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의 내용은 오래 전에 어느 책의 것을 그대로 정리해 놓은 것입니다. 당홍과 토홍을 통틀어 남양 홍씨 문중의 세세한 역사가 담겨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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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푸른밭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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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의 내용은 오래 전에 어느 책의 것을 그대로 정리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홈페이지를 만들려고 자료를 찾다 보니 책 제목을 잘 모르겠습니다.
당홍과 토홍을 통틀어 남양 홍씨 문중의 세세한 역사가 담겨져 있습니다.
남양 홍씨(南陽 洪氏)의 개요
서로 조상을 달리하는 두 집안이 동성동본(同姓同本)을 일컫는 성씨. 우리나라 2백 49개나 되는 성씨 가운데 그런 성씨는 오직 남양 홍씨 뿐이다. <당홍>은 멀리 고구려(高句麗)시절 당나라에서 귀화해 온 홍학사의 후예, <토홍>은 고려 고종조(高宗朝)의 김오위(金吾衛) 별장 홍선행(洪先幸)의 자손으로 각각 일컬어 온다. 당홍·토홍이라는 속칭도 바로 이같은 <귀화파>와 <토착파>의 구분에서 연유했다. 그러나 정작 <토착파>인 토홍의 역사보다 귀화파인 당홍의 역사가 3백여 년 이상 길다는 데서 동성동본 두 집안의 관계는 역사의 미궁에 돌아가 있다. 두 집안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는 몇 가지 가설이 있다. 그 하나는, 당홍은 글자 그대로 당(唐)나라에서 귀화해온 홍씨이며 토홍은 우리나라 토착의 홍씨라는 것. 그 둘째는, 당홍은 본디 남양(南陽)의 옛 이름인 당성(唐城) 홍씨의 약어로서 또 다른 남양 홍씨가 생겨나자, 이를 구분하기 위해 당홍에 대칭하는 용어로 토홍이라는 별칭이 생겨났다는 것. 그 셋째는 당홍의 시조로 일컫는 홍학사의 후예 가운데 일파가 난을 피해 신분을 감추며 별계의 토홍을 내세웠다는 설(당홍측주장) 등이다. 상식적으로는 두 번째의 가설이 가장 무리가 없어 보인다. 실제 본고장인 남양(南陽)(경기도 화성군) 일대에서는 토홍을 남양 홍씨로, 당홍을 당성 홍씨로 구분하기도 한다고 하나 어느 것도 입증할 문헌이나 증거는 없다. 두 집안은 오래 전에 소득 없는 뿌리 밝혀내기의 수고를 포기한 채 서로 따로 계보를 가리되 남아닌 <종씨>로 사이좋게 지내오는 터다. 조상은 다르지만 동성동본인 만큼 서로 결혼도 하지 않는다. 근래엔 각자 종친회 외에 『범(汎) 홍씨 대동친목회』(회장 토홍측 홍승만(洪承萬)변호사)까지 결성, 친목을 도모하고 있다. 홍씨는 남한에만 약 40만명, 인구순위는 20위. 남양(南陽)·풍산(豊山)·부계(缶溪)·홍주(洪州) 외에 문헌에는 개녕(開寧)·회인(懷仁)·경주(慶州)·풍주(豊州)·상주(尙州)·정안(廷安)·의주(義州)· 개성(開城)·안산(安山) 등 10여 본이 전하나 현재는 위의 4본만 확인된다. 그중에도 대종은 남양(南陽), 버금이 풍산(豊山)으로 나머지 부계(缶溪) 홍씨가 1천여 가구 홍주(洪州)는 몇 백가구에 지나지 않는다. 40만 홍씨의 거의 90%를 차지하는 남양 홍씨 중 당홍과 토홍의 비율은 8대 2정도 정립했다. 이것은 또 두 남양 홍씨가 어느 한쪽에 흡수되지 않고 유지돼 온 요인이기도 하다. 조선조(朝鮮朝)에 남양 홍씨는 모두 3백 29명(당홍 206, 토홍 123)의 문과 급제자를 냈다. 전주 이씨(全州 李氏) 884명, 안동 권씨(安東 權氏) 359명, 파평 윤씨(坡平 尹氏) 336명에 이어 네 번째의 서열이지만 인구 순위를 감안하면 놀라운 강세다. 당홍에서만 상신(相臣) 8명, 대제학(大提學) 3명, 왕비(王妃) 1명[헌종의 계비(憲宗의 繼妃)], 청백리(淸白吏) 3명을 배출했고, 토홍은 토홍대로 상신(相臣) 3, 대제학(大提學) 2, 청백리(淸白吏) 3명을 배출했으니 남양 홍씨의 명성은 부동의 것이 됐었다. |
고려시대의 당홍
