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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 |
시중 祥公 |
최치원 기록 |
비고 |
신라42대 흥덕왕 (재위 826-836) |
흥덕왕조에 公 출생(추정) |
고운과 30년(나이 차이로 추정) | |
희강왕(836-8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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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애왕(838-8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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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무왕(839-8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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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왕(839-857) |
조정에 출사(추정) |
857년 최치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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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안왕(857-8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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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문왕(861-875) |
868 당나라로 유학(1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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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강왕(875-886) |
시중에 재직 중 (나이 50후반-60초반 추측) |
879 토황소격문 885 귀국(29세) 조정출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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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왕(886-887) |
상공 下世(추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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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왕(887-897) |
894 시무10조 건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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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공왕(897-912) |
897 상표문 작성 908 생존(51세)이후 불명 |
중국에서 귀국한 고운은 헌강왕 10년인 서기 885년에 나이 29살에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라는 職에 임명되어 출사하였는데 당시 祥公은 侍中에 在職 中이거나 시중을 그만 두고 은퇴해 있거나 했을 때이므로 公의 연치는 50중반에서 60종반 사이로 보아야할 것이다. 이러한 나이 차이에도 서로 交遊한 것은 미루어 짐작컨대
첫째, 조정에 출사한 孤雲과 侍中인 公이 자주 정사를 논의함에 따라 서로 의기가 투합하였을 것이며,
둘째, 당시 신라 조정은 이미 혼란상태의 연속이라 그 끝이 보이지 않자 고운은 조정을 떠나 전국을 떠돌며 名士들과 交遊할 때 이미 은퇴해 있는 당대 大文章家 祥公과도 만나 나라를 걱정하고 그 분노를 문장으로 주고받으면서 연치(年齒)를 뛰어넘는 友情을 나누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 族譜에는 청주곽씨의 始祖가 祥公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신라 경덕왕 16년 서기 757년 이후부터 곽자의 증손자가 신라에 정착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최초로 정착한 이와 祥公과는 120여년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신라에는 이름만은 전해지지 않으나 곽씨가 살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부문은 硏究의 對象이니 後學들에게 그 짐을 맡기지 않을 수 없다.
청주곽씨의 발원지이자 곽문의 중심 성지인 상당사 앞뜰에 서니 이름모를 새들이 명암계곡의 정적을 깨우기에 몇 자 적는다.
鳥語亂聞靜上黨(조어난문정상당) 산새들 지저귀나 상당사는 고요하기만 하고
吾門飄勢創新榮(오문표세창신영) 우리 문중 세를 넓혀 새로운 영화를 만드세.
사진: 상당사 전경
性淸廉, 工文詞, 以吏能
參知政事文成公元中始祖(4세)할아버지
公의 諱는 元이요, 諡號가 文成이다. 시조 상공의 4세손으로 고려 광종(재위 949- 975년) 20년경에 청주 上黨縣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한다.
공이 태어난 광종조는 고려 건국이후 왕권을 확립하였던 시기였으나 경종(재위 975-981년)이 등극하고 부터 다시 豪族功臣들이 정치의 중앙에 서면서 혼란이 재발하게 되지만 경종이 재위 6년 만에 죽자 성종(재위 981-997년)이 등극하여 儒學政治理念을 도입하여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니 이때가 고려 조정과 사회가 가장 안정된 시기이고 국방도 튼튼해진 시기이었다.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유교사회 건설을 정치이념으로 내세운 성종은 유학과 生活學問을 높이기 위한 교육정책을 일관되게 실시하여 온 나라에 공부하는 자들이 많아지니 知識基盤이 확충되었고 이들 중 뛰어난 인재를 科擧로 뽑아 등용하였다.
元公은 성종 15년 서기 996년에 갑과에 급제하여 기거사인(起居舍人 종5품)에 임명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한다. 高麗史烈傳 郭元條(제7권)에 공에 대한 인물평이 있다. “공은 성품이 청렴하고(성청렴 性淸廉), 문사가 뛰어 났으며(공문사 工文詞), 관리로서 능력이 탁월하다(이이능 以吏能)”고 공을 評하였다.
또한 公은 愛國心이 열렬하였고 기개(氣槪)가 장렬하였는데 그 증거로 현종 원년 1010년과 현종 8년 1018년에 거란이 2차 3차로 고려 북방 국경을 침입하자 앞장서서 參戰한 것을 들 수 있다.
왕 조 |
문성공기록 |
고려4대광종(재위 949-975) |
970년경 출생(추정) |
5대경종(재위 975-9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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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성종(재위 981-997) |
996 과거급제 中書門下省起居舍人 |
7대목종(재위 997-1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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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현종(재위 1009-1031) |
1011(현종2년) 中樞院 直學士 1016(동 7년) 民官侍郞 1017(동 8년) 禮部侍郞 翰林學士 1022(동 13년) 散騎常侍 1023(동 14년) 判中樞使 1025(동 16년) 형부상서 추성문리공신상주국 1027(동 18년) 參知政事 1029(당 20년) 별세 |
문성공은 과거를 통해 등용된 관리로 현종조에서 뛰어난 다음의 업적을 달성한다.
첫째, 고려와 중국 宋나라 양국이 합동작전으로 거란을 견제하는 정책을 시도하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문성공이 서기 1015년 고려국 사신으로 송나라에 갔다. 당시 송나라는 거란국과 맺은 1014년 전연맹약(盟約)으로 거란에 과도한 조공(租貢)을 바치고 있어 나라경제가 매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조정과 국민의 自尊心이 심히 훼손된 시기였다. 이러한 사정을 간파한 문성공은 고려와 송나라가 합동작전으로 거란을 견제하여야 겼다는 원칙을 가지고 송나라 황제와 會見했을 때 그 뜻을 전했으나 문성공의 정책을 원칙적으로 옳은 것임을 알지만 거란의 보복을 두려워한 송나라 황제와 조정이 採擇치 않으니 공의 절묘한 계책은 수포로 돌아가고 송나라의 國運도 점점 쇠퇴하여 가고 만다.
둘째, 自主國防의 기틀을 만드는데 기여한다.
송나라를 다녀온 문성공은 귀국하여 송나라 實情을 상세하게 임금과 조정에 보고한다. 이에 고려 조정은 송나라의 군사력이나 경제력 등 국력이 약할 대로 약하니 송나라를 믿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자주국방의 태세를 강화할 목적으로 용호군(龍虎軍)과 응양군(鷹揚軍)을 설치하여 훈련을 강화하게 되니 고려의 국방은 더 없이 강하게 되었다.
셋째, 과거제도의 改革으로 학문을 진작(振作)시키고 人才를 널리 등용하게 하였다.
고려에 과거제도가 도입된 것은 서기 958년 쌍기에 의해 중국의 과거제도를 모방한 것에서 由來되었다. 그 동안 제도의 改善과 補完 등도 없이 시행해온 과거제도에 대하여 문성공은 송나라에 사신으로 巡行하면서 감명 깊게 깨달고 얻은 것은 송나라 학문, 즉 宋學이 발흥되어 있음이었다. 公은 王에게 주청하여 科擧試驗科目에 禮記 중에서 의(義)를 추가할 수 있도록 하였다.
禮記가 과거시험과목으로 채택됨은 학문적으로 性理學 발전의 근간(根幹)을 여는 일대 계기가 되었다. 곧 새로운 儒敎發展의 일대 轉換期를 맞게 하였다는 것이다.
넷째, 고려의료계 발전의 단초를 제시하였다.
공이 사신의 責務를 끝내고 귀국할 때 송나라 황제의 여러 가지 선물과 별도로 수집한 많은 書冊을 가지고 오게 된다. 여러 가지 物目 중에서도 서적은 더없는 큰 價値를 가지게 된다. 서적 중에서도 특히 의서(醫書)인 성혜방(聖惠方)은 고려 의료계(醫療界)에 중대한 공헌을 함은 물론 먼 훗날 조선 허준(許浚)이 저술한 동의보감(東醫寶鑑)의 편찬 자료로도 활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문성공은 현종 재위기간에 승차를 거듭하여 참지정사에까지 오른 淸廉한 高官이었다. 이에 公의 年譜를 大略으로 서술해 본다.
* 고려 광종 20년(970년)경 청주 상당현에서 출생
* 성종 15년(996년) 과거(갑과) 급제 종5품 中書門下省 기거사인(起居舍人)
* 현종 2년(1011년) 中樞院 直學士(정3품)
* 현종 6년(1015년) 宋使臣, 거란 침범에 대한 공동방위책 제의
* 현종 7년(1016년) 民官侍郞(정4품)
* 현종 8년(1017년) 禮部侍郞 翰林學士(정4품)
* 현종 10년(1020년) 과거제도 개혁(禮記를 科目으로 추가)
* 현종 13년(1022년) 산기상시(散騎常侍 정3품), 거란에 사신으로 파견됨
* 현종 14년(1023년) 判中樞事
* 현종 16년(1025년) 刑部尙書, 추성공문리공신상주국이란 號 제수받음.
* 현종 18년(1027년) 參知政事(종2품)
* 현종 20년(1029년) 별세
문성공은 正義心이 강하고 責任感이 뚜렷한 性品의 소유자이다. 공이 참지정사 시절에 현종에게 아뢰기를 여진은 야만족이니 德으로 회유하지 말고 힘으로 제압(制壓)하여야 한다고 했으니 공의 기백(氣魄)과 식견(識見)이 얼마나 출중한지 짐작할 수 있다.
거란에서 발해국(渤海國) 시조 대조영(大祚榮)의 후손 대연림(大延琳)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고려에 지원을 요청하자 반대파의 격렬한 반대에도 무릅쓰고 군대 파견을 주청하여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오히려 敗退하니 강직한 성품의 공은 그만 분하고 무안(無顔)하여 등창이 터져 현종 20년인 서기1029년에 그만 일생을 마감하고 만다.
門中에서는 공의 影幀을 상당사에 모셔두고 매년 음력 10월 3일에 祭享을 올리고 있다.
사진: 영정
未來叡智力 뛰어난 政丞
參知政事順顯公 尙 할아버지
公의 諱는 尙이고 字는 元老로 아버지는 증(拯)이시며 문성공 元이 할아버지로 고려 덕종 3년인 서기 1034년 청주 상당현에서 태어나 예종 원년인 서기 1105년에 下世하니 歲首가 73세였다. 시효(諡號)는 順顯이다.
고려 11대 문종이 장기간(37년) 권좌에 있다 죽고 그의 큰아들 순종이 왕위를 계승(繼承)하였으나 그는 등극 3개월 만에 죽으니 문종의 둘째아들 운(運)이 고려 13대 선종에 오르게 된다. 선종은 왕자시절 중원경(현재의 충주)에 살았다. 그가 충주 잠저(潛邸)에 있을 때 公은 지방관서의 하급관리로 있었는데 왕자 運이 불러 가까이 지내게 되자 공은 誠心을 다하여 그를 돌보아 섬기게 되었다. 이것이 因緣이 되어 運이 임금으로 등극하자 왕위에 오른 운은 공을 곧바로 불러 監察御使로 등용하였으며 그 후 승차를 거듭하여 參知政事, 수사공(守司空)을 역임한 후 은퇴 落鄕하여 향리에 살다 生을 마감하였다.
왕 조 |
재위기간 |
尙公 기록 |
고려9대 덕종 |
1031 - 1034 |
-1034 출생 |
8대 정종 |
1034 - 10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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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대 문종 |
1046 - 1083 |
-상당현 관리 재직중 -왕자(순종) 보좌 |
10대 순종 |
1083 - 10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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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대 선종 |
1083 - 1094 |
-1083 감찰어사 출사 |
12대 헌종 |
1094 - 10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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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숙종 |
1095 - 1105 |
-1102 참지정사 |
14대 예종 |
1105 - 1122 |
-1105 별세 향년 73세 |
順顯公이 조정에 출사한 때는 佛敎와 儒敎의 발전이 균형적이어서 사회가 평온하였으며, 특히 정치도 비교적 안정적이고 國際關係도 대체로 안정을 유지한 때이었다.
