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저널리즘의 신화, 로버트 카파(Robert Capa)展 “Slightly Out of focus"는 인류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한 사진으로 예술사에 길이 남을 명작으로 기획하였다. 카파는 1930~50년대 전선을 넘나들며 카메라로 신화를 쓴 종군 사진기자이다. 전쟁 속에서 피어난 카파는 포토저널리스트로서 의심할 수 없는 고결함과 반박할 수 없는 용맹성으로 전쟁 속에서 사라졌다. 본 전시에서 전선을 넘나들며 사실성, 현장성, 직접성 이라는 사진미학으로 포토저널리즘 신화를 완성한 로버트 카파의 사진과 함께 저서 ‘Slightly Out of Focus’ 초판 책과 가필 원고가 전시된다. 로버트 카파는 41년이라는 짧은 생애동안 다섯 차례에 걸쳐 전쟁사진가로 종군, 취재하여 세계사의 주요 역사를 증거했다. 스페인 내전 중에 ‘병사의 죽음’을 촬영하여 일약 유명한 존재로 등장하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함께 미국, 영국, 아프리카,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 최전선에서 때론 군인보다 적진 깊숙이에서 전쟁의 역사와 상처를 오롯이 담았다. 그리고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촬영을 하다가 지뢰를 밟아 최후를 마쳤다. 그는 전쟁터의 사실적 묘사와 그로인한 군인과 시민에 미치는 엄청난 충격 모두를 충분히 소화해 내었다. 카파의 사진세계는 전쟁이라는 극한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성의 적나라한 실상에 대한 파악이었다. “만약 당신의 사진이 충분하게 만족스럽지 않다면, 당신은 충분히 가까이 가지 않은 것이다” 이 말은 카파이즘의 정수이다. 카파이즘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투철한 기자 정신을 일컫는 말이다. 카파의 이상은 가능한 한 가까이 접근하는 것이었다. 그는 위협에 가까이 접근하려는 욕구 덕분에 사진이 형식주의에 빠지지 않았고 구성에 관한 타고난 시각 덕분에 포토저널리즘의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매그넘의 공동 설립자 중의 한사람인, 조지 로저는 매그넘을 주도적으로 설립하고 매그넘의 정력적인 지도자였던 카파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카파는 초소형의 카메라와 초대형 정신의 결합을 통해 인간을 위한 미래를 보고자 하였다. 카파의 용기와 지성과 직접적이며 흥분을 야기시키고 내면적이고 감정이입이 강한 사진적 스타일은 새롭고 호기심이 많은 독자층에게 이상(ideal)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설립자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은 “내가 알고 있는 카파는 현란한 투우사의 의상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위대한 도박꾼이었던 그는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과 타인을 위해 몸부림쳤다. 운명은 그로 하여금 영광의 정점에서 세상을 떠나게 했다”고 추모했다.
본 전시는 로버트 카파의 방대한 사진 세계에서 엄선된 약 140점이 전시된다. 전시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4 카테고리로 분류하여 디스플레이 하였다. 첫째 방 ‘포토저널리즘 신화의 탄생’은 인쇄된 첫 사진인 스탈린의 정적, ‘레온 트로츠키’의 사진에서 일약 스타 전쟁사진가로 발돋음하게 했던 스페인 내전의 ‘병사의 죽음’까지를 조명한다. 둘째 방은 20세기 세계사에서 주요한 획을 그은 2차 세계대전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이 방은 ‘전쟁의 실상과 그 이면의 휴머니즘’ ‘D-Day 신화의 탄생’ ‘승리/해방’으로 다시 작은 세 개의 방으로 나뉜다. 셋째 방 ‘자유로운 보헤미안’은 20세기의 보헤미안이었고 모험가였고 로맨티스트였던 카파의 일상의 삶을 다룬 작품세계를 소개한다. 넷째 방 ‘전설이 된 사진가’는 전쟁 속에서 사라져간 카파의 마지막 작업인 일본과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끝을 맺는다. 이 전시가 로버트 카파의 재발견은 물론 카파이즘에 관하여 더욱 심오하게 사색할 수 있는 문화의 장이 될 것으로 믿는다.
