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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2) 2024. 4. 14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사도행전1:6-8
지난 시간 살펴본 대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 동안 이 땅에 머무셨습니다.
<40일 동안> 40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중요한 변화의 순간마다 반복되는 숫자입니다. 4는 땅의 수인데(3은 삼위일체로 하늘의 수, 4는 동서남북으로 땅의 수), 10이라는 만 수(완전수)를 곱한 수입니다. 신구약에 나타난 40일 기사를 찾아보면, 대체로 어떤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준비 기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구약에서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 홍수가 40일간 내릴 것이라 말씀하였고(창7:4), 모세도 시내 산에서 40일간 기도하고 율법을 받았습니다(출24:18, 34:28).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는, 출애굽 후 이스라엘은 40년간 광야에서 유랑생활을 하는 벌을 받았습니다(민14:33~34). 블레셋 장수 골리앗이 이스라엘 백성과 40일간 싸우다가 다윗의 물맷돌에 맞아 넘어짐으로 이스라엘이 대승리를 얻었습니다(삼상17:49). 엘리야가 천사가 공급한 떡과 물을 먹고 호렙산까지 간 날수도 40일입니다(왕상:19:4~8). 요나도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질 것이라고 외쳤습니다(욘3:4).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40일간 광야에서 금식기도 하시고 시험을 이기신 후 공생애에 들어갔다고 증언합니다(마4:2). 오늘날 교회력에서도 사순절(주일을 뺀 40일)을 고난의 절기로 지킴으로 주님의 부활을 기다립니다. 이와 같이 40일은 어떤 큰 변화가 있기 전에 놓여진 중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 이후 40일도 그의 승천을 준비하는 특정한 기간으로 볼 수 있습니다. |
예수님은 40일 동안 이 땅에 남아계시면서, 대략 세 가지를 증거 하셨습니다.
1) 자신의 부활하심을 친히 나타내셨습니다. 2)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의 일’은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일입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주님은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복음’을 설명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의지와 힘만으로는 이 구원의 복음을 온전히 전하기 어려움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명령을 주셨습니다. 3)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성령님을 기다렸습니다.
<사도들의 질문>
드디어 40일이 지나고,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가 다가왔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주님께서 승천하시던 당일의 이야기입니다.
6절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마지막 날 예수님은 제자들과 모임을 가지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하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오직 메시아를 통해서 이스라엘 나라를 정치적으로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킬 때가 바로 지금이냐는 질문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통적인 해석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독립은 당시 제자들뿐 아니라 모든 유대인의 소원이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가 일본의 억압을 받을 때 민족 해방과 독립을 바라던 우리 민족의 바람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정치적인 메시아’로 오시지 않았음을 지속적으로 가르치셨지만, 제자들의 정치적인 독립에 대한 열망은 식을 줄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죽음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면 능히 자신들의 독립의 꿈을 이루어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더불어 예수님이 그 역사를 이루시는 날 자신들도 틀림없이 높은 자리 하나씩 차지할 것이라는 야망도 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번 강해를 준비하면서,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독립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줄곧 가르치셨던 그 ‘하나님 나라’가 이스라엘에 임할 때가 바로 이 때입니까?”라는 질문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메시지 성경(유진 피터슨 목사)으로 읽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Master, are you going to restore the kingdom to Israel now? Is this the time?” 정관사 the를 붙여 ‘the kingdom’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직역하자면, ‘이스라엘에 그 나라를 회복하실 때가 지금입니까?’입니다.
여기에서 ‘그 나라’는 앞의 3절에 언급된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주님께서 공생애 기간 내내 선포하셨던 ‘하나님 나라’, 그리고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내내 가르치셨던 그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구원의 복음이 완성되는 순간이 바로 ‘이 때입니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의 질문은 정치적인 수준을 뛰어넘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기초한 보다 성숙한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7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예수님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은 이스라엘 안에서만 이루어져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원의 복음은 모든 민족과 나라들에게 전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열방에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목적입니다.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님은 공간적인 제한을 받고 계셨기에 많은 사람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시간이 필요합니다. 듣지 못해 망하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전파할 증인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때와 시기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때’와 ‘시기’는 각각 헬라어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를 번역한 것입니다. ‘크로노스’는 연대기적으로 차례대로 흘러가는 시간을 말하고, ‘카이로스’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건으로 개입하는 시간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신 것이나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나 모두 하나님이 정하신 특별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크로노스의 시간이 흐른다고 당연히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정하신 때에 특별하게 또한 갑작스럽게 개입하심으로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하여 얼마나 오랜 ‘크로노스’의 시간이 흘러야 하는지, 또는 어떤 특별한 ‘카이로스’의 사건으로 임하시게 될는지,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절대 권한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알 수도 없고, 알려고 해서도 안 되고, 또한 바꾸려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때와 시기는 하나님이 정하실 일이요 하나님의 몫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은 사도들(우리 성도들)이 해야 할 사명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마태는 이 예수님의 이 마지막 명령을 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마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찰 때까지, 열방이 하나님께 돌아올 때까지 사도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일은 우리 모두의 사명입니다. 사명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이 일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고 이다음에 하나님 앞에 서는 날, 결산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일을 위해서 부름 받았고 그 일을 위해 성령님과 각종 은사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전파의 동선>
한편, 예루살렘에서 땅 끝까지 진행되는 복음전파의 동선에서도 큰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단순히 생각하면, 이러한 진행 방향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였을 때 가까운 데서부터 점점 먼 곳을 향하여 확장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 하나의 지명을 묵상해보면 더 깊은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제일 먼저 언급된 ‘예루살렘’은 어떤 곳입니까?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곳입니다. 한 마디로 ‘원수의 도시’입니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무너지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루살렘 성 바깥에서부터’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원수의 성읍’에도 은혜의 복음이 전해져야 함을 명령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 여러분을 힘들게 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아니 원수 같은 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 구원받아도 저 사람만큼은 구원받지 못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오히려 그 사람에게 긍휼의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손양원 목사님 일대기- 1939년 전남 여수시에 있는 애양원 교회에 재직했습니다. 애양원은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치료-수용 시설로 이곳에서 손 목사는 환자들에 대한 기독교 전도와 환자 구호를 위한 봉사 활동에 전념했습니다. 그러던 중, 1948년 발생한 여순사건 때 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두 아들이(손동인,손동신) 기독교도라는 이유로 반란군 세력에 의해 살해당한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훗날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이는데 주동자 역할을 했던 안재선이라는 청년을 자신의 양자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원수이지만 그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구원한 것입니다.
