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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반도(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세르비아,루마니아,불가리아,몬테네그로,알바니아 ...)
유럽지도
발칸반도지도
발칸 반도에 특히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이 지역을 여행하면서 독특하고 경이로운 풍광에 완전히 매료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칸 지역은 앞으로 기회가 닿는 대로 구석구석 샅샅이 여행해보겠다는 야무진 꿈을 가지고 있다.
발칸은 다른 곳에서 찾기 힘든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지만 파란만장한 역사 역시 무척 흥미롭다(현지 사람들에게는 피 맺힌 역사를 흥미롭다는 표현을 써서 송구스럽지만 어쨌든, 나에게는...). 신은 발칸에 축복받은 자연을 선물했지만 대신 비운의 역사라는 대가를 치르게 한 아이러니도 흥미로웠다.
그래서 앞으로 발칸 여행에 앞서 지역의 역사를 제대로 들여다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 공부를 해보니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복잡한 발칸 역사에 대한 이해가 여행 때 큰 도움이 될 것이란 느낌이 든다. 나아가 동-서양을 아우르는 역사에 대한 이해가 높아짐을 느낀다(발칸은 한마디로 「동양과 서양의 모자이크」였다).
발칸 반도는 위 지도의 녹색 부분이 발칸 반도다.
지도를 보면 아하,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사실 발칸반도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발틱 국가(북유럽에 있는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등)와 헷갈리는 사람도 많다.
아무튼 발칸 반도에 소속된 국가는 9개국이다.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등이다.
이 중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를 제외하고 나머지 국가는 과거에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소속이었다.
따지자면 그리스와 터키(일부)도 지리적으로는 발칸반도에 속하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리스는 절대 자신을 발칸의 일원이라고 보지 않는다.
우선 다른 발칸 국가들을 업신여기는 정서가 매우 강하고 슬라브인이 주축인 대부분의 발칸국과 민족 구성이 다른 탓이다.
발칸에 대한 부정적인 정서가 강한 서유럽에서도 그리스는 별개로 취급해준다. 칸반도의 끝자락인 그리스 반도지역에 펠로폰네소스반도 이름을 붙인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또한 발칸에 소속된 터키의 영토는 전체 가운데 극히 미미한 부분이니 예외로 보는 게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발칸의 지도는 아직도 완성된 것이 아니다. 세르비아 내에 있는 코소보가 독립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화약고’라는 명성에 걸맞게 발칸의 정치적인 지형도는 미완인 것이다.발칸이란 말이 어디에서 왔는지부터 살펴보자.
발칸이란 지명은 현재 발칸 반도 북동부에 있는 발칸 산맥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발칸은 옛날 터키어(투르크)로 산맥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발칸 산맥은 사실 동어반복이다.
발칸이라고 명명한 투르크인들로서는 여러 군소 종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아웅다웅하는 이곳이 손바닥만한 곳이어서 그냥 뭉뚱그려 발칸이라고 부른 것이 아닌가 한다.참고로 발칸반도의 이탈리아 쪽 바다를 아드리아해라고 부르는 것은 알고 있을 것이다.
아드리아란 이름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의 지리학자가 당시 가장 중요한 항구 역할을 하던 포강 어귀에 자리한 아드리아라는 마을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발칸 반도의 역사를 본격 탐험하기 전에 반드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발칸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이것을 이해하면 발칸 지역 이해가 훨씬 수월해진다.
발칸반도의 본질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보다 이 지역을 정확하게 표현한 말을 아직 찾지 못했다. 모자이크란 서로 다른 여러 가지가 한데 모여 있다는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 말은 발칸 지역이 여러 종교와 문화가 복잡하게 뒤섞여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발칸에는 종교와 문화가 섞일 수밖에 없었을까.
세계 지도를 놓고 발칸 반도를 들여다보면 이유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결론적으로 발칸반도는 지리적으로 최소한 두 개 이상의 세력이 항상 대립하는 접점에 있었다는 것이다.
