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The Wall Street Journal 2014-9-25 (번역) 크메르의 세계
다라 푸스피타 : 금지곡으로 잊혀진 인도네시아 최초의 여성 락밴드
Indonesia’s First All-Girl Rock Band Still Has the Power to Captivate
기사작성 : Sara Schonhardt
인도네시아 최초로 전원 여성들로만 구성됐던 락 밴드 '다라 푸스피타'(Dara Puspita, 다라 뿌스삐따)는 '꽃 소녀들'(Flower Girls)이란 의미로 번역될 수 있다. 당시 수카르노(Sukarno: 1901~1970) 대통령이 그녀들의 불규칙하고 쉰소리가 나는 목소리를 광기로 여겼을 정도로([역주] 수카르노는 이 밴드의 음악이 서구 퇴폐문화의 산물로 보아 탄압하여, 1965년 수카르노 정권이 붕괴한 후 1966년에야 1집이 나옴), 1960년대 그녀들의 모습에서 순진무구한 이미지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또한 그녀들은 훗날 러시아의 여성주의 펑크밴드 '푸시 라이엇'(Pussy Riot)의 선구자로서 회자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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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다라 푸스피타'의 곡 <핍핍 예아!>(Pip Pip YEAH!!). |
당시 10대였던 4명의 소녀들이 만든 곡들은 초기 비틀즈(Beatles)의 팝적인 사운드와 고고(go-go)가 혼합된 형태였다. 하지만 그녀들은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과 롤링스톤즈(Rolling Stones)의 음악들도 커버로 연주했다. 그들은 무대 위에서 절규하면서 온 몸을 른들었고, 스스로 악기들을 연주했다. 그들의 애단스러운 스타일은 결국 엄숙한 민족주의자였던 수카르노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캄보디아에서 아트 스페이스를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는 줄리앙 폴슨(Julien Poulson) 씨는 본지에 보내온 이-메일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라 푸스피타'는 정치적 발언을 많이 했다. 하지만 그들의 이미지나 사운드를 통해서 그렇게 했는데, 그런 표현 방식이 [정권과] 충돌의 여지가 많았다. |
폴슨 씨의 아트 플레이스는 현재 '다라 푸스피타'완 관련된 전시회를 개최 중이다.
오늘날 '다라 푸스피타'의 멤버들이었던 4명의 여성들은 모두 흩어졌다. 리듬 기타를 담당한 리에스(Lies A.R.)와 리드 싱어였던 티틱(Titiek A.R.) 자매는 현재 네델란드에 거주하고 있고, 드러머였던 수시 난데르(Susy Nander)는 동-자바(East Java)에 거주한다. 그리고 베이시스트 티틱 함자(Titiek Hamzah)는 자카르타(Jakarta)에서 자신의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4인 모두 이제는 할머니가 되었다.
(사진: Julien Poulson) '다라 푸스피타'의 드러머였던 수시 난데르 씨가 초창기 활동 당시의 멤버들 얼굴을 그린 그림을 들고 서 있다.
그러나 폴슨 씨는 이 밴드가 보여준 강력하고도 여성주의적인 락 앤 롤(rock and roll) 가사가 현재까지도 여전히 흡입력을 지니고 있다면서, 오늘날의 인도네시아 젊은이들이 50년 전 '다라 푸스피타'가 직면했던 과제들과 동일한 상황에 처해있다는 점에 놀랐다고 말했다. 그러한 도전이란 바로 서구의 영향과 국내의 문화적 기대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다.
