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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1) 2022. 6. 12
성령의 열매 - 사랑
갈5:22-23
<성령님은 누구신가>
우리는 지난 주일 성령강림절을 지켰습니다. 성령님은 일시적으로 어떤 능력을 일으키는 힘이나 에너지가 아니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인격적인 존재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오신 이유를 설명해 드렸습니다.
첫째, 성령님은 ‘또 다른 보혜사’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보혜사’란 말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인데 그 의미는 ‘위로자’라는 뜻입니다.
첫 번째 보혜사이셨던 예수님의 뒤를 이어 이 땅의 소외되고, 병들고, 절망 가운데 있는 자들의 친구가 되어 위로와 소망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둘째, 성령님은 ‘진리의 영’으로 오셨습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진리를 드러내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님은 스스로를 드러내시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닙니다. 진리이신 예수님과 그의 가르치신 말씀을 드러내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더욱 충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성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언제까지나 이 땅에 계실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영이신 성령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십니다(요 14:16-18). ‘영원토록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예약해 놓으신 숙소는 어디입니까? ‘너희 속’(17)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고전6:19)고 가르치셨습니다.
지금도 성령님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서 임재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중보하며 기도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성령님을 우리가 영접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인격적이신 분).
그리고 날마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 나타나는 증거가 있습니다.
바로 열매, ‘성령의 열매’입니다.
예수님은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안다’(마7:16)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열매가 맺기 전까지는 그 나무가 건강한지 알 수 없습니다.
교회 화단 – 선인장 꽃이 피다. 겨우내 쭈그려져 있어 죽은 줄 알았음.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딸 수 없고,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듯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서도 이것은 분명합니다. 그 열매를 보면 그 사람이 성령을 쫓아,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사는 사람인지, 아니면 자기 욕심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하는 우리나라 속담이 아마도 여기에 해당하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에서 또 한 가지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성령의 열매’라고 말할 때 이 ‘열매’라는 단어가 복수형이 아니라 단수형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분명히 아홉 가지의 열매들을 말하면서도 그것을 복수로 취급하지 않고 단수로 취급해서 말하는 데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들은 내 취향에 따라 몇 개만 취사 선택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마치 한 세트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으면 그 나머지 것들도 맺게 되는 것이고,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 나머지 것들도 맺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다스림을 온전히 받으면서,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살아간다면, 이 아홉 가지 열매들을 모두 맺게 되어 있다는 원리입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면 나타나는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갈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열매는 크게 아홉 가지로 구분을 합니다. 즉 사랑, 희락, 화평의 열매, 오래 참음, 자비와 양선의 열매 그리고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입니다. 이 9가지 열매는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2. ‘이웃’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오래 참음, 자비, 양선)
3. ‘자신’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충성, 온유, 절제)
<첫 번째 열매 – 사랑>
여러분! 사랑은 우리의 감정의 소산물이거나 노력의 결실이 아닙니다.
어제 뉴스에 보니 40대 남편을 20대 아내가 칼로 찔러 죽였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보니, 돈이 많은 줄 알고 결혼했는데 결혼해 보니 빈털터리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 문제로 싸우다가 홧김에(술김에) 찔러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결혼할 때는 사랑해서 결혼한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히 조건적인 사랑이었을 뿐입니다.
성령의 열매로서의 사랑(아가페)은 하나님의 사랑을 진심으로 깨달은 성도에게서 나올 수 있는 사랑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즉 ‘사랑’이 하나님의 본성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본성이 드러난 것이 바로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맺혀진 결과(열매)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당신의 독생자를 ‘희생 제물’로, 피 값으로 사셔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롬5:7-8절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면 첫 번째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경험하는 사건이 ‘하나님의 아가페적 사랑’에 대한 내적 체험입니다.
이찬수 목사님의 ‘삶으로 증명하라’는 책에 보니 이런 예화가 나옵니다.
한 의사가 아프리카의 한 마을에 들어가 그들을 섬기며 지냈습니다. 그 마을의 추장 아들은 누가 봐도 매우 훌륭한 엘리트였습니다. 외국에서 유학 생활을 마치고 추장 아들이 돌아왔을 때 마을은 술렁거렸습니다. 왜냐하면, 과연 그가 누구와 결혼하게 될지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것입니다.
