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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간 | 일 정 | 담당자 | 준 비 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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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발(효창 운동장, 22명) →남종면 분원리 → 분원 백자관
성지 미사
점심식사
창립성조 5인 묘역 출발 → 강학회 터 → 빙천 → 성조 묘역 창립 성조 묘역 → 십자가의 길(침묵중, 혼자) → 도착 → 상재상서 읽기
가족 묘 → 광암 이벽 가족 묘 → 정약종 가족 묘
귀가(효창운동장 도착)
| 여의도 복자 유치원 기사님: 01054285710
* 전체 진행: 김 안나 수녀 회장 최두경 이냐시오
경비, 간식 관리 총무
인원관리 조장
사진 촬영
식당: 강원 식당 031-762-5508
| 유인물 명찰: 성지순례 이동 마이크 떡, 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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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량 이동시: * 남한산성으로 가면서:
순례의 기도, 103위 호칭기도, 남한산성과 순교성지 소개.
연무당, 동문, 시구문 설명
* 분원백자관으로 이동시(정약종 순교자와 분원리)
* 귀가 길에: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과 시복을 위한 기도, 묵주기도로 맺음.
❦ 성지 순례 기도 ❦
순교자의 원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님!
저희 면형강학회 회원들이 성지순례를 떠나고자 하오니
이슬처럼 스러질 인생길에서 주님을 만나 빛으로 승화하신
순교자들의 발걸음을 따라 천상 본향을 향하여 걷게 해 주소서.
특별히 함께 잡혀가는 교우들을 격려한 최양업 신부님의 부친이신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의 기도가
순례를 떠나는 저희 마음을 사로잡게 하소서.
“교우 여러분, 힘을 내시오.
천상에서 천사가 내려와 우리의 발걸음을 금자로 재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장을 서서 갈바리아로 나아가시는 것을 보십시오.”
주님! 저희가 깨닫고 기억하게 해 주소서.
순례자는 땅을 딛고 하늘을 우러르며, 희망을 품고, 기도하며,
더불어 주님의 길을 걷는 것임을
순례자의 한걸음 한걸음은 속죄와 믿음의 발걸음으로 천상을 향한 걸음임을
순례자의 길은 성지 속에 녹아있는 신앙 선조들을 만나는 믿음의 잔치임을
순례자의 길은 희망과 사랑의 길을 걷는 것임을
순례자의 길은 복음을 전하며, 증거하는 선교의 길을
걷는 것임을
순례자의 길은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여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는 길임을
저희들의 시간과 생각과 말과 행위 모두를 주님께 봉헌하오니
저희들의 순례를 축복하시고 인도하여 주소서.
우리의 어머니 성모님과 우리선조 순교자들의 전구를 청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프란치스코 교황 한국 방문과 시복식을 위한 기도
사랑이신 아버지 하느님,평화의 사도인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과 시복식을 통하여 선교사 없이 시작된 한국천주교회를 강복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또한 아시아 청년대회를 통하여 아시아의 청년들을 한국 땅에 불러 주시고새로운 복음화의 계기를 마련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모두 순교자들의 정신을 본받아 신앙의 새로운 열정으로저희 자신과 교회와 사회의 복음화를 이룰 수 있게 하소서.고통 받고 소외되고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하고 신앙의 빛을 전하며사랑과 평화와 생명의 문화를 이루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복음 말씀을 통하여 우리 민족이 서로 화해하고 일치하여 한반도의 평화가 이루어지게 하소서.그리하여 저희가 아시아의 복음화에 헌신하며온 세상에 주님의 빛과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한국 교회의 수호자이신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한국의 모든 순교 성인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주교회의 2014년 춘계 정기총회 승인>
순교자들과 함께 걷는 십자가의 길
† 사랑하올 주 예수 그리스도님,
당신 가신 십자가의 길을 저희 면형강학회 회원들과 함께 걸으려 왔습니다. 당신께서 사랑하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의 길을 걸으신 것같이 저희의 길을 인도해 주소서. 일생의 순간을 오롯이 당신을 닮아 살고, 순간을 당신께 의탁하며 순교의 월계관으로 천상 영복을 누리고 계시는 우리 신앙 선조들도 오늘 저희들의 십자가 길에 함께 모셨으니 그분들의 전구도 들으시어 저희들의 길을 인도해 주소서.
+ 한국의 모든 순교성인성녀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1처 예수님께서 사형선고 받으심을 묵상합시다.
†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나는 지금까지 천주의 은혜로 형벌과 고통 가운데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결국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언제나 천주께서 나를 부르시려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하여 천주께 기도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우리 뒤를 따르십시오.” 우리는 다만 천주의 부르심을 기다릴 뿐입니다. -순교자 김 루시아의 편지중-
사랑하올 예수님, 아버지께 대한 당신의 고귀한 순명을 봅니다. 거절할 수 있음에도, 피할 수 있음에도 당신은 모두 받아들이십니다. 아무리 고통스럽고 힘든 십자가라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것이 바로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지는 것임을 저희가 깨닫게 하소서
주님의 기도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묵상합시다.
†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눈을 뜨니 다리가 온통 헤어지고 사방에서 피가 흐르거나 혹은 상처 위에 피가 엉겨 붙어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아아, 나보다 신체가 더 튼튼하지도 못하셨을 예수께서는 올리브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셨습니다. 에수께서는 매를 맞으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높은 산꼭데기까지....아무도 그를 동정의 눈길로 바라보는 사람이 없었고... 그런데 나 같은 대죄인에게는 이렇게 동정과 구원의 손길을 뻗쳐주고 정신을 들게 하느라고 애들을 쓰는군요. 얼마나 감사를 드려야 옳단말입니까 -순교자 이경언바오로의 기록중-
사랑하올 예수님,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당신의 모습에서 지극한 사랑과 겸손을 봅니다. 어깨를 힘겹게 내리누르는 십자가는 바로 저희에 대한 당신 사랑의 무게가 아닙니까. 저희도 매일 매일의 십자가를 사랑으로 지고 가게 하소서.
주님의 기도 ◎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3처 예수님께서 기력이 떨어져 넘어지심을 묵상합시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이 고을에서는 남녀노소 100명이 붙잡혔습니다. 나중에 자기네 고향 옥중에서나 혹은 감영으로 가는 도중에 굶주려 죽은 이, 마음이 약하여 배교한 사람들도 있어 이제 13명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이 천주의 섭리가 명하신 것이며, 또 우리들이 감사를 올려야할 은혜입니다. 그러나 몸은 약하므로 모든 것을 기쁜 마음으로 참아 받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흐를수록 이루 형언 할 수 없을 만큼 더 슬퍼지기만 합니다 - 김종한 안드레아편지중-
사랑하올 예수님, 무참히 넘어지시는 당신의 모습에서 나약함을 봅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버지의 권능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음을 또한 순교자들을 통해서 압니다. 삶의 무게로 넘어질 때, 저희를 일으켜주소서.
주님의 기도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4처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만나심을 묵상합시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예수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강완숙 골롬바의 신앙은 그의 모성에도 마찬가지로 영광스럽게 이겼다. 그와 같이 잡혔으나 다른 옥에 갇혀있던 그의 전실 아들 홍필주 필립보는 형벌 중 마음이 약해지는 것 같았다. 골롬바는 그 말을 듣고 그가 옥에서 법정으로 가던 어느 날 먼발치로 아들을 보고 그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예수님께서 네 머리위에서 너를 보고 계신다. 네가 그와 같이 눈이 어두워 스스로 멸망할 수 있느냐, 내 아들아, 용기를 내고 천당 복을 생각하여라.” 이 용감한 격려가 젊은이의 영혼을 구하였으니, 그는 이 말로써 힘을 얻어, 몇 달 후에 순교의 영광을 받았다.
사랑하올 주 예수님, 십자가 길에서 서로 만나신 당신과 성모님을 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요. 그리고 고통 속에서의 침묵은 얼마나 더 큰 사랑인지요. 당신과 성모님의 극도의 고통 속 사랑으로 세월호 사고로 고통 당하고 있는 유가족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소서.
주님의 기도. ◎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5처 시몬이 예수님를 도와 십자가 짐을 묵상합시다.
† 주님께서는 십자가로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예수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그는 아직 예비신자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크게 십자가를 긋고 , 자기 자신에게 성세를 주노라고 하며 머리에 물을 부었다. 그런 다음 눈이 동그래진 관원을 올려다보며 말하였다. 저는 큰 죄인입니다. 그런데 여태껏 때린 모양으로 때리면 아직도 죽을 길이 아득합니다. 제가 죽기를 원하시면 여기를 치도록 하십시오. 그러면서 몸 옆구리의 어떤 부분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데를 두 번 치니, 그는 그만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43세가량이었다. -이여삼 바오로의 기록
사랑하올 예수님, 저희를 간절히도 원하시는 당신의 부르심을 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필요에 의한 부르심이 아니라 무한한 당신 사랑에로의 부르심이라는 것을 또한 압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기꺼운 마음으로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저에게 사랑의 불을 놓으소서.
주님의 기도 ◎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6처 베로니카,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림을 묵상합시다.
†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예수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형조에서 다시6회의 신문을 받고 6회의 고문을 당한 후 사형선고를 받았다. 옥에 다시 갇히자, 기도와 갇힌 이들을 보살피는 것으로 나날을 보냈고, 그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 줄 수 있도록 밖에 나가서까지 구원을 청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이 자선사업에 어떻게나 집념하였던지 형장으로 떠나가면서까지 교우들에게 ‘무엇보다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 많이 해주세요’ 하는 말밖에는 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11월24일43세를 일기로 참수되어 아버지와 어머니와 두 오라비를 만나러 하늘로 올라갔다. -성녀 정정혜엘리사벳 기록-
사랑하올 예수님, 당신의 얼굴을 닦아드린 베로니카의 희생을 봅니다. 남을 위한, 특히 어려움 속에서의 희생은 얼마나 힘든 일 인지요. 나와 너를 떠나 저희 모두가 당신 안에서 하나임을 알게 하소서.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아픔을 서로서로 위로하며 격려하고 당신께 대한 희망으로 거듭나게 하소서.
주님의 기도 ◎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7처 예수님께서 두 번째 넘어지심을 묵상합시다.
† 주님께서는 십자가로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예수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이윽고 형리들은 매질을 멈추었습니다. 그러는 중 누님은 기운이 핍진하고 무서운 칼 밑에 몸이 움츠러들어서도 항상 순교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천주께 순교할 은혜를 주실 것과 도우심 구하기를 끊이지 아니합니다. 내가 지금 쓴 것은 많은 사람이 보고 들은 것입니다. 이 영혼에 가득한 생각을 자세히 기록할 수는 없습니다. 내 다리는 온통 터져서 한 개의 상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주의 은혜로 아직도 괴로움을 당하지는 아니하였습니다. 교우 여러분께 평화를 축원하며 소식 주시기를 바랍니다. -성 이호영 베드로 편지 중-
사랑하올 예수님, 당신의 넘어지는 모습에서 광야의 유혹을 봅니다. 그리고 유혹은 외부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나약함에 있다는 것도 또한 압니다. 매 순간의 유혹을, 나약함을 당신과 순교자들의 고통을 생각하며 굳건히 이겨낼 수 있게 하소서.
주님의 기도 ◎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8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하심을 묵상합시다.
†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예수그리스도님 주를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지극히 사랑하는 교형여러분!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내려오시어 직접 수 없는 괴로움을 당하셨다는 것을 아십시오. 그의 괴로움으로 그가 당신 교회를 세우셨으니, 이 교회도 십자가와 고난 가운데서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 있는 몇몇 교우는 천주의 은총으로 잘들 있습니다. 그들이 사형을 받게 되면 그 가족들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할 말이 많습니다만, 그것을 어떻게 편지로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얼마 안 있어 싸우러갑니다. 제발 여러분은 덕을 닦아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납시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편지 중-
사랑하올 예수님, 부인들을 위로하시는 모습에서 온유함을 봅니다. 그리고 온유함은 믿음의 소산이며, 당신의 선물임을 순교자들을 통하여 또한 깨닫습니다. 당신의 온유함을 저희에게도 나눠 주시어, 어떠한 역경에서도 당신의 향기를 잃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기도 ◎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9처 예수님께서 세 번째 넘어지심을 묵상합시다.
†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예수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정 프로타시오는 자기가 배교한 사실과 배교한 것을 취소하고 죽기를 원한다는 말을 하니 하인들은 그를 미친놈으로 다루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튿날 그는 다시 갔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3일째인 5월12일에는 병이 들고 상처가 덧난 탓으로 인하여 걸음을 걸을 수가 없었으므로 들것에 들려 형조근처까지 가서 대신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대신이 나오자 길 한가운데서 그의 앞에 엎드려 자기의 내력을 말하고 배교한 죄인이므로 자기를 죽게 하여 달라고 청하며 하도 간절히 조르는 바람에 대신은 그를 옥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 성 정국보 프로타시오 전기 중에서
사랑하올 예수님, 힘겹게 넘어지시는 당신의 모습에서 다시 일어서시는 모습을 또한 봅니다. 그리고 한때 배교하였지만 끝내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순교자들에게서도 다시 일어 서시는 당신의 모습을 봅니다. 당신의 강인함을 저희에게도 나눠 주시어, 죄와 모든 약점들을 이겨 낼 수 있게 소서.
주님의 기도 ◎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10처 예수님께서 옷 벗김 당하심을 묵상합시다.
†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예수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벌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주림이요. 그보다 심한 것은 목마른 것이었다. 다른 형벌을 받으면서도 용맹이 신앙을 증거한 이들도 주림과 목마름에서는 넘어가는 이들이 많았었다. 하루에 두 번씩 주먹 만한 조밥 한 공기 밖에는 얻어 먹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중에는 자기들이 누워 자는 볏짚 자리를 뜯어먹고 심지어는 옥안에 기어 다니는 이를 잡아먹기까지 하였다. -성 다블뤼 주교의 기록 중
사랑하올 예수님, 당신의 모습에서 너무도 간절한 목마름을 봅니다. 바로 사랑과 저희자신에 대한 목마름으로 그리고 저희의 허물과 아집이 당신의 목마름을 더욱 가중시켰다는 것도 또한 압니다. 우리에게 사랑을 일깨워 주시어 당신의 목마름을 사랑으로 가득 채울 수 있게 하소서.
주님의 기도 ◎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11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을 묵상합시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예수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형리들이 그의 말을 중단시키고 나무토막에 머리를 대라고 하니, 그는 하늘을 볼 수 있도록 머리를 누이면서 “땅을 내려다보면서 죽는 것보다는 하늘을 쳐다보면서 죽는 것이 낫다” 고 말하였다. 망나니는 벌벌 떨며 감히 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감탄보다는 징벌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므로 자신 없는 손으로 첫 번 칼질을 하였다. 목은 절반 밖에 끊어지지 않았고, 아오스eld은 일어나, 보라는 듯이 크게 십 자성호를 긋고 조용히 다시 첫 번 자세로 돌아가 치명적인 일격을 받았다. -정약종 아오스딩에 관한 기록 중-
사랑하올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신 당신에게서 커다란 관용을 봅니다. 목숨을 빼앗아가는 자들을 위한 당신의 기도, 지극한 사랑의 표현임을 또한 압니다. 취사 선택 하는 저희의 사랑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주시어 당신의 넓으신 사랑을 따라 살게 하소서.
주님의 기도 ◎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1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위에서 돌아가심을 묵상합시다.
†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예수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 관리는 나라의 관습대로 명패에 쓴, 왕이 승인한 결안을 읽으라고 하였다. 윤 지충 바오로는 곧 그것을 받아 큰소리로 읽었다. 그런 다음 그는 머리를 커다란 나무토막 위에 누이고 여러 번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고는 지극히 침착한 태도로 망나니에게 치라는 신호를 하였다. 망나니는 그의 머리를 단번에 잘랐다. 다음은 권 상연 야고보의 차례였는데 그 역시 예수 마리아의 이름 부르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의 머리도 이내 잘렸다.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사랑하올 예수님, 그저 당신의 거룩한 죽음을 바라봅니다.. 제가 무엇이기에... 제가 무엇이기에... 죽어야만 새 생명이 시작된다는 십자가의 진리를 피로서 증거한, 순교자들을 본받아 매일의 유혹과 죄에 용감히 죽을 수 있게 하소서.
주님의 기도 ◎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13처 제자들이 예수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림을 묵상합시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예수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관장은 일찍이 들어본 일이 없을 정도의 잔악성을 극도로 발휘하여 그들이 보는 앞에서 두 자녀를 죽이겠다고 위협하고 또 실제로 아이들을 혹독히 고문시키기 시작하였다. 부모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하였다. 그러나 전능한 은총이 그들을 구원하였으니 장 베드로는 부르짖었다. “자녀를 사랑함은 사람으로서 자연스러운 일이며, 우리 아이들의 괴로움은 내 자신의 괴로움보다 백배나 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천주님을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안 됩니다. 천만번 못하겠습니다.”
-장 베드로와 손 막달레나 부부 기록
사랑하올 예수님, 당신의 성시를 안고 계시는 성모님에게서 고귀한 나눔을 봅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항상 당신과 함께 하셨던 성모님, 이제 마지막 남은 고통까지도 참아 받으시기 위해 당신을 안고 계십니다. 성모님의 나눔을 깊이 본받게 하시어 모든 고통을 기쁜 마음으로 나누어 받게 하소서.
주님의 기도 ◎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14처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심을 묵상합시다.
†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예수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 5월 27일 월요일 새벽에 약간 힘이 들기는 하였으나 시체를 훔쳐낼 수가 있었습니다. 순전히 이들을 장사지내기 위해 장만하여 둔 작은 터에다 함께 묻었습니다. 나는 행복 된 유럽에서와 같이 그들에게 비단옷을 입히고 귀한 향료를 바르기가 얼마나 소원이었겠습니까마는 우리는 가난도 하거니와 그렇게 한다면 헌신적으로 이 거룩한 사업을 맡아 하는 교우가 너무나 큰 위험을 무릅쓰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저 남녀별로 각각 옷을 입히고 시체를 자리 싸서 묻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많은 보호자를 천국에 보냈고, 내가 바라는 바와 같이 어느 때고 조선에 천주교가 왕성하여지면 이 시체들이야말로 국가적인 거룩한 유물이 될 것입니다.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의 편지 중에서
사랑하올 예수님, 당신의 무덤에서 당신의 깊은 평화를 봅니다. 고통을 극복한 후의 평화, 그것은 또한 저희 모두의 희망임을 압니다. 저희에게도 당신의 평화를 심어주소서. 그리하여 세상이 빼앗아 갈 수도 없고, 줄 수도 없는 당신의 평화를 온 세상에 전파하게 하소서.
주님의 기도
마침기도
사랑하올 주 예수님, 십자가의 고통과 수난으로 당신의 진리를 가르쳐 주신 주 하느님, 예수님과 일치되어 십자가의 삶을 사셨던 성모님과 순교자들을 묵상하며 당신의 길을 걸었사오니 당신의 사랑과 성모님의 자애와 우리 선조 순교자들의 공로를 보시어, 악을 멀리할 수 있는 힘과 당신 사랑이 되어 사랑을 살아 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소서. 그리하여 아파하는 이들을 위하여 아파하고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며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줄 수 있는 사랑의 손이 되게 하소서. 당신이 다스리시는 정의와 평화의 나라를 이루어 나가게 하소서.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주님의 기도/성모송/영광송
† 한국의 모든 순교성인성녀들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1. 하느님의 종 광암 이벽 세례자 요한의 유택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화현3리
1. 유택 발견사
1) 변기영 몬시뇰의 하느님의 종 이벽 세례자 요한 묘지 소재 찾기 위한 노력
* 1977년 11월 11일: 권철신 암브로시오와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묘지 참배 하면 서 광암 선생의 묘지 찾을 것을 요망
그 후 경주이씨 집성촌인 광주군 나무골(목리) 찾음
* 경주 이씨 이준희 씨의 노력으로 경주이씨 족보에서 이벽 성조의 묘 위치 찾음
* 소재: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꽃마루)에 그의 부친과 형 격, 아우 석과 함께
부인과 3합장되어 있음을 알게 됨.
