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Christophe Archambault/ Getty Images) 로힝야족 보트 난민들의 모습.
'로힝야 토착민'(Rohingya indigenous, 버마어: ရိုဟင်ဂျာ)은 공식적으로는 미얀마의 라카인(Rakhine: 이전 명칭은 '아라칸'[Arakan]) 주라고 불리는 '로항'(Rohang) 주에 거주하는 인도-아리얀 어(Indo-Aryan) 계통의 민족이다. 로힝야 족은 미얀마의 주류 민족인 중국-티벳 어족(Sino-Tibetan) 계통 민족과는 달리, 인도나 방글라데시의 주류민족인 인도-아리얀 어족과 더욱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는 민족이다.
미얀마는 1700년대에 라카인 주(=아라칸 주)를 영토로 병합했다. 2012년 현재, 미얀마에는 약 80만명의 로힝야족이 살고 있다. 유엔(UN)은 로힝야족을 세계에서 가장 박해받는 소수민족 중 하나로 보고 있다.(주9) 많은 로힝야족이 이웃국가인 방글라데시에 위치한 슬럼가나 난민촌, 그리고 태국-미얀마 국경을 따라 위치한 난민촌에 살고 있다.
'로힝야'(Rohingya: 로힝가, 로힝자)라는 말은 아라칸(=라카인) 주 지역의 언어인 로힝야어 낱말 '로항'(Rohang)에서 유래했다. 아라칸 주는 로힝야 토착민족의 고향이다.
칼릴루르 라흐마(Khalilur Rahma) 같은 로힝야족 출신 역사가는 '로힝야'라는 말이 '자비'를 의미하는 아라비아어 '라흐마'(Rahma)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지만,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주10) 이러한 주장을 하는 학자들은 8세기에 있었던 한 난파선 조난사고로까지 그 연원을 추적한다. 이들에 따르면, 람리 섬(Ramree Island) 인근에서 아라비아의 배 한척이 난파되자 아라칸의 왕은 아랍 상인들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아랍 상인들은 자신들의 언어로 "라흐마"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아랍인들을 '라함'(Raham)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라함'이라는 말이 '로항'(Rhohang)으로 바뀌었고, 최종적으로 '로힝야인'(Rohingyas)으로 정착됐다는 것이다.(주10)(주11)
(지도) 미얀마 내에서 라카인 주(구: 아라칸 주)의 위치.
하지만 각각 '아라칸 무슬림 회의'(Arakan Muslim Conference) 회장 및 사무총장을 지낸 바 있는 자히루딘 아흐메드(Jahiruddin Ahmed)와 나지르 아흐메드(Nazir Ahmed)는 이러한 주장을 논파했다.(주10) 이들은 당시 난파선에 타고 있던 무슬림들은 현재 '탐부챠'(Thambu Kya)라고 불리는 사람들로서, 지금은 아라칸 주의 해안가를 따라 거주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만일 '로힝야'라는 말이 당시의 무슬림 집단을 일컫는 말이라면, 탐부챠족이야말로 가장 먼저 로힝야족으로 불렸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두 사람에 따르면, 로힝야족은 아프가니스탄에 살았던 이들의 후손이다.(주10)
또 다른 역사학자인 MA 초우두리(MA Chowdhury)는 미얀마 내 무슬림들 사이에서 고대 아라칸 왕국의 명칭인 '므로항'(Mrohaung)이 '로항'이란 말로 변화되어 사용됐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라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로힝야'라고 불리게 됐다는 것이다.(주10)
킨 마웅 사우(Khin Maung Saw) 같은 버마인 역사학자들은 1950년대까지는 '로힝야'라는 말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주12)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역사학자인 마웅 마웅(Maung Maung)은 영국 식민당국이 시행했던 1824년의 인구조사에서 '로힝야'라는 단어는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주13)
