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의 금잔디
http://cafe.naver.com/commu119/12434
잠을 자면 꿈을 꾸게 된다. 꿈이란 평상시에 잠재하고 있는 무의식의 세계를 꿈을 통해서 보여준다고 하는데 평생을 많은 꿈을 꾸게 되어도 과연 그 꿈이 내 무의식의 세계를 표현하였는지는 모르겠다. 항상 나는 젊었고 아이는 어렸다. 예전처럼 나는 날씬하고 목에는 실크 머플러를 두르고 풀밭에 앉아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어쩌면 이런 것들이 지난날에 대한 무의식의 환영幻影이 될 수도 있다.
<옛날의 금잔디>는 미국민요 <메기의 추억>이란 노래의 첫 구절이다. 사춘기 때부터 여고시절을 보내면서 지치지도 않고 불렀던 노래 중에 하나다. 지금의 아이들이 부르는 랩 이상으로 우리는 고향을 그리워하고 부모를 그리워하는 외국 가곡과 오페라 번안곡을 불렀다.
"옛날의 금잔디 동산의 메기 같이 앉아서 놀던 곳
물레방아 소리 들린다 메기야 희미한 옛생각"
사랑하는 메기와 금잔디 동산에서 놀던 옛 생각을 그리워하면서 이미 지금은 늙어지고 백발이 성성한 메기와의 추억을 노래한 것이다. 그들도 물레방아 옆에서 사랑을 했는지 동산 수풀은 없어지고 장미화 만발한 옛날의 금잔디 위에서 메기와 놀던 추억은 그것이 아름다운 추억이었는지 그냥 지나간 나이 들어 허무한 추억이었는지, 그게 지금의 나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어느 누구나 늙어가며 희미한 옛 추억을 회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인생의 정석일런가. 나조차도 어제의 기억조차 잊어버리고 있으면서 아주 오래된 기억들이 수시로 반추되어 그것으로 인해 깊은 생각을 할 때가 많아진다. 꿈을 꾸어도 지금의 나이 먹은 나 보다 더 젊은 나를 느끼면서 왜 그럴까. 현실의 책임은 꿈속에서도 가지고 있었고 꿈을 깨면 정말 나도 순이와 같이 놀던 금잔디의 추억이 있었나 하고 생각하고는 한다.
지난 10월. 모처럼 학생 때 가까이 지내던 J를 만났다. 피차 비슷한 전업주부로 몇십 년을 살아와서 만나 이야기하기 편하기도 하려니와 그 당시 동문 여학생 여섯 명 중 이미 두 명은 외국으로 나가 자리잡고 또 한 사람은 교회와의 인연 때문에 속세와는 인연을 끊겠다는 친구가 있다. 그러면 또 다른 한 사람 춘하는, 정기적인 모임이 없기 때문에 J와 나는 대충 할 말을 전화로 하고 정작 만나보니 할 말이 없어 마주보고 한참을 웃기만 하였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처녀 적엔 J가 통통하고 귀여운 데가 있었는데 지금도 변하지 않고 그 몸매에 편한 인상을 가지고 있다. 일년 전에 나를 보고 J는 웃었다. 그리고 나를 위로한다는 말인즉, "지금의 네 모습이 참 좋아 보인다."
새로 단장한 청계천을 걸었다.
"너 이렇게 걸어도 괜찮은 거야?"
"걱정도 팔자!"
우리는 중간 중간 계단에도 앉아보고 사람들 틈새를 비집고 다니면서 물가로 내려가 물도 튀겨가면서 걸었다.
"옛날 너 학교 끝나면 을지로에서 전차 타려고 낙원동에서 수표교인가 광교인가 건너갔지. 생각나니? 중국 구둣가게 앞을 지나가기 무섭다고 나 끌고 간 것." 지난 내 이야기에 즉각 반론을 한다.
"얘, 너 무슨 말. 행정과 머슴아 매일 강의실 앞에서 기다렸다가 너 채갔지. 나하고 같이 간건 두 번인가 밖에 안돼. 그것도 한번은 그 머슴아 하고 같이 가서 고맙다고 했는데."
그랬었나. 그래 그런 일도 있었구나. 피차 아련한 과거를 생각하며 얼굴에 미소를 머금는다.
청계천. 서울 시내를 가로지르는 말 그대로 맑은 물이 흐르는 개천. 그때 서울 중심가는 남산이 바로 보이는 퇴계로에서 북쪽으로 가로지르면 을지로 그리고 청계천다리를 건너면 종로통이다. 종로에서 또 북쪽으로 한 블록 가면 경복궁을 지나 창덕궁(비원)이 있고 담을 끼고 조금 더 가면 오른쪽은 종묘가 있고 왼쪽으로 돌면 창경궁이 있다. 소위 임금님의 주택이다.