폴슨 씨는 최근 난데르 씨를 만나기 위해 [동-자바에 위치한 인도네시아 제2의 도시] 수라바야(Surabaya)를 방문했다. 그는 이 방문길에서 현재의 인도네시아 젊은 여성들이 --- 종교적, 정치적으로 지금보다 덜 진보했던 --- '다라 푸스피타'의 활동시기인 1960년대보다도 더욱 큰 제한을 받고 있을 수도 있다고도 느꼈는데, 그것은 인도네시아에서 종교적 보수주의가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의 이러한 위대한 락앤롤 이야기가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발생 중인 엄청난 문화적 도약에 매혹적인 그림을 그려주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오늘날 이 모든 것에 대한 사색에 완벽한 배경음악이 되어주고 있다. |
폴슨 씨 자신도 뮤지션인데, 그는 자카르타의 잘란 수라바야(Jalan Surabaya)에서 레코드판들을 찾아다니다가 '다라 푸스피타'를 발견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작년에 디트로이트(Detroit) 방문길에 들렀던 한 바에서 DJ가 자신의 믹스 뮤직에 '다라 푸스피타'의 음악을 사용한 것을 발견했다. 짐 다이아몬드(Jim Diamond)와 함께 프로듀싱 작업도 한 적이 있는 그 DJ 역시 '다라 푸스피타'의 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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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Julien Poulson) 1970년에 촬영된 '다라 푸스피타'의 사진. 이 사진은 현재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회에 전시 중이며, 이 전시회는 10월3일부터 인도네시아 발리 섬에서도 개최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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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Anthony Lefferts) 캄보디아 프놈펜의 갤러리 '스페이스 포 제로'(Space Four Zero)에서 열린 '다라 푸스피타 헌정 전시회'는 캄보디아인 여성 싱어를 주축으로 하는 다국적 밴드 '캄보디안 스페이스 프로젝트'(Cambodian Space Project)의 오프닝 연주로 시작됐다. |
폴슨은 또한 네델란드에 거주하는 인도네시아인 마눙갈 와르다야(Manunggal K. Wardaya)도 찾아냈다. 와르다야는 페이스북에서 '다라 푸스피타' 팬클럽 계정을 운영하고 있다.
와르다야 씨를 '다라 푸스피타'에 열정을 가진 사람 정도로 부르는 일은 상당히 절제된 표현이 될 것이다. 와르다야 씨는 2005년 한 낡은 잡지에서 '다라 푸스피타'의 이름을 발견했다. 이후 그는 유튜브 영상 수십 편을 수집했고, 그것을 수백장의 캡쳐사진들과 함께 아카이브로 구성했다. 여기에는 '다라 푸스피타'가 발표한 4장의 앨범 자켓도 포함된다. 그리고 그는 1960년대부터 발표한 '다라 푸스피타'의 거의 모든 작품들을 수집했다고 자랑스레 주장했다.
(사진) Space Four Zero의 전시회 포스터
와르다야 씨는 '다라 푸스피타'의 역사를 보존하는 일이 자신의 의무라면서, 자신이 엄청난 열정을 갖고 그 일을 해왔다고 밝혔다. 페이스북 메신저를 통해 기자와 대화를 나누던 그는 연신 유튜브 동영상들을 틀어주면서 "이 곡은 꼭 들어봐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와르다야 씨는 멤버였던 리에 및 티틱 A.R. 씨를 만난 적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전직 로드 매니저였던 고(故) 한디얀토(Handiyanto) 씨까지도 만났다. '다라 푸스피타'의 리드 싱어였던 티틱 A.R. 씨는 와르다야 씨와의 인터뷰에서, 1960년대에 자신의 밴드는 정기적으로 당국에 보고를 해야만 했다고 밝혔다. 그녀는 정부 당국이 자신들에게 몸을 흔들지 못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공연장에 경찰이 지켜보지 않을 때는 마음대로 흔들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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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와르다야 씨가 '다라 푸스피타'의 리드 싱어 티틱 A.R. 씨를 인터뷰한 내용. |
와르다야 씨는 '다라 푸스피타'가 연주했던 음악이 "순수한 개러지 락 앤 롤(Garage rock n roll)"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녀들의 사운드가 --- 코에스 베르사우다라(Koes Bersaudara 혹은 Koes Brothers) 같은 당시 인도네시아 락 앤 롤 뮤직의 아이콘이었던 밴드들을 포함하여 --- 그 어떤 밴드들보다도 프로그레시브한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와르다야 씨는 '다라 푸스피타'의 노래들이 당시에 신-식민주의 성향으로 낙인찍혔기 때문에 광범위한 사회전 전범들에 도전해야만 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고음의 절규를 등장시킨 사이키델릭 음악 <페스타 팍 루라>(Pesta Pak Lurah: 촌장의 파티)를 혁명적인 음악이었다고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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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다라 푸스피타'의 <페스타 팍 루라>. |
'다라 푸스피타'는 그들이 여성이었기 때문에 엄청난 사회적 충격을 주었다. 와르다야 씨는 1960년대의 인도네시아 사회라면 그들이 다소곳한 가정주부가 될 것을 요구받던 시대라고 말했다.