일본 '칸다외국어대학'(神田外語大学, Kanda University of International Studies: KUIS) 소속의 역사학자 아예 찬(Aye Chan)은 '로힝야'라는 용어가 1950년대에 벵갈인(Bengalis) 후손들이 만들어낸 말이라고 보았다. 벵갈인들은 영국 식민지 시대에 아라칸 지역으로 이민을 온 사람들이다. 또한 그는 '로힝야'라는 말이 1950년대 이전에 발행된 그 어떠한 언어로 된 사료들에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하지만 아예 찬은 1824년 이전에도 아라칸 지역에 무슬림 공동체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설은 수용했다.(주14)
반면, 아라칸 역사의 전문가인 자크 라이더(Jacques P. Leider) 박사는 영국의 지리학자이자 생물학자였던 프랜시스 뷰캐넌-해밀톤(Francis Buchanan-Hamilton: 1762~1829)이 18세기 말에 출판했던 보고서에서 '로힝야'라는 단어가 사용된 사실이 있음을 지적했다.(주15) 뷰캐넌-해밀톤은 1799년에 발표한 논문 <버마 제국에서 사용되는 일부 언어들의 어휘 비교연구>(A Comparative Vocabulary of Some of the Languages Spoken in the Burma Empire)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이제 버마 제국에서 사용되는 방언 3종을 추가할 것이다. 하지만 이 언어들이 힌두 국가의 언어로부터 파생됐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다. 첫번째 언어는 오랜 기간 아라칸에 거주한 마호멧교도들(Mohammedans)이 사용하는 언어인데, 이 사람들은 스스로를 '루잉아'(Rooinga), 즉 '아라칸 원주민'이라고 부른다."(주16)
라이더 박사는 또한 '로힝야'라는 말의 어원이 "어떤 정치적 의미도 갖지 않는다"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여러분은 이 용어를 20세기를 살아가는 여러분 스스로의 정체성에 정치적 상표를 붙이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1950년대 이래로 이 용어가 현재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 이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곳에 사는 공동체에게 이러한 정체성을 부여하기 위해 사용한다는 것은 분명하다."(주15)
(주10) MA Chowdhury (1995-12-31). "The advent of Islam in Arakan and the Rohingyas". Chittagong University. Arakan Historical Society. pp.7~8.
'로힝야어'(Rohingya language)는 버마(미얀마)의 아라칸(=라카인) 주에 살고 있는 로힝야족이 현재도 사용하고 있는 언어이다. 로힝야어는 '인도-유러피언 어족'(Indo-European language family)의 분파인 인도-아리얀 어(Indo-Aryan)에서 갈라진 언어이다. 로힝야어는 버마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방글라데시 최남단 지방에서 사용되는 치따공어(Chittagonian language)와 밀접한 친연성을 갖고 있다. 버마의 민족주의적 성향의 설명들이 종종 제시하는 바와 같이, 로힝야어가 벵갈어(Bengali)와 유사한 측면을 갖고 있지만, 로힝야어와 벵갈어는 같은 언어가 아니다.
로힝야족 출신 학자들은 다양한 문자를 이용하여 로힝야어를 성공적으로 표기한다. 이러한 문자들 가운데는 아라비아 문자(Arabic), 하니피 문자(Hanifi), 로만 알파벳, 버마 문자가 포함된다. 이 중 하니피 문자는 새롭게 만든 문자로서, 기존의 아라비아 문자에다 라틴 알파벳 및 버마 문자에서 4개의 문가를 차용하여 추가한 것이다.
최근에는 로힝야어를 위한 라틴 알파벳 문자체계도 개발됐다. 이 문자체계는 영어의 A부터 Z에 이르는 26개 문자에다, 반전음 'R' 표기를 위해 라틴 문자 'Ç' 및 비음 표기를 위해 라틴 문자 'Ñ'를 추가한 것이다. 또한 로힝야어의 음운학을 정교하게 표기하기 위해 액센트 모음 5종(á, é, í, ó, ú)도 사용한다. '국제표준화기구'(ISO)는 이 문자체계를 <ISO 639-3 "rhg"> 부호로 인증했다.(주17)
(구글지도) 방글라데시와 인도의 아셈 주, 그리고 미얀마의 전반적인 위치를 보여주는 지도. 라카인 주는 미얀마의 서부 해안지대이다.
