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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양충(黃亮冲)생몰년 미상 고려조 의창현(義昌縣)정조호장(正朝戶長)을 역임하였다.호장공계 1世 시조로 삼으면서,2세조 황양돈(黃養敦) 고려조 의창현(義昌縣)정조호장(正朝戶長)을 역임했다. 과거에 급제해 금자광록대부 대상(金紫光祿大夫 大相)에 이르렀던3世 황석주(黃石柱) 중 시조로 삼는다. 따라서 영주의 창원 황씨 일문은 황양충(亮冲)황양돈(養敦 : 正朝戶長), 大相公派 世譜 上卷1쪽 3世 황석주(石柱)로 이어지는 계보를 가지는데, 대상에 올랐던 석주(石柱)를 기준으로 삼아 ‘大相公派’라고 칭한다. 석주(石柱)의 선대를 기준으로 하여, ‘호장공계 대상공파’라 칭하기도 한다. 배(配)은 동촌황씨(東村黃氏)이시다.석주(石柱)의 아들 황영렬(黃英烈)은 정순대부 군부판서 응양군 상호군(正順大夫 鷹揚軍上護軍)에 추봉되었고,배(配)동촌황씨(東村黃氏)이다. 영렬(英烈)의 아들 황유(黃裕)는 1308년고려충렬왕 34년 무신 원 무 종지 대 원년에 문과 과거에 급제하여 중현대부 (中縣大夫)전객령(典客令)좌사인(左舍人)과 동래 부사(東萊府使)와1331년에 전객령(典客令)을 역임하였다. 배(配)는 의창공씨(義昌孔氏) 부(父)천기(天紀)의서(婿)다.또 그 아들 황진백(黃眞伯)은1341년 고려 충혜왕 2년복위 신사년(辛巳年)에 종사랑(從仕郞) 침원서 영(寢園署令)을 역임하였다.배(配)은 밀성조씨(密城趙氏)이다. 영주에 세거하는 창원 황씨 일문의 초기 인물들은 토착호족으로서 그 재지적(在地的) 족세(族勢)를 얻은 기반 위에서 다시 과거를 통해 발신함으로써, 이미 이른 시기부터 가문의 사회 경제적 기반을 마련 하였다고 하겠다. 이 일문의 영주 입향조는 진백(眞伯)의 아들인 大相公派 世譜 上卷1쪽7世 황승후(黃承厚)초명은 승영(承演)이시다. 고려 공민왕대에 신호위 정용 중낭장(神號衛精勇中郞將)을 역임하였으며, 누대 세거지인 창원에서 죽주(竹州) 순흥부(順興府) 병산(屛山)으로 이거하였다.배(配)은 죽주안씨(竹州安氏)이시다 그의 아들 황처중(黃處中)은 봉직랑(奉直郞)영일 감무(迎日監務)를 지냈고,배(配)무소유씨(茂松庾氏)이시다. 처중의 두 아들인 황제(黃躋)은 도염서승(都染署承)을역임 하였으며 영주 내마암(內馬巖)으로 이거 하였다.황전(黃躔)은 1391년(고려 공양왕3)~1459년(세조5년) 자는 형보(亨甫) 통례원 봉례(通禮院奉禮)를 지냄으로써, 입향 이후에도 그들의 사환은 이어졌다. 즉 이 일문이 이전 시기부터 누렸던 사회적 기반이 크게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배(配)은 정부인(貞夫人)곡성임씨(谷城任氏)이시다. 특히 大相公派世譜 上卷1쪽6쪽 9世. 황전(黃躔)의 경우, 순흥에 와 있던 금성대군(錦城大君)이 그에게 미곡(米穀)을 주고 아울러 그 가운데 은(銀)을 놓아두었으나, 물건을 수수하는 올바른 의리(義理)를 헤아려 이를 거절함으로써, 후에 순흥 일대에 불어 닥친 일대 화란을 피할 수 있었다. 이러한 황전(黃躔)의 의리에 대하여, 이광정(李光靖)은 봉례황공전별묘봉안문(奉禮黃公전別廟奉安文)에서 “금방 화가 일어나 죽계(竹溪)가 피로 물들었네. 눈앞에서 가혹한 형벌 행해졌으나 공만은 초연하였네. 우리 황씨 면면하니, 아! 공(公)으로 인하여 온전할 수 있었네.[俄頃禍作, 竹溪血赤. 咫尺?粉, 公獨超然. 我黃 公得全]”라고 평하였다. 그는 영주에 정착하여 성장하기 시작한 이 가문이 이후 영주의 한 기축(基軸) 가문으로서 자리매김하는 데에 토대를 연 인물로 평가된다. 이 가문의 주요 인물을 살피기에 앞서, 비교적 선행하는 시기인 조선중기 이전을 중심으로 하여 그 자손들의 이거 상황을 간략히 보면 다음과 같다. 사환을 목적으로 상경하여 한때 서울에서 생활한 경우를 제외하고, 이들의 이거는 대개 남귀여가(男歸女家)의 혼인 풍속에서 기인한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부 피란(避亂) 과정에서 본토와 유리된 경우도 있다. 이렇게 이거한 계열은 몇 세대가 지난 후 다시 고토(故土) 귀환 의지를 가지고, 귀향한 경우도 있으며, 아래에 보이는 바 황유현(黃有顯)의 경우와 같이 끝내 돌아오지 못한 계열도 있다. 첫째, 황승후의 손자 황제(黃躋)는 이후 내마암(內馬巖)으로 옮긴다(현 영주시 휴천동). 둘째, 황전(黃躔)의 손자인 순릉 참봉(純陵參奉) 大相公派世譜上卷1쪽.황희성(黃希聖 : 종사랑 황귀경(黃貴卿)의 아들)은 병산(屛山)에서 풍기의 희야골[白洞]로 옮겨가게 된다. 이는 그가 희야골에 거주하던 고모부 노계조(盧繼祖)의 시양자(侍養子)가 되었던 것에서 기인한다. 아울러 그는 풍기의 대표적 토족(土族)인 풍기 진씨(豊基秦氏) 일원인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진유경(秦有經)의 사위가 되기도 하였다. 백동에 정착한 그는 용헌(慵軒) 황사우(黃士祐) 및 풍저창 직장(豊儲倉直長) 황사호(黃士豪), 현감(縣監) 황사걸(黃士傑)을 낳아 모두 걸출한 인물로 성장시킴으로써, 누대로 백동 일대에 관료와 학자가 배출될 수 있었던 기반을 마련하였다. 셋째, 황전(黃躔)의 아들로 부사직(副司直)을 지낸 황윤경(黃允卿)의 손자 大相公派世譜上卷119쪽12世.황사언(黃士彦) 사재감 정(司宰監正) 역임. (참봉 황희숙(黃希淑)의 아들)은 병산에서 문단(文丹)으로 옮겨갔다. 넷째, 풍저창 직장 사호(士豪)의 아들인 봉화훈도(奉化訓導)大相公派世譜154쪽12世 황여규(黃汝奎)는 남면(南面)의 와룡동(臥龍洞)으로 옮겨간다. 다섯째, 황사우의 아들인 大相公派世譜上卷100쪽12世황서규(黃瑞奎)는 그 장인인 고성군(固城君) 이강(李綱)의 제사를 받들게 되면서 서울로 옮겨갔다. 이는 조선초기 외손봉사(外孫奉祀)의 풍속을 반영하는 것이다. 여섯째, 호(號)송간(松澗)돈녕부사(敦寧府事)황응규(黃應奎)손자 통덕랑(通德郞) 황고(黃杲)의 아들인 大相公世譜上卷24쪽15世.황유현(黃有顯)은 풍기에서 서울 연지동(蓮池洞)으로 옮겼다가, 다시 강화도(江華島)에 들어가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이후 그 후손들은 양양(襄陽 : 예천의 고명(古名)을 가리키는 듯함.)에서 우거(寓居)하는 등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였고, 그러한 가운데 황유현의 묘소는 실전되기에 이른다. 끝으로, 이산 현감(尼山縣監) 大相公派世譜上卷1쪽10世황영손(黃永孫)의 아들인 상원 훈도(祥原訓導) 황창(黃瑒)은 풍기 고로곡(古老谷)으로 이거한 바 있으며, 절충장군(折衝將軍)을 지낸 황명택(黃命澤)은 (大相公派世譜上卷60쪽18世)순천으로 들어가 그곳 군수(郡守)의 사위가 되어 살게 되었다. 영주의 대상공파는 주로 순흥, 백동, 문단 지역 등을 중심으로 세거하면서, 관료 및 처사, 학자를 배출하고, 지역 사림 네트워크의 중심축 가운데 하나로 그 역할을 다하였다. 특기할 만한 인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목천 교수(木川敎授) 大相公派世譜上卷14쪽.황한필(黃漢弼)은 그 문행(文行)이 순흥 지역의 문풍을 크게 진작시킨 바 있었으며, 아울러 외손인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이 늘 그에게서 수학하였다고 한다. 또한 한필의 동생인 우수동주(愚叟洞主) 大相公派世譜上卷20쪽.황한충(黃漢忠)은 그의 ?화당시고취(和唐詩鼓吹)?가 주세붕으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고,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가 그의 은거지인 순흥 우수동(愚叟洞)을 무릉도원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백동의 大相公派世譜上卷28쪽.황사우(黃士祐)는 진사시와1509년(중종4) 별시문과의 甲科에 급제하였다. 경상도 도사 재임 시절에는 사환일기인 재영남일기(在嶺南日記)를 작성하기도 하였으며, 영주 군수로 있을 때에는 인재들을 잘 권면하여 온계(溫溪) 이해(李瀣) 등 많은 선비들이 학업을 성취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그는 성암(省庵) 이지번(李之蕃)과 그 아들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등과 두터운 교분을 맺었으며, 관직이 榮川郡守.1529년대사간 이듬해좌승지거처 副提學京畿監司.1532년한성부우윤.대사현.1534년,형조참판.兵.禮.戶曹判書와 우찬성(右贊成)겸吏曹判書에 이르렀고, 사후에 숭덕사(崇德祠)에 모셔졌다. 또한 석교(石橋) 황득겸(黃得謙)은 올곧은 처사의 풍모를 견지하면서, 침간정(枕澗亭)을 지어 학문 연구에 매진했다.
황사우의 아들인 송간(松澗) 大相公派世譜上卷34쪽13世.황응규(黃應奎)는 생원시와 알성시(謁聖試)에 합격하였으며,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으로부터 “삼대(三代) 이하의 인물이 아니다.”라는 호평을 받았다. 재임 시절에는, 조정에서 그 선발을 엄격히 하였던 사유(師儒)로 선발되었고, 청도와 단양의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아낌없는 선정을 베풀었다. 특히 소수서원에 별재(別齋)를 지어 동몽들을 교육하기도 하였다. 그의 아들인 정익공(貞翼公) 식암(息庵) 황섬(黃暹)은(相公派世譜上卷36쪽14世)약포(藥圃) 정탁(鄭琢)의 문인으로서 생원시와 문과에 합격하였고, 임진왜란 때 충의를 발휘하여 시종 호가(扈駕)하였다. 특히 그는 경세적(經世的) 지략이 탁월하여 국가에 약석이 될 만한 충심어린 의론을 누차 올렸다. 그의 행장을 지었던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그의 헌책(獻策)에 대하여 하나하나 비평을 달고, “그가 전후에 올린 논의는 실로 시폐(時弊)를 구제하는 절박한 것이었다.”라고 총평하기도 하였다.
