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차 세계경제는 어떻게 될 것인가? 자유무역지대(FTA)는 궁극적으로 세계경제의 안정과 풍요를 보장할 것인가? 중국의 경제발전은 우리경제의 희망인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었다는 몇 몇 글로벌기업들의 경영방식에서 우리가 지향해야할 대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의문에 대한 정답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지난날의 경험을 통하여 현재의 위치를 인식해 볼 수는 있다. 이에 1차 세계대전의 영향( 크게 보면 유럽의 조락(凋落)과 미국(달러)의 중심국화 현상)과 전후의 변화, 경제정책의 전환, 미국체제와 달러의 약세화를 다시 점검하면서 시사하는 바를 짚어보기로 한다.
유럽의 조락
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유럽 각 국은 막대한 전쟁비용을 조달하기 위하여 국내적으로는 전시공채를 발행하고, 해외에서 돈을 차입하기도 하였는데 주 대상국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있던 미국이었다. 미국은 처음에 중립을 유지하고 있으면서 영국·프랑스와는 교류(무역·자금거래)가 많았고 독일과는 상대적으로 적었는데, 이는 지리적으로 또는 관습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독일을 멀리한 것은 아니었다. 나중에는 영국·프랑스에 대해서는 외상판매가 많아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결과적으로 미국의 여론을 영국·독일에 우호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이들 나라가 전쟁에 패하면 돈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나중에 독일은 미국과 영국·프랑스의 관계에 대해 경고를 하면서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들어갔고, 결국 미국 상선이 침몰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전쟁의 결과는 한마디로 유럽의 조락과 미국의 등장이다. 전쟁 국들이 자국 내에서 발행한 전시공채는 극단적인 전시인플레이션으로 인하여 상환부담이 대폭 줄어들지만, 외채는 그대로 상환부담을 가지게 된다. 대부분의 나라들이 전채(戰債)처리문제로 식민지를 상실하게 되는 등 조락의 길로 들어서고 미국은 막대한 채권을 배경으로 새로운 강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 유럽대륙이 전쟁의 와중에 있을 때, 러시아의 볼세비즘 혁명이 성공하게 되었는데, 이는 막대한 전채처리문제로 허덕이던 전쟁국가들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프랑스는 러시아에 많은 투자를 하고있었는데 혁명 후 채권행사를 못하게 되었으며, 독일은 러시아가 최대의 무역 상대국이었으나 혁명 후 시장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영국은 1차 대전 중에도 러시아에 많은 자금대출을 하였으나 혁명 후 상환을 거절당하게 되었다.
미국의 중심국화
미국은 전쟁 중에 농산물과 군수품 수출로 엄청난 이득을 챙기게 되었다. 1914년에는 14억불의 채무국이었으나, 1917년에는 94억불의 순 채권 국가로 변화하게 되었다. 전쟁경기로 인하여 1920년대의 호황의 기반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영국이 세계의 중심국일 때는 공산품 수출과 농산물 수입으로 경제·자금의 순환구조가 그런 대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미국이 세계의 중심국가가 되고 부터는 공산품과 농산물 모두 수출만 하게되어 세계의 돈이 미국으로 흘러 들어가게 되었다. 이는 결국 다른 나라들이 미국경제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게 되었고, 그 만큼 그들 나라의 경제가 미국경제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 구조로 변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세계 열강들은 전채처리문제로 골머리를 앓게되었다. 1921년 국제회의 결과 독일은 1300억 마르크의 배상금을 관련국가들에게 지불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독일이 이를 상환할 능력이 없어 첫 해에만 갚고, 그 다음 해부터는 이행을 거부하자 프랑스가 독일의 루르 지방을 침공하게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미국이 배상금·전채 처리의 주도권을 쥐고 국제적으로 지불탕감정책을 취하게 되는데 이것이 유명한 도즈플랜(Dawes Plan)이다. 그 방식은 미국이 독일에 차관을 제공하고, 독일은 그 돈으로 영국·프랑스에 배상을 하고, 영국·프랑스는 이 돈으로 다시 미국에 대한 전채를 상환하는 방식이었다. 이 문제는 나중에 영(Young)에 의해 대폭 삭감되었다가, 1931년 후버 대통령의 지불중지 결정으로 일단락 되었는데, 이는 결론적으로 미국의 세계 중심국가로서의 역할을 확인시켜 주는 과정이었다. 당시 미국만 순 채권국이었고, 영국은 근소한 채권국이었으나 탕감으로 못 받게 되어 채무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한편 배상과 전채문제가 일단락 되자 각 국은 전쟁 중에 중단되었던 금본위제로 다시 복귀를 하게 되었다.(전쟁 중에는 극단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인하여 국제간에 자본·상품거래가 곤란하게 되므로 금본위제가 유지될 수 없게 된다.) 이미 세계 외환시장, 세계 경제의 주도권을 쥐게된 미국이 1919년에 금본위제로 완전히 복귀를 하게되자 다른 나라들도 따라가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때의 금본위제도는 종전과 좀 차이가 있었다. 미국은 금화본위제로 복귀를 하였으나, 영국은 금지금본위제로, 다른 나라들은 금환본위제로 복귀를 하게되었다. 이는 결국 달러·파운드화, 즉 미국·영국의 경제에 큰 변동이 생기면 그대로 영향을 받는 구조에 놓이게 된 것을 의미한다.
