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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안산 죽산 2
기다리지 마시고 스스로 부처님 되세요
봉업사의 흥만성쇠
고려의 창업을 기리는 봉업사가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이 아니라 죽산에 세워진 배경을 이해하려면 신라 말기로 거슬러 올라가, 죽산과 인연을 맺고 역사 속에서 명멸(明滅)했던 인물을 살펴보는 데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 중심에 궁예(弓裔)가 있다.
죽산 일대는 후백제를 세웠던 궁예가 젖먹이 시절부터 청년이 될 때까지 살았던 고장이다. 그는 신라 제 47대 헌안왕(憲安王)과 후궁 사이에서 태어났으므로 신분은 왕자고, 당연히 출생지는 현재의 경주인 서라벌이었다. 금지옥엽(金枝玉葉)으로 그야말로 금이야 옥이야 잘았어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출생 직후 일관(日官)이 그를 키우면 나라를 크게 어지럽히는 인물이 될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생사(生死)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신라 조정에서는 중요한 국가적 대사를 결정할 때 일관의 진언을 참고로 했었는데, 그런 일관이 신생아를 기피 인물로 진언하자 헌강왕은 눈물을 머금고 신생아를 포대기에 싸서 누하(樓下)로 던져 버리게 하였다. 일관이 그런 주청을 한 것은 후궁의 몸에서 태어난 왕자가 보위를 잊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은 중전의 사주를 받은 때문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궁예는 누하로 내던져졌지만 죽지는 않았다. 생모의 지시를 받은 시녀가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아이가 떨어지자 받아 안았기 때문이었다. 생명은 구했지만 불행히도 이때 시녀의 손가락이 아기의 눈을 찔러 애꾸눈이 되고 말았다. 시녀는 아기를 데리고 36계를 놓았다. 서라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지금의 충청도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 궁골로 숨어들은 다음 온갖 고생을 하면서 부왕으로부터 버림받은 왕자를 키웠다. 궁골은 칠장사가 가람을 배치한 칠현산 자락이어서 옛날에는 이곳도 죽산현에 속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궁예의 어릴 때 이름은 착하게 자라라는 뜻에서 지어진 착한마루였지만, 애꾸눈인 것이 빌미가 되어 애꾸 애꾸 하다가 꿍예가 되었고, 그것이 궁예로 굳어진 것이었다. 궁예는 이곳에서 시녀를 어머니로 알고 성장하여 마침내 청년이 되었다. 청년 궁예는 한때 기훤(箕萱)과 더불어 죽산에서 건달 노릇을 하며 지냈었다. 같은 고장에서 살았던 기훤과 궁예가 서로 힘깨나 쓰는 것으로 죽이 맞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신라 51대 진성(眞聖) 여왕은 내행(內行)이 부정한 여자였다. 미장부들을 궁으로 모아들여 그들과 더불어 음란한 짓을 하고, 저들에게 국정을 맡기는 파행을 저질렀었다. 국가 경영 능력이 없는 약관의 소년들은 여왕의 신임만 믿고 상벌(賞罰)과 임면(任免)에 있어 공정을 기하지 못하게 되니 기강은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중앙의 흐린 정치는 곧 지방행정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민심이 동요하고, 납세 의무 준수를 기피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게 하였다. 급기야 왕권의 위령(威令)이 서지 않는 틈을 도타 난을 일으키는 무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죽산을 근거지로 삼았던 사람이 기훤이다. 기훤은 일대의 건달들을 규합하여 병력을 증강시킨 다음 스스로를 죽주장군이라 칭하였다. 그는 고을의 태수를 몰아내고 죽산을 장악하였다.
이럴 즈음 궁예는 무위도식하는 생활에 염증을 느꼈던지 출가하여 스님이 되어 있었다. 그의 출가 본사는 세달사(世達寺)며, 은사는 허공(虛空) 스님이었다. 궁예의 수계 법명은 선종(善宗)이다. 궁예가 왕건(王建)을 만나 사귄 것은 세달사 수좌 시절이다.
어느 날 궁예는 경내를 거닐고 있었다. 이때 날아가던 까마귀가 궁예가 가지고 있던 발우(鉢盂)속에 왕(王)이라는 글자가 적인 아찰(牙札)을 떨어 뜨렸다고 한다. 장차 자신이 왕이 될 것을 하늘이 알려준다고 생각한 궁예는 그로부터 수행 생활을 청산하고 산문(山門)을 나섰다.
궁예는 처음 죽산의 기훤을 찾아갔었다. 옛정을 생각하여 부장(副將)이라도 시켜 주면 그것을 맡았다가 기회를 보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기훤은 승복 차림의 궁예를 예로써 대하지 않았다. 기훤에게 홀대를 당한 궁예는 다음으로 원주의 양길(梁吉)을 찾아갔다. 양길은 궁예를 대장으로 삼았다.
