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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금오산 (龜尾 金烏山. 2013. 11. 23. 군토)
11월 넷째주 토요일 군토 산악회에서는 당초 지리산 삼정산을 다녀오기로 계획이 잡혀 입었다. 그러나 국립공원 측에서 산불예방을 위하여 입산 통재로 말미암아 구미 금오산으로 변경하니 몇몇의 회원들은 계획이 바뀌니 취소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구미시는 과거 선산군 중심의 농업이 산업의 주축이었으나, 1970년대 초 정부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에 힘입어 구미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내륙 최대의 첨단 수출 산업단지를 보유한 도시로 발돋움했습니다. 현재 구미에는 1~4공단까지 25.7㎢의 국가산업단지가 있고, 고아· 해평·산동농공단지와 각지의 소규모 공장 등 총 2,704개 업체에 10만 명이 넘는 근로자가 일하고 있습니다. 주요 생산품으로는 반도체, 휴대폰, LCD, 디스플레이, 정보통신기기 등이 있습니다. 첨단 전자산업·정보통신산업을 위주로 1999년에는 전국 단일공단 최초로 수출 100억불을 돌파했고, 2005년에는 수출 300억불을 달성하고, 2012년에는 344억불을 달성하여 전국 수출의 6.3%를 차지하였습니다. 또한, 1인당 지역내총생산(2010년 기준)이 53,817달러로 인구 30만 이상 기초지자체 중 1위이며, GRDP 총규모도 25조원대로 창원에 이어 2위로 전국 최고 수준입니다.
이라고 구미시 홈 페이지를 소개하는 웹문서는 말한다.
또한
구미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정신문화의 산실입니다. 구미 지역은 낙동강 주변으로 가야시대 고분군과 유적이 발굴되고 있어 역사적으로 고대문화가 발달했던 지역으로 보입니다. 신라시대에 한반도에서는 처음으로 불교가 전해진 곳이고, 해동(海東) 최초의 가람인 도리사(桃李寺)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성리학을 꽃 피운 지역으로서 야은 길재(冶隱 吉再), 강호 김숙자(江糊 金叔滋), 점필제 김종직(店畢濟 金宗直) 등 학자와 사육신 하위지(河緯地), 생육신 이맹전(李孟專), 한말 의병대장 허위(許蔿) 등 숱한 우국지사를 배출하였습니다. 근래에 와서는 과감한 수출 정책을 추진하고 새마을운동을 창시하여 국가경제의 기틀을 다진 박정희 대통령과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대통령인 박근혜 대통령을 배출하였습니다.
라고 지역의 인물까지 자랑한다.
버스는 금강 휴게소에 들러 잠시 숨을 돌린다. 상하행선이 만나는 곳이라 예전에는 이곳에서 서로 통행권을 바꾸어 다니기도 했지 그래서 입 출 구에서 확인을 한다. 금강에 드리워진 가을 산의 그림자가 나그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징검다리 보는 갈수기라 넘쳐흐르는 물이 없다. 강가로 내려서는 계단입구에는 사랑의 자물쇠가 걸려 있다. 이곳에서 굳게 사랑을 맹세하는 젊은이들이 많은가 보다. 강 쪽으로 확장하여 휴게소의 공간을 만드느라 세운나무기둥이 나란히 열병을 하고 있다. 아침의 상큼 함을 맛본다. 경부고속도로 대전 김천 간 확장공사가 한창이다. 우리나라는 어디를 가나 개발도상국이다. 새로이 짖는 건물이나 도로는 확장하는 기색을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다. 김천의 산중에도 대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추풍령을 넘은 바퀴다린 교통수단들은 이곳 을 지나야 남으로 내려갈 수 있다. 여기저기에 세워진 다리가 교통의 요충임을 짐작케 한다. 금오산도 칼다봉쪽은 입산금지일 것이라고 구명호 회원이 말한다. 대장은 그러면 가보아서 금오산 정상을 찍고 법성사쪽으로 하산하면 될 것이라고 하면서 가서 결정하자고 한다. 지금도 경상도에 가려면 중학교 때 수학여행이 생각난다. 그때는 교통수단이 철도였다. 그래서 단체로 여행을 하려면 지금으로 보면 전세 칸을 내어야 했던가 보다. 기존 열차에 더 증차하여 다니는 것이다. 