공이 政丞의 반열에 있었으나 청렴(淸廉)하였다. 고려사에 보면 “郭尙은 성품이 질박하고 정직하여 별다른 재주는 없으나 평생 生産에 일삼지 않아 남은 자산(資産)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공은 先祖에 대한 존경심이 특출하여 侍中公(始祖)의 명예를 지키고 할아버지 文成公(元)이 국가의 공신이라 功臣家의 자긍심을 이어가고 엄격한 아버지의 訓育을 생활신조로 하여 삶을 살았으니 자연이 私心을 버리고 正正堂堂한 處世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공은 숙종 임금의 信任이 두터웠다. 공이 서경유수로 부임하여 임기도 채우기 전에 숙종이 內職으로 부르자 간관(諫官)이 간(諫 )하기를 “郭尙이 서경유수로 나가 있는 동안 이렇다 할 실적이 없으니 3년 임기나 채운 후에 부르도록 하자”고 했으나 왕은 간관의 간언을 묵살하고 형부상서(刑部尙書)로 불렀을 뿐만 아니라 품계(品階)를 더하여 우복야참지정사에 임명한 것으로 봐서도 공에 대한 숙종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공은 미래를 예측(豫測)할 줄 아는 뛰어난 재주를 가진 관리였다. 숙종 7년 서기 1102년에 윤관 등 조정의 대신들이 전폐(錢幣 당시의 주조화폐) 사용을 추진하자 이를 반대했다. 이는 고려 풍습(風習)에 적합하지 않은 것이니 엽전의 유통은 백성들이 불편해 하고 원망의 대상이 될 것이니 채택을 완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공의 반대에도 이 제도는 채택되어 시행하게 되었으나 백성들의 호응(呼應)은 고사하고 원망만 누증(累增)되기에 이르니 자연 흐지부지되고 일부 특수계층에서만 유통되다 이도 없어지게 된다. 엽전 유통정책은 당시 시대적으로 불가한 정책임을 公이 간파(看破)하고 왕에게 國力의 낭비를 초래하지 말기를 간언(諫言)하였던 것이다.
공은 엽전유통정책의 반대 인물로 지목되어 반대파들과는 정무(政務)를 수행할 수 없게 되자 미련을 버리고 관직에서 물러나 鄕里로 낙향하여 있다가 2년 후인 예종 원년인 서기 1105년에 歲首 73세로 일생을 마감하였다. 문중은 청주 상당사 경내에 공의 設壇을 축조하여 매년 음력 10월 3일에 祭享을 올려 공의 崇高한 정신을 기리고 있다.
순현공의 연보를 다음과 같이 약술한다.
* 고려 덕종 3년(1034년) 청주에서 출생
* 선종 1년(1083년) 監察御使에 이어 추밀원 좌승선(樞密院 左丞宣)으로 영전
* 숙종 1년(1095년) 戶部尙書 겸 西京留守
* 숙종 3년(1098년) 刑部尙書
* 숙종 7년(1102년) 상서 겸 우복야참지정사
* 숙종 8년(1103년) 수사공(守司空, 정1품)
* 숙종 8년(1103년) 은퇴 후 낙향
* 예종 1년(1105년) 73세로 下世
사진: 설단 정경
신선을 동경한 金門羽客
東山處士 眞靜公 輿 할아버지
1.公의 行蹟
公의 諱는 여(輿)이고 字는 몽득(夢得)이며 시호(諡號)가 眞靜이다. 공은 고려 12대 임금 문종 12년인 1058년에 아버지 참지정사(參知政事) 순현공(順顯公 )휘 尙의 둘째아들로 상당현(지금의 청주)에서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부터 글공부를 열중하였다고 한다. 고려사 열전(高麗史 列傳)에 의하면 “공은 어렸을 적에 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이름을 輿라고 하라”고 하자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꿈에서 얻은 이름 「輿」자는 「수레」라는 뜻이 있다. 이 수레(여)는 사람들이 떠메고 다니는 王者(왕이 될 사람 또는 왕)의 수레 또는 왕자와 함께 타는 수레를 의미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공은 고려 16대 예종과는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초월(超越)한 심교(深交)를 한 예종의 사부(師父)였다.
고려사 열전에 예종이 동궁(東宮:왕세자)으로 있을 때부터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을 지낸 공을 사모하였는데 왕으로 등극하자 공을 불러 궁중(순복전純福殿)에서 학창의(鶴氅衣)와 오건(烏巾)의 道士차림으로 왕의 左右를 떠나지 못하게 하니 사람들이 금문우객(金門羽客:왕궁 안에 있는 신선)이라 불렀다.
예종은 공이 혹이라도 宮 밖으로 나아갈까 염려되어 궁 안에 별장을 하사하여 거처케 하였으나 공이 궁 밖에 살기를 극구 청(請)하니 왕은 약두산(若頭山)의 한 봉우리를 하사하고 집을 지어 살도록 허락하였다. 이에 공은 집을 짓고는 스스로 아호를 동산처사(東山處士)라 하고, 당호(堂號)를 허정당(虛靜堂), 서재를 양지재(養志齋)라 지으니 임금이 현판(懸板)을 하사하였다고 고려사 열전에 기록이 전한다.
이처럼 진정공은 예종과는 친구이상의 교분을 나누었으니 어찌 관포지교(管鮑之交)나 수어지교(水魚之交:유비와 제갈공명의 군신관계를 말함)에 비하겠는가. 진정코 임금과 신하가 아닌 순수한 自然人으로서 人間對人間의 관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예종은 산책을 나와서는 종종 虛靜堂을 들러 공과 詩를 주고받으며 풍류를 즐겼다. 이처럼 공을 좋아했던 예종이 죽자(서기 1122년) 공도 적막과 공허한 세월을 보내다 8년 뒤인 인종 8년(서기 1130년)에 하세(下世)하니 세수가 72살이었다. 공이 졸(卒 )하자 인종은 당대의 대문호(大文豪) 정지상(鄭知常)에게 산재기(山齋記)를 짓게 하고 碑를 세웠으며 진정이란 시호를 내렸다.
공은 시문에 뛰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냄새나는 마늘을 먹지 않았을 정도로 천성(天性)이 청정(淸淨)하였으며 아이들과도 노는 것 보다는 학업에 열중하니 군계일학(群鷄一鶴)이었으니 이미 이때 비범(非凡)하였던 것이다.
2.공의 가계도와 생존시대
문성공 元
증(拯)
순현공 尙
진정공 輿 문충공 坦
동순 동락
(2)공의 생존시대
왕 조 |
재위기간 |
진정공 기록 |
고려11대 문종 |
1046-1083 |
-문종 12년 1058년 상당현에서 출생, 子 夢得 |
순종 |
1083-1083 |
|
선종 |
1083-1094 |
1083년 아버지 순현공 출사(감찰어사) |
헌종 |
1094-1095 |
|
숙종 |
1095-1105 |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정6품) -1102년 아버지 순현공 參知政事 |
예종 |
1105-1122 |
-1105년 아버지 순현공 卒 -1117년 詩 “東山應製” 지음 |
인종 |
1122-1146 |
-인종 8년 1130년 72세로 하세 -諡號 : 眞靜 -정지상이 지은 산재기 세움 |
3.공의 시문학 정수
공은 한 시대를 풍미한 박학다식(博學多識)한 인물이었으며, 특히 시를 지어 주고받는 것을 좋아했으며 예종과 주고받은 창화시(唱和詩) 몇 수가 전해지고 있다. 어느 날 예종이 허정당 산재기를 미행(微行)하였으나 마침 공은 출타중이라 공을 보 지못하고 벽에다 난망주(難忘酒:술 잊기 어려워)라는 시를 써 놓고 돌아갔다.
임금이 어디에 간들 술이 없었겠는가마는 공과 술을 나누며 시를 주고받고 싶었었는데 만나지 못해 섭섭한 심정을 시로 적어 벽에 남겼으니 공이 돌아와 이 시를 본 다음에 기별이라도 달라는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공이 출타에서 돌아와 이 시를 읽고 화답한 시 “동산응제(東山應製)”를 지었다. 이 시가 지으진 시기는 예종 12년 1117년 전후로 추정된다.
何處難忘酒 虛經寶輦廻(하처난망주 허경보련회)
朱門追小宴 丹竈落寒灰(주문추소연 단조낙한회)
鄕飮通宵罷 天門待曉開(향음통소파 천문대효개)
杖還蓬鳥徑 屣惹洛城苔(장환봉조경 사야낙성태)
樹下靑童語 雲間玉帝來(수하청동어 운간옥제래)
鼈宮多寂寞 龍馭久徘徊(별궁다적막 용어구배회)
有意仍抽筆 無人獨上臺(유의잉추필 무인독상대)
未能膽日月 却恨向塵埃(미능담일월 각한향진애)
搔首立階下 含愁傍石隈(소수입계하 함수방석외)
此時無一盞 豈慰寸心哉(차시무일잔 개위촌심재)
어느 곳에서나 술 잊기 어려워/ 님의 수레 헛되이 돌아가게 했네.
고관 집 조촐한 잔치에 가느라/ 신선의 약 다리는 아궁이에 재만 날리었네.
민가에서 밤새 술 마시다가/ 새벽녘에야 궁문이 열렸답니다.
지팡이 짚고 선경의 길을 돌아오면서/ 나막신에 낙성의 이끼를 묻혀왔더니
나무아래 청의동자 하는 말이/ 구름 속에서 옥황상제가 오셨답디다.
한림원 관원 모두 쓸쓸해하고/ 임금의 수레 오랫동안 서성대다가
붓 잡고 시 한 수를 남기고/ 텅 빈 누대에 홀로 오르셨네.
해 달 같은 님을 뵙지 못했으니/ 속세에 갔던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섬돌아래에서 머리를 긁적이며/ 바윗돌에 기대어 수심만 삼켰네.
이런 때에 술 한 잔도 없다면/ 이내 마음 무엇으로 위로하리까.
오언배율체의 이 시는 서술적이다. 공이 임금에게 이야기하듯 시를 읊조리고 있다. 예종은 선비를 좋아하여 궁 안에 선비들로 하여금 촛불을 밝혀두고 시를 짓게 했으며(刻燭賦詩각촉부시), 지은 시를 모아 「예종창화집」이라 했는데 창화시인의 대표적인 인물이 진정공이라고 東國李相國集(동국이상국집)은 기록하고 있다.
또 다른 詩를 보자. 장원정(長源亭)에서 저녁풍경을 보다 왕의 시에 화응한 “시골노인 소를 타고(野叟騎牛)”라는 시이다. 이 시를 읽고 있으면 한 폭의 그림을 보고 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
太平容貌恣騎牛(태평용모자기우) 태평스런 모습으로 편안히 소를 타고
半濕殘霏過壟頭(반습잔비과롱두) 부슬비에 반쯤 젖어 밭두둑 지나간다.
知有水邊家近在(지유수변가근재) 시내 가까운 곳에 집이 있는 듯
從也落日傍溪流(종야낙일방계류) 석양 무렵에야 개울을 끼고 가네.
이 시의 詩語 부슬부슬 오는 비, 소를 탐, 밭두둑, 노인, 시내와 집, 석양의 노을 등 이 모두가 그림 속에 있는 듯하다. 석양에 부슬부슬 비를 맞으며 소를 타고 가는 늙은이의 모습은 그저 소박하고 천진함을 느끼게 해 준다. 이 시에 대하여 佔畢齋 金宗直(점필재 김종직)선생은 “卽景如畵(즉경여화)” 라고 評하였다. 이 말은 詩中有畵(시중유화 : 시 속에 그림이 있다)와 같은 뜻이다.
공에게는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한명이 있었다. 공과 과거에 동반합격(同榜友)하여 나란히 벼슬길에 나선 이자현(李資玄)이 나이 27세에 아내가 죽자 강원도 청평산으로 숨어들어 속세와 단절하고 살고 있었는데 공이 공무(公務 : 關東按察使)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그를 만나 지어준 詩 “贈淸平李居士(증청평이거사)”가 이인로가 지은 파한집(破閑集)에 전해지고 있다.
