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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론] 라오스 역사 개설
History of Laos
라오스 정부가 교과서에 채택하고 있는 공식적인 '라오스 역사'는 통상 파 움(Fa Ngum: 1316~1393 [재위] 1353~1373) 국왕이 1353년 란상(Lan Xang) 왕국을 건국한 시기부터 시작한다. 라오스가 자국의 역사를 란상 왕국에서 출발한다고 보는 것은, 자국 역사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원사시대(proto-history [역주] 선사와 역사 시대의 중간)부터 시작한다고 보는 태국의 역사 기록학(historiography)에 비해 상대적으로 겸허한 태도를 취한 것이라 할 만하다.
라오스의 "공식적인 역사"가 시작된 14세기 무렵에는, 아마도 라오어와 친연성이 있는 언어들(Tai languages, 따이어)의 초창기 형태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 현재의 라오스 거주민들보다 1~2세기 앞서서부터 --- 이 지역에 상당한 기반을 닦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라오스의 국경선은 식민당국이었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French Indochina, [공식명칭] Indochinese Federation) 당국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설치한 것이다.
1. 선사시대
2009년, 라오스 북부의 안남산맥(Annamite Range)에 위치한 땀빠링(Tam Pa Ling, '원숭이 동굴')에서 고대의 유골 하나가 발견됐다. 이 유골은 최소 4만6천년 전의 것이며, 현재까지 동남아시아에서 발견된 현생 인류의 화석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주1) 미확인이긴 하지만, 루웡남타(Luang Namtha) 도의 응으빈 모우스(Ngeubhinh Mouxeu) 바위그늘 주거유적(Rock Shelter, 巖陰遺蹟)에서 행해진 연구조사는 이 지역에서 인류가 거주한 것이 기원전 5만6천년 전까지도 거슬러올라갈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줬다.(주2)
고고학적 증거는 농경사회가 기원천 4천~5천년경에 발전하기 시작했을 것임을 시사하고 있고, 옹관묘(jar burials)와 여타 무덤들에서는 기원전 1500년경의 청동기와 기원전 700년경의 철기가 출토되어 복잡한 사회가 형성돼 있었을 것임을 추측케 해준다.
라오스의 원사시대는 중국 문화 및 대(大)-인디아(Greater India) 문명과의 접촉을 통해 그 특징을 형성해나갔다. 서기 4~8세기에는 메콩 강(Mekong River) 유역을 따라 므앙(mueang)이라 불리는 "도시국가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주3)
(주1) Demeter F., et al. (2012) Anatomically modern human in Southeast Asia (Laos) by 46 ka. Proc Natl Acad Sci USA 109(36):14375–14380.
(주2) Zeitoun V, Forestier H, Pierret A, Chiemsisouraj C, Lorvankham M, Latthagnot A, Chanthamoungkhoun T and Norkhamsomphou S 2012. Multi-millennial occupation in northwestern Laos: Preliminary results of excavations at the Ngeubhinh Mouxeu rock-shelter. Comptes Rendus Palevol 11(4).
(주3) "Facts on Laos". Laos National Tourism Association. |
2. 초기 역사
라오스 지역에서 알려진 역사는 따이족(Tai peoples) 사람들의 남방 이주 이후의 일이다. 따이족은 13세기 경에 이 지역에서 자신들의 최초의 국가를 건설했다. 그것은 거의 신적인 권위와 왕의 신분에 가까운 통치자들을 정점으로 하면서, 각기 다른 다양한 부족 공동체들을 함께 끌어모은 형태였다.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는 드와라와띠(Dvaravati, 드바라바티) 왕국을 건설했던 몬족(Mon) 같은 오스트로-아시아 어족(Austroasiatic languages) 계열 언어 사용자들이나 [캄보디아 역사를 형성하는] 원형-크메르족(proto-Khmer) 같은 초창기 거주민들이 라오스 역사를 기술하는 데 있어서 대단히 강조됐다.
하지만 식민지 이후의 역사기록학은 그러한 방법 대신 라오스에 거주하는 모든 민족들을 동등하게 "토착적인"(indigenous) 민족들로 묘사하려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남쪽의 캄보디아 계통 왕국들이 라오스보다 고대의 역사를 갖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가운데, 라오스의 초창기 역사가 그러한 캄보디아 계통 왕국들과 복잡한 상호 교섭을 가졌다는 관점에서 서술한 것이다. 그리고 라오스의 원형-크메르족을 현대 역사에서 프랑스 및 미국에 맞서 싸웠던 영웅적인 "라오 민족주의자"라며 칭송하고 있다. (1902년에 시작됐던 엉 깨우의 반란 사건[Ong Keo Rebellion]을 참조하라.)