그런데 호남선 과수원 역 근처에서 탈선 사고로 인하여 전세 칸을 이어 붙여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기차에서 내려 사고지점을 걸어서 다시 위쪽에서 기차를 타고 대전역엘 도착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타고 가야할 기차가 없다. 승객용 열차를 이어 붙여야 하는데, 열차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정에 없던 급행열차(우등열차)를 타고 대전에서 대구역 까지 간 기억이 떠오른다. 우등열차에 입석으로 중학생들이 콩나물시루를 하고 가야만 했다. 출입구 쪽에는 선생님들이 안전사고를 방지하기 위하여 지키고 있었다. 그때가 아마 1966년 정도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대전에서 대구가 그렇게 멀게 느껴졌다. 버스는 어느덧 구미 나들목을 나와 시가지에 들어선다. 금오산 주차장에 도착 시간이 9시 10분이다. 운동장에서 2시간 40분 만에 도착하였다. 간단한 체조로 몸을 풀고 나선다. 주차장을 나서니 길재 야은 선생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懷古歌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依舊)한되 인걸(人傑)은 간데없고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冶隱 吉再 (1353~1419)
일행들은 모두 호텔 쪽으로 이동이다. 그러나 칼다봉 등산로를 알리는 안내판의 화살표는 반대편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반대로 발길을 옮긴다. 채미정(採薇亭) 조금위에 개울건너 입산금지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는 것이 보인다. 나는 되돌아 일행들의 뒤를 쫓는다. 도로양쪽에 심어놓은 메타세큐어 가로수가 황금색 단풍이 들어 노신사의 중후함을 뽐내고 있다. 호텔 앞에 이른 선두 대장은 호텔이 들어서 입구가 막혔다고 말하며 다시 되돌아 내려온다. 옛날에는 이곳으로 올라갔다고 말한다. 채미정 앞에 이르러 다리를 건너 들어가 본다. 입구의 문은 흥기문(興起門) 이라 현판이 걸려 있고, 채미정 정자는 왼편에 자리하고 있다. 글씨체는 예서체도 아니고 전서체도 아니고 해서체도 아니다. 그러면 고인체인가? 예해체인가? 시간이 없다. 후미에 쳐진 발걸음 재촉한다.
채미정은 야은 길재선생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 영조44년(1768)에 건립한 정자이다.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3칸 팔작지붕이다. 뒤편에는 길재의 충절을 기린 숙종의 어필오언구(御筆五言句)가 있는 경모각(敬慕閣)과 유허비각(遺墟碑閣)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일행들은 금오저수지를 끼고 난 둘레 길을 향하고 있다. 금오정 팔각 정자가 물위에 뜬 하얀 백조 같다. 일행들은 아직도 입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구장로님과 나는 다시 오던 길을 돌아 채미정 쪽으로 향한다. 산 쪽의 샛길을 따라가니 채미정 샛문에 이른다. 다시 채미정 안으로 들어가 입구 흥기문을 나와 처음에 본 입산금지 현수막이 있는 곳에 이르러 개울을 건너 입산한다. 등산로는 조그맣게 나 있다. 20분여를 오르니 이정표가 있다. 자연환경연수원 1.0km 금오산관광호텔 0.6km 칼다봉 1.4km를 알린다. 자연환경연수원 쪽에서 선두주자가 오르고 있다. 조금 뒤에 두 사장님이 오른다. 그리고 유 사장님이 오른다. ‘강 과장 어디에서 와요’ 한다. 채미정 옆길로 오른다고 말한다. 장로님을 벌써 앞장이다. 관광호텔앞쪽에서 오르는 길이 있는데, 패쇄 하여 잘 찾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까? 칼다봉에 오르는 길목을 산불예방으로 패쇄 한 것이다.
구미시 웹에서 설명하는 금오산을 알아보자
남숭산(南嵩山) - 중국의 오악(五嶽)
금오산의 원래 이름은 대본산(大本山)이었는데 고려시대에는 남숭산(南嵩山)이라 하였다.
그 유래는 중국의 황하강 유역 하남성(河南省)에 중국 오악(五嶽) 중의 하나로 유명한 숭산(嵩山)과 생김새가 흡사하여 남숭산이라 명명하였고, 남쪽에 있다 해서 남숭산이라 부른 것이다. 특히 황해도 해주에 북숭산을 두어 남북으로 대칭(對稱)케 되었다.