淸平山水似湘濱 邂逅相逢見故人(청평산수사상빈 해후상봉견고인)
三十年前同得第 一千里外各棲身(삼십년전동득제 일천리외각서신)
浮雲入洞曾無事 明月當溪不染塵(부운입동증무사 명월당계불염진)
格目忘言良久處 淡然相照舊精神(격목망언양구처 담연상조구정신)
청평산 산수가 소상강과 같으니/ 예서 뜻밖에 옛 벗을 만났도다.
삼십년 전에 함께 과거에 올랐으나/ 지금은 멀리 떨어져 제 각기 사는 신세일세.
뜬구름 골에 드니 예전 일이랑 없고/ 밝은 달이 냇물비추니 티끌에 물들지 않네.
한참동안 말없이 서로 마주하고/ 담담하게 서로 비추나니 그 옛날 그 마음.
이 시에서 공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욕망과 헛된 꿈만 추구하는 속세에 대한 회한이 진하게 묻어나고 있다.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 조용하고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는 친구의 삶에서 작가(진정공) 자신의 마음에도 자연을 그리워하는 간절함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임금 예종이 양화루(陽和樓)란 곳에서 시를 짓고 공에게 답시를 지으라 하니 즉석에서 이렇게 읊었다.
象關西南百里隅 法宮高起籍江湖(상관서남백리애 법궁고기적강호)
鱉擎金翠雲中閣 人在滄浪月下艫(별경금취운중각 인재창랑월하로)
物覩盡傾千載德 河淸長應萬年娛(물도진경천재덕 하청장응만년오)
誰能用意烟波事 好把丹靑入畵圖(수능용의연파사 호파단청입화도)
궁궐 서남쪽 백리길 끝자락에
정전(法宮)이 높이 솟아 세상을 깔고 있네.
자라가 받든 누각에 신비한 구름 둘러져 있고
달빛 받은 푸른 물결 위 떠도는 배에는 사람이 탔네.
우주만물은 보는 바 천년은덕에 엎드리고
강물은 맑아 만년의 즐거움에 오래오래 응하도다.
그 누가 능히 아지랑이 피는 풍경을 마음에 새겨
알록달록 그림 속에 멋있게 그려 넣을꼬?
최자(崔滋)가 지은 보한집(補閑集)에는 公과 정지상(鄭知常), 김극기(金克己) 등과 함께 왕과 시를 주고받은 시가 전해지고 있다.
輦路東風我獨先 馬頭春色入江天(연로동풍아독선 마두춘색입강천)
日暄野壟新年草 水繞離宮薄暮煙(일훤야롱신년초 수요리궁박모연)
微雨鳥聲挑菜地 綠波人語釣魚船(미우조성도채지 녹파인어조어선)
鳴鑾已近芳菲促 不待淸明必賜筵(명란이근방비촉 부대청명필사연)
공은 임금의 명이나 요청에 따라 즉흥적으로 시를 잘 지었다. 공의 시는 感性的이고 興趣的 효과가 있는 唐(당)나라의 詩風(시풍)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知性的이고 規格的인 宋詩風(송시풍)의 일면도 보인다.
어느 날 궁안 연회장에서 왕이 공에게 꽃 한 송이를 주며 시를 지으라 하니 “應製(임금의 명에 의해서 지은 시)”라는 시를 한수지어 바치니 다분히 임금에게 잘 보이려는 내용이 주를 이루게 된 것이다.
誰剪紅羅作牧丹 芳心未展怯春寒(수전홍라작목단 방심미전겁춘한)
六宮粉黛皆相道 何事宮花上道冠(육궁분대개상도 하사궁화상도관)
누가 붉은 비단 잘라 모란을 피웠나/ 봄추위 무서워 꽃망울 펴지 못하고 있네.
여섯 궁의 궁녀들이 서로 하는 말이/ 어찌하여 궁궐 꽃이 도사의 관위에 꽂혔는가!
시에서 목단(모란)은 富貴(부귀)를 의미하며, 꽃망울 터지지 않음은 피기 직전의 목단의 자태와 한창 아름다운 소녀궁녀들과 좋은 대조를 이뤄 시의 감흥을 절정에 다다르게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목단 꽃이 道士의 모자(갓)에 꽂혀 있으니 어찌 임금에게 감사해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이 詩를 읽은 公의 後孫인 나 魯然도 괜히 春興이 이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평양의 금수산 부벽루 서쪽 기린굴 위에 있는 永明寺(영명사)에서 지은 창화시가 東國輿地勝覽(동국여지승람:조선 성종 때 편찬한 지리서)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시에 그림이 있다.
佛宇相蓮舊帝宮 松楸千古有遺風(불우상연구제궁 송추천고유유풍)
琉璃殿屋凝空壁 錦繡簾旌炤水紅(유리전옥응공벽 금수렴정소수홍)
夜靜船樸淸鏡裏 月明樓倚畵屛中(야정선박청경리 월명루의화병중)
十年一辛經三日 滿目烟波趣不窮(십년일신경삼일 만목연파취불궁)
절이 옛 궁궐과 이었으니/ 솔과 가래나무 천고의 유풍일세.
유리전은 하늘과 엉키어 푸르고/ 비단장막은 물에 비쳐 붉네.
고요한 밤에 배는 맑은 물속에 비켜있고/ 밝은 달 아래 누각은 그림병풍 속에 기대었네.
십년에 한번 납시어 삼일을 지내다보니/ 눈에 가득한 연파의 풍취가 한이 없구나.
자연 속에 있는 절이 궁궐만 하다니 꽤나 컸나보다. 하늘과 물, 푸름(靑)과 붉음(紅)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으며, 고요한 밤의 밝은 달, 배와 누각, 맑은 물과 암벽병풍 등이 마치 실경산수화를 보는듯하다.
자연을 그리는 작가(진정공)의 한 마음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청평의 친구 이자현을 만난 후부터 세속을 탈피하여 자연에 귀의하고자 다짐하는 듯하다.
淸讌閣(청연각) 侍坐(시좌) 때 임금으로부터 雙角龍茶(쌍각용차)라는 좋은 차를 선물로 받고 감사의 뜻으로 지었던 시를 감상해 보자. 露氣天香(노기천향)이란 구절에서 임금을 지극히 생각하고 있다. 이슬 기운(露氣)은 차의 향긋함을 말하는 것이고, 하늘 향기(天香)은 임금이 직접 하사한 것을 표현한 것이다.
雙角盤龍入小團 蜀山新採趁春恨(쌍각반용입소단 촉산신채진춘한)
俄回御手親提賜 露氣天香惹一般(아회어수친제사 노기천향야일반)
쌍각용차를 작은 찻잔에 담아 들여오니/ 촉산에서 봄추위를 쫒고 새로 딴 차 잎.
임금께서 친히 내려주시니/ 이슬 기운과 하늘의 향기가 함께 일어나는구나.
眞靜公의 시가 文學的으로 대단하게 각광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나 卽席(즉석)에서 주고받았던 詩이므로 시를 짓는 능력이야 말로 대단했던 것만은 否認(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공은 즐기기 위하여 시를 지었던 것 같다. 그런데 창화시가 아닌 공의 작품이 4점이 있다. 2점은 한시이고 2점은 시조이다.
먼저 “臨津有感(임진유감)”이란 시를 읽어보자. 임진강 강변 풍경을 보면서 뒤에 두고 온 님을 생각하며 그리움을 삭이는 시이다. 진정공의 진정한 사랑은 과연 누구였을까를 생각하면서 감상해 보면 더욱 재미있고 묘한 여운이 감돌기도 한다.
秋風嫋嫋水洋洋 廻首長空思渺茫(추풍뇨뇨수양양 회수장공사묘망)
惆悵美人隔千里 江邊蘭芝爲誰香(추창미인격천리 강변난지위수향)
가을바람 솔솔 불어오고 강물은 양양하게 흘러가는데
머리 돌려 먼 하늘 바라보니 생각이 아득하구나.
슬프다, 아름다운 사랑을 멀리 떨어져 왔으니
강가의 난초와 지초는 누굴 위해 향기를 내는가.
“重修院雜詠(중수원잡영)”이란 제목의 시다. 절에 하룻밤을 보내며 홀로 보내기가 허전하여 시 한수를 지었는데 참으로 묘하다. 스님들이 도를 닦는 도장인 절간에서 속세에서의 미인과 情念(정념)과 情習(정습) 추억을 노골적으로 읊고 있으니 金門羽客으로 불렸던 공이 바람둥이였던가 아니면 소탈하고 낭만적이었더란 말인가. 아무렴은 어떤가. 평생 독신으로 살다간 공의 삶을 지금의 우리가 뭘 구시렁거릴 수 있겠는가. 위대한 사람은 美人과 美酒(미주) 매력 앞에서는 비켜갈 수 없는 것을. 시나 감상하기로 하자.
院靜僧閑夜向分 殘燈孤枕臥幽軒(원정승한야향분 잔등고침와유헌)
自嗟情習何時盡 夢把花枝對酒樽(자차정습하시진 몽파화지대주준)
밤은 깊어 가는데 절간은 고요하고 중도 한가하며
깜박이는 등잔 밑에 홀로 벼개끼고 그윽이 누웠노라.
스스로 한탄하노라 정념의 습성이 어느 제에 가실레나.
꿈에도 꽃가지(분내음)를 들고 술잔잡고 있으니.
끝으로 時調(시조) 2점을 보자. 麗末(여말)이나 朝鮮(조선)의 시조와는 다르다. 한문이 많고, 두 편 모두 諸葛孔明(제갈공명)에 대한 것으로 문학적 가치의 판단은 학자에게 남겨 두기로 한다.
南陽(남양)에 躬耕함은 伊尹의 經綸이오.
三顧草廬함은 太公의 王佐才런가.
三代後 正大人物은 武侯인가 하노라.
-躬耕(궁경): 밭을 갈며 농사 지음.
-伊尹(이윤): 湯(탕)왕을 도와 천하를 통일한 재상
-太公(태공): 周武王(주무왕)을 도운 강태공 呂尙(여상)
-王佐才(왕좌재): 임금의 자리에 오를 재목의 인물. 王者라고도 함.
-三代(삼대): 중국의 夏(하),殷(은),周(주)를 말 함.
-武侯(무후): 諸葛孔明(제갈공명)
五丈原(오장원) 秋夜月(추야월)에 어엿블손 諸葛武侯(제갈무후)
竭忠輔國(진충보국)타가 將星(장성)이 떨어지니
至今(지금)이 兩表忠言(양표충언)을 못내 슬허하노라.
-어엿블손: 가련하도다.
-兩表(양표): 제갈량이 전장에 나아가기 전에 蜀(촉)의 後主(후주;유비의 아들)에 게 올린 두 번의 出師表(출사표)
오장원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는 충신 제갈량의 두 편의 출사표를 읽으니 오늘날까지도 孔明의 충성에 감격하여 마음이 안타깝고 슬프기만 하다는 時調다.
이상과 같이 우리의 진정공께서 남겨 놓은 작품을 감상하여 보았다. 공은 풍류를 즐긴 예종이 든든한 울이 되었을 것이며, 예종은 공이 있음으로 해서 시를 더더욱 즐겼을 것이고 삶의 생기가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여하튼 공과 예종은 서로를 필요로 하여 자주 만났으며 임금의 기록과 함께 공의 기록도 후세에 까지 남겨지는 행운이 있었던 것이다.
4.끝내면서
公(공)은 “몸이 부대하고 얼굴에는 수염이 없었으며, 눈은 구슬을 걸어 놓은 듯하였다”라고 한다. 공은 “책을 많이 읽었으며 桃膠(도교), 佛敎(불교), 醫學(의학), 藥學(약학), 陰陽說(음양설) 등에도 상당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으며, 암기력이 뛰어나 한번 본 것은 암기하였다”라고 한다. 또한 弓術(궁술), 騎馬(기마), 音律(음률),바둑 등도 모두 잘 했다고 하니 全天候的(전천후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과거에 급제하여 궁내에 배속되어 閤門祗侯(합문지후)로 있다가 洪州牧使(홍주목사)를 거쳐 禮部員外郞(예부원외랑)에 올랐으나 얼마 후에 벼슬을 버리고 金州(금주)로 은거하여 자연에 귀의하게 된다.