미군과 전쟁고아, 영국 런던, 1943년 1월 ~ 2월 ROBERT CAPA © 2001 By Cornell Capa/Magnum Photos/유로포토-한국매그넘
헝가리 출신 유대인, 로버트 카파(본명은 Andre Friedmann)는 1913년 10월 22일에 부다페스트에서 양복제단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삼남 중 둘째-셋째가 ICP의 설립자이자 매그넘의 사진가인 코넬 카파(Cornell Capa)-였다. 카파의 부모는 양복제단 일로 매우 바쁘게 지냈으나 어머니 줄리아(Julia)는 기꺼이 시간을 내어서 자식들과 함께 하고자하였으며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녀는 세 아들을 불편부당하게 대하려고 애를 썼으나 앙드레에게 관심이 많았다. 앙드레은 마음이 따뜻하고 외향적이고 활발한 아이였다. 그는 어릴적부터 모험심이 강했고 억누를 수 없는 열망과 추진력을 갖고 있었다. 앙드레가 겨우 17세 되었을 때 헝가리 정부와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켰다. 당시 헝가리정권은 파시스트이고 반유대적인 홀시 해군 제독 하의 독재정부였다. 정치적으로 조숙했던 유태인 학생 앙드레는 공산당원과 만났고 그 사실이 비밀경찰에 의해 발각되었다. 그래서 그는 불과 17세에 헝가리를 떠나 정치적인 망명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가 1931년에 베를린으로 이주한 후, 언론 분야에서 경력을 쌓기 위해서 암실 조수 겸 사환으로 데포트 통신사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그 통신사의 사주인 시몬 굿맨은 앙드레가 심미안을 가졌음을 인정했다. 그는 앙드레에게 카메라를 빌려주었고 간단한 어사인먼트를 수행하도록 파견하기도 했다. 1932년 11월 27일 슈피겔 지를 위해서 카파는 러시아혁명의 역사에 관하여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강연할 예정인 러시아의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를 촬영하는 어사인먼트를 맡았다. 레닌 사후, 당의 노선을 놓고 스탈린과 대립하여 추방당한 트로츠키는 노년의 모습이 촬영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눈에 띄게 큰 카메라를 매고 있던 사진기자들은 집회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앙드레는 소형 카메라를 숨겨서 안 들킨 채 슬쩍 들어간 뒤에 파이프를 운반하는 일군들 틈에 끼어들어서 연단 가까이로 접근하여 열띤 연설을 하는 레온 트로츠키를 촬영할 수 있었다. 슈피겔 지는 앙드레의 사진을 한 페이지 가득 게재했고, ‘Friedmann-Degephot'라고 저작권을 표기했다 . 이 사진은 매체에 처음 인쇄된 카파의 사진으로 17세에 정치적인 망명자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카파의 노망명가 트로츠키를 향한 존경의 앵글을 읽을 수 있다. 1933년 1월에 히틀러가 총통이 되면서, 유태인인 앙드레는 초기 성공을 포기하고 파리로 갔다. 그 당시에 파리는 파시즘을 피해서 도망 온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의 믿을만한 피신처였다. 앙드레는 불어실력이 초보상태였으므로 최악의 상황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프리랜서 사진가로서 생계비를 벌어보겠다고 나섰지만 하루 벌어서 하루 먹으며 근근히 살아가는 정도였다. 자주 굶고, 때때로 좌절하며 심지어 소중한 카메라를 저당 잡기까지 하였다. 카파가 세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36년 스페인 내전에서 촬영한 ‘병사의 죽음’ 사진이었다. 스페인내전은 카톨릭 교회와 대지주, 군인들이 기득권을 지켜온 스페인에서 총선으로 노동자와 농민이 중심이 된 공화전선이 승리하자 프랑코 장군을 중심으로 군부 세력이 선거 무효를 선언하고 쿠테타를 주도하면서 발발하였다.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와 히틀러의 독일이 쿠테타군을 지원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뒷짐을 진 가운데 마드리드로 몰려오는 프랑코 군대를 저지하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총 6만 여명의 젊은이들이 민병대로 참가 했다. 조지 오웰, 앙드레 말로, 파블로 피카소,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그들 중의 한명이었다. 포토저널리스트, 자유주의자, 반 파시트로서 카파 또한 스페인내전에 참가하기를 희망했다. 카파는 뷰 지로부터 어사인먼트를 받아 잡지사가 전세 낸 비행기로 애인인 여류 사진가 게르다 타로(Gerda Taro)와 함께 전선으로 떠났다. 그는 참호에서 뛰쳐나와 총을 든 채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지는 공화군의 병사, 페데리코 갈시아의 죽음을 촬영하였다. 젊은 병사가 넓디넓은 하늘을 향해 양팔을 벌린 채, 피폐한 대지로 쓰러지는 모습은 마치 순교자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이렇듯 종교적 감화는 스페인 내전이 순교할 가치가 있는 성전으로 인식시킨다. 카파의 ‘병사의 죽음’은 뷰 지에 실렸고 ‘그의 머리에 총알이 관통하여 쓰러지는 순간의 공화군의 한 병사’라는 캡션을 붙여 라이프 지에 의해서 채택되었을 때 카파는 저명인사가 되었다. 