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원 독후감 공모전 대상 수상작]
아미타림은 어디에 있는가
김성준(일반부)
다달이 월급날만 기다린다. 월급내역서를 받는 순간 카드사와 보험사와 원룸 주인은 기다렸다는 듯 자기 몫을 인출해간다. 깡통 소리 요란한 통장을 쥐어짜 공과금을 내고, 다음 월급날까지 어떻게 버틸지 장고에 들어간다. 결혼식 청첩장이라도 받으면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수입과 지출이 오차 없이 정확히 평형을 이루는 나로서는 타인의 행복이 원망스럽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축의금 봉투에 짓눌려 지인의 결혼식마저 두려워하다니. 그런 걸 두려워하는 내 모습을 서글퍼 하는데, 위층 사람들은 오늘도 쿵쿵 층간소음을 일으킨다. 나는 분노한다. 어디 나만 분노하는가. 정치인끼리 다투고, 시민들끼리 싸우고, 정치와 시민이 반목하고, 노사가 투쟁하고, 남녀가 갈등하고, 지역끼리 대립한다. 무엇이든 구실만 있으면 싸우고 다투고 투쟁하는 게 우리네 살풍경이다. 다들 왜 이 모양인가.
우리는 이처럼 왜소하다. 우그러진 깡통처럼 자꾸만 작아진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없고 ‘걱정하고 화내는 나’만 존재하는 것 같다. 행복하기 위해 산다는데, 도무지 행복이란 게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외부는 온통 상호 적대적이다. 이것도 사람 사는 방식인가.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가 보다. 사회 한 쪽에서는 언제부턴가 이구동성으로 하나의 슬로건을 제창한다. 바로 ‘헬조선’이다. 터전을 ‘지옥’으로 인식하는 이 신조어가 두렵다. 같은 대상이라도 그것의 성질을 결정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헬조선’은 우리 마음이 이미 지옥임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발원』을 읽으며 예나 지금이나 민초의 삶은 참 팍팍하기만 하다는 점에 가슴이 저몄다. 원효는 끊임없이 묻는다. 이토록 많은 불상이 있는데, 민초들은 저토록 부처를 원하는데, 어째서 보살핌을 받지 못하느냐고. 소설에서는 부패한 귀족들이 표면적 이유로 제시되지만, 작가는 사실 원효의 고뇌를 통해 다른 말을 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 마음에 부처가 없기에, 마음에서 부처를 상실했기에 이 세상에 부처가 없는 것이라고. 그래서 가련한 염부(鹽夫)는 가족을 죽이고 제 목숨도 끊으려 한 것이라고. 생활고로 가족을 죽이고 자살을 택하는 처참함은 신라시대 염부만의 비극이 아니다. 요즘도 뉴스를 통해 들려오지 않는가.
같은 책이라 해도 읽는 방식과 감상은 천차만별이다. 나는 승려도 아니고, 불교에 대한 이해도 깊지 못하기에 이 책을 종교소설로는 읽어내지 못했다. 또한 철학적 소양도 없기에 원효가 깨우친 진리를 다룬 이 책을 철학소설로도 읽지 못했다. 역사적 지식도 부족하기에 역사소설로도 접근하지 못했고, 정치적 식견도 일천해서 정치소설로도 소화하지 못했다. 『발원』은 원효를 통해 불가의 가르침을 전달한 불교소설이자, 삶의 의미를 궁리하는 철학소설이자, 오늘날의 사회적 모순을 신라 당대의 사회적 부조리와 겹쳐 드러낸 역사소설이자, 사회변혁의 추동력을 강구하고 그 실천을 촉구하는 정치소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중 무엇에도 근접하지 못했다. 다만, 한 명의 민초로서 읽었다. 원효와 혜공과 요석과 그 외 숱한 뜻 있는 인물들이 피를 심고 땀을 뿌려 꽃 피우고자 했던 아미타림을 오늘 이 땅에 소환하기를 열망하며 읽었다.
하지만 아미타림은 누가 대신 건설해주는 것도 아니요, 아파트처럼 돈 주고 입주할 수 있는 공간도 아니다. 아미타림은 극락정토에서 중생을 구제한다는 부처인 아미타가 머무르는 숲이다. 따라서 아미타림에서 정주하기 위해서는 우선 부처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아미타림은 먹을 게 넉넉하지도 않고, 마음이 편하기만 한 곳도 아니다. 비담과 김춘추의 음모에서 알 수 있듯 정치적 격랑이 일 때마다 그 파괴력을 가장 먼저 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곳이다. 신라 영토 안에서 백제와 고구려의 유이민과 패잔병을 받아주는 곳, 그 점만 해도 이미 현실정치의 눈에는 반역의 공간이다. 그것도 부족해 왕즉불을 부인하고 모두가 부처라는 엉뚱한 소리나 늘어놓는 곳이기도 하다. 아미타림은 반역을 획책하여 적국의 백성과 병사를 그러모으는, 아주 위험천만한 반역자 집단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저 위태로운 아미타림으로 모여든다. 원효와 벗들은 열과 성을 다해 마치 꽃밭을 가꾸듯 그곳을 가꿔나간다. 그리고 아미타림의 사람들은 저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변화된 내면을 보여준다. 선덕여왕은 “백성은 고귀해 보이는 것을 숭배하고 위안을 받는다”고 뼈아픈 지적을 했지만, 저들은 그런 헛된 미몽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마음에서 부처를 회복하는 거대한 변혁에 동참한다. 바로 그 마음의 씨앗이 여물면 꽃이 되고, 너와 내가 꽃이 되면 그곳이 바로 불국토가 될 수 있음을 보인 것이다. 원효는 전쟁터의 참상과 죽음을 목격한 후 삶의 이유와 가치를 잃고 혼란에 빠진 적이 있다. 그때 혜공은 우리 모두가 실은 한 송이 꽃이라고 원효를 일깨워준다. 원효는 꽃 한 송이마다 진리의 몸임을 깨닫는다. 아미타림은 원효와 혜공이 그 진리를 실천하는 장(場)이자, 그 실천에 메아리를 울리는 발원(發願)의 발원점(發源點)인 것이다. 본래 천한 존재는 없고, 모두 원래 부처이므로 당장 부처로 살기만 하면 된다는 원효의 신념이 아무런 장애 없이 활기차게 퍼져나가는 곳, 그게 아미타림이다. 아미타림의 향기가 널리 퍼져서일까. 어느 꼬마가 맹랑하게도 김준후를 가르치며 “부처로 행동하면 부처가 되고, 도둑으로 행동하면 도둑이 된다”고 일깨운다.