예종이 등극한지 17년, 1122년에 왕이 하세하자 예종이 없는 세월이 적막과 공허하여 공은 속세와 연을 끊고 8년 후인 인종조 1130년에 72세에 졸한다. 인종 임금은 진정공이 부왕의 師友(사우)이고 자신도 존경했던 분이라 근신을 보내 조문은 물론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또한 정지상에게 命(명)하여 山齋記를 지어 기념비를 세우니 인종 역시 공에게 禮(예)를 다하였다.
젊어서부터 문장으로 벗을 사귀었던 공이였으니 공께서 친구들과 주고받은 시구를 소개하며, 이제 우리의 진정공에 대한 글을 마감하려 한다. 공은 친구 김황원(金黃元, 翰林學士), 이중약(李仲若, 고려 중기의 道士)과 셋이서 李道士의 남쪽 누각에 올라 술을 마시며 시를 주고받는다.
먼저, 이중약이 “壯氣暗生天外劒 雄謨三潛轉幄中籌(장기암생천외검 웅모삼잠전악중주)/장한 기운 천외의 칼에서 남몰래 일어나고 웅대한 지모 군막내의 계산에서 은은히 돌아가네.”라 고 하자
공이 이를 받아 “座中氷雪三山客 秤上錙銖萬戶侯(좌중빙설삼산객 칭상치수만호후)/좌중은 빙설같은 삼산 나그네요 저울 눈금은 만호후라 부르더라.”라 하였으며
金學士가 “日暮鳥聲臧碧樹 月明人語上高樓(일모조성장벽수 월명인어상고루)/해는 저물어 새소리 푸른 숲으로 스러지고 달은 밝은데 사람들 애기하며 누각에 올랐네.”라고 화답하며 깊은 우정을 이어갔다고 한다.
秘書監 東珣公
1.공의 행적
東珣公은 文忠公 諱 坦과 어머니 朴氏(朴光運의 딸)사이에서 큰아들 諱 東若에 이어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공의 형제는 출생에서 졸한 년대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할아버지 순현공과 숙부이신 진정공의 여러 기록을 통해 추정은 할 수 있다.
공의 백씨 東若公은 문종조인 1080-1083년에 출생하여 掖庭內謁(액정내알:8品)을 역임한 기록만이 있을 뿐이다.
破閑集(파한집, 李仁老 作)의 기록을 보면 예종 임금 때 숙부인 진정공이 대궐 안 山呼亭(산호정)에 거처하고 있을 때 공이 숙부를 찾아와 이야기를 주고받다(淸談)가 날이 저물어 궁문이 잠기자 출궁하지 못하고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마침 왕이 산보 중에 산호정을 찾았다가 공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진정공이 조카가 머물게 된 연유를 설명한 후, 술을 부어 임금에게 올리면서 “月影偏尋天子座(월영편심천자좌)/달빛은 천자에게 유난히 비치고”라고 한 후에 조카인 공에게 다음을 잇게 하니, 공이 “露華還濕侍臣衣(노화환습시신의)/이슬은 도리어 신하의 옷을 적시네.”하자 임금은 크게 칭찬하며 金門入直(금문입직)을 허락하니 이때 공의 나이 20세 전후로 추정된다.
예종 임금은 詩人을 좋아하고 才士(재사)를 아꼈기 때문에 재주가 뛰어나고 非凡(비범)했던 동순공을 어떤 방법으로든 대우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1104년경 금문입직 이후의 행적을 찾을 수 없으나 문과에 급제하여 출사하였을 것으로 보며 인종조인 1132년에 大學博士(대학박사;7品)를 하고 1135년에는 이미 員外郞(원외랑:6品(품))의 직위를 거쳐 1144년에 秘書監(비서감:3品(품))의 위치에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金(금)나라 등 외국의 사신으로 자주 출장하였다고 기록이 전하고 있다.
東若ㆍ동순공의 생존시대
왕 조 |
재위기간 |
동 락 공 |
동 순 공 |
고려 11대 문종 |
1046-1083 |
-1080-1083년 사이에 출생 추정 |
-1058 숙부 진정공 출생 |
순종 |
1083-1083 |
||
선종 |
1083-1094 |
-1083 할아버지 순현공 출사 -1084 출생 추정 | |
헌종 |
1094-1095 |
||
숙종 |
1095-1105 |
-숙부 진정공 예부원외랑 | |
예종 |
1105-1122 |
-1104 금문입직 사건 -1105 순현공 하세 | |
인종 |
1122-1146 |
-1135 액정내알 |
-1130 진정공 졸 -1132 大學博士(대학박사) -1135 員外郞(원외랑) -1144 秘書監(비서감) |
의종 |
1146-1170 |
-1150 65-66세 하세 추정 |
공에 대한 기록은 1144년 秘書監에 있었다는 것을 끝으로 그 행적이 알려져 있지 않다. 추정하건대 65-66세를 전후한 1150년경에 돌아가셨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공은 문장이 탁월하고 왕의 비서이었기에 왕(예종과 인종)의 表(표)나 文書(문서)를 많이 지어 대내외에 공표하였다.
2.공의 작품
동순공은 대문장가 였다. 고려 태조가 遺訓(유훈)으로 八關(팔관)의 제전을 성대하게 이어갈 수 있도록 하였는데, 고려는 태조 이후의 왕들은 매년 팔관회가 되면 表를 지어 제사지내고 널리 공표하였던 것 같다.
공이 지은 “八關會仙郞賀表(팔관회선랑 하표)”는 신라 고운 최치원 선생의 “鸞郞碑序文(난랑비 서문)”과 함께 신라 이래의 花郞道(화랑도)의 원류를 밝히고 그 내용을 알게 하는 역사적인 문헌으로 오늘에 까지 인구에 膾炙(회자)되고 있는 명문장이다.
공이 글을 잘 짓는 才士(재사)임에도 表(표)나 敎書(교서) 이외에는 전하는 詩文(시문)이 없으니 참으로 안타깝고 애석하다. 공이 지은 표와 교지가 東文選(동문선)과 東國輿地勝覽(동국여지승람), 補閑集(보한집) 등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公이 지은 表와 敎書
제 목 |
비 고 |
*八關會仙郞賀表(팔관회선랑 하표) |
|
*故門下侍中魏繼廷配享睿宗敎書 (고 문화시중 위계정 배향예종 교서) |
위계정을 예종의 묘정에 배향하라는 인종의 교서 |
*賜任元厚授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사 임원후 수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
임원개는 인종의 장인으로 묘청의 난에 공을 세웠다. |
*除任元厚門下平章事崔溱中書平章事李之氐 政堂文學 (제 임원후문하평장사 최진중서 평장사 이지저정당문학) |
인종19년 1141년에 작성 |
*代文公美謝禮部尙書表 (대 문공미 사예부 상서표) |
문공미는 고려조의 대표적 奸臣(간신) |
*尹彦植可工部尙書(윤언식 가 공부상서) |
윤언식은 윤관의 아들 |
*諸生謝巡齋表(제생 사 순재표) |
임금에게 신하의 소회나 감상을 적어 올린 글로 동순공 외 17인이 함께 지은 표문 |
*又謝幸學表(우사 행학표) |
임금이 태학을 방문해 주신데 대하여 사례하는 표문 |
*謝回付逃背人表(사 회부 도배인표) |
1139년도 작으로 도망하여 배반한 사람들을 되돌려준 데 감사하는 표문 |
*代金仁存謝門下侍中表 (대 김인존 사 문하시중표) |
김인존은 고려의 명신이다. 이자겸의 악정을 피해있다 그가 숙청되자 다시 등용됨. |
팔관회 선랑의 하표 전체가 명문이며 특히 표문 내용중에 좋은 글귀가 있어 소개해 본다.
桃花流水杳然去 雖眞跡之難尋(도화유수묘연거 수진적지난심)
古家遺俗猶有存 信皇天之未喪(고가유속유유존 신황천지미상)
복숭아꽃은 흐르는 물에 아득하게 가버려/ 참된 자취를 찾기는 어려워도.
옛 사람이 남긴 풍속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참으로 하늘이 없애 버리려 않네.
임금의 敎旨(교지)나 賀表(하표)는 글을 쓰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내용도 달라질 수도 있다고 본다. 공이 만든 교서나 표의 내용은 곧 공이 세상을 살아가는 생활의 한 지표이고 哲學일수 밖에 없는 것이다. 추측컨대 공의 표문에서 공의 성품이나 생활철학을 알 수 있다.
문하시중을 지낸 위계정을 예종의 묘정에 配享(배향)한다는 교서에서 “위계정이 청렴하고 검소하다(淸儉)”라는 문구가 눈에 뜨이는데, 공이 맑고 검소한 삶을 살지 않고서는 가히 채용할 수 없는 문구인 것이다.
인종의 장인 임원개를 門下平章事(문하평장사)에 제수하는 임명교지를 동순공이 지었다는 것은 왕의 신망이 그만큼 두터웠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도다. 공의 작품이 어디에도 出現(출현)되지 않고 있고, 또한 공의 生沒年代(생몰년대)가 正史(정사)나 野史(야사)에도 그 기록을 찾을 수 없으니 말이다.
끝으로 공의 伯氏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니 안타깝지만 東若公이 지은 김해 神魚山 離世寺(신어산 이세사)에 있는 詩를 소개하면서 동순공 형제에 대한 이야기를 내리겠다.
三秋碧海千尋浪 一葉片舟萬里人(삼추벽해천심랑 일엽편주만리인)
遠聽種聲尋到寺 暫留風馭欲棲眞(원청종성심도사 잠유풍어욕서진)
伽倻國業連江草 首露王孫作郡民(가야국업연강초 수로왕손작군민)
南土舊都今已見 片帆還向海山春(남토구도금이견 편범환향해산춘)
늦가을 푸른 바다 천길 물결인데/ 작디작은 배에 멀리 갈 길손 타고 있어
아늑한 종소리 따라 절을 찾아 돌아드니/ 잠시나마 돛배에 머물러 신선같이 살고 싶다.
가야국의 왕업은 강풀만 무성하고/ 수로왕 후손은 고을 백성이 되었도다.
남쪽 땅 옛 도읍도 이젠 보았으니/ 조각배 돌려 바다와 산의 봄을 따라 돌아갈거나.
연꽃을 사랑한 선비
蓮潭公 預 할아버지
1. 公이 산 時代的 背景
공이 태어난 때(서기 1232년, 고려 고종 19년)는 시대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蒙古族의 잦은 침공으로 국력이 쇠약해 질대로 쇠약해진 시기라 武臣들에 의하여 國權이 농락당하던 고려조정은 水戰에 약한 몽고의 침략을 피하기 위하여 都邑을 江華島로 옮긴 해였다.
최충헌(1196~1219) -> 최이(1219~1249) -> 최항(1249~1257) -> 최의(1257~1258)로 이어지던 武臣政權은 몽고에 대하여 강경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으나 최의가 피살되고 난 후에는 정권을 주도하는 자와 조정의 정권구도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몽고족의 외침에도 王權을 무시하고 무력을 앞세운 강력한 힘의 정치를 한 무신정권의 수뢰 최의가 피살되자 몽고의 침략으로 피폐화된 국가를 지키기 위하여 1259년 6월 강화도에서 몽고와 和議條約을 체결함으로써 고려국은 몽고국(元)의 사위국으로 顚落되었고 이로부터 공민왕 즉위년인 1351년까지 약 100년간 몽고의 치욕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무신정권의 핍박과 전란이 극심한 중에도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사찰을 중심으로 온 백성의 護國精神에 의해 세계 어느 국가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八萬大藏經을 완성하여 1398년 5월부터 慶南 陜川 海印寺에 보관 보존되어 전해지고 있다. 실로 팔만대장경은 불교의 經典으로서 만이 아니라 고려국 백성의 민족적 自矜心과 호국정신이 깃든 精神的 産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고려 제23대 고종이 1259년에 죽고 제24대 원종이 즉위하자 조정은 왕실 중심의 친몽고파와 무신중심의 반몽파의 대결이 첨예해지자 몽고는 무신의 힘을 약화시키고 고려조정을 服屬시키기 위하여 內政干涉을 더더욱 심화하였다.
