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삼릉 찾아보기
2003. 12. 27. 토요일 오후 서오릉 둘러보기를 마치고 바로 서삼릉으로 가기 위하여 큰 길로 나왔으나
택시를 잡지 못하여 한동안 기다렸다. 서오릉에서 멀지 않은 곳인 고양시 원당동에 서삼릉이 위치하고
있는 것만 알고 있고 가는 길은 정확히 모른다. ‘개똥도 약에 쓸려면 없다’고 하는데 오늘 택시잡기가 그 꼴이다.
간신히 택시를 잡아타고 서오릉로를 따라 고양방면으로 가다가 한양컨트리클럽을 가기 전에 우회전하여
농협대학 방면으로 길을 틀어 오솔길을 꽤나 기어 들어가면 서삼릉이 나온다. 택시요금은 6,000원 정도
나왔으나 1,000원을 더 붙여 지불하였다. 서삼릉을 오려면 승용차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겠고 버스
이용은 힘이 들 것 같다. 전에는 서삼릉이 서울에서 많이 떨어진 것으로 알았으나 지금은 말만 경기도이지
서울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옛날 대학시절에 친구들과 서삼릉에 놀러가서 소주를 진탕 마시고 취했던 기억이
있으나 서삼릉에 누구의 능이 있는지 관심은 없었고 오늘 와보니 옛날 기분을 느낄 수 없다. 한국마사회 원당
종마목장 좌측에 서삼릉이 자리를 잡고 있다. 서삼릉에는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희릉], 철종과 철인
왕후 김씨의 [예릉], 인종과 인성왕후 박씨의 [효릉]이 있는데, 능이 세 개 있다고 하여 서삼릉이고, 사적
제200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재청 고양지구 서삼릉출장소에서 관리를 하고 있다. 서삼릉에는 3개의 왕릉
이외에도 소경원(인조의 큰 아들인 소현세자의 원), 의령원(추존왕 장조의 큰 아들이며 영조의 세손인 의소세
손의 원), 효창원(정조의 원자 문효세자의 원) 등 3원과 46묘에 태실 54기가 있다. 역시 입장료 500원을 내고
서삼릉 안으로 들어가 왼쪽부터 차례로 둘러본다. 희릉은 비공개능이라 예릉과 희릉을 중심으로 보기로 한다.
서삼릉 조감도
2. 효창원(孝昌園)과 의령원(懿寧園)
매표소를 지나 좌측으로 난 길을 따라 가다가 관리사무소 좌측으로 길을 틀면 효창원과 의령원이 나온다.
오늘 이 시간 서삼릉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나뿐이고 다른 관람객은 보이지 않는다.
고리타분하게 옛 능이나 무덤따위를 둘러보고 무엇을 하겠느냐고 힐문할 사람이 있을 것이나 과거는
현재의 거울이고, 과거 없는 현재, 현재 없는 미래가 어디 있을 수 있는가? 나는 다만 상식적으로라도
우리 주위에 있는 문화유적들을 돌아보고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나름대로 탐색하는 시간여행을
해보는 것이 전혀 무의미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효창원은 정조의 큰 아들인 문효세자의 묘소
이다. 문효세자는 정조와 의빈 성씨 사이에서 태어나 5세의 나이로 세상과 하직하는 바람에 정조와 수빈
박씨 소생인 순조가 조선 제23대 왕위에 오른다. 효창원은 말 그대로 처음에는 용산구 효창공원 내에
있었으나 일제말기인 1944년에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효창원과 의령원의 정자각 대용의 전각
의령원은 영조의 아들 장조(사도세자)의 큰 아들 의소세손의 묘이다. 의소세손도 3세의 나이로 죽는 바람에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있던 의령원을 1949년 이곳으로 이장한 것이다. 비문의 글씨는 영조의 어필이다. 결국
사도세자의 둘째 아들인 정조가 영조에 이어 왕위를 이어받는다. 이들이 너무 일찍 죽어서 그런지 홍살문
이나 참도도 없고 정자각도 보통의 정자각과 달리 一자 형태의 세 칸 전각으로 되어 있다. 봉분은 앞뒤로
두개가 설치되어 있는데 앞에 있는 것이 효창원이고, 뒤에 있는 것이 의령원이다.
앞쪽의 봉분이 효창원, 뒷쪽이 의령원
3. 예릉(睿陵 : 제25대 철종과 철인장왕후의 능)
효창원을 나와 관리사무소를 지나 진행하게 되면 예릉이 나온다. 다른 능에서는 보기 어려운 禁川橋를
지나 홍살문으로 가게 된다. 예릉은 조선 제25대 철종과 그의 비 철인왕후 김씨의 능이다.