고려시대 문종(文宗)은 왕자를 출가시켜 이 남숭산에서 수도(修道)하게 하였는데, 그 왕자는 훗날 대각국사(大覺國師)로 봉해져 호국불교의 포교와 국정 자문에 임하였으니 남숭산의 품격과 위상이 역사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금오산은 1,000m를 넘지 않는 산이지만 굳이 숭자(嵩字)를 붙여 중국의 유명한 숭산에 비겨 말하는 것은 이처럼 그 위용(偉容)과 품격이 비범한 데서 기인되었다고 여겨진다.
소금강(小金剛)과 수양산(首陽山)
금오산은 암석으로 골짜기마다 남성적인 기상이 넘치는 기암괴석(奇岩怪石)으로 힘과 기백(氣魄)이 서려 있고, 빼어난 경관을 갖추고 있어 옛 선현(先賢)들은 소금강(小金剛)이라고 불렀다.
또한 중국의 수양산에서 고사리로 연명하다 굶어 죽은 백이숙제(伯夷叔齊)이야기와 야은(冶隱) 길재(吉再)선생의 충절을 기려 수양산(首陽山)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칠곡군 숭산리의 순국의사(殉國義士) 만송(晩松) 유병헌(劉秉憲)선생의 문집에 따르면 "선비들이 다 사모하는 수양산 기슭에다 내 시신을 묻어다오" 라고 유언(遺言)을 할 정도로 선비들 사이에서는 수양산으로도 통용(通用)되어 왔다고 전한다.
필봉(筆峯)
선산 방면에서 보면
상봉(上峯)이 흡사 붓끝 같다고 해서 필봉(筆峯)이라 하였는데 그로 인해서인지 선산지방에는 인재가 많이 배출되어 문인(文人), 달사(達士), 명필(名筆)이 대(代)를 끊이지 않았다.
조선조 성종(成宗)때의 문신 성현(成俔)은 그의 저서 용재총화에 "조선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인재의 반은 선산에 있다(朝鮮人材 半在 嶺南이요 嶺南人材 半在 善山)"라 하였고, 그 후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서도 그와 같이 언급되었으니 이는 모두 금오산 정기(精氣)의 영험(靈驗)이라는 평가도 있다.
귀봉(貴峯) 거인산(巨人山)
구미시 인동 방면에서 보면 부처님이 누워있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와불산(臥佛山)이라고하여 귀인과 대작(大爵)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귀인이 관(冠)을 쓰고 있는 모습 같다 해서 귀봉(貴峯)이라 칭하기도 하였고,
또한 마치 거인이 누워 있는 모습 같다고 해서 거인산(巨人山)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노적봉(露積峯)
김천방면에서 보면
부잣집 노적가리 같다고 해서 노적봉(露積峯)이라 하였는데 실제로 옛부터 이 지방에는 큰 부자(富者)가 많았다.
적봉(賊峯) 등 그 외의 별칭
김천시 개령면 방면에서 보면
큰 도둑이 무엇을 훔치려고 숨어서 노려보고 있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적봉(賊峯)이라 하였으며,
성주군 방면에서 보면
여인네가 산발한 모습 같다고 해서 음봉(淫峯)이라 하였다. 이런 많은 별칭들은 금오산의 위용(威容)과 준엄(峻嚴)한 자태에 대한 선인(先人)들의 애정이 담겨진 것으로 해석된다.
금오산(金烏山)
한반도의 진산(鎭山)은 우리의 영산(靈山)인 백두산이다.
백두산에서 태백산이 이루어졌고 다시 소백산이 되고 소백산은 죽령(竹嶺)과 조령(鳥嶺) 그리고 추풍령을 지나 무주의 덕유산을 만들어 남으로 힘차게 내치다가 한 지맥이 동북으로 거슬러 김천 대덕의수도산이 되더니 여기서 세 갈래로 나누어져 하나는 동남으로 내치어 합천의 가야산이 되고, 또 한줄기는 서북으로 뻗어 충청, 전라, 경상 세 도(道)의 경계점에 솟아 삼도봉(三道峯)이 되고, 나머지 한줄기가 북으로 내치다가 땅속으로 스미듯이 하면서 간직했던 기백(氣魄)을 구미, 김천, 칠곡의 경계점에서 크게 내 뿜었으니 그 높이가 976m인 금오산(金烏山)이다.