당홍은 홍학사(이름 天河)를 선시조로 모셔 두고 그의 10대손(족보의 기록)인 고려(高麗) 개국(開國) 공신 홍은열(洪殷悅)[초명 유(儒)]을 시조로 그로부터 세계를 헤아려 온다. 그의 손자대에서 1파 [재신공파(宰臣公派)], 증손대에서 다시 1파[예사공파(禮史公派)], 6대손 때 1파[중랑장파(中郞將派)]가 갈리고 13대 아래서 13파가 갈려 모두 16파로 나뉘는데 그중에도 맏이인 남양군(南陽君)[홍주(洪澍)]파와 문정공(文正公)[홍언박(洪彦博)]파가 당홍 전체의 70%를 차지할 만큼 수도 많고 융성을 누렸다. 그밖에 판중추(判中樞)[홍언박(洪彦修)파]·익산군(益山君)[홍운수(洪云遂)파]·예사공(禮史公)[홍복파] 중랑공(中郞公)[홍후(洪厚)파]가 버금가는 세력을 차지, 이들 6파가 당홍 위세의 주력인 셈. 특히 남양군 홍주의 7대손인 석벽(石壁) 홍춘경(洪春卿)[선조조 한성우윤(宣祖朝 漢城右尹)]의 자손에서만 상신(相臣) 5명과 문형(文衡)[大提學] 2명, 왕비(王妃) 1명, 20여 명의 판서(判書)급을 배출하는 화려한 가통을 이루었다. 석벽은 천민(天民)[선조조 도승지(宣祖朝 都承旨)]· 일민(逸民)[현감(縣監)]· 성민(聖民)[대제학 참찬(大提學 參贊)]의 세 아들을 두었는데 성민의 후손에서 4명의 정승이 나왔다. 고려조(高麗朝)의 당홍 인물로는 고려 태조 왕건(高麗 太祖 王建)의 오른팔이었던 개국(開國)공신 시조 홍은열(洪殷悅)[儒] 외에 이자겸(李資謙)의 난(亂)에 충절을 지켜 순사한 명필 홍관(洪瓘). 충렬왕(忠烈王) 때 세 번이나 수상직에 오른 홍자번(洪子藩), 공민왕(恭愍王) 때 수상을 지낸 홍언박 등이 있다. 홍자번은 고려(高麗)·원(元)연합군의 일본(日本)정벌 때 전라도지휘사(全羅道指揮使)가 되어 점함건조 책임을 맡았었고 원의 간섭 간신배들의 이간으로 벌어진 충렬(忠烈)·충선왕(忠宣王) 부자의 불화가 고려의 국기를 위태롭게 만든 위기에서 끝까지 부자를 화합시켜 나라를 안정시키기에 애썼던 충신. 홍언박도 고려 말 공민왕(恭愍王)을 도와 원의 속박을 물리치고 자주성을 회복하는 개혁정치에 오른팔 노릇을 했던 인물. 원의 마지막 황제 순제(順帝)의 처남으로 고려 조정에서 실력자로 군림하여 횡포를 일삼던 기철(寄轍) 일파 숙청에 수훈을 세워 1등공신이 되기도 했다. 1361년(공민왕 10년)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했을 때는 모두 서울 개경(開京)을 버리고 피난할 것을 주장했으나 그만이 서울 사수(死守)를주장했으며 서경(西京)이 함락돼 끝내 서울을 떠날 때는 왕을 따르며 전시에 궁중 경비를 줄이도록 권유하는 등 충언을 아끼지 않아 난을 평정하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를 했다. 2년 뒤 김용(金鏞)이 난을 일으켜 흥왕사(興王寺)에서 왕을 죽이려 할 때 몸을 피하라는 아들의 권고를 뿌리치고 난군 앞에 나가 불충을 꾸짖다 살해당해 충신의 한 모범을 보였다. 정승에 추증되고 문정공(文正公)의 시호가 내려졌다. 충렬왕(忠烈王) 때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오른 홍규(洪奎)는 충렬왕이 공주와 함께 양가의 규수들을 뽑아 원나라에 보내려 할 때 자기 딸을 보내지 않기 위해 머리를 깎은 일이 드러나 한때 가산이 몰수되고 귀양가는 풍파를 겪기도 했다. 당시 고려는 원의 압제하에서 해마다 적지 않은 수(연5백∼1천명)의 여자를 元에 보내야 했다. 충렬왕 1년(1275년)부터 공민왕 4년(1355년)까지 80여 년간 여자를 뽑아 가기 위해 원이 고려에 보낸 사신만 50여 차례가 넘었을 정도였다. 이에 민간에서는 딸을 오랑캐에게 주지 않기 위해 일찍 결혼시키는 조혼(早婚)의 풍습이 유행했다고 한다. 홍규는 일족 홍자번 등의 청에 의해 가산이 반환되고 풀려났으나 딸은 원의 사신 아고대(阿古大)에게 시집갔다. 한 나라의 대신이 자기 딸을 보호할 수 없었던 시대, 역사의 어두운 한 장은 독립자강(獨立自强)의 절실한 필요성을 일깨우는 교훈이기도 하다. 그의 딸 하나는 나중에 충숙왕(忠肅王)의 비(妃)가 됐다. 공민왕의 어머니인 명덕태후(明德太后)다. 또 한딸은 충선왕의 후비가 돼 그는 두 임금의 장인인 셈. 고려조(高麗朝)와의 이같이 깊은 인연으로 당홍의 일부에선 조선조(朝鮮朝) 들어 한동안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당홍의 융성은 조선조 중반 이후에 특히 두드러진다. |
조선 초기의 당홍