예릉 - 금천교를 지나 홍살문으로 이어지는 길
홍살문을 지나 望燎位가 있고 참도가 있는 것은 다른 능과 다르지 않으나 참도의 형태가 특이하다.
보통은 참도의 왼쪽은 신도라고 해서 선왕의 혼령이 다니는 길로 높게 만들어져 있고, 오른쪽은
어도라 해서 왕이 걸어가는 길로 낮게 만들어져 있으나 예릉의 참도는 가운데가 높게 만들어져 있고
좌우측으로 낮게 만들어져 있어 길이 세 갈래 길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세 갈래 길은 정자가 앞에서
좌우로 두 갈래 길로 만들어져 동입서출에 따라 동쪽에 정자각으로 올라가는 계단 2개가 서쪽에
내려가는 계단 1개가 만들어져 있다.
예릉의 홍살문과 참도-정자각
능을 바라보고 왼쪽에는 철종의 능이, 오른쪽에는 철인왕후의 능이고, 두 개의 봉분을 난간석으로
연결한 동원쌍봉릉이다. 능은 문인석과 무인석이 한 쌍씩 서있는 등 왕릉의 형식을 모두 갖춘 것으로
보인다. 문무인석의 모습이 다른 능보다 크게 느껴진다.
철종과 철인왕후의 능
철종은 장조(사도세자)의 증손자이며 전계대원군의 셋째 아들이다. 헌종이 15년 만에 후사 없이 죽자
강화도에서 지게지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던 19세 청년 강화도령 원범이 순조비인 대왕대비 순원왕후
의 명에 따라 제25대 왕으로 즉위하는데 이 왕이 철종이다. 조선 역사에서 이렇게 극적으로 왕이 된
예가 없다. 실제로 철종은 왕 노릇을 하는 것보다 농사를 지으며 사는 것이 더 낳았는데 시대의 격랑에
휩쓸려 뭐가 뭔지 모르고 왕위에 있었던 왕이었다. 철종이 20세가 되지 않은 관계로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대왕대비의 근친인 안동 김씨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맞게 되자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절정을 맞는다. 삼정의 문란을 뿌리 뽑기 위해서는 세도정치의 싹을 잘라야 하는데
철종으로서는 그런 힘이 없었고 그것이 원시적 불능이었다. 철종의 재위기간은 1831년 6월부터 1863년
12월까지 14년 6개월이고 33세에 죽었다. 힘이 없었던지 부인 8명에서 딸 하나(영혜옹주)만을 얻었다.
이 영혜옹주가 금릉위 박영효에게 출가한 것이다. 철종의 비 철인왕후는 철종이 죽고 고종이 즉위하에
왕대비가 되었으며, 고종 15년에 죽자 철종이 묻힌 서삼릉의 예릉 곁에 안장되었다.
4. 희릉(禧陵 : 제12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능)
예릉을 나오면 희릉으로 가는 길이 나오는데 희릉은 서삼릉에 제일 먼저 조성된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능이다. 장경왕후의 희릉은 원래 대모산 기슭의 헌릉 서쪽에 조영되었던 것을 불길하다 하여 중종 32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그 후 중종의 정릉이 희릉 옆에 조성되었다가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의
주장으로 정릉이 서울 강남구 삼성동 靖陵으로 천장된 것이다. 선정릉에 선릉과 정릉이 있다.
희릉의 홍살문과 정자각
홍살문을 통하여 참도를 따라 정자각으로 가게 되면 정자각의 우측에는 참도가 이어지지 않고 있다.
능이 워낙 높이 조성되어 있어 정자각 위로 올라가서도 능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헌인릉
에서처럼 능원의 한쪽으로 오르막 계간 같은 것을 만들어 능을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해주면 좋을
텐데 서오릉이나 서삼릉 모두 능을 가까이서 보기는 어렵게 출임금지 줄을 쳐놓고 있다. 장경왕후는
중종비 단경왕후 신씨가 폐출되자 왕비에 책봉되었으나 중종 10년 원자(인종)를 낳고 산후병으로
7일 만에 25세 나이로 죽었다. 중종반정 공신들이 중종비 신씨의 아버지 신수근이 반정 때 피살된
사람 중의 하나이므로 정적의 딸을 왕비로 둘 수 없다는 이유로 중종에게 억지로 왕비를 폐하게
함에 따라 신씨는 인왕산 아래로 쫓겨나왔고 신씨는 날마다 중종을 그리며 붉은 치마를 내다
걸었다고 하는 “치마바위”가 있다.
5. 효릉(孝陵 : 제12대 인종과 인성왕후의 능)
〈비공개〉
희릉을 대충 둘러보고 나와서 매표소에서 효릉을 볼 수 없느냐고 했더니 비공개라서 볼 수 없다고 한다.