금오산(金烏山)이라는 이름은 어느 날 이곳을 지나던 아도(阿道)가 저녁놀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금오산이라 이름 짓고, 태양의 정기를 받은 명산(名山)이라 한데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옛날 사람들은 태양 안에 금 까마귀가 산다고 믿었고 그 금 까마귀는 발이 셋 달린 삼족조(三足鳥)로 기이한 형상의 까마귀이나 태양의 핵이요 상징으로, 태양은 원시시대부터 인류의 가장 숭고하고 위대한 절대적인 존재로 여겨 어느 민족이던 원시종교의 형태로 신앙의 자체라 믿었으며 그 태양 안에서도 핵이요 정기(精氣)인 금 까마귀는 우리 인류의 절대적인 존재였었다.
금오산 전경
금오산의 원래 이름은 대본산(大本山)이었는데 고려 때에는 남숭산(南嵩山)이라 했으니 그 유래는 중국의 황하강 유역 하남성(河南省)에 숭산(嵩山)이라는 중국의 오악(五嶽) 중의 하나로 유명한 산이 있는데 그와 생김새가 흡사하여 숭산이라 명명하면서 남쪽에 있다해서 남숭산이라 하고 황해도 해주에 북숭산을 두어 남북으로 대칭(對稱)케 되었다.
고려시대 문종(文宗)은 왕자를 출가시켜 이 산에서 수도(修道)하게 하였고, 훗날 대각국사(大覺國師)로 봉하여 호국불교로 포교와 국정의 자문에 임하도록 했으니 남숭산의 품격과 위상이 역사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금오산은 1970년 6월1일 우리나라 최초의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온 국민의 자연공원으로 관리되고 있다
금오산을 모르니 이렇게 구미시 웹문서를 살펴보고 복사하여 기록을 남긴다.
웹문서를 살펴보는 동안 배가 아프다. 나의 위장은 조금 안 좋아 조심조심하지만 장은 좋아 변비로 고생한다. 배가 잘 아프지 않는 습성인데, 경상도말을 하거나 그곳에 가면 그렇게 뱃속이 편치 않다. 구미 태백산맥이 강원도에 이르러 동해안을 달리다 함백산에 이르러 내륙으로 향한다. 그 남쪽으로 난 가지에 금오산이 걸려 있다. 이렇게 산중인 이곳에 구미시가 자랑하는 인구 40만이 넘은 도시가 형성되어 있다. 정치적인 입김에 의하여 통수권자의 고향이라는 곳에 꿀단지를 만들어 놓았다. 토끼와 발맞추는 곳에 물류의 여건이나 사회간접자본시설이나 인구구조나 어느 것 하나 타당성이 없는 이곳에 유신정부는 산업단지를 만들어 사람들을 끌어 모아 도시를 만든다. 이런 어거지도 유분수지 우리군산은 어느 곳으로 보나 공단의 입지조건이 좋은 곳인데, 해방 후 지금까지 소외에 냉대를 넘어 따돌림까지 당하고 있다. 새만금이 어쩌고저쩌고 정치권에서는 말도 많고 탈도 많더니 이제는 어떠한가? 내가 죽을 때인 30년 후에나 공단이 조성될 것인가? 아득하기만 하다. 혁명정부는 농촌을 뜯어다. 경상도에 공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전라도 사람들이 먹고 살기위하여 경상도 공장으로 이동하여 이제는 경상도 사람이 되었다. 현직에 있을 때 선진지 견학을 간다. 선진지는 역시 경상도다. 전라도는 선진지가 없다. 모두가 낙후 지역이다. 그러면서 지역감정이 어떠하고 지방색이 어떠하고 하며 나발 거린다. 전라도 출신 공무원들은 짤닐까 자리 지키기에 여념이 없을 때에, 경상도 출신들은 면 소사 출신들까지 전라도에 와서 군수를 다 해먹었다. 그러고도 지역차별을 말하지 말라고 하는가? 울화통이 치민다. 그래서 경상도에서 무슨 행사를 한다 하면 더욱 거부감이 치밀어 외면하곤 했다. 또 왜 이리 감정이 격해 졌나.
