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호 까르뻰띠에르 1977년도 수상자
쿠바 태생의 문필가 겸 수상록 작가 (1904년 라 아바나-1980년 빠리)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초등교육을 수료한 후 12세에 파리로 건너가 어머니와 함께 음악 수업을 시작하는데 음악과 관련된 직업에 종사하게 된다. 고국으로 돌아올 즈음에 아버지가 건축사였기에 건축학을 공부하지만 과정을 전부 마치지는 않았다.
신문기자라는 직업으로 일을 시작하여 좌익운동에 참가한다. 1920년대에 그의 경제적 지위는 기근에 허덕이는 상태였기에 생계를 위한 직업의 일환으로 잡지 <까르뗄레스 Carteles >의 편집장으로 근무하다 1926년에 처음으로 멕시코로 여행을 떠난다. 1927년 쿠바로 돌아왔을 때 독재자 헤라르도 마차도 Gerardo Machado 에 항거하는 운동에 서명한 이유로 7개월 간 옥고를 치뤘다. 그의 첫번째 소설 <주에게 찬양하라 ¡Ecue-Yamba-O! >이 탈고된 곳은 감옥에서 였고 출옥해서는 잡지 <아반쎄 Avance >를 창간했다. 보석으로 자유의 몸이 된 까르뻰띠에르는 1928년에 파리로의 여행을 결심한다. 여권이 없었기 때문에 신문기자 로버트 데스노스라 Robert Desnos 는 이름으로 신분을 위장해야만 했고 쌩-나자이레 항구 Saint-Nazaire 에서 외교관의 기품으로 대접받았다. 파리에서 앙드레 브르통 André Breton 이 주창한 초현실주의를 접하게 되어 엘뤼아르 Eluard, 아라공 Aragon, 프르베르Prevert, 아라우 Artaud 등과 친분을 다져나간다. 내전 기간 중에 스페인을 방문하였으나 고향에 대한 향수에 못 이겨 파리생활에 실증이 나자 쿠바로 돌아와 1936년에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하면서 쿠바 민속 음악에 대한 중차대한 임무를 실행에 옮긴다. 멕시코와 18세기 노예들의 반란이 있어서 관심을 가졌던 곳인 아이티를 여행한다. 1945년에 베네수엘라의 수도 까라까스로 이주하여 쿠바 혁명의 기념비가 된 해인 1956년이 되서야 쿠바로 돌아온다. 혁명정부를 위해서 여러 가지 다양한 외교직을 역임하였다.
아프리카의 칼라바르 Calabar 지방에서 유래한 남성들만의 비밀 집단인 아바쿠아 abakuá 집단에 대한 친목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를 전개하는 그의 첫번째 소설 <주에게 찬양하라¡Ecué Yamba-O! >가 1933년에 출간되었다. 이 작품에 이어 <쿠바의 음악 La música en Cuba (1946) >과 <이 세상의 왕국 El reino de este mundo (1949)>이 출간됐는데 후자에서는 상상적인 일들과 현실적인 일들을 뒤섞으면서 그리고 자유와 정의에 대한 갈망과 더불어 아프리카출신 아메리카인들의 마술적인 믿음을 합치시키면서 혁명기간동안에 산또 도밍고 Santo Domingo 에서 벌어졌던 사건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엮어 나간다.
그의 소설 중에서 스페인 사람들의 정복을 계속해서 수행하면서 스페인과 라틴아메리카간의 실질적인 관계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자 시도하는 아마존 유역에서의 쿠바출신 음악가의 허구적 일기인 <잃어버린 발자취 Los pasos perdidos (1953),>를 손꼽아야 한다. 이 작품은 그의 최고의 작품으로 분류된다. 단편집 <시간의 전쟁 Guerra del tiempo (1958) >은 1950년대 쿠바정부의 폭력성과 권위주의적 기질에 대해 다룬다. 프랑스 대혁명의 회오리속에서 체포된 3명의 주인공들의 인생을 묘사하고 두 문명의 충돌 즉 게몽주의적 유럽과 신비롭고 처녀지이자 활기찬 아메리카 대륙의 충돌에 대한 테마를 지닌 <광명의 시대 El siglo de las luces >가 1962년에 출간됐다. <바로크 콘서트 Concierto Barroco (1974) >는 라틴아메리카에서의 문화의 혼합에 대한 그의 비젼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방법론의 자원 El recurso del método (1974) >과 <봄의 예찬 La consagración de la primavera (1978)>에서 전자는 질서정연한 인간의 신화가 몰락하는 한 세상의 파괴에 대한 이야기로서 고려되어지곤 했던 반면에 후자는 작가는 인간의 시간과 역사의 시간사이에 존재하는 화합할 수 없는 부조화를 설명하고자 시도한다는 까르뻰띠에르가 방관자로서의 불가능한 역할로부터 설명하고자 의도하는 쿠바에서의 새로운 신화의 승리의 장황한 연대기를 대표한다.