조선(朝鮮)초기 당홍의 두드러진 인물로는 조선 개국공신 홍길민(洪吉旼)[호판(戶判)]과 그의 아들 여방(汝方)[이판吏判)], 세조(世祖)의 쿠테타에 공을 세워 공신이 된 홍윤셩(洪允成)과 홍달손(洪達孫)· 홍순손(洪順孫) 형제가 있다. 홍윤성은 예조판서(禮曹判書) 등을 거쳐 예종(睿宗) 때 영의정에 올랐으며 홍달손(洪達孫)은 좌의정, 홍순손(洪順孫)은 판서(判書)를 역임, 당홍 영화의 기반을 닦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홍유손(洪裕孫)은 김종직(金宗直)에게 성리학을 배운 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남효온(南孝溫)·이총(李摠)·이정은(李貞恩) 등 뜻을 같이하는 선비들과 어울려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칭하며 노장(老莊)의 신선사상을 토론하면서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이들의 체제 비판적 현실도피는 결코 안전하지만은 않아 그는 연산군(燕山君) 4년(1498)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 청주(淸州)에 유배됐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1506년 풀려나기도 했다. 성종(成宗)·광해군(光海君)때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낸 홍흥(洪興)은 「당대 제일의 풍채」로 선망을 받았던 인물. 성종은 그를 일부러 명(明)에 사신으로 보내 우리나라의 인물 자랑을 했다고 한다. 뛰어난 풍채만큼 글씨도 훌륭했다. 그의 형 홍응(洪應)은 또 성종조(成宗朝) 좌의정(左議政)에까지 올랐다. 이들은 익산군(益山君)파다. 홍경주(洪景舟)는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한 공신으로 벙조판서(兵曹判書)·대사헌(大司憲)·좌참찬(左參贊)을 지내다 사림파(士林派)출신 언관(言官)들의 탄핵을 받아 벼슬을 물러났다. 그러나 그를 포함한 훈구파(勳舊派)의 반격작전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조광조(趙光祖)의 개혁정치를 무너뜨리고 신진사림(新進士林)들을 몰아낸 뒤 복귀, 좌찬성(左贊成)·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다. 조선조 당홍인물의 일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중국(中國)에 조선남아의 기개를 알리고 나중 그 인연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에 국난극복의 공신이 된 홍순언(洪純彦)이 있다. 「통문관지(通文관志)」에 실린 그의 일화를 보자. 홍순언이 젊었을 때 연(燕)나라에 가게 되었다. 어느날 청루(靑樓=술집)를 찾아갔는데 한 소복(素服)한 여인이 있었는데 얼굴이 절묘(絶妙)하였다. 여인에게 소복한 연유를 물으니 그가 대답 하기를 저의 부모가 본래 절강(浙江) 사람으로 경사(京師=서울) 벼슬하다가 일시에 구몰(俱沒=두 사람이 다 죽음)하니 집이 가난하여 장례를 치를 방법이 없음으로 나의 몸을 팔아 장비(葬費)에 쓰고자 한다고 말하였다. 순언이 장비는 얼마나 필요한가 물은 즉, 삼백금(金)은 가져야 된다고 하였다. 순언이 삼백근을 주니 여인이 잘 받지 아니하는 것을 강권(强勸)하여 주었고 몸은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여인의 순결(純潔)을 보장해 주었다. 몇 년 후 서기 1584년(선조 17년)에 종계변무(宗系卞誣)[우리나라 임금의 종계(宗孫) 착오됨을 해명함]의 일로 황지천정욱(黃芝川廷彧)을 따라 통역관으로 중국을 향하였다. 조양문(朝陽門)밖에 닿을 무렵 말을 타고 달려오는 사람이, 홍판사(判事)[홍언박]인가 묻고, 예부(禮部) 석시랑(石侍郞)이 기다린다 말한다. 이윽고 한 부인이 몸종 10여명의 호위를 받고 교사에 내려와서 홍판사에게 배복(拜伏)[절하여 엎드림]한다. 홍판사가 자리를 피(避)코자 하니 석시랑이 이르기를 이절은 보은배(報恩拜=은혜를 갚는 절)이니 절을 받아야 된다고 하였고, 부인은 고의(高義)를 받아 부모를 안장(安葬)하였음은 대인(大人)의 덕(德)이라고 칭찬하였다. 이러한 일로 말미암아, 석시랑의 도움을 받아 종손변무(宗系卞誣)가 잘 해결 되었고, 그후 1592년(선조 25년)에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侵略)하는 것을 중국의 후원병(後援兵)으로 무사히 물리쳤다. 이와 같은 일도 석시랑의 적극적인 협조로 이루어진 것이니 과연 홍순언(洪純彦)의 의기(義氣)는 국가흥망(國家興亡)이 좌우될 때 큰 공헌을 세운 것이다. 홍희남(洪喜男)은 당홍이 낳은 조선조의 명외교가. 임란(壬亂) 이후 대일(對日) 교섭에서 조선측의 주역으로 일본에 여섯 차례나 사신으로 왕래, 국교회복을 매듭지었으며, 명에도 두 차례나 사신으로 파견됐다. 1649년 인조(仁祖)가 죽었을 때는 일본의 조문사절을 부산(釜山)에서 맞아 일본사신 왕래의 새로운 규례를 정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효종(孝宗) 10년(1659) 일본에 사신으로 간 길에 서양을 통해 들어온 유황(硫黃)의 산화법(酸化法)을 배워 와 우리나라 화기 발전에 공헌했다. |
