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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최승정 신부님의 성서백주간 평화방송 다시보기
최승정 신부님의 성서 백주간 제 2 회
성경이란 2부
1.'성경(聖經)'과 '성서(聖書)'의 차이란?
성서(Bible)가 하느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의 의미가 크다면,
성경(Canon)은
'공인된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정경', '경전'의 의미입니다.
하느님과 백성의 만나는 거룩한 시간(미사, 전례)에 읽혀질 수 있는
유일한 텍스트가 바로 성경인데, 이 때는 '성서'라는 표현 보다는
'성경'이라는 표현이 더 적당하겠죠.
2.가톨릭교회의 구약성경과 개신교의 구약성경은 대부분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렇지 않은 성경도 있습니다.
구약의 경우 토빗기, 유딧기,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마카베오기
상, 하인데 가톨릭교회는 이를 '제2경전'이라고 부르면서 구약성경에
포함시키는데 반해, 개신교 교회는 이를 '외경' 이라고 부르며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신구약 성경으로 인정되지는 않지만 동시대에 쓰여진 문헌의 경우는
가톨릭교회는 외경, 개신교 교회는 위경 이라고 부릅니다.)
3.구약은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에 대해 맺은 계약인가?
구약에 있어 가장 중요한 단어는 바로 "땅"입니다.
유목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땅은 생명, 그 자체를 상징합니다.
하느님은 백성들에게 "땅"을 약속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이
주신 "율법"을 지키도록 계약을 맺는 것이지요.
4.기타
♣계약을 맺는 데 필요한 것은 "피" (희생제물)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무슨 의미 였을까?
♣옛계약은 과연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되었나?
그렇다면 '성서(聖書)'를 얘기 했을 때
그 '서(書)'라는 것의 의미는 뭘까요?
책입니다. 영어로는 Bible이라고 부릅니다.
바이블이라는 말은 그리스말에서 나왔습니다.
그리스말 비블로스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여러분이 고대어까지 아실 필요는 없겠지만 비블로스라는 말의 약간은
좀 축약된 형태로 비블리온, 그것의 복수형으로 비블리아에서 나중에
바이블이라는 말까지 오게 되는데, 이거는 지나치게 고대어랑 관련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더 이상은 설명을 드리지 않겠고, 그냥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비블로스라는 말에서 바이블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럼 비블로스라는 말은 본래 어떤 뜻이었을까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입니다. 종이가 나오기 전에 쓰였던 겁니다.
라틴말에는 파파이러스, 파피루스라는 말을 쓰는데 그 본래의
그리스말은 Biblos입니다. B가 P로 더 강하게 간거지요.
물론 고대 헬레니즘 시기의 한 도시의 이름이기도 했습니다만 파피루스.
이것은 일종의 식물의 이름입니다. 그 식물을 쪼갭니다. 갈대 같은 건데
대롱 같은 그것을 쪼개서 펼쳐 가지고 세로로 쭉 엮고 반대편에는 가로로
묶어 가지고 붙이니까 그것들이 서로 떨어지지 않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한 면을 쓰는데 옛날에 쓰였던 파피루스 종이의 크기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A4지 보다 조금 더 큽니다.
한 라인에는 12글자 정도가. 왜냐하면 고대에는 소문자를 쓰지 않고
대문자로만 썼기 때문에 열두 글자 정도가 한 라인에 들어 갔을 것이고,
전체적으로 20-24줄 정도가 들어가는 것이 파피루스의 일반적인 형태입니다.
그렇게 많은 글자를 쓸 수는 없었습니다.
'바이블'은 비브로스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따라서 그와 같은 것들은
책이라는 의미로 번역되는 게 좋겠다라는 이야기를 저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 강의록을 보시면은 라틴말 비블리아 사크라(Biblia Sacra);
사크라 스크립뚜라 (Sacra Scriptura)
Biblia(비블리아)라는 말이 결국 책이라는 말이고
Sacra(사크라)는 성스럽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Bibla Sacras는 '성서'
Scriptura(스크립뚜라)는 뭔가 새기는 것, 쓰는 겁니다.
따라서 Sacra Scriptura는 라틴말도 결국은 성스러운 책으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Biblia Sacra, Sacra Scriptura
Bible, 이걸 우리말로 번역하면 다 '성서'입니다. 책입니다.
반대로 그럼 '성경(聖經)'에서 경(經)은 어떤 의미일까요?
경은 한자로 다음과 같이 씁니다. 經
(絲)요 부분은 어떤 뜻입니까? 실이란 뜻입니다
(工)요 부분은 어떤 뜻입니까? 뭔가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책을 찿아 보니까 요글자(經)는 아주 오래된 글자이기는 하지만
주나라나 은나라 때부터 쓰였을 글자다라는 이야기인데 이런 의미를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집을 짓는데 벽돌을 똑바로 쌓아야 되잖아요
집을 지으려면. 그런데 똑바로 쌓을 재주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면 위에서 추를 내렸습니다.