까르벤띠에르에 의해 창안되고 그의 소설 <이 세상의 왕국 El reino de este mundo (1949)>의 서언에서 전파된 용어인 “신비로운 현실 lo real maravilloso” 은 그의 독창적인 소설기법을 전형화하는데 사용되어왔다. 이 용어는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주로 사용되는 소위 “가공의 현실 realismo mítico”과 동의어다. 현실과 꿈, 이성과 상상력, 역사와 우화, 삶과 죽음은 암시적이고 마술적이며 풍유적이고 게념적이고 화려한 카페트의 일종으로의 순응에 도달할 때까지 그의 내러티브적인 줄을 서로 엮어내고 있다.
알레호 카르펜티에르
알레호 카르펜티에르 이 발몽(Alejo Carpentier y Valmont)
(1904년 12월 26일, 스위스 로잔 ~ 1980년 4월 24일, 프랑스 파리)
알레호 카르펜티에르는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융성기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쿠바·프랑스·스위스계 작가이다.
비평가들은 그를 20세기 스페인어 문학을 대표하는 핵심 작가 가운데 한 사람,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문학 혁신을 이끈 주역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했다.
특히 현실을 재창조하기 위해 상상력의 여러 차원과 양상을 끌어들이는 독특한 문체를 발전시켰으며, 이러한 요소들은 그가 **‘경이로운 현실(lo real maravilloso)’**이라는 개념을 형성하고 활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평생 상당 기간 언론인으로 활동했고, 음악 연구와 음악회 조직 등에 종사한 음악학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 명성을 안겨 준 것은 무엇보다 문학 활동이었다.
생애
오랫동안 카르펜티에르는 아바나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의 가족이 출생 직후 아바나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후 스위스에서 출생증명서가 발견되면서 실제 출생지는 스위스 로잔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아버지는 프랑스인 건축가 **조르주 쥘리앵 알바레스 카르펜티에르(Georges Julien Álvarez Carpentier)**였고, 어머니 **카트린 ‘리나’ 발몽 혹은 블라고브라소프(Catherine “Lina” Valmont or Blagoobrasoff)**는 러시아계 언어 교사였다.
그의 어린 시절은 깊은 **‘문화적 혼종성(mestizaje cultural)’**으로 특징지어졌다.
가족은 아버지가 히스패닉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유럽의 쇠퇴에서 벗어나 젊은 나라에서 살기를 원했기 때문에 아바나로 이주했다.
그 결과 카르펜티에르는 쿠바의 백인·흑인 농민들과 가까이 접하며 성장했다.
영양실조와 빈곤에 시달리는 남자들, 너무 일찍 늙어버린 여자들, 제대로 먹지 못하고 질병에 시달리는 아이들….
그가 어린 시절 목격한 이러한 현실은 훗날 그의 작품 속에 그대로 스며들게 된다.
그의 어린 시절은 쿠바 독립공화국 초기와 겹쳤다.
당시 학교에서는 새로운 교육자료가 부족했기 때문에 여전히 19세기 말 스페인에서 사용하던 교과서에 의존하여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과거를 중심으로 교육했다.
11세 때 그는 부모와 함께 아바나 근처 엘 코토로(El Cotorro) 지역의 로마 데 티에라(Loma de Tierra) 농장으로 이주했다.
11세부터 17세까지 부모가 직접 그의 교육을 담당했다.