조선 중기의 당홍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공신으로 영의정 대제학에 오른 홍서봉(洪瑞鳳)과 그의 아버지인 천민(天民), 할아버지 춘경(春卿)은 <3대 호당(湖堂)>의 명예를 누린다. 또 천민의 동생인 성민(聖民)의 후예는 그로부터 6대 7명 대과(大科)의 영예를 쌓아, 춘경(春卿)의 아버지 계정(係貞)[이조참판吏曹參判)]부터 따지면 9대 대과의 5백년 유일 무이한 기록을 세웠다. 더욱이 그 중에는 영의정이 둘(홍명하 홍치중), 우의정이 1명(홍중보)으로 당홍 영화의 절정을 이룬다. 6대 이후에도 한말(韓末) 홍순목(洪淳穆)이 영의정에 오르는 등 조선조 중반 이후 당홍의 영화는 시종여일했다. 당홍 영화를 꽃피운 홍서봉에게는 이런 일화가 있다. 어릴 적 여러 아이들과 함께 당시 정승이던 홍섬(洪暹)[토홍(土洪)] 집 연못에서 놀다가 막 피는 연꽃을 모두 꺾어 버렸다. 노한 홍정승이 볼기를 치려 하자 다른 아이들은 다 도망쳤으나 서봉만은 가지 않았다. 홍섬이 기이하게 여겨, 「네가 만일 시를 짓는다면 매를 때리지 않고 용서해 주겠다」고 했더니 서봉이 「좋습니다」고 선뜻 응답했다. 홍섬이 추(秋), 유(遊), 우(牛)의 세 운자를 부르자 서봉은 막힘없이 싯구를 이루었다. 相公池閣冷如秋 童子携朋月下遊(상공지각냉여추 동자휴붕월하유) [정승댁 연못은 차기가 가을 같아 소년이 친구와 더불어 달밤에 놀았네. 태평세월에 무슨 일이 문제이리, 어찌타 연꽃만 묻고 소는 아니 물으시는고] 과연 그의 말대로 서봉은 벼슬길에서 최고의 자리인 영의정(국무총리)에 올랐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의 국난을 당해서는 최명길(崔鳴吉)과 함께 화의(和議)를 주장, 여러 차례 청(淸)나라 진영을 드나들며 강화교섭을 벌였다. 문장과 시에 능했고 글씨도 뛰어났다. 성민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 형인 승지 천민에게서 글을 배웠다. 하루는 글을 배우다 말고 갑자기 슬피 울었다. 천민이 까닭을 물으니, 「내가 배운 지 몇 달에 한번도 종아리를 맞지 않았는데 이는 나의 아버지 없음을 불쌍히 여긴 때문이라 슬퍼한다」고 했다. 홍문(洪門)의 9대 대과 영예는 스스로 채찍질하는 이같은 면학(勉學)의 정신이 전승돼서 가능했을 것이다. 조정의 중신 자리에 있은 탓에 어쩔 수 없이 주화(主和)를 주장했던 홍서봉과는 대조적으로 홍명형(洪命亨)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승문원부제조(承文院副提調)로 강화(江華)에 피신했다가 청군(淸軍)이 다다르자 화약에 불을 지르고 뛰어들어 자결. 충렬(忠烈)로 이조판서(吏曹判書)가 추증되기도 했다. 병자호란에서 당홍의 충절(忠節)을 빛낸 또 한 인물은 홍명구(洪命耉)다. 평안도(平安道)관찰사로 청군이 침공하자 2천명 군사를 이끌고 금화(金化)에서 청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좌의정에 추증되고 충렬공(忠烈公)의 시호가 내려졌다. 도둑이 들어왔다가 솥뚜껑에 먼지가 앉은 것을 보고 돈꾸러미를 놓고 갔더니 다음날 「돈잃은 사람은 찾아가라」는 방을 써붙였다는 청백리(淸白吏) 홍서변(洪書燮)[영조조공판(英祖朝工判)]의 일화는 『명심보감(明心寶鑑)』에 올라 있다. 구섭의 아들 재룡(在龍)[여영대장(御營大將)]의 딸은 헌종(憲宗)의 계비(繼妃)로 왕비(王妃)가 되었고, 재룡의 아들 종석(鐘奭)은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냈다. 종석(鐘奭)의 아들 정형(渟馨)도 한말(韓末)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올라 부자가 부판(福判)을 지낸 기록을 남겼다. 정형은 일제(日帝)가 한국(韓國)을 합병할 때 작위와 금전의 유혹을 뿌리치고 벼슬을 버렸다. 홍수주(洪受疇)는 예종(肅宗) 때 서(書)·화(畵)의 명인으로 꼽혔다. |
조선 후기의 당홍
