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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도서 2-3장 주해와 적용
패역한 세상에 맞서는 신앙 공동체 생활
이우제 / 천안대학교 설교학 교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미국 칼빈신학교(Th.M.)와 남아공 스텔렌보시대학교(Th.M.) 설교학 전공
이 시대에 ‘목회자들을 위한 목회자’로 칭송받는 영적 스승인 유진 피터슨은 「껍데기 목회자는 가라」(The Uecesany Pastor)에서 패역한 세상 문화에 종속된 목회자들의 불필요성을 말한다. 그는 지적하기를, 만일 목회자들이 성도들의 현실적인 필요만을 충족시켜주는 소비주의적 자세나 경쟁적 문화에서 살아남기 위한 성공주의적 태도를 위해 사역한다면 그야말로 불필요한 존재라고 역설한다. 그는 이런 불필요성에 대 한 지적에서부터 이 시대에 목회자의 존재 이유를 뚜렷이 규명한다. 패역한 세상에서 목회자들은 세상의 거짓과 복음의 진리 사이에 있는 차이점을 선명하게 밝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목회 사역이란 ‘대항 문화(counter culture)’를 살아가는 공동체를 세우고 바른 길로 교정하는 임무로 요약할 수 있다. 목회자는 세상 문화에 있으면서도 세상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초문화적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
이를 위해 바울은 디도서 2~3장에서 거짓된 가르침에 영향을 받고 있는 교회 공동체를 향해 대항 문화적 삶을 가르칠 것을 권면한다. 따라서 디도서 2-3장을 해석학적이고 설교학적인 아이디어가 될 수 있는 중심 문장은 ‘거짓된 복음이 횡횡하는 패역한 세상 가운데서 성도들의 가정 생활과 사회 생활을 위한 합당한 바른 교훈을 제시하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바른 복음에 합당한 교훈은 무엇인가? 성도들이 따라야 하는 바른 교훈의 내용은 무엇인가? 성도들을 바른 삶으로 인도하는 생활의 근거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위해 디도서 2~3장을 주해적이고 설교를 위한 적용 측면에서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른 복음에 합당한 복음 전파(2:1)
디도서 2장 1절은 2~3장 전체의 표제가 될 수 있는 중심 문장이다. 이 구절에서 2-3장의 내용이 집약적으로 응축돼 있다. 디도가 위탁 받은 복음은 두 가지를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하나는 사람들의 심령을 병들 게 하는 왜곡된 복음이 아닌 그들을 살찌우는 건강한 복음이어야 한다. 또 하나는 추상적이고 일반화된 가르침이 아닌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도전하는 가르침이어야 한다. 전자가 바른 신학이 있는 메시지라면, 후자는 바른 윤리가 있는 메시지라 할 수 있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전자를 잃으면 진부한 도덕적 강론이 되고, 후자를 읽으면 세상에 선한 빚을 드러내지 못하는 교회 내의 복음으로 전락해 버린다. 따라서 바울은 두 가지를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바울의 일반적 관례와 달리 윤리적 권면이 먼저 나오고(2:2~10, 3:1~2) 그것에 대한 신학적 근거(2:11~15, 3:3-8)를 제시한다는 점이다. 이 도치된 순서가 주는 메시지는 이렇다. 타락한 세상에 합당한 윤리로 개입하라. 하지만 그것은 단지 세속적 행동 강령의 실천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 안에 있는 믿음의 반영이 돼야 한다.
각 사람들을 향한 복음 전파(2:2~10)
여기서 바울은 가정에서 구성원들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말하는 ‘가정 윤리 목록’을 제시한다. 가정 안에 있는 각양의 사람들(늙은 남자, 늙은 여자, 젊은 여자, 젊은 남자, 종들)을 열거하며 비교적 자세하게 행동 강 령을 밝히고 있다. 이는 바울이 복음을 기존 질서 안에 있는 모든 성별, 연령, 계층을 위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복음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위한 전유물이 될 수 없고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역할을 감당할 때 가정과 교회는 변화한다.
또 바울이 제시하는 행동 강령은 기독교의 고상한 윤리적 영역을 소개하기보다 아주 초보 수준의 생활 지침인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늙은 남자에게는 내적 절제나 인내(2절), 늙은 여자에게는 술 금지령(6절), 젊은 남자에게는 근신에 대한 촉구(6절), 젊은 여자와 종들에게는 남자와 주인에 대한 순종을 촉구한다. 그것은 모두 기본적인 윤리 목록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1장 12절에서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 배만 위하는 게으름쟁이’라는 그레데 사람들에 대한 설명이 이 질문에 대해 해답을 유추케 한다. 그레데 교인들은 성숙한 신앙인이 아니었고 오히려 세상 문화에 훨씬 더 가까웠다. 디도는 갓 개종한 거친 사람들을 대상으로 목회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들에게 우선적으로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타락한 세상과 구별되는 기본적인 윤리들을 실천하도록 만드는 일이었다.
