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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위(軍威)지역 유적 자료집
1. 송림사(松林寺)
칠곡군 동명면 구덕리에 있는 송림사는 돌담장 안으로 들어서면 비교적 평탄하고 널찍한 터에 자리한 절 모습이다. 뜰 가운데 솟은 유명한 오층전탑 뒤로 삼성각과 산신각을 옆으로 거느린 대웅전이 의젓하고, 명부전 또한 탑을 바라보며 서향하여 앉았다. 그 주위로 지은 몇 채의 건물들이 드문드문 제 몫 만큼의 터를 차지하고 섰고, 탑의 왼쪽에 비켜선 석등을 비롯한 깨진 배례석, 또 다른 석등 부재들, 부도의 몸돌, 그밖의 석물들이 마당의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신라 눌지왕 때 아도스님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진흥왕 5년(544)진나라에서 귀국한 명관(明觀) 스님이 불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절을 창건하고 탑도 세웠다고 한다. 고려 선종 9년(1092)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중창된 송림사는 고종 22년(1235) 몽고병의 칩입으로 폐허가 된다. 복구된 절은 1597년 임진왜란 당시 왜병들의 방화로 소실, 재차 빈터만 남게 된다. 그뒤 숙종 12(1686) 기성대사(箕城大師), 철종 9년(1858) 영추(永樞) 스님에 의한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른다.
대웅전은 숙종이 글씨를 쓴 커다란 편액을 이마에 붙이고 있는데, 숙종 12년 1686년에 세워졌다. 정면 5칸 측면 3칸, 다포계 겹처마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보통 기둥과 기둥 사이의 너비는 비슷하지만, 송림사의 한가운데의 어간(御間)은 넓고 어간에 이어지는 좌우의 협간은 이보다 좁고, 가장 구석이 되는 양쪽 툇간은 아주 좁아져서 그 비율이 대략 3:2:1정도이다. 이에 따라 문짝도 어간에 넷, 협간에 셋, 그리고 툇간에 하나씩을 달았는데, 그 구실에 차이가 있어 묘미가 있다. 어간의 문짝에 넷 가운데 드나듦에 이용되는 것은 안으로 열리는 가운데 두짝의 쌍여닫이뿐이고, 나머지 두짝은 채광의 구실만을 하는 붙박이이다. 좌우 협간은 가운데 문짝이 안여닫이, 양 얖의 문짝은 고정되어 광창으로만 쓰인다. 툇간의 외짝문 또한 여닫을 수는 없고 채광창으로만 쓰임새가 한정되어 있다. 앞면 문짝 열두 개의 꾸밈새도 다양한 변주를 한다. 가운데 두 짝은 빗살문, 양 옆의 두 짝은 소슬꽃살문이 어간 문짝의 꾸밈이라면, 협간은 가운데 안여닫이가 소슬빗살문, 나머지 두 짝이 빗살문이다. 반면 툇간의 외짝문은 또 달라 정자살문이니, 문 열두 짝이 모두 닫혔을 때 보면 문살의 변화가 다기(多岐)하여 꽃살문이 화려한 어느 법당 못지않게 다채로우면서도 점잖은 품위를 겸하여 갖추고 있다. 어간에 둘, 협간에 각각 하나씩 남아있는 신방목은 그냥 지나치기엔 아깝다. 원래 벽 중간에 세운 문설주, 곧 벽선을 받쳤던 신방목이 지금 벽선이 없어진 채 양 볼에 새겨진 구수한 태극무늬와 연꽃무늬를 달고 하인방에 꽂혀 있다.
다포계 맞배지붕의 구성양식도 흔한 것은 아니다. 공포의 짜임이 기두 위에만 있지 않고 차례로 기둥과 기둥을 건너지르는 창방과 평방 위에도 일정한 간격으로 놓이는 다포계 공포양식은 대체로 팔작지붕이나 우진각지붕의 건축에서 채택된다. 맞배지붕의 경우는 기둥 위에만 공포를 두는 주심포양식이 보편적이다. 그런데 이집은 맞배지붕이면서 다포계 공포를 짜올려 두 양식의 조화를 시도하고 있다. 밖으로 이출목, 안으로 삼출목으로 짜인 공포가 놓인 위치도 미묘하다. 툇간의 평방 위에는 공포가 없고 협간에는 하나, 어간에는 두 개가 놓여 간격을 맞추고 있다. 기둥 사이의 거리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고안된, 자연스러우면서도 재미있는 발상이다.
대웅전의 앞면도 여러 가지로 흥미롭다. 다포계 맞배지붕 양식을 채택했을 경우 옆면 처리는 대개 두 가지 방식 가운데 하나를 취한다. 앞 뒷면과 마찬가지로 공포를 짜 올리는 다포양식이거나, 아니면 안쪽의 두 기둥을 귀기둥보다 높은 고주로 세워 마감하는 주심포양식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건물에서는 두 양식의 절충이 시도되고 있다. 기둥 넷을 평주로 세우고 그 위에 창방과 평방을 가로지른 것까지는 앞면과 동일한 다포계양식을 따르면서도 그 위에 놓일 공포는 생략하여 새로운 모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수법은 고식에 속하며 보기 드문 예가 된다. 기둥 사이의 폭도 고르데 분할되었다. 이 또한 쉽게 볼 수 있는 기법은 아니다. 대개는 가운데 칸이 양 옆 칸보다 넓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옆면의 앞 칸에는 띠살문을 달아 출입에 이용하고 그 위에 칸을 꽉 채우는 긴 빗살무늬교창을 얹어 앞면의 문짝과는 또 다른 변화를 보이는 것도 눈에 띄는 점이다.
건물 내부에서는 한결 이채로운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여느 법당과 달리 불단이 앞으로 돌출하여 그 앞의 공간이 아주 협소한 반면 상대적으로 불단 뒷면은 너른 것을 금방 알 수가 있는데, 이는 불단의 후불벽을 이루는 고주가 건물의 중앙선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건축 구조상 그럴 수밖에 없는 무슨 이유가 있었는지 아니면 집을 지은 대목이 무슨 다른 의도를 가졌었는지 궁금증이 솔솔 피어오르는 묘한 구조이다. 낮은 불단에 모셔진 삼존불은 국내에서 제일 큰 목불이라고 한다. 그 크기가 신앙적 관점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예술적 안목으로 본다면 그리 후한 점수를 주기는 곤란한 불상들이지 싶다.
이것저것 살피느라 분주하던 눈도 쉴 겸 밖으로 나와 법당을 한 바퀴 돌며 하늘을 올려다보면 처마 끝에 나란히 걸린 막새기와의 연꽃무늬는 투박스럽고 모란꽃 무늬는 퍽도 복스럽다.
대웅전과 같은 해에 건립된 명부전 역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지만, 대웅전과 달리 홑처마에 주심포양식을 취하고 있다. 이 집도 대웅전과 마찬가지로 옆면의 문치레가 다양하다. 어간에는 빗살문 세 짝을 달았지만, 여닫을 수 있는 것은 가운데 여닫이뿐이다. 양쪽 협간에는 기중 중간에 중방을 질러 그 위에 문얼굴을 내고 두 짝의 정자 살창을 내었다. 가장자리 좌우 툇간에는 벽체 중간쯤에는 교창을 닮은 빗살문 붙박이 광창을 두었다. 정면 5칸이 이처럼 변화로우니 보는 이의 눈이 지루하지 않다.