철원과 개성을 손에 넣은 직후에 양길을 몰아내고 마침내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는 왕건으로 하여금 강원도와 경기도의 대부분과 충청북도 북반부에 이르는 넓은 땅을 속속 예속시키는 전과를 거두게 하였다. 궁예에게 성격 파탄의 면모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고친 직후부터다.
미륵불(彌勒佛)을 자처한 궁예는 강설(講說)하는 것을 즐겼다. 석총(釋聰) 스님이 궁예의 강설을 듣고 모두 사설(邪說)이며 괴설(怪說)이라고 하자 대로(大怒)한 궁예는 그를 철추로 쳐서 죽여 버렸다. 충간하는 부인 강 씨에게는 남과 간음하였다는 죄목을 뒤집어씌운 다음, 쇠절구공이를 불에 달구어 음부(陰部)를 지져서 죽였다. 이후 독심술(讀心術)을 할 줄 안다며 사람을 빤히 바라보다가 모반을 획책했다는 죄명을 씌워 처형하는 일이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왕건도 문제의 독심술에 걸려들어 생명을 잃게 될 위기에까지 몰린 적이 있었다.
궁예의 명을 받든 왕건은 광주 수원 죽산 충주 괴산 등을 거두고 다녔는데, 이때 민심이 궁예를 떠난 것을 알게 된 왕건은 궁예를 내치고 기강이 살아 있는 새나라를 세워야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시기가 왕건이 죽산을 평정한 직후의 일이 아니었을까. 기훤 장군은 왕건에게 투항한 것으로 되어 있다. 기훤의 투항은 왕건에게 날개를 달아 주었다. 기훤은 왕건에게 투항을 하면서 조건을 달았다.
“애꾸눈 궁예는 소장이 어린 시절부터 잘 알고 있습니다. 일개 고을의 망나니에 불과하지 대업을 이룰 인물이 되지 못합니다. 그릇이 안 되는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갈수록 실정이 거듭될 것입니다. 연전에 궁예가 소장을 찾아왔을 때 그를 받아 드리지 않은 것은 그의 비뚤어진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상대로 그는 백성들을 도탄에 빠트리고 말았습니다. 원성이 자자합니다. 민초들을 구할 수 있는 분은 대장군뿐이십니다. 대장군께서 궁예를 내치고 천하를 도모하셔야 합니다.”
기훤은 죽기를 각오하고 그런 말을 한 것이었다. 왕건은 죽산을 평정한 다음 궁예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죽산 일대를 은밀히 내탐해본 결과로, 과연 궁예에게는 비뚤어진 면이 많아 갈수록 실정을 거듭할 것이라는 기훤의 말이 틀리지 않을 것을 예감하게 되었다. 때마침 궁예 휘하의 장군 네 명이 강력하게 왕건을 옹립하고 나서게 되었고, 마침내 왕건은 궁예를 제거하기로 결심을 하게 되는데, 그런 결심을 한 장소가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죽산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로부터 얼마지 않아서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운 왕건은 고려 창업을 기리는 절을 하나 세우고자 했을 때 처음 혁명을 결정했던 죽산을 사지(寺地)로 정한 것이라고 가정하면, 봉업사가 죽산에 건립되게 된 의문이 풀리는 셈이다. 왕건이 세상을 뜬 후에는 유언에 따라 그의 영정을 봉업사에다 모시게 되었고, 이후 역대 고려조 왕들은 등극 후에는 물론이거니와 매년 정초가 되면 국사를 대동하고 태조의 영정이 모셔져 있던 죽산을 다녀갔었다는 것 등은 문헌에 전하고 있어 추론이 아닌 사실로 입증이 되고 있다.
고려는 통일신라에 이어 불교를 국교로 했었다. 찬란한 불교문화 유산이 고려조를 살았던 우리 선인들에 의하여 만들어지게 된다. 그 중에서도 고려 창업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져서 태조 왕건의 진영을 봉안하고 있었던 봉업사를 중심으로 한 죽산 불교는 전국에서도 가장 융성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다시 말하면 서라벌이 신라 불교를 꽃피운 곳이라면 그에 버금가는 고려 불교의 찬란한 문화가 활짝 만개했던 곳이 죽산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랬었는데 오늘날의 죽산에서 그 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된 데에 한국 불교가 걸어온 비운의 역사가 총체적으로 집약되어 있다.