'온 유대'는 자기 동족을 의미합니다. 가까운 사람들 가족과 형제들에게 먼저 복음이 전해져야 합니다.
‘사마리아'는 앗수르의 침략으로 혼혈화 되어 무시당하고 그러니까 서로 무시하는 관계입니다.
거리로는 가장 가깝지만, 마음으로는 이방보다 더 먼 곳이 사마리아입니다.
우리로 치면, 일본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땅 끝'은 어디일까요?
영어로는 ‘땅 끝’을 단순하게 ‘the ends of the earth’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에서 ‘the ends’가 복수형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땅 끝이 한 곳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는 이미 정해진 곳이지만, 땅 끝은 정해지지 않은 불특정 다수의 지역인 셈입니다. 바로 이방의 여러 땅, 곧 모든 민족과 족속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어떤 이들은 지구를 한 바퀴 돌면 내가 선 자리로 돌아오니 내가 선 곳에서 땅 끝이라고 해석합니다.
좋은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선 곳이 땅끝이라는 심정으로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선 곳, 나의 가정, 나의 직장이 바로 땅 끝이라는 말입니다. 이곳에서 내가 예수의 증인으로 살지 않는다면, 다른 곳에 가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그러면 어떻게 이 귀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명 감당의 비결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습니다. 그 권능은 '두나미스, 즉 다이너마이트 같은 폭발력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심으로 받게 되는 ‘권능’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요?
우리는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능력’과 ‘권위’를 허락하던 장면을 다룬 적이 있습니다.
눅9:1-2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 보내시며….”
그들에게 주신 능력과 권위는 ‘하나님의 나라 전파’(preaching)와 ‘치유사역’(healing)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또 70명의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시면서, 그냥 내보내지 않으시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과 ‘권위’를 주셔서 내보내셨습니다. 파송되었던 현장에서 돌아온 제자들이 실습 보고를 하는 장면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10:17).
이 두 장면 모두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허락해주셨던 ‘능력과 권위’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얻는 능력과 권위였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을 경험했었습니다.
그러면 그때 주님께 허락받은 ‘능력과 권위’는 성령의 임재로 주어지는 ‘권능’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왜 굳이 성령이 주시는 권능이 제자들에게 새롭게 필요한 것일까요?
그 답은 오늘 본문에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권능을 받는 목적이 분명합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내 증인’, 즉 ‘주님의 증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증인’이란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바를 있는 그대로 법정에서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증인이란 주님에 대해서 보고 들은 바를 그대로 증언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누가는 이미 누가복음에서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눅24:46-48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주님의 증인’이란 ‘주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증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자신들의 경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무슨 ‘권능’이 필요한 것일까요? 그냥 보고 들은 대로 말하면 그만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증인이 되는 일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오직 진리와 사실을 말하려면 큰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특히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언하는 일은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증언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입을 막으려고 하는 세상 권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증인’의 희랍어 ‘마르투레스’는 ‘순교자’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증인’은 ‘순교자’가 될 각오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목숨을 걸고 증언할 수 있으려면 성령님께서 주시는 권능을 받아야 합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능력과 권위로 병을 치유하고 귀신을 내쫓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그들은 주님을 부인하고 비겁하게 도망가지 않았습니까? 반면에, 스데반을 보십시오. 그는 죽음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 당했습니다. 그 현장을 목격했던 바울은 후에 스데반을 가리켜 ‘주의 증인 스데반’(행22:20)이라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또한, 베드로와 나머지 제자들도 후에는 모두 순교자가 되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무슨 차이입니까? 무엇이 한때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에 급급했던 그들을 순교를 마다하지 않는 그런 용기 있는 사람으로 바꾸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성령의 권능입니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심으로 그들은 증인이 되는 권능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와 같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권능을 가진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그를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해지게 하셨던 것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음식을 구경하는 것과 밥을 먹는 것은 다릅니다. 냄새를 맡았다고 배부르지 않습니다.
교회에 출석한다고 저절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입술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정하고’, 마음으로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교회에 출석한다고 저절로 능력 있는 증인 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을 마음에 영접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영으로 내 몸에 오시는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이 여러분 안에 임재하기 시작할 때, 내 삶에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십자가가 부끄러워지지 않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됩니다.
롬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됩니다. ‘증인’ 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성령의 권능을 받아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의 복음을 증언하는 ‘증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