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디언 특집]
베트남전 종전 40주년 : 배신당한 혁명과 부패로 살찌는 "붉은 자본가들"
윤효원 (인더스트리올 컨설턴트)
제1편의 역자서문 : 2015-4-30
베트남 수도 하노이다. 거리에 나가면 1975-2015이라 쓰인 네온사인을 쉽게 볼 수 있다. 정확히 40년 전 자본주의자가 이끈 베트남 공화국은 무너져 사라졌다. 공산주의자가 이끈 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승리해 오늘날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됐다. 40년 전 오늘, 민족 해방은 달성됐고, 계급 해방이 멀지 않은 듯 했다.
미국과 한국은 '자유'를 위해 파병했다고 우겼다. 그러나 역사는 냉전 체제의 국제 정치에서 자유(freedom)라는 수식어가 반공·독재·부패·억압에 다름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제3세계에서 '자유'는 제국주의 외세의 지원과 강압 없이는 버틸 수 없는 식민주의의 연장이었다.
그런 체제는 끝나야 했고,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체제의 명줄을 잇기 위해 군대를 파병한 것은 국가의 자랑이 아니라 수치였다. 베트남 전쟁은 범죄였다.
베트남 해방 40년. 그 동안 베트남은 계급 해방을 달성하고 평등과 민주의 나라가 되었는가. 오늘 베트남이 갖고 있는 고민과 과제는 무엇인가.
영국 언론 <가디언> 인터넷판 4월 22일자에 닉 데이비스 기자가 쓴 열 쪽에 달하는 장문의 기사, '베트남 40년: 공산주의의 승리는 어떻게 자본주의 부패에 굴복했나'를 번역해 두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소제목은 역자가 달았다.
제2편의 역자서문 : 2015-5-4
베트남 노동조합 간부가 말했다. "나는 공산당원이지만, 우리 아들은 공산당을 싫어하고, 다당제를 주장한다. 아마 내 아들이 기성세대가 될 쯤엔 다당제가 되어 있을지 모른다."
예순 정년이 일 년 남은 그는 하노이의 보통 시민처럼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다. "부패는 모든 곳에 퍼져 있다. 내가 몸담은 노동조합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당신이 사는 한국에는 부패가 없는가. 베트남에서 부패 문제가 심각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해방이나 혁명의 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다. 우리를 부패했다고 비판하는 서방은 부패가 없나."
베트남은 유럽연합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을 마무리 중이다. 미국이 추진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협상에도 열심이다. 미국의 요구에 따라 경제 활성화를 위한 TPP 참여의 대가로 공산당 권력 독점을 뒤흔들지도 모를 결사의 자유를 법제화할 수도 있다는 입장이다. 대한민국도 비준하지 않은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제87호(결사의 자유) 비준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 한다.
부패와 불평등이 가장 심각한 문제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베트남에 아무도 없다. 문제는 부패와 불평등을 어떻게 해결하느냐다. 베트남은 갈림길에 서 있다. 사회주의 유산을 깡그리 버리고 자유방임 자본주의로 치달을 것인가. 노동자의 권리와 이익을 보존하면서 사회주의의 성과를 유지하는 조절 자본주의로 나아갈 것인가. 베트남의 오늘은 향후 개혁과 개방의 길로 나갈 것이 확실한 북한의 미래를 예측하는 데도 시사점이 크다.
"붉은 자본가들"의 정치적 계산과 경제적 욕망에 좌우될 것처럼 보이는 베트남의 미래는 도시와 공단에서 넘쳐나는 노동자들의 집단적 의지와 계급적 행동에 의해서도 그 경로가 영향을 받을 것이다.
영국 언론 <가디언>의 인터넷판 기사, '베트남 40년: 공산주의의 승리는 어떻게 자본주의 부패에 굴복했나'를 두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소제목은 역자가 달았다. 1편에 이어진 이야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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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AP / Horst Faas) 1962년 미국의 해군 병력수송선에 승선한 남-베트남 군인들. |
글 : 닉 데이비스(Nick Davies)
1968년 2월 이른 아침 베트남 중부 전투가 광기 수준에 이르렀다. 한국군이 하미(Ha My) 마을을 쓸어버린 것이다. 다낭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대나무집과 논이 오밀조밀하던 마을이었다. 한국군은 공산주의자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미군과 함께 싸우던 청룡부대 소속이었다.
몇 주 동안 한국군은 농민과 그 가족들을 미군이 "전략촌"(strategic hamlet)이라 부른 비좁은 구역으로 몰아넣었다. 공산 게릴라를 위한 거점과 식량을 없앨 수 있길 바랐다. 하지만, 감금 상태를 혐오한 농민들은 농사를 지으려 전략촌을 탈출해 하미 마을로 돌아왔다.