숭유억불(崇儒抑佛)의 기치를 내걸었던 조선 5백 년 동안은 불교계에 있어서 긴 폐불의 암흑기였다. 개국 초 신진 사대부들에 의해 찬란한 불교 유산에 대한 무자비한 방화의 막이 오르니 이때 유실된 것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바로 죽산에 터를 잡았던 가람들이었다. 경주는 도성 한양에서 멀리 위치해 있다는 지리적인 이점에다 전전조(前前朝)의 유산이라는 것이 감안되어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바로 전조(前朝)의 창업을 기리고 태조의 영정을 모신 봉업사는 직격탄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지금까지 민간의 마음 깊숙이 부리를 내리고 그들을 조정하고 있는 불심을 몰아내지 않으면 유교의 정당성을 옹립할 수 없다는 것이 조선을 건국한 신진사대부들의 일치된 견해였다. 그들은 방화라는 극약처방을 통해 불심을 태우려고 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임진왜란이나 일제 36년 동안 우리의 불교문화가 유실된 것이 많다는 견해를 펴는데, 일본인들이 우리의 국보급 불교 문화재를 훔쳐가기는 했지만, 그들은 결코 무자비한 방화로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인들은 직접 자신들이 만들지는 못했지만 국보급 문화재를 알아보는 안목은 있었고, 자기들의 눈으로 보아서 가치가 높은 작품들은 일본으로 가져가서 국보로 정하거나 신주처럼 지금까지도 잘 모셔놓고 있다. 문화재급 사찰에 대한 방화는 유교를 국교로 했던 조선의 사대부들이 저지른 것이다. 625의 전화(戰火)까지 거쳐 우리가 우리 손으로 잿더미를 만든 것이 대부분이다. 만약 일본인들이 훔쳐가지 않았다면 그 찬란한 문화유산이 모두 화마의 제물로 받쳐 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일본인들의 수중에 있어도 우리 것이라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인들의 약탈이 오히려 고마울 정도다.
절을 불태운 자리가 논밭으로 바꾸었으니 죽산 일대의 전답 어디에서나 요즘도 기왓장이 나온다. 몇 개의 불상과 석탑이 현존할 뿐이고, 그 나머지 흔적은 행정구역의 이름에서 찾아야 한다. 미륵당 마을이니 관음동이니 하는 것이 그것들이었다. 죽산 일대는 불교를 상징하는 지명이 산재해 있다.
죽산이라는 이름도 불교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재세시(在世時)에 주석 하시던 곳이 죽림정사다. 대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어서 그렇게 부른 것이었다. 이후 절이 세워지면 자연 대나무를 심는 것이 불가(佛家)의 전통으로 이어져 왔다. 죽산의 어느 곳에서도 세죽(細竹)이 자라고 있는데, 대나무가 많아 이름까지 죽산으로 정했지만, 그 세죽들이 또한 이곳이 고려 불교의 최대 성지였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후백제를 세웠던 궁예는 미륵을 자처했었다. 환속했지만 출가사문이었던 그는 누구보다 미륵부처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미륵은 부처님시대가 가고 미래의 어느 때인가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부처님으로 추앙받고 있는 부처님이다.
통일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지방에서는 미륵신앙이 성하지 않는다. 화랑을 미륵의 현신으로 보았었고, 그들이 삼국을 통일하여 통일된 조국에 불국토를 구현했다고 여겼기에 새로 오실 미륵에 대한 기대감이 없었다.
그러나 패망한 백제나 고구려 쪽에서 보면 미래불이 어서 나타나서 구원해 주기를 바라는 미륵 신앙이 성행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김제의 금산사나 보은 속리산의 법주사 등이 모두 미륵신앙의 본산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밖에도 백제나 고구려 땅으로 여겨지는 어디에서나 미륵을 만날 수 있고, 죽산도 미륵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고장이어서 도처에 미륵불이 산재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궁예가 산문을 나와 후백제를 세우는 일에 앞장 선것은 스스로 미륵불임을 자처하고 미륵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미륵이 아니었다. 미륵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속이고 그들의 바램에 편승하여 혹세무민(惑世誣民)한 어리석기 이를 데 없는 중생이었을 뿐이다.
미륵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미륵을 자처하는 가짜 미륵은 그 후에도 몇 차례 더 등장하지만 아무도 기대에 부응한 사람은 없다. 미륵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가 없는 말법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속히 미륵 부처님의 가피가 답지하지 않는다고 하여 실망할 것은 없다. 한 생만 돌리면 인간은 누구나가 다 깨달아지고 깨달으면 부처라고 하지 않는가. 자신이 부처라는 것을 안다면 미륵부처님을 기다릴 필요도 없는 셈이다.
기다리지 마시고 스스로 부처님 되세요.
첫댓글 미륵부처님이든지 파랑새(희망)이든지 언제 올지 모르는 환상을 사람들은 항상 기다리지요.하지만 스스로 깨쳐서 자기의 불성을 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으리라 생각됩니다.스스로 부처 되기를.....감사합니다,스님_()_
잘 읽었습니다. 이쁘게 모셔갑니다.
고려사에성의 궁예에 대한 평가는 승자인 왕건의 편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진실과는 거리가 이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죽산이 궁예가 어린시절부터 청년이 될 때가지 보낸 곳이고, 왕건이 창업을 은밀하게 결심한 역사의 고장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