영조대(英祖代) 당홍은 일시 재앙을 입는다. 이판(吏判)을 지내고 태조하(奉朝賀)가 된 홍계희(洪啓禧)의 아들 5형제가 대과(大科)에 올라 위세를 떨쳤는데 그중 지해(趾海)[형판(型判)], 술해(述海)[이의(吏議)] , 찬해(纘海)[승지(承旨])와 지해(趾海)의 아들 상간(相簡) 등이 벽파(僻派)[사도세자(思悼世子)를 공격했던 일파. 주로 노론(老論)이었음]에 가담했다가 정조(正祖) 1년 (1777년) <홍인한(洪麟漢)역모> 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사형을 당해 한동안 쇠운에 빠지게 된 것. 그러나 당홍의 이름을 역사에 길이 드높인 인물은 썩어빠진 조선왕조를 뒤엎고 천하를 일신(一新)하려던 혁명아 홍경래(洪景來). 그는 일찍 어려서 서당에서 훈장에게 글을 배우다 진시황(秦始皇)을 암살하려다 잡혀 죽은 형가(邢可)를 두고 시를 지으라는 말에, 秋風易水壯士拳 白日咸陽天子頭(추풍역수장사권 백일함양천자두)라고 지어냈다. 훈장이 「秋風易水壯士拳추풍역수장사권)이요, 白日咸陽天子頭(백일함양천자두)라」하고 뜻없이 흥얼거리자 소년 경래는 「선생님 그렇게 읽는 게 아닙니다」하고 즉각 이의를 달았다. 그는 「秋風易水壯士拳(추풍역수장사권)으로 白日咸陽天子頭(백일함양천자두)를」하며 <으로>와 <를>이라는 토에 힘을 주며 주먹을 쥐어 방바닥을 내리쳤다. 약한 제나라를 삼키려 기회만 노리는 폭군 진시황을 죽이겠다고 차가운 가을 역수(易水) 강물을 건너던 그 형가(邢可)의 주먹으로 대낮 함양(咸陽)에 중국천자(中國天子)의 머리통을 부숴 버리겠다는 이 소년의 기백에 시골훈장은 그만 혼비백산, 「얘야, 이제부터 나는 너를 가르칠 수 없다」고 도망쳤다는 얘기다. 남 하는 대로 과거에도 응시했으나 예상대로 낙방한 그는 세도정치와 당쟁과 지역차별의 속속들이 병든 조선을 바로잡는 길은 혁명밖에 없다고 생각, 과거를 단념하고 산으로 들어갔다. 박천(博川)의 청룡사(靑龍寺)에서 명문(名門)의 서자(庶子)로 역시 사회개혁의 의지를 품고 배회하던 우군칙(禹君則)을 만나 의기가 투합, 거사의 모의가 시작된다. 가산 다복동(嘉山 多福洞)을 본거지로 각지의 장사·기인 ·술사 등을 모으고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부자들도 포섭, 자금을 대게 했다. 1811년(순조 11년) 극심한 흉년으로 인심이 혼란해지자, 12월에 2천 병력을 일으켜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라 일컫고 혁명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가산(嘉山)·박천(博川)·곽산(郭山)· 정주(定州) ·선주(宣州) ·태산(泰山)· 철산(鐵山)·용천(龍川) 등 평북(平北) 일대를 휩쓸고 서울로 진격하려 했으나 관군과 安州에서 싸워 패주, 그의 웅지는 꺾이고 만다. 정주성(定州城)에 웅거, 재기의 기회를 노리던 그는 성밑에 굴을 파고 화약을 터뜨린 관군의 기습으로 전사했다. 그때 나이 서른 둘. 불꽃 같은 혁명아의 일생이었다. 비록 웅지(雄志)를 이루지 못한 채 정주(定州) 북장대(北將臺)의 이슬로 사라졌으나 <민족의 영웅>으로 길이 살아 있다. 한말 대원군(大院君)의 심복이자 수구강경파의 거두였던 영의정 홍정목(洪渟穆)은 아들 홍영식(洪英植)이 개화파의 선봉으로 김옥균(金玉均) 등과 함께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켰다가 실패, 대역죄인(大逆罪人)으로 처형되자 자결하는 비운을 맞았다. 영식의 형 만식(萬植)[한말 의정부 찬정(韓末 議政府 贊政)]은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 체결에 울분을 못이겨 음독 자결했고, 자객 홍종우(洪鍾宇)는 개화파의 영도자 김옥균을 암살하는 등 당홍의 영화는 개화의 격동과 함께 비운과 교차하며 현대로 넘어온다. |
일제시대의 당홍
고종(高宗) 17년(1880년) 일본서 돌아온 수신사(修信使) 김홍집(金弘集)이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왕에게 올려 개화논의가 분분했을 당시, 관동유림(關東儒林)의 대표로 척왜(斥倭)를 상소, 미지근한 태도의 왕까지도 공격하는 등 결사적으로 개화를 반대하다가 참형을 당한 홍재학(洪在鶴)은 조선명벌(朝鮮名閥) 당홍의 보수성을 드러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한말(韓末), 일제(日帝) 침략의 국난기에 당홍은 적잖은 의병 열사를 배출했다. 그중에도 특기할 인물은 滿洲에서 抗日 무력투쟁을 벌인 전설적 영웅 홍범도(洪範圖)장군.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된 이태 후 1907년 차도선(車道善).태양욱(太陽郁) 등과 함께 평북(平北)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압록강(鴨綠江)을 넘나들며 일군(日軍)부대를 공략하는 무력투쟁을 계속했다. 유명한 <평안도(平安道)포수>들로 조직된 그의 소수 정예부대는 신출귀몰하는 기습전술로 三水.惠山.豊山.滿浦鎭.