훈도(訓導) 황여규(黃汝奎)의 아들인 종고(宗皐) 황서(黃曙)는 진사시와 알성문과에 합격하고, 관직으로 정랑(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임진왜란 때 안집사(安集使) 김륵(金?)에 의해 가장(假將)으로 선임되어 병무(兵務)?농무(農務)에 힘쓰는 등 백성들을 안집(安集)하는 데에 혼신을 다하였다. 그런가 하면, 황응규의 아들인 부훤당(負喧堂) 황시(黃是)는 생원시와 문과에 합격하고, 관직이 좌승지와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이르렀다. 그는 김생(金生)을 숭상한 부훤당의 필법(筆法)을 잘 계승하였다. 또한 박승임의 제자였던 양심당(養心堂) 황엽(黃曄)이 있는데, 그는 사문(師門)의 가르침을 잘 이어받아 제사 예법에 철두철미한 정성을 기하였다. 황섬의 아들 조대(釣臺) 大相公派世譜上卷36쪽15世황유중(黃有中)은 생원시와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했으나 그당시에 대사현의 시관(試官)이신 아버지섬(暹)은그의글을 알아보고급제을 취소했으나 후에 음보(蔭補)로등용되고 1605년(선조38)생원시에 합격1605년에증광문과(增廣文科)을과로 급제 병조좌랑(兵曹佐郞).홍문관(弘文館)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여 대북 정권이 열리자 낙향,풍기(豊基)은거 고산.금교.찰방을 하였으며, 이후 관직에 임명되었어도 끝내 부임하지 않았다. 통훈대부(通訓大夫) 황유길(黃有吉)의 아들로 무인적 기개를 유감없이 발휘했던 황입영(黃立潁)은 당시 북벌론(北伐論)이 팽배하던 세상에서 방외인(方外人)의 풍모를 견지하였다. 그런가 하면, “문단의 대원수[騷壇大元帥]”라는 호칭을 얻었던 단구(丹邱) 황창술(黃昌述)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부모의 숙원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81세 때에 기어이 진사시에 입격하였으며, 어릴 적부터 진동보(陳同甫)의 사람됨을 늘 사모하여 고금을 하찮게 여기고 글과 술로써 회포를 달래니, ‘천하 기남자(天下奇男子)’를 자처하였다.
찰방(察訪) 황입현(黃立顯)의 아들인 백우(白羽) 황염(黃琰)은 진사시에 입격하였으며, 책 읽기를 몹시 좋아하여 음양(陰陽)산수(算數)성상(星象)감여(堪輿)의 학설까지 광범하게 섭렵하였다. 고산(孤山) 이유장(李惟樟)의 문인인 일성재(日省齋) 황후(黃)는 예학(禮學)에 유의하여, 영주 대룡산(大龍山)의 용강(龍岡) 황수일(黃壽一)과 더불어 학술을 토론하였으며, 백인재(百忍齋) 황응륜(黃應綸)도 역시 예학을 학문의 중심으로 놓고 천착해 나갔다. 한편, 양몽재(養蒙齋) 황인채(黃鱗采)는 이미 소년 시절부터 영남에서 그 재주로 명성이 자자하였고, 과거에서도 발군의 능력을 발휘하여 사마 양시(司馬兩試)와 문과에 모두 합격하였다.
이밖에 영주의 대상공파는 처사적 삶에 투철하였던 백옥(白屋) 황사원(黃泗源), 대산(大山)?소산(小山)의 문인인 죽헌(竹軒) 황최원(黃最源), 대산의 문인으로 지역의 큰 학자로 성장하였던 정와(貞窩) 황용한(黃龍漢) -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은 “근세에 정와(貞窩) 황모(黃某)와 같이 학문이 정밀하고 견식이 분명한 이가 없다.”고 호평하였다. - 등을 배출하였으며, 소암(素菴) 김진동(金鎭東)의 문인인 백천(白川) 황서한(黃舒漢), 남다른 포용력을 가지고 있던 학자인 소계(素溪) 황연한(黃淵漢), 정와의 문인으로 의약(醫藥)?복서(卜筮)?음양(陰陽)에도 광범한 지식을 쌓았던 백야(白野) 황중신(黃中愼) 및 그 동생으로 주자봉사(朱子封事)를 혹호(酷好)했던 이재(怡齋) 황중형(黃中炯), 문과와 중시(重試)에 급제하고 승지를 역임하였던 황인하(黃仁夏), 성균관 유생의 항절(抗節)을 가감없이 과시했던 저초(渚樵) 황조하(黃肇夏), 류치명의 문인으로 저술을 통해 위정(衛正)을 실천하였던 대계(大溪) 황재영(黃在英), 이재(?齋) 권연하(權璉夏)와 복재(復齋) 강건(姜楗)의 문인이었던 극재(克齋) 황기도(黃基道), 풍기의 3?1만세운동을 격화시켰던 후송(後松) 황정흠(黃鼎欽) 등 일도(一道)와 일향(一鄕)의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영주의 대상공파 창원 황씨 문중은 순흥 땅에 정착한 이후 사족으로서의 사회적 기반을 계속적으로 유지하다가, 황섬을 전후로 한 시기에 그 결실을 볼 수 있었으며, 이후에는 뛰어난 처사(處士)와 학자를 배출하여 그 명망을 이어 나갔다. 특히 소수서원, 풍기향교의 원임(院任)?교임(校任)을 꾸준히 배출함으로써, 지역의 공론형성과 교육활동에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행사하였다.
황승후(黃承厚)初名 承演 (昌原黃氏 大相公派 世譜 七世.上卷 1쪽과4쪽) 생몰년 미상. 초명은 승연(承演). 침원서 영(寢園署令) 진백(眞伯)의 아들. 그는 고려 공민왕6년丁酉(1357년)에 신호위(神號衛) 정용 중랑장(精勇中郞將)이 되어 그해에. 그는 처음으로 창원에서 죽주(竹州) (현재 순흥)로 옮겨오셔서 죽주(순흥)안씨(竹州安氏)와 혼인하였으며 창원황씨의 새로운 세거지(世居地)를 개척 하신분이다.묘갈명(墓碣銘)은없고 묘표만 있으며 1963년 계묘년에 개수(改竪)하였다. 영주시사(榮州市史)4권607쪽참조.경북 봉화군 물야면 두문리 (말문)에 묘(墓)가 있다.
황처중(黃處中) (昌原黃氏 大相公派 世譜 八世.上卷 1쪽과4쪽) 생몰년 미상. 정용 중랑장(精勇中郞將) 승후(承厚)의 아들. 그는太祖7年 戊寅1398年 영일 봉직랑(奉直郞)감무(迎日監務)를 지냈다. 송홍준(宋鴻俊)이 묘갈명을 찬하였다.묘(墓)는 경북 봉화군 봉화읍 적덕리(소지골)에있다.
황제(黃臍) (昌原黃氏 大相公派 世譜 九世 上卷 1쪽과4쪽) 생몰년 미상. 영일 감무(迎日監務) 처중(處中)의 아들. 도염서승(都梁署承)을 역임하였다. 그는 영천(榮川) 내마암(內馬巖)(현영주시 휴천동)에 살으셨다..어머니는 무송(茂松)유(庾)씨로 찬성사(贊成事)당(璫)의딸이다.경복 봉화군 봉화읍 적덕리(소지골)에 묘가있다.
황전(黃躔)1391년(고려공양왕3년)-1459년(세조4년)향년69세(昌原黃氏 大相公派 世譜 九世.上卷1쪽과6쪽) 1391년(고려 공양왕 3) ~ 1459년(조선 세조4). 자(字) 형보(亨甫). 영일 감무(迎日監務) 奉直郞처중(處中)의 아들. 그는 통례원 봉례(通禮院奉禮)를 역임하였고, 후에 증손 사우(士祐)가 높은 관직에 오른 것으로 인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추증되었다.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사육신(死六臣)사건에 연루(連累)되여남유(南遊)순흥에 안치 되어있을 때 그에게 미곡(米穀)을 주고 아울러 그 가운데 은(銀)을 두었는데, 그는 물건을 주고받는 올바른 의리(義理)를 헤아려 이를 거절하였다. 곧 순흥 일대에 화란이 일어났으나, 그것으로 인하여 그가 화(禍)를 면하게 됨으로써, 이후 후손들이 영주권(榮州圈)에서 창성(昌盛)하는 기틀이 마련되었다.1535년(중종30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공조참판(工曹參判)에증직(贈職)되다.송간(松澗) 황응규(黃應奎)가 묘갈명을 찬하였다. 그는 단산 병산의 숭보사(崇報祠)에 모셔졌는데, 그 상향축문(常享祝文)은 본손(本孫)을 대신하여 이광정(李光靖)이 지었다. 금성대군이 순흥에서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실패되면서 순흥의士民이 거의도륙(屠戮)을 당하는 판에 그는 화를 면했다.1426년 (세종8년)에 통례원(通禮院) 봉례(奉禮)가 되었는데,그후 벼슬을 사퇴하고 순흥(順興)의 병산(屛山)에 은거(隱居)한 첨모당(瞻慕堂)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5호로 되어 있다. 첨모당은 세종(世宗)11년 1429년에 지방유생들을 가르치고 학문을 연마하기 위해 강당(講堂)으로 건립하였으나 1735년(영조11) 에 이르러 영주지역 창원황씨를 중심으로 한 사림(祠林)에 의해 사우(祠宇)로 재건 되었다. 그 후 1778년(정조2년) 에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면(正面)3칸 측면(側面) 1칸의 규모로 가운데 마루가 자리하고 좌우에 온돌방이 배치된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 평면에 홑처마 맞배 지붕을 올린 단아한 건물이다.특히 창호 수법은 오래된 법식을 잘 지니고 있으며 마루방의 구성법이 독특하다. 中宗30년(1535) 증손 사우(士祐)의 貴로 가선대부 공조참판(嘉善大夫 工曹參判)에 증직되 다. 배 정부인(配 貞夫人) 곡성임씨(谷城任氏)이며 함께 병산(屛山) 숭보사(崇報祠)에 (영종(英宗) 을묘(乙卯)1735년 창건) 매년 춘추(春秋)로 제향(祭享).하고있다. 봄에 제향하는 춘향(春享)은 매년음력 三月 仲丁日(둘째丁日) 추향(秋享)음력九月 仲丁日(둘째丁日) 에전국 각처에서 봉례공(奉禮公) 자손(子孫)들이 이날에 모여서 제향(祭享)하다. 묘소(墓所: 경북 영주시 부석면 보계리(문좌실) 에 모셨다.