고대 때 로마가 동-서로 나뉠 때 발칸 반도는 정확히 ‘하프 라인’에 있었고, 나중에 합스부르크 제국과 오스만투르크가 맞장을 뜰 때도 발칸은 정확히 분기점에 있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이처럼 적대적인 민족-인종이 부딪치는 지점에 항시 위치한 운명을 수천년 동안 지속하다보니 종교, 문화, 민족, 인종 등이 모자이크를 이루지 않았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물론 중간 지대에 놓여 있다는 것이 불리한 것만은 아니다. 두 것의 장점, 예컨대 동양과 서양의 장점을 동시에 흡수하고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발칸반도의 문화가 이런 장점이 결합해 독특한 매력을 지니게 된 게 사실이다.
하지만 문화는 투쟁 속에 창조가 이루어지지만 인간은 투쟁 속에 파괴되는 존재다.
따라서 2000년 동안 종교, 문화, 인종적으로 갈등하고 싸워온 발칸 사람들이 역사 속에서 얼마나 기구한 삶을 살아왔을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 ☞ 발칸산맥의 북쪽 사면은 완만한 경사로 도나우의 저지(低地)에 이어져 있으나, 남쪽은 복잡한 모양을 이루는 몇 개의 산줄기가 그리스의 산지에 이어져 있다. 발칸 반도의 북서부는 디나르알프스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바와 같이 동(東)알프스의 연장이나, 이것은 다시 남쪽으로 뻗어 키클라데스 제도(諸島)와 크레타섬에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를 이루고 있다.
발칸 반도의 가혹한 자연조건과 각지의 고립적인 경향은 역사적인 후진성과 더불어 각지에 매우 낡은 생활양식, 고립된 민족전통을 남기는 원인이 되고 있다. 선사시대(先史時代)부터 발칸 반도에는 수많은 민족이 이동해 왔으며, 고대 그리스 문명을 짊어진 여러 민족도 발칸 반도를 통과했으리라고 생각된다. 6세기에 슬라브인(人)과 터키인이 침입하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슬라브인은 발칸 반도의 북부주민의 주요한 인종적 ·문화적 요소를 이루고 있다.
루마니아는 언어적으로는 라틴계이나, 인종적으로는 슬라브의 요소가 짙다. 남부의 그리스는 문화적으로 고대 그리스의 전통을 계승한다고 할 수 있으나, 인종적으로는 터키 ·슬라브 등 역사상 몇 차례나 반복해서 침입해온 여러 민족의 피가 많이 섞여 있다. 발칸 반도는 정치적으로 유럽에서 가장 불안정한 곳으로 되어 있으나, 이것은 발칸 반도가 끊임없이 외부세력의 지배를 받았고, 여러 민족의 침입을 받아왔다는 역사적인 사정에 연유되고 있다.
발칸 반도의 대부분은 그리스 북부에 있는 마케도니아 출신인 알렉산드로스 대왕 때 그의 정치적 영역하(領域下)에 들어갔으나, 그 후는 로마 ·비잔틴 ·투르크 혹은 해안 연변 지대에 있는 베네치아 등 외부세력의 지배를 받았으며, 근대에 이르러서도 오스트리아 ·러시아 ·영국 ·이탈리아 등 여러 세력의 직접 혹은 간접적인 영향을 받아왔다.
19세기에 러시아가 터키 세력을 물리친 무렵부터 그리스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 몇 개의 민족국가가 형성되었으나, 민족 간의 대립과 열강(列强)의 간섭의 격화는 발칸 반도로 하여금 유럽의 화약고(火藥庫)라고 일컫게 되었다.
마침내 제1차 세계대전 후 소위 민족자결원칙에 따라 몇 개의 독립국이 탄생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때에 그 대부분이 나치스 독일의 침략을 받았다. 전후에는 남쪽의 그리스를 제외한 지역에 구(舊)소련의 영향 밑에 불가리아 ·루마니아 ·알바니아 ·유고슬라비아 등의 인민공화국이 탄생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발칸 반도는 정치적으로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민족 간의 갈등이 표출되지 않았으나, 1980년대 말 이후 구소련의 사회주의가 쇠퇴하면서 국제적 관심의 초점지역으로 재등장하였다. 예를 들면, 유고슬라비아는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등 6개 공화국으로 이루어진 연방공화국이었으나, 1990년대 초를 지나면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등이 독립함으로써 유고연방이 축소되었다. 2006년에는 신유고연방을 구성하였던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분리되었다.