공화주의 희생의 강한 상징이 된 비극적인 죽음의 사진은 너무나 생생하여 전쟁사진 가운데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격찬을 받으며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와 함께 스페인내전을 다룬 불후의 명작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이 사진에 대하여 진실성여부에 대하여 의문이 제기 되었다. 왜 카파는 총에 맞아 죽은 병사 앞에 있었는가? 왜 죽은 병사는 부상의 흔적이 하나도 없었는가? 왜 그의 카메라는 그 특별한 때에 그 특정인에 초점이 맞추고 있었는가? 등 이었다. 그러나 카파는 그의 생존 시에 그 수수께끼를 해명하지 않았다. 카파는 어떤 한 사람의 죽음을 이용한다는 인상을 주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병사의 죽음’의 진위 논란은 그 스토리 전체를 보여주는 밀착지가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쟁을 타결할 수 있는 실제의 증거가 1996년에 밝혀졌다. 그것은 한 아마추어 역사가가 그 병사의 신원이 알리칸테 근교 알코이 출신의 24세 공장 노동자 페데리코 갈시아 임을 밝혀내었다. 갈시아의 처제는 여전히 알코이에서 살았고 사진 속의 그를 알아보았다. 그녀는 전선에서 그녀의 남편이 혼자 돌아와서 페데리코가 전사했다고 한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또한 마드리드의 군사문서보관소는 페데리코 갈시아가 1936년 9월 5일에 세로 무리아노에서 죽은 유일한 병사라는 것을 확인 해주었다. 그 날에 카파는 그 전설의 사진을 찍었다. 1938년, 중국은 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중일전쟁으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카파는 중국에서 촬영되는 다큐멘터리 영화 ‘4억의 민중’에 스틸사진 및 촬영 조감독으로 참여하는 한편 라이프 지에 기사를 제공하기위해 중국행을 결행했다. 당시 장제스의 국민정부 군대는 일본군의 공격으로 상하이와 난징을 잃고 한커우까지 후퇴한 상황이었다. 카파는 거기서 군사훈련을 받고 있는 젊은 여성들을 촬영했다. 얼마 후, 일본군은 한커우의 민간인 지역을 고의적으로 겨냥하여 공습했다. 맹렬한 한낮의 태양아래 불길이 도시를 휘감았다. 카파는 불타는 거리와 파괴된 건물 사이에서 고통스러운 이미지를 보았다. 카파는 민간인들이 느끼는 공포와 두려움에 초점을 맞췄다. 검게 그을린 뼈대로 변한 집 앞에서 주저 앉아 울고 있는 여인 등의 사진을 남겼다. 초기 포토저널리즘 시대에서 사진의 보도적인 힘에 대한 놀람과 강렬한 인식을 던져준 사진은 카파의 스페인 내전 사진 ‘병사의 죽음’이다. 이 사진을 게재한 영국의 픽처 포스트 지는 ‘이것이 전쟁이다’라는 제목과 함께 지금까지 촬영된 최전선의 사진 중 최고의 사진이라며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캡션은 이렇게 적고 있다. “당신은 이 사진에서 무기의 화약 냄새를 거의 맡을 수 있다” 사실 카파는 현장에 너무 가까이 접근했기 때문에 사진을 보는 편집인들과 독자들이 폭발음을 들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전쟁사진가로 불려지게 되었다. 즉 포토저널리즘의 신화가 탄생한 것이다.
소년 유격대 장례식에서 어머니들의 절규, 이탈리아 나폴리, 1943년 10월 2일. ROBERT CAPA © 2001 By Cornell Capa/Magnum Photos/유로포토-한국매그넘
1) 전쟁의 실상과 그 이면의 휴머니즘 카파는 스스로를 리포터라고 생각했다. 포토저널리즘의 길을 숙명으로 받아들인 후 젊은 카파에게 더 이상의 다른 선택은 없었다. 아프리카, 이탈리아, 노르망디 상륙작전, 파리해방과 수많은 전쟁사진을 촬영한 카파는 전쟁이 미화되는 것을 공격해 왔지만 정작 자신은 전쟁 없이 살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에 라이프 지가 카파에게 미국 내의 사소한 취재로 바쁘게 하자 그는 다소 짜증이 났고 사직하겠다고 위협을 하였다. 라이프 지는 어쩔 수 없이 그를 유럽으로 보낼 수 밖에 없었다. 때는 1941년 봄이었다. 그는 비행기와 배를 실은 수송선에 몸을 실었고 그 수송선은 44척의 상선의 호위를 받으면 서대서양을 횡단하여 마침내 리버풀에 도착하였다. 1943년. 카파는 독일군 롬멜 장군의 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침략에 대항하는 연합군의 총공격을 취재하기 위해서 북아프리카 전선에 갔다. 곧이어 카파는 이탈리아에 상륙을 했고 제82공수단과 영국장갑사단을 따라서 파괴된 나폴리로 들어갔다. 그 곳은 집을 잃은 수천가구들이 폐허에서 야영을 하고 있었다. 카파가 취재하는 동안 독일군이 설치해 놓은 대인 위장 폭탄이 공공건물을 파괴하고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리고 보메로 지역에 있는 어느 고등학교에서 한 선생님의 지도아래 10대 학생들이 총과 화약을 훔쳐 독일 군과 싸우다 목숨을 잃었다. 학교에 소년 유격대의 시체가 입관된 20개의 관이 있었다. 그 관들은 나이어린 아이들을 위한 관이었기에 관의 끝으로 발이 삐져나왔다. 카파는 그 때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투숙하고 있는 호텔로 가는 길은 학교건물 앞에 말없이 슬픔에 잠긴 행렬로 차단되었다. 학교 안에는 제대로 조화가 덮이지 않았고 너무 길이가 짧아서 발을 다 가리지 못한 유치한 관 20개가 있었다. 나폴리의 소년들은 소총과 실탄을 탈취하여 연합군이 진군할 때까지 4일간 독일 군과 싸우다 죽은 것이다 ” 이 날 카파는 소년들의 장례를 치르며 오열하는 어머니들의 모습을 촬영하여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고통을 통해 전쟁의 비극성을 생생하게 전했다.
