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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곡실/명화관"에 들렀다 영화 [어둠 속의 댄서]를 다시 만났습니다.
친구가 추천하며 함 감상평을 부탁하기에 2001년이 시작되는 꽃샘추위 속에서 비디오로 보았었습니다.
노동권의 투쟁전선에서 억척스러웠던 친구가 방향을 잃고 조직에 대한 회의와
자신의 자리를 돌아보는 시기였기에 그 부탁을 거두절미로 대할 수 없어
꼼꼼히 정성스럽게 그 감상을 적었었지요.
그 편지들이 생각나 두적여 찾아보고는 다시 정리하여 "명곡실/명화관"에 답글로 올리려다
이 게시판이 한적하여 그냥 예 올려봅니다.
98년에서 2001년까지 대우자동차의 부채와 경영실조로 국가경제가 흔들리고 있었을 때였지요.
어려서부터 추억을 함께 한 친구가 부평대우자동차에 노동자로 근무하고 있다.
자연 대우자동차의 향방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TV뉴스에 위통을 벗고 메가폰을 가로매고선 목청을 돋구던 한 변호사가 눈에 들어오더라.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힘껏 대변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도 그 쉰 강팍한 목소리에서 정신적인 피해자로 느꼈다.
그 폭력적인 공권력 앞에 내동댕이 쳐졌던 노동자들을 생각하니
네가 권해서 빌려보았던 '어둠속의 댄서' 주인공 셀마가 겹쳐지더라.
눈이 멀 수밖에 없는 운명적 현실과 그 현실을 인정할 수 없는 절박!
해고로 쫓겨나는 현실 속에 그 공장 라인 그 생계의 탯줄을 놓칠 수 없다는 노동자.
노동현장과 노동시장의 경험이 미천한 나로서는
동조도 질타도 침묵한 채 그저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더구나.
노동조건과 임금인상을 두고 협상을 하던 상황과는 다른 국면이라
공장라인을 사수하고 공장 안 그 노동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진정 살 길인지...
멀어지는 눈을 인정하고 좀 더 일찍 다른 방편을 알아보려는 노력이 아쉬웠노라고
셀마에게 말했듯이 전화위복으로의 새 방향으로 도전해보라 하면
당사자 아닌 자로서 너무 가볍고 무책임한 발상일까...
IMF이후 더욱 양극화되어가는 계층구조 속에서
신뢰할 수 없는 사회임을 보지만 난 내 코가 석자인 처지라 내 길만 쳐다보고 있다.
그들의 힘겨움이 전이되어 오지만 가타부타 어떤 말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지켜만보는 나다.
네 말마따라 사실 요즘 사회가
한섬지기에게서 그 한섬을 포탈하여 구십구섬지기에게 백섬을 꼬박 채워주고야 말겠다는 형국이라
경찰이란 그 백섬지기의 마름 같기도 한 일면을 부정할 수만은 없겠다.
그래도 넌 그 기술과 경력이 있지않은가?
나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음을 위안하시어 마음을 푸시라.
나도 한동안 오토바이 택배를 하였었다.
헬맷 안 썼다고... 일방통행로로 진입했다고... 등등 4~5만원을 뜯기니
하루 일당을 벌려다 더 까먹기도 했으니 하루벌이의 비애였다.
물론 내가 법을 어겼으니 할 말은 없지만 집을 찾아 헤매다보면...
그 속이 쓰린 억울함을...
내 성격이 굽히지를 못하는지라 쓰리면서도 봐달란 한 마디 못하고 말았지.
들어줄 지도 모르는데 괜히 더 초라해지잖아.
다만 휑하니 도망가지 못한 그 민첩하지 못한 내 둔함만을 원망할 수밖에.
그래도 놓을건 놓고 디딜건 디디며 심기일전하자!
막혔으면 돌아서 가기도 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보길...
아래는 자네가 부탁한 내 감상일세...