칼다봉에 이르는 길목이 여간 아니다. 뒤쪽으로 서서히 금오지가 보인다. 시가지를 벗어나 산중에는 하얀색 이빨을 들어 낸 아파트 군이 보인다. 폭포로 향하는 곳과 자연환경연수원 2.0km 칼다봉 성안 정상을 알린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목을 현수막이 가로막고 있다. 구장로님이 망설인다. 그러나 입구부터 위반한 것을 어찌 할거나 칼다봉으로 향하자고 말한다. 시간은 10시40분이다. 한 20여분 오르니 칼다봉 정상이다. 북쪽은 단애다. 저 멀리 산 밑 골짜기를 달리는 고속도로가 하얀 다릴 들어내며 잰걸음걸이다. 이마에 맺힌 땀을 식힌다. 앞장선 최여사 사위가 도착한다. 폭포 쪽으로 향하다. 다시 돌아 올라왔다고 한다. 이곳에서 집사람이 싸준 떡이며 사과를 나눈다. 유사장님 최여사 최여사 사위 그리고 큰 유사장님이 도착한다. 이어 임과장과 이원장이 도착한다. 이제부터는 능선으로 이루어진 곳이 많다. 곳곳에는 산성의 흔적이 보인다. 금오산 호텔에서 정상에 이르는 골짜기가 아름답다. 금오지 저수지 넘어 구미 시가지도 보인다. 우측의 정상에는 통신대 와 방송국의 안테나가 여러 개 보인다. 골짜기 4부 능선을 타고 달리는 송전선은 정상 쪽으로 향한다. 능선 곳곳에 산성의 흔적이 여전하다. 성안에 도착한 시간이 11시 40분 이곳은 60년대 까지 두 개 마을 100여 호가 살고 있었고 미군 통신대의 설치로 이곳에서 근무하는 일용직 근로자들이 이곳에 머물고 있기도 했던 곳이다. 고랭지 채소가 나오기 전 이곳에서 생산되는 채소가 고랭지의 원조 격 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성안 습지로 있다. 생태계의 보존을 하고 있다. 이곳에는 금오산성 중수비가 세워져 있다. 정상에 이르는 길목에 철책으로 둘러진 비가 있는데. 이곳이 금오산성 중수 송공비 인가 보다. 이곳에서 정상 0.7km 칼다봉 1.7km 자연환경연수원 4km를 알린다. 조금 오르니 금오동천으로 향하는 곳으로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정상 0.4km 지점이다. 정상부근 통신대에 이르니 철망에 설치된 경고 재한구역이란 글씨가 영어로 먼저 쓰여 있고 한글은 그 밑에 쓰여 있다. 지금도 미군들이 통신대를 운영하는가 보다.
금오산의 정상 현월봉(懸月峯 976m) 달을 매달아 놓은 봉우리란 뜻이다. 정상은 미군의 통신대에 내어주고 현월봉 표지석은 조금만 자리를 비집고 서 있다. 그 밑에는 방송국 안테나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조금 내려와 헬기장이 하얀 시멘트 바닥을 들어내고 있다. 식사를 그곳에서 하자고 구회장님이 말한다. 우측에 있는 약수암은 자리가 없는 것인가? 약수암으로 향하다 일주문만 바라보고 다시 헬기장에 오니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하고 점심중이다. 바람이 심하다. 중대장님이 골짜기로 먼저 올라와 안내한다. 약사암에 가면 식사할 자리가 있다며 그곳에 가서 점심을 하라고 알려 준다. 약사암의 일주문인 東國弟一門(동국제일문)을 지나 양쪽의 바위 사이에 놓인 계단을 내려서니 약사암이다. 남쪽으로 탁 트인 조망이 시원하다. 저 동쪽에는 마치 정자같이 범종각이 세워져 있다. 출렁다리로 연결되어 있고, 출입을 금하고 있다. 약사암을 지나 바위 밑에는 여러 등산객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점심중이다. 우측으로 통신대 안테나가 아스라이 보인다. 그리고 통신대 남쪽 봉우리에는 돌탑과 조각상의 스님상이 그림자처럼 보인다. 범종각을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만들어 시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인가 범인들은 접근금지다. 