전후의 변화
전후 재건과정이 끝난 후 세계 경제의 중심국인 미국은 상대적인 안정기에 들어가는데, 이때 괄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난다. 산업구조의 개편이 일어나는데 이는 산업합리화운동과 동시에 진행이 되었다. 1924년 이후 미국은 철강, 기계, 섬유 등 기간산업이 발달하게 되고, 이와 더불어 내구소비재업, 서어비스업이 발달하게 되는데 이의 대표적인 것이 자동차와 가전제품이다. 자동차의 발달은 도로의 발달을 가져오고, 이는 원거리의 출퇴근을 가능하게 하므로 전원주택이 발달하게되고, 이는 또한 건설업과 토목업의 발달을 가져오고, 주유소가 들어서고 광고업, 소비자금융이 급진적으로 발달하게 되는 유발효과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유발효과는 다시 가전제품의 수요를 가져오고, 영화, 관광, 출판, 교육 등 서비스업의 발달을 가져온다. 자동차공업의 발달과 함께 테일러시스템, 포드시스템이라는 산업합리화운동(생산성 향상 운동)이 일어난다. 새로운 산업·노무관리방식이 나타나고, 부품의 표준화·규격화가 일어나게 된다. 이제는 어느 것이 선이고 후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요와 공급이 서로를 창출시키게 된 것이다. 높아진 소득 수준으로 자동차의 비가격경쟁이 일어난다. 소비자의 기호를 충족시키는 자동차가 출현하고, 인위적인 수요 창출을 위해 광고가 발달하고, 월부판매 등 새로운 마케팅기법이 나타난다.
즉, 1920년대 미국의 안정기에 독점기업의 출현과 산업합리화로 인한 노동생산성의 급증, 그리고 독점가격의 하방경직성이 나타난 것인데, 이 때의 문제가 세계를 흔들어댄다. 독점산업의 출현은 계층별 소득변화에 중대한 현상을 야기 시킨다. 산업합리화로 노동생산성은 증대되었으나 임금의 증대는 미흡하여 생산성 증대와 임금인상의 괴리가 발생하고, 수요가 감소하므로 공급도 감소하나 가격은 독점으로 인해 떨어지지 않는다. 임금의 상대적인 과소 인상과 가격의 하방경직성은 구매력을 감퇴시킨다. 기업의 이익(자본의 소득)과 노동자의 이익에 괴리가 생긴 것이다. 소득분배가 구조적으로 노동자에 불리한 상황에서 축적된 이윤(내부유보금)이 실물투자금액을 상회하고, 투자처를 상실한 돈이 주식 붐을 일으킨다. 결국 유효수요의 부족으로 공황의 길로 들어간다. 가격기구가 자원배분의 매개변수 역할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이제 공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보통의 재정지출이 아니라 막대한 재정지출이 필요하게 되는데, 이는 정상적인 지출이 아니라 전쟁과 같은 막대한 지출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 된다. 10대의 기계를 사용하는 산업에서 수요감소로 7대만 가동할 경우 3대 분의 공급은 감소하나 독점가격의 하방경직성으로 인한 수요의 부족으로 가격은 그대로 있다. 다시 수요가 발생할 경우 유휴기계 3대를 가동하여 수요를 충당하게 된다. 즉 이는 새로운 투자는 불필요하게 된다. 투자승수효과에 의해 국민소득이 증가하여도 공황이 극복되지는 않게 된다. 따라서 공황이 극복되기 위해서는 유휴시설을 다 가동하고 추가로 새로운 투자가 나타날 정도의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1920년대의 경제구조상 미국의 불황은 다른 나라에 막대한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다. 특히 독일의 피해가 크게 된 것이다. 전후 배상·경제부흥에 필요한 돈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외자로 조달을 하였었는데, 미국의 불황은 독일 경제를 회복불능으로 몰아간다. 또한 캐나다, 호주, 라틴아메리카 등 농업국가들의 피해가 심각해진다. 공황 전 20년대 중반이후 생산성의 향상으로 곡물가격이 하락하여 국제수지가 악화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미국의 불황과 더불어 더욱 더 확대되어간다.