원나라의 도움으로 무신에게 빼앗겼던 왕권을 회복하면서 원종은 도읍을 강화도에서 개성으로 환도하였고 조정을 친몽정권으로 강화하자 배중손이 삼별초(좌별초, 우별초, 신의군)를 이끌고 국권회복을 위한 亂을 일으켜 抗戰하다 1273년 濟州道에서 여몽연합군에 의해 무참하게 토벌된다.
반몽세력의 몰락으로 고려조정은 원에 완전히 복속되었으며 고려의 여자를 원에 貢女로 보내는 등 租貢을 바치는 부마국으로 전락되어 버리고 만다. 무신정권의 독재권력이 國紀를 흔들었고 이로 인해 국가의 기강이 해이애진 틈에 고려국은 외침을 받았다. 몽고의 침략에 고려조정은 항복하게 되고 원나라의 꼭두각시가 되어 自主權이 박탈되면서 점차 몰락의 길을 가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되었다.
고려 제24대 원종이 죽자(1274년) 원 세조(쿠빌라이)의 사위인 제25대 충렬왕이 등극함으로써 사회전반은 辮髮과 胡服 차림의 몽고 풍속이 유행처럼 만연되었다. 충렬왕 조에는 元과 함께 일본정벌(1차 1274년, 2차 1281년)을 시작하였으나 실패하게 되는 사건도 있었으며 일연 스님에 의해 三國遺事가 탄생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2. 公의 一代記
공이 태어난 해는 고종이 도읍을 개성에서 강화도로 옮겨간 때이다. 실로 공은 전란 중에 어렵사리 태어난 것이다. 공은 四門博士(정8품)이신 아버지 浮와 兵部尙書(정3품)金浚의 손녀 김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병부상서 김준(개명전 김인준)은 1258년 유경, 임연등과 함께 삼별초의 힘을 빌어 최의를 살해한 인물로서 제24대 원종 임금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1268년에 아들 김주와 함께 살해된 김준은 무신정권의 최후의 우두머리였고 김준의 죽음이 무신정권의 종지부를 내리게 되는 계기가 된다.
공의 초명은 王府, 자는 先甲이라 하였으며 공은 竹山朴氏 朴哄의 딸과 혼인하여 2남(雲龍과 雲鎭)과 2녀를 둔다. 공은 23세 되던 해인 1255년(고종42년) 과거에 장원(1등)으로 급제하여 全州司祿에 임명되었다. 고종조에서는 이렇다 할 행적이 보이지 않는다. 공의 나이 29세인 1260년(원종 원년)에 詹事府 綠事로 전입되어 內園署令으로 근무하게 되는데 이때는 고려의 서울이 아직 강화도에 있었다. 내직에 근무하면서 공은 고려의 자주적 정치활동이 보장되지 못함을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이때부터 공의 가슴속에는 민족주의 정신이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시기였을 것이다.
공은 대대로 文臣 가문의 자손으로서 무신의 橫暴와 無道를 저주하였을 것이고 힘이 없음을 한탄하였으리라. 공의 성품이 내성적이나 다정하고 다감하였으며 이러한 성품이 文章과 書藝를 잘하게 되었으리라 본다.
元 세조 쿠빌라이의 신임이 두터웠던 원종이 즉위한 초기에는 원의 간섭이 다소 약화되기 하였지만 반면 왜구의 出沒은 빈번하여 남해안 백성의 곤란이 말이 아니었다. 1263년 2월에 왜구가 김해를 침입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주민을 납치해 가자 고려조정은 使臣을 왜국에 파견하게 된다. 공의 나이 32살에 홍저(정 6품)와 함께 和親牒을 가지고 왜구에 납치된 주민을 송환함을 목적으로 파견되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으며 원종조에는 지금의 외무부에 해당하는 禮賓主簿兼直翰林院에 오르게 된다.
제25대 충렬왕이 1274년 왕으로 오르자 왕은 공을 版圖正郞(정5품)으로 특별 기용하고, 고려조에 儒學을 진흥시키는 중책을 명령하여 寶文署待制 知制誥에 임용하였다. 그 후로 內侍佐郞(정5품), 國子監司業(종4품)으로 승차하였다.
공의 나이 48세 때에 右副承旨 재직시 경상도에 가축의 전염병이 창궐하여 농경사회에서는 매우 중요한 소가 수없이 죽는 일이 자주 있었다. 소의 수가 적어지고 특히 항몽전쟁을 거치는 동안에 소와 말이 줄어들어 農民經濟가 실로 어렵게 되자 畜牛의 감소를 방지키 위하여 牛馬屠殺禁止法을 건의하여 실시케 하였다.
다시 同知貢擧에 제수되었으나 상사보다 품계가 높다하여 사양하니 뭇사람의 칭송이 높았다. 특히 공이 과거 考試官으로 있을 때 승려 조영의 “날치기 인사집행”을 사전에 차단하여 권력자의 인사전형을 막아 공정한 인사운용을 하였다고 고려사는 기록하고 있다. 좌부승지(정3품), 國子監大司成, 文翰學士에 올라 오늘날의 인적자원부의 최고 책임자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어느 시대이건 조국에 해를 입히는 자가 있었다고 하던가. 당시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던 홍다구는 개인적 원한으로 고려조정을 괴롭힌 인물이다. 홍다구는 쿠빌라이에서 고려가 왜국과 相通한다고 하여 왜국 정벌을 주도하게 된다. 왜국 정벌은 여원연합군에 의해 1차(1237년)에 4만 병력과 9백여 척의 전함으로 출발하였고, 2차(1281년)에는 15만 병력이 나아갔으나 원군은 겨우 3명이 살았을 뿐 모두 몰살되었으며 고려군은 당시 김방경 장군의 뛰어난 통솔로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다.공은 여원연합군의 대패와 비참하게 죽어간 군사들을 생각하여 마음이 아파 “바다 건너감을 슬퍼함”이라고 하는 感渡海를 지어 조국의 원수 홍다구 일당을 痛烈하게 비판 공격하였다.
공의 나이 55세(1286년, 충렬왕 12년)에 知密直司事 監察大夫로 영진되어 政丞의 반열에 오른다. 감찰대부로 승차된 그 해 몽고국의 聖節을 축하하기 위하여 賀聖節使로 공이 원나라에 대사로 가게 된다. 공은 본디 성품이 강직하고 원의 복속국이란 치욕적인 국가 위치에 울분분개하고 있었다. 이러한 공이 敵國 성절 축하사절 대표가 되었으니 마음의 病이 深化되지 아니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밀직사란 왕의 명령을 대행하여 출납과 군기 등의 업무를 관장하는 곳이라, 이곳의 우두머리인 공의 公評正大한 업무처리로 볼 때 원나라 벼슬아치들에게 줄 뇌물을 준비하지 않았을 것임은 자명하다.
일찍이 공은 감도해란 시로 민족의 원수 홍다구 일당을 비판한 적이 있었는데 원에 가면 이들의 보복이 있을 것을 모를리 없는 공은 원국 가는 길이 험난하리라 고심하였을 것이다. 원에서 홍다구 무리에게 머리를 숙여야 하고 부탁과 애걸을 하여야 할 것을 생각하니 憤痛이 터질 일이다. 공은 자신이 예측한 대로 원나라 가는 도중에 맘의 病이 심화되어 향년 55세로 絶命하고 만다. 아! 어찌 슬프고 분하지 않으리오. 공의 죽음에 대한 이견이 여러 가지이나 조국을 반역한 無道들의 치밀한 훼방이 어찌 없었겠는가! 공은 이러한 훼방의 산물로 분을 삭이지 못하고 타국에서 그 命을 다하였거나, 타인에 의한 殺害 등도 있었을 것임이 미루어 짐작이 간다. 공은 逝去한 후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에 안장되었다가 지금의 청주시 명암동 약수터 후편에 이장하여 崇尙의 큰 인물로 現存하고 있다.
3.公의 생존시대
왕 조 |
연 담 공 기 록 |
비 고 |
고려23대 고 종 (재위1213-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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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2(고종19년) 출생 |
ㆍ1932 강화도 로 도읍 옮김 ㆍ8만대장경 간행 |
1255(고종42년) 장원급제(23세), 全州司祿 | ||
원종 (재위 1259-1274) |
1260(원종1년) 詹事府 綠事 |
원종조에 禮賓主簿兼直翰林院 역임함 |
1260(원종1년) 內園署令 | ||
1262(원종4년) 일본에 使臣으로 파견 | ||
충렬왕 (재위 1274-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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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5(충렬왕1년) 版圖正郞寶文署待制知制誥 |
44세 |
1276(충렬왕2년) 內侍佐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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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9(충렬왕5년)ㆍ國子司業 典法摠郞衛戌尉尹 春宮侍講學士 ㆍ右副承旨 ㆍ同知貢擧 ㆍ左副承旨 國子監大司成文翰學士 |
ㆍ여원연합군의 일본정벌실패 ㆍ삼국유사집필 | |
1286(충렬왕12년) 知密直司事 監察大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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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6 下世(元國에 使行途中 殉職) |
향년55세 |
3. 公의 文學世界
공은 文과 詩와 書에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공이 산 시대는 안으로는 최씨 무인정권에 국정이 농락되고, 밖으로는 몽고의 침략으로 국가의 전 강토가 유린된 최악의 민족적 受難期였다. 공이 文 ‧ 詩 ‧ 書에 능한 三絶이라 하지만 그의 글이 많이 전해지지 않고 있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益齋李齊賢은 그가 저술한 櫟翁稗說에서 “公의 詩는 微妙하고도 婉曲하다”고 평하였다
공의 작품으로는 모두 상소문 1편, 시 13편이 東文選에 수록되어 전해지거 있다.그 중 雨中賞蓮, 逸鷂, 感渡海 등이 일품이다.
雨中賞蓮
賞蓮三度到龍池(상련삼도도용지) - 연꽃을 보러 세 번 용못에 드니
翠蓋紅粧似舊時(취개홍장사구시) - 푸른 잎새 붉은 단장은 예와 같건만
唯有看花玉堂老(유유간화옥당로) - 꽃을 보는 옥당의 늙은 객에겐
風情未減鬢如絲(풍정미감빈여사) - 풍정은 여전한데 어찌 머리만 희였을고.
공은 이 시에서 국가의 衰落함과 자신의 憂國의 심정을 28자 七言絶句에 哀切하게 그리고 있다.
비가 오면 용화원 숭교사의 연못가에서 맨발로 연꽃을 구경하며 피폐되고 힘 약한 나라와 무궁 순진한 백성의 장래를 걱정하곤 하였다.
비바람 속의 연꽃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는 공의 태산같이 무거운 심정을 무엇으로 표시하리. 비바람은 곧 저 무지막지한 오랑캐 몽고의 조국강토 유린을 빗댄 것이고, 비바람이 아무리 세차도 굳건히 견디고 있는 연꽃을 고려 백성에 비유한 것이다.
세찬 비바람이 지나고 나면 연꽃은 더한층 싱싱하고 예쁘게 피어날 것이다. 그러나 연꽃이 활짝 피기도 전에 몸이 먼저 늙어 버렸음을 한탄하고 있다. 늙은 몸이 비바람을 막지 못함에 대한 심한 自愧之心을 시 속에 용해시킨 것이다. 이 얼마나 愛國志士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逸鷂
夏凉冬暖飼鮮肥(하량동난사선비) - 여름 겨울 철따라 정성다해 길렀더니
何事穿雲去不歸(하사천운거불귀) - 무슨 일로 구름 뚫고 가선 오질 않으이
海燕不曾資一粒(해연불증자일립) - 바다제빈 곡식 한 톨 돌봐준 일 없건만
年年還傍畵梁飛(년년환방화량비) - 해마다 돌아와 채색한 들보 옆을 도네.