그린 솜씨를 접어둔다면 명부전 앞면을 제외한 3면 벽에 그려진 지옥도의 내용은 대단히 계몽적이다. 염라대왕을 포함한 저승의 판관, 시왕들이 죄의 경중을 심판하고 그에 따른 갖가지 고통을 묘사한 그림들이지만 생각만큼 끔찍하거나 무시무시해 보이지 않는 것은 조잡한 그림 솜씨 탓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저승에서 시왕이 죄를 심판한다는 개념은 불교의 정통적인 사상은 아니며 도교의 강한 영향과 우리 고유의 내세관이 혼합된 형태로 불교 속에 이입된 것이다. 절집 안에 어디에나 보이는 명부전은 그것이 외화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만해 스님 같은 이는 이를 저급한 불교문화의 예로 꼽으면서 절집 안에서 추방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또한 불교 속에 스며든 우리 민간 신앙의 한 흐름이니 막무가내로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송림사에서는 명부전 벽화가 우리 조상들의 서민적인 정서에 가장 가깝게 다가서 있는 유산일지도 모른다.
오층전탑 서편에 오롯이 서 있는 석등은 간주석이 지나치게 세장(細長)해 보이고 화사석도 중대석에 비해 너무 커서 원래의 모습인지 의심스럽다. 신라시대의 양식을 보이는 하대석과 중대석, 옥개석 등에서 송림사의 긴 역사를 더듬을 수 있다면 그래도 좋을 듯하다. 그밖의 온전히 못한 석물들은 마당 여기저기서 정원석 하나 정도의 구실만을 해내고 있다.
송림사의 부도밭은 절 밖에 있다. 절 문을 나서 담장을 끼고 길을 거슬러 200m쯤 가면 길가에 쌓은 축대 위에 작고 낡은 비각이 하나 서 있고 그 옆으로 윗부분이 달아난 석종형 부도 네 기가 나란하다. 부도밭이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보아 송림사의 사역(寺域)이 많이 줄어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비각 안에 옹색하게 들어선 비는 대웅전과 명부전을 건립한 기성대사의 비이다. 1772년에 세웠다.
* 오층전탑
전탑은 점토를 가마에서 구워 만든 전(塼), 즉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올려 만든 탑이다. 전탑은 인도에서 발생하여 불교의 전파와 함께 중국으로 전해진 뒤, 건축재로 벽돌을 즐겨 사용한 중국사람들에 의해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 나라에까지 전해지지만 이 땅에서는 그리 많은 전탑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현존하는 1500기 이상의 탑 대부분이 석탑이고 전탑은 오직 5기만 남아 있다. 이러한 현상은 벽돌이라는 재료가 갖는 상대적인 취약성 때문에 만든 것도 전해지는 것도 적겠지만, 그보다는 벽돌과는 생활 속에서 밀착되지 못했던 우리 민족의 기질 탓이 더 컸던 요인인듯 싶다.
5기의 전탑 가운데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경북지방에 남아있고 그 중에서도 안동지방에만 3기가 분포하고 있다. 왜 이렇게 안동지방에 집중적으로 전탑이 세워졌는지 아직 그 뚜렷한 이유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 이 지방에 지질적으로 퇴적암지대가 뒤섞여 있고 화강암지대에는 단층선이 지나는 관계로 탑을 쌓을 만큼 덩어리가 큰 양질의 화강암을 구하기가 어려운 반면, 벽돌을 구울 수 있는 좋은 개흙을 쉽게 확보할 수 있는 것이 그 이유라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지만, 널리 공인된 견해는 아니다.
재료가 다르고 축조 방법이 같지 않다보니 탑의 외형도 석탑이나 목탑과는 많이 다른 게 전탑이다. 그 형태상의 일반적인 특징을 나열하면 이렇다. 1) 주로 화강암이 된 단층기단을 채택한다. 2) 탑신에는 우주와 탱주의 표시가 없다. 3) 1층 탑신에 흔히 인왕상 등이 지키는 감실이 마련된다. 4) 지붕에는 아래위로 많은 층단을 두되 언제나 낙수면의 층단이 처마 아래의 층단보다 많다. 5) 각층의 지붕이 짧고 가파르다. 6) 5층 이상의 다층탑이 많다. 이러한 특징은 모전석탑에도 거의 그대로 적용된다.
송림사 오층전탑은 앞서 말한 대로 지금까지 전해오는 5기의 가운데 하나이고 안동지역에 있지 않은 2기의 전탑 중 하나이다. 전탑의 일반적인 특징대로 화강암과 토축으로 이루어진 단층기단 위에 탑신을 세웠다. 한변이 27㎝, 높이 6.2㎝되는 방형의 벽돌과 이것을 반으로 나눈 크기의 장방형 벽돌을 사용하여 쌓아올린 탑신은, 두드러지게 육중하고 높은 1층 탑신에서 갑자기 낮고 작아진 2층 탑신으로 올라가면서 급격한 체감을 보인뒤 그 이상은 체감률이 비슷하다. 1959년 탑을 해체, 수리할 때 밝혀진 바에 따르면 1층 탑신에서 원래 감실이 있었다고 하나 과거 어느 땐가 막아버려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벽돌을 한 장씩 나란히 놓아 처마를 삼은 옥개는 1층부터 차례로 처마 아래의 받침은 9․7․7․6․4단으로, 낙수면의 층단은 11․9․8․7․5단으로 줄어들고 있다.
탑신 위에는 상륜부가 거의 온전한 모습으로 솟아 있다. 그 구성을 보면 벽돌을 네모지게 쌓아올라가다가 네 귀에 풍령(풍경)이 달린 동판을 얹어 노반으로 삼은 위에, 금동으로 만든 복발, 앙화, 세 개의 보륜, 용차, 보주가 찰주에 차례로 꽂혀 있다. 찰주는 특이하게 나무를 다듬어서 겉에 동판을 씌웠다. 높이가 4.5m에 이르는 상륜부는 전탑에 남아 있는 유일한 신라시대 작품이었는데, 지금 것은 1959년 보수하면서 원형대로 모조한 것이다. 송림사 5층전탑은 몇 번인가의 보수가 있었지만, 통일신라시대의 형태를 간직한 탑으로 추정된다. 전체 높이가 16.13m이고, 보물 제189호이다.
1959년 탑을 해체 수리할 때 세 군데서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상륜부 복발에서는 12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는 청자상감원형합(靑磁象嵌圓形盒)이, 2층 탑신에서는 사리장치와 그 밖의 유물이, 그리고 1층 탑신에서는 목불상 2구가 수습되었다. 청자상감원형합은 분묘가 아닌 곳에서 출토된 청자의 예로서도 의미가 있고, 또 탑이 고려시대에 보수된 적이 있음을 알려주는 유물이다.
