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흥안씨 후손은 죽산안씨의 거짓
족보로 순흥안씨 시조를 모독합니다.
-<협조사항>-
A. 글을 다운 받은 곳
(1) 출 처 : 순흥안씨 제3파 종회 게시판에 오른 글
(2) 게시판 : 295번
(3) 작성자 : 안 택 수 종회원님
(4) 작성일 : 2007년 12월 6일 (월) 21:01
-<협조사항>-
B. 글쓴이에 양해 사항
(1) 작성자 안택수 종원님의 양해도 구하지 못하고
(2) 본 카페에 올린 글에 너그러이 양해(諒解)를
(3) 해주시고 용납해 주시리라 사료되오며
(4) 윤허(允許)하여 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5) 아울러 게시판 395번의 글
(죽산 안씨 가짜 족보 실상을 봅시다. )
(2008. 5. 23. ) 과
(6) 게시판 394번의 글
(순흥안씨도 안씨라 거짓 족보를 가진 성씨인가요? )
(2008. 5. 14) 도
(7) 위의 공개된 글(395번과 394번)을
본 카페에 카페지기(안광용)는
안택수 종원님의 깊고 너그러운 도량(度量)에
은총을 입어 임의(任意)로 다운 받아서
글을 올렸으면 합니다.
(8)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면 윤허하여 주시는
것으로 알고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제목>-
순흥안씨 후손은 죽산안씨의 거짓
족보로 순흥안씨 시조를 모독합니다.
죽산안씨가 1976. 1999.에 그들의 족보를
날조하여(捏造) 거짓족보(僞譜)로 만들 이
유와 필요가 무엇일까? 참조문헌 등을 고
찰하여 고증하면서 그들의 범죄적 행위를
규탄한다.
죽산안씨는 본관을 같이 한 준(濬.또는 漢平).
영의(令儀)를 시조로 한 2개의 문중(門中)은
족보를 1744년. 1805년에 각각 만들기 시작한
다.
이들 시조라는 사람들은 고려중기 때 사람들
이다. 이 시조들과 이하 윗대 선조를 조종운
(趙從耘. 풍양조씨. 1608-1683.익위사익찬)이
붓으로 베껴(筆寫) 간행한 [씨족원류(氏族源
流)]의 기록을 베끼고 가승을 포함 하여 시조
이하 선조(世系)를 세웠다.
그러는 중에 순흥안씨(順興安氏) 측의 소위
[전의록(傳疑錄)]이 1800년대부터 등장(登場)
한다.
순흥이 전의록을 기록하는 배경은 광주안씨의
시조 아래 12대 결세(系缺)을 원주(原州)사는
안처대(安處大)가 [사간공후 감찰공파 29세손.
1730년대까지 생존하나 자손이 없음.
외가가 원주라(原州元씨) 원주에서 거주.
안정복(호 順菴. 1712-1792. 영조. 정조 때
실학자)공의 조부 서우(瑞羽. 울산부사 역임)
과 같은 항열(同行)이며 서우공과 같은 집안
의 처지로 서우공이 文科하여 한성에서 벼슬
할 때 왕래가 빈번 했을 것임.]
그가 1719년에 충북 충주 위류면(忠州圍柳面)의
순흥안씨집 (혹운 순흥의 外孫 김씨家)에서 윗대
12대를 베껴서(筆寫) 한성의 서우공에게 갖다
주었는데 그 기록 중에 순흥의 시조인 자미(子美)
공의 이름 (名. 諱)를 광주안씨 10세 (諱 弘美)의
아우(弟)로 기록하였으니 순흥 측에서 시조의
윗대(先系)로 반신반의 (半信半疑)로 선뜻 인정
(認定)이 어려우니 족보에 별도로 [전의록(傳疑
錄)]으로 하면서 소위 “농서이씨동래설(隴西李氏
東來說)”까지 섞어서 기록 한 것이 보인다.
