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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스크랩 광릉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
덕장 추천 0 조회 40 08.08.27 11:2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광릉 - 동아닷컴 출처>

 

 

조선 왕릉은 약 40여 기 정도가 있습니다.

문화재청에서는 이번에 조선 왕릉 모두를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계획을 세웠고, 유네스코에선 조선 왕릉을 탐방하게 되었습니다.

유럽 정원 건축가들이 세조의 광릉을 보면서 모두가 감탄과 찬사를 쏟아냈다고 합니다.

이곳이 바로 신의 정원.

하늘이 허락한 정원.

자연과 사람이 조화가 된 정원.

...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왕릉은 단순히 성역의 지역으로

왕의 주검이 묻힌 무덤의 형식이지만

조선의 왕릉은 무덤의 형식을 탈피한 하나의 정원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대충 관찰하게 되면 모두 비슷하게 보여지지만

각 릉마다 각각의 사연과 역사가 묻힌 ..그리고 한국의 아름다움까지

내포하고 있는 조선 왕릉.

그중에서

자연위에 살짝 내려 앉은 정원이라 불리는 광릉을 살펴 보았습니다.

 

<광릉길>

중앙분리대를 오랜 수명을 간직한 수목으로 멋스럽게 꾸며놓은 아름다운 길.

 

 

광릉을 들어서면 오랜된 수목들이 즐비한 오솔길 같은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이 숲속이 천연기념물인 크낙새의 서식지였고 지금은 크낙새를 볼 수 없는 실정이라 합니다.

 

 

광릉을 들어가는 길목에서 만나게 되는 바위와 잘려나간 고목들...

이런 바위와 고목들이 여기저기에 눈에 많이 띄는 모습이 이채롭습니다.

  

<홍살문>

광릉의 영역이 시작되는 것을 알리는 홍살문.

복원 당시 원래의 위치에서 더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특이한 점은 .

세조의 유언으로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지는 참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참도.

신도와 어도가 있는 두개의 길.

신도...릉에 묻힌 왕과 왕비의 혼령이 걸어 다니는 길.

어도...사람들(제사 지내로 온 왕과 왕비.제관)이 걸어가는 길 

 

<정자각>

 

<구름계단>

 

정자각과 축대 그리고 구름계단.

 

<비각>

 

<조선국 세조대왕 광릉, 정희왕후 부좌강>

 

역사의 깊이와 세월의 흐름을 알려주는 정자각의 문창살.

 

한국전쟁으로 소멸되었다는 수랏간 터.

 

정자각 축대에 박힌 총알 하나.

광릉은 한국전쟁 당시 이곳이 최대 접전지중 한 곳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곳곳에 총알 자욱과 포탄의 흔적들이 문화재에 깊이 박혀 있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가슴아픈 역사의 문화재에 또다른 상처를 안고 있는 문화재입니다.

  

<정자각의 후면부>

 

정자각 후면부에 위치한 신도.

 

본격적으로 세조의 릉으로 오르게 됩니다.

경사가 얼마나 심한지 중간쯤도 못가서 벌써 숨이 헐떡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려옵니다.

조선 왕릉중 유일하게 급경사인 광릉...

릉에 거의 다다른 지점에 다행이 세조의 릉과 정희왕후의 릉을 이어주는 지름길 푯말이 보입니다.

천만다행이지요.

내려가서 또다시 정희왕후 릉을 오르려면....아마도 포기하시는 분들이 꽤 많으실 듯 합니다.

 

 

숨을 고르면서 가장 먼저 보게 되는 세조의 릉중 곡장부분..

 

세조의 릉 앞에 자리 잡은 문인석과 말 석상.

말 석상 코 부분은 한국전쟁시 포탄의 영향으로 파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몸통 부분에는 수많은 총알 자국들이 보여지는데요...

문화재를 사이에 두고 접전을 치루었던 한국전쟁...

이것이 세조의 업보였을까요....

 

세조의 릉을 지키는 문인석과 무인석...

문인석의 모습은 너무나 얌전하고 조용한 모습이 그려지는 형상이고

무인석 또한 세조와는 걸맞지 않게 다소곳한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정희왕후의 릉 앞에 세워진 문인석과 무인석과는 대조적이라는 느낌입니다. 

세조 릉 앞에서 바라본 전경.

어느 소설가는 이 모습을 군사들이 도열해 있는 모습이고

앞 산의 형세가 군사들이 물밀듯이 달라들 것 같은 형상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보기에는 어떤 모습인지요?

 

<혼유석>

 

얼핏 보면 일반 묘 앞에 있는 제사상을 차리는 석상처럼 보여집니다.

왕릉은 제사를 정자각에서 지내기에 릉 앞에는 석상이 없습니다..

이 거대한 직육면체의 돌은 혼유석이라 하고 

릉의 왕이나 왕비의 혼령이 나와서 잠시 놀거나 쉬는 장소라해서 혼유석이라 불려집니다.

이 혼유석에도 비밀이 있습니다.

혼유석의 무게는 약 7~8 톤의 무게.

무거운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둥근 북 모양의 4개의 돌은 고석.

혼유석의 표면에 흠이 생기지 않게 봉분 앞에 옮겨오는 작업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겠죠.

작업 인부가 약 1000여 명이 동원된다고 합니다.

혼유석은 조선시대 명품중에 명품으로 손꼽혀집니다.

왜 그럴까요?

혼유석 아래에는 박석이 있고 그 아래에는 왕의 시신이 안치된 석실로 연결되는 통로가 있습니다.

