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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방 내려앉아…인명피해 없어 ‘휴’ | ||||||||||||
마산 반월시장 목조집 다락방 무너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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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낡아 무너졌다. 어이없는 일 같지만 실제 마산에서 일어났다. 마산시 반월동 85번지 일대 일명 ‘깡통시장 골목’에서다.
가게 옆 빈집에서 엄청난 먼지가 나왔다. 가까이 가서 보니 장롱 등 가구들이 있던 2층 다락이 완전히 내려앉았다. 순간 김씨는 아찔해졌다. 바로 5분전까지 무너진 집 안에서 물건을 옮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점심으로 시킨 냉면이 도착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김씨는 “무너진 집에 혼자 사시던 할머니가 2년 전 다른 곳으로 옮긴 뒤 내가 열쇠를 받아 관리하면서 창고로 쓰고 있었다”며 “나도 하늘이 도와 무사했지만 만일 할머니가 계속 살고 있었으면 큰일을 당할 뻔 했다”고 밝혔다. 김씨는 이 집 뿐 아니라 깡통시장 골목 전체가 무너지기 직전이라고 설명했다. 안 그래도 불안했었는데 진짜 건물이 무너지는 것을 본 시장 사람들은 불안해하고 있었다. 경남도민일보 취재진이 확인해 보니 대부분 건물이 바닥은 물론 벽과 천장에 금이 가고 무너지고 있었다. 그나마 아직 사람이 살고 있어 땜질식으로 수리를 해 놓아 근근이 버티고 있는 듯 했다. 깡통시장에서 ‘맷돌 콩국수’집을 운영하는 김혜숙(여·45)씨는 몇 년 전 벽이 무너져 옆집과 ‘한 집’이 되기도 했다고 밝혔다. 김씨는 합판을 덧대 다시 벽을 만들었다. 김씨는 “바닥도 꺼지고 있고 천장도 무너질까봐 철근으로 받쳐놓았다”며 “무너질까 불안해 2층 다락에는 아예 손님을 받지 않는다”고 전했다. 이 콩국수 집은 나름대로 맛있다고 소문이 나 손님이 많이 찾긴 하지만 김씨는 “언제 무너질지 몰라 불안한데 장사가 되고 안 되고는 중요하지 않다”며 “하루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고 말했다. 상인들과 주민들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하천위에 나무를 걸쳐 집을 지은 것이 ‘깡통시장’의 시작이다. 일명 ‘하꼬방’이다. 그러다 지난 1982년 마산에서 63회 전국체육대회가 개최되자 보기 싫다는 이유로 겉에만 번듯하게 시멘트를 발랐다. 결국 겉에서 보기엔 시멘트 건물 같지만 속은 목조 건물이다. 건물을 받치던 나무 기둥들이 세월이 지나면서 지나 썩기 시작했다. 건물 바닥이 내려앉는 이유다. 취재진이 무너진 집을 확인하는 과정에서도 나무 기둥이 삭아 떨어져 나간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최근 마산시 재난예방과도 ‘깡통시장’ 안전점검을 벌였다. D등급이 나왔다. 마산시 관계자는 이 정도면 붕괴위험이 높아 철거를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마산시는 5년 전 ‘깡통시장’을 철거하려다 주민들의 반발로 포기한 적이 있다. 마산시 관계자는 “당시 경제가 어려웠던 시기여서 그런지 주민들이 철거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번 붕괴사태로 이주를 요구하는 주민들이 생기자 마산시는 다시 정비계획을 세울 예정이다. 마산시 관계자는 “상인과 주민들 스스로도 의견이 상반되는 부분이 있어 빠른 시간 안에 공청회를 열어 의견을 들은 다음 결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에 한 상인은 “대부분 천장에서 물이 새는 등 무너질 위험이 더욱 커지고 있다”며 “대형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정비를 하든지 하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마산 반월동 깡통골목 사라진다 | ||||||||||||
