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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양씨-정보교환 종친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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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공파(수-윤-희증) 스크랩 임진왜란을 종결시킨 양부하
천산 추천 0 조회 34 14.07.04 19:0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부산시 금정구 노포동 대룡마을 남원양씨 묘역


임진왜란을 종결시킨 양부하의 묘



임진왜란때 12살에 왜병의 포로가 되었고 39세에 조선으로 돌아왔으며 96세까지 장수한 남원양씨 양부하의 삶과 도망가는 왜군을 완전히 제압하고자 했던 이순신의 마음을 살펴보고자 한다.


1. 풍신수길 독살에 대한 역사적 배경


부산 문화재 1호인 삼절사는 임진왜란의 충신 남원양씨 3위(양지, 양조한, 양통한)를 모신 사당이며 양부하는 삼절사 3위중 1위인 양조한의 손자이다. 양부하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병에게 사로잡혔고 할아버지 양조한과 아버지 양황은 동래성 전투에서 순절하셨다. 그러나 양부하는 양반 자제이며 총명하다는 이유로 풍신수길의 옆에서 수발을 들게 되었다. 어찌보면 일본에서 안정된 정착생활이 보장되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나 열두살의 양부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원수에 대한 분노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나이이었다. 원수의 수령을 눈 앞에 두고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던 양부하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조선의 사신과 중국의 사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양부하는 풍신수길에게 청하여 사신을 만났다 이때의 중국 사신이 심유경이다.


심유경은 명나라의 사신으로 전쟁의 배후에서 일본과 협상을 주도한 인물이며 입담 하나로 거란을 물러나게한 서희와 겨룰만한 협상가이다. 명나라는 일본이 요동까지 쳐들어올 기세이자 조선으로 심유경을 급파하였고 심유경은 능숙능란한 입담으로 왜장을 농락하였다. 심유경은 조선으로 들어오자 평양성을 장악하고 있는 왜장 고니시에게 명나라 땅에서 나가라고 하였고 고니시는 지도를 펴고 조선의 영토라고 밝히자 여기서 부터 황제의 명을 받는 곳이니 명나라 영토라고 우겼다. 이런 우격다짐으로 심유경이 협상을 진행하자 고니시는 심유경에게 대동강을 구분하여 조선을 분할하자고 제안하였다. 이러한 제안 속에서 심유경은 협상을 임하는 척 하면서 시간을 벌었고 50일 동안 휴전을 이루어냈다. 물론 이 당시에는 이순신과 조선의 의병이 승전하기 시작하여 후방이 불안한 왜병이 북진하는 것이 어렵기는 하였지만 왜병은 조선의 어가를 눈앞에 두고 50일의 시간을 소모해 버린 것이다. 


실제 그 당시 명군의 화력부대는 남방에 배치되어 있어 조선으로 파병하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는데 심유경이 입담으로 시간을 벌었던 것이다. 그리고 명군이 도착하여 평양성 전투를 개시하기 전에도 황제가 강화를 허락하였다고 거짓 정보를 보내고 협상하러 나온 왜장을 붙잡고 평양성을 공격하여 평양성을 탈환하였던 것이다. 한편 고니시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계속 강화를 제의하였고 이에 심유경이 일본으로 건너가 강화협상을 진행하였던 것이다.


여기까지가 팩트이다. 

여기서 부터는 양부하의 구전에 의존한 사건이다. 

그 구전의 내용이 임상원의 염헌집,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이익의 성호사설, 아오나기의 풍태합조선역등에 기록되어 있다.


2. 양부하의 구전


이후로 양부하는 심유경과 친해지고 풍신수길의 독살을 모의하였다. 

사건은 이렇게 진행되었다.

1) 심유경에게 곡을 하게 하고

2) 양부하가 풍신수길에게 알렸고

3) 비밀통로를 통해 풍신수길과 심유경을 만나게 하였으며

4) 그 때마다 심유경은 진정제 처럼 환약을 먹고 풍신수길을 궁굼하게 하였다.


