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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강해(2) 2024. 7. 3
내가 오늘 그대로 행하리라
왕상1:11-31
사무엘상하가 그렇듯, 열왕기상과 하는 원래 한 권이었습니다. 내용이 워낙 많아서 헬라어로 번역될 때 상권과 하권으로 나누었는데, 기독교는 그 전통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열왕기’라는 말은 ‘열 명의 왕에 대한 기록’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이름에 사용된 한자 ‘列’(벌일 렬)은 ‘열거하다’에 사용된 한자와 같은 것입니다. ‘여러 왕’ 혹은 ‘모든 왕’이라는 뜻입니다(영어 성경의 제목 - ‘The Book of Kings’).
열왕기 상하(22장, 25장) 전체가 47장인데, 무려 11장이 솔로몬 왕에 대한 기록입니다(앞의 2장에서 다윗의 말년에 대한 기록, 왕위를 물려받는 과정, 그리고 다윗의 유언). 나머지 36장이 400년 동안 이어진 남왕국 유다(르호보암에서 시드기야까지 20명의 왕)와 북이스라엘의 왕(여로보암에서 호세아까지 19명의 왕)에 대한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모든 왕조에는 왕의 역사를 기록한 실록이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도 ‘조선왕조실록’이 있습니다. 사관이 항상 옆에 있어, 왕이 다스리던 시대의 정치, 문화, 사회의 각 사건에 대한 기록은 물론이고, 왕의 모든 일거수일투족까지 기록합니다. 그 내용은 왕도 볼 수 없습니다(그래서 실록을 ‘지우개를 쓰지 않는 역사’라고 말합니다).
현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통령실에서 행해지는 모든 회의와 행사에 속기사가 있어 모든 것을 기록하고, 보관합니다.
당시에는 ‘유다 왕 역대지략’과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이라는 방대한 역사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열왕기라는 또 하나의 역사책을 기록한 것일까요?
예, 같은 자료를 가지고 있지만, 그 시대적 상황에 따라 해석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史觀 - 어떤 자료를 선택할지는 저자의 몫). 사무엘서와 열왕기서는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동안에 쓰였습니다. 이 역사를 기록하면서 저자는 “왜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과 유다가 이와 같은 재앙을 당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려 합니다. 즉 역사를 읽으면서 이스라엘과 유다가 실패한 원인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리되면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열왕들의 잘못까지 가감 없이 그대로 기술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우상숭배하고, 이방 여인과 혼인하는 등 각가지 잘못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한 것입니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선지자(엘리야, 엘리사)들의 활동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즉 이스라엘의 고난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순종에서 기인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신명기 사관).
반면, 역대기는 바벨론으로 포로가 잡혀가 있던 유대인들이 70여 년의 포로 생활을 끝내고 다시 유다 땅으로 돌아온 후에 쓰였습니다. 바벨론은 한 나라를 점령하면 그 나라가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무력화시키는 정책을 썼습니다. 그 방법이 왕족이나 지도급에 있는 인사들을 모두 바벨론으로 이주시켜 포로로 살게 한 것입니다. 본토에 남은 사람들이 구심점이 없어 힘을 쓰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포로로 끌려갔던 유대인들이 고국으로 돌아갔을 때 유다 땅은 폐허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재건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버려진 땅을 다시 개간하여 먹고 살기에도 벅찬데 무슨 힘과 돈이 있어서 성벽을 쌓고 성전을 재건하겠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역대기 저자는 기도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패배감과 절망감에 짓눌려 있는 유대 백성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까? 그렇게 기도하고 방법을 찾던 중에 ‘역사를 다시 쓰라’는 영감을 받았겠지요. 역사를 통해 희망의 이유를 찾아야 했습니다. 역사를 새로 쓰기로 결심한 저자는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자는 족보에서 그 해답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아담부터 시작하는 방대한 족보를 기록하였습니다(1장부터 9장까지). 성경을 읽으면서 족보를 만날 때마다 괴롭습니다만, 역대기의 족보는 그중에서도 최강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면서 시작된 역사가 자신들에게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을 읽으면서 그들은 거룩한 전율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지금의 자신들의 형편이 초라하고 가난해도 아담에서 아브라함으로, 그리고 이삭과 야곱에서 자신들에게로 이어지는 족보를 보면서 새로운 자긍심을 갖게 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역대기를 족보로 시작한 이유입니다.