추를 내린 다음에 그 추를 묶은 다음에 그 실에다 먹을 입혔습니다.
먹줄이죠. 그걸 벽에다 딱 찍으니까 수직이 나오는 겁니다.
그 먹을 입힌 줄, 그 실 그거를 '경(經)'이라고 불렀다.
또는 옷감을 짜는데 여러분들 직조 하는 거 생각 나시죠?
옛날의 베틀. 그러면 씨실이 있고 날실이 있잖아요.
그 중에 씨실이 고정되어 있는 실이죠. 고정되어 있는 그 실을 그거를
'경'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경의 본래의 의미는 뭐냐?
실과 관계 된건데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면 뭔가 기준이 된다, 항구하다,
다른 건 움직여도 이거는 변함이 없다. 그것을 경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어떤 삶의 규범, 삷의 규준(규범이 되는 표준)이라는
의미로 그 경이라는 말이 고정이 되고 그러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오경
(유학의 다섯 경서: 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
사서삼경(유교의 경전인 사서와 삼경)등에 대한 이러한 중요한 경전에
관해서 바로 경자를 사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영어로 넘어 오면서는 '성서'를 바이블이라고 영어가 번역 한다면,
'성경'은 영어로 넘어 오면서는 Canon 이라는 말을 씁니다.
뭔가 규준이 된다. 우리말로 Canon(카논) 이라는 것을 우리 말로
직역하자면은 '정경' 또는 '경전'의 의미가 있습니다.
케논 그러면 여러분들은 디지털 카메라를 생각하시는데 그게 아니라
정경 또는 경전의 의미가 있습니다.
왜 여러분들 음악에서 보면은 파헬벨이나 바흐의 케논이 있지요?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같은 테마가 움직여나가는 것.
그건 아마 우리가 알고 있는 케논과 의미가 상통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뭔가 규준이 된다, 규범이 된다라는 뜻입니다.
저 카논이라는 말도 히브리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순수한 라틴 말이 아니라, 히브리말 '까네'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이 까네라는 게 뭐냐하면 식물입니다. 식물인데 일정한 마디가 있어요.
일정한 마디가 있다보니까 길이를 재는데 사용됐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한치 두치 하듯이 일정한 마디가 있는 길이를 재는데 사용
하다 보니까 이것도 하나의 규범, 규준의 의미가 아닌가 하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말 성경을 그러면 서양말로 바꾼다면 Canon이라는 말이 된다는
정도로 여러분이 알고 계시면 되겠습니다.
그 의미는 뭐냐?
첫째, 성경에 있어 경의 의미는 적어도 그리스도 신앙안에서는
"이것이 분명 하느님 말씀이다." 라는 겁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 만큼은 분명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항상 항구한 의미에서의 하느님 말씀이니까
신앙 생활하면서 뭔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을 때 뭔가를 판단해야 하는데
판단하기 어려울 때 그때는 어디로 가야 된다는 겁니까?
성경으로 가야 된다는 겁니다. 신앙 생활의 규범이다는 이야기 입니다.
따라서 모든 교회 신학의 출발점은 어디일까요? 바로 성경입니다.
교회법이 됐건 뭐가 됐건, 물론 자연법이라든지, 인간의 양심이라든지 많은
것들을 생각 합니다만 모든 신학의 출발점은 바로 하느님 계시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말씀이 사실은 그와 같은 교회 안에서의 성경의 중요성
때문에 여러분들이 이렇게 열심히 또 성서 공부를 하시는 겨죠.
두번째 성경의 중요한 의미는 전례에 사용하는 텍스트다 라는 의미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요. 성당은 어떤 곳입니까?
거룩한 곳입니다. 그 거룩한 장소에서 거룩한 시간에 거룩한 백성이
거룩하신 하느님과 만나는 사건, 그것이 바로 미사 또는 경신례,
또는 전례라고 우리가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는 허락되지 않는 거예요. 그 외에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천상에 속한 것과 지상에 속한 것이 함부로 접촉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들 구약에서 하느님께서 시나이산에서 등장 하시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고 좋아 합니까? 아니면 귀를 막고 땅에 엎드립니까?
"땅에 엎드립니다" 예! 어떤 뜻입니까?
이 천상에 속한 것은 함부로 접하면은 안 된다는 겁니다.
폴리네시아어로 티부 Taboo(금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말로 '금기'라고 번역이 되는데 그게 어떤 뜻이냐 하면
'천상에 속했다'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꼭 무슨 악신적인 것이나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와는 다른 세계에 속한 것이니 만큼 우리가 감히
그것을 접촉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접촉하면 우리에게는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는 겁니다.
탈출기에서도 하느님이 뭐라고 그럽니까? 모세에게.