붕괴 위험에 철거 합의…보상 문제 관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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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보 = 마산시 반월동 ‘깡통집 골목’이 드디어 철거된다. 마산시는 4일 “주민들이 철거에 동의함에 따라 깡통골목 정비사업을 진행하기로 했다”고 밝혔다.<6월 14일자 5면 보도> ◇ “이제는 무섭다” = 깡통골목 사람들은 지금까지 철거를 반대해 왔다. 골목을 떠나면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달 12일 사람이 살지 않던 2층 바닥이 무너지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당시 깡통골목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한 주민은 “언제 무너질지 몰라 겁이 난다”며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고 불안함을 표시했다. 마산시는 오래 전부터 철거를 계획하고 있었다. 시는 골목 건물이 무너질 위험이 크다고 보고 5년 전에도 철거를 하려 했지만 결국 주민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시 관계자는 “당시 주민들이 갈 데가 없어서 그랬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시는 지난달 21일 반월동사무소에서 열린 주민설명회에서 결국 골목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냈다. 이에 따라 시는 ‘반월동 깡통골목 정비사업 계획’을 세우고 차근차근 철거를 진행할 예정이다. ◇ 적당한 보상이 최대 관건 = 깡통골목을 철거하는데 주민들에게 얼마나 보상이 되느냐 하는 것이 최대 걸림돌이 될 듯하다. 골목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이남애(여·55)씨는 4일 “대부분 2~3평짜리 공간을 임차해 쓰고 있는 세입자들이 보상을 받아 봤자 이사비용 정도 밖에 더 되겠느냐”며 “겁이 나서 철거는 해야 하겠는데 마땅히 갈 곳이 없다”고 말했다. 시도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다. 시 관계자는 “아무래도 보상 문제가 제일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며 “얼마만큼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 고민 중”이라고 밝혔다. 마산시는 다음 주 전문 감정기관에 감정을 맡겨 보상소요액을 산정한 다음 다시 주민설명회를 열어 협의를 벌인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
57년만에 철거될 마산 깡통골목의 화려한 과거 | ||||||||||||
한국전쟁 당시 군부대 주둔...전쟁 중 최고의 번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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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보 =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마산 반월시장 옆 깡통골목. 그 과거는 화려했다. <6월 14일자 5면, 7월 5일자 4면 보도> ◇ 한국전쟁 중 마산 최고의 번화가 =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많은 피난민이 마산으로 모여들었다. 1946년 8만 명이던 마산인구가 53년에는 13만으로 늘었다. 마산이 북적거리던 시기였다.
깡통골목에서 50년 이상 살아온 천화성(77) 할아버지는 ‘말도 못하게 성황이었다’고 말했다. 천 할아버지는 “전쟁 당시 토·일요일이면 깡통골목이 사람들로 넘쳐났다”며 “많은 미군들이 주변에 방을 얻어 사는 등 외화벌이에도 상당히 기여했다”고 설명했다. 깡통골목은 대부분 ‘나래비 술집’이었다. 잔술집이었지만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였다고 골목 사람들은 전했다. 한 주민은 “손님이 술이 취해 조금이라도 행패를 부리면 주인에게 바로 쫓겨나기도 했다”며 “그렇게 해도 될 정도로 술집들에 사람이 넘쳐났다”고 회상했다. 이 정도로 장사가 잘 되자 깡통골목에 가게를 얻으려는 사람도 많았다. 천 할아버지는 “가게 한 칸을 얻으려면 25만원 정도는 줘야 했다”고 말했다. 당시 집 한 채 값과 맞먹는 금액이었다. 그래도 아는 사람을 통하지 않으면 가게를 얻기 힘들었다고 천 할아버지는 전했다. ◇ 한 독지가가 도랑위에 건물을 짓다 = 지금과 같은 형태의 깡통골목이 만들어진 것은 1950년 한 독지가에 의해서다. 