그리고 저자의 특별한 관심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시대였고, 특히 하나님의 성전이 최초로 세워진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다윗의 40년 통치를 기록하면서 다른 업적들은 간단히 요약하고, 주로 성전과 관련된 이야기만을 기록합니다. 다윗은 오직 성전 건축 준비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역대기 하에 기록된 솔로몬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1장부터 9장까지 나오는 솔로몬의 이야기는 거의 전부가 성전 건축 이야기입니다. 결국, 저자는 다윗과 솔로몬을 통해 지어진 성전에 관심을 두고 역사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앞에서 말했듯이, 역대기는 유다 백성이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을 끝내고 유다 땅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기 전 혹은 동안에 쓰였습니다. 성전 건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럴 만한 자원도 부족했고, 그럴 만한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유대인들에게는 용기가 필요했고 또한 동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다윗과 그의 백성이 성전 건축 준비를 위해 얼마나 정성을 다했는지, 그리고 솔로몬이 성전을 얼마나 영광스럽게 지었는지를 기록한 것입니다. 다윗과 솔로몬 왕이 그렇게 정성을 기울인 일이라면, 그들도 역시 마음과 정성과 뜻과 힘을 다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역대기 사관). 이렇게 하여 재건된 성전을 ‘제 2성전’(스룹바벨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훗날, 주전 20년에 헤롯 대왕이 대대적인 성전 수리 공사를 시작했는데, 그것을 ‘헤롯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그 성전은 주후 70년에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아도니야의 반역>
천하의 다윗도 이제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않은 나이”가 되었습니다(70세).
당시의 이방 왕들은 젊은 처녀를 구해서 품고 자는 것으로 자신의 몸을 따뜻하게 하는 풍속이 있었는데, 다윗의 신하들도 이 풍속을 생각하고, 다윗에게 제안하였습니다. 다윗은 이를 허락하였고, 결국 수넴 여자 ‘아비삭’을 데려옵니다.
이렇게 다윗의 영향력이 현저하게 하락하자(‘레임덕’), 넷째아들 아도니야가 반역을 도모하였습니다(왕위 계승 서열 1위). 그는 전에 압살롬이 일으켰던 반역의 방식을 그대로 따릅니다.
① 압살롬처럼 ‘병거와 기병과 호위병 오십 명’을 준비했습니다(삼하15:1)(왕위를 계승할 자로서의 권위를 드러냄)
② 아도니야는 형 압살롬처럼 용모가 준수하여 사람들의 호감을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아도니야는 다윗의 헤브론 시절에 태어난 인물이기 때문에, 당시 그의 나이는 35~36세가량 되었을 것입니다. 아직 소년이었던 솔로몬에 비해볼 때 참으로 그가 왕이 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③ 아도니야는 군대장관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을 수하로 끌어들일 만큼 뛰어난 정치력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준비를 마친 아도니야는 반역을 실행에 옮깁니다. 예루살렘 남쪽 근방의 ‘에느로겔’이란 곳에서 큰 잔치를 베풀고 다른 모든 왕자와 신하들을 초청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비밀에 부칩니다.
<밧세바에게 소식을 전한 나단>
이 소식을 들은 선지자 나단은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를 찾아갑니다.
11~12절 “나단이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에게 말하여 이르되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왕이 되었음을 듣지 못하였나이까 우리 주 다윗은 알지 못하시나이다/ 12 이제 내게 당신의 생명과 당신의 아들 솔로몬의 생명을 구할 계책을 말하도록 허락하소서.”
반역의 소식을 처음 들은 사람은 나단이었습니다. 나단은 다윗이 아닌 밧세바를 찾아갔습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아도니야의 초청 모임이 ‘다윗의 허락’ 하에 일어난 일인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지금 다윗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인물은 바로 밧세바입니다.
