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인 한국.
그런데 해마다 추락하고 있는 순위가 하나 있습니다.
2006년 31위
2008년 47위
2009년 69위
이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언론의 자유도' 인데요 국경 없는 기자회(Reporters Without Borders)가
지난해 10월 발표한 순위입니다. 한국보다 앞선 나라 중에는 가나(27위),
파푸아뉴기니(56위), 올해 초 대지진이 발생한 아이티(57위) 등이 있었습니다.
4년 만에 무려 38단계가 하락한 순위는
지금 한국 언론의 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40년 언론인의 길을 걸어오는 동안 겪은 생생한 경험으로
오늘날 언론의 현실을 진단하고, 그 속에서 발견한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넉넉한 품과 미소, 걸죽한 입담으로 청중들을
확~ 사로잡았던^^ 정연주 前사장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언론은 이미 90% 장악 되었다"
“작년 엠네스티가 연례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한국이 10년만에 표현의 자유가
다시 우려할만한 수준이 됐다’고 평가했습니다. 왜 이런 평가가 나왔겠습니까?
금융위기가 왔을 때 미네르바가 인터넷에 정부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올리자
검찰은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며 체포했습니다. 문화부 장관은 ‘회피연아 동영상’을 제작한 네티즌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고요. 정부는 KBS, YTN, MBC 방송 3사의 사장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로 교체했습니다. 또 김제동, 윤도현 같은 연예인들까지도 ‘좌파’라고 낙인 찍으며 방송에서 잘랐습니다.
이들이 뭘 잘못했습니까? 민주시민으로서 시민적 권리를 행사한 거 아닙니까?
지금 한국은 개인이 정치적 의견을 표출할 수 없도록 억압하고 있습니다.”
“2008년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 KBS 이사장을 만나서 ‘정연주 때문에
일 못하겠다’고 한 일도 있습니다. 박재완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은 2008년 7월
신동아 인터뷰에서 'KBS 사장은 정부 산하 기관장으로서 새 정부의 국정철학과
기조를 적극 구현하려는 의지가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런 인물이 아니니까 잘라버린 겁니다. 지금 방송은 현 정권의 국정철학과
기조를 적극 구현하는 의지가 강력한 인물들로 포진돼 다 장악 돼버렸습니다.”
“어떻게 이룩한 민주주의고 언론자유인데 2년도 안 돼서 곤두박질칩니까?
1995년 3월 조선일보가 자사 기자들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했습니다.
‘편집권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경영진 61.4%, 중앙간부 편집국장 데스크 22.4 %, 자본권력 6.9%,
정치권력 2.9% 순으로 나왔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언론이 정치권력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시대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작년 한국언론재단에서 현역 기자들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를 보면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권력순위를 매겨보시오’란 질문에
오프라인 기자 중 28.6%, 온라인 기자 중 31.1%가 ‘정치권력’이라고 대답했습니다.
한편 이명박 정부 출범 1년 후에 한겨레신문에서 국민들에게 언론환경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어요. 언론환경이 전 정부 때하고 비슷하다 34%,
더 좋아졌다 12%, 더 나빠졌다 44.4%.
기자들뿐만 아니라, 국민들도 언론환경이 더 나빠졌다고 합니다.”
언론은 공론장의 역할을 해야 한다
언론의 위기를 말하고 있는 현재,
정연주 前사장은 30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 신문이 출발한 역사를 돌아봅니다.
그로부터 언론 본연의 기능과 존재이유란 무엇인지 이야기하는데요.
“18세기에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부르주아 계급이 탄생했습니다.
처음에 부르주아들은 만나면 주로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지요.
그러다 차츰 정치, 사회 분야로 이야기의 폭이 넓어지면서 봉건영주의
절대권력과 정치에 대해 비판하고 어떻게 사회가 개조되어야 하는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많은 사람들과 자신들의 이야기를
공유하기 위해 팜플렛 같은 걸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신문의 출발입니다.