아버지는 문학을 가르쳤고 어머니는 음악을 가르쳤다.
특히 음악은 젊은 카르펜티에르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그는 이때부터 음악에 강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 아버지가 가족을 떠났다.
카르펜티에르는 학업을 중단하고 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해 일을 시작해야 했다.
쿠바에서 초등교육을 마친 뒤 파리로 가서 **장송 드 사이이 고등학교(Lycée Janson de Sailly)**에서 중등교육 일부를 마쳤다.
그곳에서 음악이론을 공부했고, 훗날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제법 괜찮은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1917년에는 아바나의 중등교육기관에 입학하여 음악이론 공부를 계속했다.
1920년에는 아바나의 건축학교에 들어갔지만 훗날 중퇴했다.
정치와 청년기
1920년대 초부터 그는 정치 활동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특히 1923년의 실패한 **‘재향군인과 애국자들의 혁명’**과 관계를 맺었다.
그가 참여했던 집단들은 엄격한 의미의 정당조직이라기보다는 예술을 중심으로 결집한 집단이었지만, 정치적 목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은 1925년 집권한 헤라르도 마차도(Gerardo Machado) 독재정권과 미국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활동을 벌였다.
쿠바에서의 생활
1921년 카르펜티에르는 언론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언론 활동은 사실상 그의 평생 직업이 되었다.
아바나의 신문 《라 디스쿠시온(La Discusión)》의 「유명 작품들(Obras famosas)」이라는 코너에서 유명 작품들의 줄거리를 소개하는 글을 쓰면서 최초의 문학적 글들을 발표했다.
같은 해 대학을 완전히 그만두고 다시 프랑스로 갔다.
2년 뒤 쿠바로 돌아온 그는 《라 디스쿠시온》과 《엘 에랄도 데 쿠바(El Heraldo de Cuba)》에 음악과 연극 비평을 썼다.
이 무렵 경제상황도 안정되어 상업잡지 《이스파니아(Hispania)》의 편집장이 되었다.
신발 제조업자 연합을 위해 신발의 역사를 집필하기도 했고, **‘자클린(Jacqueline)’**이라는 필명으로 잡지 《소시알(Social)》의 패션 코너에도 글을 썼다.
1923년에는 **소수파 그룹(Grupo Minorista)**의 창립 멤버로서 **13인의 항의(Protesta de los Trece)**에 참여했다.
이 단체는 스스로 지적이고 비정치적인 조직이라고 설명했지만, 알프레도 사야스 대통령에 반대하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후 이 단체는 **쿠바 행동 팔랑헤(Falange de Acción Cubana)**에 합류했고, 실패로 끝난 재향군인·애국자협회의 봉기운동을 조직했다.
1924년부터 1928년까지 카르펜티에르는 잡지 《카르텔레스(Carteles)》의 편집자로 일했다.
1926년 멕시코 정부의 초청으로 언론인 대회에 참석했고 그곳에서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를 만났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우정을 유지했다.
이 시기는 카르펜티에르의 예술적 인격이 형성되는 데 매우 중요했다.
그는 아바나의 거의 모든 지역을 돌아다니며 식민지 시대 건축과 아바나 구시가지의 분위기를 발견했다.
이러한 요소들은 훗날 그의 수많은 에세이와 소설의 배경이 되었다.
1920~1928년의 작품과 발언을 보면 그가 쿠바의 아방가르드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주요 인물들과 친분을 맺었음을 알 수 있다.
작곡가 **아마데오 롤단(Amadeo Roldán)**의 음악을 들으며 음악적 지식도 넓혀 갔다.
투옥과 탈출
1927년 카르펜티에르는 **소수파 선언(Manifiesto Minorista)**에 서명했다.
이 때문에 공산주의 사상을 가졌다는 혐의를 받아 7개월 동안 투옥되었다.
감옥에서 그는 첫 소설
《에쿠에-얌바-오!》(¡Ecué-Yamba-Ó!)
의 초고를 집필했다.
가석방된 뒤 1928년 3월 아바나에서 열린 언론인 대회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프랑스 시인 **로베르 데스노스(Robert Desnos)**를 만났다.