2) D-Day 신화의 탄생 카파는 노르망디 오마하 해변의 폭격 속으로 향하는 제1파로 상륙정 승선을 택했다. 카파는 제1파로 상륙정을 결정하는 자신의 심경을 간결하게 남겼다. “종군 사진기자들은 군인들보다 술을 더 많이, 아가씨들을 더 많이, 자유를 더 많이 갖게 되지만 종군기자들에게 총도 없이 군인 보다 더 위험한 곳을 먼저 선택할 자유의지가 따른다. 안전한 곳을 촬영하여 비겁자가 되어 목숨을 구할 수 있지만 그것은 나에게 고문이다. 종군 사진기자들은 그의 손안에 자신의 생명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이 군마에 혹은 저 군마에 실을 수 있으며 최후 순간에 자기 호주머니에 다시 집어넣을 수도 있다. 나는 도박꾼이다. 나는 노르망디 해변을 향하는 첫 파도와 함께 가기로 결정했다” 1944년 6월 6일은 "D-Day"란 말이 역사적인 단어가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동틀녘 오마하 해변의 물은 차가웠다. 카파는 제1파 상륙정을 탔던 군인들 틈에 섞여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상륙정에서 내렸지만 해안까지는 100m나 남아 있는 상태였다. 제1파로 상륙정에 승선했던 군인들은 해변의 모래밭에 닿기도 전에 거의 모두 죽고 말았다. 그 날 2,000여명의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상륙 초기의 3주간 연합군의 손해는 사망자 8,975명, 부상자 5만 1796명이고, 독일군 포로는 약 4만 1000명이나 되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성공할지도 실패할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카파는 빗발치는 폭탄 속에서 떨 수밖에 없는 전율의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라이프 지에 이 사진이 실렸을 때, 사람들은 흔들린 초점으로 작전 당시의 긴박함과 전쟁이란 현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라이프 지는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Slightly out of focus)” 라는 캡션을 달았다. 노르망디 오마하 해변에 상륙하는 군인들의 사진이 2차 세계대전동안 촬영된 모든 사진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전쟁사진이 되었다. 그는 두 대의 카메라로 해안에서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장면을 106장 가량 찍었다. 그러나 일주일 후에 암실 조수의 실수로 대부분의 필름을 못쓰게 되고 말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 조수가 너무 흥분하여 건조기의 열을 높여서 건조과정을 빠르게 하려고 하다가 필름의 감광유제가 녹아버려 11개의 프레임만이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거칠어진 이미지가 역사상 가장 극적인 전쟁 사진이 되게 하는데 기여했다.
3) 승리/해방 1944년 8월 25일, 카파는 프랑스군과 레지스탕스와 함께 파리로 입성했다. 그는 5년 만에 유일하게 고향으로 여기는 도시로 돌아왔다. 지난 몇 년 동안 억눌려 있던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앞을 가렸고 환호는 군중들과 포옹을 나누었다. 그날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날이었다. 이윽고 그는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는 프랑스 외무성으로 가서 마지막 저항을 찍었다. 8월 26일, 카파는 개선문에서 노트르담까지 승리의 행진을 촬영했다. 특히 샹젤리제 거리에 모인 군중들은 차위나 탱크 위에 까지 올라서서 손을 흔드는 사람도 있었다. 환희에 찬 그날, 그가 찍은 파리의 이미지들은 해방의 기쁨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기록이 되었다. 그러나 승리의 행렬은 빌레 호텔 앞에서 갑자기 끝나버렸다. 부대에서 이탈한 독일 저격병들이 항복 명령을 듣지 못했는지 군중을 향해 별안간 발포했다. 그는 수천 명의 파리 시민들이 도로 바닥에 순식간에 엎드리는 공포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기록했다. 한편 카파는 막 해방이 된 샤르트르 시에서 독일군의 아이를 낳은 프랑스 여인이 삭발을 당한 채 군중 속에서 조롱당하는 장면을 촬영했다. 당시 프랑스 군중의 분노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창녀! 창녀!” 그 사진은 독일에 협력하지 않은 듯한 사람이 협력자를 대하는 신랄한 태도를 보여주는 생생한 기록으로, 그의 유명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정작 카파는 사진 캡션에 레지스탕스에서 활동했던 여성이 이 상황을 목격하면서 중얼거린 말을 인용했다. “이것은 잔인하고 불필요한 짓이에요. 