효릉은 제12대 인종과 인성왕후 박씨의 능이다. 인종은 중종과 장경왕후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나
생모인 장경왕후가 7일 만에 죽고 계모 문정왕후의 손에서 자란다. 인종은 1544년 중종이 죽자
조선 제12대 왕위에 올랐으나 마음이 여려 제대로 정사를 펼칠만한 위인이 되지 못했고, 재위
기간은 불과 9개월이 못된다. 조선의 역대 왕 중에서 가장 짧은 재위기간이다. 인종이 빨리 죽은
것은 문정왕후의 독기와 시기심 때문이라는 말이 많다. 제목은 잊어버렸지만 근래 TV드라마에서
전인화가 표독스러운 문정왕후의 연기를 실감나게 한 바 있다. 결국 문정왕후의 아들인 경원대군이
제13대 명종이 된다.
6. 기 타
이 이외에도 서삼릉 경내에는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의 묘인 소경원(昭慶園)과 46개의 묘와
태실 54기가 들어선 것으로 되어 있는데 찾아보지 못했다. 서삼릉 경내에 있는 묘 중 회묘와
경선군묘를 제외한 묘는 후궁과 왕자묘, 공주묘로 구분어 집장되어 있다. 본래 왕릉에는 후궁이나
왕자, 공주의 묘를 쓸 수 없으나 일제는 서울과 경기에 흩어진 묘들을 이곳으로 모아 집장한 것이다.
고종의 1남 완화군묘도 이곳으로 옮겨왔다. 회묘(懷墓)는 성종비였으나 폐비된 윤씨(연산군의
생모)의 묘이다. 원래 회묘는 경희대 자리인 天藏山(경희대 본관 뒷산, 현재는 산 이름이 고황산
으로 바뀌었다. 회기동의 이름도 여기서 유래한 듯) 아래 민묘로 있었던 것을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제헌왕후라는 시호를 올리고 윤씨의 묘에 회릉(懷陵)이란 능호를 붙이고 왕릉으로 꾸몄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물러나자 윤씨의 묘는 왕비릉에서 다시 묘로 격하되었으나 왕릉으로
조성한 상태를 유지하여 왕릉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회묘는 학교공사 때 서삼릉으로 이장하였다.
폐비 윤씨는 후궁으로 있다가 성종의 원비 공혜왕후 한씨(한명회의 딸)가 죽자 왕비가 되었으나,
성종이 후궁들을 총애하면서 질투의 화신이 되었다가 폐비되고 사약을 받는 운명을 맞는다.
조선조에서 남성의 외도는 후손을 늘리기 위해 당연한 것이었으나 여성의 질투는 이를 방해하는
것으로 허용되지 않았다. 여자의 투기는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칠거지악(七去之惡)의 하나였다.
어머니의 비극을 모른 채 왕위에 오른 연산군이 어머니의 비극을 알게 되면서 할머니인 인수대비
까지 머리로 받아버리고 한명회를 부관참시하는 등 폭정을 일삼다가 중종반정으로 몰락한다. 조선
시대에는 왕실에서 태어난 출생아의 胎를 태호에 담아 전국의 길지를 가려 석실을 만들고 그 안에
태를 넣어 묻었는데 이를 胎室 또는 胎封이라 한다. 일제는 태실을 집중관리한다는 명목으로
태조의 태실 등 22기와 왕자의 태실 등 32기를 서삼릉으로 옮겨놓았다고 한다.
7. 돌아오기
시간이 없어 서삼릉 관람을 대충 마치고 나오니 서울로 돌아가는 것이 막막하다. 일단 큰 길로
걸어서 나왔으나 택시도 없고 지나가는 승용차에 동승해보려고 보니 모두 짝짝이들 타고 있어
그들 기분 잡치게 동승하자고 말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마침 택시 한대를 잡아타고 기사에게
구파발로 갈 것을 주문하였다. 그런데 얼마쯤 가다가 보니 지하철역이 보여(삼송역-농협대입구)
바로 택시를 세워 지하철 3호선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토요일 오후 세 시간여를 나름대로 의미
있게 보냈다. 산행을 마치고 그냥 돌아갔더라도 사우나를 하던지 술을 더 마시던지 시간보내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공순영릉과 온릉은 다음 구파발쪽에서 북한산 산행이 있을 때 한 번 둘러
보기로 한다. 오늘 북한산 산행을 마치고 오후 시간에 서오릉과 서삼릉을 주마간산이나마 돌아
볼 수 있었으니 나름대로 오후 시간을 잘 활용한 셈이다. 몇 개의 왕릉 둘러보기를 통해 잠시 이
나라 과거로의 여행을 다녀오면서 과연 역사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