* 족보에 그의 저서로 《숭례의설(崇禮義說)》이 있음을 알게 됨.
* 족보 (계유보(癸酉譜),1813년)상의 이벽
이벽(李蘗)은 족보상 벽(檗)자로 나오고 자가 덕조(德操), 족보에는 덕조(德祖)로 나옴 이고 호는 광암(曠菴)이며, 1754년(갑술생, 영조 30년) 경기도 광주군 남종면(현재는 동부면) 배알미리, 즉 두미(斗尾)에서 태어나서 자라며 배웠고 (이벽과 정약용에게 한문을 가르친 스승 중에는 이방익(李防翼)이라는 분이 있었다고 두미마을의 전주 이씨 노인들이 증언하고 있고, 이방익의 묘는 강 건너 마재에 있다.)
《숭례의설(崇禮義說)》이라는 책을 썼다.
처음에는 안동 권씨 집안에서 병조 판서 권엄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자식 없이 상처하고 다시 해주 정씨와 혼인하여 아들 현모(顯謨)를 낳고 1785년(을사년, 정조9년)에 세상을 떴다.
묘지는 그의 부친과 구 형제가 묻혀 있는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 신기동에 있고, 두 부인과 3합장을 하였다.
* 외아들 이현모(顯謨): 1784년(갑진생, 정조8년) 으로 자는 경문(景門)으로, 창령 조씨 조윤 정의 딸과 혼인하였고 1847년(정미년, 헌종13년)에 세상을 떴으며 천정리 유포에 묘지가 있다. 아들 병영, 딸은 선산 김씨에게 출가.
* 통덕랑(通德郞): 통덕랑이란 선대에 벼슬한 이가 있을 때 그 후손들에게 내려 주던 것으 로 광암 이벽 성조의 묘지석에 기록된 것과 아들 현모의 족보에 기록.
* 손자 이병영(秉榮)은 1814년(갑술, 순조14년)생으로 1898년(무술, 광무14년)에 선종.
* 1979년 1월 19일 포천군 화현리를 방문 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경주 이씨 후손들에게 부 탁하고 돌아옴
* 1979년 2월 27일 강원도 횡성군 횡성면 가담리에서 직계 후손들을 만남. 7대 후손 이상 훈의 부인 정 율리안나는 횡성 본당에서 부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다른 후손들은 즉 시 입교하겠다는 말을 들음.
* 1979년 4월 20일 묘지 발굴: 봉분 반쪽을 파서
“통덕랑경주이벽지묘(通德郞慶州李檗之墓)”라는 묘지석 발견
* 1979년 6월 21일 이벽 선생 묘지 발굴하여 혜화동 성당에 이전 작업 - 부인 권씨와 정 씨 합장묘 확인 발굴. 광암 선생의 키는 1,78m이고 첫부인 권씨의 묘는 이장한 흔적이며 해주정씨의 키는 1,65m로 큰 키였다.
* 1979년 6월 23일 혜화동 성당에서 명동성당으로 모심.
1979년 6월 24일: 명동성당에서 낮 12시 김수환 추기경님 집전으로 미사 봉헌하고 신장 성당을 거쳐 두 부인의 유해와 함께 천진암 성지에 이장.
2. 천진암 성지
천진암은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가람고,(伽藍考)》에 광주 동쪽 40리에 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영조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정약용의 <천진소요집(天眞消搖集)>에서 ‘삼십년 만에 다시 왔다’는 내용으로 보아 1797년 정약용 선생이 단오날 두 형님과 함께 천진암을 들러 20여 수의 시를 지으며 이틀을 지냈던 시절로부터 30년 만이라고 한 것으로 보여지고, 그 시기가 1827년경이다. 그러므로 1820년대 후반에는 천진암이 사찰로써의 명맥을 잃어 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더라도 아래 시들로 보아 옛날에 만났던 스님들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 된다.
《다산시문선》제7집 가운데 <천진소요집(天眞消搖集)> 중에서
‘밤에 천진사에서 잤는데 절이 퇴락해서 옛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으니, 내가 대략 삼십년 만에 이곳을 다시 온 것이다[夜宿天眞寺 寺破無舊觀 余蓋三十年重到也]’
지난 자취 희미하여 다시 찾아볼 수 없는데 / 前躅凄迷不可求
그윽한 녹음 속에서 꾀꼬리 울어 그치네 / 黃黧啼斷綠陰幽
썩은 홈통엔 물방울 끌어 졸졸 흘러내리고 / 朽筒引滴涓涓水
기와 조각은 갈아 뒤집혀라 즐비한 묘에서 / 破瓦耕翻壘壘丘
덧없는 곳 연연하여 오래 머물지 말지어다 / 幻境休留三宿戀
명산이란 오직 한 번 노닐기에 합당하다오 / 名山只合一番游
또 보건대 백발이 모두들 이와 같으니 / 且看白髮渾如此
가는 세월이 진정 여울 내려가는 배 같구려 / 逝景眞同下瀨舟
상천진사시에 차운하다 학연(學淵, 약용의 큰아들)
일찍이 붉은 잎에 시 쓰던 그곳을 / 紅葉題詩處
거듭 오니 나그네 마음 슬퍼라 / 重來愴客心
문에 드니 맛좋은 술을 권하고 / 入門勸芳醑
석양빛은 높은 숲에 가려졌네 / 落日翳喬林
부서진 물방아엔 샘물이 흩어지고 / 破碓泉聲散
쓸쓸한 집엔 풀이 무성하구려 / 荒寮草色深
스님이 이틀 밤을 묵게 허락했으니 / 伊蒲容信宿
해거름이 그늘어온들 무슨 걱정이랴 / 何事怕輕陰
숙천진사 시에 차운한 시 두 수를 더 쓰다 현계(여동식)
친구들의 부름 받아 꽃다운 그늘 감상하며 / 芳陰淸賞趁鶯求
호탕히 강을 횡단하매 뜻이 문득 한가하여라 / 浩蕩橫江意却幽
납극의 풍류는 지금 이 몸이 백발이요 / 蠟屐風流今白髮
신선의 소식은 또 저 단구에 있다오 / 羽衣消息又丹丘
용문산엔 늦게 집 지어 좋은 경치를 찾고 / 龍門晩築探奇勝
양자산 선방에선 옛 친구들을 만났도다 / 楊子禪房訪舊游
한 돛대 저어 가면 앞길이 트일 것인데 / 一棹開來前路易
미진에서 누가 또 부질없이 배를 부르랴 / 迷津誰復謾招舟
속세는 이 마음 구하는 데 방해가 되기에 / 囂塵妨却此心求
늘 텅 빈 숲 향해 그윽한 경치 사랑하노라 / 每向虛林愛境幽
빽빽한 숲 그늘 곁엔 작은 폭포 소리 들리고 / 密樹陰邊聆細瀑
묵은 등넝쿨 얽힌 곳은 바로 높은 언덕일세 / 古藤圓處識高丘
제공은 나이 많아 연소자를 뒤따르고 / 諸公老去隨年少
석존불은 늦봄에 나그네 노는 걸 좋아하네 / 尊佛春殘喜客游
삼십 년 이래 이곳을 거듭 온 나그네는 / 三十年來重到客
아직도 고해의 한 외로운 배의 신세로세 / 猶然苦海一孤舟
산문을 나가다[出山門] 열초(정약용)
산루를 내려올 적마다 마음 쓸쓸하여라 / 每下山樓意悄然
어느 해에나 다시 올지 알 수가 없는데 / 不知重到定何年
사랑스러워라 이 콸콸 흐르는 계곡의 물은 / 愛玆㶁㶁雲溪水
십 리를 따라와서 들판으로 들어가누나 / 十里相隨到野田
천진암 터는 남종삼 요한 성인의 후손 남상철(南相喆, 프란치스코)가 발견하고 1962년 11월부터 1963년 1월호까지 경향잡지에 기고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에 의하면 절터가 5000에서 6000여평 규모로 꽤나 큰 절로 보인다.
천진암은 주어사(走魚寺, 현 경기도 여주시 산북면 하품리 소재)와 함께 당시 남인계를 이끌고 있던 녹암 권철신(암브로시오)이 강학을 열었다. 강학에 참여하였던 대표적인 사람들은 정약전, 김원성, 권상학, 이총억 등이었다. 그들의 강학 내용은 유교 경전이었고 강학을 참여한 모든 이들은 권철신의 지도에 따라 아침 일찍 일어나 빙천(氷泉)에 세수하고 의관을 정제한 다음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외우고, 아침에 경제잠(敬齊箴), 낮에는 사물잠(四勿箴), 저녁엔 (西銘)을 외웠다. 1779년 겨울 강학에는 광암 이벽(세례자 요한)이 강학의 소식을 듣고 깊은 밤 눈 속을 뚫고 산을 넘어와(雪中夜至) 참석하여 밤을 새워 담론(談論)을 펼쳤다. 이 강학에서 천주교 신앙을 포함한 서학이 본격적으로 연구 ․ 토론되었다. 다블뤼 주교는 이 1779년 강학에서 하늘 ․ 세상 ․ 인생 등에 관한 문제와 그에 대한 기존 학자들의 모든 의견, 성현들의 윤리서, 철학 ․ 수학 ․ 종교와 관련된 서학서 등이 연구 ․ 토론되었다고 기술하였다. 특히 서양의 과학 서적에 들어 있는 천주 교리의 초보적 이론, 즉 하느님의 존재와 섭리, 영혼의 신령성과 불멸성, 칠죄종을 극복하는 칠극(七克)의 내용 등이 연구되었으며, 참석자들은 이후 천주 교리의 이치를 어렴풋이 느끼고 기도 행위와 하느님 공경, 묵상 행위와 재를 실천해 나간 것처럼 설명하였다. 이 1779년 강학의 장소에 대해서는 천진암설과 주어사설이 있으나 천진암설이 맞다고 보고 이곳을 성지로 개발하게 되었다. 천진암은 이벽이 독서하던 곳으로 정약용(요한)은 유배에서 풀린 뒤 그곳을 찾아가 이벽을 회상하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3. 천진암 성지의 개발
천진암 성지 개발은 1975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신장본당 주임이었던 변기영 베드로 몬시뇰이 천진암을 답사하여 천진암터를 확인한 후 한국천주교회의 발상지로 보고 개발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한국 천주교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하느님의 종 광암이벽 세례자 요한과 권철신 암브오시오,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이승훈 베드로,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묘지를 찾아 이곳에 이장하여 모심으로써 창립성조 묘역을 조성하였다. 묘지 조성경위는 다음과 같다.
* 하느님의 종 이승훈 베드로의 묘 이장
1981년 11월 28일 인천시 만수동에 있던 이승훈의 묘를 이장
* 하느님의 종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묘 이장
하느님의 종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유해는 순교 후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하산곡리 윗배 알미 검단산 밑에 모졌다가 후손들에 의해 경기도 시흥군 반월면 사사리로 옮겨 모셔졌었 고, 다시 1981년 11월 1일 천진암으로 이장.
* 하느님의 종 권철신 암브로시오와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묘 이장
1981년 11월 21일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이장
* 성 정하상 바오로의 묘 이장과 조선교구설립자 묘역 조성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하산곡리 윗배알미 검단산 밑에 있었는데 무덤이 훼손, 소각되는 변고가 10월 26일에 일어났다. 후에 이를 인지한 천진암 성지 측에서 11 월 9일에 흩어 진 치아, 발가락뼈와 관조각 등을 수습하여, 천진암 성지로 옮겨, 1981. 12. 31에 안장하 여 모시고 유진길 아우구티노 성인의 가묘를 조성하여 조선교구 설립자 묘역을 조성하였다.
* 정하상 바오로 성인의 유골 수습과 묘역 안치에 관한 진실
김학렬 신부(2013.11.26)
1. 천진암성지에는 정하상 바오로 성인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성인의 아버지 정약종 아오스딩 순교자의 묘도, 고모부인 이승훈 베드로와, 큰어머니의 바로 아래 남동생 이벽 세례자 요한 순교자, 성인의 어머니 유조이 세실리아 성녀(父 柳恒命)의 외가쪽으로 연결되는 권철신, 권일신 등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들 5분의 묘를 모두 이장하여 모시고 있다 (달레 중 90 - 정하상의 친척으로 북경여행을 도운 권 천례 데레사와 조숙 베드로 동정부부; 달레 중 88 -정하상이 조동섬을 찾아 무산까지 가서 공부하게 된 이유도 바로 친척관계였기 때문이다). 정하상 성인의 삼촌 정약전 바오로의 묘도 천진암에 이장하여 모셔져 있고, 할아버지 정재원, 증조 할아버지 정지해의 묘도, 큰어머니이면서 이벽성조의 누님이며 황사영의 장모가 되는 경주이씨의 묘도 충주 하담에서 이장하여 모시고 있어, 정하상 성인의 가족들 대부분의 묘가 천진암성지에 모셔져 있다. 그러므로 한국천주교회가 시작되고,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들의 정신이 그대로 살아 있고, 이분들의 유적이 남아있는 곳이 바로 천진암성지다.
2. 성 정하상 바오로의 어머니인 성녀 유조이 세실리아 쪽의 집안도 훌륭한 신앙의 계보를 갖고 있으니, 세실리아 성녀의 외가쪽 6촌 오라버니가 바로 조동섬 유스티노이다. 조동섬은 권일신과 함께, 초기박해로 이벽 세례자 요한이 1785년에 순교함으로써 움추려든 교회를 추스르기 위하여, 용문산 절에 들어가 일주일 동안 피정을 하면서, 교회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러한 연고로 정하상은 조동섬의 귀양지인 함경도 무산을 찾아 학문을 연마하였던 것이고, 이런 학문적 기초가 《上宰相書》라는 호교론을 쓸 수 있게 만든 것이다. 동정부부로 15년 이상을 산 조숙 베드로와 권천례 데레사도 조동섬 집안이기에, 친척인 정하상의 북경왕래를 도우며 열심히 보필을 하게 된 것이다.
3. 1981년 10월 18일(일)에, 여의도에서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행사가 있었다. 무서운 인내와 신앙의 열정으로 북경을 수차례 왕래하던, 정하상 성인의 노력으로 1831년 9월 9일에 조선교구가 설립되었던 것이다. 조선교구설립 후 8년, 기해박해로 1839년에 순교하신 정하상 성인은 마재 건너 팔당댐 옆에, 아버지 정약종 아오스딩 곁에 묻혀계셨다.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을 맞아, 수원교구와 천진암 성지에서는 이분들의 무덤을 확인하였고, 이내 천진암 성지 구내로 창립선조들과 함께 이장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천진암 성지를 반대하는 교회 안팎의 훼방으로 이장을 하지 못하고 있던 중, 모 변호사의 별장 내에 있던 무덤이 훼손, 소각되는 변고가 10월 26일에 일어나고 말았다. 후에 이를 인지한 천진암 성지 측에서 11월 9일에 흩어진 치아, 발가락뼈와 관조각 등을 수습하여, 천진암 성지로 옮겨, 조선교구 설립자 묘역에 1981. 12. 31.에 정중히 안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교회내의 훼방꾼들은 성 정하상 바오로의 무덤을 그 후에도 한 번도 참배하러 오지 않았다. (월보 천진암 부록, 1982. 1. 15. 참조)
* 1982년: 1790년대의 최초 한글번역 천주교서적(성경광익, 신명초행, 성상경 등)
수필본 45권 발견 입수
(권철신 방계 8대 후손 안동 권씨 권광수씨 집에서).
* 1987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선조 직계 가족 묘역 조성
충주에 있던 정약종의 형님 정약전 부부, 부모 정재원 부부, 조부모 정지해 부부,
광암 이벽의 누이이며 정약현의 첫째부인 경주 이씨, 동생 이석 부부의 묘.
이분들은 광암 이벽의 묘 발굴 당시 함께 발굴된 부모 이부만과 청주한씨 동생 이석과 부인 양천 허씨, 누이이며 약현의 첫 부인이고 정난주(황사영 부인), 난수(홍재영의 부인)의 모친인 이씨가 이장 되어 모셔져 있다. 또한 충북 중원군 금가면 화담리 하소부락 정씨 선산에 모셔져 있었던 정약종의 가족 즉 정약전, 부인 풍산홍씨, 부모 정재원과 의령남씨, 해남 윤씨 삼합장, 조부 정지해와 풍산홍씨이다.
4.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성조 하느님의 종들의 전기
1.1 하느님의 종 광암 이벽 세례자 요한
1) 하느님의 종 광암 이벽 세례자 요한
경주 이씨 가문으로 8척 장신의 수려한 풍채를 지닌 남인 학자로서, 지퇴당 이정형과 소현세자의 스승 이경상의 후손이다. 1754년 경기도에서 출생하였으나 출생지에 대하여는 두 지역설이 있다. 즉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와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배알미리이다. 이름은 벽(蘗), 자는 덕조(德操), 호는 광암(曠庵)이다. 조부는 무반으로 이름이 났었고, 부친 이부만공은 관직에 나간 일은 없으나 그의 손자 현직으로 인하여 무병사부관으로 추종되었다. 92세의 장수. 형 格과 아우 晳 역시 무관으로 당대 무반가였다. 안동권씨 가문의 권엄의 딸 유한당 권씨와 혼인하였다. 유한당 권씨는 “언행실록”을 남겼으나 슬하의 자식을 두지 못하고 일찍 병사 하였다.
다시 해주정씨와 혼인하여 아들 현모(갑진-정미)를 두었다. 현모는 아들 병영과 딸을 두었다. 이벽 선생께서 순교하신 후 해주 정씨와 아들 현모는 횡성의 샘밭에 숨어 살았다. 그분들은 스스로 “샘밭이가”라 부르며 살았다. 그분의 세례명은 세례자 요한이었다.
경주이씨국당공파세보 권지1(문정공파,2001년판) P25 지퇴당 李廷馨(26세손), P45
黙庵 李慶相(28세손),권3P444 조부(祖父) 건(鍵), 부(父) 竹下 李溥萬, 격(현대, 顯稷 생부 稶, 鶴榮 생부 현직, 현철), 벽(顯謨, 秉榮, 龜榮 생부 顯昌) 석(P619 - 顯夔生父 懋)
2). 광암 이벽의 진리와의 만남
부친 부만의 무과(武科) 권유와 기대와는 달리 진리 탐구에 열정적이고, 경학(經學)에 뜻을 둔 선비로서 당대 유학의 석학들과 교류하면서 학문의 깊이를 더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정신적 재능이 빛났으며 그의 언변은 기세 좋게 흐르는 강물에 비할 수 있었다. 모든 문제를 연구하고 파고들었으며 그 나라의 경서를 배울 때에도 어려서부터 문장 속에 숨은 신비스러운 뜻을 탐구하려는 습성이 있었다. 그의 행동거지는 무엇인가 고상하고 위대한 기풍을 풍기고 있었고, 이 훌륭한 소질이 그에게 이 세상에서 훌륭한 장래를 약속하고 있었는데 그 때 하느님께서는 인자로운 시선을 그에게 던지셨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천주교 교리를 깊이 연구하고 토론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달레 교회사)
다산 정약용도 《중용강의보》에서 그분의 학문과 덕의 경지를
“진덕박학(進德博學)”하다고 평.
