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육신을 입기 이전에도 계셨다.
이게 지금 요한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핵심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피조물인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직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2:9)의 부분은 언급되지 않고 있다. 이는 14절에서나 나타나는데, 즉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14a)로 말미암아 그분을 눈으로 직접 보기 이전, 바로 '그분은 어떤 분이신가?'에서 요한의 복음은 시작된다.
태초에 계신 말씀(1-3)
창1:1-5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창세기와 요한복음이 그대로 만날 수 있는 것은 말씀(logos)이신 하나님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1-2).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다. 그러니까 만물의 창조가 말씀이신 하나님 없이 지은 바 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3). 이것이 신학적으로 예수님의 선재(先在) 교리다. 예수님은 만들어진 피조물이 아니다. 인간 가운데 가장 탁월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이 어느 날 진리를 깨닫고, 터득하고, 득도하여,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자의식(自意識)이 생긴 것이 아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된 게 아니다. 이처럼 만들어진 하나님이 아니라 태초에 계신 말씀이신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다.
생명의 빛(4-5)
말씀=그리스도=하나님이라는 진리가 분명히 드러난다. 한 인격 속에 양성, 즉 인성과 신성이 동시에 거하신 분, 그 하나님이 육체를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분, 그분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시다. 태초부터, 만물을 창조할 때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빛으로 오신 분이시다. 그러나 창조 이후 세상은 곧바로 죄로 말미암아 어두움 가운데 있었다. 빛이 어두움에 비추었으나 어두움이 깨닫거나 이기지 못하였다(5). 어두움임에도 불구하고 빛으로 오셨다. 어두움을 피하시거나, 나무라시거나, 진노로 다스리시지 않으시고, 그러셨음에도 인간이 그것을 알거나 모르거나를 막론하고 오셨다.
1-4절의 진리이시며, 말씀이신 하나님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어두움인 '나'에게까지 그 참빛을 비추셨다. 나는 어두움이었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였다. 영적 어두움 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에 빛을 이길 수 없는, 무능하고 무지하고 무력한 죄인(罪人)의 어두움이었다. 이게 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주님을 먼저 알고, 믿고, 또 믿기로 결정하고, 선택하고, 깨닫고, 구원을 발견하고, 영생의 세계를 알고,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을 필요로 하고, 뭐 이런 거룩한 일들을 스스로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그는 아직도 하나님의 진노라는 영원한 '어두움' 가운데 빠진 죄인일 뿐이다.
부스러기 묵상
1절 14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은 이 진리를 스스로 깨닫고 알게 되었는가?
아니다. 그 역시 알게 되었을 뿐이며, 하늘의 영광을 보게 되었을 뿐이다. 태초에, 창조의 때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지 못했던 피조물에 불과한 요한 아닌가. 그런데 그가 어떻게 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아는 진리를 깨닫고, 기록된 말씀으로 하나님을 소개할 수 있게 되었을까? 그것은 생명의 빛이신 말씀(logos)이신 하나님 자신이 모든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 요한 자신에게도 빛이었기 때문이다(4b). 유한은 무한을 파악하지 못한다. 인간은 그 누구도 하나님 없이, 계시 없이, 말씀 없이, 인간 스스로의 어떠함으로 하나님을 발견하거나, 하나님께 나아가거나, 하나님을 아는 그런 일은 없다. 요한은 그것은 '어두움'이라는 한 단어로 묘사한다.
태초에서부터 말씀의 빛으로 어두움에 비추이기 바로 직전(지금)까지 셀 수 없는 시공(時空)의 역사가 흘렀지만 빛은 빛이고, 어두움은 여전히 어두움이다.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진리의 빛으로 오시기 전까지 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깨어라, 깨어라, 먼동이 튼다!"라는 찬양을 들으면 가슴이 막 뛴다. 그렇다. 마침내 어두움이 깨어나고 있다. 내가 얼마나 어두움 가운데 있는가를, 내가 얼마나 진리이신 말씀과 거리가 있는 삶을 사는 죄인인가를,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이 오늘 나에게 무슨 모양으로 그려지고 있는가를 비로소 알고, 깨닫고, 믿고, 보고, 그래서 주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자라고 있음을 찬양하는 자로 그분의 생명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인하여 감격한다. 요한과 더불어 시작된 예수행전을 따라 새해를 시작하는 기쁨, 아무도 빼앗을 수 없음이 얼마나 다행인지, 아직 남아있는 조그마한 어두움이라도 다 빛으로 말미암아 물러가는 죄씻음과 신생(新生)의 은혜를 그래서 더 기대하게 된다.