그 당시 신문은 사회의 다양한 견해를 담으며 공론장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회가 상업화, 오락화되면서부터 언론마저 상업화되고
공론장의 기능을 상실했고 권력에 봉사하는 권력의 대리인,
권력 자체가 돼버렸습니다. 언론에는 이렇게 공론장의 역할을 하는 순기능과
권력의 앞잡이가 되는 역기능, 두 가지의 얼굴이 있습니다.”
“언론이 공론장의 역할을 하기 위해선 두 가지 기능에 충실해야 합니다.
첫째는 사실보도입니다. 각색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를 보도해야 합니다.
둘째는 신문이 처음 출발할 당시에 부르주아가 봉건권력을 비판했듯이
모든 종류의 권력을 비판해야 합니다. 권력은 비판하고 견제하지 않으면
그 속성상 부패하게 되어있습니다.”
'개와 기자는 출입금지'
유신정권 하에서 언론은 ‘권력의 앞잡이’ 역할을 했던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연주 前사장은 당시에 기자로 재직하며 겪었던
뼈저린 경험들을 생생하게 들려줍니다.
“1970년 제가 동아일보에 입사했을 때 언론사에 들어가서 본 선배기자들의
모습은 좌절, 체념, 분노, 부끄러움이었습니다. 그 때 대학에서 있었던 데모,
동일방직 노동자들이 처절하게 싸우던 일, 지식인, 종교인들의 저항은
한 줄도 못썼잖아요. 당시엔 중앙정보부 요원이 동아일보 편집국장 옆에 앉아서
‘이 기사 빼라, 넣어라, 제목 바꿔라’하고 명령했어요.
말 안 들으면 두들겨 팼습니다. 당시에 야당지도자 이름도 신문에 못썼어요.
데모란 말도 못쓰고 ‘학원사태’란 말을 썼어요.
또 ‘북한’이란 용어를 쓰면 반공법으로 잡아갔죠.
이렇게 언론이 사실보도를 못하면 언론이 아닙니다.”
"하루는 제 모교에 데모하는 학생들 취재를 갔습니다.
후배들이 도서관에서 농성을 하고 있었는데 그 앞에 의자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개와 기자는 접근 금지'라고 써붙여 놓았더군요.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기자가 사실보도를 안해서 개 취급 받는 현실이, 그에 저항하지 못하는
제 자신이요. 1974년 '자유언론실천선언' 때부터 저항하며 언론의 자유를
한 뼘 한 뼘 넓혀가면서 처음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희열을 느꼈습니다.
제가 쓴 기사들이 그대로 나갔으니까요. 당시 민청학련 사건으로
잡혀가 고문 당했던 사람들의 인터뷰가 동아일보 1면에 나왔어요.
곧 중앙정보부에서 기업들에게 ‘동아일보에 광고 내지 말라’며 압박이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텅 비어버린 광고란에 국민들이 성금을 모아
자발적 광고를 냈지요. 민주주의의 꽃이 활짝 피는 것 같았어요.”
공론장의 역할을 저해하는 ‘억압의 3각 동맹’
현재 언론이 공론장의 역할에 충실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은 무엇일까요?
정연주 前사장은 정치권력, 자본권력, 센세이셔널리즘
3가지를 중요한 원인으로 꼽습니다.
“첫째는 제가 70년대 독재정권하에서 겪었던,
그리고 2010년 현재 다시 언론의 자유를 저해하고 있는 정치권력입니다.
지금 한국 언론 90%가 정권과 똑같은 관점을 가졌지 않습니까?
언론이 수구 기득권 세력과 같은 길을 가니까 공론장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본권력입니다.
거대자본이 광고라는 어마어마한 무기를 가지고 자기 기업에
불리한 기사는 못쓰게 합니다. KBS는 수입의 40%가 수신료이기 때문에
조금 덜한 편이지만, 다른 언론매체는 광고주의 힘이 엄청 셉니다.
광고주가 언론 편집국 광고 담당자에게
전화해서 “이 기사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알아서 뺄 정도예요.”
세 번째는 센세이셔널리즘(sensationalism),
즉 본능과 호기심을 자극하여 대중의 인기를 끌어 이득을 얻으려는
보도 경향입니다. 이번 천안함 사건에서도 센세이셔널리즘이 드러났습니다.