3. 역 사
8세기에 아라비아인들이 이 지역에 도래한 이래, 아라칸에는 무슬림 정착지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아랍계 후손들은 미야우(Mrauk-U, 므라우) 읍 및 차우떠(Kyauktaw) 읍 인근의 아라칸 중부지역에 거주하는 것으로 보이고, 방글라데시 치따공 행정주(Chittagong Division)와 인접한 마유(Mayu) 강 접경지역에는 로힝야족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주18)
벵갈계 무슬림들이 아라칸 지역으로 들어와 정착한 것은 아라칸의 지방왕국이었던 미야우 왕국(Kingdom of Mrauk U: 존속기간 1429~1785)의 나라메이클라(Narameikhla: 생몰연대 1380~1433, 1차 재위 1404~1406, 2차 재위 1430~1433) 국왕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1차로 재위를 하다 권력을 잃은 후 벵갈([역주] 오늘날의 인도 벵갈 주+방글라데시)에서 24년간 망명생활을 했다. 그는 이후 벵갈 술탄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귀국하여 1430년에 다시금 왕위를 되찾았다. 이때 나라메이클라와 함께 아라칸으로 들어온 벵갈인들은 독자적인 정착촌들을 이루게 되었다.(주19)(주18)
나라메이클라 왕은 아라칸의 일부 영토를 벵갈 술탄에게 양도했고, 아라칸 지역 전체에 대한 벵갈 술탄의 종주권도 인정했다. 미야우 왕국이 벵갈의 조공국임을 인정한 이후, 나라메이클라는 이슬람교의 칭호를 부여받았으며, 벵갈의 이슬람 화폐도 사용했다. 나라메이클라 왕은 독자적인 동전도 주조했는데, 이 화폐의 앞면에는 버마어 문자가 사용되었고 뒷면에는 페르시아 문자가 사용됐다.(주20)
그러나 아라칸 지역이 벵갈의 조공국이었던 기간은 짧았다. 벵갈 술탄인 잘랄루딘 무함마드 샤(Jalaluddin Muhammad Shah: 1차 재위 1415~1416, 2차 재위 1418~1433) 국왕이 죽자, 나라메이클라의 후계자들은 벵갈에 할양했던 영토들을 되찾았다. 그들은 1437년에 라무(Ramu)를 점령했고, 1459년에는 치따공(Chittagong)을 점령했다. 아라칸은 이후 치따공을 1666년까지 점령하고 있었다.(주21)(주22)
아라칸의 왕들은 벵갈의 술탄들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이후에도, 무슬림 칭호를 유지하는 관습은 유지했다.(주23) 인도에 무갈 제국(Mughal Empire: 존속 1526~1857)이 성립한 이후, 아라칸의 불교도 왕들도 자신들을 술탄과 비교하면서 무갈 술탄들의 관습을 흉내내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정부 내에서 무슬림들을 우월적 지위에 앉히는 관행도 계속됐다.(주24)
17세기가 되면 벵갈 지역의 무슬림 인구가 증가했고, 이들이 아라칸으로 이주하여 다양한 일자리를 찾았다. 그 중 일부는 아라칸 궁전에서 벵갈어, 페르시아어, 아라비아어로 된 문서들을 취급하는 일을 했다. 아라칸은 불교도 인구가 주류긴 했지만, 이웃의 벵갈 술탄들의 영향을 받아 이슬람식 행정제도를 채택하고 있었다.(주19) 미얀마 내 무슬림 소수민족인 카메인족(Kamein 혹은 Kaman)은 바로 이 무슬림들의 직계 후손들로 여겨지고 있다.(주25)
(주25) Maung San Da (2005). History of Ethnic Kaman (Burmese), Yangon.
(사진) 아라칸 지역의 고대 주화. 벵갈의 술탄(=왕) 샴스 알딘 무함마드 가지(Shams al-din Muhammad Ghazi)가 1554년에 주조했다.
(지도) 방글라데시 내에서 치따공 행정구의 위치.