(1/2) 요1:6-18 | 예수님만을 소개합니다.
본문 관찰
사도 요한이 소개한 세례 요한(6-8)
사도 요한이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9-14)
세례 요한이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15-18)
그는 누구?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소개된다.
사람이 무슨 일을 한다고 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정체(identity)를 바로 아는 것이다. 이것 없이 어떤 일을 시작하기 때문에 좌충우돌(左衝右突)이 일어난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먼저 해결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세례 요한(6-8)
요한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광야에서 고행(苦行)하다가 스스로 '자가 발전'(터득)한 것도 아니다. 이방 종교들처럼 어떤 자의식이 생겼거나, 득도(得道)의 경지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깨닫게 된 그런 것도 아니다.
(1)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았다(6).
요한의 일생이 의미(가치)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고 믿는 것만큼 흔들리지 않는다. 한 사람의 신앙과 그의 사명을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의 시작이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은 그래서 중요하다. 이것 없이 자신에게서 시작된 계획(확신)을 하나님의 것에 감정이입(感情移入)할 때부터 문제는 꼬인다. 즉 신앙의 중심이 '나'(ego)이기 때문에 나의 형편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되거나 변한다.
그러니까 늘 생각이 흔들린다. 마치 신기루와 같다. 그것을 좇아 갈 때에는 이룰 수 있어 보이고 아름다운데 막상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좌절(자학, 침체, 낙심)한다. 쉽게 결정하고, 그것만큼 쉽게 포기한다. 나의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시작하면 늘 그렇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않된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나를 향하여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심이다. 세례 요한은 이렇게 무대에 등장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요한과 함께 하신 것이다. 이 말은 요한이 하나님과 함께 한 것이란 말과 구별된다.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그 주도권을 잡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늘 이렇게 일하신다. 다윗의 일생이 그러했다. 그가 젊고, 유능하고, 지략과 용맹이 있고, 군사와 다윗성이라는 요새가 있고, 많은 무기와 말들이 있고, 무수한 신하들이 있어서 다윗의 일생이 형통한 것이라고 성경은 결코 말하지 않는다. 다윗, 그는 누구인가? :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삼하5:10, 8:6b,14b)
(2)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왔다(7-8).
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분명하게 알았다. 그는 누군가를 증거하는 사람일뿐이지, 누구는 아니다. 이것이 요한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의 선물이다. 하나님이 요한을 특별히 붙잡으신 것이다. 나 역시 영적 혼돈(Chaos)이라는 자충수에 걸려들지 않으려면 하나님이 나를 향하여 가지고 계신 놀라운 계획이 무엇인가를 위로부터 받아야 한다. 그것은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요한은 증거하는 이 일만 하면 된다. 이것은 다른 것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영적 이기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즉, 자신이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알고 있다는 것은 그것만큼 "내가 모든 일을 다 해야 한다."는, 그래서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는, 만약 그렇지 않으면 영적 자존감을 맛보지 못하는 그런 덜 성숙한 사람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만큼, 동시에 무엇이 아닌지도 아는 사람이다 : "나는 이 빛이 아니요."(8a, 20) 은혜의 삶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동시에 언제나 피조물인 죄인이라는 점을 망각하는 거기에서부터 영적 균형이 심각하게 일그러진다. 내가 혹시 세례 요한처럼 쓰임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빛이 아니다"는 사실을 언제나 잊지 않아야 한다. 영적 교만은 '교만해야지!'라고 다짐해서 오는 게 아니다.
언젠가 읽었던 책을 읽다가 적어 놓았던 글이다 : "형제여, 자매여! 이것은 내가 받아야 할 것이 아니다. 나는 아니다. 내가 조금 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조금 더 은혜를 주셨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셨다면 당신은 나보다 더 귀한 일을 하나님께 드렸을 것이다." 비슷한 고백이 성전 미문(美文)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걷게 되는 기적 이후에 베드로의 말에도 있다 :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3:12)
예수 그리스도(9-18)
사도 요한은 자신은 은막 뒤에 감추고서 곧바로 그리스도만을 증거한다. 요한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일에 자신의 전부를 집중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깊은 샘 하나만을 팠다. 나 역시 오직 주님만을 알기를 원한다. 요한이 아는 그리스도, 그는 누구신가?