점심을 범종각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자리를 만든다. 북쪽으로 암벽이다. 낙석주위 라는 경고문이 있다. 큰유사장님은 김밥으로 작은유사장님은 컵라면으로 그리고 고부장님과 구장로님과 나는 도시락이다. 식사중간에 이원장일행이 도착한다. 식사를 마친 작은유사장님이 구운 달걀을 나누어 준다. 그때 하나가 부족하다며, 이원장은 먹지 말라고 한다. 이 말은 듣는 이원장 주인이 안 먹어야지 왜 안주냐고 유사장님에게 항의다. 다 나누어 주고 나서 유사장님 꼭 열 명이라 나누었다고 하신다. 다 계산이 있어 내 놓으신 것이다. 그리고 구 장로님께서 커다란 비닐봉지를 내놓은다. 귤이 가득 들어 있다. 몇 개를 집어 먹는다. 그러는 동안 최여사님이 도착이다. 헬기장에서 점심을 하였다고 한다. 사위와 함께 한 것이다. 커피를 가져와 나눈다. 먼저 이원장이 먹으니 유사장님 왈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데, 먼저 안준다고 농담이다. 그러면서 기분 나뻐커피를 안하시겠단다. 그러더니 최여사가 ‘유사장님 여기 한잔 하셔요’ 하니 유사장님 왈 이제까지 한 말은 내 정신이 아니였서 하며 커피를 받는다. 일동 박장대소(拍掌大笑)다. 이렇게 산행을 하면서 유사장님 안 계시면 웃을 일이 없다. 전번 아리 산악회 산행 시 작은 유사장님이 안계시니 산행하는 맛이 나지 않았다. 유머 감각이 특출한 분이 계시니 산행의 피곤함을 반감한다.
화장실을 들려 하산 길로 접어든다. 이곳에도 산불조심 등산로 폐쇄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암벽 밑의 석간수를 올라가 본다. 이곳이 마애불이 있는 곳으로 착각했다. 10여분후 1시 10분에 마애불에 도착한다. 불교에 심취한 등산객은 앉아 불공을 열심히 드리고 있다. 마애불은 각진 모서리 부분을 중심으로 조각하여 입체감을 살렸다. 정식명칭은 금오산 마애 보살입상이다. 보물 제 490호다. 높이가 5.5m 이고 신라 보살상 보다 진전된 모습이라고 설명하니 고려시대에 조각된 것으로 보인다. 한참을 내려오니 누군가가 공들여 쌓은 돌탑이 나온다. 오형돌탑(烏亨石塔)이다. 돌탑에는 이러한 글이 있다.
오형돌탑
큰 돌 작은 돌
잘 생긴 돌 못 생긴 돌
차곡차곡 들에 업고
돌탑으로 태어나서
비바람을 이불삼아
산님들을 친구삼아
잘 가라 띄워 보낸
낙동강을 굽어보며
못다 핀 너를 위해
세월을 묻고 싶다
錫, 석아
이 돌탑을 쌓는 이가 지은 시를 쓴 것 같다.
아마도 사랑하는 아들을 잊고 그 아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정성을 모아 쌓은 돌탑인가 보다. 이글을 작성하면서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고 숙연한 마음이 든다.
그러나 등산객들은 이러한 내용은 간과하고 자연과 인간의 조형미를 탐할 뿐이다.
또한 다른 곳에 이렇게 글씨를 뒤집어 써 놓았다.
心
뒤집어야 비운다. (이 글자는 올바로 씀)
뭐라 꼬!
그래요
욕심도 버리고
미움도 버리고
원망도 하지 말고
후회도 하지 말고
살다가 힘들거든
이곳에 놀러 오이소
친구 되어 줄게요
오형 돌탑 (이상은 뒤집어 쓴 글씨임)
이렇게 철학적인 내용을 기록하여 놓았다.
이곳에서부터 해양경찰서에 근무하는 회원과 동행이다. 약사암 범종각을 박정희 대통령이
시주하였다는 내용도 알려 준 회원이다. 정상 1.3km 폭포 0.8km를 알린다.
고사목에 하회탈 모양의 얼굴을 조각하여 장승처럼 등산로를 지킨다. 시간은 1시 40분이다.
넓은 마당바위가 있는 전망대에 이르러 보니 호텔과 골짜기 그리고 금오지와 시가지가 한눈
에 보인다. 안전망 넘어 누워 있는 소나무가 껍질이 벗어진 채 푸르름을 자랑한다. 뭇사람
들이 올라가 사진을 찍기 위하여 한 짓으로 발길에 달아 위쪽은 아에 껍질이 없이 반쯤 달
아 있다.