우선 밧세바는 다윗의 침실에 자유로이 들어갈 수 있는 왕비의 신분이고, 친아들인 솔로몬의 일에 가장 헌신적일 수 있는 인물이었고, 다윗에게 결단을 촉구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도니야의 반역이 성공하게 된다면 솔로몬과 밧세바의 생명만 위험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 편에 서 있는 자신도 큰 해를 입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대 절대 군주 체제 하에서 반란을 일으켜 왕권을 잡은 자는 자시의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주변의 위험인물들을 가차 없이 처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특히, 전왕(前王)이나 그 가족과 측근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아도니야의 반역을 물리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우선적으로 밧세바를 찾아갔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나단의 이러한 행동은 매우 지혜로운 것이었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밧세바와 솔로몬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계책을 알려줍니다.
13~14절 “당신은 다윗 왕 앞에 들어가서 아뢰기를 내 주 왕이여 전에 왕이 여종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네 아들 솔로몬이 반드시 나를 이어 왕이 되어 내 왕위에 앉으리라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그런데 아도니야가 무슨 이유로 왕이 되었나이까 하소서/ 14 당신이 거기서 왕과 말씀하실 때에 나도 뒤이어 들어가서 당신의 말씀을 확증하리이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다윗이 솔로몬을 차기 왕으로 세우리라는 계획을 이미 밧세바에게 밝혔다는 것입니다. 나단도 알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서에서는 이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나단 선지자의 예언에서 힌트만 줄 뿐이었습니다.
삼하 7:12-17(성전을 지으려는 다윗의 계획을 거절하셨지만, 그 마음을 기쁘게 받으신 후 축복하심)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3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14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17 나단이 이 모든 말씀들과 이 모든 계시대로 다윗에게 말하니라.”
그런데 역대상에 보면 다윗은 ‘네 몸에서 날 네 씨’가 ‘솔로몬’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대상22:7~10 “다윗이 솔로몬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으나/ 8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9 보라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그는 온순한 사람이라 내가 그로 주변 모든 대적에게서 평온을 얻게 하리라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그의 생전에 평안과 안일함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 10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지라 그는 내 아들이 되고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어 그 나라 왕위를 이스라엘 위에 굳게 세워 영원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니.”
사실 솔로몬을 차기 왕으로 세우는 일은 사실 다윗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작하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그에게 아들 솔로몬이 태어나리라는 것과 그를 통해서 성전이 건축될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실을 다윗이 솔로몬에게 알리던 시점은 언제였을까요? 역대기 기록에 따르면 다윗의 인구 조사 사건 후입니다. 하나님은 전염병의 심판을 그치기 위해 다윗에게 아라우나(오르난)의 타작마당을 사서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장차 성전이 바로 그곳에 세워지리라는 걸 다윗은 알아차립니다(대상22:1). 그리고 성전 건축에 필요한 자재를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어느 정도 준비가 된 후에 다윗은 솔로몬이 차기 왕으로서 성전 건축을 완성해야 할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준 것입니다. 짐작하건대 다윗이 솔로몬에게 왕위 계승 문제와 성전 건축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바로 그 자리에 밧세바와 나단이 함께 배석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공개적으로 솔로몬을 후계자로 공포하지는 않은 상태였던 것입니다.
왕궁에 비밀은 없습니다. 아마도 차기 왕에 대한 다윗의 의중은 공공연한 비밀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시 말해서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아도니야는 이 사실을 듣고 분노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에게 왕위가 넘어가기 전에 쿠데타를 일으킨 것입니다.
지금 나단 선지자는 밧세바에게 다윗 왕에게 가서, 약속한 대로 왕위 계승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주문하라는 것입니다.
<다윗 왕에게 나아간 밧세바>
밧세바는 나단의 말을 듣는 즉시 다윗 왕을 찾아갔습니다.
15-18절 “밧세바가 이에 침실에 들어가 왕에게 이르니 왕이 심히 늙었으므로 수넴 여자 아비삭이 시중들었더라/ 16 밧세바가 몸을 굽혀 왕께 절하니 왕이 이르되 어찌 됨이냐/ 17 그가 왕께 대답하되 내 주여 왕이 전에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켜 여종에게 맹세하시기를 네 아들 솔로몬이 반드시 나를 이어 왕이 되어 내 왕위에 앉으리라 하셨거늘/ 18 이제 아도니야가 왕이 되었어도 내 주 왕은 알지 못하시나이다.”