프랑스 식민 당국의 역사 기술과 포스트-식민지(=공산당 정권) 시대의 역사 기술은 양자 모두 그 이전부터 존재했던 명백한 인종 차별적인 역사관을 바꾸려는 시도를 보여줬다. 이전 시대의 역사관은 라오족이 현재의 라오스 지역으로 들어와 원주민 거주자들을 정복하여 예속시켰다는 단순한 관점이었다. 그러한 방식의 서술에 나타나는 원주민들은 주로 원형-크메르족이며, 비하적 어감을 가진 '카탓'(Kha-That)이란 명칭으로 표현됐다. (크무족[Khmu people] 항목 및 란상 왕국의 기원에 관한 맥카시[McCarthy]의 설명 부분을 참조하라.)
그러한 전통적 관점은 사실적 근거를 거의 갖추지 못한 것이지만, 구전되는 유사-역사를 통해 흔히 들어볼 수 있는 내용이며, 교실에서 교사들이 특별한 관심을 갖고 대처하거나 교정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이에 관해서는 와타나 폰세나(Vatthana Pholsena)가 2006년에 출판한 <전후의 라오스: 문화, 역사, 정체성의 정치학>(Post-war Laos: The Politics of Culture, History, And Identity)에서 역사기록학적 개관을 제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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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서기 1400년경의 동남아시아 각국의 세력권. |
라오스 최초의 법률적 문서는 <쿤 보롬(Khun Borom 혹은 Khun Bulom)의 법률>이라 불리는 것으로, 아직도 사본의 형태로 보존되고 있다. (또한 이 문서는 라오족의 존재에 관한 최초의 사회학적 증거이기도 하다.)(주4) <쿤 보롬의 법률>은 암송용의 토착적인 무운시(blank verse, 無韻詩)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고, 이르면 9세기 무렵의 원형적인 라오족 사회의 국가 형태를 반영하고 있다. 또한 이 법률에는 오늘날의 라오스를 포함한 남방 지역으로의 이주가 발생하기 이전 혹은 동시대의 사회상도 반영되어 있다.
<쿤 보롬의 법률>에 사용된 일반적인 용어들은 농경사회를 묘사하고 있다. 사람들의 삶은 생계형 농업(subsistence agriculture)을 중심으로 움직였고, 가축화된 물소인 가얄(gayal)이 농사에 이용됐다. 이웃의 코끼리를 훔치거나 죽인 자에게는 엄중한 처벌이 부과된 점은 당시에 코끼리가 귀중하고도 중요한 소유물이었다는 증거이다.
라오스에서 상좌부 불교(Theravada Buddhism: 남방불교, 소승불교)가 우월적 지위를 갖게 된 것은 란상 왕국의 포띠사랏(Photisarath: 1501~1547) 국왕이 불교를 중흥시킨 16세기 무렵까지도 늦춰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최근 캄보디아와 베트남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증거들은 그러한 공식적인 역사관에 변화를 줄 가능성이 존재한다. 캄보디아와 베트남에서는 [남방불교의 경전 기록어인] 빨리어(Pali) 비문들이 온전한 형태로 발견됐는데, 그 연대가 이르면 9세기로도 소급된다. (참조: JPTS, Vol. XXIII, 1997. Peter Skilling, "New Paali Inscriptions from Southeast Asia")
고대의 라오스에서는 정령신앙(animism) 및 부분적으로는 [힌두교의 주력 분파인] 시와신앙(Shaivism, 샤이비즘)이 널리 신봉됐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한명의 국왕이 갑작스레 이 나라에서 불교의 우위를 부여했다기보다는, 길고도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 불교의 우월성이 확립됐다는 증거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또한 그와는 반대의 과정이 발생하기도 했다. 오늘날의 참빠삭(Champasak) 도에 위치한 왓푸 사원(Vat Phou)에서 출토된 조각상들과 비문들의 역사적인 층위들을 살펴보면, 가장 오래된 것은 시와 신(Shiva) 신을 숭배하는 내용의 산스끄리뜨어(Sanskrit) 비문이다. 그리고 후대의 유물들은 불교에 관한 것이고, 이어서 정령신앙을 위한 유물로 시기적 역전이 발생하고 있다. (가장 후대의 조각상들은 단순히 거대한 코끼리나 도마뱀만을 묘사하고 있고, 인도에서 발생한 어떠한 조직화된 종교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또한 산스끄리뜨어나 빨리어 기록도 남기지 않고 있다.)
라오스에 관한 공식적인 모든 역사 서술들이 이 지역에 대한 중국의 민간신앙(Chinese folk religion)이 가진 (실제 혹은 가능한) 영향력을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도 중요하다. 12간지를 사용하는 라오스나 태국의 음력 달력(참조: 태국 음력)은 모두 중국의 달력에서 차용한 것이며, 인도 역법의 영향이 아니다. 이러한 역법들은 금석학(epigraphy)을 통해 보존되는 [왕정의] 국가 종교(royal religion)의 일부이며, (점복을 통해 나타나는) 수 세기 동안의 대중적 민간신앙의 일부인 것도 분명하다.
