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후 4세기 이전 한반도에 도래 삼국 중 고구려가 가장 먼저
수용 허황후 일화, 해상 통한 전래 의미 불교 수용으로 세계사적 확장 가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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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도리사의 아도화상 동상. 아도화상은
고구려에 최초 사찰인 초문사와 이불란사를 창건했고, 신라에는 도리사를 만들었다. <해동고승전>에 따르면 그를 서축 혹은 오나라의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정확치는 않다. | 한반도에 불교가 들어온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1700년
전인 기원후 4세기 이전일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불교의 공인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각각 고대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중국의 제도와
문물을 수용하던 4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 사이로, 지역적 특성이나 국가와 사회의 발전 정도에 따라 대략 150년 정도의 시차를
보인다.
그 중 고구려는 중국과 인접한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위치하여 삼국 중 고대국가로의 발전단계가 가장 빨랐고 불교의 수용과 공인 또한 제일
앞섰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인 372년에 국가 교육기관인 태학을 설립하고 공식법률체제인 율령을 반포하는 등 일련의 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불교를 수용하였다. 당시 북조 전진의 황제인 부견이 승려 순도를 보내 불상과 불경을 전하였는데, 숭불군주였던 부견은 군대를 파견하여 중앙아시아
구자국에서 활동하던 구마라집을 장안으로 오게 만든 일화로도 유명하다.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것은 앞서 전진이 전연을 섬멸하는 과정에서 고구려가
도움을 준 것에 대한 외교적 보답 차원으로 행해진 일이었다.
전진으로부터 불교가 전해지고 2년 뒤인 374년에는 승려 아도가
고구려로 왔고 고구려 최초의 사찰인 초문사와 이불란사가 건립되었다. 이어 391년에는 고국양왕이 불법을 숭신하여 복을 구하라는 내용의 교지를
내렸고, 392년 광개토대왕 때는 다음 장수왕 때 고구려의 수도가 된 평양 지역에 9개의 사찰을 건립하였다. 또 395년에는 동진의 승려 담시가
고구려에 들어와 불교를 홍포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국왕이 주도한 국가 차원의 공식적 불교 수용에 앞서 최소한 요동지역에는 여러 경로를 통해 이미
불교가 유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중국 남조의 양나라 때 나온 <고승전>에는 고구려에서 불교가 공인되기 이전인 4세기 중반에
고구려 승려와 동진의 고승 지둔이 편지를 주고받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한반도 중남부의 서부 지역에 자리 잡은 백제는
고구려보다 10여년 뒤인 384년 침류왕 때에 동진에서 온 서역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되었다. 그리고 다음해에 백제의
도읍이었던 위례성, 즉 한성(현재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몽촌토성 일대) 인근에 10개의 사찰이 건립되었다. 이후 전개된 백제 불교의 학문적,
문화적 수준은 매우 높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왜(일본)의 불교문화 형성에 미친 백제의 영향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552년에 성왕은 왜에
불교를 전파하였고, 이후 지속적으로 승려와 와박사 등의 기술자들을 파견하여 불교 교학과 문화를 전수하였다. 백제는 신라의 불교 수용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등 한반도의 선진 불교국가로서 빠르게 성장하였다.
한반도의 동남부 지역에 치우쳐 있어 삼국 중 고대국가로의
발전단계가 가장 늦었던 신라에도 5세기 전반에는 고구려를 통해 불교가 전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 등에서는 신라와 고구려의
접경 지역에 있던 모례의 집에 아도 혹은 검은 얼굴의 묵호자로 칭해지는 이방인 승려가 와서 불교를 전했다고 한다. 이처럼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초기 루트는 신라가 상국으로 받들었던 고구려를 통해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433년에 신라가 고구려 대신 백제와 손을 잡으면서 고구려를 통한 불교 전래의 길은 막히게 되었고, 대신 백제 불교의 영향이 커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신라에 일찍부터 불교가 전해졌고 민간에서 점차 전파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대외 관계의 변화, 그리고 정치적 기득권과
종교적 독자성을 가진 귀족세력의 반발 등으로 인해 불교의 공식 수용은 약 100년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졌을 것으로 보이는 5세기 전반 한반도의 상황에 대해 살펴보자. 당시 약소국이었던 신라는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고구려, 백제 사이에서
외교적 줄타기를 하였고 삼국 사이의 군사적 긴장이 극도에 이른 상황이었다.
앞서 396년에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백제를 쳐서 아리수(한강) 건너 백제의 수도 한성을 포위하였고, 백제 아신왕은
남녀 1천 명과 포 1천 필을 바치고 항복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백제의 58성, 700촌락을 얻고 백제 왕의 동생과 대신 10명을 볼모로
잡아갔다. 하지만 고구려의 신민이 되겠다고 맹세한 백제가 3년 만에 이를 파기하고 왜와 연합하였고 백제와 동맹을 맺은 왜가 고구려의 영향력 하에
있던 신라의 국경을 침범하자 고구려에서는 400년에 군사 5만을 보내 왜구를 내몰았다. 신라는 그 보답으로 내물마립간이 직접 고구려에 가서
조공을 바치고 신민임을 확약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유명한 박제상(363-419)의 일화에서도 이러한
당시의 상황을 읽을 수 있다. 박제상은 눌지마립간으로부터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보내진 동생들을 데리고 오라는 명을 받고 418년에 고구려에 가서
장수왕을 설득하여 복호를 데려왔고 같은 해에 왜로 가서 미사흔을 몰래 신라로 도망치게 했다. 이를 안 왜 왕은 박제상을 유배 보낸 후 불태워
죽이고 목을 베었다.