거두어진 유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리장치이다. 얇은 금동판을 이용하여 장식이 가득한 집처럼, 또는 화려한 가마처럼 만든 틀의 한가운데 열두 개의 고리가 붙은 녹색 유리잔이 놓이고 그 안에 역시 유리로 만든 녹색의 사리병이 안치된 이 사리장치는, 지금까지 국내에서 발견된 가운데 아름답기로 몇 손가락안에 든다. 찬란한 금빛과 조화를 이루며 눈을 황홀하게 하는 녹색 유리잔은 다른 의미로도 중요하다. 일본의 왕실 재산처럼 관리되는 정창원(正倉院)의 보물들 가운데 유명한 감색 유리잔이 있는데, 이것이 송림사 사리장치의 유리잔과 대단히 비슷하다. 일본 학계에서는 두 유리잔이 모두 당나라에서 수입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우리 쪽에서는 백제 양식을 발전시킨 신라의 작품이라고 맞서고 있는 문제의 물건이자 고대 한일관계의 비밀 한자락을 간직한 유물이다. 탑안에서 거두어진 사리장치를 비롯한 유물들은 일괄해서 보물 제325호로 지정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밖에 탑을 쌓을 때 사용한 벽돌 가운데 고누가 그려진 것도 있다. 벽돌공의 꼬챙이로 그려지고 와공의 불길에 의해 구워져서 조탑공의 손길에 장대한 탑을 이루는 하나의 벽돌로 쌓이기까지 많은 장인들이 힘든 노동의 짬짬이 고누를 두면서 왁자지껄했을 모습을 상상케 하는, 즐거운 미소가 떠오르는 민중적인 유물이다. 사리장치가 들어 있던 석함도 있다. 거북형의 몸체에 뚜껑도 거북 모양이라 마치 큰 거북이 작은 거북을 업고 있는 듯했던 이 석함은, 그러나 지금은 제 뚜껑을 잃고 어색한 새 뚜껑을 등에 얹은 채 대웅전 신방목 곁에서 그 어리무던한 표정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올려다보고 있다.
2. 군위 삼존석굴
팔공산의 서북편 능선을 경계로 나뉜 칠곡군과 군위군을 이어주는 도로가 908번 지방도로이다. 이 길을 이용하면 어느 쪽이든 삼존석굴에 닿을 수 있다. 그러나 이정표에는 모두 제2석굴암으로 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삼존석굴을 모두 그렇게 부르며 이를 당연하게 여긴다. 그 말에는 석굴암에 뒤이어 세상에 두 번째로 알려진 석굴사원이라는 뜻도 있겠지만, 석굴암에 버금간다는 자부심이 오히려 많이 담겨있으리라. 그 가치로 따진다면 과연 그럴 만도 하겠다.
바깥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채 부근 주민들의 치성터로나 쓰이던 삼존석굴의 존재가 학계에 보고된 것은 1962년이었고, 이 해에 바로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 제109호로 지정되었다. 석굴암이라는 완벽한 종교예술품이 그에 앞서는 과도기적 본보기나 선행양식이 없는 단번에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리라는 가정을 품은 채 그에 걸맞는 유물의 출현을 은근히 기대하던 사람들에게 삼존석굴은 더없이 맞춤한 유물이었다. 이렇게 하여 거칠게나마 자연암석에 새긴 마애불→천연석굴을 가공한 석굴→인공석굴의 축조라는 우리나라 석굴사원의 계보를 그리는 것이 가능해졌으니, 삼존석굴은 불교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그 무게는 자못 무거운 것이었다.
석굴은 수십 미터 넘는 바위 벼랑의 3분의 1쯤 되는 지점에 마련하였다. 입구는 밑변을 잘라낸 원처럼 둥그스름하고 내부는 궁륭형 천정에 바닥이 평평하다. 석굴의 안쪽에 자리하여 근엄하게 앉아있는 본존과 좌우로 두 협시보살이 서 있다. 대좌를 포함한 본존은 높이가 2.18m에 달해 중후하고, 광배를 갖춘 왼쪽 협시보살이 1.92m, 광배를 잃은 오른쪽 협시보살이 1.8m로 등신대의 키가 늘씬하다.
별석(別石)의 방형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본존상은 소발의 머리 위로 큼직한 육계가 솟았으며, 귀는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길고 크며 두툼하다. 얼굴에는 삼국시대 불상에 보이던 친근감있는 미소가 사라지고 위엄이 서렸으며, 위로 올라붙어 떡벌어진 어깨에도 힘이 실렸다. 두 어깨를 감싸고 몇 줄의 주름을 잡으며 흘러내리는 법의는 무릎을 지나 대좌아래로까지 늘어져 이른바 상현좌(裳懸座)을 이루었다. 오른손은 무릎밑까지 충분히 내려오지 않고 왼손도 단전 아래 놓인 게 아니라 손바닥을 뒤집어 자연스럽게 무릎 위에 올려놓아 불완전한 모습이기는 하지만, 몸을 온통 감싼 법의자락 밖으로 내민 두 손은 향마촉지인을 짓고 있다. 이 손 모습은 우리나라 불상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향마촉지인으로 주목거리가 된다. 두 무릎은 석굴 아래 마당에서 보아도 드러날 만큼 지나치게 얇고 빈약하여 얼굴과 상체에 흐르던 엄정함을 약화시키는, 다소 맥풀린 모습이다. 광배는 본존상과 분리된 바위면 위에 나타내었다. 아무런 무늬없이 두광과 신광을 두르고, 그 가장자리를 따라 불꽃무늬를 둘러 거신광(擧身光)을 삼았으나, 석굴안에 그늘이 지는 시각에는 자세히 살피기가 어렵다.
가운데 화불이 새겨진 삼면보관을 쓰고 왼쪽 발에 힘을 뺀 초보적인 삼곡(三曲) 자세를 취한 왼쪽 협시보살은 ‘으흠’하고 큰기침을 하고 난 뒤의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보며 서 있다. 왼손은 자연스럽게 내려 감로병을 들었고, 팔을 구부려 가슴에 댄 오른손은 새끼손가락으로 두 겹 목걸이에 매달린, 다슬기와 흡사한 영락을 가리키고 있다. 그 손목의 팔찌와 통통한 손등 그리고 목걸이가 도드라지게 눈에 든다. 무릎 위에서 크게 U자를 그리는 천의자락 안으로 두 다리를 따라 주름을 잡으며 흘러내리는 군의는 발목까지 덮었는데, 주름을 나타내는 음각선은 거친 대로 고졸한 맛이 있다. 소박한 대좌 위에 두 발은 덜 다듬어진 듯 모나고 투박하다. 머리 뒤로 연결된 보주형 두광은 안쪽의 원을 따라 열 장 연잎을 새기고 그 둘레에 띠처럼 돌아가며 당초문을 놓았으며 다시 그 바깥으로 불꽃무늬가 타오른다. 연잎과 당초문은 고담한 맛을 지녔다. 이 보살상은 누구라도 만져보고 싶은 느낌을 주지만 사람들의 손길이 많아 닿아 양 볼과 두 다리는 손때가 올라 반질거린다.
오른쪽의 협시보살은 그 모습이 왼쪽 협시보살과 닮은 데가 많다. 삼곡 자세, 삼면보관, 목에 뚜렷한 삼도, 목걸이, 발목까지 드리워진 군의 자락, 대좌에 그 위에 놓인 두 발 등은 거의 비슷하다. 다르다면 보관에 새겨진 보명(寶甁), 오른발 대신 왼발을 가볍게 구부린 점, 불룩 내민 배위에 올려놓은 오른손과 드리운 팔을 약간 앞으로 당겨 엄지와 검지로 구슬인가를 잡은 왼손의 모양 정도이다. 긴 눈썹, 낮은 코, 퉁퉁한 두 볼을 한 얼굴은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다.