"너희가 내 얼굴을 보게 되면 너희는 죽게 된다"(탈출33,20).
이런 얘기를 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하느님과 접촉할 수 있는,
하느님과 감히 만날 수 있는 허락된 시간과 공간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전례 공간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감히 우리가 그와 같은 시간에 어떻게 하는 겁니까?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실 수가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 그런 일은 없겠지만 어느 본당 신부님이 뭐 어떻게 하다가
친구들이랑 어느날 술을 많이 마셨어요.
다음 날 일어났는데 머리가 아픈거예요 그래서 머리도 아픈데 성체를
좀 모시면 나아질레나 그래서 성당에 들어가서 감실 열고
성체를 모셨다 이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그게 독성죄 입니다.
물론 사제는 전에 거룩하다는 그런 말씀을 드렸지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허락되는 시간과 공간이 있는 겁니다. 물론 뭐 봉성체라고
우길수도 있겠지만 안 되는 겁니다.
거룩한 시간에 거룩한 장소에서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런 거룩한 공간에서 거룩한 백성이 거룩한 하느님과
만날 때 읽혀질 수 있는 유일한 텍스트가 바로 성경입니다.
그외에 다른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시편 읽으시면 여러분들 머리속에 쏙 쏙 잘들어 옵니까?
안 들어 오죠? 성당에 오면 미사 때마다 화답송이나 이런 거 할때
시편 읽잖아요.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면서.
물론 부분적으로는 알지마는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을 할려는 거야.
우리 한테는 잘 와 닿지 않는데.
그런데 그 시편 대신에 요즘에 이해인 수녀님 시나 그런 것들은
우리 마음에 잘 와 닿잖아요. 무슨 말인지 알 수 있고.
그러니까 어느 본당 신부님이 우리 성당에는 앞으로 시편 하지 말고
수녀님 시를 읽읍시다. 그러면 그거 옳은 걸까요?
안 됩니다. 전례적으로 허용되지 않습니다. 왜 입니까?
그것은 성경 곧 교회의 전례 안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그 거룩함이
보장된 텍스트가 아니기 때문이기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그런 하느님 백성과 하느님이 만나는 그런 거룩한 시간과
거룩한 장소에서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텍스트다라는 그와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의 정의는 교회 공동체의 권의 있는 하느님 말씀으로
공인된 정경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수 많은 하느님에 관해서
또 하느님의 역사에 관해서 반성한 좋은 책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정경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 열두 족장들의 이야기라든지, 아브라함의 유언이라든지,
므나쎄의 노래라든지, 이런 것들 성경의 목록에는 없습니다.
아니면 신약 시기에 굉장히 많은 사람들에게 많이 읽혔던 신약시기부터
교회 교리 안에 쓰였던 디다케라든지 아니면 그 외에 폴리카르푸스의
순교록이라든지 클레멘스의 편지라든지, 그런데 그런 것들은 정경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그와 같은 것들은 우리가 뭐라고 부를까요?
외경이라고 부릅니다. 영어로 Apocrypha(아포크리파)라고
서양 언어로서는 일반적으로 얘기합니다.
※ 외경(外) Apocrpha: 신구약 성경으로 인정되지는 않지만 동시대에
쓰여진 문헌. 개신교에서는 위경 이라고 부름
반면에 잠시 후에 설명 드리겠습니다마는 우리 구약 성경 중에
일정한 부분은 히브리말로 전승되지 않기 때문에 개신교에서는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권수는 7권의 차이가 납니다만 책은 모두 9권입니다.
그 아홉 권의 책들을 개신교에서는 외경이라고 부르고,
우리들은 제2경전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다 경전입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서 우리가 외경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개신교에서는
위경이라고 부릅니다. 좀 복잡한 이야기인데 이해 하셨습니까?
※제2 경전
히브리어로 기록되지 않은 구약 성경.
토빗기,유딧기,지혜서,시라크(집회서), 바록서, 마카베오기 상. 하
개신교에서는 위경으로 간주함
우리는 구약 성경이 46권인데 개신교는 39권만 있다.
그런데 그 차이나는 아홉권은 우리는 잠시 후에 설명 드리겠습니다만
일곱권이 아니라 아홉권 입니다.
두권은 부분적으로만 개신교에서 인정을 합니다. 때문에 46에서 39를 빼면
분명히 일곱인데 차이나는 것은 사실은 아홉권입니다.
두 권이 부분적으로만 인정이 되기 때문에.
하여튼 그렇게 차이나는 부분을 우리는 제2경전 이라고 부르면서 모두를
정경으로 인정을 하고, 개신교에서는 그 차이 나는 부분을 외경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그 경전에 46권 안에 들어오지 못한 것을 우리는 외경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에서는 위경이라고 부른다.