그 마을에서는 남자가 청혼할 때, 여자의 집에 암소를 끌고 가서 청혼하는 것이 풍습이었다고 합니다. 대부분 처녀는 암소 한 마리를 받았고 때로는 두 마리를 받았습니다. 가끔 세 마리를 받는 경우도 있으나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어 그 마을 처녀 중 몇 명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드디어 추장 아들이 청혼하기 위해 암소를 끌고 출발하였습니다. 그런데 무려 암소를 아홉 마리나 끌고 가는 것이 아닙니까? 사람들은 모두 나와서 “역시 추장 아들은 달라. 누가 저 암소 아홉 마리를 받고 추장 아들과 결혼하게 될까?”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추장 아들이 도착한 집은 너무나 의외였습니다. 몹시 가난한 집에다가 청혼받은 처녀 역시 병약한 외모에 영 볼품없는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였습니다.
그 의사는 본국으로 귀환할 때가 되어 그곳을 떠났고, 그 후 소식은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방문할 기회가 생겨 그 마을을 가보게 되었는데, 그때의 추장 아들이 어느덧 추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추장의 초대로 그 집에 방문한 의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부인이 나와서 인사를 하는데, 예전에 봤던 그 볼품없는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당당하고 아름답고 영어까지 유창하게 구사하는 멋진 여성이 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의사가 속으로 놀라워하고 있는데, 추장이 눈치를 챘는지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사실 그때 암소 한 마리면 충분히 혼인 승낙을 얻을 수 있었지요. 하지만 청혼의 순간에 암소를 몇 마리나 받느냐가 한 여인에게 있어서 평생의 자기 가치를 결정하는 일이라는 것을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 아내가 평생 자신의 가치를 암소 한 마리에 한정하며 사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제 아내를 무척 사랑했기 때문이지요. 처음에 아내는 아홉 마리의 암소를 보고 무척 당황하고 놀랐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는 자신의 가치를 아홉 마리의 암소에 걸맞게 하려고 정말이지 열심히 노력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아내에게 공부를 하라거나 외모를 가꾸라는 등의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내는 점점 더 아름다워지고 멋진 여성이 되어갔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로마서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롬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신데 다른 방법을 통해서도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 아드님을 보내 주셔서, 우리 죄를 대신 지고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암소 아홉 마리는 댈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사람인가요?
18세기 영국에 존 뉴턴(John Newton)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어린 시절 그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그의 삶은 점점 더 피폐해져 갔습니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급기야 흑인 노예를 실어 나르는 노예선의 선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예들을 태우고 대서양을 건너던 그의 배가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죽음의 위기에서 그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의 기도가 응답하였는지, 배는 기적적으로 폭풍우를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회개하고, 신학을 공부해 성공회 사제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과거를 회개하며 쓴 찬송 가사가 바로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입니다. 노래는 미국 민요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찬송가 305장).
요약하면, 악질 흑인 노예 매매업에 종사하던 사람이 회개해서 쓴 가사입니다. 그리고 존 뉴턴에게 감화받은 유력한 국회의원 윌리엄 윌버프스의 노력으로 영국에서 노예제가 철폐되고, 전 세계로 그 영향이 파급되었습니다. 즉 어떻게 보면 세계사를 바꾼 노래라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은혜가 크면 감사도 큽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함을 더 깊이 깨달을수록 감격도 비례해서 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b)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전에 죄인 중 괴수 같았던 자신을 불러 사도의 직분을 맡기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롬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앞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자신의 체험이 얼마나 큰지를 고백한 바 있습니다.
35절“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7절“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수없이 당한 핍박과 고난에도 오히려 “넉넉히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경험한 이라면 당연히 ‘나 같은 죄인을 이토록 사랑하여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자연스럽게 이웃을 향해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새계명>
예수님은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사랑하며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성령의 열매’ 가운데 첫 번째 열매가 바로 ‘사랑’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철저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열매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랑은 ‘성령을 좇아 사는 우리 성도들이 반드시 맺어야 할 성령의 첫 번째 열매’입니다.
그 열매는 우리들의 결심으로 맺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경험할 때, 그리고 성령 충만할 때에만 맺혀지는 열매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삶에 들어와 다스려주셔야 할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온전히 성령님에게 붙잡힌 바 되어 ‘사랑’의 열매를 맺고, 메마르고 살벌한 세상에 그리스도의 사랑의 온기를 전하는 삶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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