할딱 고개에 이른다. 내리막의 할딱 고개는 계단을 이루어져 있다. 헐떡 고개가 맞는 말인데 하며 생각한다. 이곳의 방언인가 보다. 이곳을 이제는 계단을 놓았다. 계단에서 보면 맞은편 암벽에는 등산객들이 한 줄을 지어 오르고 있다. 깊게 패인 곳이 도선 굴인가 보다. 줌으로 그곳을 잡아본다. 계단을 다 내려오니 넓은광장과 연못이 있고 암벽에는 물이 흐른 흔적이 보인다. 대혜 폭포이다. 이 폭포는 해발 400m에 위치하여 있고 27m의 높이를 자랑한다. 지금은 갈수기라 물의 흔적만이 보이는데, 여름철 우기에는 많은 물이 쏟아져 금오산을 울린다하여 명금폭포라고 하기도 한단다. 폭포가 떨어지는 곳에는 욕담이 생겨 물보라가 이는날 선녀가 무지개를 타고 내려와 목욕을 즐겼다고 한다. 욕담의 징검다리를 건너 내려오면서 본 곳으로 향한다. 해양경찰서에 다니는 회원은 지난 3월에 이곳을 등산 하였다고 한다. 그 때는 이곳 대혜 폭포가 얼어 하얀 빙벽을 이루어 장관이었다고 설명한다.
도선굴에 이르는 길목은 절벽에 철근 가드레일을 세워 안전을 도모한다. 철근을 마치 엿가락 같이 꼬아 만든 것으로 꼬아진 네 곳에는 차례로 쇠사슬을 꾀어 놓어 예술적이다. 절벽에 길을 내어 관광객들이 다니니 발이 닿는 곳은 바위가 닿아 미끄럽다. 비가오거나 물기가 있는 날에는 여간 조심을 하여야 할 것 같다. 할딱고개 계단에서 본 굴 모양이 도선굴이 아니다. 조금 못가 천연동굴이 있다. 굴 입구에는 오석으로 새겨진 金烏山屈通路記(금오산 굴 통로기)가 새겨져 박혀 있다. 세운 사람은 끝 부분에 面長 金升東 記(면장 김승동 기) 라고 써 있다. 전부 한자이다. 아마도 일재시대에 한 모양이다. 연대가 정을 쪼아 낸 흔적이 허옇게 보인다. 굴 천정은 거멓게 그을려 있다. 촛불의 영향 이런가 아니면 이곳에서 숙식을 하기 위하여 불을 집혀 그을린 것인가? 지금도 여러 개의 촛불이 컴컴한 굴속을 밝히고 있다.
굴에서 보니 바로 밑에 절이 보인다. 저 밑으로 호텔이며 주차장도 보인다.
절에 이르니 海雲寺이다. 범종각 에 해운사란 현판이 걸려있다. 그리고 범종각 둘레에 무청을 걸어 말리고 있다. 스님들의 겨울 양식이다. 삼십여 칸의 계단위에 정면 삼 칸의 대웅전이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단청도 예쁘다. 주변의 나무들은 늦은 가을을 알린다. 아래에 있는 정면 다섯 칸의 지장보궁 단청은 더욱 화려하다. 사천왕문에 이르는 산쪽의 석축이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아 조형미를 미르다. 위쪽에 용마루 수키와를 얹혀 놓아 더욱 예술미를 살렸다. 해운사를 나오니 케이블카 승강장이다. 위쪽이다. 해운사 아래에는 깊이 169m에서 솟아나는 석간수가 나오는 靈興井(영흥정)에서 물맛을 본다. 영혼이 살찌는 샘물이란다. 조금 내려오니 산성으로 이어진 문이 나온다. 大惠門(대혜문)이다. 큰 은혜를 입는 문 이란 뜻이다. 금오산성의 외성을 이루는 문이다.
금오산성은 두 개의 성이 있다. 바깥쪽에 외성 그 안쪽에 내성이다. 각각 외성은 길이 3700m 내성은 2700m 라고 한다. 이산성은 고려시대부터 왜구를 피해기 위하여 쌓은 성이다. 그 후 조선조 태종10년(1401년) 때 크게 쌓았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쳐 고종에 이르러 계속 고쳤다고 한다. 산성 에는 대원군의 지시로 세워진 금오산성 중수 송공비가 세워져 있다. 고 설명한다.