밧세바는 다윗의 ‘침실’로 찾아갔습니다. 아마도 다윗이 건강의 문제로(심히 늙었으므로) 바깥출입을 하기 힘든 상태였지 않나 생각됩니다. 밧세바는 나단이 가르쳐준 대로 다윗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나단이 가르쳐준 말이라고 해서 사실과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다윗은 분명히 밧세바와 솔로몬에게 그렇게 약속했습니다. 단지 그 약속이 아직 실현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밧세바는 지금 아도니야가 반역을 꾀하고 있음을 알립니다.
더 늦기 전에, 다윗에게 그의 뒤를 이을 차기 왕을 빨리 공포해달라고 요구합니다.
20~21절 “내 주 왕이여 온 이스라엘이 왕에게 다 주목하고 누가 내 주 왕을 이어 그 왕위에 앉을지를 공포하시기를 기다리나이다/ 21 그렇지 아니하면 내 주 왕께서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나와 내 아들 솔로몬은 죄인이 되리이다.”
‘온 이스라엘이 왕에게 주목한다’라는 말은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과연 누가 다윗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위를 차지할까 궁금해했습니다. 그 권한은 다윗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밧세바는 아도니야가 왕이 되면 다윗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함부로 솔로몬을 제거하려고 덤벼들지 않겠지만, 다윗이 죽고 나면 자신과 솔로몬이 ‘죄인’이 될 것이라 말합니다(‘열조와 함께 잔다’, 또는 ‘열조에게로 돌아간다’는 표현은 통상 위대한 인물이나 왕의 죽음을 완곡하게 표현할 때 종종 사용하는 성경의 독특한 관용어입니다.). 여기에서 ‘죄인’은 단순히 ‘죄를 범한 사람’이 아니라 왕위 경쟁에서 실패한 자가 받게 되는 ‘반역자’를 뜻합니다. 아도니야는 자신의 정적인 솔로몬을 반역자로 몰아서 처형할 게 분명합니다. 그러니 결국 밧세바와 솔로몬의 생명은 지금 다윗의 결정에 달린 셈입니다.
<나단의 목숨을 건 담판>
바로 이때 약속대로 나단이 다윗을 찾아옵니다.
22~27절 “밧세바가 왕과 말할 때에 선지자 나단이 들어온지라/ 23 어떤 사람이 왕께 말하여 이르되 선지자 나단이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왕 앞에 들어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왕께 절하고/ 24 이르되 내 주 왕께서 이르시기를 아도니야가 나를 이어 왕이 되어 내 왕위에 앉으리라 하셨나이까/ 25 그가 오늘 내려가서 수소와 살찐 송아지와 양을 많이 잡고 왕의 모든 아들과 군사령관들과 제사장 아비아달을 청하였는데 그들이 아도니야 앞에서 먹고 마시며 아도니야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였나이다/ 26 그러나 왕의 종 나와 제사장 사독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왕의 종 솔로몬은 청하지 아니하였사오니/ 27 이것이 내 주 왕께서 정하신 일이니이까 그런데 왕께서 내 주 왕을 이어 그 왕위에 앉을 자를 종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나이다.”
선지자 나단 - 선지자 나단은 다윗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단은 다윗의 성전 건축 계획을 솔로몬에게 넘겨주도록 하였고(삼하 7:4-170, 밧세바를 취한 일로 다윗을 꾸짖기도 하였습니다(삼하 12:1-14). 그리고 솔로몬 출생시 하나님의 명으로 솔로몬에게 '여디디야'(‘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라는 이름을 붙여 준 일이 있으므로, 일찍부터 나단은 솔로몬이 다윗 왕의 후계자가 될 것임을 암시하였습니다(삼하 12:24~25). |
나단이 들어서자 밧세바는 물러납니다. 어떤 이들은 나단과 밧세바가 상호 공모했다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라고 해석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왕의 허락 없이는 제삼자가 함께할 수 없는 궁중 예법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Keil).
다윗과 단둘이 남은 나단은 다윗에게 분명히 묻습니다. ‘아도니야가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사람이라’고 선포했느냐고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사람들이 ‘아도니야 왕은 만세 수를 하옵소서’하고 외치고 있는 것이냐고 묻습니다. 이 말은 새로운 왕의 즉위할 때, 백성들이 함께 외치는 말입니다. 나단은 자신에게도 알리지 않고 이 일을 결정했느냐고 서운한 감정을 표출합니다.