3.2. 버마의 아라칸 정복
1785년 버마가 아라칸을 정복하자, 1799년에는 최대 3만5천명에 달하는 아라칸족(=라카인족)
이 버마의 처형을 피해 영국령 인도의 보호를 받고자, 영국령 벵갈 지역인 아라칸 이웃의 치따공 주(Chittagong region)로 피난했다.(주26) 버마 통치자들은 수천명의 아라칸인들을 처형했고, 상당한 규모의 아라칸 인구를 버마 중부지대로 강제이주시켰다. 이로써 아라칸 지역은 영국이 점령하기 전까지는 인구밀도가 희박한 지역이 되었다.(주27) 뷰캐넌-해밀톤은 1799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마호멧교도(Mohammedans)는 아라칸 지역에 오랜 동안 살고 있다"면서, 그들이 스스로를 '루잉아'(Rooinga), 즉 '아라칸 원주민'이라고 부른다고 말한 바 있다.(주16)
영국은 이웃한 벵갈 주민들을 비옥한 아라칸 계곡 지역의 농민으로 이주시켜 인구밀도를 높이는 정책을 장려했다. '동인도 회사'(East India Company)가 '벵갈 행정구'(Bengal administration: 존속기간 1765~1919)에 아라칸 지역까지 포함하면서, 벵갈과 아라칸 사이에는 국경선이 없어졌고, 양 지역 사이에 이주를 제한하는 장애물도 사라졌다. 19세기 초가 되면 수많은 치따공 주 지역 주민들이 아라칸에서 일자리를 구했다.(주27) 또한 수많은 아라칸 주민들 역시 벵갈 지역으로 이주하여 생활했다.(주28)(주29)
영국 식민당국이 1891년에 발표한 인구조사에 따르면, 아라칸 지역에는 5만8,255명의 무슬림들이 살고 있었다. 1911년 무렵엔 무슬림 인구가 17명8,647명까지 증가했다.(주30) 이러한 이주민 증가는 주로 아라칸 지역의 벼농사 논으로 영국령 인도에서 값싼 노동력이 유입되면서 이뤄졌다. 벵갈 출신의 이민자들은 주로 치따공 주 출신이 많았고, 이들은 "집단으로 아라칸 서부의 도시 지역들로 이주"했다.
인도 출신 이민자들이 버마로 몰려드는 것은 분명 아라칸 지역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라, 버마 전역에 걸쳐 진행된 현상이다. 뉴욕에서 출생한 미얀마계 역사학자 탄 민 우(Thant Myint-U: 1966~ )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20세기 초에 인도인들은 매년 최소 25만명 정도의 규모로 버마에 도착하고 있었다. 인도 이주민들의 증가는 확고한 증가세를 보여, 1927년에 48만명을 기록하면서 정점에 달했다. 랑군(Rangoon, 현재의 양곤[Yangon])은 뉴욕을 앞지르면서 세계 최대의 이민 항구가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총인구가 1,300만명인 상황에서 이뤄진 것이다([역주] 1983년 3월 31일 기준으로 미얀마 인구는 3,544만2,972명이었다. 미국 중앙정보부[CIA]가 발행하는 <CIA 월드 팩트북>에 따르면, 2012년 7월 현재 미얀마 인구는 6,058만4,650명이다). 그것은 오늘날 영국이 매년 200만명의 이민을 받고 있는 것과 동일한 수준이다. 이윽고 랑군, 아키얍(Akyab, 현재의 시트웨), 바세인(Bassein, 현재의 파테인[Pathein]), 모울메인(Moulmein, 현재의 몰메인[Mawlamyine]) 등 버마 최대 규모의 도시들에선 인도 이주민들이 도시인구의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영국 통치기의 버마인들은 [이러한 현상에] 무력감을 느꼈고, 우월감 및 두려움이 결합된 복합적 감정의 인종주의(racism)를 통해 반응했다."(주31)
인도계 이주민들의 버마 유입은 특히 인구밀도가 희박한 지역 중 하나인 아라칸 지역에서 충격이 강했다. 1939년, 영국 식민당국은 라카인 지역 불교도와 로힝야 무슬림 사이에 장기적인 증오가 지속될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라카인 주의 무슬림 이민 상황을 연구할 수 있도록, 제임스 에스터(James Ester)와 띤 뚯(Tin Tut: 1895~1948, 버마 독립 후 최초의 외무부장관 역임)을 공동 위원장으로 하는 특별 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있어서, 이 위원회는 영국이 아라칸 지역에서 철수한 후 [현재의 마얀마-방글라데시 경계선인] 국경을 확실하게 유지하라는 권고안을 냈다.(주32)
(주31) Myint-U, Thant (2006). The River of Lost Footsteps--Histories of Burma. Farrar, Straus and Giroux, pp.185~187.