마을에 들이닥친 한국군은 한 시간도 안 돼 잠에서 막 깬 촌민들을 몰아붙여 작은 집단으로 나누었다. 조직적으로 발포해 135명을 살해했다. 한국군은 집과 시체를 불태웠고, 불도저로 밀어버렸다. 진실 역시 여러 해 동안 묻혔다.
승리자가 아닌 패배자가 만든 이야기
지금은 학살 증언비가 있다.(참조☞ 하미마을 위령비) 30년이 지나 진정한 반성을 위해 찾아온 청룡부대원들이 세운 것이다. 그런데 뭔가 잘못됐다. 기념비는 집처럼 크고 화려한 지붕으로 장식돼 있다. 공동묘지 두 개와 살해당한 어른과 아이의 이름을 새긴 큰 묘비는 있는데, 왜 죽었는지 설명이 없다.
마을사람들에 따르면, 증언비가 처음 세워졌을 땐 묘비 뒷면에 그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분명히 새겨져 있었다. 발포와 피, 불타는 살, 모래 위의 시체들을 기억하는 글귀도 있었다. "아비와 어미의 몸이 산산조각 잘라져 불태워지는 걸 보는 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아이와 아기가 자지러지게 울며 기어가 죽은 어미의 젖을 빠는 걸 보는 건 얼마나 참혹스러운가…"
하지만, 공식 행사가 열리기 전 한국 외교관들이 마을을 방문해 증언비 글귀에 불만을 제기했다. 베트남 관리들은 한국 외교관들에 맞서는 대신, 연꽃이 새겨진 판으로 비 뒷면을 덮으라 명령했다. 당시 하미 마을을 연구하고 있던 한국인 인류학자 권현익(Heonik Kwon)은 마을사람이 하는 말을 기록했다. 진실을 부정하는 건 "학살의 기억을 학살하는" 두 번째 학살이다.
더 강력한 무기를 들고 돌아온 미국과 그 동맹국들
왜 베트남은 이러한 타협을 하였을까? 왜 전쟁의 승리자가 패배자가 만든 전쟁 이야기를 허용하는 걸까?
마을사람들의 답은 간단하다. 한국은 베트남 경제에서 가장 큰 투자국의 하나다. 학살 글귀를 감추는 대가로 지역 병원 설립 지원을 약속했다. 베트남 당국은 동의했다. 저항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십년 전, 1975년 4월 30일 전쟁이 끝난 이래 지금까지 베트남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올해 초부터 베트남을 한 달 여행하면서 양쪽의 농민, 지식인, 학술 연구자, 참전군인들을 만나 이윤을 좇는 권력자들이 베트남 인민에게 강요해온 수많은 거짓과 타협을 알아봤다. 미국은 전쟁의 원인과 수행을 거짓으로 설명하는 데 성공했다. 군사적 대립에서는 졌지만,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더욱 강력한 무기, 즉 돈을 갖고 돌아와 베트남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은 길을 강요하고 있다. 지금 가장 큰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베트남 지도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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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AP / Horst Faas) 1965년 3월 베트남-캄보디아 국경 인근에서, 남-베트남 군 병력이 베트콩의 기지를 공격하자, 미군 헬기들이 엄호사격을 하고 있다. |
"진심으로 나는 공산주의자다"
아흔 살인 응우옌 하오 뚜(Nguyen Hao Thu)는 하노이의 밝고 아름다운 아파트에 산다. 그녀는 유창한 불어와 엉성한 영어로 젊은 처녀 시절 강력한 적 둘을 어떻게 쳐부쉈는지 새처럼 재잘거린다. 2차 대전이 끝났을 때 식민지에서 손 떼기를 거부한 건 프랑스였다.
1946년 스물한 살 때 뚜는 정글로 가 게릴라 투쟁에 동참했다. 산(酸)과 초석(硝石), 알콜을 섞어 화약을 만드는 것이 주특기였다. "밀림에서 정말 행복했다. 폭탄에 넣을 가루로 뻥하고 우리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꿈은 단순히 외국 침략자를 몰아내는 민족주의적인 게 아니었다. 꿈은 구체적으로 공산주의적이고 혁명적이었다. 뚜는 유치원 교사였던 아버지를 프랑스인에게 빼앗겼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일곱 살이었던 뚜는 감옥에 있는 아버지에게 음식을 가져다주곤 했다.
"나는 베트남을 차지하려는 모든 사람을 증오했다. 마음으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뚜의 가족은 안락한 생활을 하던 중간 계급이었다. 하지만 1930년대 그녀의 집은 지하 베트남 공산당을 위한 회합 장소로 쓰였다. 그녀는 맑스와 레닌을 읽은 것과 열여섯 살 때 프랑스인들이 친구 하나를 어떻게 처형했는지를 기억했다. "진심으로 나는 공산주의자다."