세상에 오신 참 빛이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빛이다.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다.
그를 맞이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그 이름을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성막, 회막)으로 사셨다.
참으로 놀라는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는 점이다. 그런데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고(10b), 자기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11b). 그럼에도 그를 맞아들여 믿는 사람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욕망에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12-13). 마침내 주님은 자신을 살아있는 성전으로 자기 땅에 오사 참 빛을 비추기 시작하셨다.
요한은 아버지께서 주신 독생자의 영광,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그 영광을 보았다(14b). 9-13절의 참 빛이 그의 영혼에 비춰지자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그러자 그는 다시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15a)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은혜를 받았으며, 그 비결이 무엇인가를 선전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처럼 자기 깃발 아래 청중을 모으지도 않는다. 자신을 철저하게, 끝까지 숨긴다(21:20,24). 오직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만이 요한의 전부다.
내가 '내 뒤에 오시는 분을 나보다 앞선 분이라'고 말씀드린 바로 그분입니다.
그분은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다.
우리는 모두 그의 충만한 데서 은혜 위에 은혜를 받았다.
율법은 모세에게서 받았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겨났다.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러나 아버지의 품 속에 계시는 독생자이신 하나님이 그분을 나타내 보이셨다.
부스러기 묵상
나도 요한처럼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 수 있을까?
오직 예수님이라는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나는 봄부터 소쩍새로 울다가 끝날지라도 그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사람들은 모두 주님을 위해 울다가 쓰러져 간 순교자 세례 요한의 높은 신앙과 불굴의 영성을 동경하며 우러러 본다. 그러나 정작 아무도 요한처럼 살려고 하지는 않는 것 같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조금 잘 보여서 내가 얻고 싶은 것을 하나님의 손(천국 구좌)에서 내 손(비밀 구좌)으로 옮겨볼 수 있을까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있는지도 모른다. 주님의 영광을 위한답시고 벌려 놓은 여러 일들의 중심을 자세히 살펴보면 결국은 내가 땅에서 잘되고, 형통하게 되는 것을 위해 겉으로 거룩하게 포장해 놓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철저한 나그네 신앙을 묵상한다. 나는 영원한 본향(本鄕)을 사모하는 순례자다. 저 땅(영생)을 위해 이 땅(이생)을 잠시 거꾸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요한처럼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켜가는 사람이 그리운 시대다. 요한처럼 살고 싶다. 적당하게 타협하고, 잘못 가고 있는 게 뻔함에도 비유나 맞추어가며 적당하게 삯꾼으로 살 바에는 차라리 지금이라도 세례 요한처럼 죽는 게 바른 선택이다. 이 죄 많은 세상은 요한처럼 사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제사장의 신행(信行, 약2:14-26)에 선지자의 영성을 가지고 목사로 살다가 주님께 서고 싶다. 진심이다.
(1/3) 요1:19-31 | 요한은 증거하는 자로 숨는다.
본문 관찰
나는 아니다(19-28)
이 사람이다(29-31)
하나님의 어린양
요한의 설교(15-18)는 곧바로 큰 반향을 낳았다.
설교를 듣고 난 이후의 청중의 반응은 어느 때나 크게 두 가지다(행1:37, 7:54). 유감스럽게도 요한의 청중은 하나님께서 기대하는 것과는 반대로 들었다. 메시야의 탄생에 대한 선포된 말씀을 들은 헤롯도 그러했다(마2:7-8,13). 그런 순수하지 못한 청중을 놓고 다시 입을 연 요한을 주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튿날'(29a)에도 마찬가지다. 요한의 메시지는 전혀 변형되지 않는다.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는 궤도 수정(타협)은 아예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무엇이 요한으로 하여금 이처럼 설교하도록 이끄는가?
요한의 증거(19-28)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19a) 보내어서 요한의 설교를 진위를 가려보겠다고 나선다. 저희는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들이다(24). 저들은 요한의 설교를 더 이상 듣지 않는다. 그럼에도 뭘 말하는 지 궁금해한다. 깨우치고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책잡고 요한을 흔들기 위함이다. 참 많은 걸 생각하게 하는 본문이다. 요한은 자신을 숨기지 않고, 자신을 그대로 드러낸다(20a). 자신 뿐 아니라 자신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오신 메시야에 대한 계시를 밝히 드러낸다.
Q 네가 누구냐?
A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Q 네가 엘리야냐?