3. 1953년 완전한 독립을 획득하기 이전의 상황
란상 왕국은 17세기에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18세기 말에 이르면 시암(Siam: 오늘날의 태국)이 현재의 라오스 지역 중 많은 부분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했다. 그에 따라 오늘날의 라오스 지역은 3개의 독립국가들로 분할됐다. 북쪽에는 루앙프라방(Luang Prabang)을 근거지로 하는 국가가 생겨났고, 중부지방엔 위앙짠(Vientiane)을 근거지로 하는 국가, 그리고 남쪽에는 참빠삭을 근거지로 삼은 국가가 성립했다.
1828년 위앙짠 지역 라오스는 반란을 일으켰지만 패배하여, 이 지역은 시암에 합병됐다. 이후 프랑스가 위앙짠을 점령한 후 시암과 1893년 및 1904년 조약을 통해 라오스 전역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영토로 편입했다.
제2차 세계대전(World War II) 기간 중에는 일본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지역을 점령했다. 이후 일본이 패망하자, 라오스 민족주의자들은 라오스의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1946년 초에 프랑스 군대가 라오스를 재점령하여 라오스에 제한적인 자치권만 부여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First Indochina War: 1946.12.19.~1954.8.1.) 당시 인도차이나 공산당(Indochinese Communist Party: ICP)은 라오스 지역의 독립을 목표로 빠텟 라오(Pathet Lao: 라오국[國], 파텟 라오) 저항조직을 출범시켰다. 라오스는 1953년 10월 22일 완전한 독립을 쟁취했다.
4. 라오스 왕국 시대
라오스의 총선은 1955년에 실시됐고, 1957년에 수립된 최초의 연립정부를 이끈 총리는 [루앙프라방 왕가의 후손인] 수완나 푸마(Souvanna Phouma: 1901~1984) 왕자였다. 이 연립정부는 1958년 붕괴했다.
1960년, 내각이 왕실의 도읍인 루앙프라방에 머물고 있을 때 [중도 성향의 특수부대 지휘관이었던] 꽁 레(Kong Le: 1933 혹은 1934~2014) 대위가 행정수도인 위앙짠에서 무혈 쿠테타를 일으켰다. 그리고 중립적인 정부의 구성을 요구했다. 이후 다시금 수완나 푸마 왕자가 이끄는 제2차 연정이 출범했지만 권력을 유지하지 못했다. 푸미 노사완(Phoumi Nosavan: 1920~1985) 장군 휘하의 우익 군대가 같은 해에 중도 연립정권을 몰아냈기 때문이다.
한편, 1958년~1959년 사이에는 북-베트남(월맹)이 호찌밍 루트(Ho Chi Minh Trail)를 확보하기 위해 라오스 지역을 침범했다. 1961년~1962년 사이에 열린 제네바 회담(Geneva Conference)의 후속회의는 라오스의 중립성을 보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합의는 거의 현실화되지 못했고, 곧이어 전쟁이 재개됐다.
북-베트남 군대가 라오스에 출현하면서 점차 이 나라는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Second Indochina War: 1954~1975)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거의 10여년간 진행된 전쟁의 결과, 라오스는 세계 전쟁사에서 가장 극심한 폭격을 당한 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참조) 그것은 라오스 영토 내를 통과하던 북-베트남의 [병참 루트인] 호찌밍 루트를 파괴하고 공산 군대를 패퇴시키기 위해 미국이 공습을 감행한 때문이었다. 북-베트남 역시 파텟 라오 반군에 대해 막대한 지원을 하면서 반복적으로 라오스를 침입했다. 미국은 이 기간 중 라오스 정부와 군대를 지원하면서 비정규전 병력의 조직과 훈련을 시켰다.
1973년의 파리평화협정(Paris Peace Accords)이 체결된 직후, 미국은 베트남에서 철수했고, 라오스 정부와 '파텟 라오' 반군 사이에도 휴전이 이뤄져 새로운 연립정권이 출범했다. 하지만 북-베트남은 라오스에서 결코 철수하지 않았고, '파텟 라오' 역시 북-베트남의 이익에 봉사하는 꼭두각시 군대 이상의 역할은 수행하지 않았다.
1975년 4월 남-베트남(월남)이 함락되어 공산 군대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러자 라오스에서는 북-베트남의 후원을 받고 있던 '파텟 라오'가 별다른 저항도 없이 라오스 전역의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1975년 12월 2일, 시사왕 와타나(Sisavang Vatthana: 1907~1978 혹은 1984) 국왕은 강압적으로 퇴위했고, '라오 인민 민주주의 공화국'(Lao People's Democratic Republic: LPDR)이 수립됐다.