황영손(黃永孫) (昌原黃氏 大相公派 世譜 十世.上卷 1쪽) 1405년(태종 5) ~ 1475년(성종 6). 도염서승(都染署承) 九世 제(躋)의 아들. 이산 현감(尼山縣監)을 역임하였다.- 舊順興誌
황직경(黃直卿) (大相公派 世譜 上卷1쪽과8쪽10世)향년96世 생몰년 미상. 통례원 봉례(通禮院奉禮) 九世 전(躔)의 아들.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그는 일찍이 동향(同鄕)동덕(同德)으로 구성된 오로회(五老會)에 참여하였는데, 현손(玄孫)인 황재(黃載)가 이 모임 장면을 그린 계회도(契會圖)를 소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식암(息庵) 황섬(黃暹)이 고오로계회도서(古五老契會圖序)를 지었다.
황귀경(黃貴卿) (大相公派世譜 上卷1쪽과 6쪽10世) 1413년(태종 13) ~ 1490년(성종 21). 통례원 봉례(通禮院奉禮) 九世 전(躔)의 아들. 종사랑(從士郞). 그는 손자 사우(士祐)가 높은 관직에 올랐던 것으로 인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되었다. 그는 평생 남들의 장단점을 비평하지 않았다. 또한 성품이 어질어서 살아있는 미물(微物)은 발로 밟지도 않았으며, 남을 해치거나 남의 것을 탐하는 마음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는 평생 은둔하여 출사(出仕)하지 않았다.묘소:경북 영주시 순흥면 태장2리(거묵골)에있다.
황창(黃瑒)昌原黃氏 大相公派 世譜 十一世.上卷 1쪽과4쪽) 1423년(세종 5) ~ 1509년(중종 4). 이산 현감(尼山縣監) 十世 영손(永孫)의 아들. 그는 상원 훈도(祥原訓導)를 역임하였으며, 다시 풍기의 고로곡(古老谷)으로 이거하였다.
황윤경(黃允卿)(大相公派 世譜 10世 上卷11쪽) 1428년(세종 10) ~ 1511년(중종 6). 통례원 봉례(通禮院奉禮) 九世 전(躔)의 아들. 그는 부사직(副司直)을 지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식과 행실이 있었고, 경전(經傳)을 널리 고찰하였다. 그는 천성이 순고(諄古)하여 은거하면서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후손 황춘식(黃春植)이 비음(碑陰)을 찬하였다.
황희숙(黃希淑)(大相公派 世譜 上卷1쪽과 11쪽11世) 1451년(문종1) ~ 1508년(중종 3). 자(字) 청보(淸甫). 부사직(副司直) 윤경(允卿)의 아들. 그는 충순위 참봉(忠順衛參奉)에 임명되었으며, 천성과 행실이 순근(諄謹)하여 장자(長者)의 기풍이 있었다.
황희성(黃希聖) (大相公派 世譜 上卷1쪽과 6쪽11世) 1455년(세조 1) ~ 1524년(중종 19). 자(字) 호연(浩然). 종사랑(從仕郞) 10世 귀경(貴卿)의 아들. 그는 순릉 참봉(純陵參奉)에 임명되었다. 아들 사우(士祐)가 고위 관직에 오른 것으로 인하여 숭정대부(崇政大夫)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었다. 그는 천성이 순근(諄謹)하여 남들과 다투지 않았다. 또한 독서하기를 매우 즐겼고, 검소함을 숭상하였다. 그는 행실에 삼갔으니, 노인(老人)을 보게 되면 반드시 재배(再拜)하였고, 향교(鄕校)를 지나갈 때에는 걸음걸이를 빠르게 하였다. 사람들이 그에게 벼슬하기를 권하면, 그는 머리를 흔들 뿐이었다고 하였다. 그의 고모부인 노계조(盧繼祖)가 희야골[白洞]에 살았는데, 자식이 없어 그를 시양자(侍養子)로 삼았다. 그는 이로 인하여 순흥병산에서 풍기 희야골(백야동)로 이거하였고(1493성종24)년, 아울러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진유경(秦有經)의 딸과 혼인하였다. 묘소:경북 영주시 순흥면 태장2리(거묵골)에있다.
황한필(黃漢弼) (大相公派 世譜 12世.上卷 1쪽 4쪽 14쪽과)---署承公派 1456년(세조 2) ~ 1545년(인조 1). 상원 훈도(祥原訓導) 창(瑒)의 아들. 그는 조봉대부(朝奉大夫) 목천 교수(木川敎授)를 역임하였다.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의 외조부이다. 그는 문행(文行)이 있어서 주세붕(周世鵬)이 이를 칭찬 하였다. 죽계지(竹溪志)에 따르면, 그는 나이가 구십에 이르도록 부지런히 후진들을 교육하였으며, 가르침을 받는 자의 신분 귀천(貴賤) 따위를 따지지 않았다. 이에 학생들은 비록 그 성취의 정도는 달랐으나, 모두 그의 학문적 은택을 고루 입었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의 외조부로서, 황준량이 그에게 항상 수학하였다고 하였다.
황희현(黃希賢) (大相公派 世譜 11世 上卷 7쪽 1쪽) 1461년(세조 7) ~ 1527년(중종 22). 자(字)덕옹(德翁). 종사랑(從仕郞) 귀경(貴卿)의 아들. 선릉 참봉(宣陵參奉)을 贈工曹參議 지냈다.
황한충(黃漢忠)(大相公派 世譜 12世.上卷 4쪽과 20쪽) 1464년(세조 10) ~ 미상. 자(字) 양좌(良佐). 호 우수(愚叟)백운거사(白雲居士). 상원 훈도(祥原訓導) 11世 창(瑒)의 아들. 그는 생원시에 입격하였으나, 이후 7번에 걸친 대과 응시에 실패하자, 소백산 아래 순흥 우수동(愚叟洞)에 양성정(養性亭)을 짓고 은거하였다. 그는 일찍이 ?화당시고취(和唐詩薣吹)를 지었는데, 여기에 주세붕(周世鵬)이 발문(跋文)을 붙여 이르기를, “그 율(律)이 숙근(熟謹)하고 그 사(辭)가 아고(雅古)하여 당(唐)에 태어났더라도 그 기미(氣味)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퇴계 선생의 소백산 유산기에, 제현들의 시와 더불어 당시 명경암(明鏡庵)에 있던 그의 작품이 언급되어 있다. 그는 피폐한 풍기향교(豊基鄕校)의 재건을 위하여 곡식을 희사하였고, 소수서원이 건립될 때에도 재물을 내어 적극적으로 도왔다. 소수서원은 조선중종37년1542년에 풍기군수 주세붕이세운 백운동서원이 모체다.이후 퇴계가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상주함으로서 명종5년1550년에 임금이 내린 사액을 받아 소수서원이라 부르게 되였다. 1542년(중종 37)에는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가 한충(漢忠)를 만나서 방황상사한충우우계(訪黃上舍漢忠于愚溪) 를 지어 이르기를,
우뚝 솟은 소백산은 하늘과 나란한데 峨峨小白與天齊
손님이 무릉도원에 다다름에 길이 분명하구나. 客到桃源路不迷
나도 이미 귀거래사 읊고 떠나왔으니 我亦已成歸去賦
그대만 우계를 가졌다 자랑 마소. 莫誇君獨有愚溪
라고 하였다. 문집으로 백운집(白雲集)이 있으며, 도고서원(陶皐書院)에 제향되었다. 묘(墓): 丹谷上流 自作洞 巽向(단곡상유 자작동 손향)
황 빈(黃 彬) (昌原黃氏 大相公派 世譜13世 上卷20쪽) 자는 국화(國華). 생원(生員)진사(進士), 자(字) 양좌(良佐). 호 우수(愚叟)백운거사(白雲居士). 12世 한충(漢忠)의 아들. 中宗때 사마(司馬)시 합격. 주세붕(周世鵬)이 豊基군수로, 향교(풍기향교를 이름인 듯)를 옮겨 세우며, 소수서원을 세울새, 황빈이 벼 75석을 내어 도왔다. 주세붕이 記文에서「그의 도타운 뜻은 主山 유(劉)씨에 내리지 않는다」고 칭찬했다.(主山 劉씨:朱子(憙)가 南康에 서 원을 세울때 물력으로 크게 도운 유윤적(劉允迪)을 이름) 그의 사는 집을 中和堂이라 편액했는데, 주세붕이 다음 詩를 주었으니-
去年浮石共淸遊, 仍想君家滿院秋 爲問中和堂下水, 源頭何日暫定休
지난해 부석사에 함께 노닐제, 그대 집 무르녹을 가을 그렸지. 묻거니, 중화당밑 넉넉한 물이 그 근원 잠시런들 멈춤 있으리. 용 황관(黃寬) (大相公派 世譜 13世 上卷 14쪽) 1474년(성종 5) ~ 1556년(명종 11). 자 문요(文饒). 목천 교수(木川敎授) 12世 한필(漢弼)의 아들. 부장(部將)을 지냈다.