이 엄청난 무게의 혼유석을 들어내지 않고는 석실 안으로 들어 갈 수 없답니다.

릉의 자물쇠 역활인 듯 싶어집니다.

 

 

혼유석을 받히고 있는 고석의 문양.

 

많은 사람들은 세조를 말하면서 단종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단종을 제거하고 왕위를 찬탈하게 되는 수양대군.

그러기에 단종의 삼촌인 수양대군이 어쩌면 나쁜 폭군으로 보여지게 되는 현상도 있습니다.

단종은 세조가 죽였습니다. 강원도 영월에 유배중인 단종에게 세조는 사약을 내리게 되지만.

단종은 사약이 아닌 활 시위에 목졸려 운명을 달리하게 됩니다.

단종의 죽음은 세조의 영욕의 꿈이 아닌 왕권을 무능케한 신하들의 잘못된 보필로 얻어지는

어이없는 희생이라고 칼스버그 개인적인 생각을 해봅니다.

세종대왕의 후속 왕으로 나약하고 병든 형님(문종)을 바라보는 수양대군...

그리고 신하의 권력이 하늘을 찌르는 광경을 지켜보는 수양대군...

어리고 철 없는 단종을 허수아비로 전락시켜린 신하를 쳐다보게 되는 수양대군...

왕권이 무너지고 신하의 권력이 높아지면 최대의 피해자는 바로 백성의 몫이 됩니다.

신하는 최대한 부와 권력을 잡아야만이 권세가 오래가기에 백성들을 더욱 쥐어짜게 되지요.

아무래도 이쯤에서 수양대군은 백성들의 태평세월을 위해 노력했던 아버지(세종대왕)을 생각하게 되겠지요...

그리고 왕권을 지키려고 왕비의 가족조차 몰살 시켜버렸던 할아버지(태종)도 생각했을 듯 합니다.

계유정난.

제2의 왕자의 난. 형제의 난이라고도 불리우지만 수양대군은 이 거사로 신권을 바로 잡고 무너진 조선의 왕권을 다시

바로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평소에 무예를 즐겼던 수양대군이기에 장쾌한 정치로 북진정책을 펼쳐 여진족을 몰아내고 영토를 넓혀가고 .

토지제도 개혁과 경국대전 편찬등 수 많은 업적을 이루어 냅니다.

말년엔 왕위 찬탈에 대한 고뇌에 쌓여 불심으로 참회를 하는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단종을 말하면서 세조를 일컫게 되지만 ..단종의 신하들 또한 그 죄 몫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조의 릉 곡장 꼭대기에서 봐라본 전경입니다.

오른쪽 나무들이 너무 많이 자라서 세 개의 산등성이를 가렸다고 합니다.

그 세 개의 산등성이가 보여지면 왼쪽의 산새보다 훨씬 장관으로 다가온다고 하네요.

광릉은 조선 왕릉중에서 최고의 명당으로 꼽는다 합니다.

조선왕릉이 모두 명당에 위치하는 것이 당연지사이겠만 세종대왕의 영릉과 세조의 광릉을

명당으로 알아주는데 특히나 광릉은 학술적으로나 풍수적으로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명당의 기준이라고 하는데요.

풍수에는 전혀 문외한인 칼스버그...

 

세조의 릉을 떠나 정희왕후의 릉으로 발길을 옮겨봅니다.

역시나 산길이 그러하듯이 정희왕후의 릉을 찾아가는 지름길도 그닥 쉽게 걸어 갈 수 있는

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지름길에서 바라본 정희왕후의 릉선.

내가 저 가파른 능선을 더운 여름에 올랐다 생각하니 또 다시 순간적으로 아찔해집니다.

 

정희왕후의 릉 곡장 끝에서 바라본 전경.

세조의 릉에서 바라본 전경보다 더 멋지게 다가오는 산새인 듯 합니다.

 

정희왕후의 릉 앞에 세워진 문인석과 무인석....

문인석의 표정은 무언가 약간의 비장감을 느낄 수 있는 표정인 듯 싶습니다.

그리고 무인석은 세조의 릉에 위치한 무인석 보다 더 호걸스러운 모습을 보여지는 듯 합니다.

정희왕후....

수양대군이 거사를 앞에 두고 초조해 할 때에,

스스로 갑옷을 채워주고 용기를 복돋아 주었던 여인...

그리고 세조가 떠나자 둘째아들 예종을 왕위에 올려 놓지만 왕이 된지 1년 2개월만에 승하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맏아들 덕종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성종)을 즉위시킵니다.

13살에 즉위한 성종이 어린 나이였으므로 조선최초로 수렴청정을 하게 됩니다.

정말 대단한 권력을 구사했던 왕비였네요.

무려 왕을 세 사람이나 만들고 또 7년동안 수렴청정까지...요즘말로 킹메이커였고..최고의 권력까지 누리는

정말 여걸중에 여걸인 듯 싶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문인석과 무인석의 표정이 다른 릉과 남다르게 다가오는 이유가...

 

광릉의 탐방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아서는 왕위를 빼앗고 죽어서는 명당을 빼앗은 세조....

후세에 전쟁의 상처까지 안고가는 세조....

....

잡념으로 걸어가는 나에게... 광릉을 해설하신 분이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11월에는 입산이 금지되어 봉분까지 못올라가니 10월 마지막 주에 올라와서 광릉을 앵글에

담으면 세조의 깊은 고뇌에 찬 한숨소리까지 담겨진다 합니다...

...

광릉 숲속에서 막바지 여름의 매미소리가 귀를 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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