그리고 각양의 사람들을 위한 교훈들 중에 디도를 향한 권면이 삽입돼 있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에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7절)” 바울은 성도들을 향해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했듯이, 디도에게도 그레데 교인들을 향해 디도 자신을 모본으로 제시해 가르쳐야 한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이 거짓 교사들과 참 교사들을 구분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기 때문이다.
적용을 위해 이 부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바울이 말하는 합당한 삶으로 인도하는 바른 교훈이란 첫째로,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성을 유지하는 가르침이다, 바른 가르침이 창조되는 공간은 관계의 그물망 안에서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연결될 때다. 복음 전파는 단순히 테크닉 교환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 생명적 관계 안에서 연결되는 사역이어야 한다. 둘째로, 합당한 삶으로 인도하는 교훈은 바른 말뿐 아니라 바른 삶의 본이 뒤따르는 가르침이다. 팔머의 주장처럼, 교사는 자신의 자아를 가르치는 사람이다.
성도의 바른 생활의 근거가 되는 원리(2:11~15)
바울은 가정에서 실천해야 할 합당한 생활에 대해 말한 후 그것을 위한 신학적 근거를 제시한다. 앞서 열거한 기본적이고 중요한 권면들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우리의 힘과 결심으로 의로운 삶이 가능할까? 그렇지 않다. 이에 대해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양육 받을 때 가능하다고 분명하게 가르친다(11~12절). 은혜는 거룩한 생활을 위한 영적 동기 부여와 동시에 우리를 이끌어 바른 실천으로 옮겨 준다. 즉 은혜야말로 성도의 윤리적 삶의 열매들을 생산게 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바울은 은혜 이전에 우리의 상태, 은혜 받은 이후에 우리의 변화, 은혜 안에 있는 우리의 미래를 규명한다. 그러면서 그분이 우리를 은혜로 구속하신 목적을 분명히 밝힌다.
우리는 은혜가 나타나기 전에 세상의 불법과 정욕에 따라 살던 사람이다. 은혜로 말미암아 옛 사람의 구습을 버리고 근심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이 되었다(12절). 더욱이 은혜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미래의 소망을 응시하게 만든다(13절). 14절에서 이런 위대한 은혜의 역사가 무슨 목적을 위해 우리에게 임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한마디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있는 친 백성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것을 디도서 2장에 국한시켜 말한다면, 앞서 제시한 가정 윤리를 실천할 수 있도록 우 리를 구속하신 것이다. 2장에서 마지막 구절은 다시 한 번 디도에게 어떻게 가르쳐야 할 것인지를 권면하면서 끝을 맺는다. ‘누구도 업신여기지 못하도록 권위 있게 가르쳐야 한다’고 권면한다. 디도 자신의 직임이나 지위에서 나오는 권위가 아니라 가르침을 명하시는 주님과 그 주님 앞에 바른 삶을 살면서 생기는 권위로 가르치라고 강조한다.
이 부분을 정리해 적용하면 첫째, 바울은 윤리를 강조하지만 그 전에 은혜를 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바른 복음은 단순히 좋은 권면(good advice)이 아닌 좋은 소식(good news)이어야 한다. 말씀 사역자는 도덕 선생으로 부르심을 받는 게 아니라, 은혜 전달자로 부르심을 받음을 명심해야 한다. 둘째, 바른 복음은 권위를 동반해야 한다. 권력과 권위는 하늘과 땅이 서로 먼 것처럼 전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권력은 외부에서 내부로 작용하지만, 권위는 내부에서 외부로 뻗어나간다’ 권위가 내면의 변화에서 나오는 힘이라면, 권력은 외적 지위에서 나오는 힘이다. 권위는 은혜로 인해 발견한 정체성, 소명 의식, 진실한 삶에서 생겨난다.
성도의 바른 사회 생활(3:1~2)
패역한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의해 규정되거나 함몰되어선 안 되는 신앙 공동체의 모습이 사회 생활 속에서 어떻게 구현돼야 하는지가 3장의 주제다. 가정이나 교회 안에서 삶뿐 아니라 신앙의 영역 밖에 있는 사회에서 성도들이 감당해야 할 책임에 대한 합당한 삶을 가르쳐야 한다. 그 가르침의 중요성을 바울은 ‘기억하게 하라’는 명령으로 제시하고 있다. 바울의 ‘기억하라’는 말은 그 자신이 사회를 등지고 신앙의 영역에 머물거나 신비의 영역으로 숨는 것과 같은 염세적이고 소극적인 기독교인의 삶을 가르친 적이 없음을 간접적으 로 증명하는 것이다. 그런 가르침은 거짓 복음이다. 오히려 바울은 ‘변혁적 모델’에 근거해 사회적 영역에서 그리스도인 됨을 드러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바울은 성도들이 갖는 사회적 책임은 통치자 및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로 규정한다. 두 영역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올바른가? 무엇이 바른 교훈인가? 먼저 공적 통치자들과의 관계에선 복종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존슨(L.T.Johnson)이 잘 지적했듯이, 이 순종은 세상 권력자들 앞에서 수동적으로 끓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를 예비’해야 한다. 마음은 빼앗길 수 없어도 줄 수 있는 보물이기 때문에 마음으로 순복하는 사람들은 자원해 공적 지도자들을 돕는 선한 일에 힘쓰게 된다.