전쟁 당시 지금 깡통골목 자리는 폭 3~4m 도랑만 흐르고 있었다. 일부 피난민들이 판자로 집을 지어 살기는 했다. 하지만 ‘고또원갑’이란 특이한 이름의 사람이 도랑위에다 건물을 지었다. 당시 이 과정을 지켜본 천화성 할아버지는 “미군부대에서 나온 커다란 목재로 도랑을 가로지른 다음 그 위에다 수십 칸의 공간을 만들어 사람들에 분양했다”고 말했다. 이후 고씨는 건물 자체를 마산시에 양도했다고 한다. 외화벌이 짭짤 '최고 번화가' 하지만 고씨와 무슨 이유로 건물을 지었는지 왜 양도를 했는지 확실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당시를 증언하는 사람들이 ‘독지갗라고 부르는 것을 보아 단지 돈을 벌기위해서는 아니었다고 추측된다. ◇ 왜 깡통골목이지? = 깡통골목은 왜 ‘깡통골목’일까? 현재 깡통골목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깡통집이라는 구멍가게가 있는데 주민들에 따르면 이 가게를 운영하던 무척 억척스런 할머니가 있었다. 이 할머니는 당시 미군들을 상대로 달러를 바꿔주기도 하고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물품을 구해다 팔기도 했다고 한다. 한 주민은 “그 할머니는 영어를 전혀 할 줄 몰랐지만 미군들과 어떻게 그리 의사소통을 잘 하는지 신기했다”고 밝혔다. 이 할머니가 운영하던 가게에서 깡통에 담긴 미군 전투식량(시레이션)을 팔았는데 이 때문에 ‘깡통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사람들은 설명했다. 지금 할머니의 아들이 이 가게를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는데 이름 밝히기를 거부한 이 아들은 “그 때 우리 집 뿐 아니라 다른 가게에서도 미군부대 물건을 팔았다”며 “당시 국산제품이 아예 없던 상황에서 당연한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 쇠퇴하는 번화가 = 주민들은 마산에서 전국체전이 열리던 82년까지도 깡통골목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도랑 위에 지은 목조 건물이 오랜 세월을 버틸 수는 없었다. 70년대 초반 19살의 나이로 깡통골목으로 이사 왔다는 한 주민은 이미 그때부터 철거 이야기가 나왔다고 전했다. 이 주민은 “전국 체전이 열릴 당시 마산시의 독려로 입주자들이 돈을 들여 목조 건물 위에 슬래브로 지붕을 올리고 시멘트로 건물 외벽을 발랐다”며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었다고 밝혔다. 썩어가는 목조 기둥에다 시멘트까지 발랐으니 붕괴 위험이 높아진 것은 당연한 일. 입주민들은 자기 돈을 들어 기둥 옆에 앵글을 넣는 등 끊임없이 수리를 해야 했다. 마산시는 현재 깡통골목을 ‘무허가 노후 건축물’로 분류하고 있다. 마산시 관계자는 5일 “당시 헌법도 제대로 없던 상황에서 지어져 별 문제가 없었다”며 “하지만 현행 건축법을 따른다면 당연히 철거해야할 건물”이라고 강조했다. |
깡통골목의 산 증인 천화성 할아버지 | ||||||||||||||||||||||||
“좋은 세월 다 갔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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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통골목의 과거를 캐기 위해 기자는 한 시간째 골목을 돌고 있다. 골목 사람들은 ‘국수집 할아버지가 제일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국수집을 찾았다. 띠포리(밴댕이) 국물로 유명한 ‘할매국수’(본보 2002년 10월 16일 보도)다. 며느리인 듯한 주인이 금방 아버님을 모시고 올테니 기다리란다.
멋진 선글라스를 끼고 나온 천화성(77) 할아버지. 며느리한테 미리 얘기를 들은 듯 묻지도 않은 말을 꺼낸다. “큰 애가 지금 50대인데 여기서 다 컸습니다. 우리 할멈이 장사를 할 적에 이 곳에서 국수를 먹던 ‘주먹’들이 지금도 찾아와서 먹고 가곤 합니다. 할멈 인심이 좋았거든요.” 전쟁 중 미군부대에서 일했다는 천 할아버지는 깡통골목을 짓는 모습을 직접 지켜봤다. “내가 미군 부대 목공 센터 조장이었습니다. 영어는 못해도 대강 알아듣고 숙소도 지어주고 그랬어요. 그 때 당시 지금 깡통골목이 있는 하천 위에다 목조 건물을 짓더라고. 그러고는 한 칸씩 임대를 주었지요.” 이렇게 만들어진 깡통골목에서는 주로 미군 군수품이 거래됐다.