그 정도의 틀로서 여러분들이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아무튼 그런 의미에 정경은 공인된 정경이고 전례 안에서 사용될 수 있는
유일한 텍스트다라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정경의 의미를 이해 하시면
되겠습니다.
따라서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전체적으로 준비를 해서
우리에게 몇 년 전부터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그 책의 제목은
성경이 더 올바를 까요? 아니면 성서가 더 올바를 까요?
제가 생각하기엔 성경이 더 맞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이와 같은 책을, 하느님의 말씀을 번역했을 때
그 일차적인 목적은 뭐냐 하면?
전례, 곧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과 만날 때 사용할 수 있는 텍스트로서
사용할 수 있는 전례적인 목적이 아마 첫번째 그와 같은 목적이었을 겁니다.
따라서 그것은 성경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반대로 그렇다면 성서라는 말은 없어져야 되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이라는 제목이 등장하자 마자 저희 백주간 회장님께서 저에게 전화를
하셨어요. "우리도 앞으로는 성경 백주간이 되는 겁니까?"
그래서 "아닙니다. 두 가지 용어가 공존하되 그 두가지가 갖고 있는 어감이
좀 다릅니다.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 생각으로도
공부라는 말을 붙일 때는 성서가 더 좋은 것 같애요." 성서공부!
하지만 기도, 전례, 교회 신앙 생활의 중심 텍스트로 우리가 얘기할
때에는 성경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올바르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런 성서 또는 성경을 우리가 큰 틀에서 보자면은 모두 몇 권이죠?
강의를 많이 들으신 분들은 안 걸려 넘어지죠? 예! 한 권입니다.
여러분들 성물 판매소 가서 "성경 73권 주세요!" 얘기합니까? ^*^
이게 사실 여러분들 웃으시라고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굉장히 중요한
얘기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결국 하나라는 겁니다. 왜냐?
오늘날 까지도 어떤 신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또 신자들 중에서도 어떤
분들이 계시냐면 "신부님 구약은 나는 읽고 싶지 않습니다.
구약은 나는 아닌 것 같애요!"
구약에 나오는 어떤 신학을 여러분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틀 안에서
설명을 드리지 않아서 그런지 구약의 하느님은 굉장히 무서운 것 같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과 좀 다른 것 같고, 뭐 이래서 아주
초세기에서부터 오늘날까지 구약의 하느님 또는 구약성경의 권위를
부정하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는 뜻에서
성경은 한 권입니다 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 한 권의 성경을 둘로 나누어 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구약과 신약입니다.
성경: 구약성경(46권), 신약성경(27권)
여러분들이 그 뜻을 잘 알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구약을 우리말로 바꾸자면 옛 계약이라는 뜻입니다. 옛 약속, 옛 계약.
언제, 어디서, 누가 누구와 맺은 계약일까요? 모세는 계약의 중재자입니다.
이스라엘과 하느님이 맺은 그 약속입니다. 계약입니다.
계약의 내용은 뭡니까?
"나는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겠고, 너는 나에게 무엇을 해야한다."
이게 일반적인 계약이죠. 하느님이 이스라엘에 약속하신 건 뭡니까?
"땅과 자손에 대한 축복"이겠지만 중요한 것은 "땅'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뭐라고 그러십니까?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세 12,1 참조)
그 다음에 탈출기 3장을 보면 하느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면서
어떤 말을 하시나요?
3장7절, 모세의 소명과 함께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그 땅에서 저 좋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족과 히타이트족과 아모리족과 프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곳으로 데리고 올라 가려고 내려왔다."(탈출 3,7-8)
뭐에 관한 얘기죠? "땅"에 관한 얘기 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이스라엘에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가나안 땅을 직접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젖도 꿀도 흐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평당 얼마나 할까요? 척박한 땅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뭡니까? 그 주변의 땅은 아예 어떤 땅 입니까?
주변의 땅은 아예 광야 입니다. 사막 입니다.
뭐를 꼽아서 자라는 일이 없어요. 뭐를 심어서 싹이 트지를 않는 땅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은 그나마 뭐를 꼽으면 자란다 이겁니다.
이게 놀랍다 이겁니다. 뭔가 싹을 틔울 수 있는 땅,
그 정도만 되어도 감사하다는 겁니다.
따라서 여러분들 이스라엘 사람들 내지는 그쪽, 그 지금의
고대 근동이라고 얘기하는 이스라엘, 시리아, 사우디아라비아
이런 사람들에게 땅이 무슨 색입니까? 물으면, 그 사람들은
어떤 색이라고 얘기 할까요? 붉은색 이라고 얘기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땅색을 물어보면 어떤 색이라고 말합니까?
황토색 이죠? 붉은색 보다 좀 짙어집니다.
만약에 유럽에 사는 사람들에게 땅은 어떤 색입니까? 하고 물어보면
훨씬 더 짙은 색을 땅색이라고 그럽니다.
유럽의 땅은 정말로 그런 면에서 비옥한 것 같애요.