다음으로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취해야 할 자세는 대조법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피해야 할 것은 상대방을 말로써 훼방하는 일이다. 훼방은 다른 사람들을 깎아내리고 자신을 높이려는 가장 흔히 범하기 쉬운 교만의 증상이라 할 수 있다. 훼방과 대조되는 덕목은 누구와도 다투지 않은 우호적인 자세, 관용, 온유함이다. 이것들은 자신을 희생하면서 다른 사람을 높이고 세상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게 하는 겸손의 증표들이다. 세상의 변화는 신자들이 이런 모습으로 모범을 보일 때 펼쳐진다.
결국 교회 공동체는 이 땅에 속해 있어야 하지만, 선취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다음 세계의 삶의 윤리를 끌어다가 현재를 살아가야 한다. 세상을 살되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고 다른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 이것이 세상의 완고함을 녹이는 미풍이 된다. 세상은 우리가 갖고 있는 성공의 크기로 변화하지 않고 오직 우리의 인격의 크기로 변화하게 될 것이다.
성도의 바른 사회 생활의 근거가 되는 원리(3:3~8)
2장의 구조와 동일한 패턴으로 성도들의 바른 사회 생활을 위한 올바른 삶을 제시한 후에 그것이 무엇으로 가능한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를 베푸심으로써 우리의 삶에 주권으로 개입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바울 신학의 정수인 은혜의 우선성을 발견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지금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단순히 중생이나 칭의를 위한 구원론적 영역뿐 아니라 성도들의 바른 사회 생활을 가능케 하는 역동적 삶을 위한 신적 능력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신적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사회적 윤리를 가르칠 수 있는 근거가 되는데 이를 위해 바울은 그들이 과거에 어떤 자였는지, 하나님의 은혜의 개입하심으로 현재 어떻게 새롭게 바뀌었는지를 압축적이면서 포괄적으로 설명한다. 바울은 그리스도 밖에서 삶의 열매를 나열함으로써 그들의 과거의 삶이 얼마나 악덕으로 가득 찼는지를 설명한다. 이 부분(3절)은 3장 1~2절의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하는 미덕들과 4-8절까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상태와도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이런 비교를 통해 바울은 자신이 이전에 율법 아래 있었지만 악덕으로 가득찬 삶을 살 수밖에 없었음을 드러냄으로써 율법적 삶의 한계를 말한다.
그러나 위와 같은 죄악에 깊이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나타나셨을 때, 구원이 임하시고 그것으로 인생은 새롭게 변화된다. 이런 근본적 차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하나님의 개입하시는 은혜이기 때문에, 5절의 증언처럼 구원은 사람들이 갖는 도덕성이나 윤리성에 있지 않고 우리 구주 하나님과 그분이 행하신 일에 있음이 강조돼야 한다. 로마서에 나타난 장엄한 스케일의 구원론을 압축적으로 요약한 것 같은 표현들 중에서 바울은 구원이 그의 긍휼, 중생의 씻음,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5~6절). 특별히 동일한 패턴을 제시하고 있는 2장 11절 이하에서 구원의 은혜에 대한 설명과 비교할 때, 이곳에서 두드러진 강조는 성령의 사역을 언급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성령이 우리를 새롭게 하시 고 우리에게 풍성하게 임하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신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이다.