골목과 함께 울고 웃었던 한평생 “부산 국제시장과 같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미군부대에서 나온 걸로 꿀꿀이죽도 만들어 팔았습니다. 바로 이곳이 마산의 중심가였지요.” 천 할아버지는 깡통골목과 관련해 두 가지 인상 깊은 일화를 소개했다. ◇ 외교 다방의 상하이 박 현재 깡통골목 건너편엔 럭키사우나가 있다. 사우나가 들어서기 전엔 ‘럭키카바레’가 영업을 했고 그 전 이름이 ‘백옥회관’이었다. 그 당시 마산 유일의 사교장이었다. 그 바로 옆에 ‘외교다방’이 있었다. 한국 전쟁 때 인천 미인대회 출신의 마담이 연 다방이다. 그 남편이 ‘상하이 박’이란 사람이다. 그는 키도 크고 잘 생기고 성격도 좋았다. 한 번은 다방에서 군인과 싸움이 붙었다. 공군점퍼를 입은 이 군인이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상하이 박을 향해 겨누며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상하이 박은 전혀 기죽지 않고 “야! 쏴! 쏴봐!”라고 소리쳤다. 결국 그 군인은 총을 쏘지 못했다. “그 만큼 배짱이 있던 사람이라!” |
깡통골목 어떻게 형성됐나?(상) | |||||||||||||||||||||||||||||||||||||
고또환갑씨, 상인위해 자비로 건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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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시 반월동 반월시장 옆 깡통골목이 철거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 골목에 있는 2층 목조건물이 어떻게 건립됐는지에 대해 새삼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알려진 바로는 ‘고또원갑’이란 독지가가 한국전쟁 중 깡통골목을 지어 마산시에 기증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 독자는 “시아버지(고또환갑씨의 아들)가 많이 서운해 하셨다”며 “아직 건강하시니 궁금한 게 있으면 연락을 하라”고 덧붙였다. 9일 오후 독자가 살고 있는 마산시 월영동 동아 2차 아파트를 찾았다. 고또환갑씨의 아들 고봉덕(78)씨는 소파에 앉아 취재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 고씨의 증언을 토대로 고또환갑씨는 어떤 사람이었고 왜 깡통골목을 지었는지 2회에 걸쳐 알아본다. ◇깡통골목을 지은 이유
처음부터 2층 건물로 지어 2층은 살림집으로 하고 1층은 가게로 쓰게 했다고 고씨는 덧붙였다. 하지만 하천을 덮어 건물을 짓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마산시에서 허가를 내 주지 않으려 했다. 수소문 끝에 만난 아들 고봉덕씨 증언 아들 고씨는 “시에서 개인명의로는 허가를 못 내주겠다고 했다”며 “그래서 결국 아버지께서 돈을 댔지만 시에서 지은 것으로 하고 임대료도 시에서 받게 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아마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하천을 복개해 집을 지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고또환갑씨는 술 도매상을 했다. 전쟁이 나고 부산에만 술 공장이 돌아가던 시기였다. 아들 고씨는 “당시 미군부대에서 일하던 노무자들이 저녁 일을 마치고 오면 주로 깡통골목에서 한 잔 씩 걸쳤다”며 “깡통골목 모서리에도 가게를 열었다”고 기억했다. 당시 깡통골목에 들어가는 술은 고또환갑씨가 다 댄 것이다. 아들 고씨는 이런 아버지의 ‘힘(?)’으로 미군부대 경비대장을 맡기도 했다고 밝혔다. ◇특이한 이름 ‘고또환갑(高又還甲)’ 고또환갑씨는 1905년 6월 7일 고성군 고성읍 수남동에서 태어났다. “미군부대 있어 장사되겠다” 하천복개
두 해 뒤 아버지가 진갑(進甲)을 맞았을 때 고또환갑 선생이 태어났다. 그래서 ‘다시(又) 환갑’이란 뜻으로 이름을 “또환갑”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고씨는 항상 배우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
당시 할아버지는 큰 아들인 고환갑씨에게 공부를 시켰다. 하지만 고씨는 나중에 시골에서 농사짓기 싫다며 일본으로 도망을 갔다고 아들 고씨는 전했다. 때문에 할아버지는 동생인 고또환갑씨에겐 공부를 시키지 않으려 했다. 고또환갑씨가 결혼을 하고 아들 고씨를 낳자 일본에 있던 큰 아버지가 귀국했다. 그래서 고또환갑 선생은 마산으로 독립해 이사를 왔다. 마산에 온 고 선생은 간장공장에 취직했다. 당시 마산시 자산동에 있던 산전(山田)장유양조장이었다. 지금 몽고간장의 전신이다. | |||||||||||||||||||||||||||||||||||||
깡통골목 어떻게 형성됐나(하) | ||||||||||||
고또환갑씨의 시장사랑 ‘산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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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통골목 건물을 지은 고또환갑씨는 독특한 자본가였다. 1945년 해방을 맞자 조선인 자본가들이 일본인들이 버리다시피 한 공장들을 헐값에 인수해 나중에 대자본가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고씨는 이 같은 길을 걷지 않았다.