*영화 - 어둠 속의 댄서 - 를 보고*
mms://media3.nkino.com/Theque/TrailerTheater/1261/300.asf
"앞을 못보는군요?" -- 제프
"볼 게 뭐 있어요?" -- 셀마
♬난 모든 것을 다 보았어요♬
나는 모든 걸 봤는걸요.
나무도 보았고
미풍에 나부끼는 버드나무 이파리도 보았고
제일 친한 친구의 손에
죽은 사람도 보았고
채 꽃을 피우기도 전에
스러진 생명들도 보았어요
과거는 이미 보았고
미래의 모습도 알고 있어요.
난 모든 걸 보았어요
더 볼 것이 없답니다
이대로도 행복한 걸요
이대로 만족하는 걸요. -- ♩셀마♩
코끼리나 왕, 페루는 못 봤을 걸요. -- ♩제프♩
내겐 더 중요한 일이 있어요. -- ♩셀마♩
중국은 어떤가요?
만리장성을 본 적 있어요? -- ♩제프♩
무너지지만 않으면 성은 모두 똑같아요. -- ♩셀마♩
결혼할 남자는요?
함께 살 집은요? -- ♩제프♩
솔직히 저에겐 아무 상관없는 일이랍니다. -- ♩셀마♩
나이아가라 폭포도 못봤잖아요? -- ♩제프♩
물을 봤으니 그걸로 됐어요. -- ♩셀마♩
에펠 탑은요?
엠파이어 빌딩은요? -- ♩제프♩
내 맥박도 그만큼 높은 걸요. -- ♩셀마♩
당신 머리를 만지는 손자의 손은요? -- ♩제프♩
솔직히 저에겐 아무 상관없는 일이랍니다
내가 가고 난 뒤 누가 무엇을 하든
아무 상관없어요.
난 모든 걸 보았어요
어둠도 보았고
조그만 섬광 속에
반짝이는 빛도 보았고
내가 선택한 것도 보았고
내게 필요한 것도 보았어요.
그걸로 충분해요.
더 바란다면 욕심이 지나친 거죠
과거는 이미 보았고
미래의 모습도 알고 있어요.
모든 걸 보았으니 더 볼 것이 없답니다. -- ♩셀마♩
당신은 모든 걸 다 보았고 그걸...
당신의 스크린 위에 다시 비춰볼 수 있죠
빛과 어둠
크고 작은 모든 것들...
마음에 새겨둬요
더는 필요없어요.
과거는 이미 보았고
미래의 모습도 알잖아요.
모든 걸 보았으니 더 볼 것이 없답니다. -- ♩합창♩
♪-(I've seen it all)-♪
"앞을 못 보는군요." -- 제프
"볼 수 있어요." -- 셀마
영화가 흘러가는 맥락과는 상관없이 이 노래 자체로의 메세지와 힘이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철로 위를 위태위태하게 걸어가는 셀마와 그녀를 따라 지켜보는 제프와의 대화가
기차가 지나가면서 오버랩되듯 환상적인 뮤지컬이 시작되고 끝이나며
다시 현실로 돌아오며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이 '어둠 속의 댄서' 주인공 셀마에 대한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고'
그 복선이 이 장면에 다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저에겐 가장 깊이있게 여운으로 남는 노래와 가사, 춤이 한데 어울린 환상이었고
그 환상이 기차처럼 스르르 흘러가고, 현실의 셀마가 돌출되듯 투영되어 나타나는 장면.
그 묘한 대비가 가슴에 각인지듯 긴 여운으로 남았습니다.
(사실 인물의 성격이나 줄거리가 너무도 평면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리 진한 여운을 주는 것은 이런 뮤지컬적 몽환과 현실의 치열한 리얼리티,
그 묘한 대비의 영화적 장치가 조성한 효과라고 보여집니다.)
어둠 속의 댄서는 한마디로 역설적입니다.
진한 모성으로 감동과 여운을 주면서도 그 모성을 부정하고 있었습니다.