A 나는 아니라.
Q 네가 그 선지자냐?
A 나는 아니라.
Q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A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Q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A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요한은 '이다'와 '아니다'를 정확하게 구분한다. 오늘 묵상의 핵심은 이것이다. 요한은 이 진리를 어떻게 알았을까? 먼저, 가족에게서 찾아보자.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마27:56, 막15:40, 요19:25)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자매간다. 예수님과 요한은 사촌간이다. 그렇다면 요한이 태어날 때 일어났던 하나님의 간섭하심은 훗날 성경의 기록대로 살다가 죽은 요한의 생애에 직접적인 요인이었음에 틀림없다(눅1장). 그러니까 요한이 이것을 모르고 자랐을 리 없다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요한은 이 진리를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 하니라."(23, 사40:3) 그는 자신의 근거를 말씀에서 찾는다. 광야생활을 통해서 스스로 뭔가를 터득한, 그러니까 위로부터 임한 계시와 상관없이 땅으로부터 얻어진 어떤 파편들을 조합하여 그럴듯한 무슨 설(說)을 늘어놓고 있지 않다. 자신은 '소리'에 불과하고 예수님은 그 소리의 '실체'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정확하고 분명하게 안다. 그것만큼 딴소리하지 않는다. 그는 아는 진리를 말하고 있는 데 반해,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결코 '알지 못하는 한 사람'(26b)이 자신들 가운데 서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이러쿵저러쿵 하고 있다. 이 묘한 대조가 숨죽인 모습으로 본문에 들어있다.
요한은 이 진리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리고 당당하게 저들에게 증거한다 :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27a) 하늘을 맛본 사람은 이렇게 산다. 그는 고독한 광야에서 메시야가 공생애를 시작하기까지 묵묵히 '소리'로서만 자신을 준비하고, 마침내 외치는 자의 소리로 증거하는 사명에 온 몸을 드린다. 그는 자신의 영성의 초점을 결코 혼돈하게 이리저리 흔들지 않는다. 분명하게 렌즈(lens)의 앵글을 맞춘다. 그것만큼 선포할 수 있고, 당당할 수 있다.
요한의 고백(29-31)
마침내 예수께서 요한에게 나아오셨다(29a).
요한은 그 주님을 보았다. 그럼에도 그의 외치는 소리(설교)에는 전혀 변함이 없다. 사실 복음서가 증언하는 이 시기의 분위기는 어떻게 하면 요한의 언행(言行)을 책잡아 그를 죽일 꼬였다. 거룩한 메시야의 행진에 앞서 '세례요한 서곡'(序曲)의 나팔이 울려 퍼지는 길목에 벌써 바리새인들이 출몰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지 않은가(19,24). 그럼에도 요한은 담대하게 선포한다. 지난번에 했던 설교는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라며 다시 반복(30)하면서까지 말이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29)
요한은 자신을 넘어서(20a), 이제 예수님을 세상에 밝히 드러낸다.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6)으로서,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8)로서, 그러니까 빛이 아니요 그 빛을 증거하는 자로서, 자신의 전부를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15b,30b)의 뒤에, 결국 자신이 주는 물세례까지도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31) 말한다. 참으로 놀랍다. 자신을 정확하게 알지 않으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정확하지 않으면 결코 이럴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인식이다. 이 아침 요한에게서 배우는 진리이다.
부스러기 묵상
"설교란 무엇인가?"라는 지극히 원론적인 질문이 묵상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붙는다.
요한은 지금 자신의 생명을 건 설교를 하고 있다. 그는 짧지만 굵게 살았다. 일전에 어떤 책을 보니까 여름을 노래하는 매미는 약 1~2주를 위해 7년인가를 땅 속에서 보낸단다. 요한은 주님의 길을 곧게 하기 위해 자신의 죽음을 외치는 소리로 살았다. 그는 이 설교 하나 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자로 서기 위한 준비를 긴 세월동안 한 셈이다. 요한 같은 사람은, 스데반 같은 사람은 더 오래 살아서 더 많은 일을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만 순교하고 만다. 어쩌면 이게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더 오래 살고, 세상의 눈높이에 적당히 안주하고, 하늘의 소리를 좀 줄이고, 사람들의 귀에 즐거운 소리는 좀 볼륨을 높이고, 뭐 그러면서 적당히 간지러운 곳이나 긁어주며 살아도 얼마든지 유명하게, 박수 받으며, 칭찬과 존경을 받으며 살 수 있겠지.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다는데 나는 이런 싹이 아직도 묘연하게만 하다. 처음 목회자로 사역을 시작한 1986년만 해도 설교만큼 쉬운 게 없었다. 그런데 한 해 한 해 시간이 지날수록 설교만큼 어렵고 두려운 일이 없다. 강단에만 서면 두렵고 떨린다. 자신 없어서가 아니다. 잘 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반대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이 모두가 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나의 완악함과 교만이라는 죄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이 밀려올 때 더 그렇다.