아들 고씨는 이 회사가 지금은 없어졌다고 밝혔다. 유원회사의 전신이 소주와 청주를 만들던 ‘소화소주’라고 아들 고씨가 말한 것으로 보아 지금 무학소주의 전신인 ‘소화주류공업사’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만일 아들 고씨의 말대로 고또환갑씨가 제대로 유원회사에 투자를 했다면 현재 무학소주의 주인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고또환갑씨는 시장(市場)을 만드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 ◇어시장 이전을 추진하다 깡통골목을 짓기 전 마산반월시장 번영회장을 맡고 있던 고 선생은 반월시장에 가축시장과 청과물시장을 만들 생각을 하고 마산시로부터 허가를 얻어냈다. 당시 반월시장은 마산에서 제일 큰 시장이었다. 하지만 고씨가 만든 두 시장은 장사가 안돼 결국 얼마안가 접고 말았다. 그러다 한국전쟁 직전 고 선생은 또 다른 기획을 하게 된다. 거듭되는 시장 조성 실패에도 ‘칠전팔기’ 바로 어시장을 새로 내는 것이다. 당시 구 마산시가 쪽에 어시장이 형성되어 있었지만 너무 비좁다고 생각한 선생은 바닷가에 있던 큰 창고를 주목했다. 지금 마산여객터미널 자리다. 일제시절 지어진 이 창고는 당시 일부 사람들이 칸막이를 하고 살림을 살고 있었다. 선생은 역시 제 돈을 들여 이 사람들을 이주 시켰다. 그리고 창고를 비워놓고는 시의 허가를 얻어 어시장을 옮길 참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미군은 비어 있던 그 창고에 군수물자를 들였다. 결국 어시장 이전 계획은 전쟁 통에 물거품이 됐다. 이런 활발한 활동 때문에 지역 상인들에게 인기가 좋았던 선생은 해방 후 마산상공회의소가 생길 때 신구마산 상인들이 모여 한 회장 선임 투표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었다. 하지만 선생은 초대회장 자리를 거부했다. 글을 읽을 줄 몰랐기 때문이다. 아들 고씨는 “당시 아버지께서 자신은 말은 잘 하지만 회의록만 쳐다보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다”며 “많이 아쉬워했다”고 전했다. 선생은 특히 지난 1946년 마산에서 미군정을 상대로 10월 봉기가 일어났을 때 마산상공회의소를 해산하라는 요청을 강력히 거부하기도 했다. 당시 상공회의소 상인 중에는 공산당에 가입한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당시 김종신 의원의 적극적인 설득으로 결국 상공회의소를 해산했다. 66년 협심증으로 사망…공적비도 없어져 ◇공적비를 거부하다 선생이 깡통골목을 세우고 반월시장 사람들에게 장사를 하게 하자 반월시장 사람들이 공적비를 세워주려 했었다. 선생은 극구 허락하지 않았다. 살아생전에 공적비를 세운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시장 사람들은 공적비를 세웠다. 지금 마산 중앙고등학교 옆 이면도로 자리다. 하지만 지난해 도로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이 공적비는 사라졌다. 가족들이 공사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쫓아갔지만 공적비는 흔적도 없었다. 선생은 지난 1966년 협심증으로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하던 그 정신은 손자를 통해 이어지고 있다. 선생의 손자 고굉무(43)씨는 사업을 하는 틈틈이 후원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는 현재 경남여성장애인연대 후원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아름다운가게 마산대우점을 만드는데도 적극 참여했고 지금도 운영위원을 맡고 있다. 손자 고씨는 “만약 어시장을 옮기는 등 할아버지의 기획이 그대로 실현되었다면 마산은 지금과는 또 다른 발전된 도시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며 “나도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사회에 좋은 일을 많이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
마산 현대사 굴곡 깃든 '깡통골목' 사라진다 | |||||||||||||
안전 문제로 42세대 내달 보상협의 시작해 7월까지 마무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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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현대사의 굴곡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반월시장 '깡통골목'이 올 7월이면 자취를 감춘다.<2006년 6월 14일, 7월 5·7·13·15일 보도>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병참기지를 방불했던 마산, 그 중 가장 왁자지껄했던 반월동에, 한 독지가의 기획으로 개울 위에다 나무를 걸쳐 만든 상가 '깡통골목'이 마산사(史)의 한 페이지로 들어간다.
지은 지 57년이나 되는 목조 건물이 안전할 리 없는 데다 '달리 갈 곳이 없다'며 철거를 반대해 온 주민·상인들도 지난해 이웃집 다락방이 폭삭 꺼지는 경험을 한 후로 이주를 결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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