우리는 축구장을 만들어서 잔디를 깔아야 되지요. 유럽에 있는 많은 땅들은
막대기만 꼽으면 축구장이 되는 거예요. 잘 자랍니다.
저도 맨 처음에 공부하러 가서 땅을 보면서 "야! 우리 땅이랑은 땅이 색깔이
다르구나!" 그걸 느꼈습니다. 굉장히 비옥하다고 그래요. 그 땅들이.
아무튼 우리가 보기에는 굉장히 척박한 땅인데 그것도 중요하니까
여기서는 뭐라고 표현하는 겁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라고 합니다.
뭔가 양분을 갖고 있다는 그와 같은 뜻입니다.
그 땅을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십니다.
"땅", 정말로 중요한 테마입니다. 구약성경 안에서는.
구약성경에서 땅이라는 문학적 표상은 항상 "생명"을 의미합니다.
땅이 있기에 생명이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제가 지금 마이크를 들고 거리로 나가가지고 지나가는 사람,
서울 사람에게 마이크를 딱 들이대고 인간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한 가지만 있다면 뭐가 있습니까? 라고 물어 본다면 오늘날 거리를
지나가는 서울 사람은 저에게 뭐라고 대답할까요? 한 가지만 고르라면?
돈, 뭐 아니면 산소. 뭐 이정도 얘기 하는 사람들이 있겠지요.
하지만 이스라엘에게는 땅이 중요한 겁니다. 왜 그럽니까?
이스라엘의 선조가 누구죠?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성조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은 뭐하든 사람들이었습니까?
유목민이었습니다. 요즘 우리말로 바꾸자면 '노숙자'입니다.
그냥 가족 단위로 양 몇마리 끌고 다니면서 풀밭이 나오면은 풀 좀 먹이고,
우물이 있으면 물 좀 먹이고 또 다음 곳으로 떠나가는 뭐 노숙자입니다.
그와 같은 아브라함이 여러분들 보십시오.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는 사회적인 배경을 보셔야 됩니다.
아브라함이 조카인 롯과 함께 다니다가 양 떼가 너무 커지니까 같이
못 다니지요? 왜 입니까? 땅 주인들이 받아 주지를 않는 겁니다.
양 떼가 너무 커지면은 땅 주인들이 "여기 와서 풀을 뜯으십시오."
하고 넉넉하게 허락해 주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롯에게 뭐라고 그럽니까?
"너는 저쪽으로 가라, 나는 이 쪽으로 간다." 그러는 겁니다.
그리고 야곱과 에사우가 나중에 화해를 하지만 함께 머뭅니까?
아닙니다. 형님이 저쪽으로 가시면 나는 이쪽으로 갑니다.
왜 입니까? 자기 땅이 없는 겁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이 자기가 사랑하는 아내 사라가 죽습니다.
아무 곳에나 묻을 수 없지요. 그러니까 아무데나 묻었다가 다른 사람들이
막 파가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안되니까 막펠라에 있는 어느
페니키아인이 갖고 있던 동굴 하나가 눈에 띄는 겁니다.
옛날에 예수님 시대까지만 해도 마찬가지 입니다.
셈족 계통의 사람들의 장례 풍습은 동굴 같은 데에다 시신을 안치하고
앞을 돌로 막는 것이 일반적인 매장의 풍습이었습니다.
특히 예수님 시대에는 동굴의 입구를 예루살렘 쪽으로 많이 냈습니다.
그리고 시신을 눕혀 놓는 것이 아니라 시신을 세워서 묻었습니다. 왜냐?
예수님 시대에도 종말에 관한 신앙이 유대 신앙에도 있었거든요.
그럼 종말이 시작되는 곳이 어디냐?
예루살렘인데 시작되자 마자 무덤을 열고 바로 나오라고, 좋은 스타트를
끊는 거죠. 그런데 바위는 왜 그리 무거운 거를 갖다 놨는지 모르겠지만
밀고 나오기 힘들 꺼예요. ^*^
아무튼 뭐 그렇게 바위를 밀고 나오는 그와 같은 이유에서
시신을 세워서 예루살렘 방향으로 묻는 어떤 장례 풍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무튼 그 페니키아인에게 가서 아브라함이 뭐라고 그럽니까?
"당신 동굴을 좀 파시오!" 그 페니키아인이 그렇게 얘기 합니다.
"아, 당신과 나 사이에 그냥 거기에 묘지로 쓰시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절대로 안 된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 페니키아인이 좀 웃기긴 해요. "애이, 그냥 쓰시라니까요.
근데 돈을 낼려면 얼맙니다." 라고 얘기를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 값을 치룹니다.
여러분들 창세기를 읽다 보면 막펠라의 무덤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 나옵니다.
우리 한테는 지겨울 정도로 나옵니다. 이건 왜 이리 자꾸 나오는 거야?