캐시가 아들 '진'을 위해서는 셀마가 살아있어야한다고 했지만
셀마의 진한 모성은 엄마라는 존재보다 눈[目]이라는 존재가 아들의 삶을 더 밝혀주리라 말합니다.
감독은 이 영화 속의 저변에 자본주의 비인격성을 고발하려 합니다.
빌과 린다 내외가 셀마 모자를 그리 보살피고 챙겨주는 이웃이었지만
그 인간의 정이란 것이 돈 앞에서는 얼마나 속절없는 것이었던가?
그 친절과 풍요로운 웃음이란 것은 먼저 돈이 있고서이지 않은가?
그 제2변호사의 감면과 승소에 대한 열정도
돈이 없다는 말에 돌변하여선 냉정하게 뒷걸음치고 말았지 않은가?
그렇게 셀마의 비극적 종말이 자본 우선 논리의 자본주의 안에 배태되고 있었음을 은근히 냉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산업사회 그 기계화에 대한 인간 소외에 대해서는
그 프레스 공장 안 환상적인 뮤지컬을 통해 그 공장과 기계에 생명을 심어주어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기계에 규칙적인 리듬을 주어 그 리듬이 생명의 숨결로 되살아나
그 인간(노동자)과 하나로 어우러지며 기계를 자연적 생명으로 승화시키고
그 기계의 리듬에 혼연일체 되는 것이 바로 물아일체의 카타르시스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문득 무위자연 물아일체에서 그 물이란 것이 공장 안의 기계까지도 포함하는 것일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비극은 그 사회구조적 모순에서라기 보다는
셀마의 개인적인 성향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셀마는 한마디로 사랑을 나눌 줄 모릅니다.
위 노래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셀마의 눈에 담겨진 인간은
'제일 친한 친구의 손에 죽은 사람도 보았고'하며 그리 단 한번 언급되고는
더 이상 인간을 얘기하지 않으며 자연대상만을 노래합니다.
영화 전반에 걸쳐도 셀마 부모님에 대한 단서는 없지만
셀마는 그 부모님의 정과도 단절되어 있었음을 느꼈습니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사랑할 줄 안다고 했던가요?
셀마는 그렇게 사람에 대한 불신과 의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높고 두꺼운 벽을 치고는 오로지 자기의 세계에만 닫혀있었습니다.
위 노래에선 체념적 달관이 흐르고 있지만
셀마는 체념할 만큼 자신을 위한 뭔가를 소망해본 적은 없어보입니다.
노래에서 "어둠도 보았고 조그만 섬광 속에 반짝이는 빛도 보았고
내가 선택한 것도 보았고 내게 필요한 것도 보았어요." 하는 것은
사회에 홀로 내동댕이쳐졌을 때의 절망감, 새 생명을 잉태했을 때의 섬광과도 같은 그 빛,
그리고 아이를 낳겠다는 선택과 그 태어날 아이와 자랄 아이를 위한 생계비.
그렇게 자신의 아이를 안아보고자는 소망만을 했었을 뿐.
그 이외에는 자신을 연민하거나 사랑해보려하기 보다는 자신 인생의 암울함을 예견하며
자신을 몹시도 부정(不正)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것은 제프가 "앞을 못 보는군요?" 물었을 때 "볼 게 뭐 있어요?" "볼 수 있어요."라는
엇갈린 심리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 볼 게 없다면서 자신의 처지를 위로하며 태연을 가장했으면서 왜 다시 물었을 때
"예, 보지 못해요. 그렇지만 상관없어요."하지 못하고 볼 수 있다고 했을까?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겠지...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건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정하려고만 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셀마에겐 눈이란 바로 생명이고 생계이고 일을 할 수 있음이었는데
그 눈이 안 보인다고 스스로도 인정해버리면 자신이 더 이상 살아있을 명분이 없는 거였습니다.