3). 구원의 체험
강학회와 교리연구: 천진암, 주어사 강학(1779혹 1777, 雪中夜至, 張燭談經)
권철신과 그 문우들의 강학회에서
새벽에 일어나 얼음을 깨고 냉수로 세수하고 주자의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외우고, 해가 뜨면 경제잠(敬齊箴),정오에는 사물잠(四勿箴)을 저녁에는 서명(西銘)을 외움.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은 마지막 10圖로써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밤늦게 잠들 때까지 하루 일과에서 명심해야할 잠언‘이란 의미이다.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숙야잠)
근본이 서면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고, 옷을 입고 관을 쓰고 단정하게 앉아 형체를 단속한다. 이 마음을 거두어 들이면 떠오르는 태양처럼 밝으며, 엄숙한 자세로 가지런히 하면 텅비고 밝으며 고요하고 전일하게 된다. 밝은 천명은 빚나나니 항상조목하여 살필지어다. 일에 응함이 이미 끝나면 나는 이전과 같이 되나니 마음이 깊고 고요하여 정신은 모이고 생각은 쉬게 된다.
‘경제잠’(敬齊箴)
의관은 바르게 입고 눈의 시선은 존경스럽게 가지도록 하며, 어디서나 거하는 곳에서는 마음을 푹 가라앉혀서 침착하고 고요히 하며 상제를 대하여 뵙기 위하여서는 모든 것을 뛰어 넘고 초월하도록 하며(潛心以居對越上帝)
발자욱은 반드시 신중하게 무겁게 떼어 놓고 손놀림은 반드시 공경스럽고 공손하게 가지며 땅은 잘 가려서 밟도록 하고, 대문을 나설 때는 손님이 남의 집에서 나갈 때 하듯이 조심하며 일거리를 당해서는 제사에 임하듯 하며 항상 삼가고 조심하여 전전긍긍하며 입은 물병 아구리 막듯 잘 지키도록 하고, 분심잡념 같은 여러 가지 생각이나 생겨나는 뜻을 막기를 성을 막 듯하며, 서쪽을 가지고 동쪽이라 하지 말고 북쪽을 남쪽으로 삼거나 여기지 말라.
‘사물잠’(四勿箴)
하늘을 아버지라 하고 땅을 어머니라고 한다. 나라는 존재는 바로 이 땅과 하늘 사이에서 서로 혼합된 가운데 있게 된 것이므로 하늘과 땅이 닿아서 막힌 것이 바로 나의 몸이고, 또 하늘과 땅의 다스리는 통수라고 하는 것이 바로 나의 본성이다. 그러니 만인이 모두 다 나와 한 뱃속에서 나온 동포이며 만물이 모두 다 나와 더불어 한 가지로 있는 동질적인 것이로다.
‘서명’(西銘):
정자(程子)가 말하길 ‘서명은 인(仁)의 몸체이다 그리고 가득 채워져 모두 다 얻었을 때에 성인(聖人)이 된다’ 하였다.
건(乾)은 하늘이며 아버지라 일컫고 곤(坤)은 땅으로 어머니라 일컫는다.
나의 이 작은 몸은 아버지와 어머니 가운데에 태어나 있으며
하늘과 땅 사이에 스승인 것은 나의 마음인 성이다.
민중과 나는 한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친형제와 같으며
만물과 나는 모두 더불어 함께하는 친구이다.
대군이라 하는 것은 우리 부모의 근본의 아들이고
대신은 종자의 집안을 다스리는 집사이다.
나이 많은 어른을 존경할 때는 자기 어버이를 모시듯이 존중하고
외롭고 약한 이를 돌볼 때는 자기 아이를 돌보듯이 사랑하느니라.
성인은 하늘과 땅의 덕을 합하는 사람이고, 현자는 덕에 보통사람보다 뛰어난 사람이다.
무릇 하늘 아래 병들어 폐쇄된 사람과 손발이 없는 불구자
자손이 없는 사람과 홀아비 과부 등과 같은 사람들도 전부다가 나의 형제들로서
팽개칠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은 의지할 곳 없으며 하소연할 데 없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보호해 주어야 하며 그러한 자식들을 돌보아 주어야 한다. 또한 즐겁게 해주고 근심이 없도록 해주는 사람이 진정 효도하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이를 어기는 사람을 패덕,
이런 어진 베품을 해치는 사람을 도적이라 한다.
악한 사람을 구하지 못하는 것을 재주가 모자라는 사람이라 하고
성현의 행동대로 하늘의 이치를 실천하면 하늘을 닮은 사람이라고 한다.
성현의 말씀들을 응용하고 따르고 변화할 줄 알 면은 그 사실들을 선한 쪽으로
저술할 수 있으며, 하늘의 이치를 궁리하여 알 면은
그 뜻하는 바를 선한 쪽으로 이어갈 수 있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도 부끄러움이 없으며 더럽힘이 없는 행위를 하게 된다.
마음속에 하늘이 준 선한 성품을 기르고 가지고 있으면
게으름이 아닌 행위를 할 수 있다.
술은 사람의 본성을 어지럽히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이니, 우왕의 아버지는 송국의 백작으로 봉하여 졌으므로 송국의 아들인 우왕은 이러한 술의 나쁜점을 되돌아 보고 술을 끊어 영재를 양육하여 이 영재들 중 훌륭한 사람에게 지방을 다스리게 하였다.
마음을 놓지 않고 힘써 공경하여 저 밑에서부터 힘써서 기쁘게 한 것은 순임금의 지극한 효도의 공이다.
헌공이 도망하지 않고 차라리 죽기를 기다린 것은 신생의 공순함이었다.
부모에게 받은 몸을 온전히 보존하여 사람은 증자의 본명이 삼인 증삼이니라.
용기 있게 결단하여 부모의 말씀을 따른 이는 백기였다.
부하고 귀하며 복이 있고 윤택한 것은 내 삶에 후덕함을 주는 것이며
가난하고 근심스럽고 슬픈 것은 나를 단련하여 옥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모든 일에 순리에 따르게 된다면 내가 죽음에 이르러서는 편안해질 것이니라.
이벽 선생님은 학풍을 같이 했던 사람들과 강학을 통하여
만물의 창조자이시고 주재자이신 하느님을 믿고 전하였다.
이승훈의 문집 《만천유고》에 실려 있는 가사들
광암 이벽의 《천주공경가》(천주가사 자료집, 김영수 엮음)
天主恭敬歌 己亥年(1779년) 臘月(섣달) 走魚寺 李曠菴檗作歌
어와세상 벗님네야 이내 말씀들어보소 집안에는 어른있고 나라에는 임금있네
내몸에는 영혼있고 하늘에는 천주있네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는 충성하세
삼강오륜 지켜가자 천주공경 으뜸일세 이내몸은 죽어져도 영혼남아 영원하리
인륜도덕 천주공경 인륜도덕 모르면은 살아서는 목석이요 죽어서는 지옥이라
천주있다 알고서도 불사공경 하지마소 알고서도 아니하면 죄만점점 쌓인다네
죄짓고서 두려운자 천주없다 시비마소 아비없는 자식봤나 양지 없는 음지봤나
임금용안 못뵈었다 나라백성 아니던가 천당지옥 가보았나 세상사람 시비마소
있는천당 모른선비 천당없다 어이아노 시비마소 천주공경 믿어보고 깨달으면
영원무궁 영광일세 영원무궁 영광일세
《십계명가》
己亥臘月 於主魚寺 講論後 丁選庵 權公相學 李公寵億 作歌寄之 李曠菴檗作歌
세상사람 선비님네 이 아니 우수운가 사람나자 한평생의 무슨귀신 그리많노
아침저녁 종일토록 합장배례 주님외고 있는 돈 귀한재물 던져주고 바쳐주고
자고깨자 행신엄동 각개귀신 모셔봐도 허망하다 마귀귀신 우매한고 사람드라
허위허례 마귀귀신 믿지말고 천주믿세 하늘위에 계신천주 벌레같은 우리보소
광대무한 이우주에 인간목숨 내여주셔 지혜지각 깨달으며 우주섭리 알고나면
천주은혜 밝은빛을 무궁토록 받을련가 사람지혜 우둔하여 꼭두각시 나무신막
외고우러 복받드냐 절한다고 효자되냐 잘되어서 저복이라 못되어서 남탓이랴
죄짓고서 우는자야 천지신명 왜찾나뇨 가난하여 굶주린자 조물주란 왜찾느냐
음양태극 선비님네 상재상선 왜논하뇨 말이닐러 말라시대 이모두가 천주시네
천주일러 거룩하사 다고말고 논치마소 금수갈길 져인고로 사람갈길 따로있네
곤경한자 비지말고 가르침을 깨쳐보세 일곱날을 엿새같은 근면노력 다하고서
일곱째날 고요히 천주공경 하여보세 갑논을박 쉬지않고 논쟁구궐 무용일세
천지고금 만물지사 부모효도 으뜸일세 부모은혜 모르고서 불효자식 되고지면
죄중에서 제일크고 죽음후에 지옥가네 하늘같이 넓은대지 부모정이 일컬으면
인간금수 초목만물 그아버지 천주일세 부모효도 알고지면 쳔주공경 알고지고
영원불멸 큰 은혜 하시필경 얻어지네.
* 1783년 동료 이승훈이 부친을 따라 사신 행차 길에 북경을 간다하는 말을 듣고 그를 찾 아가 부탁하기를
1) 자네가 북경에 가는 것은 참된 교리를 알라고,
하늘이 우리에게 주시는 훌륭한 기회일세.
2) 참 성인들이 교리와 만물의 창조주이신 천주를 공경하는 참다운 방식은
서양인들에게서 가장 높은 지경에 이르렀네.
3) 그 도리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4) 그것이 없이는 자기 마음과 자기 성격을 바로 잡지 못하네.
5) 그것이 아니면 임금들과 백성들의 서로 다른 본분을 어떻게 알겠는가.
6) 그것이 없으면 생활의 기초가 되는 규칙도 없네.
7) 그것이 아니면 천지창조, 남북극 원리며 규칙적인 운행을 우리는 알 수가 없네.
8) 그리고 천사와 악신의 구별, 이 세상의 시작과 종말,
9) 선인은 천당에서 상을 받고 악인은 지옥에서 벌을 받는 것.
이 모든 것도 우리는 알 수가 없네.
“자네가 북경에 가게 된 것은
천주께서 우리나라를 불쌍히 여기사 구원코자하시는 표적일세.
북경에 가거든 즉시 천주당을 찾아가서 서양인 학자들과 상의하며 모든 것을 물어보고, 그들과 교리를 깊이 파고들어, 그 종교의 모든 예배행위를 자세히 알아보고, 필요한 서적들을 가져오게. 삶과 죽음의 큰 문제가 자네 손에 있으니, 가서 무엇보다도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게.”(황사영 백서, 달레 교회사 상)
탈출기2, 23 - 이스라엘 자손들은 고역에 짓눌려 탄식하여 울부짖었다....고역에 짓눌려 청하는 그들의 소리가 하느님께 올라갔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셨다.
4). 머무름(부르심에 대한 자각과 응답)
이벽은 이승훈이 돌아오기를 날을 세어가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벽은 이승훈이 가져온 서적을 받아 독서와 묵상에 전념을 위하여 칩거: 수표교
《성교요지》: 49절의 한시, 시마다 각주, 묵상노트-천학초함을 읽고 지음
교우들은 한글로 필사하여 읽고 기도함.
《천학초함》. 서양 선교사들이 저술한 서학서를 체계적으로 모아 간행한 총서.
. 理篇(천주교의 교리, 서양 학문, 인문 지리)
서학범, 기인십편, 교우론, 이십오언, 천주실의, 변학유독(辨學遺牘), 칠극,
영언려작(靈言蠡勺), 직방외기.
. 器篇(과학 기술)으로 편집.
진서수법, 표도설, 천문략, 간평의, 동문산지, 기하원본,
혼개통헌도설(渾蓋通憲圖說)
하느님 체험: 칠성사의 해설, 교리문답, 복음성서의 주해
매일의 성인행적과 기도서 등 묵상, 기도
* 새로운 생명이 자기 마음 속에 뚫고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이 커가고, 신앙과 더불어 자기 동포들에게 하느님의 은혜를 알려 주고자 하는 욕망도 커갔다.
5). 복음선포(사명의 수행)
(1) 말씀의 선포 - 성령으로 가득찬 선포
자기 은신처에서 나와 이승훈과 정약전, 약용 형제를 찾아가
“이것은 참으로 훌륭한 도리이고 참된 길이요. 위대하신 천주께서는 우리나라의 무수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가 그들에게 구속의 은혜에 참여케 하기를 원하시오. 이것은 천주의 명령이오. 우리는 천주의 부르심에 귀를 막고 있을 수가 없소. 천주교를 전파하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오.”
그들은 영(靈)으로 가득차서 실제로 복음을 전파하며 구원적 삶을 실천하였다.
사도들이 성령을 받고 복음을 전하듯 바오로 사도가 부르심 받아 전하는 사도가 되었듯이 이들도 그렇게 되었다.
이벽과 이가환 두 학자의 토론(3일 밤낮 지속)
“벽의 말은 분명하고 똑똑하여 사방에 빛을 던져 주었으며, 그의 논증은 태양같이 빛났고, 바람처럼 몰아치며 환도처럼 끊어냈다.
(蘗雄辯如長河 固守如鐵壁 公知不可以口舌爭 遂止不往 -다산의 정헌 묘지명)
이가환은 “이것은 眞理요, 正道다.”라고 외치며 굴복.
1코린2,4 :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히브리4,12 - 13 :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과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에페소6,12-17 : 우리의 전투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한 무장들 갖추십시오.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여러분은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2) 복음적 삶(사랑과 증거의 삶)
복음을 전하러 갈 때 말과 가마를 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걸어서 다녔으며
남녀노소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복음 말씀을 듣고 그 삶을 살도록 초대하였고 찾아 나섰다.
* 모임 장소: 1) 이벽 자신의 집에서 집회
2) 명례방 김범우 토마스의 집으로 집회 장소 이동.
* 한글번역: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과 부녀자 아이들까지 쉽게 읽고 배울 수 있도록
교리서를 한글로 번역하고 가르쳤다.
* 모든 사람을 하느님 안에 형제자매로 받아들였다. 그리스도를 맏형으로 모든 그 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형제자매임을 깨닫고, 주님께서 가르치신 사랑의 새 계명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사랑의 하느님의 삶 을 사셨다.
백승종의《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P293》: 정치 문화적 혼란 초래
조선이 천주교를 위험시한 이유: 천주교는 높고 낮은 신분에 속한 남성과 여성들이 가입된 비밀 결사였고,《정감록》과 같은 혁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상당수 끼어 있었다. 천주교 신자들은 말세를 주장했고, 구세주 또는 지인의 재림을 믿는 경향도 있었다. 더욱이 그들은 이방인들과 친교를 맺는데 그치지 않고 그들 이방인들을 정신적 지표로 삼았다.
유관검의 문초기록(사학징의,18013.28)
지금 허다하게 체포된 자는 너의 인척이나 가객이 아니면, 모두 노비들이거나 소작인들이다. 그 무리는 거의 몇 개 군에 걸쳐서 성행했다. 너의 말대로라면 이 학문을 하면 나라가 부강해지고 해마다 풍년이 들고, 나라가 평안하여 길에 떨어진 물건마져도 주어 가지지 않고, 노인은 짐을 지거나 이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그러나 당당한 儒學도 아직 이와같이 된 적이 없다. 너는 일찍이 유학을 배우지 않고 邪學의 무리한 이론을 가지고 세상을 변혁하고자 하였다. 이는 진실로 국가를 위하고 이 백성을 위하는 일이겠는가.
답하기를
“사학의 종지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를 자기와 같이 하라’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권하여 입교시키는 것은 이는 하늘나라에 오를 만한 큰 공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이나 지혜로운 사람,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힘써 모두 권유하여 바라는 바는 하늘에 오르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신부에게 보고하여 칭찬을 받거나 꾸중을 듣도록 합니다. 그 천주학도 ‘임금을 섬기고 정성을 다함’(事君盡誠)을 중히 여겨 이 세상을 태평성대에 이르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는 임금을 섬기는 도리이니 어찌 그 사이에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마태22.36-40 율법의 계명,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 중 첫째 계명은 네 마음을 다하 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둘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는 것
요한 13,34-35 : 내가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 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6). 박해와 순교
을사추조적발 사건(1785년 봄)
추조 포교들에 의해 명례방 집회가 발각되어 천주교에 대한 공적 박해가 일어남.
양반자제 훈방조치, 집주인 김범우 토마스 유배형
이벽 세례자 요한은 문중의 박해로 그해 여름 죽음을 당함.
다산 정약용은 만가《友人李德操輓歌》에서
선학이 인간 하계에 내려오니(仙鶴下人間)
그 풍채 신처럼 높이 당당하게 보이고(軒然見風神)
날갯짓 백설처럼 휘날리니(羽翮咬如雪)
닭과 오리가 미움과 시새움에 사네
우는 소리 온 세상을 진동시키고
맑고 명료하여 세속의 혼미함을 뛰어 넘었네
가을바람 타고서 홀연히 날아가 버리니
인간의 노력이 슬프고 공허하도다.
* 2013년3월4일-7일 열린 주교회의 춘계 정기총회에서
제2차 "조선 왕조 치하의 순교자" 시복 추진 안건 제목을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로 결정
* 2013년4월26일: 교황청 시성성으로부터 교령(Prot. N. 6625/10) 접수:
마산교구 예비심사 관할과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시복 안건에 대한 답서
* 2014년 추계 주교회의에서 하느님의 종 장애 없음 선포 예정
7). 첫째 부인 유한당 권씨(권엄의 딸):
《언행실록》: 천주실의, 칠극, 천학초함-언역정사
서학에 몰두했던 남인파 학자들이 천진암․ 주어사 등지에서 학문 토론을 하고 있을 때, 이들의 부녀자들은 벌써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漢文으로 된 서학서 등을 읽고 신앙생활이나 교리연구뿐만 아니라 같은 부녀자나 일반 서민대중을 위해 「천주실의」「칠극」등을 번역하고, 정서해서 부녀자들끼리 신앙을 전파하였다. 또한 자녀들을 열심히 교육하였으며 한 집안의 수많은 노비들을 가르쳐 입교시켰다.
권철신의 「유한당 권씨 언행실록(有閑堂 權氏 言行實錄)」序文
夫婦는 天地에 비길 수 있는 짝이 될 만한 것이다. 천주께서는 天地를 만드시므로써, 천지가 생겨난 후에 비로소 만물이 거기서 났듯이, 夫婦가 있은 연후에야 거기에서부터 五倫이 생겨났느니라. 즉 父子관계나 君臣의 관계나 朋友의 관계가 모두 夫婦의 인연이 된 후에 생겨났느니, 부부로부터 一家親戚들이 있게 되고, 어른아이가 있게 되었듯이, 만세에 이르는 인류의 모든 由來가 부부에게서부터 출발하였으므로, 부부는 인류의 으뜸이로다. 有閑堂 권씨께서는 見聞이 博學하시었고, 법도와 규범을 지키는 데 빼어난 모범이셨다. 이제 가장 간결하고, 합당한 글솜씨로 그 규범의 줄거리를 대강 기록하여, 책이름을「有閑堂 權氏 言行實錄」이라 하였으니, 그 내용인 즉, 도무지 비할 데 없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훈계의 말씀이로다.