수강궁에 기르던 새매가 날아가 버린 것에 대한 심정을 읊었다.
이 시에 대하여는 시를 읽는 사람에 따라 그 해석을 달리할 수 있다.
하나의 해석은 다음이다.
공에게는 雲龍, 雲鎭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두 아들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큰 아들은 奉善大夫 都津長이었고, 둘째는 敎書郞이 되었다. 그러나 둘째 운진은 아들 린까지 두었으나 관직을 그만두고 佛家에 出家하여 승려가 되었다. 공은 사랑하는 아들이 관직을 승차하며 조국과 백성을 위하여 봉사해 줄 것을 기대하였으나 출가하여 중이 되었으니 허전하고 슬픈 처지를 시에 담았다고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해석은 다음이다.
이 시에는 공의 나라 사랑하는 절절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조국을 버리고 몽고에 빌붙어 一身의 榮華를 누리는 배반자 홍다구 무리의 背恩忘德을 詩語로 쏟아 내고 있다. 나라로부터 國祿을 받으며 살다가 작은 이해에 서로 반목하다 불리해지거나 매사가 자기편으로 유리해지지 않으면 怏心을 품고 적에게 귀순하거나 충성하는 반역자들에 대한 울분을 표현한 愛國詩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로부터 별 이익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무지렁이 일반 백성들까지도 국가가 累卵의 위기가 올 경우에는 생업을 뒤로하고 국가를 위하여 이 한 몸을 기꺼이 바친다는 것을 바다제비에 비유하고 있다.
東郊
信馬尋春事(신미심춘사) - 말 타고 봄 구경 나섰더니
牛兒方力耕(우아방력경) - 송아지는 밭갈이에 한창이구나.
鳥鳴天氣暖(조명천기난) - 새 울고 날씨는 따사한데
魚泳浪絞平(어영랑조평) - 물고기 헤엄쳐 물결이 퍼져가네.
野蝶成團戱(야접성단희) - 들나비는 서로 얽혀 희롱하고
沙鷗作隊行(사구작대행) - 갈매기 떼 줄지어 날아가누나.
自嫌隨鷰雀(자혐수연작) - 어쩌다 이 몸은 연작을 따라 헤매고
不似鷺鶿淸(불사노자청) - 해오라기와는 벗을 삼지 못하는고.
시절은 봄이다. 농부는 일이 서툰 송아지를 데리고 밭 갈고, 새의 짝 찾는 소리가 감미로우며, 물고기는 한가롭게 헤엄치고 나비는 이 꽃 저 꽃 옮겨가며 사랑나누기에 한참이다. 그림을 보고 있는 듯한 詩이다. 평화스럽고 한가한 농촌 들녘을 묘사하면서 자신은 벼슬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구차하게 자리지킴을 하고 있가 하는 心境을 토로한 詩라 할 수 있다.
直盧
半鉤疎箔向層顚(반구소박향층전) - 성긴 발 반쯤 걷고 이어진 산을 바라보니
萬壑松風動翠烟(만확송풍동취연) - 무수한 골짜기 솔바람이 푸른 연기 흩트리네.
午漏正閒公事少(오루정한공사소) - 공무의 일도 적어 한가한 한낮에
倚窓和睡聽鈞天(의창화수청균천) - 창에 기대어 졸면서 천상의 풍류를 듣네.
당직을 서면서 조용하고 한가하고 또 무료하여 창을 열고 겹겹이 이어진 먼 산봉우리와 그 사이 골짜기를 구경하다 그만 잠깐 졸았더니 하늘나라 음악을 들었다는 내용의 시이다. 자연에 귀의하고픈 심사를 시로 토해내고 있다.
지면 관계상 感渡海, 初夏, 壽康宮觀獵, 扈駕丹山途中, 上鎭邊金相周縣, 詠橘樹 등에 대한 것은 생략한다.
4.맺으며
공의 人品은 평범하고 강직하지만 겸손과 따뜻한 심성을 가진 분이었다. 높은 지위에 있어도 거만하지 않고 항상 서민과 같은 삶을 살았다. 특히 공은 文章에 능하였으며 詩는 당대의 대문호 益齋 李齊賢, 졸옹 최해, 연흥군 민사평 등 많은 문인들과 交流하며 일대를 風味하였을 뿐만 아니라 書體는 힘이 있어 일가의 체를 이루어 많은 同 ‧ 後學 모두가 공의 서체를 배우고 臨書하여 書風의 변화를 主導하였다. 공은 일반 백성의 고달픔을 누구보다 안타까워하여 농업, 축산 등 서민과 농민경제 發興을 위해 노력하였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실로 고려와 조선 양조를 통틀어 명실공히 實學의 先驅者이었음을 알 수 있다.
通憲公 刑部侍郞
郭忠秀(생존기간 추정 1328-<1390-1400>)
1. 郭忠秀의 생몰년대 미상으로 본관은 淸州이다. 公의 시조는 신라 헌강왕조 侍中이신 휘 祥이고 중시조 4세 參知政事 文成公(휘 元), 6세 참지정사 順顯公(휘 尙 1034-1105), 7세 金門羽客 眞靜公(휘 輿 1058-1130)이며 文詩書의 三絶이신 知密直司事 監察大夫 蓮潭公 (휘 預 1232-1286)이 고조이다. 부친은 版圖正郞을 지낸 郭之泰와 모친 김해허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供譯署令 郭麟으로 일본에 書狀官으로 가서 돌아오지 못한 壯元公이다. 공은 부인 홍양이씨 사이에서 2녀가 있어 첫째는 江華人 府尹 黃順常에게 출가하였고, 둘째는 全義人 牧使 李悰과 成家하였다.
杜門洞 72賢의 한분이신 高麗忠臣 上黨君 政堂文學 郭樞(시호 文良)와는 삼종간이다. 陽村 權近이 “충효의 가문에는 餘慶(남에게 착한 일을 많이한 보답으로 그 자손이 받는 경사)이 끊이지 않는다는데 伯道(맏이/충수공)가 아들이 없으니 天道가 어이 그리 무지한고?”라며 탄식하는 詩를 지었으며, 牧隱 李穡선생도 충수공의 자식 없음을 통탄하며 하늘을 원망하는 글을 남기고 있다.
2. 곽충수 년보
-1328년 충숙왕15년 1328년 출생 추정(목은 이색 선생이 지은 공의 조부 비문에 목은이 충수공과 同年이라는 기록이 있음)
-1348년 충목왕 8년 獻納
-1352년 공민왕원년 持平
- ? 공민왕조 通憲正郞
-1361년 공민왕10년 刑部侍郞
-1390-1400경 下世로 추정함(목은과 동갑으로 목은이 1396년에 卒하였으므로
추정함)
3. 고려사 기록
고려사에 “충수(지태의 아들 장원공 린의 손자)는 慷慨하고 志氣가 있어 臺諫을 歷敭하고 聲績이 있었으며 관은 여러 차례 通憲을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사열전에는 다음의 기록이 있다. 공민왕 원년 1352년 윤2월8일에 이연종이 손수 김두 등의 탄핵문을 쥐고 조목조목 따져 물었더니 김두가 이연종에게 말하기를 “공은 헌사의 장이 되어 먼저 죄인을 탄핵하는 데에는 참여하지 않고 도리어 우리들을 따지는가?” 하니 이연종이 부끄러워하였다. 김두와 곽충수가 조일신의 家奴를 옥에 가두어 문초하였더니 조일신이 군졸 50여명을 거느리고 가서 옥을 부수고 순군부의 관리를 불러 출감시키도록 하였던바 그 관리가 말을 듣지 않자 곧 그를 때리고 만호 홍유에게 부탁하여 마침내 출감시키며 도리어 대관을 고소하니 임금이 김두 등에게 일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 조일신은 또 참소로서 도평의록사 김덕린 등을 국문하여 모두 제명하고 금고하였는데 임금은 그것을 불가함을 알고서도 부득이 따랐다.
나라 사람들도 그의 세력을 두려워하여 아무도 감히 말을 하는 자가 없었다. 일찍이 김두와 곽충수는 이연종이 늙고 간사하며 또 조일신에게 아부하는 사람이라 하여 그를 탄핵하는데 있어 이연종과 함께 의논하지 않았다. 이연종이 이에 감정을 품고 이때에 이르러 명을 받고 사헌부에 앉아서 드디어 김두와 곽충수와 장령 경천흥을 탄핵하였다. 뒤에 임금이 이제현을 불러 국사를 자문하고 이르기를 “이연종은 간사함이 많은 사람이로다”하였다.
고려사 세가에는 또 이런 기록도 있다. 공민왕 10년 1361년 10월 10일 임금의 일행이 통제원에 이르자 경성으로부터 오는 자가 아뢰기를 “적이 이미 가까이 왔습니다”하니 드디어 임진강을 건너 파주에 이르렀다. 시종 자는 시중 홍언박 이암 평사사 김용 경천흥 류탁 복야 김일봉 참지정사 정세운 판추밀원사 이춘부 첨서 김희조 지추밀원사 류숙 손등 지주사 원송수 승선 김속명 홍언유 이색 김달상 병부상서 목인길 상장군 김원명 전 이부상서 홍사범 전 형부상서 류연 간의대부 김한룡 장군 이림 장백안 원외랑 김군정 형부시랑 곽충수 정언 박사신 어사 박대양 시어사 전녹생이었다.
절개를 지킨 충신
壯元公 麟 할아버지
1.글을 쓰며
고려 25대 충렬왕의 재임기간동안 麗元聯合軍이 일본정벌에 2차례(127년10월과 1281년 3월) 나아갔으나 인명과 물질적 損失을 크게 보고 실패로 끝났으며 3차 정벌계획도 하려하였으나 원의 쿠빌라이가 1294년 죽자 계획은 중지되고 만다.
고려 23대 고종시대에 몽고족의 勃興으로 1219년 고려는 몽고와 형제국의 盟約을 맺는다. 그러나 몽고사신이 돌아가는 길에 도적에게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몽고는 이를 고려 조정이 계획한 살해사건으로 단정하고 1225년 國交를 단절하였고, 1231년부터 1257년까지 28년 동안 무려 7차례나 고려를 침략하여 국토를 蹂躪한다. 이에 고려 임금 고종은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항몽을 하지만 끝내 고려는 몽고의 부마국으로 되는 신세가 된다.
고려까지 복속시킨 元은 일본까지 복속시키기 위하여 일본을 정벌하기로 하고 여원연합군을 만들어 앞에서와 같이 두 차례의 정벌 길에 나아갔으나 바닷길에 어둡고 태풍과 같은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실패하고 만다. 두 번의 실패는 일본의 콧대만 높이는 결과가 되었으며 고려에 대한 원한과 악감정까지 갖게하고 만다. 이러한 때에 몽고가 일본을 달래기 위하여 나포한 일본인을 고려에 호송해와 일본에 송환하도록 한다.
고려 조정은 일본인 송환을 빌미로 외교적으로 일본을 굴복시키기 위하여 사신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김유성을 宣諭使로 하고 書狀官에 장원공 곽린을 임명한다.
2.공의 생애
장원공은 시조 祥公의 13세손으로 고려24대 임금 원종조인 서기 1263 - 1267년 사이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공의 할아버지는 知密直司事 監察大夫 蓮潭公 預이시고, 아버지는 연담공의 차자인 校書郞을 지낸 雲鎭이다.
공은 나이 20세 전후인 충렬왕 11년 1285년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直文翰署 에 근무하던 중 충렬왕 18년 1292년 供驛署令으로 승차하여 서장관의 임무를 지고 일본에 使行갔다 고려에 원한을 갖고 있던 일본은 사신 일행을 억류시켜 돌려보내지 않았는데 모두 殉節하는데 그 죽은 일시를 알 수 없게 된다.