레 남 퐁(Le Nam Phong)은 뚜와 나이가 거의 같다. 열일곱 살이었던 1945년 프랑스와 싸우려 사병이 되었다. 전쟁에서 삼십 년을 보냈고, 북베트남 육군 중장까지 올라 미국군의 무기를 파괴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어느 포근한 저녁 그의 안락한 집 밖에 앉아 망고를 깎으면서 자기의 혁명 동기를 말했다.
"사회주의? 물론이지. 모든 싸움의 목적은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고, 자유와 독립과 행복을 얻는 거였어. 프랑스와 미국에 대항해 싸우던 첫날부터 우리는 이미 우리가 만들고 싶은 사회를 가슴에 품었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착취하지 않는, 공정하고 독립되고 평등한 사회."
뇌물과 폭력으로 세워진 남베트남
이 지점에서 미국의 자기 설명에 대한 설명과 갈라지기 시작한다. 미국판 설명은 1954년 프랑스가 패배했고, 미국군이 북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의 탈취 위협으로부터 남베트남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개입하게 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프랑스가 베트남 전역에서 인민을 소외시켰다는 점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갈라진 두 개의 국민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1954년 베트남군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서방 동맹국들은 남부 거점에 대한 권력을 고집했다. 제네바 국제조약에서 합의된 바는 1956년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새 정부를 수립하는 선거까지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이 임시로 나눠져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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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는 만약 선거가 이뤄졌더라면 베트남인 80%가 호찌민과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에 표를 던졌을 것이라고 후일 인정했다. 이는 우리가 만난 베트남인들의 말과 일치하는 바다.
미국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악명 높은 CIA 간부 에드워드 랜스데일(Edward Lansdale)을 통해 뇌물과 폭력을 능란하게 써가며 사이공에 가톨릭 정치인 응오 딘 디엠(Ngo Dinh Diem, 응오 딘 지엠)을 수반으로 하는 새 정부를 설치했다. 그는 독재자에다 족벌주의자였고, 반공에 친미주의자였다. 1955년 10월 랜스데일은 남베트남에서 선거를 조작해 디엠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전국 선거는 취소됐다. 이제 "임시" 분단은 두 개의 나라로 나뉜 베트남에서 남베트남은 북베트남 침략의 수동적 희생자라는 가식의 외피로 전락했다.
2차 대전 때보다 더 쏟아 부은 폭탄
프랑스 전쟁에 돈을 댔던 미국은 남베트남 육군에 기꺼이 돈을 퍼부었고, "자문관"이라는 외피를 씌운 1만6300명을 파병했다. 1965년 3월엔 전투병을 보냈다. 1969년 전투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미국은 55만 명을 파병했다. 여기에 남베트남군 89만7000명, 한국과 동맹국에서 파병된 수천 명을 더해야 한다. 하버드 의대와 워싱턴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사망자 수는 380만 명에 달했다.
영국 특파원 제임스 캐머런(James Cameron)은 미국의 행위를 "국제적 품위에 대한 공격으로 구역질나고 터무니없다"고 묘사했다. 1965년 쓴 글에서 전쟁으로 흘러간 경로를 돌아봤다. "신중을 기하지 않았고 서툴고 잔인하고 경솔했다. 서방은 점점 더 실수를 저질렀고 허둥댔다. 자신들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처음부터 그들의 주장은 상투적이고, 결코 사실을 좇은 적이 없었다."
폭력의 기억은 엄청난 공격을 당한 사람들에게 아직도 남아 있다. 지금은 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호찌민이라 부르는 사이공의 작은 집에서 공산당 게릴라였던 이는 자신의 밀림 캠프에 떨어지던 미군의 폭격과 자신과 동료들이 어떻게 비좁은 여우 굴로 숨었는지를 기억했다. "우린 쌀로 만든 도수 높은 술이 있었다. 그걸 마시면 독해 눈물이 나올 정도다. 우린 '어머니 땅의 눈물'이라 불렀다. 술을 마시면 두려움이 없어졌다."
미국은 2차 대전 중 연합국이 독일과 일본에 사용한 것보다 많은 폭탄을 베트남에 떨어뜨렸다. 네이팜탄도 떨어뜨렸다. 희생자들의 피부에 달라붙어 살을 태웠다. 백린(白燐)은 뼈를 녹였다. 파편 폭탄에서 나온 쇠 구슬과 철 조각은 사방으로 날아갔다. 에이전트오렌지 4300만 톤을 포함해 독성 화학물질 7300만 톤이 뿌려져 식물을 죽였고 노출된 사람들에게 질병을 안겼다.