이게 하느님의 뜻이랑 무슨 상관이야 하지만 이스라엘에게는 중요합니다.
왜? 그 땅이 자기 땅으로 가져 본 첫 번째 땅인 겁니다.
'막펠라 무덤'은 이스라엘 민족이 소유한 첫 번째 땅이었다.
저희 부모님이 이북 분이신데 월남 하셔서 열심히 일을 하시며
열심히 절약해서 마침내 자기 집을 마련 하신 겁니다.
그 날 밤에 두 분은 손을 꼭 잡고 한 잠도 못 주무답니다.
여기 많은 분들 그게 어떤 마음인지 이해들 하시지요?
그게 아마 마지막까지도 사랑을 지켜준 인생의 어떤 중요한
체험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튼 그런 겁니다. 내가 가졌던 최초의 땅.
야곱도 나중에 어떤 자기 땅을 사는 그와 같은 감동적인 이야기가
기술되어 있습니다.(창세 33,19 참조)
이스라엘은 자기 땅이라고 가져 본 적이 없는 겁니다.
그들에게 땅은 곧 생명이라는 겁니다.
구약성경에서 땅은 곧 생명을 의미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구약성경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구약성경 전체에 그 땅이라는 테마가 계속해서 이어져 나옵니다.
반대로 그러면 그 땅에서 살기 위해 이스라엘은 뭐를 해야
합니까?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 율법을 히브리말로 토라라고 합니다.
구약:하느님은 땅을 약속하시고, 그 대신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지켜야 한다.
토라(Torah):모세오경을 의미 하는데, 넓게는 유다 율법 전체를 의미한다.
책으로 따지자면 저희가 앞으로 읽게 될 모세오경 그게 바로 토라입니다.
가장 협의의 의미로서는. 하지만 광의의 의미로서는 율법책의 전체가
하나의 토라입니다. 토라 이후의 예언서는 너비임이라고 그러는 예언서가
나오고, 그 이후에 커투빔이라는 성문서가 나오고, 그 이후에 마지막으로
나오는 5세기경에 나오는 유다의 법전이 여러분들이 이름을 아실
탈무드라는 법전이 나옵니다.
※ 유다 율법서 : 토라 - 너비임 - 커투빕 - 미슈나 - 탈무드
이것이 커다란 의미에서 유다 율법의 책입니다.
따라서 유다 율법은 아주 좁은 의미에서 토라만 있는 것이 아니라,
광의의 의미에서 토라가 있다라는 것에 대해서 한번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따라서 문장은 이렇습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에게 땅을 줄 것이고, 그 땅에 들어가 살기 위해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탈출기 19장 3절부터 8절을 한 번 읽어 볼까요?
계약의 체결을 약속하시는 일종의 뭐라고 그럴까요?
계약 이전의 뭐 가계약이라고 그럴까요?
모세가 하느님께 올라가자, 주님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셨다.
"너는 야곱 집안에게 이렇게 알려 주어라. '너희는 내가 이집트인들에게
무엇을 하고 어떻게 너희를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나에게 데려왔는지 보았다.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나의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이것이 네가 이스라엘인들에게 알려 줄 말이다.
모세가 돌아와 백성의 원로들을 불러, 주님께서 분부하신 이 모든 말씀을
전하였다. 그러자 백성이 다 함께, "주님께서 이르신 모든 것을 우리가
실천하겠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모세는 백성의 말을 주님께 그대로
아뢰었다.(탈출 19,3-8)
위 성경 말씀에 '계약'이라는 그와 같은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또 반복됩니다. 이 계약이 정식으로 맺어지는 것은
탈출기 24장에 와서입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론과 나탑과 아비후와 이스라엘의
원로 일흔 명을 데리고 주님에게 올라와, 멀찍이 서서 경배하여라.
너 모세만 주님에게 가까이 오고 다른 이들은 가까이 와서는 안 된다.
모세가 백성에게 와서 주님의 모든 말씀과 모든 법규를 일러 주었다.
그러자 온 백성이 한목소리로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실행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모세는 주님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였다.
그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산기슭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따라 기념기둥 열둘을 세웠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몇 몇 젊은이들을 그리로 보내어, 번제물을 올리고 소를 잡아 주님께
친교 제물을 바치게 하였다.
모세는 그 피의 절반을 가져다 여러 대접에 담아 놓고, 나머지 절반은
제단에 뿌렸다. 그러고 나서 계약의 책을 들고 그것을 읽어 백성들에게
들려 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실행하고
따르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모세는 피를 가져다 백성에게 뿌리고
말하였다. "이는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
모세는 아론과 나탑과 아비후와 이스라엘의 원로 일흔 명과 함께 올라갔다.
그들은 그곳에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뵈었다." (탈출24,1-10)
여기서 모세가 이상한 일을 하죠? 어떤 일을 합니까?