데스노스는 카르펜티에르가 마차도 정권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자신의 여권과 신분증을 건네주었고, 프랑스로 향하는 배에 탈 수 있도록 도왔다.
프랑스 생활
카르펜티에르는 1928년부터 1939년까지 프랑스에서 살았다.
프랑스에서 보낸 시간은 그의 정신세계를 크게 풍부하게 했고 새로운 문학기법과 표현방식을 접하게 했다.
그가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는 초현실주의 운동이 절정에 이르던 시기였다.
초현실주의자들은 그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프랑스에서 그는 아르투로 우슬라르 피에트리(Arturo Uslar Pietri),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Miguel Ángel Asturias)**와 깊은 우정을 맺었다.
그들의 토론 속에서 라틴아메리카 문학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이 싹텄다.
이것은 훗날 **마술적 사실주의(realismo mágico)**라고 불리게 된다.
우슬라르 피에트리는 1920년대 독일 미술평론가 **프란츠 로(Franz Roh)**의 글을 읽고 이 용어를 문학에 적용했다.
카르펜티에르는 이후 《이 세상의 왕국》의 1949년판 서문에서 자신의 개념을
‘아메리카의 경이로운 현실(lo real maravilloso americano)’
이라고 명명했다.
카르펜티에르는 프랑스의 음악계에도 깊숙이 들어갔다.
프랑스 작곡가 다리우스 미요(Darius Milhaud), 브라질 작곡가 에이토르 빌라로부스(Heitor Villa-Lobos), 쿠바 작곡가 알레한드로 가르시아 카투를라(Alejandro García Caturla) 등과 교류했다.
시, 오페라 대본, 음악 작품용 텍스트 등을 집필했다.
데스노스의 도움으로 초현실주의 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했고, 이 경험은 그의 작품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초기 단편 「학생(El estudiante)」과 「엘리베이터의 기적(El milagro del ascensor)」은 초현실주의적 성격을 띤다.
카르펜티에르는 스페인어뿐 아니라 프랑스어로도 글을 쓸 수 있었다.
프랑스어로 「Histoire de Lunes」를 썼으며 청중에 따라 프랑스어나 스페인어로 인터뷰했다.
《라 레볼뤼시옹 쉬르레알리스트(La Révolution surréaliste)》에 참여하면서
루이 아라공(Louis Aragon),
트리스탕 차라(Tristan Tzara),
폴 엘뤼아르(Paul Éluard),
그리고 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
이브 탕기(Yves Tanguy),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등을 만났다.
스페인과 카르펜티에르
1933년 첫 소설 **《에쿠에-얌바-오!》**를 완성한 뒤 잠시 프랑스를 떠나 마드리드로 갔다.
이 기회에 톨레도를 방문했다.
이듬해에는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초청으로 마드리드에서 열린 《예르마(Yerma)》 초연을 보기 위해 다시 스페인을 찾았다.
파리에서 스페인의 현실에 관한 일련의 글을 썼으며, 그 글에서 톨레도는 카스티야 예술의 중요한 기준점이 되었다.
특히 바로크 예술에 깊은 열정을 느꼈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경이로운 현실’**이라는 개념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톨레도 대성당의 **엘 트란스파렌테(El Transparente)**는 그에게 특별한 매혹의 대상이었다.
이 경험의 흔적은 훗날
《빛의 세기(El siglo de las luces)》,
《바로크 협주곡(Concierto barroco)》
등에서 나타난다.
1935년 봄에는 친구인 화가 **위프레도 람(Wifredo Lam)**과 쿠엥카를 여행했다.
그는 쿠엥카의 자연을
“그랜드캐니언의 완벽한 복제품”
이라고 표현했다.
1937년 스페인 내전 중에는 제2차 문화수호 국제작가대회에 참석한 쿠바 대표단의 일원으로 스페인을 방문했다.
전쟁의 충격을 받은 그는
「폭격 아래의 스페인(España bajo las bombas)」
이라는 네 편의 열정적인 르포를 썼다.
라틴아메리카를 다시 발견하다
프랑스에서 보낸 세월은 카르펜티에르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바라보게 했다.