경제정책의 전환
미국의 경제공황이 전 세계로 확대되면서 1920년대 경제구조에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난다. 먼저 금본위제가 다시 붕괴된다. 1929년 우루과이, 브라질, 1930년 호주, 뉴질랜드 등 농업국가가, 1931년 오스트리아와 독일, 1932년 영국, 그리고 1933년에는 미국, 1936년에는 프랑스 및 프랑스와 금 블록(block)을 형성한 이탈리아까지 금본위제를 포기하고 엄격한 국가의 환관리제도로 들어가게 된다. (혹자는 이를 국가(독점)자본 단계로 들어갔다고 표현)
이러한 금본위제의 붕괴와 더불어 나타난 현상은 무역제한(관세장벽) 정책과 세계경제의 블록화 현상이다. 먼저 미국이 1930년에 관세율을 19.8%에서 33.6%로 인상하였는데 이는 당시 신대륙의 구대륙에 대한 도전장이라고 할만큼 거대한 사건이었다. 같은 해 쿠바, 캐나다, 멕시코가 관세장벽을 강화하였고, 1931년에는 인도, 중국, 페루도 관세를 인상하였다. 1932년에는 자유무역의 보루인 영국도 10∼30%의 관세를 부과하는 법이 제정되었다. 같은 해 캐나다 오타와에서 영연방의 대표들이 모여서 '오타와 협정'을 체결하게 되는데 이는 영연방 제국에 대해서는 특혜관세를 부과하고 비영연방국에 대해서는 높은 관세를 부과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전 세계를 '블록경제화' 하는 시초가 되었다. 독일은 동남유럽을 대상으로 청산협정을 체결하여 '나찌광역경제권'을 형성하였고, 미국은 통상협정법을 제정하여 '판 아메리칸 블록(Pan American Block)'을, 일본은 한국과 만주를 엔화블록으로 묶는 '대동아 공영권'을, 프랑스는 '프랑블럭'을 형성하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은 이러한 블록과 블록간 대립의 표출이었던 것이다.