본존의 무뚝뚝한 엄숙함과 두 보살의 세련되지 않았으나 명랑하고 아름다운 자태가 빚어내는 미묘한 분위기가 작은 굴 안에 가득하다. 본존은 석가여래의 근본 오인(五印) 가운데 하나인 향마촉지인을 하고 있으나, 두 협시보살의 모습으로 보아 불상은 미타삼존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향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석굴암 본존상을 아미타불이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삼존석굴 불상들에는 서로 다른 시대적 양상이 뒤섞여 있는 것으로 본다. 본존불 좌대가 두 무릎보다 넓은 점이나 그 좌대를 뒤덮은 옷주름이 대칭에 가까운 것, 두 협시보살의 삼면보관, 목걸이, 보주형 두광 등은 삼국기의 고식에 속하며, 본존의 큼직한 육계, 얇은 옷주름, 두 보살의 길죽한 몸매에 어울리는 신체 비례와 삼곡의 자세, 그리고 두광의 당초문 등에서 삼국 말기에 새로 수용한 수(隋)․초당(初唐) 양식이 가미된 것으로 평가된다. 통일신라 초, 7세게 말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석굴은 신라 소지왕 15년(493) 극달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질 뿐 그 아래 있던 절이 어떤 내력을 지녔고 언제 없어졌는지 따위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지금의 건물들은 모두 80년대 이후에 들어선 것이다. 비로전 앞에는 경상북도 문화재 제241호로 지정된 단층의 모전석탑이 있다. 화강암을 작게 다듬어 돌 사이에 삼물을 채우지 않고 차곡차곡 쌓아올린 이 탑은 네모진 집꼴인데, 원래의 모습인지도 분명하지 않고 기단도 대부분 마당에 깐 판석이 가리고 있다. 인공 연못가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58호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있다.
유감스럽게도 1996년 봄부터 석굴 안에서 불상들을 참배하거나 살펴볼 수가 없게 되었다. 절에서 내건 「관람안내」에는 그 이유를 “그 동안 내부를 제한없이 공개하여 삼존석불을 보존 관리하는데 많은 지장을 초래하여왔기에 부득이 석굴 난간을 낮추어 새로 중수하고 밖에서 관람하도록 하였습니다.”고 설명하고 있다. 아쉽지만 현재로는 석굴 아래 마당에서 멀찍이 올려다볼 도리밖에 없다. 마당에 마련된 참배단에 서서 엷은 음영에 잠긴 세 불상을 바라보노라면 저리 높은 곳까지 저만한 부피와 무게를 가진 불상들을 옮겨 모신 신라사람들의 종교적 열정에 감염되어 온몸의 솜털이 오스스 일어선다.
3. 양산서원(陽山書院)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에 있는 양산서원(陽山書院)에는 경재(敬齋) 홍로(洪魯, 1366~1392), 허백정(虛白亭) 홍귀달(洪貴達, 1438~1504), 우암(寓菴) 홍언충(洪彦忠, 1473~1508)을 배향하고 있다. 여기에는 경재 홍로의 《실기(實紀)》 목판과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 1621~1678)의 《휘찬여사(彙纂麗史)》의 목판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다. 그러나 최근에 도난의 염려가 있어 안동 국학진흥원에 기증하여 보관하고 있다. 서원은 익공집 목조와가 2동인데 조선말 대원군의 명령으로 한때 철폐되었다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홍경락(洪慶諾) 선생의 묘비에는 “선무원종공신 혼암홍공지묘(宣武原從功臣混庵洪公之墓)”라 쓰여 있는데 10대손 홍연구가 세웠다. 한돈원이 찬(撰)하였고 창녕 조병선이 서(書)하였다. 비의 높이는 총 2.03m이다.
4. 한밤마을
행정지명은 대율리(大栗里)인데, 이보다 널리 쓰이고 있는 정겨운 우리말 이름인 한밤마을에는 영천 최씨, 전주 이씨도 이웃하여 살지만 부림(缶林) 홍씨(洪氏)가 대성(大姓)을 이루어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마을 이름은 한밤마을이나 대율리말고도 율리(栗里), 율촌(栗村), 일야(一夜), 대야(大夜)라고도 부르는데, 이름 속에 마을 내력이 함께 들어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처음 이곳에 마을을 이루고 살던 사람들은 신천 강씨들이었고, ‘일야(一夜)’가 그 이름이었다. 950년경 부림 홍씨의 입향조가 되는 홍란(洪鸞)이란 선비가 가까운 남산리에서 이사해오면서 내쳐 불러오던 마을이름을 대야(大夜)로 고쳤다. 1390년 무렵 홍씨의 11대손 홍노(洪魯)라는 이는 마을 이름을 다시 한번 바꾸니, ‘밤 야(夜)’자가 좋지 않다고 하여 ‘밤 율(栗)’자로 갈았다. 이렇게 ‘대율(大栗)’로 정해진 이름을 오늘까지 쓰고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한자말이야 이리 바뀌고 저리 변했어도 우리말로는 달라진 게 없다. 일(一)이나 대(大)는 ‘크다’, ‘많다’,‘하나다’라는 뜻이 담긴 ‘한’이라는 우리말로 치자면 그게 그거고, 야(夜)든 율(栗)이든 우리말 소리는 ‘밤’이니, 거기서 거기다. 그저 ‘한밤’이면 될것을, 다만 얘기 속에는 마을의 묵은 나이를 짐작하면 그만이겠다.
모름지기 오래된 마을은 오래 된 나무가 있어야 하느니, 마을 초입의 청청한 솔숲, ‘한밤성안’은 한밤마을의 얼굴이자 자랑거리이다. 도로 양쪽 5천 평쯤의 터에 200년이 넘게 자란 늙은 소나무 수백 그루가 구불구불 이룬 숲은, 막힌 데 없는 마을 앞을 알맞게 가려주고 겨울의 찬 하늬바람을 조금은 녹여주며 여름에는 솔바람소리가 그늘보다 시원한 휴식처도 되겠거니와, 마을을 한층 운치있고 유서 깊게 만들어주는 구실도 그에 못지 않을 듯하다.
한밤성안 가장 아래쪽에는 낮은 돌담을 끼고 금줄이 쳐진 당산나무와 솟대가 솟았다. 3-4m는 될 화강암을 터슬터슬 모나게 다듬어 세운 솟대 앞면에는 ‘진동단(鎭洞壇)’이라는 글자를 새겨 이곳이 마을의 평안을 지키고 기원하는 장소임을 나타내었고, 옆면에는 ‘단기 사천이백구십구년(檀紀四千二百九十九年)’이라는 글자를 파서 솟대를 세운 해가 1966년임을 표시했다. 과거에는 팔공산에서 자란 정결한 나무로 오리를 조각한 솟대를 ‘비신’이라 하여 3년마다 새로 세웠으나, 그게 번거로워 아예 이렇게 돌솟대를 세웠다. 꼭대기 올라앉은 오리의 모양이나 만듦새가 가관이다. 엎어놓은 바가지에 시멘트를 발라 몸체로 삼고 그 앞뒤로 머리와 꼬리를 붙여 대충 오리 흉내를 내었으니, 그 무심함을 웃어야 할지 무성의함을 비웃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진동단 한옆으로 재미있는 ‘회의장’ 겸 ‘야외무대’가 마련되었다. 흙벽돌만한 돌들을 낮게 턱을 지어가며 부채꼴로 줄줄이 쌓아올려 ‘객석’을 만들고 앞에는 역시 돌덩이 몇 개로 ‘간이무대’를 꾸몄다. 여기에서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의 일을 논의하거나 돌아가며 노래라도 한 자리씩 주고받는 여흥을 즐긴다면 그럴 수 없이 어울릴 듯하다. 솔숲 안에는 인공으로 만든 연못도 있다. 이 연못에 물이 고이고 수초라도 몇 포기 자라면 숲의 윤기가 더하련만 지금은 잡초가 무성한 채 못가를 두른 석축이 하나둘 무너져가고 있다.