고려조정은 국가를 위하여 殉職한 공의 공로를 받들어 유족에게 보답하는 절차로 청주 楸洞에 전답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공의 생존시대
왕 조 |
장 원 공 기 록 |
비 고 |
고려24대원종 (재위1259-1274) |
1263-1267년 사이 출생(추정) |
100년 무신정권 종말 |
충렬왕 (재위 1274-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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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5(충렬왕11년) 장원급제 直文翰署 |
나이 20세 전후 |
1286 |
할아버지 연담공 하세 | |
1292(충렬왕18년) 供驛署令 -同年 10월사신으로 일본파견 (書狀官) -使行 이후 不歸, 殉節 -조정에서 청주 추동의 전답 하사 -일본 승려이 사신 일행이 모두 죽었다고 전해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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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歷史書 속의 壯元公
高麗史列傳에 公에 대한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충렬왕시절(18년)에 세조(홀필렬)가 또 다시 僉院 洪君祥을 파견하여 일본을 招諭하려할새 王이 金有成이 辭命에 능하다 하여 太僕尹에 승진시켜 宣諭使로 삼았는데 그 때에 書狀官될 사람이 없는지라 사람들은 모두 다 계략으로 (서장관을) 모면하였는데 郭麟이란 사람은 淸州人으로 壯元에 뽑혀 文翰署에 나가고 있었는데 (성품은) 충직하고 文才가 있었다. (곽린이)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랏)일에는 어려움을 사퇴하지 못하는 것인데 臣子된 의리로써 어떻게 (책임을) 모면하려 하겠는가?」라고 말하니 어떤 이가 이 말을 재상에게 말하니 재상은 기쁘게 여겨 (곽린을) 서장관에 충당하고 승차시켜 供譯署令에 제수하더니 장인인 崔謁이 재상에게 아뢰어 번복시키려 하니 공이 奮然히 말하기를 「죽기는 매 한가지다. 나랏일에 목숨을 바치는 것이 오히려 처자의 손에 죽는 것 보다 낫지 않겠는가?」라 하고 드디어 떠나갔는데 일본이 왕년의 공격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모두 다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아니하니 나라에서 가긍하게 여겼다. ---<중략>--- 또 멀리 곽린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청주 楸洞의 전답을 하사하였다. 두 사람의 생사는 세상에서 듣지 못했었는데 후일에 일본의 승려 감공이란 자가 와서 말하기를 「김유성은<중략> 병으로 죽었다고 말했으며 곽린도 또한 결국은 죽고 돌아오지 못했다. 공의 아들 之泰는 版圖正郞에 이르렀는데 나이 칠십이 넘도록 슬퍼하고 사모하기를 더욱 간절히 하고 벼슬하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또한 東史綱目에 공이 죽어서 저승에 가서도 限이 풀리지 않아 무덤의 풀이 고국이 있는 서쪽으로만 향한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신으로서 일본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의 고초를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有成 등이 일본에 도착하니 일본은 전년의 공격을 유감스럽게 여겨 모두 다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아니하니 두 사람의 생사를 세상에서는 들을 수가 없었다. (本傳을 상고해 보니 일본승 감공이... 중략) 또 陽村 權近의 詩를 상고해 보니 「멀고 먼 곳 무덤 위의 풀은 서쪽으로 쏠리어 부질없이 엉클어져 있구나」라 하고 自註에 세간에서 전해 오기를 「郭壯元의 무덤이 일본에 있는데 무덤풀이 모두다 서쪽으로 향하고 있다」고 한다고 하였다)
공이 일본으로 使行 길에 오른 후 부인 崔氏와의 사이에 어린 아들 之泰(후일에 正郞 지냄)에게 편지를 남기는데 이 글이 遺書가 되고 만다. 이와 같은 내용의 글이 아버지를 위하여 세운 永慕亭에 牧隱 李穡(1328-1396)이 지은 永慕亭記에 傳한다.
목은이 지은 이 기록은 조선조 14551년에 편찬한 고려사보다 무려 70여년전의 일이니 고려사 보다 더 사실적이라 史料的 價値도 높다고 할 수 있다.
영모정에는 韓修와 양촌 권근의 영모정시도 전해지고 있다. 다음은 목은이 지은 영모정기 全文(번역)이다.
淸州의 湫洞에 곽씨의 田畓이 있어서 곽씨는 그대로 그 가운데 집을 짓고 농사 지어서 그것으로 손님접대며 婚禮며 喪禮와 葬禮의 비용에 충당하며 아침저녁거리가 대강 보충되면 더 남기를 바라지 않았다. 조정에 벼슬하게 되면 혹 농사를 폐하여 논밭이 묵더라도 다시 돌아보지 않을 것 같이 하고 벼슬을 그만 두면 처자를 데리고 와서 농사를 지으며 글을 읽고 시를 읊으며 나뭇꾼이나 밭갈이 노인과도 함께 웃으며 이야기를 하여 勢利에 대해서는 막연한 듯하였다.
곽씨의 大夫 장원공은 至元 년간에 忠直하고 文章을 잘하였는데 元의 世祖가 천하를 통일하였으나 오직 일본만이 조공을 하지 아니하니 (세조는) 이에 말하기를
「먼곳의 백성을 情들게 함에는 德으로써 해야 하나니 招諭해서 오게 하는 것이 제일이다」라 하고 고려로 하여금 한사람의 사신을 보내어 자기의 의사를 분명히 알게 하니 여기에서 고려의 군신은 서둘러서 (세조의) 命을 받아 신중히 使者될만한 사람을 골라 뽑았지만 서장관 될 사람이 없었는데 사람들은 모두 다 꾀로써 모면했지마는 장원공만은 使行으로 가기를 바라는 뜻이 있어서 어떤 이가 재상에게 이 말을 전하니 재상도 대단히 기뻐서 왕에게 보고하고 나와서 장원공을 사행으로 가도록 임명하였다.
장인 최알이 재상을 만나보고 覆奏하려 하니 장원공은 분연히 말하기를 「죽기는 매한가지인데 나랏일에 죽는 것이 오히려 처자의 손에서 죽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라 하고 떠나가더니 과연 돌아오지 못했다. (고려의) 군신은 애통하게 여겨 관직과 논밭을 주니 현재 추동이 바로 이것이라 長楸란 말은 離騷經에서 나왔는데 해석하는 이가 말하기를 「喬木이란 말과 같으니 故國을 가리키는 것이라」한다.
그의 아들 정랑공(之泰)은 일생동안 悲痛해 하고 울부짖어 벼슬하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는데 현재 나이 칠십여세이라 그런데도 追慕하기를 더욱 더 하였으며 그의 손자 通憲公(忠秀)은 정자를 洞中에 짓고 물을 끌어다 연꽃을 심어서 그 어버이의 마음을 편하도록 효도하는 바에 있어서는 무엇이든지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정랑공은 일찍이 아들(통헌공)에게 말하기를「(내가) 어려서 아버지 얼굴을 못뵙게 되었으니 내 슬픔이야 어찌 말로써 다 하겠는가? 너도 다행히 벼슬하고 출세하였으니 내 기쁨을 알 수 있을 것이오 내가 병없이 건강하고 너도 또한 내 곁에 있지마는 내가 결코 너를 따르지 못할 것이다. (네가) 당대에 글을 잘 쓰는 사람에게 청하여 내가 동쪽을 바라보는 심정을 적어서 자손들에게 보여 주도록 하라」하였다.
대체로 아침에 사모하여도 저녁에 잊어버린다면 영원히 사모하는 것이 아니오, 아들 때엔 사모하여도 孫子代엔 잊어버린다면 영원히 사모하는 것은 아니다. 아침 저녁을 한 시각같이 하고 이들 손자가 한 몸처럼 하여야만 그 사모함이 영원하다 아니 하겠는가?
통헌공은 나에게 영모정기 적기를 부탁한 지 오래 되었다. 통헌공은 나와는 동갑이다. 의분에 북바치는 뜻을 가지고 있어 法司에 있을 때는 법을 그대로 집행할 뿐 강한 자를 두려워하지 아니 하였고 言官에 있을 때는 과감하게 말할 뿐 일을 피하려 하지 아니하였다. 이러므로 行省의 법을 관장함에 기강이 더욱 떨치고 바다 섬에 귀양가도 이름이 더욱 퍼졌다. 죄를 다스리면 엄하고 밝게 할 뿐 까다롭게 살피는 것은 힘을 쓰지 아니하고 수령이 되어서는 백성들을 사랑으로 어루만질 뿐이므로 그의 공평하고 부지런함은 칭송받았으니 장원공의 충직함과 정랑공의 효성을 대체로 겸했다 할 것이다. 그 몸이 영광스럽고 顯達함에 이르고 士林의 冠冕이 됨이 마땅한 것이오, 그리고 조정에 서서는 일찍이 해를 마치도록 편한 적이 없었고 추동에 살적에는 일찍이 해를 거르는 일이 없었다.
三槐 王氏는 德을 몸에 닦고 하늘에 應報를 구하여 左契를 지닌 것과 같이 손 닿는대로 딱 맞아들어 복을 받았는데 장원공의 忠義에 대한 보답은 이와 같은 것은 어찌된 셈일까?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보답함에는 名譽로써 하기도 하고 地位로써 하기도 하며 德으로써 하기도 하는데 그 所致는 다 마찬가지이다. 덕이 있으나 명성이 들리지 아니하고 명성이 있으나 지위가 맞지 아니하는 것은 군자는 근심하지 않으나 덕이 그 지위에 맞지 못하고 명성이 어쩌다가 그 실정에 지나치는 것은 군자가 대단히 두려워하는 것이다.
오늘날 통헌공의 德이며 名聲은 하늘이 장원공에게 보답하는 所以가 되는 것이나 그 지위 같은 것은 비록 현달했었다. 하지마는 선비들의 공론인즉 오히려 부족한듯 불만스러워 하는 기대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통헌공은) 나이 이제 겨우 육십이니 重用되고 못 되는 것은 앞서 예측할 수는 없는 것이니 그렇다면 하늘이 지위로써 보답하려는지 아니하려는지도 오늘에 결정할 것은 못 된다.
하늘이 이 앞으로 크게 보답하려 해서 늦는 것일까? 왜 의당히 보답해야 할 사람에게 아직도 보답하지 않는 것인가? 하늘이 결정할 것이 아직 결정되지 않은 지 오래 되었으니 내 앞으로 郭氏 宅을 두고 볼 것이다. 철원 최씨에게 徵驗해 본다면 팔십세에도 아들을 낳아 지금은 그 자손이 대단히 번창하다. 곽씨는 뒤를 繼承할 자손이 없다고 근심하지 말라. 하늘이 기필코 곽씨에게 후하게 보답할 것이다. 곽씨가 반드시 후손이 없으리라고는 하늘이 과연 기필하지 아니할 것이오 영모정이 廢墟가 된다는 것도 하늘은 과연 기필하지 않을 것이다. 하늘로 하여금 기필할 수 있게 한다면 곽씨는 무엇을 근심하겠는가?(반드시 후한 보답이 있을 것이다)
고려의 양심 두문동 72현
上黨君 樞 할아버지
1.고려말의 운명
공민왕이 고려 제31대 임금으로 등극하자마자 원의 부마국으로 전락해 있는 고려를 자주독립시키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한다. 공민왕이 강릉대군으로 원에 볼모로 있을 때부터 원의 실정을 훤히 꿰뚫고 있던 그는 등극과 동시에 원과 인척관계가 있거나 원을 등에 업고 국정을 문란하게 하는 權臣을 숙청하고 원의 연호를 폐지하고 몽고식 머리모양인 開剃削髮을 금지하였으며, 특히 조정의 제도를 원의 지배이전 시대인 문종조의 관제를 복원시키니 원의 협박과 위협은 말할 수 없었다.