(주32) Kyaw Zan Tha, MA (July 2008). Background of Rohingya Problem, p.1.
3.4. 제2차 세계대전과 일본의 점령
1942년 3월 28일, 라카인 민족주의자들과 카렌니족(Karenni: 카렌족의 분파로서, '레드 카렌'[Red Karen]으로도 불림)이 시트웨 군의 민비야(Minbya) 읍과 므로항(Mrohaung, 현재의 미야우) 읍에서 약 5천명의 무슬림들을 학살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라카인 주 북부에서는 무슬림들이 약 2만명의 아라칸인들을 학살했다. 여기서는 이 인종분쟁을 중재하려고 나섰던 우 우 초우 카잉(U Oo Kyaw Khaing) 부지사도 살해당했다.(주32)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일본 군이 버마를 침공했다. 이에 영국 식민당국의 군대는 버마에서 퇴각했고, 권력 공백 상태가 나타나면서 상당한 규모의 폭력사태가 빚어졌다. 이 폭력사태들에는 라카인 주의 불교도 주민(=아라칸인, 현재는 '라카인족')과 무슬림 교도인 로힝야족 주민 사이에 발생한 지역적 폭력사태도 포함된다. 이 기간 중에는 친영파와 버마 민족주의자들 사이의 폭력사태도 발생했다.
영국 군이 퇴각하자 , 아라칸 북쪽 지역에서는 친영파 무슬림 무장단체들이 버마를 침공한 일본 군 사이에서 완충지대를 형성했다.(주33) 로힝야족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연합국 세력을 지지하면서 일본 군에 반대했다. 이들은 연합국을 위한 정찰활동도 했다. 일본 군은 수많은 로힝야족을 상대로 강간, 살인, 고문 등의 만행을 무수하게 저질렀다.(주34) 이 기간 중에 약 2만2천명의 로힝야족이 폭력사태를 피해 국경을 넘어 벵갈 지역으로 피신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 중 일부는 영국령 인도로까지 이동했다.(주35)(주36) 이후 버마와 일본 군이 끊임없이 학살을 하자, 총 4만명의 로힝야족이 치따공 지역에 피신했다.(주37)
(주33) Field-Marshal Viscount William Slim (2009). Defeat Into Victory: Battling Japan in Burma and India, 1942-1945. London: Pan.
1947년, 아라칸 북부지역에서 지하드(Jihad, 성전) 운동을 지원하던 로힝야족 원로들이 '무자히드 당'(Mujahid party)을 창당했다.(주38) '무자히드 당'의 목표는 아라칸 주 북부에서 무슬림 자치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네 윈(Ne Win: 1920~2002) 장군이 '1962년의 버마 쿠테타'를 일으키기 전까지 '무자히드 당'은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네 윈은 이후 서부지역 무슬림 반군들을 상대로 20년 이상 여러 군사작전을 전개했다. 그러한 작전들 가운데 유명한 사례는 1978년에 전개된 '킹 드래곤 작전'(Operation King Dragon)이다. 이 작전 중 대규모 구속과 고문이 가해지자, 많은 수의 무슬림 주민들이 [2차대전 종료 전에 벵갈 지역의 일부분었던 곳이자] 이웃국가인 방글라데시로 피난하여 난민이 되었다. 로힝야족 난민들은 이때 방글라데시 뿐만 아니라, 파키스탄의 카라치(Karachi)에도 대규모로 피신했다(앞의 각주6 참조).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버마의 무슬림 반군들(=무자헤딘)은 아라칸 지역의 오지에서 여전히 활동 중이다.(주39) 방글라데시 무자헤딘과 버마 무자헤딘들이 연합한 세력 역시 상당한 규모지만, 이들은 최근 수년간 여러 국가들에 있는 국제적 차원의 무슬림 무장세력과 네트워크를 확장해나가고 있다. 버마의 무슬림 무장세력은 외국에서 군사훈련도 받고 재정적 지원도 획득하고 있다.(주40)
(주38) Bilveer Singh (2007), The Talibanization of Southeast Asia: Losing the War on Terror to Islamist Extremists, p.42.