설교가 뭘 할 수 있을까? 단순화시킨 감은 있지만 요한이나 스데반은 결국 설교 때문에 죽은 거 아닌가. 누구 하나 변화시키지 못하고 그냥 증거만 하고 끝났다. 사실 설교 하면, 항상 5천명이 회개하고, 고넬료의 온 가정에 성령이 임한 베드로의 설교가 훨씬 더 정서적으로 친숙했었다. 그러나 요한의 설교도 하나님이 쓰셨다는 생각을 좀 더 오랫동안 해 보는 아침이다. 나는 요한도 아니고, 베드로도 아니고, 참 답답하고, 해서 깊은 숨을 몰아쉰다. 언제나 요한처럼 설교하다가 죽는 날을 맞이할까? 하나님이 과연 이 특권을 나에게도 허락하실까? 언제쯤이면 나에게도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15b,30b)라며 하늘의 비밀을 외치는 복음의 소리가 날까? 요한의 외침 앞에 나는 무릎을 꿇는 것으로 시작한다. 나에게도 하나님을 외치는 소리가 나는 그 날을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아침이다.
(1/4) 요1:32-42 | 랍비를 그리스도라 증거한다.
본문 관찰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32-36)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37-42)
와 보라!
요한은 '보내심을 받은 사람', '증거하러 온 자'(6-8)로서 '또' 일한다(32).
요한의 증거는 계속 이어진다(15-18, 19-28, 29-31, 32-34, 35-36). 짧은 듯한 증거(설교)안에 삼위일체(신론, 기독론, 성령론) 교리가 다 들어 있을 정도다. 요한의 증거는 곧바로 예수를 좇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했으며, 한 가족에게 복음이 증거됨으로서 '메시야 고백'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이전에 이미 고백되어지는 놀라운 영적 추수가 시작된다. 여기에 주님이 하신 말씀은 '와 보라'(39)와 '장차 … 하리라'(42) 밖에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역사는 이미 불꽃이 되어 타오르고 있다.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32-36).
요한은 "내가 보매"(32)라는 말로 '또' 증거하기 시작한다. 본 사람은 증거하게 되어 있다. 이러한 일은 요한이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31a,33a) 이미 시작된 일이다. 요한이 시작한 일이 아니다. 뭘 보여 달라고 해서 된 일이 아니다. 요한과 무관하게, 요한과 의논됨 없이, 요한이 알지 못하고 있을 때에, 무엇을 말인가? 32절이 예수님께 이루어진 걸 말이다. 요한은 자신도 모르는 일이 자신 앞에 이루어지는 것을 본다.
사람들은 종종 여기서 착각하고, 또 넘어진다. 뭘 본 것은 자신이 잘나고, 똑똑하고, 그럴 만 한 자격이 있고, 기도를 많이 했고, 전혀 의심하지 않고 확신했고, 봉사와 헌신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것에 따른 반대급부(反對給付)와 같은 결과로써 이런 일이 자기에게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그것만큼 교만해진다. 그래서 신앙의 많은 덕목(목록)들이 이것을 얻고, 보고, 누리고, 휘두르는 것을 위해 종교적인 모양새를 띄게 된다. 이것은 맛이 가도 완전히 간 경우다. 이것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신앙을 곡해한 영적 무지의 소산이다.
요한은 알지 못한 일을 어떻게 듣고, 알고, 그래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34)고 말하는가? 참으로 무릎을 칠 만 한 기막힌 그의 고백을 만난다 :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33a) 그는 자신의 '증거'의 근거를 오직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신 것에서 찾는다. 그는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자, 그러자 뭐라도 된 양 기고만장(氣高萬丈)해 하거나, 깝죽거리거나, 건방지고 방자하게 처신하거나, 그 시대의 무수한 사람들 가운데 유독 자신에게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교묘하게 자기 쪽에 유리한 수단으로 변형 혹은 사유화하거나, 앞서 말한대로 자신이 뭔가를 했기에 -예를 들면, 광야에서 경건한 영성생활을 추구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그 결과로서 하나님도 자신을 알아보았다는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통로로서 쓰이는 것에 진심으로 최선을 다 한다.