분쟁기의 라오스 군구들
라오스의 군구(Military Region, 軍區)는 5개로 나눠져 있었다.
제1군구 (루앙프라방) : 왕실 및 '왕립 라오스 육군'(Royal Laos Army: ARL 혹은 RLA) 참모총장 출신의 오운 라티꾼(Oune Rathikul) 장군이 지배한 지역. 제1군구 사령관은 국왕의 이복 동생이었던 티야오 사이웡(Tiao Say~vong) 준장이었다. 제1군구는 라오스 북서부 지방에 위치하여 퐁살리(Phong Saly), 후워컹(Houa Khong), 사인야불리(Sayaboury), 루앙프라방 등 4개 도를 포함했다.
제2군구 : 라오스의 북동부 지역으로서, [몽족(Hmong) 출신의] '메오 마키'(Mèo Maquis) 대-프랑스 게릴라전 영웅 왕 빠오(Vang Pao: 1929~2011) 장군의 지배 하에 있었다. 제2군구는 후워판(Houa Phan)과 시앙코우앙(Xieng Khouang) 도의 2개 도이다. 사령부는 항아리 평원(Plain of Jars)의 북서쪽에 위치한 롱쳉(Long Cheng)에 있었다.
제3군구 : 중부지방으로서 사령부는 사완나켓(Savannakhet, 사반나켓)에 있었고, 사완나켓 도와 캄모완(Khammouane) 도를 관할했다. 이 지역은 보운폰(Bounpon) 장군이 지휘를 하다, 1971년 7월부터는 노우펫 다오 흐웡(Nouphet Dao Heuang) 준장이 지휘했다. 하지만 이 지역의 실질적 권력은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이었던 르웜 인시시앙마이(Leuam Insixiengmay)의 인시시앙마이 가문이 갖고 있었다. 르웜 인시시앙마이의 부인은 몸 부완판(Mom bouanphan)의 큰 여동생이었고, 몸 부완판은 분 움 나 참빠삭(Chao Boun oum na champasack) 왕자의 아내였다.
제4군구 : 사령부는 빡세 (Pakse)에 있었고, 살라완(Saravane), 아따쁘(Attopeu), 참빠삭, 세돈(Sedone), 시타돈(Sithandone) 도 등 라오스 남부의 6개 도를 관할했다. 이곳을 지배한 것은 분 움 나 참빠삭 왕자의 나 참빠삭 가문이었다. 제4군구 사령관은 참빠삭 가문의 일원인 파숙 라사팍(Phasouk S. Rassaphak) 소장이었다. 그는 약 10여년간 이 지역을 지휘하다, 1971년 7월 작가이기도 한 숫차이 웡사완(Soutchay Vongsavanh) 준장으로 교체됐다.
제5군구 : 라오스의 수도권인 위앙짠과 보리칸(Borikhane) 도를 관할했다. 사령부는 '치아니모 육군기지'(Chinaimo Army Camp)에 있었고, 쿠쁘라싯 아바이(Kouprasith Abhay) 소장이 지휘를 하다, 1971년 7월에 통릭 촉벵 분(Thongligh Chokbeng Boun) 준장으로 교체됐다.
5. 공산정권 - 현재의 라오스 정부 (1945~ )
1975년 12월에 출범한 새로운 공산정권의 지도자는 까이손 폼위한(Kaysone Phomvihane: 1920~1992, 우측사진)이었다. 그는 경제적 의사결정 구조를 중앙집권적으로 바꾸고, 이전 정부의 관료들 및 군인들을 "재교육 캠프들"에 대거 감금했다. [전쟁기에 미군에 협조했던] 몽족들 역시 이러한 캠프에 수용됐다.
라오스의 공산정권은 명목상 독립국가였지만, 오랜 기간 베트남의 실질적인 꼭두각시 정권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공산정권의 정책들은 라오스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국민들을 해외로 떠나가게 만들었다.
라오스는 1991년 소련이 붕괴하기 전까지 베트남을 통해 전달되는 소련으로부터의 원조에 심하게 의존했다. 1990년대에 [집권 공산당인] '라오 인민혁명당'(Lao People's Revolutionary Party: LPRP)은 중앙통제식 경제체제를 포기했지만, 정치권력은 여전히 일당 독점체제로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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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렇케 힘든일을 하시고,..
또 한나라에 접근을 하시는군요,,
감사하게 읽어봅니다,
안녕하셨습니까 ^^
진도가 좀 느릿느릿 나아갈 것 같습니다..
완전 재밌고 또 즐겁게 읽고 배웠습니다. 많이 알려주세요~~~~ 감사합니다!
오랫만에 반갑습니다.. ^^
라오스 역사도 이제 서서히 관심이 갑니다..감사합니다 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