그렇게 자꾸 시력을 잃어가는 건
자신의 살아있음의 필요를 그 당위를 잃어가는 거였습니다.
자신이 부정되어지는 현실에서도 그 얼굴이 천진하고 평화로와 보이는 것은
외부세계와는 단절된 셀마 자신만의 박자와 선률이 흐르는 그녀만의 닫혀진 세계가 있어
외부로부터 오염될 여지가 없었고, 그 자신에 대한 부정까지도
아들 '진'을 향한 희생적 사랑이 채워주고 넘쳐났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외부의 어떤 소리로든지 안식할 수 있는 그 자신만의 몽환적세계에 쉽게 도달할 수 있기에
셀마는 다른 외부의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아들 '진'의 수술비가 모아질 때까지만 그 자신의 부정을 이겨내고...
결국 아들의 눈으로 다시 부활할 수 있으리란 기대로 충만합니다.
그렇게 셀마는 외곬으로 닫혀있었습니다.
그 셀마의 평면적인 성격에 비극은 예고 되어졌습니다.
셀마가 사람들을 신뢰하고 열려져있어 자신을 나눌 수 있었다면...
셀마가 이대로도 행복하고 만족하며 모든 것을 보았고 미래도 알 수 있다며 평화롭게 웃음을 지었지만
그건 모두 거짓이었습니다.
정말 그랬다면 눈이 무슨 소용입니까?
진에게 그 눈을 주기 보다는 자신의 그 평화로움을 주는 게 더 옳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셀마는 끝내 자신의 그 행복하고 만족한 평화로움을 주기 보다는
아들에게 눈만을 주려했습니다.
결국 셀마는 실명하는 인생은 결코 아름답거나 행복하지 않음을 그 아들을 통해 드러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아, 셀마가 사람들과 좀 더 나누었더라면......
하지만 셀마는 곧이 곧대로. 일점의 융통성이 그 시야만큼처럼 없었습니다.
린다에게 빌의 고민을 말해주고 제프에게 자신의 마음을 열어놓고 함께 나누었더라면......
약속이란 것은 무엇입니까?
지켜줌으로 상대를 배려함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스스로의 신뢰성은 깨지더라도 린다에게 말해주고 함께 고민하며 풀어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빌에 대한 더 큰 배려일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아들 '진'과도 대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손지검으로 엄하게 다그치고 자신의 방식만 고수했을 뿐
'진'의 이야기를 그 심중을 들어보려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볼 수 있다고 고집만 피울 게 아니라
진작 자신의 실명을 인정하고 다른 방편을 모색하며 개척해보았으면 어땠을까?
그러면서도 눈을 잃음으로 일을 할 수 없는 오로지 삶의 짐짝일 뿐이라는 자기 부정의
그 절박한 환경이 못내 가슴을 아프게 하며 또한 그 셀마의 결정을 필유곡절일 수밖에 없었겠다는
탄식도 흘러나옵니다.
그 자신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제프의 따뜻함을 받아들일 여지도 주지 않았던 거겠죠.
자기의 부정을 희생적 사랑으로 승화시켜 오로지 아들 '진'의 눈으로 부활하고자 하는
소박하고 절박한 소망으로 그 치열해진 모정!
그 모정이 바라보는 현실은
엄마보다 눈이 더 필요하다며 처절히 목을 메답니다.
빌의 죽음은 자살로 보였습니다.
그 자살에 셀마가 이용당한 것으로......
빌은 살고 싶었습니다. 그 이전의 풍요로움 그대로... 하지만 그대로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린다에게 말할 용기도 없습니다. 이는 린다를 무시한 처사입니다.
린다의 사랑이 자신의 유산이라고 격하시킨 거나 다름아닙니다.
린다가 사치스러웠다지만, 빌 자신이 더 그 린다의 화려한 치장을 원하고 있었을 지 모릅니다.
꽃이 화려한 화병만을 고집하듯 그렇게... 그 자신의 허영으로 셀마의 돈을 노렸겠지만,
빌도 참 여린 사람입니다.