숲 안에는 석물이 세 점이 있다. 두 가지는 근래에 세운 홍씨 문중 인물을 기리는 비석이고 하나는 석탑의 기단이다. 비석은 홍천뢰(洪天賚) 장군의 비석와 홍효자를 기리는 비석이다. 홍천뢰 장군은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의병장으로 이 한밤 성안의 의병들을 모아놓고 훈련을 시켰다고 한다. 이 비석의 제자(題字)는 고 박정희 대통령이 쓴 것이다. 홍천뢰 장군의 비석 옆에 세워진 효자비는 부림 홍씨의 가문에 태어난 홍효자(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를 기리기 위한 비석이다. 1889년 대율리에 태어난 홍효자는 어릴 적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주위의 칭찬이 자자했다. 그의 나이 11세 때 어머님이, 26세 때 아버님이 각각 돌아가셨는데, 그때마다 3년 시묘살이를 하며 묘소 곁을 떠나지 않았다. 홍효자 역시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장사지내는 날 난데없이 날아온 까마귀떼들이 온 하늘을 뒤덮으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석탑은 1987년 경북대 인문과학연구소에서 펴낸 자료에 의하면 이 기단 위에 팔공산 골짜기에서 수습한 삼층석탑이 있었으며 그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 있으나, 어찌 된 노릇인지 현재는 각 면에 두 개의 안상이 뚜렷한 하층기단만이 남아있다.
한밤성안을 뒤로하고 마을 안길로 접어들면 이내 대문에 문패만 없다면 마을집과 전혀 구별을 할 수 없는 대율사(大栗寺)가 나온다. 이 절마당 용화전(龍華殿)이란 현판이 달린 단칸 보호각 안에 보물 제988호 군위 대율동 석불입상이 서 있다. 본래는 한밤마을의 옛 길가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마을에서는 모두들 미륵불로 알고 있고 그렇게 부른다. 높이가 2.65m로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조금씩 예스런 분위기를 풀어놓는 고살길을 따라가면 저절로 마을 한가운데 있는 대청(大廳)에 이른다. 한밤마을이 내세우는 또 다른 자랑거리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익공계 홑처마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덤벙추초 위에 놓인 두리기둥도 튼실하고 대들보를 비롯한 각 부재들이 여유로우며 짜임새로 간결하여 퍽 담박하고 건실해 보인다. 벽체없이 사방이 훌훌 트인 구조로 시원스럽고 집 전체에 높직하게 깐 마루도 넉넉하다. 한 때 학동들을 가르치는 서당으로 쓰였으며 지금의 마을의 경로당으로 쓰인다니, 아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멋진 경로당이 아닐까 싶다. 원래 절의 대종각(大鐘閣)이 있던 자리에 세운 건물로 조선 전기에 처음 세웠으나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인조 10년(1632)에 중창하였으며, 효종 2년(1651)과 숙종 32년(1706)에 중수된 기록이 있다. ‘군위 대율리 대청’이 공식 명칭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62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청 바로 옆에 있는 남천고택(南川古宅)은 가장 규모가 큰 집으로 ‘쌍백당(雙栢堂)’이라고도 하니, 두 그루의 거대한 잣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본 가옥은 250년 전에 부림 홍씨 우태선생의 살림집으로 그 후 주손(冑孫)들로 이어지면서 수차에 걸쳐서 중수하였다. 사랑채 대청 상부에 ‘崇禎後上之卽位二年丙申三月七日申時竪柱上樑’이라는 상량문을 보면 현종 2년(1836년)에 지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안채 역시 건축수법이나 정황으로 보아 사랑채와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는 100여년 전에 중수하였다고 전하며, 사당은 수년 전에 개축하였다고 한다. 원래 이 가옥은 ‘興’자형의 독특한 배치형태를 이루고 있었으나, 해방후 중문채와 아래채가 철거되어 현재의 모습만 남아 있고 대문채는 옮기면서 방향을 바꾸었다. 현재는 ㄷ자형의 안채와 ㅡ자형의 사랑채, 사당이 있고 주위는 자연석 돌담으로 경계를 이루고 있다.
한밤마을은 돌담치레가 유난스런 동네이다. 어쩌면 이 마을의 가장 생광스런 자랑거리가 바로 돌담장일지도 모른다. 대청으로 모여들고 또 대청에서 퍼져가는 고살길은 한결같이 돌담장 사이로 꼬리를 감춘다. 집집마다 돌담을 둘러 마을 대부분이 그러하니, 모르긴 해도 그 길이를 합하면 몇 천 미터는 너끈하리라. 마을 좌우로 비껴가는 개천에 지천으로 널리 냇돌을 주워다 솜씨대로 쌓아 마을을 구석구석 누비는 돌담장은 옛 것에 옛 모습대로 새로 손본 것은 그것대로, 무너지면 무너진 대로 온존하면 온전한 대로 사뭇 그윽한 정취를 자아낸다. 골기와지붕을 머리에 인 수십 채 고가 아래로 휘어지고 이어지면서, 때로는 그 위에 파랗게 이끼가 살아나고 또 때로는 담쟁이와 호박덩굴이 기어오르기도 하는 돌담장은 우리를 전설 속으로, 고향 마을로 몰고 다닌다. 담장 안으로 가장 많이 자라는 나무가 산수유, 호두나무, 감나무이다. 아른아른 산수유 피고 후드득 후드득 호두를 털며 말갛게 홍시가 익어갈 무렵의 돌담길은 한밤마을의 서정이다.
* 동림재(東林齋)
경북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에 있는 동림재는 의흥 예씨(義興芮氏) 시조 예낙전(芮樂全)을 제향하기 위한 공간으로, 100여년 전 1917년 2월에 건립된 팔작지붕 지붕으로 된 집이다.
부계군(缶溪君) 예낙전은 고려 인종 때의 인물로 고려조에서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지냈으며 의흥 예씨의 시조가 된다. 고려 인종 23년 을축년(1145) 11월에 예부시랑(禮部侍郞 : 正四品)으로 금(金)나라의 만수절(萬壽節)에 성절사로 다녀왔으며, 의종 때 보문각 학사(寶文閣學士 : 正三品)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 正二品)를 역임하고 의흥 부계군으로 봉군되었다. 《보한집(補閑集)》에 「한거(閑居)」라는 시가 남아있으니, 다음과 같다.
萬里行裝春已暮 멀리 나그네 길 차비에 봄은 이미 저물었고
百年契闊夜何長 앞으로 백년 살아갈 계획에 밤은 어이 이리도 긴가.