무릇 일반 주부들이 이대로만 행하면 주부로서의 덕행이 충분할 것이고, 고상한 숙녀가 되어 대단히 지혜로운 부인으로서 생활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를 실천하는 주부는 자기 가정을 명문대가로 빛나게 할 것이고, 본인 자신도 천추에 그 이름이 향기롭게 전해지게할 만큼, 훌륭한 인생을 살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노라.
(1795년 음력 6월 6일 숙부 권철신 지음)
『언행실록』에 나타난 서학의식과 그 문화적 의미
㉠ 천주(天主) 용어 사용 - 텬쥬를 섬김에 그 근본 목적을 두고 서술한 점이 가장
큰 특색이다.
㉡ 實學的이고 西學的인 입장에서 서술
㉢ 실록의 대상은 → 당시의 서민 여성들
㉣ 많은 비유를 사용하였다.
㉤ 당시의 제도적, 전통적 남존여비 사상 보다 근대적인 의식에서 서술하였다.
신의와 의리와 내조의 관계를 강조함/ 남․여 동등한 인격적 관계 강조
㉥ 효도와 奉祭祀 → 효도의 으뜸가는 근본
㉦ 교육에 대한 방법이나 교육 문제 강조→자식 교육하는 법을 상세하게 서술
『언행실록』의 내용이 되는 綱目들 (유한당 권씨 언행실록 중에서)
㉠ 마음가지는 법 : 인간의 모든 기거행실의 근본이 <마음>에서 나온다. 마음은 형체도 없고 정취도 없으나 항상 복중에 근거를 삼아 은복(隱伏)하였는데 여기서 선과 악이 무상으로 출입하여 百禮의 주장이 되고 일신의 으뜸이 되며 만사의 길흉화복이나 흥망성쇠, 수요장단, 군자, 노인 같은 결단도 전부 <마음>에서 나온다.
마음 잡는 법 - 모든 욕심이 견물생심에서 나오니 부귀영화를 흠선하지 말며, 좋은 물건을 가지고자 말며, 의복, 거처, 범절을 자기 처지에 적당하고 분수에 맞도록 하며, 일시라도 마음을 풀어놓아 해태하지 말며, 삼가고 조심하여 옥을 받드는 것처럼 혹은 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하여 禮가 아닌 모든 것에서 오관을 지키는 것 등 부인은 남자보다 한층 더 주의하면 마음을 수렴할 수 있다. 이는 ‘內訓’이나 ‘女論語’ 등에서 찾기 어려운 서학적 종교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내용이다.
㉡ 용모 가지는 법 : ‘內訓’이나 ‘女論語’에서의 모든 외적 기거동작에 대한 교훈과 같음/ 일반서민 부녀들을 위해 자세하고 섬세하게 기술, 쓰는 용어도 일반 부녀자들의 언어로 씀/ 용모가 깨끗하고 현아한 부인을 연화(蓮花)에 비유함
㉢ 몸 가지는 법 : 여성의 동작과 그에 따른 예의 범절 상술/ 칠거지악과 삼종지도를 인용,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의 일상예법 및 순종(三從)지덕의 필요성 기술함
㉣ 말삼하는 법 : 화순 간결하게 하여 부허 황잡하게 말고, 들은 말과 보지 못한 말은 하지 말며, 적절한 말이라도 떠들어 하지 말고, 즐거운 말이라도 번거로이 하지 말고, 말은 적중․단정하며 온화․공손․자상하게 해야 되며, 남의 누덕(허물)을 입에 담지 말고 형제간 허물을 들추어 내지 말며, 지친간 험담을 舅姑와 가장에게 전해 정의를 상케 말며, 비복배의 전언을 곧이듣지 말아 옮기지 못하게 거절할 것이니 어진 부인은 내 집에 당한 일만 듣고 그 외 일은 말하지 아니할 것이다.
이 장에는 ‘텬쥬’라는 용어가 나옴이 특징이다. 공자나 성현들 대신 ‘천주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예)...흉한 말은 옮기지 말고 좋은 말만 전주하며...비와 바람을 탓하지 말며 일월성신을 원망치 말며 의건(衣巾)을 정제하고 천주를 공경할지니라.
㉤ 기거하는 법 : 부모와 윗사람을 대할 때 부녀자로서 지켜야 되는 일상 예규를 자세하게 교훈
㉥ 居家하는 법 : 家母가 되는 부인이 집에 거취하면서 행해야 되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몸가짐과 예법/ ‘천주 말씀에 일으시되 한집 계교는 화순한대 있고, 일생계교는 부즈런한대 있고 일년계교는 봄에 있고 하로계교는 새벽에 있다 하셨나니라’ 고 함으로써 부인들의 게으름을 경계하였다.
㉦ 처녀의 修身하는 법 : 보옥을 갑(상자)에 넣어 감추어 둔 것과 같이 남이 알지 못하게 고귀하게 다루라는 교훈/ 육체와 아울러 정신과 마음가지는 법과 어른들을 공경하는 법을 동시에 강조함
㉧ 출가하는 법 : 출가할 때의 여러 예절 설명, 혼인의 중대함과, 평등한 부부간의 信義를 강조함
㉨ 가장 섬기는 법 : 여논어의 사부장(事夫章), 내훈의 부부절(夫婦節)과 동일하게 교훈하되 부인들의 내조, 즉 부모 섬김, 동기간 우애와 친척간 화목 도모, 가장의 덕행과 정의를 돕도록 강조함.
㉩ 부모와 구고(舅姑) 섬기는 법 : 성효(誠孝)로 부모를 섬기되, 의식주의 부족함이 없이 해 드리고, 시부모를 정성되이 모시며, 재산 사용시 허락을 얻고, 부모가 재산을 마음대로 쓸 수 있도록 하며, 부모의 친척과 친구를 때로 청하여 대접하고, 좋은 것은 먼저 대접하고, 늙은 부모를 적막하게 홀로 버려 두지 말며 자녀들과 함께 방문토록 하고, 병중의 부모를 극진히 간호하라 함. 아울러 서모와 계모일지라도 잘 대접하라 함.
㉪ 자식 교육하는 법 : 자식을 귀중히 여겨 사랑할 줄만 알고 옳은 도리를 가르치지 못하면 안 된다 하며, 교육-어른과 손님 섬김, 검소한 의복, 7세 이후 부모 앞에서의 진퇴법, 명령에 순종함, 아침저녁 청소, 못된 장난과 상스러운 말 옮기지 못하게 함 등-의 필요성 강조/언행실록 고유내용
㉫ 자부 교훈하는 법 : 친정집과 다른 시댁의 가칙(家則)을 배우도록 하고, 고부간 성격이 다르면 자신의 성격을 억제하며, 온화한 말로 자부를 교훈하고, 종친들에게 며느리 흉을 보지 말며, 미련한 며느리는 잘 교훈하되 칭찬하는 법으로 교육하라고 제시함 - 이는 언행실록에만 나오는 내용
조선 후기 사회에서 서학 신도들의 여성관 및 부부관이 바로 이 『언행실록』 서문 첫 절에 나타나 있는데, “부부는 천지와 大宇라, 천주가 천지를 만드시고 천지 있은 후 만물이 나고 부부 있은 후 五倫이 났나니 父子君臣과 朋友가 부부로부터 나고 一家具族과 長幼가 다 부부로부터 나고 만세 자손까지 다 말미암아 났나니 인륜에 으뜸이다”라고 함이 그것이다.
8). 샘밭이씨 - 둘째 부인 해주 정씨와 아들 병모
강원도 횡성의 샘밭으로 이주하여 숨어서 신앙생활을 함.
1.2 하느님의 종 이승훈 베드로(만천(蔓川). 1756 - 1801. 4. 8 서소문)
1) 영세 입교까지
평창 이씨 집안 이동욱을 부친으로 여흥(여주)이씨 이가환의 누이를 모친으로 만초천(蔓草川) 지금의 서울 중림동에서 출생했다, 24세(1800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783년 말 경 청나라 사신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가는 부친을 따라 가서, 북경의 북천주당에서 예수회 소속 그라몽 신부에게 조선의 반석(盤石)이 되라는 의미로 ‘베드로’로 영세 입교. 부인은 나주 정씨 정약현의 여식으로 정약종, 정약용(丁若鏞)의 매부이기도 하다.
세례 받을 당시 북경 사제들은 그에게 교리적 질문 외에 국왕이 그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신앙을 버리라고 강요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지의 질문을 하였고,,
그는 서슴지 않고
“진리를 명백히 아는 이 종교를 버리기 보다는 차라리 모든 형벌과 죽음까지도 감수하겠다”고 대답하고
복음이 가르치는 정결(貞潔)에 대하여 여러 여자를 데리고 사는 것을 용인치 않는다는 것도 알려 주었더니
“법적인 아내 밖에 없고 또 다른 여자를 결코 얻지 않겠다.” 대답하였다.
부친에게 세례 받는 것을 허락 받아 오라는 요청에
부친으로부터 세례를 받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 왔다.
세례 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면 인간의 공명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시골로 물러가 자기 구령에만 전력하고자 한다.” 고 말하였다.
또한 해마다 북경 사제들에게 “ 소식을 전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서양 사람들을 그 나라에 불러들이기를 제청(提請)하겠다. 고 약속하였다.
(방따봉 신부의 서한 중에서)
2) 입교 후 활동
* 북경에서 돌아올 때: 교회 서적과 성물 등을 가져옴.
11월 3일 이승훈, 권일신 문초 중 홍낙안에게 정원이 물어서 아뢴 말
“대간의 신하가 말하기 어렵다고 한다면 신이 그것을 진술해 볼까 합니다. 간행하는 것은 오히려 여사에 불과합니다. 대개 그 아버지의 사행(使行)에 따라가 수백 권의 사서(邪書)를 널리 가져와 젊고 가르칠 만한 사람들을 가르친 자가 있으니, 바로 평택현감 이승훈이 그 사람입니다. 신은 이승훈과 본래 사이가 좋았지만, 이 일이 있은 뒤로는 사사로운 원수처럼 미워했습니다.....책을 간행했는지의 여부를 이승훈이 절대 모를 리가 없습니다.”
* 이승훈이 가져왔다고 생각되는 서적들
(1) 교리서:
알레니의 《회죄직지(悔罪直指)》 《척죄정규(滌罪正規)》 《미사제의(彌撒祭儀)》
브글리오의 《칠성사예전(七聖事禮典)》 《미사경전(彌撒經典)》
《모예 신부의 《성세규의(聖洗規儀)》
《고해원의(告解原義)》 《성교절요(聖敎切要)》 《성사요리(聖事要理》)
(2) 교리문답서
성교해략(聖敎解略)》 《성교문답(聖敎問答)》 《성교요리(聖敎要理)》
(3) 복음서 주해서들
《성경직해(聖經直解)》 《성경광익(聖經廣益)》
(4) 매일 성인전
페레이라 신부의 《주년주보성인단(周年主保聖人單)》
마이야 신부의 《성년광익(聖年廣益)》
* 이승훈 베드로는 북경에서 돌아온 후 이벽, 정약전, 정약용, 권일신 등에게 세례 를 베풀어 교회 공동체(1784영 9월) 형성.
* 교회 서적 연구와 신앙 실천:
* 1785년 을사추조적발 사건으로 문중 박해를 받음. - 분서(焚書), 벽이문(闢夷文)
* 1786년 배교를 뉘우치고 가성직자단을 구성 성사집전: 세례, 견진, 열 명의 사제 임명 - 세례와 견진, 고해성사 등을 집전
* 1787년 정미 반회보 사건: -이승훈베드로와 정약용 요한인 강이원 등과 함께 공부한다는 핑계로 반촌(혜화동)에 있는 김석태의 집에서 모여 천주교 서적을 강습하였다. 이것을 척사의 입장에 있던 이기경이 알게 되어 소문을 퍼트렸고 이를 홍낙안이 척사 대책론의 책사를 올렸다. 또한 이는 척사의 여론을 일으키는데 일조하였다.
* 1787년 ‘감제(柑製)’에서 ‘한분유사(漢枌楡社)’란 과목이 붙자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천주 외의 다른 신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으며 그런 것에 대한 글을 지어도 역시 대죄가 된다.”고 하면서 한 글귀도 짓지 않았다.”(이만채, 벽위편)
* 감제(柑製): 임금이 해마다 제주도 진상 귤을 성균관및 사학(四學)의 유생들에게 내리고 거행하는 과거.
* 한분유사(漢枌楡社): 한고조가 그의 고향인 풍(豊)에 느릅나무로 사신(社神)을 삼은데서 온 말.
* 1789년 겨울 밀사 윤유일 바오로를 북경에 파견 - 북경 주교님께 보내는 편지.
* 1790년 음사로 의금부 도사, 1791년 서부도사로, 6월 24일 평택현감으로 등용(음직) - 정약용(1789년) 등과(登科), 홍낙민(1789년) 등과(登科)
* 1790년 조상제사 금지 문제로 다시 혼란을 겪고
* 1791년 진산 사건으로 인하여 신해 박해 발생 - 평택현감(삭탈관직)
* 1794년 양구 현감으로 제수.
* 1795년 주문모 신부 밀입국 발각(유배형- 예산), 이가환(충주목사), 정약용(금정찰방)
*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3월 22일 이가환, 정약용, 홍낙민 등과 함께 체포
4월 8일 정약종 홍낙민, 최창현, 홍교만, 최필공과 함께 서소문에서 순교.
* 형장에 끌려가면서 동생 이치훈에게 月落在天 水上地震 유시 남김.
* 문집 : 《만천유고(蔓川遺稿)》
* 아들 이신규, 손자 이재의 토마스는 1866년 순교
* 증손 이연구와 이균구는 1871년 순교.
* 7대손 이석태 신부(서울대교구)
* 2013년 제2차 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시복시성 하느님의 종 133위에 오름.
4) 이 베드로가 북당의 선교사들에게 보낸 편지
(1789년 말경 쓰여진 편지)
저 이 베드로가 땅에 엎드려 가슴을 치오니, 이 몸을 불쌍히 여기소서. 제가 성세성사를 받았던 1784년 봄 이후에 있었던 일에 대하여 신부님들 앞에서 통회하는 바입니다.
저는 실로 엄청난 죄를 지었으니, 저는 하느님의 은총을 완전히 저버린 채 제 발로 마귀의 종이 되어, 성사를 집전하는 일까지 손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의 영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영혼까지 잃도록 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제가 저지른 모든 죄 중에서 가장 큰 죄인 것입니다. 아! 저를 용서해 줄 곳이 이 세상 어느 한 구석엔들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저를 기꺼이 기다려 주신 저 무한한 자비에 손을 내밀지 않으면 제가 어디에 도움을 청할 수 있겠습니까? 이 모든 것을 생각해 보면 두려움이 뼈 속까지 스며들면서도 동시에 감사하는 마음이 끝없이 솟아나오게 됩니다. 신부님들도 그동안 제가 어떤 죄들을 지었으며 이 새로운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를 낱낱이 듣게 되면, 신부님들도 어쩔 수 없이 하느님께 저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청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제가 새롭게 다시 살아갈 수 있는지 그 확실한 길을 제에게 가르쳐 주시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주시는 것은 비단 저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천여 명에 이르는 저의 동료들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랍니다. 그들은 성교회의 본분을 다하고 있으면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한 채 자신들이 지은 죄 때문에 크게 낙담하고 있으며, 어디에서 빛을 찾을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하여 어두움 속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게다가 신부님들까지 없어서 고해성사도 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라서 저의 동료 천주교 신자들은 끝없는 불안 속에서 살고 있답니다.
저희들도 구속의 은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 그 은혜를 저희들도 받을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니 신부님들이시여, 저희가 얼마나 큰 고통과 슬픔 속에서 살고 있는지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부디 난파되어 곧 물에 빠져 죽을 지경에 이른 저희들의 손을 뿌리치지 마시고 저희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쳐 주시옵소서. 이제 제가 지은 죄들이 어떤 것이며 저희 새로운 천주교 신자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1. 제가 세례를 받았을 당시 저는 마땅히 알고 있어야 할 사항에 대하여 피상적으로밖에 알지 못하였는데, 그렇다면 제가 받은 세례가 과연 유효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여기에 대한 신부님들의 지시를 기다리겠습니다.
2. 저는 물론 성교회에 입교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수학에 대해서 알고 싶은 욕망도 함께 있었습니다.
3. 예전에 제가 북경에서 우리나라로 돌아올 때 저는 상본들을 외교인들에게 맡겼다가 나중에 다시 돌려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혹시 성스러운 것을 모독한 죄를 지은 것은 아닌지요?
4. 제가 우리나라에 돌아 왔을 때, 저에게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되었던 일은 제가 갖고 온 책들을 가지고 제가 믿는 종교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저의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어떤 학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이미 예전에 우리 종교에 관한 책을 한 권 발견하고는 그 책을 여러 해 동안 열심히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으니, 그는 천주교에 관한 문제 중에서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까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신앙과 열정은 그가 알고 있는 지식보다도 더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저를 가르쳐 주기도 하고 저에게 힘을 북돋아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하느님을 잘 섬길 수 있도록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찌나 열렬하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던지, 저는 모든 사람들의 요청대로 제가 북경에서 세례를 받을 때 행해졌던 예절에 따라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박해가 터지고 만 것입니다. 저의 가족은 그 박해로 인하여 다른 어떤 가족들보다도 더 큰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저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모이게 된 형제들 모임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세례를 주는 일이 중단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저 대신 다른 두 사람이 세례를 베풀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제가 앞에서 말씀 드렸던 바로 그 학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박해로 인해 많은 고통을 당하다가 체포된 지 일 년 후인 1785(1786)년 가을경에 숨을 거두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5. 천주교 신자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고해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토의를 하고자 1786년 봄에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갑은 을에게, 을은 병에게 고해를 할 수 있지만, 갑과 을이 서로 혹은 을과 병이 서로 맞고해를 하는 일은 없도록 결정하였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같은 해 가을에 다시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 모임에서 그들은 미사를 집전하고 견진성사를 주는 일을 제가 맡아 하도록 결정하였습니다. 저는 그들의 권유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열 명에게도 미사를 드릴 수 있는 권한을 주었습니다. 미사와 견진성사 예절들은 여러 책들과 시과경에 나와 있는 예절들을 따르되, 어떤 것들은 빼기도 하고 어떤 것들은 첨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도문들은 저희 기도서에 나와 있는 것 중에서 택해서 사용하였습니다.