자신의 양심에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던 거지요.
돈을 가지면서도 그 양심으로부터 벗어날 면죄부가 필요했던 거지요.
그래서 셀마의 시력에 셀마와 자신의 운명을 건 겁니다.
총으로 사람을 쏜다는 것, 맞춘다는 것, 죽인다는 것.
경찰관의 관록으로 보건데 그리 쉽게 죽는 것도 아니지요.
특히 셀마처럼 하얀 영혼으로는...
(그러나, 셀마는 순백의 하얀 영혼이 아니라 바래고 바래서 하얀해진 영혼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셀마가 총을 잡도록 쏘도록 유도합니다.
혹 죽을 수도 있으나 시력이 없는 셀마의 눈에 자신의 운명을 겁니다.
그대로 죽으면 자신의 죄값이고 몸에 구멍은 나도 치명상을 피한다면
그 구멍이 셀마에 대한 양심의 면죄부가 되겠지 했겠죠.
예상대로 처음 한 발은 배에 맞았지만 급히 구급차를 부르면 될 것 같고...
장전된 총알을 다 쏘았지만 바닥에만 맞았습니다.
하지만, 셀마가 철통으로 그리 쳐올 줄이야...
빌의 예상 밖이었습니다. 그래도 차라리 마음은 편합니다.
이리 죄값을 치르는구나! 하지만 셀마의 빌 저로인한 가시밭길이 못내 애처롭고 미안합니다.
그래서 빌의 떠나가는 영혼은 셀마를 위로하고
린다가 나중에 죽어지면 빌 제가 사정을 다 말해서
셀마에 대한 오해를 풀거라며 미래 사(死) 후의 린다를 불러다주어
셀마의 영혼을 그렇게 환상적인 뮤지컬 속에서 위로하며 셀마의 영혼을 평화롭게 하여주었다면...
빌은 그렇게 양심과 탐욕의 간극에서 스스로 운명을 다한 것입니다.
셀마가 살인한 건 아니라 봅니다.
그리그리 음악과 춤과 노래라는 것은
모든 해원과 안식으로 이끄는 동화(同化)의 세계이고
그 비극을 통해
그 개개인마다 갖고 있는 주관적이지만
모두의 가슴이 소원하는 그 동화(同化)의 세계를
울음으로 불러내어 현실을 좀 더 따뜻하게 나누자는 메세지로 이해해 봅니다.
불교에서 화두명상이 자기 안의 견성의 길이듯
신을 빌어 기도묵상이 자기 안의 계시적 소명을 받들어내는 길이듯
셀마에게 있어 그 들려오는 외부 소리가 뮤지컬적(신명의) 세계를 이끌어내는 길인가 합니다.
그 셀마의 신명적 세계에서 삶과 죽음은 없겠지요.
그래서 107걸음을 노래 속에서 걸을 수 있었고
교수대에서도 그 노래 속에서 죽음을 떨칠 수 있었겠죠.
하지만 이는 꿈보다 해몽이었고 셀마에게 뮤지컬은 그녀 자의식 속에 지어진
그녀만의 단절된 유토피아였다고 하겠습니다.
-2001년 6월 편지에서-
사실 저는 영화에 대해서 그리 긍정적이지는 못해요.
산업사회가 도래하고 기계가 도입되면서 노동과 오락이 분리되어졌잖습니까?
마찬가지로 전
영화가 발달하면서
우리 삶의 현장과 감동의 세계가 분리되어지는 것 같거든요.
영화를 보고 소설을 보고 드라마를 보는 우리의 필요성은
우리 삶의 톱니바퀴에서 그 각박함으로 초조하고 긴장함에 놓쳐야했던
정서와 감동을
그 영화나 소설이나 드라마를 통해서 대리적으로 만족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영화나 소설이나 드라마를 통해서 깨어난 감수성으로)
삶의 현장에 이어져서
그 삶의 현장에서 바로 아름다움과 감동을 만끽하기 위함이지 않겠습니까?