이 풍설(風說)을 광주안씨 안정복은(順菴)은 [거
짓을 바르게 밝힘(辨誣)]으로 경계(警戒)하였다.
이런 현상을 1930년대까지 죽산안씨 측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유는 그 조상 선대의 계통이(系出)
이 광주와 순흥의 일이므로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09년쯤 안윤채(安潤采.彩). 안력(安瓅.
重瓅)이 죽산안씨라고 하면서 “麗末世譜”. “안윤
채집의 문서(家錄)”. “麗末御本古譜”라는 문건을
죽산안씨세보(1923.계해)의 범례에 써놓고 “믿지
않는다(尙難徵信)”하고. [안씨동원보(安氏同源譜)]
라고 하여 죽산의 족보에는 부록(別錄)으로, 조선씨
족통보(朝鮮氏族統譜. 1924. 윤창현 편찬)에 안씨
근원(安氏根源)으로 기록하였다. 1908년 증보문헌
비고(增補文獻備考)에 그것이 기록되기도 하였다.
(순흥의 安在亨의 기록과 일치)
조선씨족 통보와. 1923년 죽산안씨 세보 속의 안윤채
가록의 거짓을 꾸며 광주안씨 2世이하의 이름(諱)을 모
방(模倣)하여 항열자(行列字)처럼 그럴듯하게 만들고,
심지어 시조라는 안방준(安邦俊)은 809-879년으로 낳
고, 죽은 해로 하고. 2세부터 6세. 8세의 부인의 姓과
그 父名. 官職까지 新羅末. 高麗初 (800-980년) 사람인
것처럼 그 기록을 조작(造作)하여 두 문중(濬. 令儀)을
하나로 묶어 동성동본(同本同姓)의 곤궁(困窮)을 피해
보자는 것이라 추정한다.
이원의 세 아들이 신라 경문왕 때 갑신외란(甲申外亂)
이니 왜란(倭亂)이니 사실(史實)에 없는 전공(戰功)으로
성을 받고(賜姓) 이름을 바꾸고(改名). 군호를 받고(封君)
등 거짓을 꾸미고. 광주안씨. 순흥안씨 시조와 상대선조
들을 끼워 넣어, 거짓족보(僞造族譜)를 만든 것이다.
뿐만 아니라, 1976년 대동보의 착오 부분을 고친다면서
1999년 대동보에서는 중국 당나라 고조(첫 황제 高祖.
李淵)의 일가라 하여 종실인(宗室人)이 이원(李瑗)이고
고성이씨의 시조 이황(固城 李璜)과 형제라면서 당나라
황제의 일족이고 중국사람의 후손인양 하는 것은 어처
구니없는 짓이다.
중국 당나라의 역사서인 구당서. 신당서(舊唐書. 新唐書)
의 당나라 종실인 국정(國貞)의 아들이 아니다.
더구나 저들은 광주. 순흥. 신죽산. 탐진 안씨가 죽산안씨
와 한 할아버지 자손 혈통이라고 현혹(眩惑)하는 거짓을
저지르고 있다.
(‘76죽산대동보간행사-안명선.’99죽산대동보간행사-안효열.
안씨원류-안국승.죽산대종회보7.8호-안국승.죽산대종회보
10호-안민규.)
오늘날 20세기.21세기의 열린 시대에 족보를 거짓으로
꾸며 중국 당나라 황제의 일족인양 성씨시조를 세움은
부끄러운 짓을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광주. 순흥안씨는 죽산안씨 시조가 누구든 관계치 않을
일임에도 두 문중의 시조와 상대 선조를 방자하게 끼워
넣어 모독함에 분노하는 것이다.
그러나, 광주안씨 대종회는 2007. 2월. 5월에 죽산안씨
대종회에 이를 온건한 표현으로 통지하였다.
죽산안씨 측은 이 잘못을 철저하게 깨닫고 모든 기록과
기사를 다 고쳐야 할 것이다. 아울러 광주안씨. 순흥안
씨 후손들은 이 사실을 알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