황사우(黃士祐) (大相公派 世譜 12世 上卷1쪽.6쪽 28쪽 ) 1486년(성종 17) ~ 1536년(중종 31). 자(字) 국보(國輔). 호 용헌(慵軒). 순릉 참봉(純陵參奉)11世 희성(希聖)의 아들.황전(黃躔)의 증손자 그는 진사시에 입격하고,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였다. 그는 풍기의 백동(白同) 자택에서 출생하였다. 이때 풍기에 운수를 잘 보는 맹인이 살고 있어, 아버지 희성이 그에 대해 물어보니, “이 운수는 벼슬이 반드시 1품에 이를 것이나, 수(壽)를 누리지는 못할 듯합니다.”고 했다고 한다. 또한 외삼촌인 목사(牧使) 진담(秦澹)은 “이 아이는 반드시 이른 나이에 재상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총명함이 절륜하여, 말은 잘하지 못하였으나, 4세 때 글을 읽을 줄 알았다고 하며, 6세 때에는 연구시(聯句詩)에 능하여 운자(韻字)를 불러주면 곧바로 시를 완성하였다. 진담을 따라 서울에 올라갔던 그는 15세에 진사시 초시에 입격하고, 동학(東學)에서 공부하였으며, 22세 때에는 자암(自庵) 김구(金絿)와 함께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29세 때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때 그는 장원을 차지한 박세희(朴世熹)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우수하였는데, 시험을 주관하였던 정광필(鄭光弼)?김안국(金安國)이 등급을 결정하지 못하자, 중종이 특명으로 갑과(甲科)에 두 자리를 만들어 함께 장원에 두도록 하였다. 그는 이후 전적(典籍), 감찰(監察), 정언(正言), 수찬(修撰) 등을 거치면서, 경연에도 입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1516년(중종 11)에는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에 갔으며, 이때 조천록(朝天錄)을 기록하기도 했으나 일실되었다. 또한 1522년(중종 17)에는 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해 지방관에 임명되기를 청하여 영천 군수(榮川郡守)로 나왔는데, 정사를 펼침에 인서(仁恕)를 우선하여 이민(吏民)들이 그 혜택을 고루 입었다. 또한 인재를 잘 권면하여 온계(溫溪) 이해(李瀣) 등 많은 선비들이 성취된 바가 있었으며, 문도(門徒)들이 날마다 운집하였다고 한다.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로 임용된 그는 도내를 두루 다니며 직무를 수행하였다. 1519년(중종 14)에는 봉성(鳳城)에 있던 승지(承旨) 권벌(權?)을 방문하고, 고성(固城)의 관포대(灌圃臺)에 있던 어득강(魚得江)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해 12월에 진주(晉州)에서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문사화유감(聞士禍有感)?이라는 시를 지어 이르기를, 예부터 저 소인배들이 교묘히 큰 죄 얽었으나 斐從來作貝錦 청천백일은 본래 청명(淸明)하도다. 靑天白日本淸明 저 하늘이 요순(堯舜) 정치 원치 않는가 彼蒼未欲唐虞治 훌륭한 선비들 이 화(禍)로 매장되었도다. 陳榻龍門是禍坑 라고 하며 애석해 하였다. 그는 도사로 재직하고 있던 당시에, 그 활동을 재영남일기(在嶺南日記)로 기록하기도 하였다. 내직으로 들어온 그는 병조 정랑(兵曹正郞), 지평,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 헌납, 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 및 보덕(輔德)에 임명되었다. 다시 사간(司諫), 집의(執義)에 임용되었으며, 석강(夕講)에 입시하여서는 임금에게 천하의 선(善)을 포용하여 치도(治道)에 유익함이 있도록 할 것을 청원하였다. 그는 1528년(중종 23)에 응교(應敎)로 임명되었는데, 경연에 들어가서 인명(人命)과 관련된 형벌 집행에 선왕(先王)의 법을 준수하기를 청원하였다. 그는 1529년(중종 24년)에는 어필(御筆) 특지(特旨)로 대사간(大司諫)에 임용되었고, 다시 승지로 발탁되어 동부승지를 거처 우부승지 및 도승지에 제수되었다. 다시 그는 가선대부에 올라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형조 참판(刑曹參判), 대사헌(大司憲), 대사간,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을 역임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그가 매우 풍채(風采)가 있어 사림이 훌륭하게 여겼다고 하였다. 1533년(중종 28)에는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임명되어 잠시 외직으로 나갔다가, 이듬해 부제학으로서 다시 내직에 복귀하였으며,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임용되었다. 1535년(중종 30)에는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재직하였는데, 이때 겨울에 천둥이 친 재변이 일어난 것으로 인하여, 조정이 늘 화목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이 해에 예조와 이조의 판서를 지내고,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에까지 이르렀다. 중종실록(中宗實錄) 연몽실기원(燃蒙室記遠) 문헌에 있다. 그는 1536년(중종 31)에 은가(恩暇)를 받고 풍기에 소분(掃墳)하러 왔다가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 그가 생을 마치니, 중종은 그가 밖에서 생을 마친 것에 놀라움을 표하고, 슬픔을 나타내기 위해 스스로 소찬(素饌)을 들었으며, 습진(習陣)할 때에 풍악(風樂)을 없애라고 명하였다.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은 만시를 지어 이르기를, 사림은 공히 그의 죽음 탄식하고 士林共抱云亡嘆 성주(聖主)께서는 수습하지 못한 슬픔 품으셨네. 聖主方懷不整傷 이조?병조, 의정부는 모두 쓸쓸해졌으나 銓省巖廊俱寂寞 응당 역사에 그 꽃다운 이름 남으리라. 只應靑史姓名芳 라고 하였고, 규암(圭菴) 송인수(宋麟壽)는, 온화한 말씀은 우러를 만하였고 溫溫辭氣足聆瞻 벼슬은 정승에 가까워도 날로 겸손하였네. 位近鈞衡德日謙 젊어서 이미 큰 인물 되리라는 점괘 맞았으나 早歲已諧熊虎卜 중년에 갑자기 진사(辰巳)의 액[현인의 죽음]을 당했네. 中年遽値巳辰占 라고 하였다. 그는 성품이 화수(和粹)하고 관대하여, 장자(長者)의 풍모가 있었다. 그는 바쁘게 관직 생활을 할 때에도, 늘 퇴조(退朝)하면 의관을 갖추고 단정하게 앉아 책을 마주하여 보았는데, 한 줄을 보면서도 바로 8, 9줄을 훑어가며 그 내용을 이해하였으며, 한 번 본 것은 잊어버리지 않았으므로, 충암(?庵) 김정(金淨)이 그의 총명함에 탄복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의 아버지인 성암(省庵) 이지번(李之蕃) 등과도 절친한 교분을 맺었다. 회산세고(檜山世稿)에 그의 유고인 용(軒稿)가 실려 있는데, 이는 그의 후손인 죽헌(竹軒) 황최원(黃最源)이 자료를 수집하고 죽헌의 스승인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에게 교감을 받은 것이다. 대제학(大提學) 신광한(申光漢)이 묘갈명을 찬하였다. 그는 숭덕사(崇德祠)에 제향되었다. 묘소:경북 영주시 순흥면 태장2리 (거묵골)에 있다. 마을 앞에 신도비각(神道碑閣)이 있다.
황사호(黃士豪)(大相公派 世譜 12世.上卷 1쪽과6쪽50쪽) 1488년(성종 19) ~ 1564년(명종 19). 자(字) 국번(國藩). 순릉참봉(純陵參奉)11世 희성(希聖)의 아들. 그는 천성이 중후하고 수랑(秀朗)하였다. 그는 문예(文藝)에 재능이 많았으며, 필법이 또한 주경(?勁)하였다. 품계로 조봉대부(朝奉大夫)를 받고, 안기도 찰방(安奇道察訪)과 풍저창 직장(豊儲倉直長)을 역임하였다. 그는 시서(詩書)에 힘을 쏟아 여러 차례 문과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는 못하였다. 그가 풍저창 직장으로 있을 때 그곳 전복(典僕)이 제멋대로 함부로 일을 처결하였다. 이에 그가 이를 저지하였다가, 도리어 모함을 받는 처지에 놓이게 되자, 다시는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그의 묘지(墓誌)는 영주금석문전집(榮州金石文全集)에 수록되어 있다.
황사걸(黃士傑)(大相公派 世譜 12世.上卷 1쪽과 55쪽) 1490년(성종 21) ~ 1570년(선조 3). 자(字) 국간(國幹). 순릉 참봉(純陵參奉) 11世희성(希聖)의 아들. 그는 세마(洗馬)를 지내고, 삼가 현감(三嘉縣監) 등을 역임하면서 4읍을 두루 다스리다가, 중앙 부서의 실무 책임자인 첨정(僉正)으로 승진하였다. 1539년(중종 34)에 영덕 현령(盈德縣令) 박광좌(朴光佐) 일행이 문경(聞慶)에서 쉬고 있다가,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그냥 그 앞을 지나가던 무리에게 도리어 집단 난타를 당하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당시 용궁 현감(龍宮縣監)으로 재직하던 그는 그 무리가 안동부(安東府) 사람들임을 알아내고 바로 사헌부로 문서를 띄우고, 그들을 사로잡은 바 있다. 1544년(중종 39) 4월 9일에는 승문원 저작(承文院著作) 박승간(朴承侃)과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 박승임(朴承任) 형제가 고향으로 내려와 귀대(龜臺) 상류에서 영친연(榮親宴)을 베풀고, 또 그 자리에서 그 형인 박승건(朴承健)과 박승준(朴承俊)의 사마시 입격에 따른 문희연(聞喜宴)을 아울러 거행한 바 있다. 당시 이 연회는 영주의 모든 읍민(邑民)들이 나와 구경하였다고 했을 만큼, 반남 박씨(潘南朴氏) 한 집안만이 아닌 영주 사족 전체의 영광스러운 자리였다. 삼가 현감으로 있던 그는 인근 고을의 수령?찰방 및 전 사간(前司諫) 황효공(黃孝恭),전 전적(前典籍) 진연(秦淵) 등과 함께 이 자리에 참석하였다.
황사필(黃士弼)(大相公派 世譜 12世.上卷 1쪽과 7쪽 62쪽) 1488년(성종 19) ~ 1523년(중종 18). 자(字) 국경(國經). 선릉 참봉(宣陵參奉) 11世희현(希賢)의 아들. 직장(直長)을 지냈다. 그는 학식과 올바른 행실이 있었다.
황사영(黃士英))(大相公派 世譜 12世.上卷 1쪽 참의공파66쪽) 1495년(연산군1) 卒 미상 선릉 참봉(宣陵參奉) 11世 희현(希賢)의아들 순릉참봉(順陵參奉)을 지냈다.증 공조참의 (贈 工曹參義)에 추증되였다.
황사언(黃士彦)(大相公派 世譜 12世.上卷 1쪽과 80쪽119쪽) 1497년(연산군 3) ~ 1568년(선조 1). 자(字) 언지(彦之). 참봉(參奉)11世 희숙(希淑)의 아들. 통훈대부(通訓大夫) 사재감 정(司宰監正)을 지냈다. 그는 성품이 순후하였다. 그는 회곡(晦谷) 권춘란(權春蘭),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와 더불어 도의(道義)의 교분을 맺었다고 하였다. 그는 병산(甁山)에서 문단(文丹)으로 이거하였다.
황인(黃訒)(大相公派 世譜 13世.上卷 111쪽 참의공파66쪽) 1502년(연산군 8) ~ 1592년(선조 25). 자 중묵(仲黙). 12世사영(士英)의 아들.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추증되었다. 그는 1581년(선조 14) 무렵에 소수서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특히 주자절요(朱子節要)19권과 이학통기(理學統紀)8권을 소장하게 하였다.
황사효(黃士孝)(大相公派 世譜11世 上卷 1쪽154쪽) 1514년(중종 9) ~ 미상. 자 경지(敬之). 참봉(參奉) 희숙(希淑)의 아들. 참봉(參奉)을 지냈다.
황득겸(黃得謙)(大相公派 世譜8世 上卷14쪽) 1515년(중종 10) ~ 1596년(선조 29). 자(字) 여익(汝益). 호 석교(石橋)?계옹(溪翁). 한필(漢弼)의 손자 부장(部將) 13世관(寬)의 아들. 그는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였고, 후에 통정대부(通政大夫)를 받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큰 뜻을 품고, 부지런히 학문에 정진하여 경전의 뜻을 꿰뚫어 통달하였다. 사마시에 입격하였으나, 끝내 문과에는 불리(不利)하자, 과거를 단념하고 친히 농사를 지으며 자락(自樂)하였다. 그는 성실함과 질박함으로 자신의 몸가짐을 지키며 스스로 옛 사람임을 자처하였다. 또한 의롭지 않은 물건은 털끝만큼도 취하지 않고, 평생 남에게 아첨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순흥 석교촌(石橋村) 동쪽 시냇가에 침간정(枕澗亭)을 지었는데, 송간(松澗) 황응규(黃應奎)의 시에 “서책 뒤적이며 소일할 만하고, 냇물 마주하여 마음 씻을 만하구나.[披卷堪消日, 臨流可洗心]”라고 하였다. 유고가 있다. 단곡(丹谷) 곽진(郭)이 묘갈명을 찬하고, 하당(荷塘) 권두인(權斗寅)이 지문(誌文)을 찬하였다.