그 정서(감성)를 깊고 넓게 열려함이언만
특히나 영화는
그 스크린 속에서만 감성과 상상력을 열게하고는
그 스크린 위의 영상과 줄거리로 오히려 삶의 현장을 견주고
현장에서의 꿈보다는 스크린을 꿈으로하여
자신의 삶을 재단하고 한숨짓게 하면서
삶과 그 감동을 현장과 스크린처럼
각각으로 나누어 받아들이게 사람을 몰고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할머니께서 들려주신 옛날 이야기는
스크린이라는 공간이 따로 있지 않고
밤하늘이면 밤하늘, 별이면 별, 해와 달이면 해와 달 등등
우리 주위의 실물들이 영사기가 되고 스크린이 되어
우리가 감동할 세계와 우리의 삶 현장이 구분되지 않았었지요.
즉 삶의 현장은 생계생존과 연관된 공간이라 고단하고 메마르게만 받아들이다가
영화의 스크린 세계에서나 그 고단과 메마름을 잊어보자고 하는 세태.
제 개인적으로
문학이나 예술이라는 것이
삶의 고단함이나 메마름을 위로하기 위한 대체물로서의 가치는 아니라.
우리가 현장에서 잊고는 놓치고는 하는 그 우리의 정서와 감성을
그 문학이나 예술의 힘을 빌어 일깨우고 열어서
바로 그 삶의 현장을 아름답고도 감동스럽게 느낄수 있게끔 하여주는
그런 가치가 아닐까?
아아,
아기의 얼굴을 떠올리세요
특히나 갓 태어난 아기얼굴을 새록새록 떠올려보세요
하루하루 달라지며 새로워지는 그 얼굴을 기억하세요
그 티없이 맑고 깨끗한 눈동자를 들여다보면
너무나 영롱하여 가없이 빨려 들어갑니다.
아기의 눈동자는 은은히 속삭입니다.
자신의 눈이 항상 새롭게 빛나면
굳이 새로운 볼거리를 찾지 않아도
보이는 모든 것들이 새롭답니다.
자신의 마음이 항상 감사함으로 충만하다면
어느 감동적인 일을 만나지 못해도
행하는 모든 일상이 감동적이랍니다.
갓 태어난 아기는 그렇게
한순간도 한순간도
그 살아있음을 놓치지 않습니다.
영화라는 것은 그 허구적 상황을 꿈꾸라함이 아니라
그렇게 우리의 감성을 두드려서
자신의 현장을 아름답고 감동스럽게 보라함일 것이다.
영화에 대한 제 횡설수설로 긴 감상을 마무리 정리하였습니다.
_()_
첫댓글 아주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더군요. 지금 동영상으로 볼때 카메라가 무척 좋다고 느껴지네요.실제로 흐트러지게 찍었다는군요. 어딜 가면서도 한눈을 자꾸 파네요^^보통 영화신에서 기차가 나오는 것은 시간을 의미 합니다. 무섭도록 암울하군요.제 기억으로 살인의 추억에선 7번의 기차신이 보이는데 그에 따라 내용이
바뀌지는 것이 인상적이었고 야쿠라와"꿈"의 반고호의 회상장면도 기차로 암시를 하지요. 어둠의 댄서에서 기차는 뭘의미 할지 영화보고 오겠습니다. 잘읽었어요
기차와 선로라는 것이 시간과의 평행선을 연상시키는 장치였군요...^^ 박하사탕에서도 기차가 거꾸로 가면서 시간이 거슬러갔었지요. 어둠의 댄서에서는 기차라는 그 석탄검은연기와 쇄덩어리 바퀴의 굴러감으로 아마 산업사회의 기계문명과 인간의 노동 그 생명력 등을 의미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__^_
그 중심에 타고가는 이...와 그 위에 실려가는 이... , 비켜가는 이... 등이 있었던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