잘린 다리만 남은 아들
미국의 하노이 폭격은 역사적 오명을 남겼다. 민간인으로 가득 찼던 하노이는 자체 방어 공군력이 없었다. 당시 여덟 살이었던 한 여인은 음속의 두 배로 날던 F-111 폭격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등에 나뭇가지를 덮어 어설프게 위장했던 걸 기억했다. 대공 포대에 근무했던 한 남자는 성과 없던 밤샘 방어 작전을 마치고 집으로 가니 폭격으로 마을이 통째 사라진 걸 보았다. 그의 아들이 남긴 건 흉터로 확인한 잘린 다리뿐이었다.
미국의 지상 공격도 강력했다. 메콩 삼각주의 한 마을에서 예순 후반의 농부는 황토로 지은 집에 평화롭게 앉아 기억을 더듬었다. 그녀의 엄마는 미군 헬리콥터가 굉음을 내며 다가오는 걸 보고 도망가는 실수를 범했다. 미사일을 맞은 엄마의 몸은 야자수 나무 앞에서 산산조각 났다. "엄마를 모아야 했다. 이를 주워야 했다." 남자 형제 셋은 헬리콥터 기관총에 맞아 죽었다. 지금도 그녀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 헬리콥터 소리 같은 것을 들으면 공포에 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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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AP / Art Greenspon) 1968년 4월, 미국 공수부대원들이 5일 동안의 순찰활동 중 부상당한 동료들을 호송용 헬기로 인도하고 있다. |
"움직이는 건 뭐든 죽여라"
미국인 다수는 미 라이(My Lai) 마을 주민에 대한 악명 높은 학살이 특별하고 드문 사건이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2001년 6월 언론인 닉 터스(Nick Turse)는 미국국립문서보관소에서 다른 그림을 찾아냈다. 비밀에 붙여진 대책팀이었던 베트남전쟁범죄위원회(Vietnam War Crimes Working Group) 관련 자료를 발견한 것이다. 미국 육군은 미군이 저지른 학살과 살인, 강간이 300건이 넘었음을 입증했다.
당시 터스는 베트남을 방문했다. 그가 쓴 책 <움직이는 건 뭐든 죽여라>(Kill Anything That Moves)에는 중부 고산지대 촌마을에서 여자와 어린이 스무 명이 살해된 사건의 현장을 찾으려 애쓰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현지인을 따라 나선 길에 동일한 좁은 지역에서 학살을 기록한 증언비를 다섯 개나 추가 로 발견했다.
"건초더미에서 바늘을 찾는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내가 찾은 것은 바늘더미였다." 그는 "끈적이들"(gooks, 동남아시아인을 비하하는 모욕적인 표현)의 목숨에 대한 인종적 무관심, "사살" 숫자를 올리라는 상부의 압박, 농촌 지역이 "무차별 포격 지대"로 갖는 성격이 결합되어 "민간인에 대한 살해가 광범위하고 일상적으로 이뤄졌으며, 이는 미군 지휘부의 정책 때문"라고 결론지었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투옥되어 학대를 받았다. 1970년 미국 의원단이 악명 높은 꼰 다오 감옥을 방문했다. 거기엔 남녀 무리가 "호랑이 우리"에 족쇄를 찬 채 갇혀 있었다. 굶주리고, 두드려 맞고, 고문당하면서 곤충을 먹어 연명하고 있었다. 이런 사실이 알려져 소동이 벌어졌지만, 감옥은 끝내 폐쇄되지 않았다.
몇 해 전까지 사이공의 대형 신문사 앞에는 상냥한 여인이 언론인들에게 커피를 팔았다. 그녀의 이름을 아는 이는 없었고, 그냥 커피 레이디로 불렀다. 그녀도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갖고 있지만, 대개는 평화가 온 다음 일어난 일에 대한 이야기를 갖고 있다. 이게 베트남 공산당이 지금 거짓말을 하는 맥락이다. 그녀는 해방의 날을 기억한다. 전쟁이 끝났다는 환호. 세계 역사에서 가장 거대한 군대를 쳐부순 공산주의의 힘에 대한 순수한 자부심.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 두려움도 있었다. 폭력적인 보복과 약탈의 소문이 돌았다. 커피 레이디는 총을 들고 거리에 드러누운 미친 사람들이 겁났다. 개인적인 이유로 그녀는 슬펐다.