백성에게 피를 뿌립니다. 그런데 이것은 굉장히 이상한 일입니다.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 그와 같은 피를 사람이 만져도 됩니까?
그럼 부정해지는 겁니다.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때는 오히려 백성들에게 피를 막 뿌립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죠? 막 피를 뿌립니다.
피는 구약성경 안에서 거룩합니다. 이거는 신에게 속한 거예요.
따라서 인간은 피를 접촉하지 못합니다.
구약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선지국, 순대 이거 먹으면 안 되는 겁니다.
피를 그렇게 먹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 나중에 예수님도 비유로 말씀하실 때 예리코로 가는 길에서
어떤 사람이 부상을 당해서 쓰러져 있지요?
(루카 10,29-37: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그런데 사제와 레위 사람이
그 옆을 지나가지요. 그게 그 사람들이 꼭 나쁜 사람들 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들이 사제와 레위인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제와 레위인들이 만약 그 사람을 도와 주다가 사람의 피가 몸에 묻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부정해 집니다. 부정해 진다는 건 뭡니까? 만약 사제라면 미사를 못하게
되는 겁니다. 율법에 그렇게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율법의 본래의 의미는 뭐겠습니까?
"사제와 레위인들은 결코 폭력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는 그런 의미로
피를 만져서는 안 된다라는 율법이 있는 건데, 그런데 그 사제와 레위인들
내지는 당시의 유다의 종교적인 이해는 그 피를 접촉해서는 안 된다는
그 문장만 남아 있는 거예요. 그 율법의 정신이 뭔지는 알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거 어떻게 하는 겁니까? 이것 만졌다가 큰 일 나지.
그리고 그 옆을 지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 뒤를 따르던 사마리아 사람이
자신을 아끼지 않고 그를 도와 주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피를 뿌리는 겁니다.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입니다.
일반적으로 계약과 함께 붙어 있는 동사가 있습니다. 뭐라고 그러죠?
계약을 맺는다. 뭔가를 맺는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런데 히브리 말로는 계약을 맺는다라는 말을 하지 않고
다음과 같은 동사를 씁니다.
계약은 '카랏 버릿' 그러는데 '카랏'이라는 동사가 갖고 있는 뜻은
'자르다'라는 뜻입니다. 왜냐?
여러분들 흔히 생각하기에 계약을 맺는 것에 대한 그림을 한 번
그려 보십시오. 그러면 계약을 맺을 때 어떤 그림이 떠 오릅니까?
인감 도장, 계약서, 부동산 뭐 이런 것들에 대한 그림이 떠 오르겠지요.
그런데 고대인들에게 계약을 자른다는 '카랏 버릿' 했을 때 떠오르는 거는
뭐냐하면 그 계약이 진정으로 계약으로서의 효력을 가지려면 곧 법적인
효력을 가지려면 제사의 틀 안에서 약속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제사가 조금은 이상한 제사입니다. 왜냐?
일반적으로 유다인들이 알고 있는 제사는 그런 제물들을 태우는 왜
구약성경에서 보면 좀 웃기는 말이 나오잖아요.
'살라 바치고', '흔들어서 바치고' 그 장면을 생각해 보면 좀 웃기긴 해요.
아무튼 살라 바치고, 흔들어 바치고 대개 그것들을 태워서 연기를 내는
방식으로 제사를 많이 드리는데 계약을 맺을 때 만큼은 동물을 잘라서
제단을 그 피로 적시는 겁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그것을 굳이 해석할 때는 이런 뜻이라고 합니다.
당신과 내가 계약을 맺는데 하느님을 곧 신을 증인으로 세우는 겁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계약을 어겼을 때에는 이 동물처럼 이렇게 반으로 갈라져서
죽게 될 것이라는 약간은 좀 위협적인 그런 의미가 그 안에 남아 있다고
합니다.
구약이 이러니까 나중에 신약에서도 하느님과 새로운 이스라엘이 신약의
그런 계약에서도 하나의 제사가 전제되는 밑그림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구약은 그 내용이 뭐죠?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계약을 맺는데
제사의 틀 안에서 계약을 맺는데 그 내용이 뭐냐?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으로 "하느님은 이스라엘에게 땅을 주고,
이스라엘은 율법(토라)을 지켜야 한다."
이거를 약간 신명기에 와서 조금 폼나게 이야기 하기 위해서
"나는 너희들의 하느님(신)이 되겠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는
서로 소유 곧 "너는 나의 것이고, 나는 너의 것이다." 라는 얘기를 합니다.
"하느님의 땅에 들어가 살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법을 지켜야 한다."라는
것에 대하여 우리들이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뭐냐?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킨다고 해서 하느님께 득되는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녹음이 되는 카세트 라디오를 갖고 싶었어요.
그래서 저의 아버지 "아버지! 제가 요번에 그거를 좀 갖고 싶습니다."