溪巖谷沼悠然樂 깊은 골짜기의 바위와 물소리를 유연히 즐기면서
掩戶山間別野庄 외진 산곡에 문을 닫고 있으니 또 다른 야장이로세.
집중유현록(集中儒賢錄 : 崔滋)에서는 “재주와 식견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으며 문장과 행실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才識過人文行名世]”라고 평을 하고 있다. 묘소는 의흥현(義興縣) 내 동림동(東林洞)에 있다.
5. 인각사(麟角寺)
《삼국유사(三國遺事)》는 고려 충렬왕 때인 1280년 때 일연(一然)스님이 지은 5권2책의 역사책이다. 1145년 김부식을 비롯한 11명의 편사관(編史官)이 왕명에 의해 편찬한 50권 10책의 기전체 사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더불어 고대사 연구에 가장 귀중한 책으로 꼽히는데, 특히 《삼국사기》에 누락되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준 점에서 의의가 크다. 왕력(王曆)․기이(紀異)․흥법(興法)․탑상(塔像)․의해(義解)․신주(神呪)․감통(感通)․피은(避隱)․효선(孝善)으로 항목을 나누어 고조선으로부터 후삼국까지의 역사는 물론 수많은 이야기를 싣고 있어, 우리 고대사 연구뿐만 아니라 지리․문학․종교․미술․민속 등 문화 전반에 관한 정보를 캐내는 데 없어서는 안될 금광과도 같은 책이다.
만일 《삼국유사》가 없었다면 우리의 고대사는 어떤 모습일까? 우선 우리는 민족사의 첫머리에서 단국신화를 지워야 할 것이다. 그래서 건국신화를 갖지 못한 허전함을 감내해야만 할 것이다. 다음으로 향가 14수를 잃어야 하리라. 그리하여 노래가 없고 서정이 사라진 건조한 고대사를 아쉬워해야 하리라. 그밖에 그 속에 담긴 수많은 신화․전설․설화가 스러져 우리 선조들의 생활과 사유는 물론 꿈까지도 길어올리던 샘이 말라버릴 것이다. 실로 《삼국유사》없는 우리의 고대사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리라.
군위군과 영천시의 경계에서 우뚝한 화산(828m)이 서쪽 산자락을 드리운 고로면 화북리에 인각사가 자리잡고 있다. 화산의 화려하고 기품 있는 모습이 마치 상상의 동물 기린을 닮았으며, 절이 들어선 자리가 기린의 뿔에 해당하는 지점이라 하여 ‘인각사(麟角寺)’라 이름지었다는 이 절은 신라 선덕여왕11년(642) 의상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로부터 640년 뒤 일연스님이 이곳에서 《삼국유사》를 완성하고 입적할 때까지 5년 동안 머물렀다. 인각사가 바로 우리의 소중한 유산 《삼국유사》의 산실이자 일연스님이 만년에 보낸 곳인 것이다.
일연(1206~1289) 스님의 속성은 김씨, 처음의 법명은 견명(見明)이었으며 나중에 이름을 바꾸어 일연이라 하였다. 경주의 속현인 장산군(章山郡 : 지금의 경산)에서 김언필(金彦弼)의 아들로 태어났다. 1214년(고종 1) 지금의 광주(光州)지방인 해양(海陽, 지금 경남 남해)에 있던 무량사(無量寺)에 가서 학문을 닦았고, 1219년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출가하여 고승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여러 곳의 선문(禪門)을 방문하면서 수행하였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의 추대로 구산문 사선(九山門四選)의 으뜸이 되었다. 1227년 승과의 선불장(選佛場)에 응시하여 장원인 상상과(上上科)에 급제하였다. 그 뒤 비슬산(琵瑟山)의 보당암(寶幢庵)으로 옮겨 수년 동안 머무르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참선에 몰두하였다.
1236년 10월 몽고의 침입이 일어나 병화가 전주 고부(古阜)지방까지 이르자, 병화를 피하고자 문수(文殊)의 오자주(五字呪)를 염하면서 감응을 빌었다. 문득 문수가 현신하여 “무주(無住)에 있다가 명년 여름에 다시 이 산의 묘문암(抄門庵)에 거처하라.”고 하였다. 이에 곧 보당암의 북쪽 무주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항상 “생계(生界), 즉 현상적인 세계는 줄지 아니하고 불계(佛界), 즉 본질적인 세계는 늘지 아니한다[生界不滅 佛界不增]”는 구절을 참구(參究)하다가 깨달음을 얻어서 “오늘 곧 삼계(三界)가 꿈과 같음을 알았고, 대지가 작은 털끝만큼의 거리낌도 없음을 보았다.”고 하였다. 이해에 나라에서 삼중대사(三重大師)의 승계(僧階)를 내렸고, 1246년 다시 선사(禪師)를 더하였다.
1249년 정안(鄭晏)의 청을 받고 남해의 정림사로 옮겨 이를 주재하였다. 이 절에 머무르면서 대장경 주조 중 남해의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의 작업에 약 3년 동안 참여하였다. 1256년 여름에는 윤산(輪山)의 길상암(吉祥庵)에 머무르면서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 2권을 지었고, 1259년 대선사(大禪師)의 승계를 제수받았다. 몽고의 침입이 계속되는 동안 남쪽의 포산 · 남해 · 윤산 등지에서 전란을 피하면서 수행에 전념하다가, 1261년(원종 2) 원종의 부름을 받고 강화도로 갔다. 강화도 선월사(禪月寺)에 머무르면서 설법, 지눌(知訥)의 법을 계승하였다.
1264년 가을 왕에게 남쪽으로 돌아갈 것을 여러번 청하여 경상북도 영일군 운제산(雲涕山)에 있던 오어사(吾魚寺)로 옮겨 살았다. 이때 비슬산 인홍사(仁弘寺)의 만회(萬恢)가 그 주석을 양보하였으므로 인홍사 주지가 되어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1268년에는 조정에서 선종과 교종의 고승 100명을 개경에 초청하여 해운사(海雲社)에서 대장낙성회향법회(大藏落成廻向法會)를 베풀었는데, 일연으로 하여금 그 법회를 주관하게 하였다. 그는 물 흐르는 듯한 강론과 설법으로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감화시켰다.
1274년 인홍사를 중수하고 협소한 경내를 확장한 다음 조정에 아뢰자 원종은 ‘인흥(仁興)’이라 이름을 고치고 친필로 제액(題額)을 써서 하사하였다. 또, 이때 비슬산 동쪽 기슭의 용천사(湧泉寺)를 중창하고 불일사(佛日寺)로 고쳤는데, 그의 〈불일결사문(佛日結社文)〉은 이때 쓰여진 것으로 생각된다. 1277년(충렬왕 3)부터는 충렬왕의 명에 따라 청도 운문사(雲門寺)에서 1281년까지 살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다. 이때에 《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281년 6월 동정군(東征軍)의 격려차 경주에 행차한 충렬왕은 일연을 불러 그의 가까이에 있게 하였다. 그때 일연은 뇌물로써 승직(僧職)을 구하는 불교계의 타락상과 몽고의 병화로 불타버린 황룡사의 황량한 모습을 목격하였다. 1282년 가을 충렬왕의 간곡한 부름으로 대전에 들어가 선(禪)을 설하고 개경의 광명사(廣明寺)에 머무르면서 왕실 상하의 극진한 귀의를 받았다. 이듬해 3월 국존(國尊)으로 책봉되어 원경충조(圖經沖照)라는 호를 받았으며, 이해 4월 왕의 거처인 대내(大內)에서 문무백관을 거느린 왕의 구의례(옷의 뒷자락을 걷어올리고 절하는 예)를 받았다.