그는 훗날 프랑스 생활을 통해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아메리카의 질감과 삶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토착주의 뒤에 더 깊은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대지적 맥락(contexto telúrico)
그리고
정치적·서사적 맥락(contexto épico-político)
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두 맥락의 관계를 찾아내는 사람이
“아메리카의 소설을 쓰게 될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프랑스 체류 말기에 그는 아메리카의 세계를 표현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그에게 아메리카는 아직 완전히 이해되지 않은 거대한 성운과 같았다.
그러나 자신의 작품이 바로 이곳에서 펼쳐질 것이며,
“깊이 아메리카적인 작품”
이 될 것이라는 직감을 갖고 있었다.
아이티와 멕시코 여행
1943년 아내 릴리아 에스테반(Lilia Esteban), 연극연출가 **루이 주베(Louis Jouvet)**와 함께 아이티를 여행했다.
이 여행은 카르펜티에르에게 아메리카 세계의 발견이었다.
그리고 그가 말한
‘경이로운 현실(lo real maravilloso)’
을 직접 발견하는 여행이기도 했다.
이 경험에서 탄생한 작품이 1949년 멕시코에서 출간된
《이 세상의 왕국》El reino de este mundo
이다.
1944년에는 멕시코를 여행한 뒤 중요한 음악 연구를 진행했다.
1945년 멕시코에서
《쿠바의 음악(La música en Cuba)》
을 출간했다.
베네수엘라 생활
카르펜티에르는 1945년부터 1959년까지 카라카스에서 사실상의 자발적 망명생활을 했다.
일부 비평가들은 이 시기를 그의
“생애에서 가장 풍요로운 시기”
라고 평가한다.
1948년 3월 《이 세상의 왕국》을 완성했고, 이듬해 봄 멕시코에서 출간했다.
이 작품은 15년이 넘는 세월 만에 그가 완성한 장편소설이었다.
카라카스에서는 또 다른 대표작 세 편을 완성했다.
《잃어버린 발자취(Los pasos perdidos)》 — 1952
《추적(El acoso)》 — 1956
《빛의 세기(El siglo de las luces)》 — 1958 완성
《잃어버린 발자취》는 베네수엘라의 지리에서 영감을 얻었다.
1947년 카르펜티에르는 베네수엘라 내륙 깊숙이 여행했다.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지역을 지나 **시우다드 볼리바르(Ciudad Bolívar)**까지 갔고, 산 카를로스 데 리오 네그로에서는 여러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을 만났다.
훗날 그는 이 여행에서 《잃어버린 발자취》의 최초 구상이 탄생했다고 말했다.
“아메리카는 서로 다른 시대들이 동시에 존재하는 유일한 대륙이다.”
《잃어버린 발자취》로 그는 프랑스에서 최우수 외국도서 비평가상을 받았다.
《추적》은 마차도 독재정권 붕괴 뒤 혼란기에 벌어진 적대적 테러집단들의 유혈충돌에서 영감을 얻었다.
《빛의 세기》는 베네수엘라 해안 산타페 만 여행에서 부분적으로 영감을 받았다.
1958년 완성했지만 1962년에야 출간했다.
그 사이 쿠바에서는 혁명이 일어났다.
카르펜티에르는 이렇게 말했다.
“쿠바 혁명의 승리는 내가 너무 오랫동안 조국을 떠나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는 쿠바로 영구 귀국할 계획을 세웠다.
언론인 카르펜티에르
베네수엘라 체류 중 그는 대부분의 단편소설도 집필했다.
동시에 엄청난 양의 언론활동을 했다.
1950년부터 1959년까지 신문 《엘 나시오날(El Nacional)》의
「Letra y solfa」
라는 칼럼에 문학과 음악에 관한 약 2,000편의 기사와 연대기를 발표했다.
베네수엘라 중앙대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쳤고, 카라카스의 광고회사 ARS에서 아르투로 우슬라르 피에트리 등과 함께 일했다.
쿠바 귀환
1959년 카르펜티에르는 쿠바로 돌아와 아바나에 다시 정착했다.
1962년에는 **쿠바 국립출판사(Editorial Nacional de Cuba)**의 총책임자가 되었다.