저들은 군인들의 여자일 뿐이에요. 내일이면 미군과 잠을 잘 여자들 이죠.” 1945년 3월에 카파는 마지막 중요작전인 독일 낙하산 투하 작전에 참가했다. “나는 연대장과 함께 선도비행기를 타고 갔다. 그리고 나는 그 연대장 바로 뒤에서 두 번째로 점프하기로 되어 있었다. 비행기를 타고서 탐정소설을 읽기 시작 했다. 내가 겨우 67페이지를 읽었을 때 준비하라는 의미의 빨간 신호등에 불이 들어왔다. 잠시 동안 나는 ‘미안해요, 나는 못하겠어요. 내가 책 읽기를 다 끝내야 해요.’라고 말해야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일어섰다. 나의 카메라가 다리에 잘 매어져 있는지 그리고 나의 플래시가 나의 가슴 위의 주머니에 들어있는지를 확인했다. 파란 불이 들어왔다. 내가 땅바닥으로 떨어졌을 때에 셔터를 계속하여 눌렀다. 우리는 납작 누워있었다. 총탄 앞에서 누구도 일어나기를 원치 않았다. 16km 떨어진 곳에 큰 나무들이 있었다. 내 뒤에 뛰어내린 사람들 중 몇 사람은 그 나무위로 떨어졌다. 그래서 땅 위 15m 높이에서 어찌할 줄 모르며 매달려있었다. 우리는 다수의 군인들을 잃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 카파의 친구 피에르 가스만은 카파에게 비행기에서 낙하산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얼마나 극적인가를 묻곤 했다. 카파는 “점프하는 것이 그렇게 두렵지 않고, 내려가는 것이 특별히 어렵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빗발치는 총알 속에서 땅으로 뛰어내리고 바지가 뻥 뚫리고 그것을 벗지 않으면 안 될 때에 극적이다” 카파는 이전 전쟁 사진에서 한번도 본적이 없는 전쟁사진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전투지역에 가까이 접근하여 촬영한 사진들은 군인들의 눈에 비친 두려움을 보여 주었고 대포소리, 포탄 터지는 소리, 소총소리가 들려오는 느낌을 주었다. 그의 사진들에는 늘 인간에 대한 특별한 연민이 배여 있었다. 그 인간애를 바탕으로 전쟁의 공포와 절망과 살벌함 속에서 죽어 가는 군인들과 부상자들, 피난민들, 어린이들을 보여 주었다.
카파는 은막의 여왕 잉그리드 버그먼으로부터 청혼을 받고 당대 최고의 문인인 어니스트 헤밍웨이, 존 스타인벡과 호형호제할 정도였다. 그리고 파블로 피카소와 게리 쿠퍼와도 친분이 있었다. ‘전쟁 사진의 대부’, ‘종군기자의 전설’ 로 불리는 카파는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20세기의 보헤미언이었고 모험가였고 로맨티스트였다. 1950년대 초에 매그넘의 뉴욕 오피스나 파리 오피스로 매그넘을 방문하는 방문객들은 순전히 활기 넘침에, 젊은 스탭들의 열정과 헌신적인 태도에, 비지니스와 즐거움의 흥분된 혼합에, 세계도처에 색다른 지역에 있는 사진가들로부터 케이블로 이미지를 받고 급히 보내는 분주함에 누구나 감동을 받았다. 두 오피스 중에 어디에서도 카파의 친구들, 어니스트 헤밍웨이, 존 스타인벡, 어윈 쇼, 존 휴스턴, 험프리 보가트 등을 폭넓게 마주치기 십상이었다. 그들은 우연히 떠내려 들어오고 나갔다. 당시에 만약 당신이 매그넘 오피스를 방문했다면, 당신은 카파를 만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지루하고 시끄러운 점심식사나, 경마장이나, 파티에 휩쓸려 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작가 어윈 쇼는 그리니치빌리지에 있는 한 주점에서 카파를 만났던 것을 회상했다. 그는 예쁜 아가씨와 함께 있었다. 카파가 미모의 아가씨와 함께 있는 것이 들키곤 했다. 그는 속눈섭이 짙은 눈을 갖고 있었고, 시적이고 도시 실정에 밝았으며 곱슬머리를 했고 아랫입술에는 담배를 문채 냉소적인 입 모양을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남녀 모두를 매혹시키는 유쾌함과 위트가 있었다. 그는 장군들의 본부에서, 참호에서, 할리우드 파티와 같은 화려한 연회에서, 파리의 최하급술집에서, 시끄러운 포커 게임장에서, 최고유행을 따르는 파리 디자이너들의 패션쇼에서도 환영받았다. 카파는 모든 상황에서 자기를 어울리게 하는 두려움 없는 자질덕택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여기서 그가 만난 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히 그가 사랑했던 여인들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카파의 첫 애인은 여류 사진가 게르다 타로였다. 그녀는 카파와 함께 스페인내전에 처음 도착한 종군 사진가 가운데 한명이었다. 카파는 스페인 내전기간 내내 전선을 취재하다가 파리에 잠시 돌아와 있을 즈음인 1937년 7월에 스페인으로부터 끔찍한 소식을 접했다. 게르다가 죽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마드리드 서쪽에서 공화군의 공세를 취재하고 있었다. 