케이블카를 타는 곳에 ‘금오산선사적비’ 라 쓰인 오석이 돈을 들인 흔적이 보인다. 내용은
앞에서 설명한 내용보다 구체적으로 기록하여 놓았다. 1991년에 세운 것이다. 주차장에 도
착하니 3시다. 입구에 설치한 금오산 안내 등산로를 보니 산불방지를 위하여 계곡에서 정상에 이르는 등산로만 남겨 놓고 모든 등산로는 폐쇄하여 놓았다. 공원 관리실이 있는 곳에는 넓은 잔디밭이 조성되어 있다. 화장실에는 더운물까지 나온다. 다시 한 번 전라도의 비애를 느낀다. 여기는 화장실 까지 더운물이 나오는데, 우리 전라도 는 도립공원의 어느 화장실에서 더운물이 나오는가 보아라. 그 무엇으로 지역감정을 억누를 수 있단 말인가? 각성할지어다. 전라도 전라북도 도민들이여. 화장실을 다녀오니 대장님이 도착하여 주차장 건너편 관리사가 있는 곳 쪽의 좌석에 하산 주상을 차렸다. 닭 강정과 맥주 소주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상대적 박탈감에 울적해진 기분을 소주와 맥주를 겸한 소맥으로 달랜다. 이것을 본 임과장님 ‘왜 그래요’ 한다. 산은 산이고 지역감정은 감정이지 하며 마음을 달랜다.
그래 이곳사람들이 금오산(金烏山)이라 칭함을 이렇게 해석도 해본다. 금가마귀는 길조이니 박정희가 아니더라도 그 누군가가 나와 이곳을 잘 살게 만들었을 것이다. 내가 억울해 하며 지역감정을 이야기 하는 것은 국토 발전의 형편성이다. 한나라의 지도자가 되면 사심을 버려야 한다. 그런데, 집권 욕에 사로잡혀 총구로 권력을 잡고 그도 모잘라 종신토록 대통령을 하려고 계엄령 하에 헌법 개정을 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박탈하는 긴급명령권을 발동하여 법에 우선하는 권력을 휘두르고 대통령 선출을 간접선거로 바꾸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라 이름을 붙여 이사람들이 대통령을 선출한다. 이름 바 체육관 대통령이다. 끝내는 술자리에서 부하의 총에 맞아 비명횡사하는 대통령이었다. 30년이 지난 지금 그의 딸을 대통령으로 내세우는 우리의 정치수준을 보면 국민의 척도가 얼마나 후진적인 것인지 통탄할 일이다. 지금은 국가 기관을 동원하여 대선에 개입한 흔적이 나오는데, 이것을 수사하는 검찰의 수장을 바꾸고 담당검사를 하차시키고 검찰출신의 박정희 대통령의 친위대를 비서실장에 앉히고 검찰을 쥐락펴락 하는 이것이 과연 올바른 정치로 가는 것인가? 천주교 정의 사회 구현단의 전주교구 사제단에서 관권개입 대선에 대한 정확한 진상을 밝히라는 시국미사에서 연평도 포격 문제를 말하여 온 나라가 시끄럽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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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친구는 산과 땅 같은 진정한 친구입니다. 친구는 등산가이며, 소설가이며, 사진작가입니다. 기행문 잘 감상 하였습니다.
너무나 과찬의 말씀 입니다. 등산가라기 보다 산이 좋아 산을 찾는 사람이고, 소설가라는 말은 당치도 않으며, 사진작가 대열에 서려면 아직도 구도도 제대로 잡을 줄 모르는 문외한 입니다. 그저 나의 생각과 감정을 말할 뿐입니다. 애독해 주어 감사 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늘 안산,즐산하세요.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건강은 어떠한지요. 반갑습니다. 근래 산행은 안하는지요. 건강이 허락하면 산행도 하고 아름답고 맛깔난 여행기도 올려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아옛날이여 옛날에 추억이 있었던 금오산과 관광호텔..... 감했습니다 존글 존사진들 감사합니다
별도의 게시판 까지 마련하여 주어 감사 합니다. 열심히 노력하여 보겠습니다. 일오통신 아~자.
ㅎㅎㅎㅎ 아직도 열정이 대단하신걸로 봐서는 20대 같오!! 언제 한번 같이 합시다. 쥑일 놈들 ㅋㅋㅋㅋㅋ
열정은 없고 기운만 있는데, 20대는 고사하고 70대 같으오, 불러 주시면 일요일 빼고 오~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