하나님은 요한에게 말씀하셨다 :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33b)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하심과 그것에 대한 계시를 맛본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다. 이 말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리는 복음의 메시지다. 하나님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이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해서 예수님을 보고 또 이렇게 말한다 :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36)
다시 반복하지만 이 진리는 요한이 스스로, 생득적으로, 학습과 교육을 통해서, 오랜 광야의 수련과 고행을 통해서, 소위 득도(得道)의 경지에 들어감으로써 깨우친 사설(私說) 진리가 아니다. 위로부터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는 오직 이 말씀의 통로로 쓰이고 있을 뿐이다. 요한은 이러한 영적 원리를 따라 언행심사(言行心事)에 한치의 오차 없이 자신의 역할을 유감 없이 발휘한다. 한 사람의 영적 성숙은 그에게 덧붙여진 은혜가 주어질 때 그것을 어떻게, 무엇으로 핸들하느냐를 보면 대략은 알 수 있다. 요한은 내가 구비해야 할 사역의 몫들을 아주 균형잡힌 모습으로 감당하고 있음을 본다. 요한은 내가 본받아야 할 사역의 맨토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37-42).
'두 제자'(37a)는 안드레와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 요한이다. 그들은 세례 요한이 전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좇는 첫 제자가 된다. 이들은 예수님을 랍비(선생)로 알고 시작하지만 곧바로 예수님이 메시야(그리스도)라는 진리를 고백하는 신앙의 사람들로 바뀐다. "그날 함께 거하니"(39b)에서 "시몬을 찾아 말하되"(41a) 사이 어간에 주어진 주님과의 만남은 이들을 예수의 사람들로 만든 것이다. 누가? 우리 주님께서다.
복음이 전해지는 순서도가 흥미를 끈다.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은 한 사람 세례 요한을 바꾸어 놓았다. 그 요한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는 순서는 이렇다 : ①세례 요한 → ②사도 요한/안드레 → ③베드로. 세례 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도 요한과 안드레는 세례 요한에게서, 베드로는 사도 요한과 안드레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듣게 된다. 하지만 ②는 ①에게서 전도를 받았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메시야를 만났다."(41)는 신앙고백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주님은 이처럼 언제나 불완전하고 부족한, 시작만 한 초보자인 나를 이처럼 이끄시는 분이시다. 이점은 ③ 역시 마찬가지다. 그도 ②를 통해서 전도를 받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입문(入門)이었다. 이게 "장차 … 하리라."(42b)는 예수님의 계획하심 아닌가.
부스러기 묵상
내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있음이 얼마나 복된 사건인지 모른다.
요한마저도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33a)로 시작하여 순교하는 축복까지 받게 된 것 아닌가. 성경의 모든 사람들이 다 바닥에서 시작하고 있음이 위로가 되고, 또 기대가 된다. 나 역시 "허물과 죄로 죽은, … 본질상 진노하심 아래"(엡2:1-3) 있는 절망의 존재로부터 그리스도의 구속, 곧 죄사함이라는 값없는 은혜를 통해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아, 마침내 '새로운 피조물'(고후5:17)로 여기까지 와 있다. 내가 잘나고, 뭔가 하나님께 했기 때문에 그 공로로 지금이라는 은혜에 붙들려 있는 게 아니다 :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찬송가 204장 3절 中)
나는 믿는다. 베드로처럼 "장차"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나를 통해서도 계획하신 놀라운 일이 있음을 말이다. 이걸 생각하면 얼마나 힘이 되고 가슴이 뛰는지 모른다. 나에게도 베르도처럼 '장차'라는 미래가 있다니 말이다. 주님께는 미래로 가는 길이 있다. 주님 앞에 나아오면 주께서는 언제나 복음과 상관없었던 지난 과거와 완전히 단절되는 소망과 구원과 영생의 미래로 이끄신다. 할렐루야다! 베드로가 한 일이란 그저 동생의 전도를 받아 주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온 것뿐이다. 은혜는 여기서 시작되고 있다. 사람은 자꾸 나왔기 때문에를 생각하지만, 그래서 내가 시작했고 뭔가를 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무엇'이 주어졌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은혜를 받고 보면 아니다. 주께서 은혜를 주시고, '장차'까지 내다보시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하심 안에서 진행되는 하나님의 시간표라는 것을 말이다.