'다라 푸스피타'는 현재 소규모의 헌식적인 팬들 사이에서만 유명할 뿐이다. 와르다야 씨의 페이스북 계정에서 '좋아요'를 누른 이들은 1,100명을 간신히 넘은 정도이다. 인도네시아 안에서 그들을 기억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와르다야 씨는 그러한 상황이 이해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다라 푸스피타'가 1970년대 초에 이미 음악계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정부는 1972년에 그들의 밴드 활동을 금지시키고, 이후 어떠한 노래들도 재발매하지 못하도록 금지곡으로 만들었다.
이제 유튜브와 인터넷의 힘 덕분에 열정적인 음악 애호가들은 그들을 재발견할 수 있다. 혹은 와르다야 씨의 바램대로 그런 현상이 벌어질 가능성도 있다. 뉴스 채널인 '메트로 티브이'(Metro TV)는 작년 3월에 '다라 푸스피타'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다. 와르다야 씨는 그러한 일이 진작에 있어야 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도네시아의 프로그레시브 락 밴드였던 '압바마'(Abbhama)나 '샤크무브'(Sharkmove)처럼] 오래된 밴드들의 레코드들이 현재 더 많이 재발매되고 있다. 사람들이 '다라 푸스피타'에 대해서도 흥미를 갖고 있다. |
와르다야 씨에게 있어서 '다라 푸스피타'를 소개하는 일은 예술 및 자유로서의 음악에 대한 신념 때문에 자신들을 희생했던 대중문화의 영웅들을 평가해 보여주겠다는 바램이기도 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은 '비틀즈'가 되길 바랬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들은 인터넷과 SNS가 출현하기 오래 전에 국제적으로 나아가려 했던 일을 했던 사람들이다. 또한 그들은 여성들이었고, 당연히 문화적 장벽도 만났었다. 하지만 그들은 항복하지 않았다. |
현재 캄보디아 프놈펜의 '스페이스 포 제로'(Space Four Zero)에서는 <다라 푸스피타: 존재한 적 없는 위대한 걸 그룹>(DARA PUSPITA: THE GREATEST GIRL GROUP THAT [N]EVER WAS)이란 주제로 전시회가 진행 중이다. 이 전시회는 이루 인도네시아 발리 섬의 '카사 루나'(Casa Luna)에서 10월 3~6일 사이에 개최될 <우붓 문인 축제>(Ubud Writers Festival) 때도 다시 전시될 예정이다. 폴슨 씨는 '다라 푸스피타'에 대한 헌정 앨범도 편집 중이며, 현재 활동 중인 밴드들과 가수들에게 '다라 푸스피타 컴필레이션' 앨범의 곡들을 연주해주도록 요청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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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마도 락 뮤직이나 싸이키델릭 사운드에 있어서는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의 아시아에서
인도네시아가 단연 최고로 앞섰던 국가가 아닌가 싶습니다..
요즘 인도네시아 락 뮤직을 관심있게 살펴보던 중
마침 이런 기사가 나와서 반가운 마음에 번역했습니다.
앞으로 인도네시아 락 뮤직 소개를 좀 더 해볼까 합니다..
놀라운 수준을 가졌더군요..
특히 1970년대 밴드들은 더욱 더 충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