나는 원효의 깨달음을 응축한 꼬마의 말에서 깊은 울림을 느꼈다. “부처로 행동하면 부처가 되고, 도둑으로 행동하면 도둑이 된다.” 바로 이게 원효가 그토록 방황과 번뇌 끝에 도달한 핵심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자신을 낳다가 돌아가신 어머니의 죽음은 원효에게 최초의 번뇌를 안겨줬다. 도대체 사는 것은 무엇이고, 죽는 것인 무엇인가! 낭도 시절에는 군인으로서의 의무와 불살생의 신념을 두고 또 고민에 빠졌다. 승병을 조직하라는 선덕여왕의 명령과 승려로서의 사명을 두고 또다시 깊은 시름에 빠져야 했다. 요석을 구하고 싶으면 분황사에서 파계를 선언하라는 김춘추의 음모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딜레마였다. 이처럼 원효의 생은 묵묵히 앉아 수행정진만 하는 정적인 삶이 아니라 순간순간 방편을 찾아내야 하는 난제의 연속이었고, 팔팔 끓는 물처럼 뜨거운 동적인 삶이었다. 그는 경전 속에서 볼 수 있는, 남이 이미 해놓은 ‘죽은 번뇌’가 아니라 자기가 직접 부딪히고 살이 까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산 번뇌’를 매순간 감당해야 했다.
그가 마침내 도달한 깨달음은 진실하다. 진실은 언제나 설득력을 얻게 마련이다. 부처의 연기에 근거한 ‘동체대비’, 실은 마음이 고통을 만들어낸다는 ‘일체유심조’는 그래서 힘차게 박동한다. 원효는 ‘금강삼매경론’을 풀이하며 “집착의 대상은 모두 없애 열반에 머물 수 있지만, 커다란 자비의 마음으로 열반마저도 없애 머무르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홀로 깨달아 홀로 즐기는 열반의 경지마저 버렸다. 부처가 되어서도 부처를 버린 것이다. 그가 버리지 않은 오직 한 가지는 바로 민초였다. 깨달음을 얻은 그는 민중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간다. 미움 없이 살 수 있는 땅이 있느냐는 물음에 “모순이 들끓는 바로 거기에서” 변화의 씨앗을 심는다고 답한다. 그 변화는 물론 네가 아니라 내가 먼저 나서야 가능하다. “세상이 변했으면 좋겠는가? 우리부터, 나부터 변해야 한다”는 일갈은 그래서 나온다. 당장 나부터 변하고, 나부터 부처 되기를 열망하는 그 마음이야말로 “지금 이 땅에, 이 땅의 백성들이 운하는 불교”를 가능케 하는 시발점이기에 그렇다.
원효. 새벽 효(曉). 새벽은 가장 어두운 시간이며, 동시에 밝음의 가능성을 지닌 시간이기도 하다. 가장 암담한 어둠을 품었지만, 그 배를 갈라 세계를 비춰줄 빛을 비춰주는 효(曉). 나는 이 정신이야말로, 원효의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원효가 평생 고달프게 궁구한 진리이지만, 우리가 그 수레에 올라 탈 수 있다면, 그래서 우리 마음마다 도사린 지옥을 몰아내고 부처를 긍정한다면, 그 커다란 수레는 꽃을 가득 싣고 여기저기 씨앗을 뿌리며 종횡할 수 있지 않겠는가. 거기서는 반목과 대립을 넘어선 화쟁과 원융회통의 꽃향기가 두루 퍼질 수 있지 않겠는가. 말뿐인 공허함이라고 자조하지 말자. 공론에 그친 당위일 뿐이라고 자포자기 하지 말자. 원효는 매 순간 자신의 무력함을 서럽게 절감해야 했다. 하지만 ‘새벽’이라 불리던 아이가 ‘소성’에 이르기까지 관통하는 단 하나의 원칙은 바로 실천이었다. 나의 실천은 나를 변화시키고, 변화된 나는 너를 변화시키고, 그렇게 우리는 변화되어, 변화된 세상을 활짝 열 수 있다. 얼마나 가슴 두근거리고 흥분되는 말인가. 부처처럼만 행동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데.
첫댓글 아미타림이 필요없는 시대야 말로 아미타림이 완성된 세상이겠지요
이 독후감이 궁금했습니다. 올려주셔서 감사해요~^^ 발원을 제대로 읽어냈네요. 잘 쓴 독후감을 읽으니 <발원>을 다시 한 번 읽고 싶네요. _()_
찾느라 애먹었어요
고생하셨어요~
에고 제가 더 고맙습니다^^
좋은 글을 읽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