또한 각 공화국에 분포하는 소수 이민족 집단에 대한 다수 민족의 적대행위가 심각한 국제문제가 되고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발칸 반도는 유럽의 후진지역에 속하며, 각국의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농업의 비중이 매우 크다.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만 해도 부재지주(不在地主)에 의한 토지 소유제가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어 빈부(貧富)의 차이가 컸으며, 문맹률(文盲率)도 높았었다. 전후 자본주의 체제하에 있는 그리스와 사회주의 체제하에 있는 기타 제국(諸國)과는 그 방법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있지만, 서로 공업화에 힘써 일단은 중공업도 다소 일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발칸 반도 제국의 무역구조를 살펴보면 농산물과 농산물 가공품 혹은 광산물의 수출을 주로 하는 후진국형(後進國型)을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 슬라브계(系) 여러 나라 간의 언어상(言語上)의 차이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문화적 차이, 정치적인 대립 등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한편 도로의 건설 등으로 다소 해소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각 지역의 고립적인 경향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어서 이것 또한 발칸 제국의 경제적인 발전을 저해하는 큰 원인의 하나가 되고 있다.
● 유고슬라비아 내전
내전은 1991년 6월 27일 유고슬라비아 연방군이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막기 위해 슬로베니아를 침공함으로써 시작되어, 슬로베니아 → 크로아티아 → 보스니아 → 코소보 등지로 싸움터를 옮겨가면서 벌어졌다. 그 사이 주요 민족의 분포에 따라 6개 공화국, 2개 자치주로 이루어졌던 유고슬라비아 연방국은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신유고연방·마케도니아로 분리 독립되어, 민족간 대립을 격화시켰다.
〈슬로베니아 내전〉 인구의 90% 이상이 슬로베니아인으로 구성된 슬로베니아를 지배할 명분이 없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10일간의 전투 끝에 이들의 독립을 사실상 묵인하고 철수하였다.
〈크로아티아 내전〉 크로아티아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나자 1992년 4월 1만 4000명 규모의 유엔 평화유지군이 파견되어 완충 역할을 하였으나 유혈 충돌이 계속되었다. 세르비아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크로아티아인의 극단적 민족단체인 우스타샤가 세르비아인 50여 만 명을 학살하였기 때문에 크로아티아가 독립할 경우 이 지역에 소수민족으로 남을 세르비아계 주민이 다시 학대를 받을까 우려하여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막은 것이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전〉 인구 450만 명의 보스니아는 이슬람계 43%, 세르비아계 32%, 크로아티아계 17% 등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중 이슬람계와 크로아티아계가 독립을 강행하자 세르비아계는 민족별 분리를 주장하여 무장 반란을 일으켰다. 이 지역의 내전은 다른 민족에 대한 '인종청소'의 양상을 띠어 방화·살상·강간이 자행되어 1995년까지 25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코소보 내전〉 세르비아 공화국의 코소보주(州) 주민의 90%를 차지하는 알바니아계 주민은 세르비아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여 코소보 해방군을 조직하였고, 세르비아 보안군은 이들을 색출한다는 구실로 알바니아인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이 지역에서의 '인종청소'를 경고하여 온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유고슬라비아가 이를 묵살하자 1999년 3월 24일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공습을 단행하여 계속 압력을 가하였다. 이 지역에서의 인명 피해는 아직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며 알바니아계 난민은 40∼50만에 이르러 인근 마케도니아 등지로 피난하였다.
코소보 지역을 제외한 유고슬라비아 내전은 1995년 12월 파리에서 세르비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의 세 대통령이 평화협정에 조인함으로써 표면상 종식되었으나 크고 작은 30여 민족과 여러 종교가 혼재한 이 지역은 여전히 그 분쟁의 씨를 안고 있다.
● 코소보 사태
코소보는 알바니아계 주민이 전인구의 80% 가까이를 차지하지만 영토는 신유고연방에 속해 있는 자치주이다. 그래서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세르비아로부터의 분리독립을 바라고 있었다. 1998년 3월 초 코소보의 알바니아 분리주의 반군들이 세르비아 경찰을 공격하면서 코소보사태가 시작되었다.