새해 벽두에 서서 나를 생각해 봐도 여지없이 그렇다. 내가 나의 '장차'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이게 절망이거나 불안함이 전혀 아닌 이유는 이 '장차'까지도 하나님의 손에 있는 섭리요, 축복의 사인(sign)이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 때문이다. 나는 나를 믿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다. 내 믿음과 신뢰의 대상은 오직 주님이시다. 그것만큼 '장차'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하나님의 작품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 그것을 알고 확신하는 것만큼이 내가 다시 주님께 돌려드려야 할 내 몫의 달란트라는 것, 때문에 맡은 자로서 주님께 구해야 할 것은 충성이라는 것, 나는 이 진리를 믿는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1/5) 요1:43-51 | 43절은 51절의 밀알이다.
본문 관찰
J-B 나를 좇으라(43-44)
B-N 나사렛 예수니라(45)
N-B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46)
B-N 와 보라(46)
J-N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47)
N-J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48)
J-N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48)
N-J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
J-N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50)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51)
(J-예수님, B-빌립, N-나다나엘)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나를 좇으라!"(43)
이는 주님께서 빌립을 만나서 하신 말씀이다. 그는 다른 제자들과 비교해 볼 때 주님으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는다. 빌립은 다시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전함으로써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안드레, 요한, 야고보, 베드로, 빌립, 나다나엘(바돌로매)로 늘어났다. 주님의 일차적인 관심은 '사람'이다. 한 사람을 아시고, 만나시고, 부르시고, 그리고 그를 변화시키시며 '장차 …보리라'(42,51)까지 내다보신다. 오늘을 살면서 내일을 보시는 주님을 만난다.
빌립 : 나다나엘(45-46)
주님을 만난 이후, 빌립의 신앙고백이 눈에 띈다 :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45) 이 고백은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할 때 한 말이다. 주님과의 첫 번 만남에서 나온 신앙고백이기에 좀 더 이 고백 앞에 머물러 있게 된다. 빌립은 모세오경과 선지서들을 이미 읽고, 메시야(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는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한다. "나를 좇으라"(43)는 주님의 부르심과 빌립의 응답이 아름다운 하모니로 엮어져감이 참 부럽다. 나 역시 주께서 "나를 좇으라!" 부르셨고, 이 부르심에 합당하게 응답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더 생각하는 시간이다.
한편, 빌립의 증언에 대한 나다나엘의 반응은 실망스럽다 :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46a) 그렇다면 나다나엘 역시 빌립만큼이나 구약을 아는 지식이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의 고백이 얼마나 다른가를 나다나엘에게서 본다. 누구보다 빌립이 이 사실을 더 잘 안다. 그래서 안드레와 요한이 '와 보라!'(39)로 주님께 부르심을 받았던 것처럼, 말하자면 주님의 언어를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사용한 것 같다. 진리는 설명하고, 이해하고, 가르쳐서 되는 것보다는 진리이신 주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을 빌립은 알게 된 것이다. 자신에게도 45절이 분명하게 드러났던 때는 역시 그 말씀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가 아닌가. 그래서 빌립도 나다나엘에게 뭐 복잡하고 장황하게 진리에 '대해서' 설명하기보다는 진리 '앞으로' 그를 '와 보라!'(46b) 말하고 있다.
예수님 : 나다나엘(47-52)
나다나엘이 '와 보라'의 주인이신 예수님 앞으로 나아간다(47a). 주님은 그를 보셨다. 안드레가 베드로를 주님께 데리고 오는 것을 '보시고'(42) 그에게 42절로 말씀하셨던 것처럼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47a) 말씀하신다 :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47) 주님은 자기 사람들을 아신다(13:1). 베드로의 '장차'(42)까지를 아신 주께서 나다나엘 또한 아신다. 그 주님이 동일하게 나를 아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46절처럼 뭘 아는 것 같아도 진짜 알아야 할 것은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다. 이게 주님을 만나기 이전의 인생이다 :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48a) 나다나엘은 주님을 모르고 있었지만 -그래도 46절처럼 자신 있게 말한다. 이게 인생이다- 주님은 그를 아신다. 빌립이 그를 부르기 전에도 그를 이미 보고 계셨다(48b). 주님은 이런 분이시다. 지금 이 시간에도 나를 보고 계신다. 놀랍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머리가 서는 일이기도 하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분이시기에 나 역시 나다나엘처럼 꼬리를 완전히 내릴 수 밖에 없다(49).