제가 독성죄를 지었다는 사실은 1786(1787)년에 가서야 알았습니다. 1786년 봄이었는데 사제직에 임명된 열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자신이 사제직에 임명되자 ‘청 까오 이바 야오’란 책을 열심히 그리고 아주 꼼꼼하게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바로 그 책에서 제가 어떤 죄에 떨어졌는지를 모두 알아내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은 즉시 거기에 대하여 충고해 주기 위해서 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여기에 그 사람의 편지를 동봉해 드립니다. 이 얼마나 끔찍한 죄입니까? 저는 이로 인해서 뼈 속까지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저는 부랴부랴 성사가 집전되고 있는 곳에서 모두 성사 집행하는 것을 중지하도록 한 다음, 모든 천주교 신자들에게 제가 독성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6. 1784년 말 쯤에 저는 그라몽 신부님께 편지를 썼는데, 그것은 제가 그라몽 신부님께 어떤 사람을 보내니 그 사람을 통해서 책을 몇 권 보내 달라고 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제가 보냈던 사람은 음력으로 1785년 4월에 돼서야 돌아왔습니다. 그 때는 벌써 박해가 일어나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사람은 체포되었으며, 그라몽 신부님이 보내 주었던 책들과 제 편지에 대한 답장은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운 좋게도 사형 선고를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모든 통행이 엄격하게 감시를 받게 되었으며, 모든 통행인은 엄중한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저는 이번에 보내는 이 편지들도 혹시나 발각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에서, 편지들을 비단천 위에 쓴 다음 그것을 다시 목화 솜 속에다 넣은 것이랍니다. 그것은 만에 하나 제가 밀사로 파견하는 사람과 같이 가게 되는 동행인들 중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어쩌다 저의 밀사가 편지를 지녔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날에는, 저희 새로운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엄청난 박해에 직면하게 될 것은 물론 앞으로 신부님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부님들께 간곡하게 비오니, 부디 이 편지를 들고 가는 사람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온갖 사고에서 그 사람을 보호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가 신부님들의 소식을 받게 되는 행운을 누릴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신중하게 처신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에게 늘 방심하지 않도록 주의를 주셔야 할 것입니다.
1784년 이후부터 저희들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 하느님을 흠숭하는 사람들이 사방 천리에서 천여 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박해가 네다섯 군데에서 일어나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천주교 신자들을 몽둥이로 때리기도 하고 협박하기도 하는가 하면, 온갖 감언이설로 유혹하는 등 좌우간 천주교 신자들을 배교시키기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꿋꿋함과 용기를 보여준 사람들의 수가 어마어마하게 많았으니, 그 가운데도 열 명도 넘는 사람들은 피를 흘리면서까지 신앙을 증거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성공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습니다. 성사가 중단된 다음부터 저희는 마치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처럼 매일 고통과 불안 속에서 지내며 구원받을 수 있기만을 밤낮으로 갈망하였습니다. 그러니 유럽에서 오신 우리 선교사님들께 하소연하지 않으면 도대체 저희가 누구에게 소리 높여 하소연할 수 있겠습니까? 부디 저희의 이 애타는 간청을 들어 주시어, 저희를 저버리지 마시고 저희에게도 구속의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시옵소서.
신부님들께 그동안 일찍 소식을 전하지 못했던 것은 그동안 박해가 일어나 연락하고 싶어도 어려움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저희가 가난하여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구원의 원수들이 천주교 신자들을 향하여 분노를 터뜨리는 바람에 천주교 신자들은 사방팔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된데다 고해성사까지 받지 못하게 되어, 그만 처음에 지녔던 그 느긋하면서도 열정적이었던 마음을 차츰 잃어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나라들은 이미 구속의 은혜를 받아, 온 세상이 주교들과 사제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저희가 살고 있는 이 작은 땅덩어리만 구속의 은총에서 제외되어 있단 말입니까? 주님의 사제이시며 봉사자이신 신부님들 앞에 엎드려 간절히 비오니, 부디 주님께서 흘리셨던 피를 생각하시고 사도들의 모범을 따르시어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고, 죄의 무게에 짓눌려 살면서도 빠져나갈 길조차 모두 막혀 버린 이 사람들이 다시금 생기를 찾고 새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옵소서. 신부님들께 이렇게 간곡히 부탁드리옵니다.
그런데, 만에 하나 제가 신부님들과 연락한 것이 탄로라도 되는 날에는 저희 천주교 신자들은 그야말로 모두 끝장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신부님과 연락하고 지냈다는 사실은 오직 우리 천주교회 신부님들만 알고 계셔야 합니다.
5). 조선인 이 베드로가 북경에 계신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
1790년 성령 강림 축일 후 일곱 번째 주일에(7월 11일)
대죄인 이 베드로는 우리 교회의 선교사님들께 온 마음을 다하여 이 글을 올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가 엄청나게 큰 죄들을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신부님들의 답장을 받아 보는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해주시고자 자비를 베풀어 주시어 저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신부님들이 보내 주신 답장들은 온통 애정과 열성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그리고 글자 하나하나가 모두 애정과 열성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편지들을 백번 가까이 읽고 또 읽으면서도 저는 끝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가눌 수가 없었습니다.
신부님들이 보내 주신 답장을 보면 1. 신부님들은 저희들이 지은 독성죄에 대하여 조금도 꾸짖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희가 잘 몰라서 그런 것이라고 관대하게 돌려버리셨습니다. 2. 그리고 저희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저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치료 방법은 회개이므로 그 방법에 의지하라고 권유하셨습니다. 3. 또한 신부님들은 당신들께서 우리에게 마련해 주려고 하는 성사의 은혜에 저희가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 보라고 지시하셨습니다. 하지만 저희를 더욱 기쁘게 했던 것은 윤 바오로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모두가 신부님들께서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해 주신 덕분입니다. 이토록 많은 은혜를 저희들에게 베풀어 주시니, 이 감사하는 마음을 무슨 말로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사항과 관련하여 말씀드릴 것 같으면, 저희의 나약함과 저희가 지은 수많은 죄와 그리고 아직도 저희를 짓누르고 있는 인간적인 두려움을 생각해 볼 때, 회개를 한다고 해서 어찌 저희 마음이 후련해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저희는 어쨌든 간에 저희를 직접 가르쳐 주고, 좀 더 확실하게 도와 줄 수 있는 사제 한 분을 모셔야겠습니다. 그러지 않고서 어떻게 이 깊은 구렁텅이에서 저희를 다시 꺼내 줄 수 있겠습니까?
신부님들이 보내신 편지는 음력 4월에 이곳에 도착하였습니다. 모든 신자들은 신부님들의 편지를 받고서 말할 수 없이 기뻐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습니다. 그 편지는 오히려 신자들을 이전보다도 더 끔찍한 슬픔으로 몰아넣었답니다. 지금 저희가 처해 있는 상황은 마치 날이 어두워져서 당황한 여행자가 깜깜한 어두움 속에서 헤메다가 멀리 한 줄기 빛을 발견하고도 그곳에 갈 수 없는 처지에 있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저희가 처해 있는 상황을 제대로 말씀 드릴 수가 없습니다. 비유를 들어 말씀드린다 하여도 충분히 알려드릴 수가 없습니다. 저는 정말로 무슨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저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희망하고 있는지를 신부님들께 제대로 알려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기꺼이 또 다시 윤 바오로를 신부님께 보내기로 결정하였는데 그것은 신부님들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셨던 문제들을 저희가 토의한 결과를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저희가 신부님들께 말씀드리는 방법이 어쩌면 믿을 만한 것이 못되고 신부님들 마음에 썩 안 들지도 모릅니다. 부디 저희의 부족함을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윤 바오로가 출발하는 날짜가 너무나 촉박하기 때문에 저희가 미처 글로 다 쓸 수 없었던 내용들에 대해서는 윤 바오로가 직접 신부님들께 말씀드리게 될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다음 문제에 대해서는 윤 바오로가 설명하겠지만 조금 더 보충 설명을 해드려야겠습니다. 신부님들께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저의 집안이 아직 박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저 또한 아직도 자유롭지 못한 처지이지만 그래도 저는 힘닿는 대로 열심히 하느님을 섬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당연한 의무입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천주교 신자들을 돌보는 일을 책임지는 것은 현재 제가 처해 있는 상황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감히 청하오니, 부디 이 의무에서 저를 벗어나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문제에 대한 신부님들의 지시를 기다리겠습니다. 삼가 이 편지를 저희 영혼의 아버지들에게 올리오니, 부디 신부님들께서는 이 편지를 세심하게 읽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자료출처: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1.3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베리오(1742-1791.11 장독으로 순교)
1). 생애
1742년 경기도 양평군 양근면 양근리 갈산에서 시암 권암의 5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 형 철신과 함께 당대에 명망이 높은 대학자로서 정조 임금까지도 그를 존경하고 아꼈다고 알려져 있다.
1784년 가을에 이벽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전해 듣고, 그해 겨울에 이벽의 집에서 이 승훈으로부터 프란치스코 하베리오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음.
세례명을 선택함에 있어 조선의 사도를 지향하며 주보성인을 선택함.
장인 순암 안정복 - 천주교 배척과 《천학고》,《천학문답》
아들 권상문 세바스티아노, 딸 권천례 데레사, 조숙 베드로 동정 순교자.
1785년 추조적발 사건과 당당한 천주교 신앙 전달.
조동섬 유스띠노와 용문사에서 8일간의 침묵 피정 후 교회 재건에 앞장.
가성직자단을 구성. 복음적 교회 공동체를 마련하여 복음의 전국적 확산에 기여함.
1791년 체포되어 문초를 당하고 유배지(제주-예산)로 가던 중 장독으로 숨짐.
2013년 제2차 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시복시성 하느님의 종 133위에 오름.
2) 피정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네리오는 얼마동안 고요한 곳으로 물러가 있을 필요를 느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하여 그의 유일한 스승이었던 성령의 학교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하고자 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을 먼저 성화해야 한다는 것을 배워 알았었다. 이를 위하여 그는 규칙적인 피정을 할 결심을 하고 자기의 계획을 더 쉽게 실천하기 위하여 용문산에 있는 어떤 적막한 절로 들어갔다. 친구들 중에서는 오직 한사람, 조동섬 유스티노 만이 그를 따라갔다. 절에 도착하여 그들은 우리 주와 그 성인들을 본받고자 하는 원으로 머리에 떠오르는 신심수업에만전심하면서 절에서 팔일을 보냈다. 진정한 천주교 정신에 잘 맞는 이러한 실천은 그들 자신과 그들이 피정 후에 가르친 사람들을 위하여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을 얻게 하였음은 확실하다.” (달레 교회사 상,322)
3) 문초기록(정조실록) 1791,11.8-13.: 유배지 제주도 위리안치 - 16일 예산으로 변경
정조 15년 신해 (1791, 건륭56) 11월 8일(기묘)
이승훈을 삭직하고 권일신을 위리 안치시키도록 하다
형조가 아뢰기를,
“권일신이 공술하기를 ‘서양 책을 보기를 좋아해서 연전 금령이 내려지기 전에 《직방외기(職方外紀)》 등의 책을 보았는데, 그 사이에 좋은 곳도 있고 혹 좋지 않은 곳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기도 하였기 때문에 이 학술을 숭봉(崇奉)한다는 지목도 받았지만 애당초 특별히 외워 익히거나 매혹되어 빠진 일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본조(本曹)에 와서 스스로 변명한 일은 이렇습니다. 을사년 연간에 그 이름을 잊어버렸으나 김씨 성을 가진 중인(中人)이 서학(西學)을 높이 받든 일로 심문을 당할 때, 저와 김가가 서로 친한 사이이고 그때 저와 김가가 함께 《천주실의》를 보았던 까닭에 자못 여러 사람들의 지목을 받았었습니다. 그래서 모른 체하고 스스로 피하기에는 미안한 점이 있기에 과연 몸을 드러내 형조에 자수했는데, 요는 변론하여 해명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대저 그 학술은 천주(天主)를 소중하게 여기는데 그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일을 삼가하는 의리가 고서(古書)의 「어두컴컴한 새벽 남 모르는 곳이 더욱 드러나니 엄히 공경하고 경건히 두려워하라.」는 가르침과 은연중 합치되기에 그때 과연 열람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단 금법(禁法)이 반포된 뒤로는 이런 종류의 책을 보기가 매우 어려워져 일체 보지를 못했습니다.’ 하였습니다.
또 공술하기를 ‘이번에 올라올 때 대략 홍낙안의 무리가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낙안은 바로 저의 8촌 족조(族祖)인 권부(權孚)의 외손입니다. 비록 얼굴을 보지는 못하였으나 안부는 서로 통하였는데, 교주라는 이름을 저에게 돌리다니 실로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전 도정(都正) 목만중(睦萬中) 부자와는 원래 서로 친한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됨이 원만하지 못한 점이 많았기 때문에 항상 친구들을 대하면 그 단점을 배척하였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관계가 나빠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처럼 증거를 서는 행동을 하다니, 이는 필시 기회를 타서 유감을 풀려고 하는 것으로서 좌도(左道)에 미쳐 미혹되었다는 죄과에 빠뜨리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실로 드러난 죄가 없는데, 무슨 연고로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교주란 반드시 주장하는 것이 있고 또 따르고 사모하는 사람이 있어야 그렇게 지목할 수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저는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이 학술을 말한 적이 없는데, 실로 어떤 원수진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필시 저에게 유감을 풀려고 하는 것이니 저는 정말 애매하기만 합니다.’ 하였습니다.
세 번째 공술하기를 ‘시골에서 올라올 때 동생이 중도에 마중 나와서 대략 홍낙안과 목만중 두 사람의 일을 알려주어 이로써 알았습니다만, 저와 저의 장인인 고 동지중추부사 안정복(安鼎福)이 서로 사이가 어긋났다는 말은 모두 시속의 부박한 자들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천주문답(天主問答)》 한 가지 일로 말하더라도 장인이 분명히 이 책을 지었으나, 그와 더불어 강론할 때 입론(立論)이 준엄하지 못해 인심을 격려하고 경계시킬 수 없다고 말을 주고 받은 일이 있으니, 제가 이 학술을 위하지 않았음을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 자식이 외조부의 상을 당했을 때 장례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말하면, 그때 마침 제가 중병에 걸려 사경(死境)에 처했기 때문에, 힘을 다해 구호하느라 다른 것을 돌볼 겨를이 없어 가서 참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초상 때에는 두 아들이 모두 가서 호상(護喪)하였고, 또 장사지낸 뒤에도 계속 왕래를 하였으니, 이로써 애초부터 서로 어긋난 일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네 번째 공술하기를 ‘야소(耶蘇)는 그 책에서 그 나라의 현인(賢人)이라 불리는 사람인데, 제가 같은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고 같은 나라에 있지 않아 그 행적을 참으로 알지 못하는 이상 그가 어진지 사악한지는 변론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사람의 오륜(五倫)에 벗어나니, 반드시 사교(邪敎)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사악함을 일단 분명히 알지 못하는 이상 어떻게 남이 하는 대로 구차하게 좇을 수 있겠습니까. 권상연(權尙然)은 애초부터 서로 모르고, 윤지충(尹持忠)은 약간 안면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만약 과연 사판을 태워버린 일이 있다면, 이는 진실로 놀랍고 망령된 짓입니다. 조상을 섬기는 한 조목은 특히 그 학술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니, 제사를 예법대로 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생일에도 제물을 올리는 것이 정례(情禮)에 합치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사판을 태워버린 사람은 어떤 책을 보고서 이처럼 패역스럽고 망령된 일을 했는지 모르겠으나, 실로 이해하지 못할 바입니다.’ 하였습니다.
다섯 번째 공술하기를 ‘제가 만약 그것이 사학(邪學)임을 진정으로 알았다면, 어찌 그것이 요사스럽다고 말하기를 어려워하겠습니까. 그 책 가운데 「밝게 천주를 섬긴다.」든가 「사람들에게 충효(忠孝)를 느끼게 한다.」는 등 몇 구절의 좋은 말 외에는 다른 것은 실로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억지로 요서(妖書)라고 하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여섯 번째 공술하기를 ‘본 책자는 단지 《직방외기(職方外紀)》와 《천주실의》 두 책인데, 금법을 설치한 뒤로는 다시 보고 익히지 않았습니다. 금서를 간행한 일은 보지도 듣지도 못하였으니 소문이 허황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야소(耶蘇)의 사람됨의 사정(邪正)은 비록 그 책의 전체적인 대의는 모르지만, 그 가운데 기억나는 것으로 「엄숙 공경하고 삼가 두려운 모습으로 천주를 받들면 법이 없어도 자연 임금에게 충성하고 명령하지 않아도 자연 그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사람되는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듯합니다. 이것이 이치에 벗어난 사설이 아닌 이상, 어떻게 그 사람이 삿되다고 배척해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스스로 교주로 자처하거나 타인이 교주라고 불렀다면, 반드시 근거할 단서가 있은 뒤에야 바야흐로 진실한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교주라는 두 글자가 뜬소문에서 생긴 것을 죄로 삼아 형장(刑杖) 아래에 귀신이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게 한다면, 정말 애매합니다.’ 하였습니다.
일곱 번째 공술하기를 ‘그 학술은 대체로 공맹(孔孟)의 학문과 달라 인륜에 어긋날 뿐더러 나아가 제사를 폐지하고 사람의 마음을 빠뜨리게 하였으니, 이 점에 있어서는 사학(邪學)입니다.’ 하였습니다.
그가 교주라는 칭호에 대해서는 뜬 소문으로 돌려 극구 변명을 하면서도, 유독 야소에 대해서는 끝내 그가 사특하고 망령되다고 배척하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엄한 매를 치면서 묻는데도 전과 같은 말만 되풀이하니, 그가 그 학문에 빠져 미혹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엄한 형장을 시행한 뒤에 비로소 사학(邪學)이라는 두 글자의 자복(自服)을 받았지만, 교주와 서책에 관한 두 가지 일과 관련하여 그가 변명한 것을 근거로 믿을 수가 없으니, 더욱 엄히 형문(刑問)하여 반드시 자백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하니, 판하하기를,
“홍낙안이 이른바 교주라고 말한 것은 꼭 무리를 모아 설교(說敎)했다는 것이라기 보다는 거기에 빠져서 떠받들고 믿는 것을 지적한 것인 듯하다. 그의 두 번째 공술 가운데 ‘이는 이치에 벗어난 사설(邪說)이 아니다.’고 한 것을 보면 그의 실정이 저절로 드러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 번 추문을 받은 뒤에 비로소 ‘사람의 오륜에 어긋나며, 나아가 제사를 폐지한 것은 사학이 되는 것이다.’ 하는 등의 말로 공술을 하였고 보면, 이것이 유가(儒家)의 말을 하면서 묵자(墨者)의 행동을 하는 것은 오도(吾道)의 죄인이 된다고 하는 것과 똑같다고 하겠으나, 척사(斥邪)에 한 발자취를 세운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가령 그가 입으로만 그렇다고 하고 마음으로는 그렇다고 하지 않으면서 이처럼 묻는 데 따라 적당히 대답한 행동을 한 것이라 하더라도 꾸짖고 욕하는 말이 이미 그 자신의 입에서 나온 이상 그가 잘못 배운 십 년의 공부가 저절로 햇빛을 받아 녹아내린 얼음이 되어버렸다고 하겠다. 마음과 입이 진짜 서로 호응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되겠는가.
왕정(王政)에서 힘쓰는 바는 그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만한 것이 없다. 그 집에 있는 잡서들은 별도로 관원을 보내 즉시 조사한 뒤 가져와 형조의 뜨락에서 태워버리고, 그는 고신(拷訊)의 기한이 차기를 기다려 다시 엄히 형문한 뒤에 제주목(濟州牧)에 사형을 감해 위리 안치시키도록 하라. 그리고 이와 함께 목사에게 명하여 초하루와 보름에 점고할 때 글이나 말로 반드시 사학을 비난하고 배척하는 형적을 보이도록 하고, 자주 감시하는 사람을 보내 그 행동거지를 살피되 만일 옛날처럼 개전의 모습을 보이지 않거나 혹 다른 사람을 미혹시키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목사가 직접 심문을 하고 곧바로 결안(結案)을 받아 먼저 참(斬)한 뒤에 아뢰도록 하라.”