황윤규(黃潤奎)(大相公派 世譜 13世 上卷.7쪽.봉례공대종파 28쪽) 1515년(중종 10) ~ 1587년(선조 20). 자(字) 장문(長文). 용헌(용軒) 사우(士祐)의 아들. 그는 선무랑(宣務郞)을 지냈다. 그는 행의(行誼)로 여러 차례 향천(鄕薦)에 올랐다. 특히 동생인 송간(松澗) 황응규(黃應奎)와 더불어 우애가 뛰어났다. 그는 형제들과 같은 마을에 살면서 재물은 반드시 형에게 사양하고 잘못이 있으면 간언(諫言)하기를 잘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말을 하는 자가 없었다고 하였다.
황윤겸(黃允謙))(大相公派 世譜14世 上卷16쪽) 1518년(중종 13) ~ 1593년(선조 26). 자 중익(仲益). 부장(部將) 관(寬)의 아들. 그는 효행이 탁월하였다.
황응규(黃應奎)(大相公派 世譜 13世 上卷 .봉례공 대종파24쪽서강공(西崗公) 34쪽) 1518년(중종 13) ~ 1598년(선조 31).조선의 문신. 자(字) 중문(仲文). 호 송간(松澗). 용헌(?軒) 우찬성(右贊成)12世사우(士祐)의 아들. 그는 식년 생원시와 알성시에 합격하였고, 신재(愼齋)와 퇴계의 문인이다. 그는 어린아이일 때에 그 노는 것이 일반 아이들과 달랐고, 일일이 독려하지 않아도 스스로 공부에 열중하여 글의 대의를 잘 파악하였다. 그는 특히 초서(草書)에 능하였다. 그는 성장하여 신재 주세붕(周世鵬)에게 무인으로 수업을 하였는데, 주세붕으로부터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다. 또한 퇴계이황(李滉) 선생에게도 수업하였다. 그는 고문(古文)을 숭상하여 이를 늘 손에서 놓지 않고 즐겨 공부하였다. 그는 매암(梅巖) 이숙량(李叔樑)과 함께 도곡(道谷)에서 글공부를 하기도 하였다. 그는 1543년(중종 38)에 생원시에 입격하고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이때 그는 동료들의 추중을 받았고, 특히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은 누차 그를 선생의 자리에 앉히고는 “삼대(三代) 이하의 인물이 아니다.”라며 예우해 주었다. 1564년(명종 19)에 성균관에서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겨 유생들을 관직에 천거할 때마다 번번이 그를 제1번으로 하였다. 이에 그는 전함사 별제(典艦司別提)로 관계에 진출하였고, 금오랑(金吾郞)이 되고, 장흥고 직장(長興庫直長)으로 옮겼다. 그는 이렇게 관직생활 중이던 1569년(선조 2)에 52세로 알성별시(謁聖別試)에 급제하였다. 그는 이후 전생서 주부(典牲暑主簿), 예조?호조?형조?공조정랑과 좌랑을 두루 역임하였다. 또한 사유(師儒)로 선발되어 직강(直講)을 거쳐 사성(司成)에 이르렀고, 사섬시 정(司贍寺正), 예빈시 정(禮賓寺正), 종부시 정(宗簿寺正)에 임명되었다. 그는 관계에 들어선 이후부터 늘 직사에 마음을 다하여 임하였다. 이때 청도(淸道) 수령 자리가 비어 이조(吏曹)에서 그를 보임(補任)하였다. 당시 청도는 인구가 많고 아전배들이 호강(豪强)하여 수령이 다스리기 어려운 읍으로 악명이 높은 곳이었는데, 그는 구름처럼 쌓인 공부(公簿)를 처리하고, 하예(下隸)들을 매로 다스리지 않았으며, 부세(賦稅)를 무겁게 더하지 않았다. 또한 노인과 백성들을 은혜롭게 양육(養育)하니, 그곳 풍속이 일변하였다. 그가 장차 병으로 관직을 버리고 돌아가려 할 때에, 어린이와 노인이 달려와 눈물을 흘렸고, 심지어 가시나무를 둘러치고 아문(衙門)을 에워싸서 그가 나오지 못하도록 며칠씩이나 지켰다고 하였다. 그는 다시 단양 군수(丹陽郡守)로 부임하여, 그곳 세금을 면제시켜주고 서숙(書塾)을 세워 경내 자제들이 공부할 바를 알도록 하였다. 이렇게 선정을 베푼 그는 임기가 만료되었음에도 1년을 더 머물렀다. 1588년(선조 21) 가을에는 서울로 복귀하기는 하였으나, 곧바로 “나는 이제 늙었다. 가을바람이 이니,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와 이후 다시는 서쪽 땅을 밟지 않았다. 그는 고향에 살면서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을 사양하고 지냈으나, 시비에 관한 일을 만나면 분명하게 판별을 짓고서야 그만두니, 선(善)한 자는 그를 좋아하고 그렇지 못한 자는 그를 원망하였다고 하였다. 1588년에 고향 에 은거 1592년9선조25)에 임진왜란 때에 명나라 군대가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군읍의 재정이 탕진되어 식량을 댈 수 없었고 조정에서도 미처 경황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스스로 곡식 수백 석을 내놓고 술과 고기를 보내주었다. 조정에서 후에 이 사실을 듣고 그에게 절충장군(折衝將軍)을 상으로 내렸다.1594년에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 되어 온 고을의 의기(義氣)를 창도하였는데, 이에 고을 사람들이 그를 추대하여 향병 대장(鄕兵大將)으로 삼았다. 그는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모으는 데 전력을 다하던 중, 생을 마치고 말았다.영주시 풍기 백동에 餘生을 詩風으로 지내시던 正庵亭閣이 있다. 상여(喪輿)의 출발을 앞두던 때에 비가 계속되고 앞 시내 물이 불어 건너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밤에 갑자기 비가 그치고 별이 빛나더니 그의 장사를 다 치른 후에, 그쳤던 비가 계속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백씨(伯氏)인 황윤규(黃潤奎)와 더불어 같은 마을에 살면서, 재물은 반드시 형에게 사양하고 잘못이 있으면 간언하기를 잘 하니, 주위에서 그들 사이를 이간하는 말을 하는 자가 없었다. 또한 아우 황서규(黃瑞奎)가 일찍 생을 마치자, 자신의 소생과 똑같은 예식으로 조카들을 혼인시켜 주었다. 그는 시에서는 이백(李白)?두보(杜甫)를 숭상하였고, 필법(筆法)에서는 김생(金生)의 체재를 존모(尊慕)하였다. 그는 소수서원의 유생들이 과거 공부만을 일삼고 동몽(童蒙) 교육을 등한시함으로써 서원의 학풍을 퇴락하게 하자, 이곳에 별재(別齋)를 지어 동몽들을 교육시켰다. 이에 후생들이 권장되어 학업을 성취한 자들이 많았다고 하였다. 또한 서원의 건물을 중수하였고, 서원의 묘정(廟庭) 및 각 건물 주변에 소나무와 잣나무 등을 심어 숲을 조성하며 돌층계를 만드는 일에도 관심을 표명하였다. 그가 젊었을 때에 산방에서 글을 읽었는데, 꿈에 시 한 수를 짓기를, 물 북쪽은 비단처럼 가을 물들고 水北秋如錦 서쪽 하늘엔 눈썹처럼 달빛 고와라. 天西月似眉 세상일 서글퍼하는 마음은 있으나 有心悲世事 태평성대 만들 힘은 없구나. 無力鑄雍熙 라고 하였으며, 1588년(선조 21)에 고향으로 돌아오던 날 술에 취하여 시를 읊기를, 서울 그리는 한 생각, 잊지를 못해서 終南一念未能忘 노둔한 말 억지로 채찍질하여 낙양엘 들었었지. 强策駑?入洛陽 쇠약한 몸이 고된 벼슬살이 못 이겨서, 衰朽不堪供卯酉 가져왔던 행장을 귀선(歸船)에 다시 실었네. 歸船還載上來裝 라고 하였다. 그의 문집인 송간고(松澗稿)가 회산세고 안에 수록되었다. 판서(判書) 홍희준(洪羲俊)이 행장을,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가 묘지명을 찬하였다. 묘소:경북 영주시 순흥면 태장2리(거묵골)에 있다. 마을앞에 신도비각(神道碑閣)이 있다.
황여규(黃汝奎)(大相公派 世譜13世 上卷 52쪽) 미상 ~ 1595년(선조 28). 자 사언(士彦). 풍저창 직장(豊儲倉直長) 12世사호(士豪)의 아들. 그는 봉화 훈도(奉化訓導)를 지냈다. 그는 타고난 자질이 근후(謹厚)하고, 다른 사람의 과실을 말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어릴 때부터 문장을 짓고 공령문을 공부하여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는 못하였다. 만년에 장사랑(將仕郞)으로서 봉화 훈도를 지냈다. 그는 아들 황서(黃曙)를 데리고 풍수암(風樹庵)에서 공부하였는데, 이때 “愼追人莫有, 終慕世無聞”이라는 구절이 들어간 연구(聯句)를 지었다. 후에 이로써 종모루(終慕樓)라는 누명(樓名)이 생기게 되었다. 그는 희야골에서 처음으로 남면(南面)의 와룡동(臥龍洞)으로 이거하였다. 그의 후손인 황입성(黃立誠)이 묘지(墓誌)를 찬하였다.
황서규(黃瑞奎)(大相公派 世譜13世 上卷100쪽) 1520년(중종 15) ~ 1552년(명종 7). 자 계문(季文). 용헌(?軒) 12世사우(士祐)의 아들. 그는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후에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되었다. 그는 장인인 고성군(固城君) 이강(李綱)의 제사를 받들게 되면서, 서울로 이거하였다.
황선(黃璿)(大相公派 世譜 13世 上卷120쪽) 1526년(중종 21) ~ 1594년(선조 27). 자 경수(景?). 사재감 정(司宰監正) 사언(士彦)의 아들. 봉직랑(奉直郞)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을 지냈다. 유고가 있다.
황기(黃琦)(大相公派 世譜13世 上卷123쪽) 1528년(중종 23) ~ 1608년(선조 41). 자 중규(仲奎). 사재감 정(司宰監正) 사언(士彦)의 아들. 한성 우윤(漢城右尹)에 추증되었다. 그는 문아(文雅)가 뛰어났으므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추증을 받았다.