권신과 원의 인척을 척결한 왕은 중 신돈에게 힘을 싫어주어 개혁을 주도하고 정세운, 최영, 이성계 등 군의 여러 장수들에게 홍건적의 침입과 왜구를 물리쳐 국권이 안정되는가 했으나 신돈의 전형과 독선으로 정치는 혼돈해 졌으며 임금마저도 불교에 미혹되고 宴樂을 일삼으니 제명에 살지 못하고 1374년 홍륜과 환관 최만생에 의해 피살되고 만다.
공민왕의 죽음은 곧 고려 붕괴의 단초가 되고 만다. 공민왕 사후 17년만에 王氏의 고려는 1392년 7월에 이성계가 이씨의 나라를 세우니 이씨조선이다.
2.공의 일대
문량공은 충숙왕 7년 1338년 청원군 대율리에서 태어나서 조선 태종 5년인 1405년에 하세하니 향년이 68세였다. 호가 秋巖, 仰天齋이며 文良은 諡號다.
공은 청주곽씨 시조 상공의 15세손이며 아버지는 門下平章事 郭琛이고 어머니는 淸州鄭氏이다. 공의 조부는 典法判書 忠憲公 延俊이며 증조부 雲龍은 문과급제하고 議政府 都津長을 하셨으며 高祖父는 蓮潭公 預이다.
공은 나이 23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이 때 같이 급제한 인물은 圃隱 鄭夢周, 三憂堂 文益漸, 石灘 李存吾이며 1364년 포은과 함께 翰苑에 나아갔으나 그해 11월에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간다. 이 때 포은은 공과의 헤어지는 심정을 送別詩에 적어 섭섭함을 달랬다고 한다.(송별시 생략)
고향으로 낙향한 공이 10년을 초야에 묻혀살다 공민왕 23년인 1374년에 다시 조정에 나아가 기울어진 국운을 지탱시켜 바로세우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룰 수 없음을 알고 1388년에 벼슬을 버리고 2차 향리로 낙향한다. 낙향한지 5년 만인 1392년에 절친한 친구 포은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에 하늘에다 “하늘이여! 하늘이여! 나는 장차 어디로 가란 말인가(天乎天乎 我將安歸)라고 탄식하며” 杜門洞으로 숨어든다.
공의 생존시기
왕 조 |
문량공 기록 |
비 고 |
고려27대 충숙왕 (재위 1313-1330, 1332-1339) |
1338(충숙왕7년) 청원군 대율리(추동)에서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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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31대 공민왕 (재위 1351-1374) |
1360(공민왕9년) 문과급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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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4(동 13년) 直翰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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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4 겨울 관직사퇴 향리로 낙향 |
포은의 송별시 받음 | |
1374(동 23년) 中顯大夫 藝文館 直提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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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32대 우왕 (재위 1374-1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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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5(우왕1년) 中顯大夫 密直司右代言 寶文閣 提學知制敎 知軍簿事 同知書筵僉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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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8(동 4년) 奉翊大夫 僉書 密直司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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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0(동 6년) 端誠輔理功臣 三重大匡 上黨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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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동 14년) 政堂文學 |
최영 피살 | |
1388 관직사퇴 2차 낙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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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 (재위 1392-1398) |
1392(태조 원년 7월) 杜門洞 隱居(72현) |
포은 피살 조선 건국 |
조선 3대 태종 (재위 1400-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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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1(태종 원년) 匡靖大夫 政堂文學 寶文閣 大提學 知藝文春秋館事 |
不出事 |
1401(왕이 다시) 議政府左贊成判戶曹 修文殿 大提學 |
不出事 | |
1405(동 5년) 별세 향년68세 시호 文良 |
長湍 草芝谷 장사 |
3.杜門洞 72賢
고려말의 최영과 정몽주를 만고의 충신이라 한다. 易姓으로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포은의 충절을 貶下시키지 않았으며 포은을 살해한 태종 이방원도 1405년에 포은에게 大匡輔國崇綠大夫領議政府使修文殿大提學藝文春秋館事 익양부원군으로 추증하여 그의 충절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런데 어찌 최영과 포은만이 고려의 충신이겠는가. 조선이 건국됨과 동시에 고려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지 않은 신하와 선비가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두문동 72賢의 이름은 더 높다.
이성계가 1392년 조선을 건국하고 왕위에 오르자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서쪽기슭에 자리한 두문동에 모여 동네의 東西의 문을 걸어 잠그고 일체 외부로 나가지 않았다. 여기에서 유래된 말이 “杜門不出”이다. 조선왕조의 어떠한 관직도 받지 않고 두문동에 묻혀 산 72현에 대한 구체적인 사료는 발견되지 않으나 야사로 대를 이어 전해져 오다 조선 22대 정조대왕이 이 이야기를 듣고 1783년 성균관에 표절사를 세워 72현의 충절을 기리게 됨으로써 正史에 72현이 고려의 마지막 충신으로 남게 된 것이다.
4.공에 대한 後世人의 글
공이 節槪로 자신을 끝까지 지키자 이와 같은 공의 절개를 推仰하는 이들이 글을 남기고 있다. 후손으로는 漢紹公이 공의 事蹟을 찬술하였고 幸州 松沙 奇宇萬 선생이 공의 事狀을 적었으며 月城 勉菴 崔益鉉 선생이 공의 전을 남겼고 崔永祚(通訓大夫) 선생이 공의 遺跡碑文을 남겼다. 여기 그 모두를 기재하기는 어려워 면암선생의 傳을 소개한다.
면암 최익현선생의 문량공 전(전문/역문)
文良郭公의 이름은 樞이고 淸州사람이다 姓의 근원은 본래 周나라 虢叔에서 비롯되었으며 唐나라 汾陽王의 손자가 사신으로 신라에 왔으며 그 후손 祥이 신라의 侍中이 되었는데 이 분이 곧 그 始祖다 훌륭하도다! 고려의 文成公 元 順顯公尙 文忠公 坦 文簡公 琦 密直司事 預가 德을 세운 공훈은 전후에 유명하다 증조부 雲龍은 禮部正郞이요 조부 延俊은 典法判書에 淸原君이요 아버지 琛은 門下平章事이며 어머니淸州鄭氏는 版圖判書 怡의 따님으로 서기1314(충숙왕戊寅)年에 淸州楸洞에서 公을 낳았는데 어려서 圃隱선생과는 함께 공부했으며 한 살 아래로 매우 친밀하게 사귀었다 서기1360(공민왕庚子)年 10月에는 國子監進士로서 文科에 鄭圃隱李存吾文益漸과 함께 등과하였다 松都에 살면서 臺省에 나갈 때에는 淸直으로 이름이 있었으며 1362(壬寅)年에는 포은과 함께 翰林에 뽑혔는데 그 해 겨울 12月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갔다 포은이 公에게 보낸 送別詩에 「정의의 붓을 휘두르는 높은 절개는 꺾지 못하리」라고 한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품은 뜻을 서로 알고 통했음을 알 수 있다 하겠다 「한 낮에도 찬란하게 빛나지 않고 음산한 구름은 해를 가렸네」라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비록 석별의 정경을 묘사했다고는 하나 그 속에는 시대를 슬퍼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큰 뜻이 담겼으며 「어느 때에나 봄바람이 불어 다시 만나 이별없이 지낼고 먼 길을 함께 타고 가면서 속마음을 그대에게 털어놨으면」이라고 한 대목으로 봐서 그 사귐의 깊이를 알 수 있으며 公은 참으로 이 말을 들을 만한 분이다 포은이 함께 배우고 같이 벼슬한 사람에는 公 한 분이 아닐 터인데 작별함이 이 처럼 간절하니 千年이 지난 후에 생각해도 公의 일생을 미루어 알만하다 하겠다 서기1374(甲寅)年에는 中顯大夫藝文館直提學을 제수받고 이듬해에는 中順大夫密直司右代言寶文閣提學知製敎知軍簿事同知書筵事가 더해졌으며 1378(戊午)年에 奉翊大夫簽書密直司事로 옮겼고 1380年에는 端誠輔理功臣에 올라 三重大匡이 더해졌으며 上黨君에봉해졌다 公은 늘 마음이 편안하고 곧으며 청렴하고 욕심이 없으며 감정을 밖으로 나타내지 아니하여 어려서부터 큰 도량이 있었으며 일찍이 그 덕망이 조정에서 두더러지게 나타나서 백성에게 베푸는 뜻을 두었으며 자기 집의 일과 같이 나라를 근심함을 임무로 여겼다 나라가 절망적인 형편이 되자 결연히 물러나 그침없이 고향에 돌아왔으나 오직 나라를 근심하고 슬퍼하니 朝野에서 미덥게 보아 여러번 불러서 몸은 台司에 淸白한 志操는 布衣때나 다름이 없었다. 李太祖의 위세가 날로 성하여 天命이 그 쪽으로 기울어지므로 林泉에 몸을 숨겨 일생을 마치려 하는데 圃隱公이 害를 입으니 하늘을 우러러 슬퍼하며 하늘이여! 하늘이여! 내 어찌 돌아가리! 하고는 일세의 동지 여러분과 함께 杜門洞에서 會盟하고 같이 몸을 숨겼다 이태조는 登極하기 전부터 公이 현명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함께 國事를 다스리고자 政堂文學寶文提學知藝文春秋館事의 벼슬로 여러번 불렀으나 절개를 지켜 굽히지 아니하였으며 太宗朝에는 또한 門下侍郞議政府右贊成判戶曹修文館大提學으로 연달아 불렀으나 응하지 아니하고 長湍의 十川橋에 은거하여 서기1405(太宗五年乙酉)年 7月 7日에 세상을 뜨니 享年이 68세였다 國王은 近臣을 보내 제사를 지내고 文良이라 시호를 내렸으며 고을의 草芝谷에 장사하였다 夫人安東權氏는 典工判書儼의 따님이며 아들恂은 고려의 少卿인데 부친의 뜻을 이어 근신하였으며 驪興閔氏는 棲閒堂 忭의 따님으로 세 아들을 두었는데 홍은 郞將이며 煇는 承旨이고 惲은 同敦寧으로 모두 조선조에 벼슬에 나아갔으며 딸들은 持平김양남 承旨김육 少尹봉안국에게 출가하였다 손자나 증손 아래로 이름난 사람이 연이어 遺德이 끊이지 아니하였으며 源流가 맑으면 뿌리가 크고 가지가 무성한 법이니 또한 조상의 음덕이라 하겠다 公의 후손 漢紹가 松沙奇宇萬이 지은 事狀을 보여주며 나에게 傳을 청하는데 나는 글을 버렸으며 남의 집안의 글을 맹세코 쓰지않기로 하였으나 公은 人倫과 기강을 돕고 풍속을 영구히 바로 세워서 변하는 세상에 우리나라의 臣下의 모범이 되었으므로 끝내 거절치 못하고 이와같이 記述하는 바이니 후세에 論하는 분은 이것도 버리지는 말고 좋은 事實을 찾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野史에 따르면 公은 名門世族으로 일찍이 才德을 갖추어 묘령에 벼슬길에 올라 社稷을 돕고 民生을 구하고자 하였으나 世態가 맞지아니 하였으며 國運이 걷잡을 수 없게되자관직을 그만 두고 산 속에 숨어 살며 혹은 나아가고 혹은 머물기도 하였는데 나아가면 國政에 공헌하고 물러나도 나라 근심을 잊을 수 없었다 運命의 所致인가 圃隱公의 죽음을 보고는 다시 나아갈 수 없어 물러나서 綱常을 도와 圃隱冶隱諸賢과 더불어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길을 걸어서 저 伯夷叔齊나 魯仲達과 한가지로 절의를 세웠으니 포은공의 詩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서로 사귀고 學問을 닦고 마음을 허락한 것으로 판단됨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歷代朝廷에 褒獎함이 밝고 밝지못한 것은 世道를 重히 여기는 것과 관련이 있으니 百世에 大義名分을 밝히는 데는 훌륭한 인재로도 부족하며 가벼히 여겨서도 안될 것이다
西紀1906年(高宗43年)丙午仲春上旬 月城 崔益鉉 謹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