풍신수길의 건강상태는 양부하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 환약의 효용성으로 풍신수길을 현혹하였다. 심유경은 풍신수길에게 장시간 동안 배를 타고 와서 습기에 병이나서 먹는 약이라고 하였고 풍신수길도 얼마전까지 동경에 있다 배를 타고와서 몸이 좋지 않았으므로 약의 효용에 대한 유혹을 받게 되었다. 풍신수길은 심유경이 먹던 양을 반 쪼개서 심유경이 먼저 먹게 하였고 안전함을 확인한 후 나머지 반쪽을 자신이 먹었다. 환약을 나눠 먹는 일이 잦아지니 풍신수길은 점점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심유경은 돌아가서 해독약을 즉시 복용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당시 또 하나의 팩트가 있다.

심유경은 명나라로 돌아가서 살 수 없는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고 

그 내용이 발각되어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풍신수길은 협상에서

명나라 황제의 딸을 자신의 첩으로 줄 것과

조선을 분할하자고 제의 하였다.

대륙 침략의 목적을 알고 있는 명나라가 이러한 협상을 받아들일리가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심유경은 이러한 협상 내용을 조작하였다.

심유경은 풍신수길이 일왕에 봉해줄 것과 조공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한다고 조작하였다.


심유경은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자신이 살 수 있는 길은

풍신수길의 곁에서 끝까지 눌러 살거나

풍신수길을 독살하고 자신의 책략을 밝히는 길 뿐이었다.


하지만 심유경은 자신의 팩트를 밝히지 못 하고 명나라 스파이 사세용에게 협상조작 사건이 발각되어 역사무대에서 사라졌고 그가 사라진 2개월 후 풍신수길이 죽었다.

물론 이 사건에 대한 진실은 양부하만이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의 배경을 재 구성해 보면 상황은 이렇다.

양부하와 심유경은 풍신수길을 독살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심유경은 풍신수길을 죽이지 않고서는 자신이 살 수 있는 길을 스스로 차단하고 있었다.  또한 심유경은 조선을 분할하는 협상을 진행하였으니 조선에서 보면 만고의 역적인 셈이다. 이러한 심유경을 양부하가 변호하고 있다. 풍신수길을 독살한 사건은 엄청난 사건임에도 양부하는 출세와 권욕에 어떠한 목적도 없었고 그 자손들도 입신을 위해 이 사건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양부하는 이 사건에 대한 내용을 95세가 되어서야 세상 밖으로 전했다. 이러한 상황은 팩트일때 가능한 구도인 것이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양부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양부하는 12세에 일본에 끌려가서 39세에 귀국하여 문자를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양부하는 자신의 목격담을 구전으로 전했고 임상원이 기록하였다. 당대에 강수은이라는 유학자도 일본으로 잡혀갔다 귀국하였는데 강수은은 목격담을 문집으로 남겼다. 강수은의 문집과 양부하의 구전을 대조해 보면 전하고 있는 사건의 시간과 사람들, 지명이 모두 일치하여 양부하의 구전은 신뢰할 수 있다고 하였다. 다만 풍신수길의 독살사건은 양부하만이 진실을 알 수 있으나 밤낮으로 풍신수길의 곁을 양부하가 지켰으니 양부하의 목격담은 믿어진다고 기록하였다.


3. 심유경을 제거한 사세용 그리고 조선의 운명

심유경은 풍신수길을 독살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협상조작 사건을 저질렀고 명나라 스파이 사세용에게 그 내용이 발각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조선의 임금 선조는 사세용이 너무 고맙다. 조선의 분할을 막아준 은인으로 믿는다. 그리고 사세용은 심유경을 대신하여 전후 협상을 주도하였다. 


심유경이 처단된 2개월 후 풍신수길이 죽었다. 풍신수길의 최고 경쟁자 도쿠가와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막부시대가 변하고 있었다. 조선에 건너온 왜장들은 본국에서 자신의 영지를 보존해줄 풍신수길이 죽은 것을 안 이상 도쿠가와 세력이 움직이기 전에 빨리 귀국해야 한다. 그래서 7년왜란이 종결된 것이다. 그러니 임진왜란의 종결은 양부하로 부터 비롯된 것이다.


일본군은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조용히 돌려 보내면 우리의 피해도 줄일 것인데 이순신은 마지막 불씨를 꺼고자 했다.