사실 나단 선지자는 앞뒤 전후를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나이 많은 다윗이 약속을 잊고 아도니야를 왕으로 선포했을 수도 있습니다. 나단 입장에서도 생명을 건 담판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정말 큰일이 난 것입니다.
<다윗의 뒤늦은 선포>
그동안 아무런 생각 없이 지내던 다윗은 나단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 즉시 밧세바를 불러들여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8~30절 “다윗 왕이 명령하여 이르되 밧세바를 내 앞으로 부르라 하매 그가 왕의 앞으로 들어가 그 앞에 서는지라/ 29 왕이 이르되 내 생명을 모든 환난에서 구하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라/ 30 내가 이전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켜 네게 맹세하여 이르기를 네 아들 솔로몬이 반드시 나를 이어 왕이 되고 나를 대신하여 내 왕위에 앉으리라 하였으니 내가 오늘 그대로 행하리라.”
다윗은 자신을 온갖 고난과 환난에서 건지신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한다고 하면서, 밧세바의 아들 ‘솔로몬’을 차기 왕으로 세우겠다고 선언합니다. 그것도 ‘내가 오늘 그대로 행하리라’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들은 밧세바는 드디어 한시름을 놓습니다.
31절 “밧세바가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내 주 다윗 왕은 만세 수를 하옵소서 하니라.”
이렇게 해서 다윗의 왕위는 공식적으로 솔로몬에게 이양되었습니다.
<배우는 교훈>
저는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중요한 교훈을 깨닫습니다.
첫째, 아도니아의 반역의 소식을 들은 나단 선지자의 선택입니다.
사실 주류 세력은 아도니야에게 넘어갔습니다.
왕위 계승 1순위인 ‘아도니야’에 대한 사람들의 인정과 호감도 높은 상황이었습니다. 인간적인 판단으로 보면 당연히 장자인 아도니야에게 왕위를 넘기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많은 유력한 사람들이 주판알을 튕겨보고, 아도니야에게 선을 댓을 것입니다. 아도니야가 베푼 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도, 서둘러 달려갔을 것입니다. 뒤늦게라도 선을 대기 위해 동분서주했을 것입니다.
또, 밧세바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녀가 낳은 자신 ‘솔로몬’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로 부정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어립니다.
그럼 왜 나단은 밧세바와 솔로몬의 편에 섰던 것일까요?
부름 받지 못했어도, 그를 찾아가면 아도니야는 대환영을 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정사를 보좌해 주던 선지자가 자신에게 왔을 때 아도니야는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그에 맞는 예우를 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내 나단은 밧세바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목숨을 걸고 솔로몬의 목숨을 호위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 나단은 정치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대언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편에 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솔로몬’에게 있음을 알았기에 자신의 생명을 걸고 그를 지킨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실현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자신의 눈앞의 이익이나 욕망을 채우는 일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너무 늦은 다윗의 선포입니다.
아도니야의 반역이 일어난 근본적인 원인은 다윗의 선포가 너무 늦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이 솔로몬에게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웬일인지 그것을 선포하기를 주저하였습니다.
다윗은 아도니야의 반역 소식을 듣고 난 뒤, ‘내가 오늘 그대로 행하리라’라고 말합니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오늘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왜 그동안 하지 못했을까요?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라는 말처럼 나름대로 다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왕위 계승’을 발표하면 그 후부터는 자신의 존재가치가 상대적으로 위축됩니다. 주도권을 차기 왕에게 넘어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더 좋은 기회를 저울질하다가 그만 적기를 놓쳐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마26:41)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건강 상태가 조금 좋아지면 꼭 그렇게 하겠다고 생각했지만, 건강이 예전만큼 회복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되었든지 정당하지 못한 자기변명이요 핑곗거리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을 탓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모습도 다윗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대로 순종하여 따르지 않습니다. 말로는 더 좋은 기회를 기다린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따를 더 좋은 기회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바로 그때가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경우에서라도 하나님의 편에 서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면 속히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래 끌면 시험에 듭니다. ‘내가 오늘 그대로 행하리라’라는 말처럼 즉시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미루지 마십시오. 주어진 환경이나 조건을 핑곗거리로 삼지 마십시오. 오늘이 순종하기 가장 좋은 날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오직 하나님의 편에 서서, 오늘 여기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실천하는 참된 믿음의 용사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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