조선조 영조 임금 때 국책사업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하천을 정비하고 장안의 큰길을 만들어 백성들의 생활 수단 즉 종로의 육전상가와 을지로의 공工상가가 조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접한 청계천은 맑은 물로 빨래를 할만큼 그렇게 깨끗한 물도 아니었고 상류쪽으로는 각종 염색으로 더러워진 물과 걸인들의 움막으로 채워졌으며 아래로 내려갈수록 전후戰後 도시 빈민으로 인한 극빈자들의 움막과 판자촌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헐벗은 아이들의 더러운 배설물과 상상도 하기 싫을 정도의 생활하수로 청계천은 더러워 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옛날의 금잔디에서 놀던 회상을 하듯 그것 자체도 즐거운 추억이 되어 마음 여린 J는 벌써 웃으면서 눈물을 그렁대고 있다.
"그때 네 신랑 소개해준 춘하 지금도 잘 살지?"
"아무렴."
대답하는 내 목소리가 약간 꼬였다. 나는 결코 춘하가 이 글을 읽을 일이 없기 때문에 이 글을 쓰는지 모른다. 어차피 J는 알고 있기 때문에.
춘하. 장안동 본교에서도 소문이 날 정도로 춘하는 뛰어난 미모를 자랑했다. 한 학기를 지나 입학을 한 춘하를 내가 처음 만났을 때 춘하는 무언으로 어색함을 풀어보려고 그랬는지 처음으로 내게 말을 붙인 것 같았다. 그때 내가 처음 본 그녀의 옆모습은 가히 환상적으로 예뻤다. 지금의 현대적인 팔등신의 미美가 아니고 160이 안 되는 아담한 키에 약간 통통한 몸매 물기를 머금은 듯한 까만 눈동자에 눈웃음을 치는 듯한 표정이 하여간 예쁜걸로만 치면 미스 코리아가 울고 갈 정도였다. 바쁜 중 모처럼 시간을 내서 근처 빵집이라도 가면 모든 눈길이 춘하한테만 쏠려 나머지 처녀들은 제대로 제값을 못매길 정도였으니까.
강의가 끝날 때쯤, 강의실 복도에는 거짓말 보태 수십 명의 남학생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 중에는 장안동 본교생도 여러 명 있었고 다른 대학은 물론 서울대학을 졸업한 사람도 있었다. 서울상대를 졸업한 사람이 얼마나 마음이 조급했는지 당시 춘하 오빠의 친한 친구인 지금의 내 남편이 된 사람한테까지 찾아가 눈물로 하소연하면서 춘하를 내게 오게 해달라고 졸랐다고 했다.
자기관리 만큼은 철저한 똑똑한 여자라는 것을 시간이 갈수록 느끼게 하는 여자였다. 하여간 수업이 끝난 늦은 시간에 우리는 춘하 덕분에 그중 간택된 사람을 따라가 각종 군것질로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지나고 보니 그녀는 그때 여럿이 행동하므로 자기관리를 하는 영악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 춘하에게는 오빠의 또 다른 친구인 L씨가 굳건히 뒤를 지키고 있었다. 그 사람은 미팔군 납품으로 젊은 사람으로서는 드물게 재력이 있는 남자였다. 북에 부모님을 두고 두 형제만 월남해 자수성가했기 때문에 딸린 식구 없는 여자에게는 조건이 좋은 남자였다. 흠이라면 키가 작고 미남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도 춘하가 영 반응이 없고 별 실속 없이 돌아다니자 춘하에 대한 믿음이 없어지는지 동료의 소개로 다른 여자와 약혼을 하고 혼인을 한다고 지금의 내 남편이 된 사람이 알려주었다.
문제는 그 이후에 재미있는 사건이 생겼다. 그 남자가 약혼을 하고 혼인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자 춘하는 대구에 있는 언니네 집(부모가 없다.)에서 그 날로 서울로 올라와 울고불고 난리를 치고 날 배신했으니 약을 먹고 자살한다고까지 소동을 피우고는 졸업한 그 해 가을(64년) 그 사람과 결혼을 한 것이다.
그 이후 우리는 기회를 만들어 여러 번의 만남을 가졌으나 세월이 갈수록 춘하는 자기생활의 단단한 영역을 만들어 우리와 점점 멀어져갔다. 그래도 이래저래 가끔은 소식을 듣는데 저도 이제 흰머리 속일 수 없어 염색한지가 오래됐노라고 자주 만날 기회를 만들자고 인사치레는 깍듯이 하지만 지나고 보면 혹시나가 역시나다.
지금 우리부부의 신경전 끝의 마무리 전戰.
"당신 옛날 춘하한테 구조조정 당해서 날 붙잡고 늘어진 것 아니야?"
그러면 웃고 넘어가면 될 것을 소심한 우리 남편 정색을 하고 펄쩍 뛴다.
"그런 애들은 나하고 어디가 틀려도 많이 틀려서 제 발로 와도 싫다고."
하긴 나도 그 당시 나 쫓아다닌 사람 열다섯 트럭에 한 사람 못타 트럭 뒤꽁무니 따라 뛰어온다고 허풍을, 허풍이 아니라니까. 부린다.
그런 수다를 같이 앉아 듣던 남편 친구 K씨,
"그래 맞아. 내가 열다섯 번째 마지막 트럭에 타니까 누구 한 사람 못 타고 뒤따라 쫓아오더라고. 그게 바로 이 사람이었구먼. 아이고, 불쌍해서 봐 줬네."
남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