그러나 늙은 어머니의 봉양이 마음에 걸려 몇 차례에 걸친 왕의 만류를 뿌리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산 아래에서 모시고 봉양하던 어머니가 1284년에 죽자, 조정에서는 군위 화산의 인각사(麟角寺)를 수리하고 토지 100여 경(頃)을 주어 주재하게 하였다. 인각사에서 당시의 선문을 전체적으로 망라하는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두번 개최하였다. 1289년 6월에 병이 들자 7월 7일 왕에게 올릴 글을 쓰고, 8일 새벽 선상(禪床)에 앉아 제자들과 선문답(禪間答)을 나눈 뒤 거처하던 방으로 돌아가서 손으로 금강인(金剛印)을 맺고 입적하였다. 그해 10월 인각사 동쪽 언덕에 탑을 세웠으며, 시호는 보각(普覺)이고, 탑호(塔號)는 정조(靜照)이다.
일연스님의 부도비에 새겨진 「보각국사비명」에서 추린 그의 행적이다. 부도비는 절의 한옆 작은 비각 안에 있지만 막상 안을 들여다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깨어지고 동강나 얇은 돌덩이에 가까운 두 조각 비편이 남아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오대산 월정사에서 사본(寫本)이 전하고 불완전한 대로 몇몇 옛 탁본이 세상에 알려져 비문의 내용을 거의 파악할 수 있는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탁본 가운데 윤광주(尹光周)라는 사람이 1701년에 쓴 서문이 붙은 것도 있는데, 그 서문에 “임진년 전란 때 섬오랑캐들이 이 비를 보고 ‘뜻밖의 왕우군의 진적(眞蹟)을 여기서 다시 보는구나’라고 하며 다투어 찍어냈다. 마침 겨울이라 불을 놓고 찍어내다 비를 땅에 넘어뜨렸다. 그뒤로 비석이 떨어지고 깎여 글자가 줄어들게 되었고 남은 조각도 손상되어 본래의 모습을 잃게 되었다. 아! 왜인들의 재앙이 어찌 그리 심한가?”라는 구절이 있다. 일연스님의 부도비는 이미 임진왜란 때 결정적으로 훼손되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흔히 과거 보는 선비들이 이 비의 글자를 깎아내 갈아마시면 반드시 급제한 다는 헛소문이 이 부도비가 심한 수난을 당했다는 말이 전하지만 이는 그저 귓등으로 흘려들어도 괜찮을 듯하다. 비문은 당시의 문신이며 문장가였던 민지(閔漬)가 짓고, 글씨는 왕우군(王右軍), 곧 왕휘지의 행서를 집자해서 새겼다. 일연스님이 입적한 지 6년만인 충렬왕 21년(1295)에 세웠다. 비의 말미는 이렇게 끝난다.
“겁화(劫火)가 활활 타서 산하가 모두 재가 될지라도 이 비는 홀로 남고 이 글은 마멸되지 마소서.”
극락전 오른쪽 마당가에 지대석까지 온통 드러내고 서 있는 비가 다름 아닌 일연스님의 부도이다. 일제강점기 일인들에 의해 도굴되어 화북 3리 둥딩마을 뒷산 부도골, 비명에서 말하는 ‘인각사의 동쪽 언덕’에 넘어져 있던 것을 옮겨 복원한 것이다. 신라 이래 가장 보편적인 부도 양식인 팔각원당형을 따르고 있다. 자연석에 가까운 네모진 지대석 위에 희미하게 복련이 새겨진 하대석이 놓였으며, 그 위에 팔각의 중대석과 상대석이 차례로 올라갔다. 중대석에는 우주로 구분된 8면에 동물상이 조각되었으나, 무슨 상인지 분명치 않다. 유난히 두꺼운 상대석에는 겹꽃 8장을 선각으로 돌리고 그 사이를 다시 홑꽃 연잎으로 메웠다. 상대석 위의 몸돌 역시 8면으로, 정면에서 두 줄로 ‘보각국사정조지탑(普覺國師靜照之塔)’이라는 글씨를 음각하고 뒷면에는 문비를 조각한 뒤 나머지 면에는 사천왕상과 보살상을 얕게 새겼다. 몸돌을 덮은 팔각의 지붕돌에는 아무런 새김도 없으며 추녀마다 귀꽃이 있지만 마모가 심하다. 상륜부에는 앙화, 보륜 그리고 불꽃무늬에 감싸인 보주만 남아 있다.
전체적인 형태가 퍽 둔중하고 짜임도 정교하지 못할뿐더러 새겨진 조각도 평면적 형식적이다. 고려 말기에 가까워지면서 점차 양식적으로 퇴화해가는 자취가 뚜렷이 보인다. 그렇더라도 국존이라는 지위에 있던 인물의 부도치고는 너무 초라한 느낌이다.
6. 남계서원(南溪書院)
군위군 군위읍 외량리에 있는 서원. 조선 중기의 문신 류성룡(柳成龍, 1542~1607)과 이호민(李好閔, 1553~1634년)을 배향하고 있다. 1581년(선조 14) 3월에 창건되었으며, 1607년 류성룡이 세상을 떠난 뒤 1621년 후진들이 중수하여 1627년 류성룡의 위패를 모시고 서원으로 승격시켰다. 1787년(정조 11)에 이호민을 추가 배향하여 봄, 가을로 봉향해 왔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이 전국의 미사액(未賜額) 서원을 철폐하자 위패를 하회로 옮겼으며 일부 건물만 남아 서당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6·25전쟁이 일어나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으나, 1990년에 영천 이씨, 남양 홍씨, 경주 이씨, 연안 이씨, 해평 김씨, 풍산 류씨 등 7개 문중 후손들이 뜻을 모아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였다.
서원 앞의 큰 바위에 ‘南溪洞天 西厓柳先生杖屨之所’가 새겨져 있다. 류성룡의 아버지 류중영(柳仲郢)이 남계서당을 짓고 ‘招隱臺’라 하였는데, 뒤에 남계서원으로 승격하였다. 군위읍 대북리는 류중영의 외가이며 류성룡의 진외가가 있는 곳이다.
7. 송호서원(松湖書院)
군위군 외량1리에 80번지에 있다. 모헌(茅軒) 이숙황(李淑璜 : 세조 때 인물), 남계(南溪) 이보(李輔, 1545~1608), 송오(松塢) 이진(李軫, 1536~1610)을 배향하고 있다. 1725년에 창건하여 1753년에 서당으로 발족하였다. 1798년에 사당을 건립하여 송호사(松湖祠)라 개칭하였다. 1815년에 송호서원으로 승격하였다. 1868년에 훼철되었다가 2011년에 복원하였다. 앞쪽에 강당을 두고 뒷면에 묘우인 상덕묘(尙德廟)를 둔 전학후묘의 배치이다. 강당 앞에는 솟을 삼문 형식의 문간채를 두어 입구를 사용하였다. 지형의 고저차를 이용하여 사당을 강당보다 높은 곳에 배치하였다. 사당의 우측에 비석과 비각이 있다.