"보통 사람들의 삶은 힘들었다"
몇 해 전, 그녀는 사이공 근처 해변 도시인 붕 타우의 미군 기지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했다. 거기서 로널드라 불린 한 군인을 만났다. 뉴욕 출신인 그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상공으로 정찰기를 조종했다. 둘은 사랑에 빠졌다. 로널드는 짧은 통보 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잠시 동안 편지가 왔다. 미국에 오도록 후원할 거라 했다. 곧 편지는 끊겼다. 여자는 남자가 돌아오지 않을 걸 알았다. 새로운 체제가 알면 화를 입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로널드의 편지를 태워버렸고, 그의 소식을 다신 듣지 못했다. 해는 흘러 이제 예순넷 백발이 된 지금, 절 옆에 조용히 앉은 채 여전히 슬픔을 느낀다.
커피 레이디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미국 남자와 사랑에 빠져 괜찮은 삶을 꿈꾸던 평범한 베트남 여인이었다. 해방의 날은 더 편안한 시절을 가져오지 못했다. 우선 새로 생긴 협동 공장에서 일거리를 찾았다. 하루 11시간 등을 구부린 채 재봉틀을 돌려 소량의 쌀과 더 작은 량의 고기를 얻을 수 있는 배급증을 얻었다. 여러 해 동안 남자 형제와 작은 집을 나눠 써야 했다. 그는 섬유 공장에 다녔다. 경제는 십년 동안 침체했다. "보통 사람의 삶은 힘들었다."
미국은 베트남을 폐허 상태로 만들었다. 폭격으로 도로와 철도, 교량과 운하를 파괴했다. 불발탄과 지뢰가 시골 곳곳에 널렸다. 심지어 농부들이 일하는 논에서도 발견됐다. 고성능 폭약과 에이전트오렌지로 오백만 헥타르의 숲이 불모지가 됐다. 새 정부는 남베트남 촌락 3분의 2가 파괴됐다고 추정했다. 사이공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고아들과 넘쳐나던 마약은 미국이 남긴 유산의 일부였다. 새 정부 추산 전국적으로 피난민 1000만 명, 전쟁미망인 100만 명, 고아 88만 명, 불구자 36만2000명, 그리고 실업자가 300만 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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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Nick Ut / AP) 1972년 6월, 남-베트남 군인들이 [미 공군의] 네이팜탄 폭격으로 겁먹은 아이들을 인솔하고 있다. |
서방의 잔인한 경제 봉쇄
경제는 혼돈 상태였다. 해방의 날이 왔을 때, 인플레이션은 900%로 치솟았다. 논의 나라인 베트남은 쌀을 수입해야 했다. 파리 평화 회의에서 미국은 박살난 인프라 재건에 35억 달러를 제공키로 합의했지만, 단 1센트도 지불하지 않았다. 미국은 공산당 정부의 적인 사이공 정권에게 빌려주었던 수백만 달러를 갚으라고 요구함으로써 빈궁한 나라를 모욕했다. 베트남 경제는 세계와의 무역과 원조를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전쟁에서 지자마자, 미국은 전쟁으로 파산한 나라와의 수출입을 금지함으로써 무역 봉쇄를 강요했다. 또한 다른 나라에 압력을 가해 미국의 정책을 따르도록 했다. 같은 방식으로 미국은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 유네스코 같은 국제기구들이 베트남에 원조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미국은 에이전트오렌지가 심각한 질병과 선천적 기형을 유발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보상금으로 자국 참전군인들에게 20억 달러를 지불했다. 하지만, 200만이 넘는 베트남 희생자들은 아무 보상도 받지 못했다.
이런 적대적 경제 봉쇄 속에서 어느 경제 모델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베트남의 사회주의 프로젝트가 붕괴하는 건 불가피했다. 베트남은 조야한 사회주의 정책을 채택했고 농민들에게 배급증을 주면서 곡물을 넘기도록 강요했다. 생산 인센티브가 없으니, 소출도 엉망이었다. 인플레이션이 전시 수준으로 폭등했고, 다시 쌀을 수입해야 했다. 1980년대 초 공산당은 "사회주의 지향의 시장 경제"라는 노선을 공식 채택했다.
미국이 강요한 굴욕적 타협
이 전환으로 커피 레이디는 1988년 봉제 공장을 떠나 노점상이 될 수 있었다. 매일 아침 네 시에 일어나 시내로 나가 커피를 준비한다고 그녀는 말했다. 다섯 시면 신문사 앞에 작은 의자를 놓고 일을 시작했다. 90년대 내내 모든 게 변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허용됐다. 사기업이 장려됐다. 자유로운 상거래, 자유로운 시장, 이윤, 임금이 돌아온 것이다.