황명규(黃命奎) (大相公派 世譜13世 上卷102쪽) 1532년(중종 27) ~ 1610년(광해군 2). 자 업문(業文). 용헌(?軒) 사우(士祐)의 아들. 종사랑(從仕郞)을 지냈다.
황고(黃杲)(大相公派 世譜14世 上卷34쪽) 1535년(중종 30) ~ 1592년(선조25). 호 서강(西崗). 송간(松澗) 13世응규(應奎)의 아들.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황수규(黃秀奎)(大相公派 世譜13世 上卷55쪽) 1538년(중종 33) ~ 1625년(인조 3). 자 문경(文卿). 호 대취헌(對翠軒). 첨정(僉正) 사걸(士傑)의 아들. 그는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였고, 후에 직장(直長)과 찰방(察訪) 역임하였다. 그는 단곡(丹谷) 곽진(郭)과 더불어 세교(世交)를 맺었다. 그는 훌륭한 몸가짐이 비범하여, 장자(長者)의 풍모를 가졌다고 하였다.
황선규(黃善奎)(大相公派 世譜13世 上卷107쪽) 1538년(중종 33) ~ 1615년(광해군 7). 자 문숙(文叔). 참봉(參奉) 사준(士俊)의 아들. 참봉(參奉)을 지냈다.
황섬(黃暹)(大相公派 世譜14世 上卷 54쪽 정익공종파(貞翼公宗派 36쪽) 1544년(중종 39) ~ 1616년(광해군 8). 자(字) 경명(景明). 호 식암(息庵),돈암(遯庵). 시호 정익(貞翼). 송간(松澗)13世 응규(應奎)의 아들. 서울의 동부(東部) 이현(?峴)에 있던 경저(京邸)에서 출생하였다. 생원시와 문과에 합격하였다. 그는 어려서 재사(才思)가 있었고, 커서 더욱 배움에 열중하였다. 이웃 현(縣)에 있던 이황(李滉)의고제(高弟)인 약포(藥圃) 정탁(鄭琢)에게 나아가 스승으로 모다.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간 그는 서천 군수(舒川郡守), - 그의 선정에 보답하기 위한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졌다. -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등에 임명되었다. 이 무렵 그는 경연에 입시하여, 서울 각 관사의 노비 신공포(身貢布)를 형조에 먼저 내게 하지 말고, 열읍(列邑)에서 거두어 도회관(都會官)에게 보낸 후 관찰사와 차원(差員)이 이를 서울로 올려 보내게 함으로써, 형조와 각 관사의 농간을 차단하기를 청원하여 재가를 얻었다. 임진왜란 전까지, 그는 집의(執義)와 사간(司諫)을 역임하였으며, 승정원에도 진출하여 도승지에까지 이르렀다가, 다시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나갔으며, 내직으로 복귀해서는 병조 참지(兵曹參知)를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파천하는 어가(御駕)를 호종하였다. 이때 모운사(募運使)에 차출되어 군량 등 군수품 조달에도 기여하였다. 1593년(선조 26)에는 호조 참의(戶曹參議)로 옮겼는데, 어가가 해주(海州)로 돌아갈 때에 상소하여, 병사들을 지휘할 장수를 그 가문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유능한 자로 선발하여 8도에 배치할 것과, 전쟁 중의 사치풍토를 없애기를 청원하였다. 또 며칠이 지난 후에 다시 상소하여, 간첩(間牒)봉수(烽燧)전함(戰艦)책루(柵壘)수성(守城)복병(伏兵)군율(軍律) 등에 대하여 조목별로 아뢰었는데, 비변사(備邊司)가 그의 상소에 대하여 “계려(計慮)가 심원(深遠)하다.”고 호평하기도 하였다.1594년(선조 27)에 또 상소하여, 나라의 재물이 탕감된 실정을 진달하고, 군공이 있다는 이유로 수령에 제수된 자들이 해당 군민들을 침탈하는 사례가 많음을 들어, 이른바 ‘군공 수령(軍功守令)’의 선발을 엄격히 하기를 청원하였다.1596년(선조 29)에는 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해 외직으로 나가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활동하였다. 1598년(선조 31)에는 친상(親喪)을 당하였으며, 상제를 마친 후에 참의(參議), 대사성(大司成), 부제학(副提學),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였다. 1602년(선조 35)에는 이조 참의에 임명되었고, 아울러 주역 교정 당상관(周易校正堂上官)에 차출되었다. 이때 그는 경연에 입시하여, 당시의 상무적(尙武的) 분위기 속에서 양가(良家)의 자제들이 유업(儒業)을 알지 못하게 되었음을 말하고, 서울에는 사학(四學)을 조속히 설치하며, 외방에는 교당(校堂)을 수리하고 훈도관(訓導官)을 차출하여 유생들을 가르치게 할 것을 청원하였다. 이후에 그는 도승지(都承旨), 호조 참판(戶曹參判), 대사헌(大司憲)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여, 영의정 류영경(柳永慶)이 축출되는 가운데, 그도 류영경의 처남이라는 이유로 정치적 탄압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양몽재(養蒙齋)를 지어 오로지 후진들을 성취시키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는 사후에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 1등에 오르고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그는 타고난 자질이 수려하였을 뿐만 아니라, 연원이 있는 스승에게서 받은 학문을 그 노력으로 더욱 확충하였다. 조정에 나아가서는 군주와 나라를 위하여 자신이 아는 바와 충심을 모조리 다하였다. 특히 그의 행장을 지은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그가 올린 계책에 대하여 하나하나 비평을 달고, 끝에 이르기를 “공(公)이 전후에 올린 논의는 실로 시폐(時弊)를 구제하는 절박한 것이다. 혹 시대의 다름이 있고 논의의 상세한 정도가 다르지만 그대로 그쳐서는 안 될 바가 있다. 그래서 내가 감히 그 나머지 뜻을 보충하였으니, 오늘날에도 쓰이는 바가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공이 다시 살아나더라도 (성호 자신이 평한 행위에 대해) 반드시 웃으며 용서하여 주실 것이다.”라고 하였다.그는 평소 집안에 거처할 때에도 스스로 준칙을 세워 이를 잘 따랐는데, 특히 소병명(素屛銘)을 지어서 검신(檢身)을 위한 좌우명(座右銘)으로 삼았다. 단곡(丹谷) 곽진(郭)이 소수서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동몽(童蒙)의 입학 연령에 관해 그에게 품의하니, 그는 연한에 구애되지 말고 입학하게 하라고 답하였다. 그는 소수서원에 두공부(杜工部 : 두보)의 글과 여러 물품을 보내주기도 하였다. 또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서 소수서원에 정충록(精忠錄)을 상송(上送)하라는 명을 내렸을 때에, 서원의 유생들이 그를 대신할 보관용 필사본을 완성하기 전까지 기한을 연장해 주기를 문학(文學) 류항(柳恒)에게 요청하기도 하였다.퇴계 선생이 예안(禮安)에서 시행한 향약(鄕約)을 풍기에서도 시행하게 되었을 때에, 그는 이에 관한 발문(跋文)을 짓고 이를 향사당(鄕射堂)에 게시하였다. 또한 부운탄(浮雲歎)이라는 절구시(絶句詩)를 지어 뭇 소인배들이 용사(用事)하던 정국(政局)에 대한 비감을 깃들였다. 그는 소고(嘯皐)?퇴계(退溪)의 문인이자 정치가였던 동향(同鄕) 출신의 백암(栢巖) 김륵(金?)과 평생지기로 지냈다. 당시 그가 서천 군수로 재직하면서 고향에 귀근(歸覲)하러 가다가 청도(淸道)에서 김륵을 만난 바 있었는데, 이때 김륵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다행히 평생의 친구 만나서 幸接平生友.. 흔쾌히 며칠간 머무르게 되었네. ?成數日留 시(詩) 짓는 뜰에는 오정(梧井)에 비가 내리고 詩庭梧井雨 금각(琴閣)에는 해산(海山)이 가을로 물드네. 琴閣海山秋 벼슬아치 되니 패도(?道)도 생각하지만 作吏寬思? 세상 근심하니 꿈에서 주공(周公)을 뵙는다네. 憂時夢見周 어느 때나 왕사(王事)를 사양하고 何當謝王事 고향에서 우리 둘 훨훨 노닐꼬. 桑?兩浮遊 라고 하였다. 또한 성호사설(星湖僿說) 시문문(詩文門)에 다음과 같이 그의 침류정(枕流亭) 시가 소개되어 있다. 죽계(竹溪) 서쪽 가는 가장 맑고 그윽한데, 竹溪西岸最淸幽 물가 난간, 구름 창에 옥 같은 물결 비치네. 水檻雲窓照玉流 멀리서 생각건대, 침류정 주인 심상하는 곳에 遙想主人心賞處 백구(白鷗)가 거울처럼 맑은 가을 물결 나눠 가졌으리. 白鷗分占鏡中秋 이익(李瀷)은 “점화(點化)가 또한 새롭다.[點化亦新]”라고 평하였다.문집이 간행되었다. 성호 이익이 행장을 찬하고 대사헌(大司憲) 남태저(南泰著)가 신도비명을 찬하였다. 우곡서원(愚谷書院)에 제향되었다....저서:식암집(息庵集),.....문헌: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성호문집(星湖文集), 조선도서해제(朝鮮圖書解題) 묘소:경북 영주시 순흥면 태장2리(거묵골)에 있다.
황염(黃염)(大相公派 世譜13世 上卷137쪽) 1544년(중종 39) ~ 1635년(인조 13). 자 중온(仲溫). 순릉 참봉(順陵參奉) 사순(士純)의 아들. 그는 참봉(參奉)을 지냈고, 후에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추증되었다.
황호(黃琥)(大相公派 世譜13世 上卷154쪽) 1552년(명종 7) ~ 미상. 그는 임진왜란 때 순직하였다. 참봉(參奉) 사효(士孝)의 아들. 충무위 상호군(忠武衛上護軍) 및 통정대부(通政大夫) 행 절충장군(行折衝將軍)을 받았다고 한다.