1.4 하느님의 종 권철신 암브로시오(녹암(鹿菴), 1736∼180. 4 1)
1)생애
권철신 암브로시오는 권일신의 맏형으로 1736년 경기도 양평군 양근면 양근리 갈산에서 태어났다. 조선 건국 공신이며, 주자학자였던 권근의 후예로 남인 대가의 자손으로서 이익의 학풍을 이으며 경학과 예학에 있어 당대의 뛰어난 유학자로 경서의 철리와 윤리를 연구하는데 일생을 보냈다. 그에게 제자들이 많이 모였는데 정냑전은 폐백을 바치며 그의 문하에 들어왔다. 대표적인 문하생들은 이벽, 정약종, 이승훈, 김원성, 윤유일, 이존창 등이다.
1779년 겨울, 강학회에 지도자이면서 경학 중심의 상학의 형태였으나 광암 이벽의 참여로 서학에 관한 토론과 연구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 즉시 신앙을 고백하지는 않았다. 1784년 가을 광암 이벽 세례자 요한이 말을 타고 양근에 와서 10여일 간을 머무르면서 녹암 권철신과 토론을 겸한 복음전파 활동을 하고 동샌 권일신의 권유pfP를 받았다. 에 따라 암브로시오라는 본명으로 입교하였다.
입교한 후부터는 온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을 입교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그가 이미 누리고 있던 신망은 많은 선비들로 하여금, "녹암 선생님 형제분들이 믿는 종교라면 믿을 수 있고, 믿어야 할 종교"로 확신하게 하였다.
권철신 암브오시오는 직접적인 복음 전파활동을 하지는 않았고, 천주교회의 운영에도 결코 직접 관여하지 않으면서, 도를 닦는 고승들처럼 초연하게 기도와 참선을 즐기면서 찾아오는 이들에게 친절하고 관대하게 대했다. 그러나 1785년 을사박해를 시작으로 권씨 가문은 박해 세력의 시기와 질투와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본래가 이름있는 집안이 천주교를 믿자, 남들의 비난과 박해도 역시 대단하였던 것이다. 마침내 1791년의 진산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신해박해로 동생 직암 권일신이 모진 형벌과 참혹한 고문 끝에 귀양 길에 순교하였다.
기미년(1799), 박해자들은 터무니없는 일을 꾸며 모함하는 고발을 하였다. 권씨 집안의 자제들도 역시 이에 맞서 대항하여, 일이 크게 벌어지게 되었는데, 지방군수가 현명하게 조정하고 정당하게 밝혀내어, 박해자들의 모함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해 여름, 대사간 신헌조가 권철신과 정약종을 천주교인들의 두목이라 하여 정조에게 상소하였다. 그러나 왕은 상소를 올린 신헌조의 품계를 박탈하고, 천학사건을 거론하는 것조차 금하였다. 다시 경신년(1800) 5월에 다시 왕에게 상소를 올렸는데, "양근 고을에 사학이 아주 성하여 배우지 않는 사람이 없고 믿지 않는 마을이 없는데, 군수는 태평으로 들어앉아 조금도 사찰하지 아니하니, 그 군수를 징계해야 합니다."하고 아뢰었다. 관에서는 그들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으므로 양근 군수를 인책 사퇴시켰다. 새로 부임한 군수는 과거지사를 들춰내어 많은 사람들을 체포하였으므로, 녹암 권철신은 서울로 올라가, 잠시 몸을 피하였다. 그러자, 관가에서는 그의 아들 권상문을 대신 잡아다가 가두었다. 아들이 아버지의 벌을 자기가 대신 받겠다고 여러 번 청했으나, 군수는 허락하지 않고, 기어코 권철신을 불러 가려고 하였으므로, 사건은 오래도록 결말이 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하고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수렴청정을 하게된 정순왕후 김씨와 노론 벽파, 남인 공서파들에 의해 박해가 일어났고, 권철신 암브로시오도 체포되었다.
항상 집에서 학문연구와 신앙생활에 전심하며, 통문과 공문으로 자기를 몹시 욕하는 것도 도무지 상관하지 않고, 의연히 기도생활을 하던 녹암 권철신은 교우들이 형벌에 이기지 못해 배교하였다는 말을 들으면, 오히려 "가련한 사람들, 참 애석도 하다. 저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반생의 업적을 무익하게 만들고, 고통으로 의당 받게 될 영광을 잃는도다."하면서 탄식하였었다. 체포 후 재판관들 앞에 끌려나가서도 천주교와 그 신앙 실천에 관해 용감하게 변호하였다. 형벌을 당하면서도 얼굴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며, 매우 조용하고 침착하게 대답하였다. 그래서 직무상 그 심문을 참관해야 하였던, 가장 철저한 원수 중의 한사람이 법정에서 나오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형벌과 심문을 당할 때에 다른 죄인들은 몹시 당황하는데, 권철신 공만은 마치 잔칫상 앞에 조용히 앉아 있는 사람 같았소."
형조에서 음력 2월 25일 문초 아래 순교하셨다.
2). 다산 정약용의 녹암 권철신 묘지명에서
“공의 학문은 효제충신(孝弟忠信)을 한결같이 종지(宗旨)로 삼아 부모에게 순종하고 뜻을 봉양하며, 친구와 형제를 한 몸처럼 아끼는 데에 힘쓰니, 그 문하에 들어간 자는 다만 한 덩어리의 화기(和氣)가 사방으로 퍼져 마치 향기가 사람을 엄습하는 것이 지란(芝蘭)의 방에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뿐이었다. 아들과 조카들이 집안에 가득하나 마치 친형제처럼 화합하니, 그 집에 10여 일이나 한 달을 머문 뒤에야 비로소 누가 누구의 아들이라는 것을 겨우 구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노비(奴婢)와 전원(田園), 또는 비축된 곡식을 서로 함께 사용하여 내 것 네 것의 구별이 조금도 없으니, 집에서 기르는 짐승들까지도 모두 길이 잘 들고 순하여 서로 싸우는 소리가 없었다. 진귀한 음식이 생기면 비록 그 양이 얼마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반드시 고루 나누어 종들에게까지 돌려주었다. 그러므로 친척과 이웃이 감화(感化)되고 향리(鄕里)가 사모하였으며, 먼 곳에 사는 사람들까지 우러러 보니, 학문과 행검(行檢)을 힘쓰는 상류 사족(士族)들까지 모두 공을 사표(師表)로 삼아 자제(子弟)를 문하에 들여보냈다.”
1.5 하느님의 종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1760 - 1801. 4. 8. 서소문 밖)
1. 생애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나주 정씨 정재원의 셋째 아들로 1760년 경기도 마재에서 태어났다.
정약종은 천주교가 전파되자 즉시 배웠다. 그러나 이벽을 향하여 참된 길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자주 뇌이며 입교를 망설이다가 4.5년 후 둘째 형 정약전의 권유로 아우구스티노를 세례명으로 입교하였다. 교우가 되자 그는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고 어떤 찬사도 미칠 수 없는 열심과 항구심으로 천주교를 봉행하였다. 1791년 배교한 그 형제들과 다른 많은 친구들이 보여준 불행한 본보기도 그의 마음을 흔들지 못하였다.(다블릐 비망기) 그러다가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양근 분원(현 경기도 광주군 남종면 분원리)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1800년 경신박해가 일어나자 피신하기 위하여 5월에 가족들을 이끌고 서울 청석동으로 이주하였다. 그 후 그의 동생 정약용의 도움으로 남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황일광 시몬의 공초 기록으로 보아 1800년 겨울에 주문모 신부님이 그의 집에 머므르면서 자신의 행랑채로 이사해 살았던 황일광이 주 신부님으로부터 세례를 받게 해 주었다. 또한 그가 정약종 주문모 신부와 함께 자주 첨례에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1800년 겨울에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음을 알 수 있다.
(사학징의 황일광 조)
* 광주 분원리: 광주 분원리는 1750년대 영조조에 사옹원 산하의 도요지(관요)가 이동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왕실 도기 납품의 관요는 광주 일대에 있으면서 땔감과 태토(흙), 물을 따라 10여년 주기로 이동하였다. 그러다가 땔감 조달의 용이성(강원도로부터 수로를 이용한 조달)과 물의 풍부한 여건을 갖춘 분원리로 이동되어 관요가 사라지는 고종 조까지 분원리 관요가 유지되었다. 분원에서의 자기 공정은 1년에 전국에서 공역을 담당한 장인들의 부역으로 대개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지며 도제조는 당시의 영상(1794년 도제조 채재공)이나 왕실 사람들이 맡았고, 실질적인 감독관은 번조(燔造)관 즉 감독(정약용의 큰 아들 정학연 - 1859년 번조관 정학유 선정비)이 전 공정을 관리하였다. 공정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략 300에서 500여명이었다. 분원 주위에 마을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전속 공인제의 등장에서부터라고 볼 수 있다(1700여년때). 공인 마을과 땔감을 파는 사람들의 마을이 형성된 것이다.
*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1791년 윤지충 권상연 사건으로 조상제사 문제가 교회 내에서 크 게 대두되고 사대부 출신의 신자들이 갈등을 겪으며 신앙을 멀리 할 때, 자신의 집안을 떠나 분원리로 이주하여 살았다. 1800년 경신박해로 여주와 광주 지역의 교우들이 체포될 때 정약종은 서울 청석동으로 피신하였다가 그의 동생 정약용의 도움으로 남산에 집을 마 련하여 은거 하였었다. 정약종이 순교하고 재산 적몰 될 때 분원리 정약종의 집 훼철에 대한 이야기를 정약용의 공초에서 나온다.
재산적몰: 『추안(推案) 및 국안(鞫案)』신유2월 10일 정약용 문초에서
“편지 안의 ‘양향(楊鄕)’은 과연 어느 곳이며, ‘죄인의 집을 허물고 그 위에 연못을 만든다.(破家猪澤)는 말에는 어떤 곡절이 있는가?”
“양향은 곧 양근을 이르는 것이며, 파가저택이란 말은 분원(分院)의 봉사(奉事)가 저의 형의 집을 훼철(毁撤)하고자 하여 이렇게 말한 것인데, 이는 분원의 하인이 전한 말입니다.”
* 정약종의 분원리 복음 전파의 가능성은 많은 교우들이 정약종과 이웃하며 살았다는 기록이다.
- 정약종의 사랑채에 거주하면서 나무장수를 하였다는 황일광 시몬, 황차돌 형제.
- 사냥꾼으로 알려진 김한빈 베드로 순교자, 김국빈(김한빈과 혈연 관계로 추정)
- 을해박해 때 경상도에서 순교한 최봉한 프란치스코
홍주 다래골 태생인 그는 모친과 함께 입교하여 공주 무성산 산속에서 사았다. 주문모 신부님이 서울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모친과 누이와 함께 서울로 올라가 성사를 받았 다. 모친은 종부성사를 받고 선종하였고, 누이는 정약종의 집에 머물렀고, 자신은 지방 으로 내려와 서석봉 안드레아의 딸과 혼인하였다.(다블릐 비망기)
* 도자기와 관련된 순교자
* 도기공 교우들: 이도기 바오로는 청양 사람으로 신앙을 받아들이고 정산으로 이주하여 옹기를 구우며살다가 1789년에 순교.
한덕운 토마스: 본디 홍산 사람이고 이존창에게 교리를 배우고 입교하 여 1800년에 광주 의일리로 이주, 1801년 3월 교우들 사정을 알기 위해 사기를 지고 서울로 올라와 청파에서 홍낙민 루카의 시신을 만나고 서소문 밖에서
최필제의 시신을 찾아 장사지냄.
김귀동: 본디 고산 사람으로 제청에 흙과 남가 좋다하여 옹기를
구워 생활터전으로 삼으려 이주.
황사영 알렉시오를 숨겨 줌.
* 체포와 순교
: 신유년 음력 2월 11일에 그는 말을 타고 마재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금부도사 한 사 람과 마주쳤으나, 이 사람이 그를 지나쳐 가자 아우구스티노는 이 사람이 자기를 체포하 러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자신이 정약종임을 밝히고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서울 옥으로 끌려 갔다.( 다블뤼 비망기)
심문을 받는 동안 그는 점잖게 신앙을 고백하고 관리들 앞에서 천주교의 진리를 설명하 며,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천주를 배반하는 일은 절대로 동의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하였다. 1801년 4월 8일 서소문 밖에서 동료들과 함께 참수로 순교하셨다.
순교 후 순교자의 시신은 고향 마재 건너편에 있는 배알미리(현 경기도 하남시 배알미동) 에 안장되었다가 1959년 4월 후손들이 이주하면서 반월의 사사리(沙士里)로 이장되었으며 1973년 5월 선산이 매각되면서 근처의 가족 묘지로 다시 이장되었고, 1981년 11월 1일 천진암 성지로 모셨다.
『추안(推案) 및 국안(鞫案)』신유2월 10일 최창현 요한 문초에서
“제가 가장 존경하는 자는 곧 권일신, 정약종, 이존창입니다.” 묻기를
“비단 휘장은 너의 집에서 만들어져 정약종에게 보내진 것인데, 어디에 쓰던 물건인가?”
답하기를
“천주께 첨례(瞻禮)하는 날에 이 휘장을 설치하고 천주상을 건 다음 무릎을 꿇고(궤좌(跪坐)) 서적을 외우면서 천주의 은혜를 생각합니다.”
《황사영 백서》에서
“명도회장 정 아오스딩은 정약용의 셋째형입니다 전에는 양근에서 살다가 경신년 5월 박해 때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는 전부터 사교를 믿는다는 비난을 많이 받아 왔는데, 경신(庚申)년 여름 한 고약한 관리가 선왕의 면전에서 그를 지명하여 주살하기를 청하였으나, 선왕이 꾸짖어 이를 모면하였습니다. 정 아오스딩은 이 때 시세가 이미 변화하여 재난의 불길이 점점 맹렬하게 타오름을 보고, 자기 스스로 도저히 그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가지고 있던 성물과 책과 신부의 편지 등을 농 하나에 넣어 가지고 다른 집에다 맡겨 두었는데, 그 농을 맡긴 집도 발각될 가능성이 있고, 또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본집으로 도로 운반해 오려고 했으나 부장들에게 빼앗길까 두려워서 임 토마스라는 사람을 시켜 나무장수로 가장하고 농을 마른 솔잎으로 싸서 19일 석양 무렵에 짊어지고 거리로 나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농은 크고 솔잎은 엷어서 아무래도 땔 나뭇짐 같지가 않았습니다. 마침 한성부의 별육 단속하는 사람이 이것을 보고, 그것이 밀도살한 쇠고기가 아닌가 의심하여 임 토마스를 관청으로 끌고 갔습니다. 농을 열어 보니 모두가 성교에 관한 책과 성상과 신부의 편지였으므로 한성부의 관리들이 크게 놀라 마침내 농과 사람을 다 포청으로 압송하였습니다. 이것은 불에다 기름을 끼얹은 것과 같아 환난이 이로 인하여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책을 넣었던 농이 압수된 이후에 교우들은 모두 놀라 몸을 떨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아침저녁으로 두려워했는데, 2월 초에 포도대장 이유경이 다른 직책으로 옮겨가고, 새로 임명된 신대현이 집무하자 옥에 가득차 있던 배교한 사람들을 죄다 석방하고 오직 최 토마스 형제와 최 요한과 임 토마스만 석방하지 않았습니다. 혹은 말하기를 장차 장살할 것이라고도 하고, 혹은 멀리 귀양 보낼 의논을 하고 있다고도 합니다. 외부에서도 검거가 잠시 중지되니 교우들은 기뻐하였고, 이대로 아주 아무 일이 없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였습니다.
이 때 소북의 박장설, 노론의 이서구, 남인의 최현중 등이 계속해서 상소하여, 극단적으로 성교를 비방하면서 역률로 논죄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아울러 신대현이 통인들을 가볍게 처벌한 것을 죄로 몰아 논란하였습니다. 대비가 크게 노하여 신대현을 이조에 가두고, 포도청에 가두어 두었던 네 사람을 금부로 옮기게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국법은 조정의 신하와 역적의 죄는 금부에서 다스리고, 포도청에서는 오로지 도둑을 관장하고 서민의 죄는 형조에서 다스리게 되어 있습니다. 교우들은 다 서민이어서 포도청에 수감되어 있는 자는 도율을 적용 받고, 금부로 옮겨간 자는 역률로서 논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2월 초아흐레날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홍낙민을 금부에 하옥시키고 11일에는 권철신, 정약종을 체포하였으며 한편 포도청에 단단히 경계하여 전에 석방한 사람들을 모두 다시 체포하게 하고, 아울러 여주와 양근에 가두어 둔 여러 사람을 금부로 압송해 오니, 서울과 지방의 이름 있는 교우는 한 사람도 이 난을 모면한 이가 없었습니다. 길에는 나졸들이 밤낮으로 끊이지 아니하고 널려서 이리 달리고 저리 뛰며, 금부와 양 포도청과 형조의 옥은 모두 빽빽이 차서 더 수용할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정약종 아오스딩은 성품이 강직하고 의지가 굳세고, 무엇에서나 자상하고 세밀한 것이 남보다 뛰어났습니다. 일찍이 선도를 배워 오래 살 생각이 있어서 엉뚱하게 천지개벽설을 믿었다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천지가 변하고 바뀔 때는 신선도 역시 없어짐을 면하지 못할 것이고 결국은 이것도 영원히 사는 길이 아닐 것이므로 배울 것이 못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성교를 듣자 그는 독실하게 믿고 힘써 실행하였습니다. 신해년 박해 때 그의 형제와 친구들 중에서 믿음이 온전한 사람이 드물었는데 오직 그만이 조금도 동요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세상사를 이야기함에는 서툴렀으나 성교의 진리를 강론하기를 좋아하였으며 비록 병들어 괴롭거나 굶주림을 당했을 때에도 그 괴로움을 모르는 사람 같았습니다. 그러나 혹 한 가지 조그만 이치라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먹고 자는 것을 잊고 온 마음과 힘을 다해 생각하여 반드시 분명한 깨달음에 이르고야 말았습니다. 그는 비록 말을 타고 가거나 배를 타고 있거나, 언제나 묵상의 공과를 그치지 않았으며 어리석고 몽매한 사람을 보면 혀가 굳고 목이 아프도록 힘을 다해 가르치고 깨우치게 하면서도 조금도 싫증내는 기색이 없었으므로 비록 아무리 어리석고 둔한 사람이라도 그와 있으면 깨치지 못하는 자가 거의 없었습니다. 일찍이 그는 교우들 가운데 무식한 이들을 위해 우리나라의 한글로 "주교요지" 두 권을 저술하였는데 널리 성교의 여러 가지 책에서 인용하고 자기의 의견을 보태서 지극히 쉽고 분명하게 설명하여 어리석은 부녀자나 어린아이들이라도 책을 펴 보기만 하면 환히 알 수 있고, 한 군데도 의심스럽거나 모호한 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부도 이 책이 이 나라에서 꼴과 땔나무보다 더 요긴하다 하여 간행을 인준하였습니다. 정 아오스딩은 여러 해를 두고 깊이 학문을 쌓은 것이 아주 습관과 성품으로 생활화 되어 매번 교우를 만나면 안부 인사 정도만 하고, 강론을 시작해서 종일토록 힘써서 미처 다른 이야기를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는 혹 자기가 아직 모르던 것을 한두 가지 알게 되면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해서 칭찬해 마지않았으며 혹 신심이 식어버려 태도가 분명치 아니한 사람이 강론을 듣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면 서운해하고 딱하게 여기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별의별 도리를 다 물어도 그는 마치 호주머니 속에서 물건을 꺼내듯이 번거롭게 생각하지 않고 말이 끊어지는 일이 없었으며 계속해서 어려운 문제를 설명하는데도 조금도 막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은 다 차례가 갖추어져 논리가 어그러지거나 혼란하지 아니하고, 날카로우면서도 뛰어나 오묘함을 넘어서며, 자세하고도 정확하여 사람들의 믿음을 굳게 하여 애덕을 더욱 왕성하게 하였습니다. 비록 그의 덕망은 관천에게 미치지 못했지만은, 성교의 이치에 밝기는 관천보다 나앗습니다.