하지만 사세용은 왜장 사스마와 밀약을 하고 퇴로를 열어준다.

사스마 군이 일본의 퇴로를 열었다. 그 과정에 조선의 영웅 이순신이 죽었다.

그리고 왜장 사스마는 일본의 영웅이 되었다.


본국으로 돌아간 사스마는 역시 도쿠가와와 대결하였다.

사스마 가문이 패하였다. 그러나 도쿠가와 가문은 이순신을 죽인 일본의 영웅 사스마 가문을 멸문시키지 않았다. 사스마의 아들에게 영지를 물려주는 조건으로 사건을 마무리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200년이 지났다. 사스마 가문은 드디어 도쿠가와 가문에게 복수를 한다.

사스마 가문이 일본의 메이지유신 시대를 연것이다. 

도쿠가와 막부시대를 종결하고 천왕시대를 연것이다.


메이지 유신의 주도자 사스마 가문

이순신이 죽으면서도 끄고자 했던 그 불씨가 결국 다시 살아나

정한론을 태동시켜 조선을 멸국시키고 대동아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심유경을 처단한 사세용

사세용을 신뢰한 조선의 임금 선조

그들이 대동아 비극의 불씨를 살렸고, 역사는 또 그렇게 되풀이 되었던 것이다.


임진왜란을 종결시킨 양부하.