버마의 군사정권은 반세기 동안 이 나라를 통치했다. 군사정권은 버마 민족주의와 상좌부 불교(Theravada Buddhism: 소승불교, 남방불교)를 그 지지기반으로 했다. 또한 미국 정부 전문가들의 관점에서 보면, 군사정권은 로힝야족을 비롯하여, 코캉족(Kokang people, 果敢族) 및 판셰족(Panthay: 중국계 무슬림) 같은 중국계(화교 및 화인) 소수민족들에 대해 강력한 차별정책을 펼쳤다. 심지어는 버마 주류민족 출신 민주주의 운동가 중 일부도 로힝야족을 동포로 보지 않을 정도이다.(주41)(주42)(주43)(주44) 버마의 역대 정권들은 로힝야족이나 화교계 수수민족에 대한 폭동을 조장했다는 비난을 받아왔다.(주45) 2009년에 홍콩을 방문했던 버마 정부의 고위 외교관 한사람은 로힝야족을 "[사람잡아 먹는] 도깨비 같이 추하다"(ugly as ogres)면서, 미얀마에서 그들은 [이질적인] 외래인들이라고 표현했다.(주46)
'2012년 라카인주 폭동사태'는 미얀마 라카인주 북부에서 로힝야족 무슬림들과 라카인족 사람들 사이에 발생한 일련의 갈등 사태를 가리킨다. 이 폭동은 몇주일에 걸친 분리주의 논쟁이 벌어지다 발생했고, 많은 이들은 이 갈등의 양편 당사자 모두를 비난했다.(주47)
2012년에 발생한 라카인주 폭동사태의 즉각적인 원인은 명료하지 않다. 많은 분석가들은 이 폭동의 주원인으로서, 6월 초에 라카인족 여성 1명이 먼저 강간당한 후 살해당했고, 그 이후 라카인족들이 버마 무슬림 10명을 살해하면서 시작됐다고 말하고 있다.(주48) 이 사건으로 무슬림 마을 주민들 "[10명의1명 꼴로] 무차별 살해당했다"(decimated)고 한다.(주48) 수백 채의 가옥들이 불타고, [이슬람 모스크와 불교 사원 등] 많은 수의 공공건물들도 파괴됐다.
'영국 주재 버마 로힝야족 기구'(Burmese Rohingya Organisation UK: BROUK)의 뚠 킨(Tun Khin) 회장에 따르면, 2012년 6월 28일 현재 로힝야족 650명이 살해당했고, 1,200명이 실종됐으며, 8만명이 피난을 떠났다고 한다.(주49) 반면 미얀마 정부에 따르면, 라카인족 불교도와 로힝야족 무슬림 사이의 폭력사태로 인해 78명이 사망하고, 87명이 부상했으며, 수천 채의 가옥이 파괴됐다. 그리고 5만2천명의 사람들이 피난했다고 한다.(주50)
폭동이 발생하자 미얀마 정부는 이 지역에 통행금지를 실시하고 군대를 투입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6월10일에 라카인주에는 비상사태가 선포되어, 군대가 이 지역의 행정권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주51)(주52) 버마 군대 및 경찰은 로힝야족 무슬림들을 대규모로 구속하면서 임의적인 폭력행위도 가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주49)(주53)버마 민주주의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많은 수의 불교 승려들의 단체들도 이 폭동사태에서 로힝야족 공동체로 전달되는 인도주의 원조물자를 차단하는 데 나섰다(☞관련게시물).(주54)
미얀마 정부는 7월에 130여개 이상의 국내 소수민족을 등재한 목록에서 로힝야족을 제외시키면서, 그들을 1982년부터 방글라데시에서 이주해온 무국적 방글라데시 무슬림으로 분류했다. 미얀마 정부는 로힝야족이 미얀마 시민권을 가질 자격이 없다고 선언했다.(주55)
로힝야족은 수니파(Sunni) 이슬람교를 신봉하지만, 그 종교적 실천에 있어서 무슬림 신비주의자들인 수피(Sufi)의 영향도 반영하고 있다. 미얀마 정부가 이들에 개한 교육기회를 제한하고 있어서, 다수의 로힝야족에게 있어서 교육을 받은 기회란 대부분 근본주의적인 이슬람교 공부 뿐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마을에는 모스크들과 종교학교들이 존재한다. 로힝야족 무슬림들은 전통적으로 남성은 모여서 기도를 하고, 여성들은 집에서 기도한다.