보스니아내전의 종식으로 한 동안 잠잠하던 발칸반도가 다시 전화(戰火)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세르비아 경찰은 즉각 반격에 나서 반군은 물론, 반군 거점지역의 주민들을 대량학살하였다. 이에 맞서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코소보해방군(UCK)을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1998년 3월 31일 국제연합(UN)은 유고연방에 대한 무기금수조치를 내렸으며, 1998년 4월 세르비아의 탄압에 대한 알바니아계 주민의 시위가 확산되었다. 세르비아는 1998년 5월 3일 대규모 소탕작전을 전개하여 수십 명의 알바니아계 반군을 사살하고, 알바니아계 주민들을 대상으로 이른바 인종청소작전을 펼쳤다.
이를 피해 코소보로부터 탈출하는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러시를 이루었고, 난민수는 1999년 1월 현재 30만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1998년 6월 코소보사태에 대한 개입을 선언한 미국과 유럽연합은 나토(NATO) 병력을 코소보 주변에 배치하고 코소보로부터의 세르비아 병력의 철수, 잔혹한 인종청소의 중단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세르비아군은 이를 무시하고 1998년 8월 코소보해방군의 주요거점을 함락시켰다. 1998년 10월 나토는 세르비아에 대한 무력 사용을 결정하였다. 그러자 세르비아의 밀로셰비치 대통령은 1999년 2월부터 3월 말까지 몇 차례에 걸쳐 서방측과 코소보 평화협상을 가졌다.
그러나 협상은 모두 실패로 끝나고, 3월 24일 나토는 유고연방에 대한 공습을 시작하였다. 6월 3일 마침내 세르비아 의회가 유엔(UN)의 평화계획를 승인하였다. 6월 5일부터 나토와 유고연방간에 군사회담이 열렸고, 9일에는 군사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나토의 유고공습이 시작된 이래 11주간 계속된 코소보사태는 수습되고 평화안 이행에 들어갔다.
● 카라지치 [Radovan Karadžić, 1945.6.19~]
1945년 6월 19일 구(舊)유고슬라비아연방에 속한 몬테네그로사회주의공화국의 페트니차 출신인 카라지치는 보스니아내전의 전범이다. 스르프스카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 보스니아내전을 주도하여 당시 자행된 잔혹한 '인종청소'의 주범 가운데 한 사람으로 수배된 지 13년 만인 2008년 7월 21일 체포되었다.
그는 1960년 유고슬라비아의 사라예보로 이주한 뒤 사라예보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정신의학을 공부하였고, 1970년 덴마크의 네스트베드병원에서 신경성 장애와 억압에 대하여 공부하였다. 1974~1975년 미국 뉴욕의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의학 수련을 쌓은 뒤 유고슬라비아로 돌아와 코세보병원에서 근무하였으며, 세르비아의 민족주의 작가 도브리차 초시치(Dobrica Ćosić)의 영향을 받아 시인으로도 활동하는 한편, 그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하였다.
1989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세르비아민주당(Serbian Democratic Party) 창당에 참여하였고, 1991년 세르비아인만으로 구성된 보스니아-세르비아의회를 주도하였다. 1992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국민투표를 통해 유고슬라비아연방으로부터 독립을 결정하자, 보스니아-세르비아의회는 이를 따르지 않고 사라예보를 수도로 하는 스르프스카공화국을 창설하여 연방에 잔류하였다. 카라지치는 스르프스카공화국의 대통령에 취임하여 유고연방의 지원을 받아 내전을 주도하였다.
보스니아내전은 1992년부터 1995년까지 계속되었으며, 이른바 '인종청소'라는 학살이 자행된 가운데 약 25만 명이 사망하고 300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하였다. 특히 1995년 7월에는 유엔이 안전지대로 선포한 스레브레니차에서 8000명에 가까운 이슬람계 주민들이 학살되었는데,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자행된 최악의 학살사건으로 불린다.
1995년 12월 국제사회의 개입으로 보스니아내전은 봉합되었으나 카라지치는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에 의하여 집단학살과 전쟁법규 위반, 사유재산 침탈 등 16개 항목의 범죄 혐의로 기소되어 지명수배되었다.
카라지치는 13년 동안 추격망을 피해오다가 2008년 7월 21일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체포되어 국제형사재판소가 있는 네덜란드로 후송되었다. 체포되기 전까지 카라지치는 베오그라드에서 백발에 긴 수염으로 모습을 바꾸고 '드라간 다비치'라는 가명으로 대체의학과 심리치료를 하는 사설 병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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