경제정책 전환의 또 한가지는 재정정책이 실시된 것이었는데, 재정정책이 본격적인 경제정책의 일환으로 실시된 것은 이때가 처음으로 '뉴딜식'과 '나찌즘식'의 두 가지가 실시되었다. 공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1928년부터 실시된 재정정책으로 독일은 1937년에 완전히 회복을 하였으나, 미국은 그때까지도 완전한 회복을 하지 못하였는데, 그 이유는 재정지출의 규모에 있었다. 독일은 1932년에서 1938년까지 군사비를 22배나 증가를 시켜 정부지출 중에서 군사비가 43%까지 차지하게 되었는데, 같은 기간에 미국은 1.4배 증가 시켰고 정부지출 중 비중도 6%에 불과하였다. 또한 같은 기간 동안 정부지출 자체도 독일은 2.1배를 증가시켰으나, 미국은 1.4배 증가에 그쳤다. 정부지출이 GNP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독일은 42%나 되었으나, 미국은 20%에 불과하였다. 즉, 미국 정도의 재정지출로는 경기부양효과가 없고 독일처럼 방대한 금액이 일시적으로 지출되어야 미국경제가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미국경제가 독점기업화 되어서 수요가 감소하면 조업단축(일부 설비의 유휴화) 등으로 공급이 감소하게 되지만 가격은 하방경직성으로 인하여 떨어지지를 않는다. 이때 일정규모의 재정지출을 하여 수요를 진작시켜도 생산은 단축된 조업의 회복(유휴설비의 가동)에 의한 것이지 새로운 투자에 의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경기회복 속도가 느리게 되고, 회복이 되어도 일정 한계(수준)에 도달하였다가 다시 떨어지게 된다. (케인즈가 말하기를 자기의 이론을 입증시키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재정지출이 필요한데 이는 전시에나 가능하다고 하였다.) 미국, 영국, 프랑스는 '뉴딜식'을 채택하였고, 독일, 일본, 이탈리아는 '나찌즘식(파시즘식)'을 채택하게 된다. 1차 세계대전이 제국주의 전쟁이었고, 그 전쟁의 가장 선봉은 자본가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경제블록간의 대결이었던 2차 세계대전의 경우에도 이들 자본(가들)의 논리가 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미국체제와 달러의 약세화
그러면 2차 세계전쟁 수행을 위한 대규모 재정지출을 통하여 공황을 극복하였으나, 기존의 과잉설비와 군수물자 조달을 위하여 추가로 늘어난 설비는 전후 세계질서 개편에 어떻게 작용하게 되었을까?
과잉생산(유효수요의 부족) 공황에 겁을 먹은 미국이 취할 수 있는 길은 늘어난 설비를 돌아가게 해야 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수요가 있어야 하나 서유럽이나 일본은 물론이고 저개발국은 더 더욱 구매력이 없었다. 한마디로 국제금융시장에서는 미국물자를 구매할 달러가 부족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에 필요한 것은 구매력 부족에 빠져 있는 세계를 미국이 자기의 과잉생산력을 위한 시장으로 전화시킬 수 있는 방법인데 그것은 곧 미국으로부터의 달러공여뿐이다. 그런데 달러공여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미국과 채무국간의 쌍무협정에 의해 자금원조를 제공받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케인즈가 구상한 국제청산동맹안으로써 국제적 기구를 매개로 하여 '익명적'형태로 채무국에 달러를 공급하는 방법인데, 후자는 채무국이 채권국으로부터 경제외적 의무관계를 부담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미국의 이해관계와 일치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미국으로부터의 달러공여는 쌍무협정에 의한 '원조'로 행해지고, 원조(광의로 말하면 해외군사지출이나 역외조달도 포함된다.)를 지렛대로 하여 미국은 채무국에 군사적·정치적·경제적 의무관계를 강요할 수 있었고, 이것이 전후 세계질서를 냉전체제로 끌고 간 미국체제였다. 즉, 전후의 사회주의세계의 확대와 민족주의 운동의 대두에 대항하여 수원국(受援國)을 강요하여 사회주의 세계의 정치적·군사적·경제적 봉쇄망을 완성시킨 동시에 '도미노 이론'을 내세워 민족운동을 억압하고 식민지해방을 압살하는 체제를 구축한 것이 소위 말하는 달러부족을 배경으로 한 '달러체제', '미국체제'인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1차 세계대전후에 전채문제와 배상문제가 서유럽을 중심으로 한 세계의 자본주의체제를 오랜 위기와 혼미 속에 빠뜨려 경제부흥을 뒤지게 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달러살포는 패전 자본주의국의 경제부흥을 가속시킨 효과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며, 더 나아가 미국에 있어서 격심한 과잉생산(유효수요부족) 공황의 도래를 저지했을 뿐만 아니라 비교적 높은 성장을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 미국체제는 미국자본에 세계적 규모의 넓은 활동무대를 제공한 것이었다.