[역자 해설] 소수이긴 하지만 로힝야족 힌두교도도 존재한다. 2017년 9월 말 현재 이들 중 일부가 학살되어 미얀마 정부와 로힝야족 반군 사이에 범인에 대한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라카인 주에는 라카인족 240만명, 로힝야족 120만명(2017년 9월 동안 약 50만명이 탈출)이 거주하는데, 일만명 이하의 힌두교도 로힝야족도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이들은 양측으로부터 적대적 반응을 얻기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미얀마 정부는 이들 힌두 로힝야족에게는 2등급 주민증을 발급하여, 3등급 주민증의 대다수 로힝야족과 갈등을 조장하는 정책을 취한 것으로 보고된다.
(동영상) '알자지라'(Al Jazeera) 방송이 2012년 7월에 보도한 방글라데시 영토 내 동쪽 국경지대에 위치한 로힝야 난민촌의 모습. 로힝야족 난민들은 방글라데시 내에서 취업 자체가 금지되어 있어서, 난민들의 삶은 매우 비참하다. 심지어 14세 된 소녀까지도 생존을 위한 매춘에 뛰어들고 있다.
로힝야족은 "세계에서 가장 환영받지 못한 사람들" 중 하나라든지,(주56) "세계에서 가장 박해받는 소수민족 중 하나"(주57)로 묘사되곤 한다. 로힝야족은 <1982년 제정 국적법>에 따라 미얀마 국적을 박탈당했다.(주58) 이들은 정부의 허가 없이는 여행을 할 수 없으며, 토지소유도 금지되어 있고, 자녀도 2명까지만 낳겠다는 서명을 강요당한다.(주58)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 앰네스티)에 따르면, 무슬림인 로힝야족 사람들은 1978년 이래로 미얀마 군사정권의 지속적인 인권 유린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그 결과 많은 수의 로힝야족이 이웃국가인 방글라데시로 피난했다.(주59)
로힝야족의 [정치적] 운동의 자유는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고, 그들 대다수가 사실상 버마 시민권(국적)을 거부당하고 있다. 그들은 또한 다양한 형태의 갈취 대상이자, 임의적인 세금을 부과받기도 한다. 또한 토지 몰수, 강제이주, 가옥 파괴, 결혼 시 재정적 제한 등의 불이익을 당한다. 지난 10여년간에 라카인주 북부지역에서 강제노동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도로나 군 부대를 건설할 때 로힝야족이 강제노동에 동원되는 일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중략)
1978년, 미얀마 군대가 '나가민'(Nagamin: '용왕' 혹은 '드래곤 킹') 작전을 전개하면서, 20만명 이상의 로힝야족이 방글라데시로 피난했다. 이 작전의 공식적인 목표는 "미얀마 영토에 불법잠입한 외국인들에 대해 조치를 취하기 위해, 법률에 의거하여 내국인과 외국인을 구별하기 위해 라카인주에 살고 있는 모든 개인들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이 군사작전은 민간인들을 직접 목표로 했고, 광범위한 살인과 강간, 모스크들의 파괴, 여타 종교적 박해를 수반했다. (중략)
1991~1992년 사이에 25만명 이상의 로힝야족이 방글라데시로 새로운 피난행렬을 이뤘다. 그들은 만연한 강제노동과 즉결처형, 그리고 고문과 강잔에 관해 보고했다. 미얀마 군대는 기반시설(인프라)이나 경제적 사업을 하면서 로힝야족을 무임금으로 강제동원했다. 이러한 강제 노력동원 환경은 종종 매우 가혹한 조건을 갖고 있다. 정부군이 로힝야족을 강제로 노력동원하면서, 수많은 여타 종류의 인권유린도 발생했다.(주59)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은 2005년에 방글라데시에 체류중인 로힝야 난민들의 미얀마 귀환을 지원했다. 하지만 난민촌(난민캠프)에서 인권유린 사례 고발이 나오면서 이러한 노력이 위협받았다.(주60) 유엔이 일찍부터 노력을 했지만, 로힝야 난민 대다수는 방글라데시에 그대로 남았다. 그들은 미얀마 군사정권의 부정적 태도 때문에 귀국할 수 없었다. 방글라데시의 미얀마의 로힝야족 난민들은 더 이상 방글라데시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여러 문제들에 봉착해 있다.(주61)
(동영상) 로힝야족 난민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알자지라 방송 2012년 7월의 보도특집.