정부는 비밀리에 워싱턴에 타협하자는 신호를 보냈다. 재건 원조금 35억 달러, 에이전트오렌지와 전쟁범죄에 대한 보상 요구를 중단했다. 심지어 구(舊) 사이공 정권의 전쟁 부채 1억4600만 달러 상환에도 동의했다. 양보를 받은 미국은 1994년 거의 20년 동안 베트남을 질식시켰던 무역 봉쇄를 해제했다.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 기금 공여 기관들이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경제는 한 해 8.4% 성장했고, 곧 베트남은 세계에서 가장 큰 쌀 수출국의 하나가 됐다.
90년대 내내 공산당 안에는 새 조류인 자본주의에 대항해 사회주의를 지키려던 당파들이 강력하게 존재했다. 혼돈에 빠진 경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들 분파는 극적으로 빈곤을 감소시키는 데 성공했다. 전쟁이 끝났을 때, 베트남 인구의 70%가 공식적인 빈곤선 아래에서 살았다. 1992년엔 그 비율이 58%, 2002년엔 32%까지 떨어졌다.
동시에, 정부는 모든 마을에 초등학교를, 거의 모든 마을에 중고등학교를 지었다. 또한 무상의료의 기본 토대를 세웠다. 사회주의 당파들은 새로운 자본주의 수단을 지령하는데 충분한 정치적 힘을 갖고 있었다. 90년대 세계은행은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는 조건으로 수억 달러에 달하는 추가 대부금을 공여하겠다고 세 번이나 제안했다. 베트남 정부는 거절했다.
하지만 2000년부터 변화 속도는 빨라졌고 정치적 균형은 변했다. 국제 공여 기구와 외국 투자자들의 지속적인 압력을 받아들여 베트남 정부는 결국 국영기업의 매각을 승인했다. 또한 미국과의 무역 협상을 성사시켜, 마침내 2006년 세계무역기구 회원국 자격을 얻었다. 이는 외국 투자와 원조의 급증을 뜻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전쟁에서 승리자로 등장한 이후 30년 만에 베트남은 세계화된 자본주의 경제에 완전히 통합되었다. 결국 서방이 승리한 것이다.
배신당한 혁명
이 모든 변화를 사이공 거리의 커피 레이디는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변한 게 없었다. "벌이는 같고, 같은 집에서 산다"고 그녀는 말한다. "가게엔 물건이 많아졌지만, 값도 계속 올랐다. 나라는 변했지만, 나 같은 사람을 위한 건 아니다. 연줄을 가진 사람은 부자가 됐다." 요 몇 해 동안 그녀는 베트남 브랜드인 쭝 응우옌(Trung Nguyen) 커피만 팔았다. 그녀는 여전히 가난하지만, 쭝 응우옌 커피 회사를 소유한 남자는 자유로운 기업 활동의 새로운 조류에 올라탔고, 지금은 1억 달러 자산가가 되었다.
신문사 사무실엔 응우옌 꽁 케(Nguyen Cong Khe)가 앉아 있었다. 그는 커피 레이디의 노점상 옆 건물에서 <딴 니엔(Thanh Nien)>을 편집했다. 케는 편집장 시절 사이공의 조직폭력배와 고위관료들 사이의 연줄을 폭로하고 공적 자금 절도에 연줄 좋은 가문들이 연루됐다는 추문을 다룬 기사로 권력자들을 화나게 만들었다. 베트남 정부는 공식적인 검열 제도를 어설프게 운영하고 있는데, 매주 편집장들을 소집해 뭘 다루고 뭘 숨길 지를 통보한다. 하노이는 화요일에 사이공은 목요일에 소집한다. 케는 2008년 해고됐다.
작년 11월 케는 위험을 또 무릅썼다. <뉴욕타임스>를 이용해 정부에 언론 자유 허용을 요구했다. 지금은 뉴스 웹 사이트를 운영하는 사무실에 앉아 일을 저지른 것이다. 베트남 공산당 지도부는 자기 대의의 배신자가 됐다고.
"처음엔 혁명을 성공시킨 사람들이 정부를 만들었을 때, 그들은 가장 공정한 방식으로 나라를 발전시키고 번영케 하겠다는 좋은 의도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선가 잘못되기 시작했다. 혁명에 참가했던 이들이, 투명하겠다고 선언했던 이들이 결국 자신들의 약속과 사상을 배신해 버렸다."
부패와 불평등
케 자신도 혁명의 일부였다. 1970년대 초 학생으로 반미 선동을 했고, 삼년 동안 철창신세를 졌다. 여러 해 동안 당원이었다. 그는 당 지도부가 경제에 시동을 걸기 위해 자본주의라는 수단에 의지했던 이유를 이해한다. 하지만, 그는 신자유주의 동전의 어두운 면, 즉 부패와 불평등을 목도해 왔다.