그녀는 방공호에서 공화군을 맹사격하고 있는 프랑코의 항공기 편대를 좇아 사진을 찍고 있었다. 한 비행기가 그녀의 카메라에서 나오는 섬광을 포착하고 그녀를 향하여 발포하였으나 냉정히 촬영을 계속하였다. 실전이 끝났을 때 그녀는 부상자들을 수송하는 차량에 매달렸다. 그 차는 길에서 얼마 내려오지 않아서 통제력을 잃고서 질주하는 탱크 옆을 들이받았다. 게르다는 튕겨 나와서 탱크 밑에 깔리고 말았다. 그녀는 그 다음날 아침에 죽었다. 카파는 너무 비통해했다. 그녀의 장례식 때에 너무나 슬퍼서 운구 행렬이 지나 갈 때 한 친구의 어깨에 얼굴을 감추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리고 방안에 틀어박혀서 보름 내내내 엉엉 울기만 했다. 그 후 여러 달 동안 그는 게르다의 사진들을 갖고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그 사진을 건네주면서 그녀가 자기부인이었다고 주장했다. 게르다의 뒤를 이어 카파의 애정을 받은 수많은 여자 가운데 게르다 만큼 카파에게 영향을 미친 여인은 없었다. 카파의 두 번째 애인은 황홀할 정도의 미모를 지닌 RAF 파일럿, 에라인 저스틴이었다. 카파는1944년 봄에 전선 취재를 중단하고 곧 다가올 D-Day 취재에 관한 신임을 보증받기 위해서 런던으로 갔고 대형 호화 아파트에 저스틴과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카파는 그녀를 핑키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그녀의 딸기 색 금발 때문 이었다. 그들의 아파트는 무수한 파티와 밤늦도록 포커의 장소가 되었다. “D Day전의 런던은 카파에게 주연의 시간이었다”고 어윈 쇼가 썼다. 그는 고도로 개발된 취향을 가졌고 선술집을 돌아 다니지 않을 때에 열렬한 포코 게임을 위해서 자기 여자친구의 아파트에서 호스트 역할을 했다. 당시 그는 여성들로 하여금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느끼게 하였다. 사진작가 벌트 하디의 부인 쉐라 하디는 전쟁 기간 동안에 픽처 포스트 지에서 일했는데 카파가 런던 지사에 왔을 때를 잊지 못했다. “모든 아가씨들이 ‘카파가 온다, 카파가 온다’고 말했고 그들 모두가 화장을 하고 복도에 서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매력적인 전쟁사진작가에 관한 소문을 이미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신비한 큰 눈, 긴 눈썹, 뒤로 잘 빗어 넘긴 머리카락의 카파가 입에 담배를 물고 복도를 걸어내려 오고 있었다. 아가씨들 모두가 그에게 홀리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후에 카파는 뛰어난 그림같다는 잉글리드 버그만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당대 최고의 관객을 동원하는 여배우와 카파의 만남은 어떤 도시보다 유혹적인 도시인 파리에서 이루어졌다. 버그만은 유럽의 미군기지 순회공연에 참가하기위해 파리에 왔고 카파와 어윈 쇼가 리츠 호텔의 로비에서 버그만을 우연히 본 것이다. 그들은 그녀에게 석찬에 초대하는 메모를 보냈는데 놀랍게도 그녀는 초대를 수락했다. 버그만은 짙은 눈썹의 매력적인 용모와 자석 같은 흡인력을 지닌 카파에게 첫 눈에 반했다. 그 후 단지 몇 주일 만에 카파와 유부녀인 버그만은 연인이 되었다. 버그만은 카파의 첫인상에 대해 자신의 홍보 담당 메니저인 조 스틸에게 “카파는 굉장히 멋지고 독특하며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이라고 말했다. 버그만의 전기작가인 도널드 스포트는 “버그만에게 카파는 마술처럼 갑자기 그녀의 삶 속으로 들어온, 영화대본에서나 보던 사람이었다”라고 서술했다. 버그만은 카파가 할리우드에 와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길 간절히 바라며 열렬히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카파는 인터내셔널 픽처스의 제작을 맡는 한편 영화스틸 사진을 찍어주고 영화대본용으로 전쟁회상록을 쓰면서 할리우드에 머물렀다. 버그만은 카파가 늘 자기 주위에 머물 수 있게 되어서 기뻤지만 얼마가지 않아서 카파는 영화산업이 지루해졌고 상업적인 영화계 풍토에 질려버리고 말았다. 이때, 버그만이 카파에게 청혼을 했다. 그러나 카파는 “나는 어딘가에 매여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냐, 내일은 한국이라고 하는데 내가 만일 결혼해서 아이가 있다면 나는 한국에 갈 수 없겠지,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라고 거절했다. 카파는 결혼해서 정착하려 하지 않았고, 버그만은 자신의 체면을 살려주는 그 어떤 약속도 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하기 위해 배우로서의 생명을 위태롭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카파는 뉴욕으로 돌아갔다. 