그는 또 천주님의 모든 덕과 여러 가지 도리가 본래 크고 광활한데, 여러 가지 책에 흩어져 있어 온전히 논한 책이 없기 때문에 읽는 사람이 요점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하여 장차 여러 책에서 뽑아 모아 부문별로 나누고 모아서 책이름을 "성교전서"라 하였습니다. 뒤에 성교의 교리를 배우는 바람들에게 남겨 주려고 하였는데, 초고가 반도 이루어지지 못한 채 박해를 당하여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정 아오스딩이 체포되어 옥에 들어가니 관리가 왕명으로 심문하였는데 그는 성교의 진실한 이치를 분명히 진술하고 성교를 금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뜻을 분명하게 밝혀 말하였습니다.그는 또 천주님의 모든 덕과 여러 가지 도리가 본래 크고 광활한데, 여러 가지 책에 흩어져 있어 온전히 논한 책이 없기 때문에 읽는 사람이 요점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하여 장차 여러 책에서 뽑아 모아 부문별로 나누고 모아서 책이름을 "성교전서"라 하였습니다. 뒤에 성교의 교리를 배우는 바람들에게 남겨 주려고 하였는데, 초고가 반도 이루어지지 못한 채 박해를 당하여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정 아오스딩이 체포되어 옥에 들어가니 관리가 왕명으로 심문하였는데 그는 성교의 진실한 이치를 분명히 진술하고 성교를 금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뜻을 분명하게 밝혀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관리는 크게 노하여 왕명을 반박한다고 하며 대역부도의 죄로 논죄하였습니다. 그는 옥에서 끌려 나와서 함거에 올라 형장으로 가면서 큰 소리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여러분들은 우리를 비웃지 마시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천주님을 위하여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일 뿐입니다. 대심판 때에 우리가 흘린 눈물은 진정한 기쁨으로 바뀌고 당신네 기쁨과 웃음은 진정한 고통으로 변할 것이니 당신들은 꼭 그렇게 서로 웃지는 마십시오."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처형 받기에 앞서 주위에서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당신들은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마땅히 행해야 할 일입니다. 당신들은 두려워 말고 후에 본받아서 행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칼로 한 번 찍으니 머리와 몸이 반으로 잘렸는데, 그는 벌떡 일어나 앉아 손을 크게 벌려서 십자 성호를 긋고는 조용히 다시 넘어졌습니다. 최필공 토마스와 함께 처형당했는데 이 때 그의 나이 42세였습니다.”
『추안(推案) 및 국안(鞫案)』신유2월 12일 정약종 문초에서
“저는 병오년(1786)3월에 이 학문을 저의 중형(정약전)에게서 들었으며, 저는 지금까지 이 학문에 빠져 있으나, 중형은 근래에 과연 하지 않습니다.”
“저는 본래부터 이것이 정학(正學)이라고 알고 있었을 뿐 사학(邪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압수된 서책은 과연 저희 집에서 나왔습니다. 교주로 말하면 제가 약간 문자를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따로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으며, 소굴이나 동료들로 말하자면 문을 닫고 홀로 있었던 까닭에 따로 고할 사람은 없습니다.”
“서책은 제가 스스로 베끼고 이해하였으므로 따로 교주와 동료들은 없으며, 제가 만일 사학이라고 생각하였다면 어찌 감히 이를 배웠겠습니까. 그것은 대단히 공정하고 지극히 진실한 도리이므로, 몇 년 전에 나라에서 금한 이후에도 애초부터 바꿀 마음이 없었습니다. 비록 만번 죽음을 당할지라도 조금도 뉘우칠 마음이 없습니다.”
“제가 천주를 대월소사(對越昭事)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無處不可矣)”
“천지의 주재자는 형상이 없으므로 천주 화상을 만드는 것이고, 7일마다 첨례를 봄으로써 의탁하는 정성을 드리는 것입니다.(天地主宰無形象 故作爲天主畵像)”
“<일기> 가운데서는 또 조상에 제사 지내고(우이제사조선), 분묘에 배알하고(배알분묘), 부친상을 당해 혼백을 만들고, 제전을 실행하는 것을 모두 죄과(遭父喪而造魂帛設祭尊等事 皆稱罪過)라고 말하였으니, 멸륜패상이 지극히 흉악하며, 또 나라의 큰 원수는 임금이고, 집안의 큰 원수는 부친이다.(國有大仇君也 家有大仇父也) 라고 한 이것은 너의 아비에게 차마 하지 못할 망측한 말이다. 국가에 부도한 말을 제멋대로 지껄인 것은 더욱 지극히 흉악한 일이다. 진실로 조금이라도 도리를 지킨다면 어찌 차마 마음에서 일어나 책에다 쓸 수 있겠는가?”
“저 스스로 그 죄를 알고 지금은 뉘우치고 있습니다.”
순교: 형장으로 가는 수레위에서 그의 얼굴은 침착했고 빛났다. 그리고 형장으로 가는 도중에 수레 끄는 사람을 불러 “목이 마르다.”라고 말했고,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심하게 질책하자 “제가 마실 것을 청한 것은 다만 위대하신 모범을 본받기 위함이오.”라고 말했다.
형장에서도 그는 훌륭한 설교 강단에서 설교하는 설교자였다. 둘러서 있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존재하시고 무한히 흠숭하올 천지 만물의 대 주재이신 이가 당신들을 창조하셨고 보존하십니다. 당신들은 모두 회개(悔改)하여 당신들의 근본(根本)으로 돌아와야 하오. 그 근본을 어리석게 멸시와 조소거리로 삼지 마시오. 당신들이 수치와 모욕으로 생각하는 그것이 내게는 곧 영원한 영광 거리가 될 것이요.”
“땅을 보면서 죽는 것보다는 하늘을 보면서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며 하늘을 우러르는 자세로 머리를 두었다. 휘강이의 칼을 맞고 다시 일어나 몸을 곧추 세우고 십자 성호를 크게 긋고는 평온하게 다시 자리를 잡았다.
2) 광주 분원리: 광주군 내촌면 분원리는 1750년대 영조조에 사옹원 산하의 도요지(관요)가 이동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왕실 도기 납품의 관요는 광주 일대에 있으면서 땔감과 태토(흙), 물을 따라 10여년 주기로 이동하였다. 그러다가 땔감 조달의 용이성(강원도로부터 수로를 이용한 조달)과 물의 풍부한 여건을 갖춘 분원리로 이동되어 관요가 사라지는 고종조까지 분원리 관요가 유지되었다. 분원에서의 자기 공정은 1년에 전국에서 공역을 담당한 장인들의 부역으로 대개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지며 도제조는 당시의 영상(1794년 도제조 채재공)이나 왕실 사람들이 맡았고, 실질적인 감독관은 번조(燔造)관 즉 감독(정약용의 큰아들 정학연 - 1859년 번조관 정학유 선정비)이 전 공정을 관리하였다. 공정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략 300에서 500여명이었다. 분원 주위에 마을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전속 공인제의 등장에서부터라고 볼 수 있다(1700년대). 공인 마을과 땔감을 파는 사람들의 마을이 형성된 것이다.
*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1791년 윤지충 권상연 사건으로 조상제사 문제가 교회 내에서 크게 대두되고 사대부 출신의 신자들이 갈등을 겪으며 신앙을 멀리 할 때, 자신의 집안을 떠나 분원리로 이주 했다고 본다.
* 정약종의 복음 전파의 가능성은 많은 교우들이 정약종과 이웃하며 살았거나
사기공이었다.
정약종의 사랑채에 거주하면서 나무장수를 하였다는 황일광 시몬, 황차돌 형제.
사냥꾼으로 알려진 김한빈 베드로 순교자, 김국빈(김한빈과 혈연 관계로 추정)
* 도제조 채제공: 1794년 사옹원 도제조로 제수됨 - 분원리 공덕비 (도광5년,1825년)
-정조실록 정조 18년 갑인 (1794, 건륭59) 12월 7일(경신)
영중추부사 채제공을 상호 도감 도제조로 삼다.
경모궁에 추숭할 존호를 ‘융범희공개운창휴’로 의논해 정하다
영중추부사 채제공을 상호 도감(上號都監) 도제조로 삼았다. 경모궁에 추상할 존호를 ‘융범희공개운창휴(隆範熙功開運彰休)’라고 의논해 정하였다.
- 정조실록 정조 18년 갑인 (1794, 건륭59) 12월 7일(경신)
상호 도감 도제조 채제공이 호조 판서 심이지, 예조 판서 민종현 등 4명을 도감의 당상으로 추천하다
상호 도감 도제조 채제공이 아뢰기를,
“도감의 당상을 4명으로 차출하라는 연교를 받들었습니다. 호조 판서 심이지(沈頤之),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 행 부사직 이득신(李得臣), 행 성균관 대사성 이가환(李家煥)을 아울러 임명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 정약용의 아들 정학연 번조관 - 번조관 정학연 공덕비(함풍9년, 1859년)
* 명도회 회장: 주 문모 야고보신부로부터 명도회 회장으로 임명 받음.
명도회는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중국에 있던 단체를 모방하여 설립한 교리 연구 및 선교 단체.
3)명도회 회장: 주 문모 야고보신부로부터 명도회 회장으로 임명 받음.
명도회는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중국에 있던 단체를 모방하여 설립한
교리 연구 및 선교 단체.
분원리 관요와 백자 자료관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합수머리를 이루는 곳이 팔당호이다. 양수(兩水)의 풍부한 물을 받은 팔당호가 지척에서 찰랑이고, 건너편 양평군 능내리의 그림 같은 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지는 분원마을. 자연의 아름다움을 농익혀낸 조선백자가 이곳 분원마을에서 탄생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당시의 분원리 가마터엔 일제의 민족 말살정책의 하나로 분원초등학교를 세웠다. 이 초등학교가 지금까지의 역사를 전해주고 있다. 학교로 오르는 계단 모퉁이와 운동장 주변에는 그때의 흔적을 말해주는 도자기 파편들이 널려 있다. 화단의 흙 속에서, 학교 운동장 뒤로 오르는 또 다른 축대 아래서 반짝이며 빛을 발하는 건 죄다 도편(陶片)들이다. 그 도편들을 밟고 교사(敎舍) 뒤로 오르면 분원 감독관들의 송덕비가 세워져 있다. 평생을 도자기 굽기에 바치며 불꽃같이 살다 간 무명 도공의 비는 광주읍(현: 광주시)에서 이천으로 들어가는 첫 고갯길 옆에 세워져 있다.
조선인의 생활문화에 깊이 스며든 도자기를 생산해내던 주요 산지가 광주 일대의 도요지이다. 흙(陶土)보다 땔감이 중요했던 초기의 가마들은 나무가 많은 곳을 찾아 관음리·도마치로 옮겨 다녔다. 한 곳에서 10년 정도 도자기를 굽고 나면 인근의 땔감은 바닥이 나고, 다시 나무를 찾아 가마를 옮기곤 했다. 퇴촌면 일대와 중부면 번천리· 오전리, 초월면 무갑리 일대를 비롯해 광주의 6개면에서 조선시대 백자가마터로 밝혀진 곳은 무려 200여 곳이나 된다. 광주 전역이 가마터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모두 사옹원의 분원에서 둔 관요(官窯)였다.
광주지역은 그만큼 땔감이 풍부했고, 양질의 백토(광주 수을토)가 생산되었으며, 한강과
마재 성지가 바라다 보이는 광경을 감상할 수 있다.
경안천을 이용한 편리한 교통이 제품수송을 원활하게 거들었다. 분원리 이전의 금사리
가마는 유백색의 맑은 자기가 특징이었고, 이곳 분원리 가마에서는 청백색의 자기가 특징으로 꼽힌다.
고려청자가 귀족적인 풍모를 갖췄다면 조선시대 도자기는 소탈한 서민의 풍모가 짙다. 화려한 권좌에서 내려와 대중 속에 어우러지는 인품의 변화와도 같은 것이 조선자기의 탄생이다. 이는 미적 기준과 가치의 변화였고, 아름다움이 귀족이나 지방호족의 전유물이었던 신라나 고려 시대보다 훨씬 서민화된 상황이었다.
조선은 건국 초 전국의 가마를 조사·정비하고 도자기 번조를 맡는 중앙기관으로 사옹원(司饔院)을 두었다(세조 13년, 1467). 세종 때에는 경기도 광주지역에 사옹원 소속의 분원을 두어 궁중에서 쓸 도자기 일체를 생산해냄으로써 지방 관요였던 광주관요는 중앙기관으로 승격된다. 사옹원의 주된 임무는 국왕의 식사를 관장하고 그에 사용되는 그릇을 사옹원 제조장에서 담당케 하는 것이었다.
이곳 분원리 한 곳으로 관요(官窯)가 정해졌을 때는 도자기 생산의 오랜 경험이 축적되어 대량생산이 가능한 공장체제로 변모해갔으며, 당시로서는 엄청난 생산력이었다.
백자는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생산되는데,
성종에서 중종 연간은 조선백자의 절정을 이룰 만큼 그 질이 우수하였다. 조선 중기 광주의 중앙관요에서 생산된 백자 중에 발색이 아름다운 갑번(匣燔)백자가 늘어났다.
후기의 청화백자는 잡물의 함유라고는 없는, 푸른빛이 감돌만큼 순백색의 자태에 안정감이 있고 원만하며, 선의 흐름이 유연하여 기품마저 넘친다. 그리고 일반 백성들을 대상으로 막사기가 대량 생산될 만큼 도자문화가 급격한 발전을 보인다.
특히 이 시기에 만들어진 달항아리는 한껏 풍성한 느낌을 준다. 문양에서도 소상팔경·십장생·까치·호랑이 등의 민화가 그려지기도 한다. 회화적이며 대담한 필선, 소박하고 구수한 멋이 있는 도자기로 발달해갔다.
도자기 전쟁이라 불리는 임진왜란을 겪으며 전국의 가마는 모두 파괴되거나 도굴 당했다. 도공마저 일인들의 손에 끌려가는 수난을 겪으며 조선의 도자문화는 한때 사양길로 접어들고, 청자문화는 아예 맥이 끊겨 버렸다.
그래도 광주분원은 빠르게 복구되어 백자를 생산해냈으나 격변의 구한말을 맞으면서 도자문화 발전의 여력을 상실해버렸다. 이어 우리의 도자기술을 전수받은 일본 도자기가 밀려와 우리의 도자문화전통을 퇴각시켜버렸다.
그 영광의 조선 관요는 조선왕조와 함께 불이 꺼진 지 오래다. 오늘날 마을 이름 분원리가 무색하게 되었으며, 우리는 조선시대 도자문화를 꽃피웠던 분원리를 중심으로 그 흔적들을 만나볼 수밖에 없다.
도자기와 천주교
1. 옹기, 사기점과 교우촌
도자기는 우리 신앙 선조들의 삶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박해를 피해 심산유곡으로 숨어 들어간 신앙 선조들의 생업과 마을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 점촌이었고, 점촌의 형태는 크게 옹기점과 사기점으로 구분된다. 선조들은 옹기와 사기(백자)를 구워 내다 팔며 공동체 생활을 영위해 나간 교우촌을 이루었었다. 신앙 선조들이 숨어서 생활했던 전국 어디에서나 손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옹기와 사기 조각들이고, 사기나 옹기를 굽다가 포졸들의 급습으로 가마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사기그릇들이 그대로 보존된 가마터가 발견되기도 한다.(예: 진천 백곡면 명암리 사기장골 가마터) 오늘 우리 면형강학회 회원들이 방문하는 분원리 백자관은 우리 신앙의 선조이며 순교자이신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순교자께서 10여년간 사셨던 지역으로서 분원리 관요와 신앙전파, 교우촌 형성과의 연관성을 찾기위한 시도이다. 실상 1995년 서울 대교구 예비신학생들과 배티 교우촌 성지 순례를 하면서 정삼이골의 사기점 터를 직접 찾아 사기조각들을 주웠던 적이 있었다. 예비신학생들에게 그 조각들에 대해 설명해 주었더니 그 조각들을 주워다가 촛대 받침을 만들어 기도할 때 순교자들의 굳은 신앙심을 기억하며 그분들께 전구를 청한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사기장골과 발래기 사기 조각들은 현재 당고개 성지 곳곳에 장식되어 박해 당시의 선조들의 신앙과 박해로 인해 순교하신 분들을 만나게 한다. 또한 옹기점과 교우촌의 밀접한 관계는 익히 우리 교회사에서 널리 알려진 바이다.
2. 옹기, 사기점의 교우촌의 구성원 - 공동체 생활의 교우촌
교우촌의 신앙 선조들은 신앙 공동체로서 모든 생활이 공동체적이었다. 기도는 물론 노동이나 재산의 사용도 공동소유의 개념을 가지고 생활하였다. 그러므로 교우촌을 방문하는 선교사들은 교우촌에 대하여 사도들의 초대교회 공동체나 수도원을 보는 것 같다고 하였다.(보두네 신부의 편지) 점촌의 교우들은 옹기나 사기를 제작하는 데에는 많은 인력이 각자의 역할을 다해야 하는 협동 작업으로 이루어졌다. 옹기나 사기를 제작하는 그룹은 크게 두 그룹으로 나누어진다. 한 그룹은 장인과 옹기장이가 있으며, 또 한 그룹은 건아꾼, 잡일꾼, 생질꾼, 수비꾼, 화부가 있다. 점촌에는 이 같은 역할을 담당할 인력이 필요하였다. 그리고 옹기나 사기를 판매할 사람들도 필요했다.
장인은 자기의 성형을 담당한다. 옹기를 만드는 장인인 옹기장이는 옹기의 성형을 담당한다. 그 중 책임을 담당하는 옹기장이를 대장이라 칭한다. 옹기대장은 성형에서 소성에 이르기까지 전 공정에 능숙해야 한다. 따라서 박해를 피해 산으로 피신해 온 신자들이 즉시 옹기장이가 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하겠다. 숙련된 기술이 필요한 만큼 박해 초기 다양한 신분의 신자들은 옹기교우촌에서 담당할 수 있는 역할은 극히 제한적이라고 볼 수 있다.