거리 곳곳에서 부패와 불평등을 볼 수 있다. 어두웠던 과거에도 불구하고 사이공은 상업 활동으로 북적거린다. 하지만 사이공은 모든 면에서 빈곤의 흔적이 역력한 개발도상국의 도시다. 동 커이 거리가 있다. 신흥 엘리트가 500달러짜리 헤르메스 티셔츠, 1만5000달러짜리 베르사체 손목시계, 6만5000달러짜리 금박 송아지 가죽으로 된 4인용 의자가 딸린 오리털로 채워진 식탁을 살 수 있는 방종한 부의 섬이다.
거리 모퉁이에는 있는 콘티넨털 호텔에선 한 끼 가격이 노동자의 주급인 식사를 판다. 레스토랑 이름은 호찌민 얼굴에 마지막 일격을 가한다. 르 부르주아.
케는 공공 프로젝트에 10달러가 배정됐다면, 7달러는 누군가의 주머니로 흘러간다고 말했다. 정말? 베트남 국가 예산의 70%가 도둑질당하고 있다? 믿기 어려운 비율의 절도다. 통역을 통해 말하니,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손을 공중에 휘젓는다. "50에서 70% 사이."
작년 국제투명성기구는 베트남을 세계에서 가장 부패한 나라들 가운데 하나로 보고했다. 100점 만점에 31점으로 118개국보다 나빴다.
"붉은 자본가들"
부패가 새로운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베트남에선 관리들이 자신의 영향력을 팔아 가족의 편의를 봐주는 게 하나의 전통이다. 하지만, 현 지도부 하에서 그 수준이 새로운 단계에 달했다는 주장이 있다. 사람들은 특히 베트남의 거대한 국영기업들을 민영화하는데서 문제가 커졌다고 말한다. 일부 정치인과 관료들이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이나 자기 가족을 고위직에 앉힌 것이다. 베트남에서 2년간 동남아의 개발 문제를 연구한 영국 학자 마르틴 게인즈버러(Martin Gainsborough)의 말이다. "관리들은 개혁주의 이상에 고무되기보다 부패한 욕망에서 동기 부여를 받아왔다. (...) 우리가 종종 '개혁'이라 부르는 것은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금융 및 기타 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얻으려는 경쟁자의 시도에 다름 아니다."
최근 세 달 동안 한 웹 사이트가 베트남 파워 엘리트들의 비행에 관한 주장을 상세히 실었다. <쩐 중 꾸엔 륵(Chan Dung Quyen Luc: '권력의 초상화'라는 뜻)>이란 이름의 사이트는 서류와 녹음자료, 동영상으로 주장을 뒷받침했다. 사실이 명확히 확인되지 않았지만, 관찰자들은 이 사이트가 경쟁 상대에 손상을 가하는 데 내부 정보를 이용할 만큼 힘을 가진 정치인의 작품으로 추측했다. 사이트는 비밀스런 도둑질의 세계에 대한 짧은 경험을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사이트는 한 지방 관리가 100만 달러가 든 가방을 집으로 배달했고, 그 덕택으로 "대개발"에 참여한 부동산 회사가 1억5000만 달러의 세금을 내지 않게 됐다고 주장하면서 최상층 인사를 공격했다. 그 회사는 지방 관리와 최상층 인사에게 빌라를 무상으로 제공했다. 사이트는 지도급 정치인 두 명을 지목하면서 이들이 부패 은행가에 대한 기소를 막았으며, 대가로 거액의 뇌물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국영기업에서 1억 달러가 누이의 은행계좌로 흘러들었으며, 그 인척은 지금 사업을 스무 개나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사이트는 고위 군부 인사가 자기 아들의 회사를 이용해 군대 땅을 팔아 사적 이익을 남겼다고 비판했다. 그 사람이 "거대 부패 네트워크"의 일부라는 주장을 담은 은행 직원의 편지를 수백만 달러가 표시된 은행계좌와 함께 사이트에 올려놓기도 했다.
국가는 때때로 부패를 인정하고 부패를 척결하기도 한다. 작년 말 세간의 이목을 끈 재판이 열렸다. 전직 국영기업 임원 네 명이 뇌물과 사기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두 명은 무기징역에 처해졌다. 케는 이 재판들이 전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노동법 물 타기
"우리는 수백만의 목숨을 독립과 평등과 바꿨다. 감옥에서 나는 전쟁이 끝나면 부패 없는 나라가 될 것이라 상상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나라의 발전은 이뤄져야 하지만, 적법하게 돈을 버는 사람들을 해하는 쪽으로 가선 안 된다. 사람들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 불법적인 방식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을 허용해선 안 된다."