천안함 사건 직후 백령도 사건현장으로 실종자 가족과 일부 언론이 같이 갔었는데,
현장에 가서 보니 선체도 발견 안 되고 해군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방송에서 ‘지금 해군이 적극적으로 구조활동을 잘 하고 있다’고
보도하더라는 겁니다. 이걸 보고 화가 난 실종자 가족대책협회 회장이
CBS 라디오 뉴스에 나와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언론은 제발 소설 좀 그만 쓰십시오!’
지금까지 보도된 천안함 관련 뉴스 중에 과연 몇 %가 사실일까요?
천안함 사건과 관련된 자극적인 기사들이 지방선거, 4대강 사업 문제를 덮어버리고 있습니다.”
“요즘 언론들은 일관성도 없습니다. 최소한 자기들의 가치 지향이 있다면
일관성이 있어야죠. 예를 들어 고위공직자의 도덕성이 중요하다고 했으면 국
민의 정부든, 참여정부든, 지금 정권이든, 객관적으로 일관되게 적용해야 하는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또 다른 예로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전후에 나온 조중동 사설과 천안함 사건 이후에 조중동 사설을 비교 검토하면 책이 한 3권은 나올 겁니다. 언론학자들은 이런 거 분석 안 하고 뭐하나요?
주어진 자료를 합리적으로 분석해서 국민들에게 알려야죠.
시대가 바뀌고 자기 이해관계가 달라질 때마다 논조와 강조점이 다르고
어떤 거는 무시하고 어떤 거는 부풀리는 것, 이것이 왜곡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은 있다"
한국 언론의 적나라한 현실이 하나, 둘 드러날 때마다
강연장 곳곳에서 깊은 한숨과 탄식이 터져나옵니다.
위기에 처한 한국 언론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것일까요?
정연주 사장은 “희망은 분명히 존재한다”며 여론조사 결과를 보여줍니다.
“2년 전 대선 때 20대의 MB지지율이 42.5% 였습니다.
올해 초에 매일경제 신문에서 이명박 대통령 지지율 여론조사를 했습니다.
‘지지한다’가 총 43.3%였어요. 세대별로 보면 조중동의 영향을 많이 받는
50대 이상은 61.9% 나왔어요. 반면 인터넷으로 신문을 보는, 비교적 조중동의
영향을 받지 않는 20대는 27.7% 가 나왔습니다.
제가 각 대학에서 강연을 마치고
‘왜 이렇게 MB한테 돌아섰냐?’라고 물어봐요. 그러면 학생들이
‘등록금 반값에 해준다고 했다가 사기쳤고, 등록금 융자금 준다고 하고
복리계산하고,김제동, 윤도현도 잘랐잖아요’라고 합니다.
지금 20대는 김제동 퇴출과 같은 단순한 사건으로 정치교육을
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20대들이 투표를 하면 세상이 바뀝니다.”
“김대중 前대통령이 작년에 노무현 前대통령 서거 이후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 것인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기는 길은 모든 사람이 정부에 옳은 소리로 비판해야 하겠지만
그렇게 못하는 사람은 투표를 해서 나쁜 정당에 투표하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나쁜 신문을 보지않고 또 집회에 나가고 하면 힘이 커진다.
작게는 인터넷에 글을 올리면 된다. 하려고 하면 너무 많다.
하다 못해 담벼락을 쳐다보고 욕을 할 수도 있다’
내가 가진 시간과 재능, 돈을 가지고 내 주변 사람과 함께
손을 잡고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희망이 생기고 세상과 언론을 바꿀 수 있습니다.
가는 길이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제가 좋아하는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란 시가 큰 힘이 됩니다.
우리 함께 절대 좌절하지 맙시다.”
담쟁이들처럼 서두르지 않고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절망적인 현실이라는 벽을 넘을 때 이 사회는 희망적인 세상이 될 수 있다는
정연주 사장의 결론에 청중들은 큰 박수로 화답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