혁명정부 아래에서 교육부, 대학, 과학아카데미, 청소년출판사, 국가문화위원회 등과 관련된 출판사업을 조직했다.
UNEAC, 국립문서보관소, 국립도서관, 유네스코, 쿠바영화예술산업연구소(ICAIC), 카사 데 라스 아메리카스(Casa de las Américas) 등 문화기관과도 관계를 맺었다.
1962년 멕시코에서
《빛의 세기(El siglo de las luces)》
가 출간되었다.
이후 파리 주재 쿠바대사관의 공사참사관으로 임명되었다.
1964년에는 라디오 아바나의 문화 프로그램
「쿠바와 세계의 문화(La cultura en Cuba y el mundo)」
를 진행했다.
주요 주제는 라틴아메리카의 소설과 음악이었다.
같은 해 에세이집
《탐색과 차이(Tientos y diferencias)》
를 멕시코에서 출간했다.
말년과 세르반테스 문학상
1972년 바르셀로나에서
《망명권(El derecho de asilo)》,
《바로크 협주곡(Concierto barroco)》,
《방법의 자원(El recurso del método)》
등이 출간되었다.
쿠바에서는 그의 70세를 기념하는 대규모 헌정행사가 열렸다.
3년 뒤 아바나 대학교에서 히스패닉 언어·문학 명예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알폰소 레예스 국제상도 수상했다.
또한 **치노 델 두카 세계상(Premio Mundial Cino del Duca)**을 받았고 상금을 쿠바 공산당에 기부했다.
1976년에는 캔자스 대학교 스페인·히스패닉아메리카 연구학회의 최고 영예인 **명예회원(Honorary Fellow)**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쿠바 인민권력 전국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자료 본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1978년 카르펜티에르는 스페인의 최고 문학상인 미겔 데 세르반테스 문학상을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에게서 받았다.
그는 이 상의 상금 역시 쿠바 공산당에 기부했다.
※ 다만 같은 자료의 「수상」 항목과 마지막 수상자 계보에서는 1977년 세르반테스상 수상자로 기록되어 있다.
1979년에는
《봄의 제전(La consagración de la primavera)》
이 출간되었다.
또한
《하프와 그림자(El arpa y la sombra)》
가 멕시코·스페인·아르헨티나에서 출간되었다.
이 작품으로 프랑스의 외국작가 대상 문학상인 **메디시스 외국문학상(Prix Médicis étranger)**을 받았다.
1980년 4월 24일,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중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쿠바로 송환되어 아바나의 **콜론 묘지(Cementerio de Colón)**에 안장되었다.
문체와 주제
카르펜티에르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경이로운 현실(lo real maravilloso)’
과 네오바로크(neobarroco) 개념을 가장 먼저 제시한 작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바로크적인 문체와 ‘경이로운 현실’ 이론으로 널리 알려졌다.
대표작으로는
《에쿠에-얌바-오!》(1933)
《이 세상의 왕국》(1949)
《잃어버린 발자취》(1953)
등이 있다.
《에쿠에-얌바-오!》에서는 아프로쿠바 문화가 중요한 주제로 등장한다.
쿠바가 미국에 종속되어 있던 정치적 상황을 비판하며, 작품에 수록된 사진 때문에 순수한 허구라기보다는 인류학적 저술처럼 보이기도 한다.
‘경이로운 현실’
카르펜티에르는 1948년 《엘 나시오날》에 발표한 글에서 **‘경이로운 현실’**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이듬해 《이 세상의 왕국》 서문에서 이를 다시 설명했다.
그가 아이티에서 경험한 현실은 서구적 의미의 환상이나 허구가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갈망하며 **마캉달(Mackandal)**의 변신 능력을 실제로 믿고 있었고, 그러한 집단적 믿음 자체가 역사적 현실을 만들어냈다.
카르펜티에르는 말했다.
“나는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경이로운 현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왕국》 서문의 마지막에서 독자에게 묻는다.
“그러나 아메리카 전체의 역사란 결국 ‘경이로운 현실’의 연대기가 아니고 무엇인가?”