저희 아버님이 저를 보시더니,
"어 그래 ! 요번에 일등하면 내 그거 사 줄께!"
그래서 제가 죽어라 공부해서 하여튼 성적을 잘 받아서 그거를 선물로
받았어요. 근데 오늘날 제가 그거를 뒤돌아 보면서 생각하는 게 제가
그렇게 성적을 잘 받은 게 저희 아버지한테 뭐 득되는 게 있습니까?
없지요. 그냥 기쁘기만 한거 잖아요. "아! 아들이 공부 잘했구나!"
근데 선물은 제가 또 받은 겁니다. 참 이상하죠? 하느님의 마음과
부모의 마음이 가장 그런 면에서 비슷한 유형인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런 하느님의 율법을 잘 지키게 된다면 그건 누구를 위해
좋은 일일까요? 율법은 이스라엘 공동체 스스로를 위해 좋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살기 위해 가장 좋은 것.
그런 공동체의 틀을 잡아 주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율법입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모세오경에 나오는 율법! 굉장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 참 어려운 것을 얘기 합니다.
예를 들어 너희들이 한 번 밭에 나가서 추수를 하거든
한번 흝고 지나 갔으면 두 번은 하지 마라,
그거는 가난한 사람들의 몫이다. 이런 얘기를 합니다.
그리고 그 추수를 할 때 소의 입에 채우지 마라.
걔네들도 먹을 권리가 있다.
우리나라 헌법에 그런 것 있습니까?
동물들도 먹을 권리가 있다. 뭐 견권, 우권 그런 것에 대해서 얘기 합니까?
안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거 너무한 거 아니냐?
라고 얘기 합니다. 아닙니다.
그런 동태 복수법이 갖고 있는 본적인 의미는 이겁니다.
누가 너를 때려 가지고 이빨 하나를 부러 뜨렸으면 너도 그 사람에게
복수할 수 있다. 그 대신에 이빨 한대만 부러뜨려라,
옥수수 다 그냥 그렇게 하지 말고.
눈을 하나 멀게 했으면 하나만 멀게 해라. 두개까지 멀게 하지 마라.
요즘에 복수는 어떻습니까?
"건드리기만 해 봐! 내가 열배로 갚아 줄께!"
더군다나 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에게,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에게,
약한 민족이 강한 민족에게 혹시라도 실수로라도 뭔가 잘못 하면은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동태복수법만 잘 지켜줘도 세상은 훨씬 평화로울 겁니다.
그런 율법의 책이 뭡니까?
이스라엘 너희가 내 땅에서 평화스럽게 살기를 바란다.
하느님이 지키라고 주신 율법에는 공동체가 평화롭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하느님의 마음이 담겨 있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고,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하느님은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습니다.
언제, 어디서? 언제인지 정학하게는 모르겠지만 이집트를 탈출하고
나서 시나이 산에서 이스라엘과 하느님이 모세를 중재자로 계약을 맺었다.
이것이 구약 성경 전체를 이끌어 나가는 하나의 동력입니다.
여기서 말씀드리는 동력이라는 건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제가 본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나면은 저희 본당 청년들에게 밥도 사주고
맥주도 한 잔 하고 그럽니다. 그럼 애들은 굉장히 좋아합니다.
공짜니까. 근데 한 작년 12월 이때부터는 애들이 미사 끝나고 나서
"야! 모여라! 오늘 내가 저녁 사줄께!" 그런데 애들이 안 된대요.
그래서 내가 왜? 그랬더니, "신부님 집에 가서 시크릿 가든 봐야 돼요!"
아무튼 그 친구들이 그 젊은 애들이 잘 먹는 애들이 공짜밥을 마다하고,
공짜 맥주를 마다하고 브라운관 앞으로 달려가는 겁니다.
그 이유는 뭘까요? 뭔가 그들을 끄는 힘이 있는 거지요,
뭡니까? 재민데 그게 뭡니까? 그 다음에 어떻게 됐을까? 라는 겁니다.
그게 하나의 문학적 모티브, 사람을 브라운관 앞으로 우리를 하여금
그 두꺼운 소설책을 한장 한장 읽게 만드는 그겁니다.
구약성경을 한장 한장 읽게 만드는 그 문학적 모티브 그 동력은 뭐냐?
그래서 그들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었는데 그들이 그곳에 가서 잘 살은 거야?
못 살은 거야?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우리들은 결론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 땅에 들어가서
하느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하느님의 율법을 지키면서 행복하게
오래 오래 잘 살았을까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걸 뭐라고 부릅니까? 구약이라고 부르겠지요.
만약 그렇게 됐다면 구약, 옛 계약이 아니라 그냥 계약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구약이고 이제 새로운 신약이 등장하게 됩니다.
공부하신다고 수고하셨습니다.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아멘.
다음은 제3회 구약과 신약 1부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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