鳳梧洞 등지에서 숱한 승리를 기록하여 침략 日軍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중에도 가장 빛나는 전투가 유명한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 대첩후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 서일(徐一)을 총재로 추대하고 김좌진(金佐鎭)과 함께 부총재가 되어 레닌 정부의 협력을 얻어 고려(高麗)혁명군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준비하던 중 레닌 정부의 배신으로 독립군이 소군(蘇軍)에 무장해제를 당하는 黑河사변으로 조직은 해체되고 큰 타격을 맛본다. 그후로도 그는 백두산(白頭山)일대를 근거지로 무력항쟁을 계속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어떻게 어디서 죽었는지 최후는 전해지지 않는다. 건국후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이 수여됐다. 홍병기(洪秉箕)는 천도교(天道敎)대표로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에 가담했으며 3년형을 받고 출옥 후 만주(滿洲)로 건너가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홍기조(洪基兆) 역시 천도교대표로 33인에 끼었으며 2년형을 사고 나와서는 천도교의 교사(道師). 장로(長老)로 신앙을 통해 청년들에 민족정신을 고취했다. 해방후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주어졌다. 그밖에도 홍익성(洪益成)은 기독교 장로로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 18개월 옥살이를 하고 3.1운동 때는 황해도(黃海道) 신천군(信川郡)의 시위를 주동하고 만주로 망명, 임정(臨政)연락원으로 안동(安東)서 활약하다가 일경(日警)에 체포돼 신의주(新義州)감옥에서 순국했다. 홍식(洪植)은 만주서 독립군사령부 제3영장(營長)으로 국내에 들어왔다가 일경(日警)과 교전 끝에 전사했으며, 홍학정(洪學渟)은 평안도 일대에서 독립운동 자금모집에 활약했는데 1927년에는식산은행(殖産銀行) 의주(義州)지점을 습격하고 금융조합에서 9백80원을 강탈, 만주로 가기도 했다. 그 후에도 압록강을 넘나들며 각지의 일본경찰서를 습격하고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다 일경(日警)에 체포돼 순국했다. 홍원식(洪元植)도 3.1운동 때 고향 화성(華城)에서 시위를 주동했는데 유명한 일제의 제암리(提岩里)학살사건 때 현장에서 살해당했다. 일본 중앙(中央)대학을 졸업하고 상해(上海)에 망명, 임정의 자금조달에 활약했던 홍승로(洪承魯)는 해방 후 귀국, 반민특위(反民特委)감찰위원. 한독당(韓獨黨)감찰위원장으로 민족정기(民族正氣)의 선양에 앞장섰었다. |
조선시대의 토홍
비록 수에서는 당홍과 비교가 안 될 만큼 적으면서도 토홍은 당홍에지지 않는 저력이다. 토홍은 시조 선행(先幸)의 9대 내지 12대손에서 문희공(文僖公)·정효공(貞孝公)·참의공(參議公)·주부공(主簿公) ·대호군공(大護軍公)의 5파가 갈렸다. 본고장인 남양(京畿道 華城郡)과 서울 경북(慶北)·예천(醴泉)· 영주(榮州)·봉화(奉化)·충남(忠南) 아산(牙山)·당진(唐津) 등에 주로 산다. 토홍의 영화 중의 절정은 중종(中宗) 때 영의정에 오른 문희공(文僖公) 언필(彦弼)과 그의 아들 섬(暹)의 대. 暹은 宣祖 때 영의정을 세 번 역임하며 名相 淸白吏의 칭송을 들었는데 부자가 수상을 지낸 드문 기록을 세웠다. 더욱이 그의 어머니 여산(礪山) 송(宋)씨는 중종(中宗) 때 영의정을 지낸 송질의 딸로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이 모두 수상인 <세계사상 유일의 복많은 여성>. 당시에도 왕비와 대신의 부인 등 상류사회 부인들의 사교 모임이 있었는데, 왕비는 송부인이 나타나면 꼭 일어서서 마중하며 깍듯한 존경을 표했다 한다. 그 까닭을 묻자 왕비는 자신은 남편이 임금일 뿐이지만 송부인은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이 모두 재상이니 어찌 내가 공경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고 했다는 것. 宋부인은 명문의 여인답게 예의범절에 밝고 부덕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여장부였다 한다. 