따라서 카르펜티에르에게 ‘경이로운 현실’은 단순한 환상적 문학기법이 아니었다.
그것은 라틴아메리카의 역사 자체를 바라보는 방식이었다.
마술적 사실주의와의 차이
‘마술적 사실주의(realismo mágico)’라는 용어는 독일 미술평론가 **프란츠 로(Franz Roh)**가 1925년
《후기표현주의: 새로운 유럽 회화의 문제들》
에서 사용한 용어이다.
이 글은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레비스타 데 옥시덴테》를 통해 스페인어권에 소개되었고, 이후 라틴아메리카 문학에 적용되었다.
그러나 카르펜티에르의 ‘경이로운 현실’과 ‘마술적 사실주의’가 정확히 같은 개념인가에 대해서는 지금도 연구자들 사이에서 견해가 갈린다.
음악
음악은 카르펜티에르의 삶과 작품에서 매우 중요했다.
할머니는 피아니스트였고, 어머니는 피아노를 연주했으며, 아버지는 첼리스트였다.
카르펜티에르 자신도 음악이론을 공부했고 피아노를 연주했다.
프랑스에 살던 시절 파리 음악계에 참여해 여러 작곡가들과 협업했다.
그의 문학에서도 음악은 단순한 소재가 아니라 문장의 리듬과 소설의 구조를 만드는 원리가 되었다.
《이 세상의 왕국》에서는 아프로쿠바적 리듬과 음악성을 살리기 위해 크레올어를 사용한다.
《잃어버린 발자취》에서는 주인공이 오래된 악기와 언어 속에서 음악의 기원을 찾아 정글 깊숙이 들어간다.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점차 그 세계에 동화되지만, 결국 그의 통합은 완전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난다.
문화적 혼종성
카르펜티에르 작품의 핵심 주제 가운데 하나는
문화적 혼종성(mestizaje cultural)
이다.
그것은 그가 생각한 라틴아메리카적 인간을 이해하는 핵심 요소이기도 하다.
초기 작품에서는 흑인과 아프로쿠바 문화, 인간과 우주의 관계를 많이 다루었다.
백인 남성은 그의 작품에서 비교적 드물게 등장하지만, 등장할 경우 흔히 라틴아메리카를 억압하는 네 가지 제도를 상징한다.
감옥
교회
노예제
외국 제국주의
여행
카르펜티에르 문학에서 여행 역시 핵심적인 요소이다.
거의 모든 작품에서 등장인물들은 여행하거나 끊임없이 이동한다.
이는 어쩌면 카르펜티에르 자신의 끊임없는 여행과 이주의 삶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시간과 역사
카르펜티에르가 창조한 소설세계에서는 같은 문제가
서로 다른 상황,
서로 다른 시대,
서로 다른 장소
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그의 인물들은 오늘의 인간이면서 동시에 어제의 인간이고, 어쩌면 내일의 인간이기도 하다.
어제의 혁명은 내일의 혁명이 될 수도 있다.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이 겹쳐지면서 다양한 역사적·개인적 주제들이 나타난다.
이러한 시간과 역사에 대한 관점은 카르펜티에르가 라틴아메리카 문학에 남긴 가장 중요한 영향 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영향은 칠레의 **호세 도노소(José Donoso)**와 《밤의 음탕한 새》, 멕시코의 **페르난도 델 파소(Fernando del Paso)**와 《제국의 소식》, 콜롬비아의 **헤르만 에스피노사(Germán Espinosa)**와 《왕관을 짜는 여인》, 그리고 쿠바의 레오나르도 파두라(Leonardo Padura) 등 후대 작가들에게서도 확인된다.
유산
카르펜티에르의 작품은 문학과 문화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남겼다.
그는 라틴아메리카의 경험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려 했으며 자신의 복합적인 문화적 배경을 작품 속에 끌어들였다.
특히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지 시대 과거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99년에는 그를 기념하여
알레호 카르펜티에르 소설·단편·에세이상(Premio Alejo Carpentier)
이 제정되었다.
수상자 발표는 매년 그의 생일인 12월 26일에 이루어진다.
주요 작품장편소설
원자료에는 카르펜티에르 연구서와 논문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주요 자료는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