황서(黃曙) (大相公派 世譜13世 52쪽) 1554년(명종 9) ~ 1603년(선조 36). 자(字) 광원(光遠). 호 종고(宗皐). 훈도(訓導) 여규(汝奎)의 아들. 소고(小皐) 박승임(朴承任)의 문인이다. 그는 진사시와 알성문과(謁聖文科)에 합격하고, 관직으로는 파주(坡州)와 상주 목사(尙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오함이 절륜하였고, 자라서는 문예(文藝)에 성과를 이루어 사화(詞華)가 울연(蔚然)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천성이 강직하여 다른 사람에게 영합하지 않았다. 그는 비록 벼슬한 초기에 당시 재상의 뜻을 거슬러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나, 이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고 후진들을 가르치고 양성하는 데에 전념하였다. 그는 작은 집을 지어 ‘운곡(雲谷)’이라 게액(揭額)하고, 날마다 이곳에서 제생(諸生)들과 함께 학술을 강론하였다. 그사이 1589년(선조 22)에 수성 찰방(輸城察訪)에 임명되어 부임하였다가 임기가 차서 돌아온 바 있다. 임진왜란 때에는 창의(倡義)하여 향병(鄕兵)을 규합하였으며, 안집사(安集使) 김륵(金?)이 그를 풍기의 가장(假將)으로 삼음에, 그는 백성들에게 병무(兵務)와 농무(農務)를 힘써 권장하여 안집(安集)에 힘쓰면서 죽령을 굳건히 수비하였다. 이후 그는 전적(典籍), 신령 현감(新寧縣監), 호조 정랑(戶曹正郞)에 임명되었으며, 1598년(선조 31)에는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부임하였다. 이때 상주는 병화를 겪어서 온 고을에 인적이 드물 지경이었는데, 그가 마음을 다해 노력하여 고을 재건에 힘을 쏟았다. 1601년(선조 34)에는 다시 사섬시 정(司贍寺正)에 제수되고, 다시 파주 목사(坡州牧使)로 파견되었다. 그는 소수서원과 관련해서, 1597년에 사당의 누수처(漏水處)에 기와를 새로 얹는 공사를 개시할 때 이안고유문(移安告由文)?을 지었고, 완료 후에는 환안고유문(還安告由文)을 짓기도 하였다. 아직 본격적으로 호란(胡亂)이 발생하기 이전, 혼란한 북쪽의 변정(邊情)에 대해 시를 지어 이르기를, 함경도에 풍진이 이는데 嶺北風塵起
먼 고을에서 세월은 참 빠르다. 周南歲月?
누가 계책 장대하게 세울까. 爲猷誰克壯
눈물이 낙동강 물에 떨어지네. 淚灑洛東流
라고 하면서 짙은 우국(憂國)의 염을 깃들였다. 그는 후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봉되어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 회산세고(檜山世稿)에 청량산 유산기를 비롯한 그의 글이 실려 있다. 노주(蘆洲) 김태일(金兌一)이 묘갈명을 찬하였다.
황시(黃是)(大相公派 世譜14世 上卷.98쪽 42쪽) 1555년(명종 10) ~ 1626년(인조 4). 자(字) 시지(是之). 호 운계(雲溪)?부훤당(負喧堂). 송간(松澗) 응규(應奎)의 아들. 그는1579년(선조12년)사마시(司馬試) 1594년생원시와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그는 풍기 백동(白洞)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준재(俊才)를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글을 잘 지어서 문조(文藻)가 울연(蔚然)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1578년(선조 11) 가을에 생원 초시에 입격하고, 이듬해 봄에 한준겸(韓俊謙) 등과 함께 생원 복시에 입격하였다. 또한 1584년(선조 17) 봄에 박호(朴?) 등과 더불어 서총대(瑞?臺)에서의 친림 정시(親臨庭試)에 급제하였다. 이후 그는 학유(學諭), 충주 교수(忠州敎授), 주서(注書), 감찰(監察), 예조 좌랑(禮曹佐郞), 고산 찰방(高山察訪), 형조 좌랑(刑曹佐郞), 정언(正言), 호조 좌랑(戶曹佐郞) 등에 임명되었다. 1589년(선조 22)에는 정언에 임명되었으나, 헌납(獻納) 백유함(白惟咸)이 정여립(鄭汝立)과 연루된 관원들을 주요 관서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청한 것을 계기로 양사(兩司)의 관원들이 모두 체직될 때 함께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곧 다시 병조 좌랑(兵曹佐郞)에 임명되었다. 정언으로 있으면서 그는 경기 일대의 흉년 상황을 간곡히 아뢰고, 선조(宣祖)에게 원릉(園陵)을 참배하는 일을 중지하기를 청원하였다. 그는 이후 지평(持平), 재령 군수(載寧郡守), 직강(直講)을 역임하였고, 임진왜란이 발발하던 전후에는 봉화 현감(奉化縣監)으로 재직하였다. 1594년(선조 27)에는 병조 정랑(兵曹正郞), 지평(持平)을 역임하였다. 그는 지평으로 있으면서, 정철(鄭澈)이 사감(私憾)을 가지고 옥사를 처리하였던 죄에 대해 말하고 그의 관작을 추삭(追削)하기를 청하였고, 아울러 그를 두둔한 정언 박동열(朴東說)의 체직을 청하였다. 이 해 6월에는 이조 판서(吏曹判書) 김응남(金應南)이 그를 청현요직(淸顯要職)인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기용하였다.
이듬해에 세자시강원 관원으로서 세자책봉조사(世子冊封詔使)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에 차출되어 의주(義州)에 다녀왔으며, 이후 일시 사직하였다가 9월에 집의(執義)에 임명되어 조정에 복귀하였다. 그는 1596년(선조 29)에 들어와 보덕(輔德), 전적(典籍), 교리(校理), 사성(司成), 종부시정(宗簿寺正) 등을 역임하고, 7월에는 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해 외임(外任)을 자청하여 영천 군수(榮川郡守)에 임용되었다. 1598년(선조 31)에 부친상을 당하게 되자, 3년 동안 시묘(侍墓)하였다. 복(服)을 마쳤을 때에 조정에서 그를 불렀으나 응하지 않다가, 1600년(선조 33) 12월에 내자시 정(內資寺正)에 임명됨에 조정으로 복귀하였다. 이후 그는 종성 도호부사(鍾城都護府使), 청송 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 집의, 부호군(副護軍),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었으며,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 및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책봉되었다. 1605년(선조 38)에 명나라 조사(詔使)인 주지번(朱之蕃) 등이 조선으로 나왔을 때에,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있던 그는 별연위사(別延慰使)로 차출되어 정주(定州)로 나갔다. 이때 원접사(遠接使) 류근(柳根)이, 주지번이 준 와유록(臥遊錄), 영물시(詠物詩), 옥호빙(玉壺氷), 우산편(雨山編), 서일전(棲逸傳), 기승시(紀勝詩)등과, 금선(金扇) 2자루 및 시(詩)를 그에게 부쳐 주었다. 이후 그는 좌승지(左承旨), 승정원 부제조(承政院副提調),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1608년(선조 41)에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여 이이첨을 중심으로 한 대북정권이 집권하자, 여러 차례 사직소를 올려 귀향하였다. 그러다가, 1610년(광해군 2)에 천추사(千秋使)로 차출되어 중국에 다녀왔다. 그 일행이 요양(遼陽)에 도착하였을 때 큰 뇌우(雷雨)를 만났는데, 그가 방물(方物)을 받들고 언덕에 올라가 묵묵히 기도하자 하늘이 갑자기 개이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고 하였다. 그는 이때의 일을 조천록(朝天錄)으로 엮었다. 그는 이후 인조가 즉위하기 전까지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채, 심봉정사(心峯精舍), 부훤당(負暄堂), 완아당(翫鵝堂) 등을 지어 산수를 구경하고 학문을 연구하는 곳으로 삼았다. 이때 그가 형인 대사헌(大司憲) 황섬(黃暹)과 더불어 시내를 격하고 왕래하면서 항상 시주(詩酒)로 즐기니, 원근이 성사(盛事)라고 칭술하였다고 하였다. 1623년(인조 1)에 인조가 즉위하자, 그는 삼척 부사(三陟府使)로 부임하였다가, 얼마 되지 않아 관직을 사양하고 돌아왔다. 대계(大溪) 황재영(黃在英)은 ?종선조운계공친필일기후서(從先祖雲溪公親筆日記後?)?를 지어, 그의 필체에 보이는 호일(豪逸)한 기상이 김생(金生)을 숭상한 아버지 송간공(松澗公)의 필법(筆法)을 가정에서 잘 계승한 결과라고 하였다. 그는 이조(吏曹)의 낭관(郎官)으로 재직할 때에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과 두터운 교분을 맺었는데, 김상용이 1610년(광해군 2)에 시를 지어 그에게 주기를, 회상하면, 이조(吏曹)에서 함께 낭관으로 있을 때에, 憶昔天曹共作郞
금란지교 맺어 오래도록 서로를 잊지 못하였지. 如蘭契分久難忘
반가운 눈빛으로 오늘 다시 만났으나 相逢此日雙眸碧
말년에 양편 살쩍이 희끗희끗해짐이 한스럽구나. 只恨衰年兩?蒼
목청 높여 한 곡조 뽑으며 간단히 한 잔하는데, 一曲高歌成小酌
빽빽한 긴 대나무가 화려한 집을 둘렀네. 千竿脩竹繞華堂
빠듯한 일정에 기한 있어도 서로의 정은 끝이 없으니, 嚴程有限情無極
서쪽 봉우리에 석양 떨어짐도 알아채지 못하네. 不覺西岑下夕陽 라고 하였다. 그의 유집이 회산세고(檜山世稿) 안에 수록되어 있다.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가 묘지명을 찬하고, 방예손(傍裔孫) 황용한(黃龍漢)이 묘갈을 찬하였다. ...저서:조천록(朝天錄), 부훤당집(負暄堂集),완아당(翫鵝堂).심봉정사(心峯精舍),... 문헌:선조실록(宣祖實錄), 정궁집(貞窮集 묘소:경북 영주시 순흥면 태장2리 (거묵골)에 있다.
황엽(黃曄) 1556년(명종 11) ~ 1631년(인조 9). 자 경휘(景輝). 호 양심당(養心堂)?남애재수(南厓??). 습독관(習讀官) 담(譚)의 아들.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의 문인이다. 그는 종사랑(從仕郞) 현풍 훈도(玄風訓導)를 역임하였다. 그는 성품이 매우 효성스럽고, 조상을 추모하는 데에 정성이 독실하였다. 그는 특히 제사를 예법에 따라 잘 모셨다. 박승임은 묘소(墓所) 제사와 사당(祠堂) 제사를 지낼 적에 늘 집사안(執事案)을 정비하여 이를 매우 경건히 거행하였는데, 이때 그도 통가(通家)의 의(義)를 지켜 여기에 참여하면서, 그러한 박승임의 태도를 늘 눈여겨보았다. 그는 이러한 학습을 통해서 후에 자신이 선조(先祖)에게 제사를 올릴 때에, 그처럼 예법을 잘 준수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유집이 있다.
황유경(黃有慶) (大相公派 世譜15世 上卷 100쪽) 1558년(명종 13) ~ 1629년(인조 7). 자 숙형(叔亨). 민(旻)의 아들. 그는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참봉(參奉)을 지냈다.
황지(黃墀) (大相公派 世譜15世 上卷 14쪽)--署承公波 1560년(명종 15) ~ 1647년(인조 25). 자 군급(君級). 생원(生員) 득겸(得謙)의 아들. 그는 내섬시 부정(內贍寺副正)을 역임하고, 후에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추증되었다.