그녀가 처녀시절 친정아버지 송질은 극성스런 부인의 성격에 골치를 앓던 나머지 딸들도 어머니를 닮으면 큰일이다 싶어 세 딸을 불러도 놓고 한마당 연극을 했다고 한다. 딸들 앞에 약을 한 사발씩 내놓고 너희들이 어머니를 본받아 극성을 부리면 다음에 시집을 가더라도 송씨 가문에 누가 미칠 터이니 그럴 양이면 여기 이것이 독약이니 아예 마시고 죽어라고 했더니, 위로 두 언니는 절대로 어머니 같은 극성을 부리지 않겠다고 약속한 반면 유독 셋째 송부인만은 「사람이 세상에 나서 자기 본마음대로 살지못하면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뭐가 다르겠냐」고 선뜻 약사발을 들어 들이켰다는 것. 그 약은 그러나 독약이 아니라 보약. 딸들의 기질을 시험하고 길을 들이려던 송질은 이 셋째 딸의 기개에 그만 미소를 짓고 말았다 한다. 유감없이 한 세상을 살 그런 기질을 타고 낳던 듯 싶다. 그녀는 평생 세 번 평양(平壤)을 갔다. 처녀때 평안(平安)감사 아버지를 따라, 결혼한 뒤 평안감사 남편을 따라, 세 번째는 늙어서 평안감사 아들을 따라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천하제일강산(天下第一江山) 평양의 경치를 구경한 것은 늙어서 아들을 따라가서였다. 처녀때와 젊은 부인이었을 때는 몸가짐을 조심하느라 집밖을 나가지 않았던 것. 할머니가 되어 세 번째 가서야 가마를 멈추게 하고 「이제는 평양 구경을 해도 욕되지 않을 것이다」며 산천경개를 구경했다. 평안감사 관사별당에는 그녀가 처녀 때 와서 심었던 복숭아와 앵도나무는 그때 고목이 되어 있었다. 송부인은 나무가 이렇게 늙었으니 나는 얼마나 늙었겠는냐고 인생무상을 탄식했는데 이 얘기를 전해들은 中宗은 이 당대 복덕귀(福德貴)부인의 영광을 높이기 위해 특별과거를 베풀고 글제로『三至柳京歎櫻桃樹老(삼지유경탄앵도수로)』[세번 평양에 가서 앵도나무의 늙음을 탄식하다]를 출제했다는 것이다. 남성 위주의 조선사회에서 여성이 존경과 대우를 받은 드문 한편의 가화(佳話)가 아닐 수 없다. 몇 해 전 미국에서 간행된 세계 유명 여류인사 속에 한국여성으론 유일하게 올랐다는 종친회의 자랑이다. |
조선 ~ 일제시대의 토홍
정효공(貞孝公)의 파조인 홍담(洪曇)은 홍언필(洪彦弼)의 조카. 선조(宣祖) 때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도 올랐으며 효성이 지극해 고향에 효자 정문이 세워지기도 했다. 그의 손자 희(憙)는 왕자사전(王子師傳)·동지돈녕(同知敦寧)을 지냈는데 인조(仁祖)에게는 이모부가 된다. 그는 인조의 외조부인 구사맹(具思孟)의 사위. 인조와 이종사촌간이 된다. 희(憙)의 아들 진도(振道)[판중추(判中樞)], 진문(振文)[한성좌윤(漢城左尹)] 형제는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가담해 공신이 되고 벼슬이 올랐다. 진도의 5대손 홍억(洪檍)은 정조(正祖) 때 6조(曹)의 판서를 두루 역임한 명신. 광해조(光海朝)의 명신 홍가신(洪可臣)은 참의공(參議公)[홍한(洪瀚)]파. 무오사화(戊午士禍)에 화를 입은 홍한의 증손이다. 제자 백가에 통했을 뿐 아니라 시문(詩文)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손자 우량(宇亮)은 병자호란(丙子胡亂)의 국치를 겪은 후 문수산(文殊山)에 은둔, <영남절사(嶺南節士)>로 불리었으며 사후 이조(吏曹)판서가 추증되었다. 그의 아우 우원(宇遠)은 숙종대(肅宗代) 남인(南人)의 중진으로 이조판서에 올랐으며 우량(宇亮)[수사(水使)]은 청백리에 뽑혔다. 대호군공(大護軍公)파에서는 홍숙(洪淑)이 대사헌(大司憲) 예(禮) 병조판서(兵曹板書)를 거쳐 좌찬성(左贊成)까지 벼슬이 올랐다. 그의 손자 여(礪)는 또 중종(中宗)의 사위가 됐다. 유명한 <병자호란(丙子胡亂) 삼학사(三學士)>의 한사람인 홍익한(洪翼漢)은 홍숙(洪淑)의 현손(玄孫). 끝내 화의가 성립된 뒤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과 함께 청(淸)나라로 끌려가서 살해됐다. 그의 부인 혀(許)씨, 아들 수원, 며느리 이(李)씨도 호란(胡亂)때 강화(江華)에 피난했다 함께 죽었다. 근대 현대에 들어 토홍은 많은 선각자를 배출한다. 독립협회의 간부였던 홍정원(洪正原), 일육사(日陸士)를 26기로 졸업해 한국인으로 최고계급인 중장(中將)에까지 올랐다가 2차대전 후 필리핀에서 전범으로 처형된 <비극의 장군> 홍사익(洪思翊), 『봉선화』의 작곡가 홍난파(洪蘭坡)[본명 영후(永厚)], 시인(詩人) 홍로성(洪露雀)[본명 사용(思容)] 등이 그중에서 두드러진 인물. 우리 현대음악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인 홍난파(1897∼1941)는 경기도(京畿道) 수원(水原) 출신. 