한편 전후의 안정적인 기업활동(미국체제의 구축)을 위해서는 통화가치의 안정이 절대적인 문제가 되므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4년 7월, 44개국의 대표들이 브레튼 우즈(Bretton Woods)에 모여 IMF를 창설하였다. 여기에서 미국의 달러화를 기축으로 한 고정환율제도인 금환본위제를 채택하였다. 즉, 미국만이 지불준비금을 모두 금으로 준비한 금본위국이고 다른 나라들은 모두 금과 미국의 달러화를 대외지불준비금으로 보유하여 달러화와의 일정한 환율을 유지할 의무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까지는 유럽의 경제재건에 막대한 지원(Marshall Plan)을 하고도 무역수지흑자로 종합수지에서는 흑자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1950년대부터는 유럽 및 일본의 경제재건과 생산성 향상으로 미국의 국제경쟁력이 위협을 받기 시작한다. 한국과 베트남전쟁에 따른 군사비 지출 등 무역외수지 적자를 무역흑자로 충당하지 못한 체 종합수지적자를 시현하게 되었다. 따라서 국제금융시장에서 2차 대전 직후의 달러화부족 상태는 1950년대부터는 달러화과잉 상태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금의 매장량은 한정되어 있는데 증가해 가는 국제유동성의 증가를 충족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등 여러 가지 문제점들에 대해 SDR 도입 등 보완을 해왔지만, 금의 공정가격과 런던 자유시장가격과의 괴리는 3배 이상으로 벌어지게 되었다.
결국 1971년 8월 닉슨행정부의 금태환중지선언으로 브레튼 우즈의 금본위제는 사실상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이 이후 국제수지 조정은 국제지불준비자산 보다는 환율의 변동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1970년대 두 차례의 오일쇼크와 미국의 인플레이션은 환율의 급등(달러의 평가절하)을 부채질하였고 또한 이 시기에 들어 환율은 국제수지뿐만이 아니라 각국의 통화정책에 따라 큰 폭의 변화를 보였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초반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미국의 고금리 정책은 유로달러 시장의 달러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켰고, 미국 국제수지 자본계정에는 흑자가 발생되었으며 달러화는 강세통화가 되었다. 그러나 이는 지속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미국의 고금리현상은 국제적인 고금리현상으로 파급되어 실업율을 증가시키게 되었고, 고평가된 미국의 달러화는 미국수출상품의 국제경쟁력을 약화시켜 경상수지적자를 누증시키고 달러과잉현상을 발생시켰다. 이후 1990년대 중반에 신경제의 영향으로 일시 강세를 보였으나 전반적으로 약세화의 길을 걷고있다.
시사점
그러면 과거의 이러한 사실들을 오늘날의 경제현상과 결부시켜볼 때 시사하는(우려되는) 점은 무엇인가?
첫째는 블록화다. 2차 세계대전이 경제블록간의 대결이었음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데, 다시 왜 세계는 블록화가 급진전 중인가. 오늘날 세계 각 지역에서 추진되고 있는 블록화의 본질도 경제문제인데, 그 시초는 1951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의 6개국이 형성한 유럽석탄·철강위원회(ECSC ; European Coal Steel Commission)였다. 이 ECSC가 오늘날의 EU로 발전하여 현재는 '유로화'라는 화폐(경제)통합까지 발전하였고, 이제는 통합의 마지막 단계인 정치통합을 위하여 나아가고 있다. 정치통합까지 완료되면 세계에는 EU라는 하나의 거대한 국가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전 세계가 WTO를 중심으로 세계무역의 활성화를 추진하고 있지만 WTO체제하에서는 140여 개국이 동시에 각종 무역장벽을 철폐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기 때문에, 일단 합의하기 쉬운 국가들끼리 우선 지역경제통합(FTA ; Free Trade Area)이 가속화 되고 있다. EU는 가장 앞선 단계에 있으면서 과거 동유럽국가들까지 포함시킬 예정이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북미자유무역지역(NAFTA)은 2005년까지 34개국이 미주 자유무역지대(FTAA)창설에 합의한 상태다. 아시아지역의 경우 이미 중국-ASEAN간의 FTA를 2010년까지 결성하기로 합의가 되어 있다. 이와는 별도로 각 국가 대 국가 단위로 FTA결성이 맹렬하게 진행중인데 2002년 현재 이미 체결된 FTA만 해도 168건이나 된다. 한국의 경우 최근 칠레와 FTA를 체결하였으며 현재는 싱가포르, 일본과 FTA를 추진 중에 있다. 또한 한·중·일 FTA 추진을 위한 서울선언을 채택하기도 하였다(2002.11.22). 한편 국가단위의 FTA가 농산물 문제 등으로 시간이 소요됨에 따라 산업별 FTA를 추진하려는 움직임도 시작되고 있다. 