7~8절에서 은혜로 생긴 결과를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한다. 하나는 소망 중에 상속자가 될 것을 미래적으로 바라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세상에서 바른 교훈의 삶을 현재적으로 이루는 것이다. 7절의 첫 번째 결과에 대한 설명에 따르면,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목적은 영생이다. 그 영생의 선물은 칭의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다. 즉 칭의로 영생을 선물로 받는 상속자가 되는 특권을 받는 것이다. 영생의 약속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동등하게 영생을 받아 누리게 되는 동일한 위치에 있게 된다. 후사가 될 자격을 가지게 되었으나, 그것은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소망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과거 구원 역사의 확실성이 우리가 갖고 있는 소망의 궁극적 확신으로 인도한다. 이미 주어진 후사의 약속과 아직 오지 않았지만 그것의 성취에 대한 미래적 확실성 가운데 신자들은 담대함으로 전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본문에 국한시켜 말한다면, 전진하는 삶이란 3장 1~2절의 사회 윤리를 믿음 안에서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8절에서 두 번째 은혜의 결과를 설명한다. ‘이 말이 미쁘도다’라는 ‘신실한 어록’과 함께 시작함으로써 앞의 구절인 4-7절을 든든한 연결 고리로 묶어서 여태껏 이야기한 것이 신뢰할 만하다고 분명히 한다. 바울은 미신 말씀에 대해 디도로 하여금 확신과 함께 가르치기를 원한다. 그 결과 성도들은 현실적으로 세상에서 선한 일에 힘쓰고 그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주님과의 신뢰적 관계를 맺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바울의 말하는 바른 가르침의 특징을 배우게 된다. 그것은 형식화된 율법적 가르침이 아니라 구속의 은총에 대한 강력한 체험을 동반한 가르침이다. 율법적 가르침이 인과율의 법칙에 매여 궁극적으로 악독이 가득한 삶으로 귀결된다면, 은혜 안에서 반응하도록 이끄는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돌아오게 하는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게 될 것이다.
마지막 당부와 인사(3:9~15)
이 부분은 크게 거짓된 가르침에 대한 거절(9~11절)과 개인적인 인사(12~15절)로 나눌 수 있다. 9~11절은 바울이 2~3장에 걸쳐 성도들을 유익케 할 바른 가르침을 유익한(8절) 것으로서 적극 권장했던 것과 달 리, 거짓된 가르침에 대해 무익한(9절) 것으로 엄중히 경계하고 있다.
무익한 가르침이란 어리석은 변론, 족보 이야기, 분쟁, 율법에 대한 다툼들이다. 이런 종류의 가르침은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분열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한두 번 권고한 후에 듣지 않으면 멀리하라는 것은 당연한 경계였다.
나머지 구절들(12-15절)에서 바울은 여러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면서 다른 서신서와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당부들로 서신을 끝맺고 있다. 특히 15절에서 은혜로 마무리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 글의 시작이 은혜(1:4)였고, 핵심적 권고들이 은혜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2:1), 마지막 권고도 은혜이다. 죄악이 창궐하던 시대에 하나님의 대안 공동체로서 가정과 사회에서 선한 행실을 드러낼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강해지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음을 역설한다. “은혜가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맺는 말
지금 우리는 디도가 목회하던 1세기 그레데 사람들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우리는 21 세기라는 포스트모더니즘 정신이 호령하는 시대에 목회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보면 두 세계를 하나로 연결할 공통 분모를 어디서도 찾을 수 없어 보인다. 그러나 시대의 외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본질에서 한 가지 뚜렷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1세기의 그레데 지역 성도들이 비록 교회 안에 있었지만 세상과 구별되는 점을 갖고 있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 시대의 교회도 세상의 대안이 되기를 포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레데 사람들이 삶의 기본적 윤리도 갖지 못했던 것처럼, 현재 교회 가운데 근본적 윤리조차 무너져 내린 서글픈 모습을 목도하게 된다. 이런 혼돈의 시대에 우리는 다시금 바울이 디도에게 했던 권면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패역한 시대에 교회를 거룩한 삶의 윤리를 펼쳐 보이는 대안 공동체로 세워야 한다. 이것이 디도서 2~3장에서 바울이 전한 메시지의 골자다. 이 길만이 교회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고 그분 앞에 세상을 세우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시대가 어두워질수록 말씀을 가르치는 목회자의 사명이 중요하다. 우리는 바른 복음을 전해야 한다. 바른 복음은 바른 신학적 메시지나 정통적 교리를 전하는 것으로 한정해 설명할 수 없다. 바른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기반을 둔 가르침을 의미한다. 즉 바른 교훈은 하나님의 은혜의 광대함과 변화를 가능케 하는 역동적인 힘에 근거한 가르침을 뜻한다.
우리 시대의 안타까움은 많은 지도자들이 시대의 타락상도 알고 시대를 향한 나름대로 문제 의식도 갖고 있지만, 엉뚱한 처방을 내리고 있다는 데 있다. 계속적으로 은혜 아래 강한 자들로 교회 공동체를 세워 패역한 세상의 대안이 되는 쪽에 노심초사하는 게 아니라, 세상의 마음을 사로잡는 테크닉과 방법에 의존해 세상을 향한 구애 작전을 펼쳐야 한다고 믿고 있다. 은혜로 충만한 사람들의 신실성으로 세상을 설득하기보다 마케팅 전략을 사용해 효율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선전하고 있다.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의 목회가 기능적인 면으로만 치닫게 되면 공동체의 진정한 변화의 능력은 상실케 된다.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육신적인 방법들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은혜에 승부를 띄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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