대동아 비극의 불씨를 완전히 끄고자 했던 이순신의 행적을 깊은 마음으로 우러러 칭송한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일찍이 동래 사람 양조한(梁朝漢)과 통한(通漢)이 송상현(宋象賢)과 함께 죽었는데 조한의 손자 부하(敷河)는 그때 나이 12세였다. 사로잡혀 대마도로 실려 가서 목창(木槍)을 세우고 그 끝에 쓰기를, “조선 양반의 자제로 관백에게 헌신하겠다.” 하였다. 도주(島主)가 처음에는 도망병인가 의심하다가 그가 쓴 것을 보고는 부하를 차례로 여러 섬에 전하여서 수길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수길이 부하를 자세히 보고는, “조선 아이도 일본 아이와 같구나.” 하고 통역하는 왜를 돌아보고 부탁하기를, “네가 이 아이의 스승이 되어 일본 말을 가르쳐라.통달하지 못하면 너를 목벨 것이다.” 하니, 통역관이 두려워하여 촛불을 밝히고 밤을 새워 부하를 가르치면서, “네가 만약 힘쓰지 않으면 나와 네가 함께 죽게 된다.” 하였다. 이튿날 수길이 시험조로 부하를 불렀더니 부하가 잘 대답하므로 수길은 크게 기뻐하였다. 석달 동안 배워서 일본 말을 다 알자, 수길은 사랑하여 항상 좌우에 가까이 있게 하였다. 수길은 삼층 병풍을 뒤에 치고 높이가 한 자를 넘는 자리에 머리를 틀어 뭉치고 다리도 뻗고 앉았는데 왼편에는 포(砲)와 검을 두고 오른편에는 활과 화살을 두었으며 위에는 창 따위를 걸어 두었다. 그때 군사를 일으켜 일이 번거로웠는데도 수길은 할 일이 없었다.곁에 근신 다섯 사람이 있어서 한가할 때면 옛 일을 이야기하고 손뼉을 치면서 즐거워하였다. 수길에게는 다섯 명의 계집이 있었으나 자식이 없다가 군사를 일으키던 해에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이름이 수뢰(秀賴)였다. 《간양록(看羊錄)》에는, “수길의 근신이 수길의 계집과 간통하여 낳았다.”고 하였다. 병신년 가을에 부하는 우리 사신과 중국 사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수길에게 청하여 다행히 만나 보았는데, 중국 사신은 심유경이었다. 왜가 사신을 객관에 가두고 군사를 시켜 매우 엄중히 지키고 있었다. 부하가 중국 사람의 곡하는 소리를 듣고 돌아와서 수길에게 알렸더니, 수길은 곧 음실(蔭室)을 만들고 객관에서 궁궐로 오게 하여 유경을 맞아들여 보았다.유경은 좌석에 앉아서 환약 한 개를 먹었는데, 수길과 두 번째 만났을 때에도 약을 먹으므로 수길이 괴이히 여겨 물으니 유경은, “만리나 되는 바다를 건너오느라고 습기에 상해서 병이 났으므로 항상 이 약을 먹었더니 기운이 넘치고 몸이 가뿐하오.” 하였다. 수길이, “거짓이 아니오?” 하니 유경이, “감히 거짓말을 하겠소.” 하였다. 수길이, “나도 앞서 섬에서 돌아왔더니 기운이 줄어든 듯한데 먹을 수 있겠소?” 하자 유경이, “좋지요.” 하고 곧 주머니 속에서 찾아 보여주었다. 수길이 부하를 시켜 가져다가 손바닥에 놓고 자세히 보니 환약에 무슨 글자가 적혀 있었다. 수길은, “글자가 어찌 이렇게 작은가.일본에서 큰 글자를 잘 쓰는 것만 못하다.” 하면서 품속에서 이쑤시개를 꺼내어 그 약을 반으로 갈라 유경에게 주면서, “함께 맛보고 싶소.” 하였다. 유경이 받아서 삼키고, 한참 뒤에 목을 움츠리고 팔을 펴서 몸이 편안해지는 듯한 형상을 보이니 수길이 그제서야 입에 넣고 물을 찾아 마셨다. 이튿날 아침에도 유경을 만나서 환약 한 개를 얻어 처음처럼 나누어 먹었는데, 그 약은 매우 독해 사람의 몸을 몰래 약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유경은 객관에 돌아가서 필시 다른 약을 먹어서 그 독기를 내리게 하였을 것이다. 수길은 이로부터 사지에 윤기가 없어지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몸이 말라서 의원에게 보였으나 효험이 없고, 침을 놓아도 피가 나오지 않았다.수길이 괴상하게 여기면서, “살아 있는 사람이 어찌 진액이 없을 수 있는가. 내 뜸을 뜨리라.” 하고, 드디어 내실에 들어가서 첩들에게 쑥을 붙이게 하다가 갑자기 모로 누워 웃으면서, “내가 일어나지 못할 것 같다. 밖에 명령하여 말꼬리 두어 웅큼과 깨끗한 물 한 독을 들여오게 하였다가 죽거든 상을 알리지 말고, 배를 갈라서 창자를 들어내고 오장육부를 씻은 다음 말꼬리로 꿰매어서 시체를 술독에 담그게 하라.” 하였다. 첩들이 그의 말대로 하고, 일이 있으면 함께 의논해서 결정하였다. 몇 달이 되어서는 냄새가 심하여 밖에까지 풍기므로 첩들이, “끝까지 숨기지는 못할 것이다.” 하고, 드디어 상을 발표하였다. 수길이 내실에서 거처하게 된 뒤부터는 부하가 모시지 못하였으므로 이 일은 문지기에게서 들은 것이다. 수뢰는 그때 일곱 살이었다. 《염헌집(恬軒集)》의.t;양부하전.에는 “부하의 나이 39세 되던 기미년에 돌아왔고 신사년에는 이미 95세였는데 내가 직접 부하에게서 들은 것이다.” 하였다.



