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이 머문 곳 / 김성문
천관사天官寺는 김유신 장군의 첫사랑이 깃든 곳이다. 청춘의 한순간을 함께했던 여인 천관天官을 그리워하며 그녀의 집터에 지은 절이라고 전한다. 지금은 절도 사람도 사라지고 흔적만 남았지만, 그 자리는 여전히 아련한 기억을 불러낸다. 경주에 갈 때마다 나는 천관사지를 찾는다. 절이 아닌 절터에는 사람보다 오래 머무는 사랑이 고요히 남아 있다.
천관사의 이름은 『삼국유사』에 처음 나타난다. 원성왕 김경신이 꿈속에서 가야금을 들고 천관사 우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려 후기 문인 이인로는 『파한집』에서 이 절에 얽힌 사랑과 이별을 노래했다. 그중 두 구절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다정한 공자는 꽃나무 밑에서 노닐었고
원망 품은 여인은 말머리 앞에서 울었네.”
꽃나무 아래에서 사랑을 나누던 두 사람과, 떠나는 말 앞에서 눈물 흘리던 여인의 모습이 짧은 시구 속에서 되살아난다. 사람은 떠났으나 그들의 이야기는 절의 이름이 되고 노래가 되어 오랜 세월을 건너왔다.
천관사는 고려 중기까지 명맥을 이어간 것으로 보이지만, 어느 때인가 폐사되었다. 그 터는 경주 오릉 동쪽 교동 일대에 남아 있다.
2019년 3월, 처음 천관사지를 찾았다. 가까이에는 남천이 흐르고, 김유신이 서라벌에서 생활했던 재매정택도 멀지 않았다. 봄날의 강물에는 주변 풍경이 잔잔히 비쳤고, 절터에는 깊은 적막이 내려앉아 있었다.
발굴조사를 통해 건물터와 석등터, 우물터와 탑터가 확인되었지만, 처음 마주한 절터의 흔적은 미미했다. 무너진 탑의 기단석과 옥개석은 논두렁에 흩어져 있었고, 절이 있던 자리에는 오이와 토마토가 자라고 있었다. 한때 사람들의 기도와 가야금 소리가 머물렀을 공간을 농작물의 푸른 잎이 덮고 있었다.
절터 중앙에서는 팔각 석탑을 복원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그러나 탑은 이층까지만 올라간 채 멈춰 있었다. 미완성의 탑을 바라보며 나는 오래전 끝나 버린 사랑을 떠올렸다. 함께 쌓아 올리던 시간은 어느 순간 멈추지만, 완성되지 못한 마음은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다. 이루지 못했기에 오히려 더 오래 기억되는 사랑도 있다.
2021년 10월, 김유신 장군의 가을 대제를 마치고 다시 천관사지로 향했다. 포클레인과 덤프트럭이 오가는 공사장 한가운데 삼층까지 올라간 석탑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수선한 현장 너머로 서쪽의 선도산은 손에 닿을 듯 가까웠고, 북쪽의 경주 시내는 평온했다.
탑이 한 층씩 모습을 되찾는 동안 나 또한 조금씩 나이를 먹었다. 처음 이곳에 섰을 때는 천관과 김유신의 사랑이 먼 옛이야기로만 느껴졌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그 이야기는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래전 나누었던 말 한마디와 한 사람의 표정을 가만히 되새기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첫사랑은 처음 사랑한 사람만이 아니라, 가장 순수했던 자신과 가장 뜨겁게 믿었던 시간을 함께 떠올리게 하는 마음인지도 모른다. 세월이 지나도 마음속에서 늙지 않는 그 사랑은 함께 걷던 길과 바라보던 나무, 헤어지던 골목과 다시 오지 못한 장소에도 스며든다. 사람은 떠나도 장소는 남아 그때의 마음을 대신 기억한다.
2023년 7월,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절터를 다시 찾았다. 삼층의 모습을 갖춘 탑이 햇빛 아래 서 있었다. 기단은 사각형이고 일층부터는 팔각형이었으며, 층마다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상륜부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듯했지만, 절터에는 잔디가 단정히 깔리고 세 곳의 건물터에는 주춧돌이 가지런히 남아 있었다.
복원된 탑을 바라보며 기쁨보다 쓸쓸함이 먼저 밀려왔다. 흩어진 돌은 다시 쌓을 수 있지만, 지나간 시간까지 되돌릴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새로 세운 탑은 옛 모습을 되찾았으나, 그 아래에서 웃고 울었던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복원이란 사라진 것을 온전히 되살리는 일이 아니라,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것을 기억하기 위한 일인지도 모른다.
천관이 살던 집도 가야금 선율도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나 탑은 기억을 품은 채 그 자리에 서 있다. 바람이 절터를 스칠 때면 멀어지는 말발굽 소리와 끊어진 가야금 가락이 아득히 되살아나는 듯하다.
나는 앞으로도 경주에 갈 때마다 이곳을 찾을 것 같다. 천관과 김유신의 사랑을 떠올리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이 절터에 서면 한때 소중했으나 이제는 멀어진 사람들과,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나의 시간도 함께 떠오른다. 기억은 붙잡으려 할수록 멀어지지만, 때로는 한 장소에 기대어 오래 살아남는다.
절터는 비었지만, 어떤 사랑은 끝내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김성문 ksm39441@naver.com
경북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대구초등교장회 회장, 대구교육대학교 겸임교수, 『한국수필』 등단, 수필집 『가야국 산책』, 『기억 저편』, 『오늘을 비추는 김유신의 길』, 저서 『가락국 역사』, 『사국시대 가야』 외, 대한민국 황조근정훈장 받음. 현: 사단법인 가야연구원장, 가락대구광역시종친회장, / 한국문인협회, 한국공무원문인협회, 한국수필가협회 회원 / 대구문인협회, 국제펜한국본부대구지역위원회, 대구수필가협회 이사 /경산문인협회, 한국수필문학관 수필알바트로스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