<삼국유사>에서는 그가 왜 왕의 회유를 받자 “계림(신라)의 개나 돼지가 될망정 왜 왕의 신하는 될 수 없고 계림의 형벌을
받을망정 왜의 벼슬과 상은 받지 않겠다.”고 했다고 전하고 있다. 한편 박제상의 부인은 남편을 그리워하며 치술령 고개에서 왜 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어서 치술신모가 되었다고 하며, 민간에는 그녀가 망부석이 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고구려의 장수왕은 427년 평양으로
천도한 후 지속적인 남진정책을 추진하였고 이에 위협을 느낀 백제와 신라는 433년에 나제동맹을 결성하여 고구려와 대립하였다. 이후 고구려는
백제를 침략하여 결국 475년 개로왕을 죽이고 백제의 수도 한성을 점령하여 요충지인 한강유역을 차지했다. 이때 신라는 1만 명의 구원병을
파병하였는데, 고구려는 481년 신라를 공격하여 7개의 성을 점령하고 신라를 크게 위협하였다. 이때는 백제가 신라를 도와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였고 493년 백제 동성왕이 신라 이벌찬 비지의 딸과 혼인하면서 두 나라의 동맹관계는 더욱 공고해졌다. 이후 551년에는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유역을 빼앗았고, 553년 신라 진흥왕이 백제의 한강 하류지역을 점령하고 신주를 설치하면서 굳건했던 나제동맹이
깨지고 백제와 신라는 적대 관계로 돌아섰다.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것은 백제와 친선관계를 유지하면서 고대국가로서의 체제를
정비해가던 법흥왕 때에 이루어졌다. 법흥왕은 즉위 후 527년에 살아있는 생명을 위해 복을 닦고 죄를 없애기 위해 신라 최초의 공식 사찰인
흥륜사를 창건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사찰의 건립을 반대하는 귀족들의 반발이 매우 거셌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측근인 이차돈을 처형하면서까지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이때 이차돈의 목에서 하얀 피가 솟는 이변이 일어났다고 하며 그의 순교를 통해 결국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되었다.
한편 일본에서도 불교 수용을 둘러싸고 신라와 비슷한 양상이 벌어졌다. 일본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시기는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6세기 전반 무렵으로 당시 문화적 선진국이었던 백제로부터 불교가 전해졌다. 즉 538년(552년 설도 있음) 킨메이 천황 때 백제의 성왕이
불상과 경전을 보낸 것이 공식적 불교 전래의 시초였고, 당시 일본 정계를 주도하던 한반도 계통 도래인들이 불교수용에 있어 큰 역할을 하였다.
신라와 마찬가지로 일본도 국왕과 왕실은 불교 도입에 매우 우호적이었지만 독자적인 조상신 숭배나 신령 신앙을 가졌던 일부 귀족세력이 정치적
기득권의 약화를 우려하여 극력 반대하였다.
이에 백제 도래인 계통인 소가씨 가문이 국왕을 도와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불교 수용에 반대한 모노베씨 세력을 진압하고 불교가 공식
수용되었다. 이어 일본 최초의 사찰인 호코지가 소가씨의 씨사로 건립되었고 선진 불교국인 백제와 고구려의 승려들이 일본에 초빙되었다. 이들의
가르침을 받은 쇼토쿠 태자는 율령과 관위를 정비하는 등 고대국가의 체제와 기틀을 다지는 한편 불교가 일본에서 정착, 발전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호류지와 시텐노지를 창건하였고 불교교학의 이해와 연구에도 일가견을 가졌다.
한편 삼국 외에도 한반도 남부 낙동강
유역에는 연맹체 국가인 가야가 1세기에서 6세기 중반까지 존재하였는데, 대륙을 통해서가 아니라 바닷길을 통해 남방 불교가 수용된 정황이 있어
주목된다. <삼국유사>에는 가야 연맹체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후가 인도 아유타국 출신으로서 바다를 건너올 때 바다신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해 파사석탑을 싣고 왔다는 전설이 소개되어 있다. 실제로 현존하는 탑의 모양이나 재질이 매우 특이하며 한반도 밖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비록 이 설화가 김수로왕 당대의 모습이 아닌 후대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이지만, 남방의 해상 루트를 통해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불교가
한반도에 직접 전래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일화라고 할 수 있다.
신라의 경우에도 바다를 통한 이방인의
도래나 이질적 문화의 수용 사례가 확인된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라 제4대 군주 석탈해는 다파나국 출신이라고 하며 알로 태어나
궤짝에 담겨져 바다를 건너 금관가야에 도착했다. 하지만 아무도 거두지 않자 다시 진한의 아진 포구로 흘러왔다고 한다. 이는 유·이민 출신으로
신라의 임금까지 오른 석탈해의 기이한 행적을 그린 것으로 당시 해상을 통한 인적 교류와 문물의 유입이 종종 있었고 그 중에는 신라 사회의 주류가
된 이들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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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태 동국대 HK
교수 | 한국의 역사는 특수와 보편, 고유성과 국제성이 교차하면서 양자의 대립과 공존이 반복되며
전개되었다. 지리적, 문화적 여건상 주변부의 속성을 지닌 한국은 동아시아의 중층 공간 속에서 문명의 수용자 및 전달자로서 기능해 왔다. 이
과정에서 글로벌한 보편성을 갖는 불교는 한국의 지역적 특수성과 결합하여 제3의 파생문화를 형성하였고 새로운 한국적 로컬리티를 창출하였다.
불교의 수용 이래 한국은 문명의 세계사적 확장을 경험하였고 횡단문화의 교차를 통해 복합적 융합문화를 일구어왔다. 그리고 그 발단은 인도에서
발원하여 동아시아로 넘어온 불교의 수용에서 시작되었고 이를 통해 한국사는 새로운 전환기적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