옹기의 판매는 신자들이 특별한 기술 없이 옹기점에 흡수되면서부터 참여할 수 있었던 단계로서, 옹기장수로서 이동이 비교적 자유로워 다양한 소식들을 접할 수 있었다. 흩어진 가족들의 소식부터 선교사들의 이동경로를 통한 방문일정 및 박해에 관한 분위기 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직접 행상을 하며 家家戶戶방문하며 천주교를 전할 수 있어 전교를 위한 수단이 되기도 했다.특히 옹기의 소비자는 여성이다. 이 때문인지 행상을 나서는 부녀자들이 많았다. 이러한 모습은 옹기의 소비가 활발했던 근대까지 쉽게 볼 수 있었다. 이들은 여성들이라 각 가정에 직접 들어가 판매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여성들끼리 부드럽게 흥정을 할 수 있어 판매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렇게 판매된 옹기는 많은 이윤을 남기며 농민보다 경제력을 갖추게 되었다.이러한 옹기교우촌 내에서 신자들은 자신들끼리의 결속을 굳게 만든다. 때문에 그들은 특수 거주지역을 형성하며 그들 본래의 생활양식을 계승하게 되었고, 이때 옹기업의 특수성이 신자들의 필요조건과 맞물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옹기의 수요는 어떠했을까? 옹기교우촌이 형성되던 조선 후기에는 옹기장이 늘어나면서 옹기를 파는 곳도 증가하였다.
『正祖實錄』32卷, 15年(1791년, 신해년 1月 25日)"차대를 거행하였다. 저자의 백성들에게 육전(六廛) 이외에서도 함께 매매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도성에 사는 백성의 고통으로 말한다면 도거리 장사가 가장 심합니다. 우리나라의 난전(亂廛)을 금하는 법은 오로지 육전이 위로 나라의 일에 수응하고 그들로 하여금 이익을 독차지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빈둥거리며 노는 무뢰배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스스로 가게 이름을 붙여 놓고 사람들의 일용품에 관계되는 것들을 제각기 멋대로 전부 주관을 합니다. 크게는 말이나 배에 실은 물건부터 작게는 머리에 이고 손에 든 물건까지 길목에서 사람을 기다렸다가 싼값으로 억지로 사는데, 만약 물건 주인이 듣지를 않으면 곧 난전이라 부르면서 결박하여 형조와 한성부에 잡아넣습니다. 이 때문에 물건을 가진 사람들이 간혹 본전도 되지 않는 값에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팔아버리게 됩니다.이에 제각기 가게를 벌려 놓고 배나 되는 값을 받는데, 평민들이 사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만약 부득이 사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 처한 사람은 그 가게를 버리고서는 다른 곳에서 물건을 살 수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그 값이 나날이 올라 물건 값이 비싸기가 신이 젊었을 때에 비해 3배 또는 5배나 됩니다. 근래에 이르러서는 심지어 채소나 옹기까지도 가게 이름이 있어서 사사로이 서로 물건을 팔고 살 수가 없으므로 백성들이 음식을 만들 때 소금이 없거나 곤궁한 선비가 조상의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일까지 자주 있습니다. 이와 같은 모든 도거리 장사를 금지한다면 그러한 폐단이 중지될 것이지만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단지 원성이 자신에게 돌아올까 겁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3. 옹기교우촌의 공동생활
“모든 이가 그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아주 아무것도 없는 형제들에게 무슨 도움을 줄 줄 알았고, 과부와 고아들을 거두어주니, 이 불행한 시절보다 우애가 더 깊었던 일은 일찍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일을 목격한 노인들은, 그때에는 모든 재산이 정말 공동으로 쓰여 졌다고 말한다.” (Ch.Dallet, 안응렬·최석우 역주,『韓國天主敎會史』中,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p.16.)"옹기교우촌에서는 공동노동ㆍ공동이익ㆍ공동분배의 원칙 실행이 가능했다. 그 중 노동을 신성시하여 일요일에는 항상 쉬며, 가마에 불을 땔 때도 告祀를 지내지 않았다. 작업은 봄ㆍ여름ㆍ가을만 일하고 겨울에는 빚을 내더라도 노동을 하지 않는 독특한 옹기점의 사회성을 지니고 있다. 충북 진천의 새울 공소에서는 믿는 이들끼리 함께 지내며 공동소유ㆍ공동생산ㆍ공동분배가 이루어지도록 옛날 어른들로부터 부탁받았다고 한다. 때문에 이곳에서는 이를 실천하고 있었다." (임경택,「천주교 신앙촌의 사회적 성격에 관한 연구 : 천주교의 토착화 연구를 위한 시론 - 충청북도 진천군의 신앙촌 사례」, 서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1989, pp.28~32.)
이러한 옹기교우촌의 생활은 오늘날 공소에서도 그 전통을 찾아볼 수 있다. 옹기업을 해온 공소에서는 공동노동·공동이익·공동분배의 원칙을 이어갔다. 그중 노동을 신성시하여 일요일(주일)에는 항상 쉬며, 가마에 불을 땔 때도 告祀를 지내지 않고, 작업은 봄·여름·가을만 일하고 겨울에는 빚을 내더라도 노동을 안 하는 독특한 옹기점의 사회성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의식이었던 평등사상과 노동에 대한 의무·노동을 신성시하는 관념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겼기 때문이다.
4. 옹기교우촌의 가업계승
‘2007년 4월, 전남 곡성군 승법리 옹기점에서 생활하다 마을로 내려 온 김정남(1926년생)씨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19살에 결혼하기 전까지 승법리 옹기점에서 생활했으며 어린 시절부터 이곳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천주교자리였단다”는 이야기와 “천주교인이 묶여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그녀는 증언한다. 옹기점은 미산리(미륵굴)에서 시작하여 승법리로 내려왔고, 그 중 일부는 여우내로 들어갔단다. 옹기업을 하는 사람들은 "점놈"이니 "옹기장놈"이라며 천한 노동으로 취급받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당시에도 그녀는 이 같이 불렸다고 한다. 옹기장이었던 그녀의 조부는 옥과에서 승법리 옹기점으로 이사를 왔으며, 그녀의 부친 김명용(1899~1951)도 같은 일을 하게 되었단다. 그녀는 옹기를 팔러 순창, 송정, 괴목, 하동 등지를 다녔었다고 전한다.'
‘2010년 5월에 조사했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사암리에 위치한 용암공소 옹기 교우촌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은 옹기공장이 호황일 때에도 그곳에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신자였기 때문에 일요일에는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요일마다 공소예절을 지내며 함께 기도생활을 했으며, 그들은 어려운 시절을 보내면서도 서로를 의지하며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용암공소라는 공동체가 힘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용암공소의 옹기점은 1987년 폐점하였지만, 아직까지 구교우들이 사암리를 지키며 교우촌의 모습을 이어가고 있다.'
지역 | 서울.인천.경기도 | 강원도 | 충청도 | 전라도 | 경상도 |
종교관계 | 천주교(90%)기독교(10%) | 천주교 (50%)기독교(50%) | 기독교.유교(20%)천주교(80%) | 천주교(50%)불교.무교(50%) | 기독교(60%)불교.유교.무교(40%) |
李東姬,「한국 옹기의 지역별 특성」, 이화여대 석사학위논문, 1985, pp.50~89.
5. 옹기교우촌의 혼인
‘2007년 전남 곡성의 김정남(1927년생)의 증언에 따르면 점사람끼리 혼인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옹기점은 옹기점끼리, 사기점은 사기점끼리 사돈을 맺었다고 한다. 그녀는 부친과 조부가 천주교 신자였는지는 모르나, 시아버지(朴氏)가 천주교 신자였으며, 승법리에서 여우내로 내려간 천주교 신자였던 강이팔이 처남댁으로 삼으려 중매로 결혼하게 되었다고 한다. 강이팔과 朴氏는 사위와 장인사이로 천주교 신자였으며 옹기일을 세습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통해 옹기점의 혼인법과 교회의 혼인 관계가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이는 종교의 자유가 허락된 이후에도 전통처럼 유지되고 있다.'‘용암공소 옹기점에서 일하는 이들 중 1~2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천주교 신자였다고 한다. 이들 대부분은 가업으로 옹기업에 종사했던 이들의 후손들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혼인관계 역시 옹기업에 종사한 천주교 신자들끼리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이곳의 옹기점이 폐점할 때까지 공장주였던 정진옥(1930년생)은 그의 부인 박준순(1935년생)이 '성환'의 옹기마을 출신으로 그녀의 오빠가 옹기업에 종사했다고 전한다. 이들은 정진옥의 누이가 '성환'으로 시집가게 되면서 중매가 이루어졌다. 그의 누이 역시 신자였으며, 옹기업에 종사하는 신자에게 시집을 갔던 것이다.이곳에서 공장장으로 있었던 박근석(1930년생)을 통해서도 이와 같은 특징을 알 수 있다. 그는 경기도 화성 조암의 옹기점 출신이다. 그는 어린 시절 뒷일을 보던 부모님을 따라 옹기점에서 놀며, 자연스레 옹기업에 관심을 갖고 성형을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고향인 조암에서 17살 때에 본격적으로 옹기업에 뛰어들었다가 23살에 부모님을 모시고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그의 부모님은 물론 고향인 조암의 옹기점 역시 천주교 신자들이였으며, 예전부터 옹기업을 하는 사람은 거의 100% 천주교 신자였음을 이야기한다.그의 아내 엄명복(1933년생) 역시 신자로서 옹기업에 종사했다. 남편이 만든 옹기를 이웃 마을인 학일리와 문촌리로 팔러 다녔단다. 단지와 같이 작은 옹기 5~6개를 이고 지어 집집마다 옹기를 팔러 왔다며 행상을 했다고 한다. 큰 옹기는 한 개만 들고 다닐 수 있었는데, 아침에 팔러 나가면 저녁때가 되어서야 다 팔고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멀리 행상을 나갈 때는 이웃의 여자들과 2~3명이 짝이 되어 나갔다고 증언한다. 이 역시 다 팔아야만 돌아왔으며, 보통 15~20일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일요일에는 행상을 나가지 않았으나, 먼 마을로 가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일요일도 일을 해야만 했단다. 보통 방 하나를 빌려 생활해야 했기 때문이란다.' (숨쉬는 갈색 도자기 옹기의 이야기 창작소재 개발, 2010년, 문화콘텐츠)☞ 신자들은 같은 신자와의 혼인관계 전통을 박해시대 이후 옹기업이 성행하던 때까지 이어왔다. 이러한 전통을 지닌 옹기는 근대를 대표하는 많은 사진들 속의 주요 소재로 등장했다. 장독대의 모습, 시장의 상점에서 옹기를 진열해 둔 모습, 옹기를 행상으로 팔러 다니는 모습, 아낙들이 물동이를 이고 있는 모습 등 당시 한국의 모습을 대표하는 일상으로 옹기가 빠짐없이 등장한다.비단 이러한 모습은 근대에 와서 완성된 것은 아니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서민들의 생활상을 담은 풍속화에서도 옹기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만날 수 있었다. 친숙한 일상의 모습에서 만날 수 있는 옹기였기에 박해시기를 겪어야 했던 신자들은 자연스레 의심의 눈에서 벗어나 생활하며 신앙을 지켜낼 수 있었다. 아직까지도 옹기업이 가업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박해시기 옹기업에 종사했던 신자들 역시 다른 생활을 모색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현존하는 옹기공방 대부분이 천주교 신자들로 이루어져 있음은 옹기와 천주교와의 깊은 연관성이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을 말해준다.
6. 옹기의 문양(표식)
옹기에 나타난 표식은 장식이기도 하지만, 옹기 안의 내용물을 구분하기 위한 하나의 표시이기도 했으며, 옹기점과 장인을 표시하기 위한 하나의 상표 내지 사인이기도 했다. 따라서 옹기의 표식은 장식 요인보다 제작상 요인이 우선한다고 할 수 있다. 처음 유약의 두께를 점검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되어 점차 장식의 기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표식들은 손가는 대로 그려지는 특징 때문에 일반화하는 것은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선학들의 옹기 표식에 관한 연구를 빌어본다면 표식들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이 중 천주교 관련 표식으로 십자가와 종, 비둘기, 물고기, 사랑문, 예수찬미의 글귀 등을 신앙심의 표현으로 보았다. 하지만 十字紋, 물고기, 비둘기(鳥紋)은 조선시대 그 이전의 다양한 기물과 그림에도 표현된 표식이다. 그러나 이를 천주교 관련 표식으로 분류하는 이유는 도상학적 방법론에 입각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1)물고기 문양
물고기 문양은 천주교 신앙과 연관 지어 해석하는 경우 성경의 텍스트를 인용할 수 있다. 도상학적 연구방법에서는 도기에 그려진 도상을 그림이나 텍스트를 적용할 수 있다. 만일 성경에 나타난 텍스트가 없다면 옹기에 나타난 물고기 표식을 단순히 전통표식의 하나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이 표식이 옹기에 새겨져 있고, 이 옹기를 만든 이들이 성경을 접한 천주교 신자였다면 텍스트가 이 표식의 기초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물고기란 천주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의 의미였다. 로마에서 박해가 한창일 때 초대교회 신자들은 의사소통과 신분확인을 위한 암호의 한 형태로서 땅이나 '카타콤바(Catacomba)’ 벽에 물고기 그림을 그려 서로를 확인했다. 또한 카타콤바는 공동묘지 역할과 함께 일종의 지하 도시로 내부로 들어오면 출구를 찾기 힘들 정도로 아주 복잡했다. 미로와 같은 그곳에서 물고기 머리가 향하는 방향을 따라 자신들의 집회장소를 찾아왔다. 천주교 신자들은 자신의 신분을 다른 신자들에게 알리는 일종의 암호로 물고기를 그렸던 것이다.이러한 상황과 이에 대처한 신자들의 모습은 조선의 박해시대의 경우와 매우 흡사하다. 이들의 공동 집회 장소는 옹기가마로 재현되었고, 벽과 바닥은 옹기의 표면과 바닥, 내면 등에 물고기문이 재현되었던 것이다. 옹기에 나타나는 이러한 표시들은 박해를 받던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을 지키려는 노력이었다.
2)옹기의 십자문양
옹기나 사기점을 이루며 살았던 교우들은 옹기나 사기에 물고기 문양 뿐 아니라 교우들만이 알아 볼 수 있는 십자 문양을 새겼다. 사실 옹기의 십자문양이 언제 착상하여 제작되었는지, 어디에 어떻게 새겼는지, 당시의 사건들과의 관계는 무엇인지, 주문자와 제작자는 누구인지, 누구의 의도로 그 표식이 표현되게 되었는지 등을 알아내기는 어렵다. 그러나 십자 문양의 형태로 보아 교우들이 문양을 넣었음을 익히 알 수 있다.
▲ 등잔 아래 감실처럼 홈을 파고 그 안에 성모자상을 배치한 특이한 옹기등잔이다.
그 옆 좌우에는 옹기 호루라기가 놓였다.
교회 구전에 따르면,
이 옹기 호루라기는 교우촌을 지키려는 교우들이
새소리를 내 외부 침입을 알렸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십자 문양을 새긴 천주교 새우젓단지.
2009 울산세계옹기문화엑스포에 사진으로만 공개됐던 옹기로,
십자 표시가 선명하고 그 주위에 원을 그렸다.
1989년 세계성체대회 상징마크와 아주 유사하게 닮았다.
▲ 꽃잎으로 십자문양을 새겨 넣은 천주교 옹기 양이(兩耳)단지.
세로 부분에는 아카시아잎을 그렸고,
가로 부분에는 토끼풀(클로버) 문양을 그려
십자무늬를 형상화했다.
▲ 19세기 광주지역 민요에서 제작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청화백자들.
왼쪽은 전형적인 포도무늬 청화백자인데 반해
오른쪽은 포도무늬 끝부분에 십자표시를 그려 넣었다.
우연이라고 볼 수 있지만, 당시 제작된 포도무늬 청화백자에서도
십자 표시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천주교]교회문화재 30년 수집 김바오로ㆍ정율리아나씨 부부 기독교유물이야기 /
K.Chuch History〛
4. 옹기를 이용한 교우들 간의 연락방법
즉 옹기교우촌 신자들이 국내에서 활동하며 취했던 방법을 인용해 국경 근처에 상점을 중간 연락처로 생각했던 것이다.‘박해시대에 각 교우촌 신자들은 그들끼리만 알아볼 수 있는 표시를 옹기에 새겼다고 한다. 장날이 되면 그들은 표시를 해 둔 옹기를 팔러 장에 나가 회초리나 막대기 끝으로 그 표시를 치면서 민요나 타령을 불렀다고 한다. 이때 만나기로 한 다른 교우촌의 신자가 민요나 타령 소리를 듣고 찾아와 회초리나 막대기 끝을 보고 표시를 확인 한 후 회초리를 치고 있는 상대만 들을 수 있도록 “찬미예수”라고 말하면 상대는 “아멘”이라고 응답을 하여 신자임을 확인하고, 서로 통성명을 나눴다고 한다. 서로를 알아본 신자들은 어느 교우촌에서 왔는지를 서로에게 알리고, 다음과 같은 사항을 전달했다고 한다. 외국 신부들의 이동상황, 신부의 이동에 따른 세례성사·고백성사·미사 일정 및 이들이 행해지는 공소와 교우촌에 관한 정보, 박해의 시작과 멈춤에 관한 정보, 교우촌 공동체 간의 연락과 헤어진 교우 가족들의 안부 등 정보교환을 했다고 한다.'☞ 이는 1994년 전남 광양에서 한종오의 강연내용이다. 이때 강연을 했던 한종오는 성·황석두 루가서원의 사장으로 오기선 신부와 함께 성지 발굴과 개발을 위해 교우촌 조사를 해오면서 어느 老敎友로부터 전해들은 사실이라고 전하였다.앞서 언급한 기록들에서는 단지 비밀히 어떤 표를 정하여 연락을 했다고 언급한다. 이때 표시는 외국 선교사들의 행방을 전하거나 박해와 같은 위급 상황을 알리는 것으로, 신자들끼리 서로를 알아보기 위한 언어였다. 이러한 사실은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킬 것을 각오한 이들에 의해 비밀로 지켜졌다. 혹 이러한 사실이 알려질 경우 옹기를 깨 증거를 소멸시킬 수 있었다. 이로써 옹기의 어떠한 표시는 암호적 성격을 지켜낼 수 있었다.위와 같은 상황을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위 증언이다. 이 증언의 배경 역시 場이다. 이 증언은 어떠한 표시로 연락을 했다는 사료의 내용과도 부합한다. 회초리 끝으로 표시를 가리키며 타령을 불렀다는 증언은 매우 구체적이기까지 하다. 이는 눈에 쉽게 띄지 않는 곳에 십자표시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회초리 끝으로 그 표시를 가리켰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살펴보았듯 신자들이 자신들을 알리기 위한 표시로 십자표시를 활용했던 사례들을 통해 옹기에 새겨진 어떠한 표시는 십자표식임을 짐작할 수 있다.따라서 옹기에 새겨진 십자표식은 신자들의 신앙 활동이자 자신들이 신자임을 나타내기 위한 표시였다. 이러한 십자표식은 옹기의 표식으로 활용되면서 옹기의 기벽을 단단하게 하기 위한 작업에서 사용되는 도개에도 새겨지게 되었다. 십자표식의 도개자국은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도개의 표식과는 눈에 띄게 다른 것으로 그 용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참고자료[네이버 지식백과] “숨쉬는 갈색 도자기 옹기의 이야기 창작소재 개발”, 2010,
*공지사항*
1. 하느님의 종 124위 순교지 ․ 관련 성지 78곳 특별전대사 선포
2. 교황 방한 특별 심포지엄
2014년 5월 30일(금) 오후 1시30분. 명동 대성당
3. 장하다 순교자: 평화방송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4. 면형 강학회에 관심 있는 분들 소개하기.
5. 프란치스코 교황 축복 묵주 봉헌: 본인것과 다른이들을 위한 봉헌
예금주: 이용호
계좌번호: 농협 352-0062-9984-53
입금방식: 입금 후 솔뫼 전화(041-362-5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