주님은 여기서 대화를 중지하지 않으신다. 얼마나 무지하냐, 뭘 모르면서 안다고 하느냐, 그러니 내 밑에 와서 훈련을 좀 받으라, 내 얘기를 좀 들어라, 즉 "나는 …이다."(A)와 같은 얘기들은 전혀 하시지 않는다. A는 훨씬 뒤에 가서야 나오기 시작한다. 그러면 무엇을 말씀하는가? 주님은 대화를 나누는 '지금'에서 시작하신다. 그리고 곧바로 '미래'로 간다 :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50b) 처음 만난 친구들, 이제야 자신들 앞에 서 있는 분이 누구라는 것만을 안 초보자들, 구약을 아는 지식에서 걸어다니시며 숨을 쉬시는 눈앞에 서 계신 주님을 이제 막 알기 시작한 친구들, 좀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신앙고백 하나 정도 간신히 붙들고 있는 '아직'은 제자가 아닌 친구들, 그러나 주님에게는 '이미' 미래를 알려주고, 그래서 거기까지 나아가고자 하는 열심이 그 속에 들어있다.
저희들이 잘나서가 아니다. 이게 나 역시 넘어지는 부분이다. 주님이 50절처럼 말씀해 주시면, 그리고 그러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면 꼭 내가 그럴 만 한 어떤 자격이 있기 때문에 주께서 나를 알아보신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조금씩이라도 내 안에 꿈틀거린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나 역시 나다나엘처럼 47절의 수준과 시점에 서 있을 뿐이다. 내 선 지점은 50-51절이 아니다. 거기는 주님이 나를 향하여 가지고 계신 놀라운 계획하심이다. 제자들이 거기까지 나아가는 것이 비전이요 목표듯이 나 역시 그렇다. 이를 위해 주께서 나에게도 "나를 좇으라!"(43) 명하신 것이다.
부스러기 묵상
이제 51절을 이해할 수 있는 매우 기초적인 묵상을 한 셈이다.
주님의 열심을 만난다. 주님은 제자들을 '사람'으로 보시고, 만나시고, 말씀하신다. 주님에게 있어서 제자들은 수단이 아니라 목표다. 그들과 함께 51절까지 가겠다는 선언이다. 비록 지금 제자들의 형편은 피아노로 따지면 바이엘 수준이지만 그들이 급기야 개인 독주회를 하는 거기까지, 그러니까 51절을 '보리라'까지 저들과 더불어 함께 나아가실 것을 말씀하신다. 제자들은 지금 43절에 있다. 그러나 주님에게 저들은 이미 51절에 있다.
때가 되면 주님에게처럼 제자들에게도 51절이 성취될 것이다. 이 일은 제자들이 이루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이루신다. 제자들은 그걸 보는 자들이다. 마침내 그것을 보는 일이 2장부터 시작된다. 사도 요한의 노림수는 아주 탁월하다. 51절이 어떻게 성취되어 가는가를 볼 것이다. 이를 보고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을 입게 될 것이다(12). 그리하여 마침내 이 말씀이 성취될 것이다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 동시에 20:30-31절이 성취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 아침에 51절이 이처럼 내 안에 찾아왔다.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
하나님의 천사들을 보리라.
인자를 보리라.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이제 남은 것은 51절을 보는 데까지 '나를 좇으라'(43) 부르시는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나도 주님이 약속하신 51절을 보고 싶다. 이 미래가 주님 안에서 가까이 왔다. 이 일은 이미 시작되었고 진행중이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시는 중보자이신 주님께서 나에게도 하늘을 열어주셔서 43절(땅)에 있으나 51절(하늘)을 보는 자로 인도하실 것을 믿는다.
주님! 내가 거기까지 주를 좇겠나이다.
이제 주께서 2장부터 이루어가실 그 영광스러움을 따라 가겠습니다.
나에게도 그 영광의 부스러기를 부어 주십시오.
내 눈을 열으사 제자들이 보았던 51절의 약속이 나에게도 이루어지는 복을 주옵소서.
나에게도 인자(人子)가 되시옵소서.
나에게도 하늘 문을 여시옵소서.
이제부터 더 '보리라'까지 주님을 좇겠습니다.
찬미예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