이익의 성호사설


양부하(梁敷河)는 동래(東萊)사람인데 임진왜란 때에 사로잡혀 일본에 머무른 지 27년 만에 돌아와 95세에 죽었는데, 당시의 일을 모두 목격하여 소상히 알았다.
근세에 판서 임상원(任相元)이 그 말을 기록하여 전기(傳記)를 지었는데 《염헌집(恬軒集)》 가운데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부하(敷河)는 나이 12세에 포로가 되었다. 그는 양가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관백(關白)에게 바쳐졌다. 이때에 관백 수길(秀吉)은 일도(一島)로 옮겨 성을 쌓고 궁실을 수선하며 군사를 뽑아 조선을 침략하는 중이었다.
수길이 익히 보고, “조선 아이가 일본 사람과 흡사하다.” 하고, 역관에게 일본말을 가르치게 하였는데, 3개월 만에 능숙하였다.
수길의 동정을 살펴보니, 수길은 등 뒤에 3층 병풍을 둘렀고 방석의 높이는 1척(尺) 남짓하며 상투를 짜고 걸터앉았는데, 좌편에는 총과 칼, 우편에는 활과 화살을 나열하고 위에는 창 등속을 걸어 놓았다.
이때에 전쟁이 일어나 일이 번잡하였으나 수길은 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근신(近臣)을 시켜 옛날 이야기를 하게 하고 손뼉을 치며 즐겼다. 그리고 부하가 천인이 아님을 알고 각별히 사랑하여 항상 좌우에 있게 하였다.
부하가 우리 사신과 중국 사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수길에게 간청해서 한번 만나보았더니, 중국 사신은 심유경(沈惟敬)이었다. 왜인들은 심유경을 객관(客館)에 가두고 엄중히 수직하였는데, 부하가 중국 사신의 통곡하는 소리를 듣고 수길에게 보고하니, 수길은 객관에서 궁실에 이르기까지 음실(蔭室)을 만들도록 한 다음 영접하여 만나보았다.
중국 사신은 자리에 앉은 후 환약 한 개를 꺼내어 먹었다. 재차 회견할 때에도 또한 환약을 먹으니, 수길은 괴상히 여겨 물었다. 사신은, “바다를 건너올 때에 습기로 인하여 몸이 불편하므로 항상 이 약을 복용하는데 이 약을 먹으면 기운이 솟고 몸이 경쾌합니다.”라고 대답하자, 수길은, “거짓말이 아닌가?” 사신은, “감히 그럴 리가 있겠소.” 하니, 수길은, “내가 일전에 경도(京都)에서 돌아와 몸이 매우 피곤한데 나도 복용하면 어떻겠소?” 사신은, “좋습니다.” 하고, 드디어 주머니에서 환약 한 개를 꺼내어 주니, 수길은 반을 쪼개 주면서, “그대와 함께 나누어 먹으려 하오.” 하였다. 사신이 받아서 삼키니 수길이 한동안 눈여겨보다가 그가 팔뚝을 펴며 기운을 내는 모양을 보고 비로소 입안에 넣고 물을 마셨으며, 다음날 아침에도 또 사신을 만나보고 환약 한 개를 구하여 나누어 먹었다.
대개 이 약 가운데에는 독약이 들어 있는데, 사신은 객관으로 돌아오는 즉시 해독약을 복용했던 것이다. 이로부터 수길은 사지가 파리하여 오래될수록 더욱 심했는데, 의원을 청하여 약을 썼으나 효험이 없고 침으로 찔러도 피가 나오지 않으니 괴상히 여겨 말하기를, “어찌 산 사람으로서 혈액이 없을 수가 있느냐?” 하였다. 또 희첩(姬妾)을 시켜 약쑥으로 뜸을 뜨다가 홀연히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다시 일어나지 못하겠다.” 하고, 여러 희첩에게 유언하기를, “말총과 맑은 물을 준비하였다가 내가 죽거던 비밀에 붙여 발상(發喪)하지 말고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어 오장ㆍ육부를 깨끗이 씻은 후에 다시 말총으로 꿰매고 시체를 술 독에 담그라.” 하였다.
여러 희첩들은 이 말을 좇아 문병하는 자가 있으면 다만, “약간 차도가 있다.”고 대답하고, 일이 있으면 여러 희첩들이 상의하여 결정하였는데, 사취(屍臭)가 밖에 풍겨나감에 미쳐 대신들이 비로소 이를 깨닫고 문지기에게 물어서 알게 되었다.
그 아들 수뢰(秀賴)는 이 때에 나이 겨우 7세이었으므로 대신(大臣)인 가강(家康)과 휘원(輝元)이 수뢰를 도와 정사를 보좌하였으며, 일본을 둘로 나누어 각기 33주(州)씩을 차지했으니, 가강은 동쪽을 주관하고 휘원은 서쪽을 주관하였다. 각기 그 성으로 돌아갈 때에, 큰 일이 있으면 관백(關白)의 처소인 대판성(大阪城)으로 모여 결정하기로 약속하였으며, 부하는 휘원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휘원의 막하(幕下)에 모승(謀僧) 안국사(安國寺)가 있었는데 휘원을 달래여 말하기를, “한 나라에 두 임금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청컨대 군사를 일으켜 자웅(雌雄)을 결정하여 이긴 자가 임금이 되게 하옵소서.” 하고 7일 간을 연달아 역설하니, 휘원이 마침내 이 말을 따랐다.