일본 동경(東京)의 상야(上野)음악학교에서 2년간 수업한 뒤 1920년 귀국, 유명한 『봉선화』를 작곡했다.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모양이 처량하다. 애조를 띤 가락은 일제침략에 신음하던 겨레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일제는 끝내 이 노래를 금지곡으로 묶어 놓았다. 1925년에 서울에서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첫 번째 바이얼린 독주회를 가졌고 1926년 다시 일본에 건너가 동경고등음악학교에서 공부하고 1927년엔 동경교향악단의 제1바이얼린 주자가 됐다. 4년 졸업과 동시 귀국, 중앙보국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1931년 조선음악가 협회를 조직, 상무이사로 음악운동을 이끌었다. 그 해 미국에 건너가 세우드음악대학서 연구생활을 하다가 33년 귀국, 이화여전(梨花女專) 경성보육학교 교수 등으로 일했다. 76년엔 경성(京城)중앙방송국 양악부 책임자가 되어 방송관현악단을 조직, 서양음악을 보급했는데 『봉선화』외에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등 가곡과 『달마중』 『낮에 나온 반달』 등 동요는 지금까지 애창되는 겨레의 노래. 해방을 보지 못하고 41년 돌아갔으나 노래에 담긴 그의 애국혼은 모두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음악 외에 문학에도 재질을 보여 『처녀혼』 『향일초(向日草)』 『폭풍우 지난 뒤』 등 소설창작집을 20년대에 발표하기도 했다. 시인 홍로성(洪露雀) 역시 수원 출신으로 1920년대 나도향(羅稻香)·현진건(玄鎭建) 등과 함께 『백조(白潮)』를 창간, 『나는 왕이로소이다』, 『백조는 흐르는데 별하나 나하나』등 감상적이고 향토색 짙은 서정시들을 발표했었다. 토월회(土月會)의 동인으로 연극운동에 참가하기도 했으나 『백조(白潮)』잡지운영에 가산을 탕진, 가난 속에 폐환으로 고생하다 해방 직후인 47년 46세로 돌아갔다. |
현대의 당홍과 토홍
당홍은 현대에 들어 과거의 영화의 비할 때 다소 허전한 느낌이 없지 않으나 법무 내무부장관을 역임한 중앙일보(中央日報)회장 홍진기(洪璡基), 전 내무 보사부장관 홍성철(洪性澈), 전(前) 문공부장관 홍종철(洪種哲), 전 방송공사사장 홍경모(洪景模) 약학계의 태두인 전서울약대학장 홍문화(洪文和), 언론인 홍종인(洪種仁), 전 중앙일보주필 부사장 홍성유, 4선국회의원이었던 홍창섭(洪滄燮), 한국방송 광고공사사장 홍두표(洪斗杓)[이상 당홍], 몇 해 전 작고한 전 경련회장 홍재선(洪在善), 전 대한변협회장 국정자문위원인원로 변호사 홍승만(洪承萬), 한국일보발행인 홍유선(洪惟善), 언론인 문학평론가 홍사중(洪思重)[이상 토홍]씨 등이 각계에서 명문 남양홍씨(南陽洪氏)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 |
참고할 내용들
이 것은 인터넷 상의 족보사이트에서 모두 동일하게 올려져 있기에(한 곳에서 베낀 듯...) 일단 그대로 올립니다. 그러나 당홍의 항렬표에서 일부 몇 자가 저희 집에 있는 족보(할아버지께서 베끼신 것, 1940년대?)에 있는 것이랑 다릅니다. 혹 잘아시는 분이나 집에서 쓰는 돌림자가 이 것이랑 다를 경우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당홍 항렬표
토홍 항렬표
집성촌
유적소재지(遺蹟所在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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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의 내용은 오래 전에 어느 책의 것을 그대로 정리해 놓은 것입니다. 당홍과 토홍을 통틀어 남양 홍씨 문중의 세세한 역사가 담겨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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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푸른밭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벽전
첫댓글 요즘 카페지기 족보공부좀 하고있군~~아무튼 계속 수고좀부탁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