한·중·일 철강업체들이 '동북아철강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것도 그 한 예이다. 이러한 (지역단위)FTA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역내교역 수준이 어느 정도 이루어져 있어야 하고, 그러한 상태에서 FTA가 이루어지면 교역수준은 더 높아지게 된다. 2000년 현재 역내무역결합도를 보면 한·중·일+ASEAN은 48%, NAFTA는 56%, EU는 62%의 수준을 보이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지역단위)FTA가 활성화 될수록 과거 2차 세계대전화 하였던 블록간의 충돌이 우려된다는 점이다. 차이가 있다면 과거에는 관세를 높여서 블록을 형성하였다면, 최근에는 관세를 낮추어서 블록화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것이 블록간의 배타성을 유발하는 것은 마차가지라는 것이다. 또한 자기에게 필요한·부족한 부분을 FTA로 해결하고 나면 WTO의 존재의의가 약해 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세계 기축통화로서의 역할을 해온 달러는 점점 그 영향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
한편 여기서 우리는 중국의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장차 한·중·일 FTA의 중심 축이 될 중국은 지난 20여 년 동안 연평균 9%이상의 실질경제성장을 이룩하였고 당분간은 이 추세를 유지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그러면 중국은 우리가 전향적으로 임해야할 만큼 믿을 수 있는가? 내 생각은 간단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이미 한·중·일 3국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1%까지 되었지만 분명한 것은 어느 특정지역 특정산업에의 의존도가 높을수록 그만큼 리스크도 크다는 것이다. 우선 중국 자체의 최대 문제는 실업율이다. 중국은 매년 4000만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필요한데 현재의 연9% 경제성장으로도 4000만개의 일자리 창출은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이 언제까지 9% 이상의 경제성장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 더 큰 문제는 중국의 1%가 미치는 상대적·절대적인 위력이다. 만약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1% 정도만 후퇴하여도 중국 내부의 실업 등 사회문제, 값싼 물건들이 우리 나라를 비롯한 주변국에 넘쳐 들어올 절대 물량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가 될 것이다. 농산품, 공산품, 첨단제품 할 것 없이 우리경제에 미치는 영향과 그로 인한 예상되는 우리사회의 문제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둘째는 글로벌독점기업화와 과잉설비 문제다. 독점기업에 의한 독점가격이 역사적으로 어떤 현상을 초래하였는지 위에서 우리는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면 오늘 현실은 어떤가? IT의 발달로 이제는 한 국가 한 블록의 독점기업이 아니라 글로벌독점기업화 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산업에서 세계적으로 1,2등 기업만 살아남게 된다는 것은 예측되는 현실이다. 한 글로벌기업의 예를 보자. 스위스에서 출발한 소비재기업 네슬러(Nestle)는 총자산 중에서 해외자산 비율이 81%, 총매출액 중 해외매출이 98%, 총고용인원 중에서 해외현지법인에서 일하는 인원이 97%다. 그러면 이러한 글로벌 기업들이 지탱하고 있는 주요 산업별 과잉설비 현황은 어떤가. 자동차는 31.4%, 석유화학 15.4%, 철강 14.6%, 조선 9.8%이고 가장 잘 나간다는 반도체도 4.1% 이다. 세계(한국) 경제의 희망이라는 중국을 보면 철강 36%, 원유 63%, 시멘트 23%, 유리 50%의 과잉설비를 보이고 있다(모두 2000년 기준, 삼성경제연구소 자료). 이러한 과잉설비는 앞으로 우리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현재 세계경제 동향에서 우려되는 점을, 좋던 싫던 우리가 적극 대처해야할 사항에 대해 근대사를 참고하여 정리해 보았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문제들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가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선·후이고, 그 인·과는 어디에 있고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우리는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그 해결을 위해 노력해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