2009년 2월에는 인도네시아의 아체족 선원들이 '말라카 해협'(Strait of Malacca)에서 21일 동안 바다 위에서 해매던 로힝야족 보트피플 난민들을 구조하기도 했다.(주62)
지난 수년 간, 수많은 로힝야 난민들이 태국으로도 피난했다. 태국-미얀마 국경을 따라 설치되어 있는 난민촌 9곳에 대략 11만1,000명 정도의 로힝야족 난민들이 머물고 있다.
태국 당국이 배에 탄 로힝야 난민들 중 일부를 그대로 배에 실어 태국 바깥의 바다로 밀어냈다는 혐의들이 존재해왔다. 2009년에는 태국 군대가 로힝야족 난민 190명을 배에 태워 바다로 내보냈다는 증거가 나타나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당국은 2009년 2월에 이들 난민 중 한 무리를 구조했다. 구조된 난민들은 태국 군에 체포되어 구타당한 소름끼치는 체험을 증언했다. 그리고 그대로 바다로 밀려났다고 증언했다. 2월 말에는 로힝야족 난민들이 탄 보트 5척에 관한 보고가 있었다. 그 중 4척은 폭풍우에 침몰했고, 1척만 해안에 도달했다. 2009년 2월 12일, 아피싯 웻차치와(Abhisit Vejjajiva) 당시 태국 총리는 로힝야 난민들이 바다로 밀려났다는 "약간의 증거들"이 존재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내 생각으론, 이 사람들을 다른 [나라] 해안으로 흘러가도록 하는 시도가 있었다고 본다. (중략)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 충분한 물과 식량이 공급됐다는 이해가 선행된 상태에서 발생했다. (중략) 누가 그렇게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중략) 하지만 누가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분명한 증거가 존재한다면, 그 사람들은 스스로의 입장을 설명해야만 할 것이다."
아피싯 총리는 "만일 인명손실이 있었다면" 유감이라면서,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로힝야 난민들을 귀국시키기 위한 노력은 2005년부터 시작됐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2009년 미얀마 사절단과 회담을 가진 직후, 난민촌에 살고 있는 로힝야족 가운데 약 9천명을 버마로 되돌려보내기로 했다고 발표했다.(주64)(주65)
2011년 10월 16일, 미얀마에서 출범한 새로운 정권은 로힝야 난민들의 귀국에 동의했다. 하지만 로힝야인들에 대한 폭력, 강간, 고문, 대량 학살은 바로 그 비밀스런 나라인 미얀마 내에서 발생했다.(주66)(주67)
첫댓글 일단..
살인, 강간, 고문 등
인권유린에 대해 원론적으로 반대한다는 입장 표명 외에는...
정치적 해법에 관해선
제3자의 관점에서도 쉽게 결론이 안나는 복잡한 문제구만요.. ㅠ.ㅠ
생각보다도 훨씬 복잡한데요...
해결이 불가능해보일 정도.. ㅠ.ㅠ
이건 캄보디아 내전보다도 해결책이 더욱 요원해보이네요..
잘 지내시고 계신가요?
종교와 연관된 내용이라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심각한 종교문제와
인종적 관점에서 보면 또 새로운 인종문제 등
여러가지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듯 하네요.
하지만 인명살상이나 추방같은 비 인간적인 행위들은 없어자기만을 바랍니다.
안녕하셨습니까..
그런데 이미 그 박해 수준이 도를 넘어서,
미얀마 주류 버마족과 라카인주의 주류 인구인 불교도 라카인족의 만행은
돌아오기 힘든 수준의 범죄로 변했네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