그와 버그만의 로맨스는 2년 만에 끝이 났다. 그들은 평화적으로 헤어졌다. 여러 해 뒤에 버그만은 자신의 자녀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염려스러웠지만 회고록에서 카파를 언급했다. 어느 날 저녁 그녀의 딸 이사벨라 로제리니가 막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버그만은 딸에게 그 원고를 주면서 “여기 있다. 읽어봐 그러나 나를 너무 나쁘게는 생각하지 말어”라고 말했다. 딸은 어머니의 모험담을 밤을 새워가며 읽었다. 그리고 다음날 “엄마에게 그런 애인이 있었다니 믿을 수 없어요”라고 말을 하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버그만이 카파에게 반한 만큼 카파도 버그만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핑키와 그랬던 것처럼, 그는 게르다의 죽음 이후, 그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 즉 한 여자와 진정으로 친밀해지는 것에 대한 갈등과 다시 한번 맞닥뜨려야 했다. 핑키의 경우처럼 사랑은 다시 거절로 끝나버렸다.
1954년 4월. 새로운 사진잡지 카메라 마이니치 지는 카파로부터 도움을 받기 위해서 그를 초대하였다. 그것은 전액경비지급을 받는 6주간의 어사인먼트였다. 그는 교토, 나라, 오사카, 코베, 아마가사키를 여행했다. 그 기간동안에 그는 마음에 드는 것은 무엇이든 촬영할 수 있고 다른 잡지들을 위해서 일할 수도 있었다. 카메라 마이니치 지는 게재되는 모든 사진에 대하여 후한 저작료를 지불하였을 뿐만 아니라 잡지사가 제공해준 모든 장비를 카파가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비록 그가 생계를 위한 방편으로 사진에 별로 매력을 느끼지 않고 있었지만 카파가 거절할 수 없는 제의였다. 일본으로 떠나기 전에 옛 여자 친구에게 그의 경력의 전환을 축하하기 위해서 돌아오자마자 큰 파티를 열 것이라고 말하고 떠났지만 그는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경력을 종결하고 말았다. 4월 말경에 라이프 지는 일본을 촬영하고 있는 카파에게 인도차이나 전쟁 취재를 요청하였다. 라이프 지는 30일간의 어사인먼트로 2천불의 개런티와 도쿄에서 베트남으로 가는 경비와 2만 5천불의 생명보험증권을 합한 제안서 전문을 카파에게 보냈다. 2천불은 단지 하노이에 앉아있기만 해도 받게 되는 개런티였다. 출판되는 사진마다 추가로 저작료를 받게 되고 전투 지역이 위험할수록 더 높은 위험수당을 받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카파가 인도차이나 전쟁에 종군을 결심한 보다 큰 이유는 살아있는 가장 위대한 전쟁 사진작가라는 카파의 평판이 한국전쟁에서 이름을 널리 알렸고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계속적으로 훌륭한 작업을 하고 있는 데이비드 더글라스 던컨에 의해서 능가당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컸다. 그리고 그의 친구 어윈 쇼는 카파가 매카시적인 미국에서 그가 공산주의 동조자라는 ‘반-공식적인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 그 일을 맞는 부분도 있다고 확신했다. 5월 25일 아침 7시에 카파는 짚 차에 몸을 실었다. 숙련된 종군기자인 카파는 카메라와 필름 그리고 술병과 냉차병을 휴대했다. 200대 차량으로 대략 2천명의 군인들로 된 기동부대를 수송했다. 그리고 남딘 교외에서 강을 배로 건너기 위해서 기다리는 동안에 카파는 그의 동료들에게 그 날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장담했다. 8시 40분에, 선도차량들이 저격병의 공격을 받아 차량이 궤멸되어 멈추어 서자 프랑스 기갑부대가 포격으로 응수했다. 카파는 돌격하면서 논에서 일을 하는 월남 농부의 모습을 보고서 깜짝 놀랐다. 그들은 전투 상황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마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들의 일을 계속 하고 있었다. 카파는 엄호를 받으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그들 뒤에서 포격전이 진행되는 가운데 농부들의 사진을 찍으려고 논으로 걸어들어 갔다. 이윽고 트럭이 지뢰 위를 지나갔을 때에 폭발로 인하여 4명이 죽고 6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번에는 종대가 박격포와 저격병의 공격을 받았다. 종군사진가, 루카스는 훗날 전투를 묘사했다. “적의 박격포가 우리 종대를 향해서 날아 왔다. 저격병들은 이따금 낙오병들을 쏘았다. 그리고 우리들의 대포도 반격의 포성을 울렸다. 도로에 연해있는 촌락들은 탱크들이 포탄을 마을로 던져서 마을에 불이 붙었다. 저격병을 숨겼던 버려진 교회는 파괴되었다. 카파는 어디에나 있었다. 한번은 박격포가 날아와 부상당한 베트남 군인을 짚차에 싣고서 한 초소로 데려갔다. 