그는 가장 아픈 곳을 건드렸다. 초기 보여준 공정한 경제 발전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은 더 이상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세계은행 2012년 보고서는 "불평등이 다시 의제가 되고 있다"고 했다. 2014년과 2010년 사이 하위 10%의 소득이 5분의 1이나 떨어진 반면, 상위 5%의 소득은 전체 소득의 4분의 1을 차지했다.
가장 심각한 불평등은 농촌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다. 수백만의 농부가 공장이나 도로 건설 때문에 토지를 잃어야 했다. 90년대 초, 거의 모든 농촌 가구(91.8%)가 땅을 갖고 있었다. 2010년에 되자 농촌 가구의 22.5%가 땅이 없게 됐다. 빈농층은 도시로 대거 유입되어 민영화된 기업에서 해고당한 수십만의 노동자들과 합류하고 있다. 이 거대한 인간 파도는 개인집이나 거리에서 장사를 하는 "비공식 부문"이나 새로운 산업 단지와 수출 가공 지역으로 빨려들고 있다.
비공식 부문에선 어떠한 보호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산업 지역에서조차 실질적인 보호가 눈에 띄게 약해졌다. 베트남의 노동문제 전문가 안지 응옥 쩐(Angie Ngoc Tran) 교수는 자신의 책 <결박(結縛) Ties That Bind>에서 한때는 진보적으로 유명했던 이 나라의 노동법이, 부분적으로는 미국상공회의소 같은 단체들의 로비로 물 타기 된 지 오래라고 설명한다. 국가가 후원하는 노조들은 약화됐고, 이 노조들은 파업을 조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외국인 투자와 국영기업 민영화의 방식으로 베트남에 들어온 투자가 급증함에 따라, 국가는 인민의 편에서 행동하는 정부의 모습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 국가 조직과 기관 일부는 자본가들과 연합하고 있다."
모든 노동자가 최저 임금을 보장받고 있다. 1990년 첫 도입 당시 최저 임금은 "생활 임금"에 맞는 수준에서 정해졌다. 생활필수품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여러 해가 흘러 외국 자본을 잃을 수 있다는 공포 때문에 정부는 최저 임금을 동결했고, 인플레이션은 최저 임금의 실질 가치를 떨어뜨렸다.
고삐 풀린 신자유주의로 가나
그 결과 2013년 4월에는 정부의 통제를 받는 노조가 최저 임금이 생활 필수 비용의 50%는 되어야 한다며 항의에 나서기도 했다. 노조연맹에 따르면, "도시 노동자 대부분은 극빈하고 육체적으로 쇠약한 상태다. 노동자들은 싸고 허름한 셋방에 살며, 생활비를 최저 수준으로 줄였다. 영양실조와 건강 문제가 심각하다"고 말했다.
이제 의료와 교육은 더 이상 무상이 아니다. 세계은행 보고서는 "소득이 기본 서비스에 대한 접근권을 더 많이 결정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정부는 빈곤층을 위한 마을 보건소보다 부유층을 위한 병원에 훨씬 더 많은 재정을 지출했다.
베트남은 경제가 마비된 국가가 절대 아니다. 전쟁 복구는 거의 기적에 가깝다. 특히 영국같이 발전한 나라들에서 빈곤이 느는 동안 빈곤을 줄인 나라다. 하지만 오늘의 현실은 두 체제에서 가장 나쁜 것인 권위주의 사회주의 국가와 고삐 풀린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로 마감되고 있다.
이 둘의 결합은 베트남 인민으로부터 돈과 권리를 박탈하면서 혁명의 수사 뒤에 숨은 극소수 엘리트의 주머니를 채우고 있다. 전쟁에선 승리했지만 평화에선 패배한 베트남의 지도자들이 사회주의자라는 주장은 속빈 선전에 불과해 보인다. 한 때 목숨을 걸었던 전직 게릴라가 한 말처럼 "그들은 붉은 자본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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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러잖아도 꼭 번역해서 소개하려던 글인데요..
마침 프레시안에서 먼저 번역했기에 일손을 덜게 됐습니다..
오늘의 베트남을 이해하는 데 좋은 글이라고 생각됩니다..
아울러 한국 군의 양민 학살 이야기가 이런 방식으로
국제언론들 사이에서 맨 앞에 회자되곤 하는 판이죠..
더 이상 우리끼리 쉬쉬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란 말이죠..
저도 얼마전 이 기사를 읽었는데 오랜만에 접하는 아주 훌륭한 글이라고 감탄했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두단락이 현실을 기막히게 지적하고 있지요. 개인적으로 일상에서의 부패체감도는 베트남이 오히려 캄보디아를 능가한다고 생각합니다.
베트남의 부패 문제가 정말 심각한 것 같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