8. 양천서원(良川書院)
고려시대의 문신이자 서예가인 정헌(靜軒) 홍관(洪灌, ?~1126)과 양파(陽坡) 홍언박(洪彦博, 1309~1363), 조선 중기의 문신 서담(西潭) 홍위(洪瑋, 1559~1624)를 배향하고 있으며, 남양(南陽) 홍씨 문중에서 소유와 관리를 맡고 있다. 1786년(정조 10)에 유교의 교화와 선행을 계승하여 문사를 배출코자 창건하여 남양 홍씨 후손들이 제사를 담당하여 오다가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이후 1926년 이 지역에 오랫동안 세거해 온 남양 홍씨 후손들에 의하여 복설되었다. 경내에는 총 5동의 건물이 있으며, 해마다 홍관의 기일인 음력 2월 26일에 제사를 지낸다.
양천서원신도비(良川書院神道碑)는 정헌(靜軒) 홍관(洪灌)의 비이다. 전액(篆額)은 ‘高麗尙書左僕射洪公神道碑’이지만, 전액의 주인공인 홍관(洪灌)은 말할 것도 없고 홍언박(洪彦博)과 홍위(洪瑋)의 내력까지 같이 서술한 특이한 형태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의 신도비에 세 사람의 내력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좀처럼 찾아볼 수 형태이다. 이 비석돌은 양질의 화강암으로 경남 진해 바닷가에서 캐어 낙동강을 거슬러 상주 낙동까지 배로 운반하여 왔고, 다시 위천을 따라 여기까지 뗏목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운송이 어려웠던 200여년 전의 일이니, 그 정성과 노고를 높이 살만하다. 비는 1858년 4월에 건립되었으며, 비문은 이종상(李鍾祥)이 지었고 글씨는 응천(凝川) 홍택주(洪宅疇, 1816~1886)가 썼다. 홍택주는 군위사람으로 문장이 뛰어났고, 특히 필법은 청나라의 원세개(袁世凱)와 이홍장(李鴻章)이 감탄할 정도였으며, 당시의 비판(碑版)은 그의 손을 거친 것이 많았다. 이 신도비의 글씨는 흥선대원군도 그것을 보고 감탄하면서 본받으려고 하였다한다.
또 서원 앞에 바위에 ‘吟風臺’와 ‘灘凉臺’ 그리고 ‘觀瀾臺’가 새겨져 있으며, 서원 안에는 정산(靜山) 홍재겸(洪在謙, 1850~1930)이 지은 양천서원중수기문이 걸려있다.
9. 광석재(廣石齋)
군위군 소보면 봉황리 699에 있는 광석재는 고려가 망하자 평생을 은둔하며 이름마저 ‘려(麗)’자를 ‘려’자로 고친 고려 충신 영천 이씨 이려(李려, 1384~1455)의 애국충절과 증손인 우암(牛巖) 이세덕(李世憲, 1476~1555)의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충주목사를 역임한 후손 만옹(漫翁) 이정기(李廷機, 1613~1669)가 건립하였다. 건물이 군위에서 소보 사이의 도로에서 좌측으로 꺾어 올라간 산기슭의 서북쪽을 향해 자리잡고 있다. 건물 왼쪽 뒤에 있는 모덕사(慕德祠)와 앞쪽의 관리사는 1982년에 신축한 것이다. 이 건물은 대지가 경사진 관계로 자연석을 기단으로 만든 후 집을 지었다. 기단의 정면에는 1칸폭의 넓은 계단을 설치하였다. 전체적인 평면은 ‘口’자형으로 되어 있다. 광석재 바로 옆에 십여기의 묘소가 있는데, 특이한 것은 각 묘소 앞에 있는 비석에 갓이 없다는 점이다.
10. 칠탄숙강당(七灘塾講堂)
경북 군위군 군위읍 외량리 795에 있는 서담 홍위(1559∼1624)가 성리학을 연구하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조선 인조 7년(1629)년에 지은 건물이다. 홍위는 조선 중기 문신으로 선조 34년(1601) 벼슬에 올라 통제영종사관, 춘추관기사관 등을 역임하고 광해군 때에 관직에서 물러나 후진양성에 힘쓴 분이다.
마을 뒤편 언덕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칠탄숙 강당은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건물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비교적 높은 기단 위에 서 있는데, 가운데 3칸은 개방된 마루이고 양 옆은 온돌방을 배치하였다.‘칠탄숙’은 일곱 여울이란 뜻인데 여울은 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 물살이 세차게 흐르는 곳이다. 동네 입구 첫여울을 열풍탄(烈風灘), 서애 류성룡 선생을 모신 남계서원 앞을 남계탄(南溪灘), 그 위의 여울을 선곡탄(線谷灘), 양천 여울을 양천탄(良川灘), 내량리를 중심으로 흐르는 곳을 내량탄(內良灘), 가마솥 모양의 산봉우리 앞 여울을 부봉탄(釜鳳灘), 마지막 일곱 번째 여울을 서담탄(西潭灘)이라하여 칠탄숙이라 하였다.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이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여기를 방문하여 ‘권학문(勸學文)’을 썼는데, 그 내용이 현판에 새겨져 걸려있다.
11. 양암정(兩岩亭)
경상북도 군위군 소보면 내의리 629에 있는 정자이다. 1989년 5월 29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16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문신 서담(西潭) 홍위(洪瑋)가 자연을 음미하며 송학(宋學)을 연마하기 위해 1612년(광해군 4)에 세운 건물이다. 1868년(고종 5) 불에 타 없어진 것을 1888년(고종 25)에 다시 세웠다. 경관이 뛰어난 위천(渭川) 옆의 절벽 끝에 있으며 주변에는 흙과 돌로 담장을 둘러놓아,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뒤로 돌아 정면으로 출입하도록 되어 있다. 정면에는 대문을 세웠으며, 문 오른쪽에는 ‘양암정’이라고 새긴 바위가 있다.
12. 북산서원(北山書院) : 절강장씨(浙江張氏)
군위군 군위읍 대북리에 있다. 이 마을에는 절강 장씨의 집성촌이다. 절강(浙江)은 중국 동남부 동해(東海) 연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양자강(陽子江) 하류의 남부를 점하고 있다. 전당강(錢塘江)에 의하여 동서로 나누어지고 항주(杭州)를 성도(省都)로 하고 있다.
시조(始祖) 장해빈(張海濱)은 중국(中國)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의 속현인 오강현 사람으로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유격장군 오유충(吳惟忠)의 휘하 장군으로 와서 울산의 증성(甑城) 싸움에서 유탄을 맞아 귀국하지 못하고 군위 대북리에 정착하여 살았다고 한다. 아버지 생전의 이름은 장응화(張應華)인데 명나라 태의감(太醫監)이고 할아버지 이름은 장충원(張忠源)이다. 명나라 과거에 등제되어 명나라 관청의 자사(刺史)였으며. 증조부는 장맹경(張孟慶)으로 명나라 국자진사(國子進士)였다.
여기의 후손들이 장해빈을 시조로 하고 고향인 절강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약 5,000명 정도 된다고 한다. 장해빈은 서원 뒤에 대명단(大明壇)을 만들어 조국 명나라를 사모하였다고 한다.
송희준(觀善書堂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