종군사진가, 맥클린는 당시 상황을 “해는 쨍쨍 내려 쪼였다. 사방에서 총성이 울리고 있었다. 우리들의 뒤쪽에서 프랑스 대포, 탱크와 박격포의 소리, 왼쪽에 있는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숲 속으로부터의 소총소리, 오른쪽에 있는 다른 마을에서 폭발하는 프랑스 포탄과 뒤섞인 소총소리, 지래와 적의 박격포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상황이 너무 위험하여 누구든 주변을 서성거리지 못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카파는 다섯 번째 전쟁이었고 위험을 판단하는데 전문가였다. 카파는 마치 과감하게 나가기 전에 총성이 잠잠하기를 잠시 동안 기다리는 것처럼 짚 차 뒤에 서있었다. 그는 왼쪽으로 구부러졌던 길 위로 재빨리 걸어 올라간 다음에 길옆에 있는 도랑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는 높이 자란 풀을 해치고 전진하는 프랑스 소대의 사진을 찍었고 차량이 다시 이동을 하기를 기다리면서 그들의 차량 옆을 어슬렁거리는 군인들의 사진을 몇 장을 더 찍기 위해서 길 위로 다시 기어 올라 찍은 뒤에 논에 있는 소대를 따라잡기로 결정했다. 그는 두 장의 사진을 더 찍었다. 그것이 그가 찍은 마지막 사진이었다. 그는 다른 각도에서 군인들을 찍으려고 도랑의 풀이 있는 경사를 기어오르다가 대인 지뢰를 밟은 것이다. 맥클린과 루카스가 카파가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으려고 앞으로 달려갔다. 로버트 카파는 한 손에 카메라를 꼭 쥐고 있었다. 그는 왼쪽 다리가 잘려나가고 흉부가 파열된 채, 가쁘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사진의 끈을 놓지 않았다. 맥클린은 카파의 이름을 불렀고 그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으나 아무런 소리를 듣지 못했다. 전쟁을 진정으로 증오했던 종군 사진가, 카파는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다가 탱크에 치어 죽음을 맞은 애인, 게르타처럼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았다. 한 여인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총각사진가, 카파는 불혹의 나이에 대인지뢰를 밟아 생을 마감했다. 그는 인도차이나전쟁에서 순직한 첫 번째 미국인 포토저널리스트가 되었다.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헤럴드 트리뷴’ 종군기자 출신 존 스타인벡은 카파의 죽음을 접하고 몇 시간 동안 거리를 걸었다. 그리고 돌아와서 잃어버린 친구를 위한 감동적인 비문을 지었다. “카파의 위대함은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진실 되고 활력이 넘치는 그의 사진들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카파는 더욱더 중요한 다른 일을 남겼다. 그는 그의 주변에 젊은이들을 모아서 격려하고, 가르치고, 심지어 먹이고 입히기 조차했다. 무엇보다도 그가 젊은이들에게 베푼 최상의 것은 그들의 예술에 대한 존경과 그것의 실행에 있어서 성실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한번도 그들에게 카파 자신의 사진과 같은 부류의 사진을 찍도록 요구한 적이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전 생애에 있어서 카파의 작은 부분을 지니게 될 것이고 그들은 카파를 그들의 젊은이들에게 전할 것이다.” 존 스타인벡의 예견대로 매그넘은 오늘날, 작가주의를 지향하는 세계최고의 다큐사진 에이전시가 되었다. 카파의 주검이 미국으로 인도되었을 때,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될 만하다는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카파의 어머니가 고함을 치며 반대했다. “나의 아들을 국립묘지에 묻을 수 없다.그는 전쟁에 반대했다. 그래서 군인들 사이에 묻히게 해서는 안 된다” 그녀는 엄격하고 단호했다. 그의 장례식은 뉴욕 주의 한 공동묘지에서 거행되었다. 가까운 가족과 매그넘 회원 몇 명만이 참석했다. 그리고 하노이에 있는 바로부터 조화 하나가 도착했다. 카파로부터 진한 마티니를 혼합하는 방법을 배웠던 바텐더가 보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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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만약 당신의 사진이 충분하게 만족스럽지 않다면, 당신은 충분히 가까이 가지 않은 것이다” 카파 언제 시간내서 같이 가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