이에 각기 33주의 군사를 이끌고 관원(關原)에 들어서 회전(會戰)하게 되었다. 휘원의 아래에 한 부장(部將)이 있었는데 용맹스럽고 싸움을 잘하여 온 나라가 꺼려했으니, 곧 살마주(薩摩主) 의홍(義弘)이었다. 10월 14일 회전하기로 약속했는데, 가장이 의홍에게 글을 보내어 이(利)로써 달래니, 의홍이 받아들여 내응(內應)하기로 약속하였다.
싸움이 바야흐르 어울리자 의홍이 서군(西軍)의 진영 뒤로부터 포를 쏘고 이에 가강이 여러 군사를 독려하여 진격하니, 서군이 대패하였다, 가강이 드디어 휘원과 안국사 및 주모자를 사로잡아 휘원은 석방하고 변란을 주모한 두 사람을 참수(斬首)했으며, 휘원은 3주(州)를 봉해 주었다.
이에 부하가 휘원에게 환국할 것을 청하니, 휘원은, “내가 강토를 깎이고 식록이 적어 족히 양사(養士)할 수 없다.” 하고, 허락했으며 또한 노첩(路帖)을 주었다. 부하가 이에 길을 떠났는데,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돌아가기를 원하는 남녀 80여 인을 데리고 뱃길로 대마도에 다다라 도주(島主)에게 말하여 고국으로 돌아왔으니, 이때에 나이 39세였다.
당시의 전쟁과 풍속을 모두 목격했으나 문자를 몰랐기 때문에 그 연ㆍ월ㆍ인명ㆍ지명을 모두 일본어로 써서 알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강수은(姜睡隱)이 저술한 《간양록(看羊錄)》과 대조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수은(睡隱)도 또한 포로로서 일본에 머물러 있던 사람인데, 한 사람은 문자로 쓰고 한 사람은 언어를 썼으나 서로 기필한 바 없이 앞뒤가 부합하니, 어찌 믿을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오직 독환(毒丸)의 일에 있어서는 달리 본 자가 없으니, 이는 외부에서 살펴서 알 일이 아니요, 밤낮으로 친압했던 부하가 정녕히 마음에 기억하여 잊지 않았으니, 아마도 허황한 말은 아닐 것이다.
이로써 생각하건대, 심유격(沈遊擊)이 우리나라에 정성을 다하였는데, 마침내 원통하게 극형을 당했으니 더욱 슬픈 일이다. 당초에 심유격이 평양에서 왜적과 땅을 그어 약속을 정하여 50일 동안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용만(龍灣)에 있는 대가(大駕)는 아마 압록강을 건너게 되었을 것이요, 왜적이 경성에 웅거했을 때에 심유격이 행장(行長)을 속여, “명 나라에서 군사를 동원하여 호서(湖西)로부터 너희들의 돌아갈 길을 끊어버리겠다.” 하였으므로 왜적이 이에 남쪽으로 내려갔으니, 이 말이 아니었으면 대가가 도성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며, 수길이 죽은 후에 부산에 있던 왜적이 철수해 돌아가고 나라가 비로소 평온했으니, 이 또한 독환이 공적을 이룬 것이다.
다만 수길이 죽기 전에 심유격이 먼저 형벌로 죽었으니, 이렇게 원통할 수가 없다. 이 일이 심유격의 입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군사기밀은 비밀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니,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먼저 누설되면 큰 손실이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부하가 일찍이 돌아오고 심유격이 살아 있었더라면 이를 빙자하여 공훈을 삼고 호언장담하지 않았겠는가?
이제 염헌(恬軒)의 기록한 바로 인하여 남은 뜻을 밝히고 석성(石星)과 심유격의 억울한 혼령에게 애도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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