황이번(黃以藩) (大相公派 世譜16世 上卷 14쪽) 생몰년 미상. 자는 한보(翰甫)이며 부정 지(墀)의 장 남으로직장을 지냈다
황이무(黃以茂) (大相公派 世譜16世 上卷 14쪽) 1589년(선조22)~1666년(현종7).자는 실보(實甫)이며 부정 지(墀)의 둘째아들로 후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귀주 (龜州)김세호(金 世鎬)가 묘갈명을 지었다
황유상(黃有相)(大相公派 世譜15世 上卷 16쪽) 1560년(명종 15) ~ 미상. 초명 연상(連相). 자 낙하(洛河). 호 만회(晩晦). 오(晤)(임진왜란 때 실종)의 아들. 절충장군(折衝將軍)을 지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순절(殉節)하였는데, 후에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증직되었다.
황유중(黃有中)(大相公派 世譜 15世 上卷 정익종파36쪽54쪽) 1564년(명종 19) ~ 1620년(광해군 12). 자(字) 중정(中正). 호 조대(釣臺). 식암(息庵) 대사현섬(暹)의 아들. 그는 생원시와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였다. 그는 어려서 서울의 이현(梨峴)에 거주하였는데, 12세 때에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등과 함께 “동학오동계(同學五同?)”를 만드니, 진신(搢紳)들이 다투어 이를 전하면서 그들을 “동촌기동(東村奇童)”이라 지목하였다. 그는 문예가 일찍부터 성취되었고, 기상이 초연(超然)하였다. 평소 벼슬길에 진출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과거에 실패하였어도 조금도 실망하지 않았다. 일찍이 정시문과(庭試文科)에서 급제했으나, 아버지 섬(暹)식암(息庵)이 고시관(考試官)으로 참여하여 그의 글을 알아보고는 그를 떨어뜨리니, 사람들이 부자간에도 공정히 일을 처리하는 모습에 탄복하였다고 하였다. 1586년(선조 19)에 어머니 상을 당하자, 정성껏 예를 치르고 시묘(侍墓)하였다. 1604년(선조 37)에는 음보(蔭補)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며, 다시 사과(司果)와 사정(司正)에 임명되었다. 그는 이듬해에 증광 생원시에 입격하였고, 1606년(선조 39)에는 증광 문과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 이후 그는 전적(典籍), 형조 좌랑(刑曹佐郞),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지내고 홍문관(弘文館)에 등용되었다. 그는 다시 옥당(玉堂)에 선발되었으나, 홍문관 관직에 본격 임용되기 전에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광해군 즉위 후에 대북(大北)의 전횡이 시작되고 영의정 류영경(柳永慶)이 축출되는 정국(政局)에서,그의 처남(妻男)되는 아버지가 파직돠자 벼슬을 버리고 그는 아버지 식암과 함께 미련없이 풍기(豊基)에 귀향한후 그는 부모님을 보살펴드리는 여가에 서책을 연구하는 일로써 자오(自娛)하다 고산(高山.금교(金郊).찰방(察訪)을지냈다. 그러다가, 1609년(광해군 1)에 고산 찰방(高山察訪)으로 임명되니, 그는 곧바로 관직을 버리고 돌아왔다. 그 이듬해에는 금교 찰방(金郊察訪)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중국의 조사(詔使)가 탐욕이 심하여 역로(驛路)에 소동이 일어나자 행정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뽑아 이를 진정시키고자 하였던 조정의 조치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임무를 맡아 물품 공급을 무리 없이 넉넉하게 하고, 그 이듬해에 인혐(姻嫌)하여 관직에서 해면(解免)되었다. 그는 이후에도 정언(正言), 헌납(獻納),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그는 늘 ‘전 원외랑(前員外郞)’이라고 자칭하였기에, 그가 생을 마친 이후에 후손들은 그가 광해군대에 받았던 관함(官銜)을 절대로 붙이지 않았다고 하였다. 회산세고(檜山世稿)에 그의 글이 실려 있다. 정와(貞窩) 황용한(黃龍漢)이 행장을 찬하고, 염헌(恬軒) 임상원(任相元)이 묘지명을 찬하였다. 또한 이상도(李尙度)도 묘갈을 찬하였다. 유고 가운데 ?강구별우인(江口別友人)이라는 시가 있는데, 그 가운데 1절(絶)에 이르기를,
만남과 헤어짐엔 본래 기약 없고 人生聚散本無期
세상 부침은 각각 그 때가 있도다. 世上浮沈各有時
오늘 자네와 강 포구에서 헤어지는데 今日與君江浦別
떠나는 이 남는 이, 심사는 백구만이 아네. 去留心事白鷗知 라고 하였다.
황흘(黃忔) (大相公派 世譜14世 上卷 120쪽) 1564년(명종 19) ~ 1642년(인조 20). 자 시성(時省). 士彦의손자,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선(璿)의 아들.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추(同樞)를 받았다.
황신(黃晨)(大相公派 世譜14世 上卷102쪽) 1568년(선조 1) ~ 1640년(인조 18). 자 시원(視遠). 종사랑(從仕郞) 명규(命奎)의 아들. 내의원 봉사(內醫院奉事)를 지냈다.
황진(黃晉) 생몰년 미상. 자 경진(景進). 대취헌(對翠軒) 수규(秀奎)의 아들. 첨지(僉知)를 지냈다.
황용(黃墉) 1571년(선조 4) ~ 1661년(현종 2). 자 석흘(石屹). 생원(生員) 득겸(得謙)의 아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받았다.
황유길(黃有吉)(大相公派 世譜15世 上卷71쪽 都正公派38쪽) 1574년(선조 7) ~ 1635년(인조 13). 자 선숙(善叔). 식암(息庵) 섬(暹)의 아들. 그는 사마시에 입격하였고, 후에 감역관(監役官), 해주 판관(海州判官), 종친부 도정(宗親府都正) 등을 지냈다. 그는 인조비(仁祖妃) 인열왕후(仁烈王后 :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딸)의 조부(祖父)인 증 영의정(贈領議政) 한효윤(韓孝胤)의 사위가 되어, 인조반정 이후 왕실과 매우 가까운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전원(田園)에서 여유롭게 소요하면서 관직이나 출세에 연연하는 뜻을 두지 않았다고 하였다. 황중민(黃中敏)이 찬한 그의 묘비(墓碑)가 영주금석문전집에 수록되어 있다.
황현(黃晛) (大相公派 世譜 14世 上卷 7쪽) 1576년(선조 9) ~ 1645년(인조 23). 자 백휘(伯輝). 선무랑(宣務郞) 윤규(潤奎)의 아들. 그는 빙고 별제(氷庫別提)를 역임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침착하고 굳세었으며, 일찍부터 의도(儀度)를 이루었다. 18세 때에 음보(音譜)로 사섬시 참봉(司贍寺參奉)에 임명되었으나, 학업을 아직 이루지 못하였다고 하여 스스로 사양하였다. 1602년(선조 35)에는 제천 훈도(堤川訓導)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았다. 1605년(선조 38)에 봉사(奉事)를 거쳐 직장(直長)에 임명되었고, 다시 빙고 별검(氷庫別檢)에 제수되었다가 빙고 별제로 승진하였다. 이때 빙고의 얼음을 사사로이 구하는 권세가의 청탁에 있자, 그는 “이는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것이니, 어찌 유사(有司)가 사사로이 인정(人情)에 맞추어야 하겠는가?”라고 하며, 일체 불허하였다. 그는 이 때문에 사방의 비난에 직면하게 되었으나, 전혀 개의치 않았다. 결국 그는 1606년(선조 39)에 파직되어 돌아왔다. 그는 이때부터 다시는 사진(仕進)하지 않고, 여유롭게 노닐며 자락(自樂)하였다. 그는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고 종족(宗族)에게 미더움을 주었으며, 재화(財貨)에 서툴고 조세(租稅)에 성실히 임하였다. 그는 혹 횡액(橫厄)을 만나더라도 그냥 감수할지언정 되갚음을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의 묘갈(墓碣)은 후손 황응륜(黃應綸)의 부탁으로 이상정(李象靖)이 찬하였는데, 영주금석문전집에 수록되어 있다.
황유첨(黃有詹)(大相公派 世譜15世 上卷 88쪽) 1578년(선조 11) ~ 1625년(인조 3). 자 군성(君省). 식암(息庵) 섬(暹)의 아들.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의 장인이다. 그는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준재(俊才)가 있어, 아망(雅望)이 자자하였다. 그는 어린 나이에 사마시에 입격하여 생원이 되었으나, 광해군대에 다른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상소하여 류영경(柳永慶)을 구호하고 시국(時局)을 논하였다가, 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해 유벌(儒罰)에 처해지게 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해벌되어 1625년(인조 3)에 문과 별시에 응시하러 갔다가, 불행히 개성(開城) 땅에서 생을 마쳤다. 이때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있던 이경직(李景稷)이 친히 염습하여 그의 시신을 돌려보내 주었다. 또한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만시(輓詩)를 지어, 그가 포의(布衣 : 벼슬하지 않은 선비)로서 생을 마친 것을 아쉬워하였다. 그의 저서에 정무록(丁戊錄)이 있는데, 이는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편찬에 기초자료로 활용되었다.
황연열(黃延悅) (大相公派 世譜14世 上卷 100쪽) 1578년(선조 11) ~ 1648년(인조 26). 자 열지(悅之). 유경(有慶)의 아들. 진사를 지냈다고 하였다.
황질(黃晊) 大相公派 世譜14世 上卷 68쪽) 1579년(선조 12) ~ 1671년(현종 12). 자 문숙(大叔). 증 공조 참판(贈工曹參判) 인(認)의 아들.12世사영(士英)손자 동지중추부사를 받았다.
황운(黃?) 1580년(선조 13) ~ 1656년(효종 7). 자 사후(士厚). 참봉(參奉) 염()의 아들. 계공랑(啓功郞) 직장(直長)을 역임하였다.
황입진(黃立震)(大相公派 世譜16世 上卷36쪽) 1588년(선조 21) ~ 1666년(현종 7). 자 진보(震甫). 조대(釣臺) 유중(有中)의 아들섬(暹)의손자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추증되었다.
황혜(黃憓)(大相公派 世譜14世 上卷137쪽) 1588년(선조 21) ~ 1665년(현종 6). 자 자인(子仁). 참봉(參奉) 염()의 아들.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同知)를 받았다.
황이무(黃以茂) (大相公派 世譜 16世 上卷14쪽)--署承公派 1589년(선조 22) ~ 1666년(현종 7). 자 실보(實甫). 부정(副正) 15世지(墀)의 아들.12世한필(漢弼)의고손자,후에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그는 넓고 큰 도량이 있었다. 특히 그는 옛것을 좋아하는 마음이 독실하였으므로, 세속을 즐겨 추종하면서 구차스러운 속태(俗態)를 짓지 않았다. 그는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고 형제들과 우애를 나누면서 아울러 수(壽)까지 누리니, 향당(鄕黨)에서 모두 그를 추중하였다고 하였다. 귀주(龜州) 김세호(金世鎬)가 묘갈명을 찬하였다.
황정(黃渟) (大相公派 世譜 17世 上卷112쪽) 1624년(인조2)~1690년(숙종16).자는 종원(宗遠)이며 좌승 지 이무(以茂)의 아들로 후에 대사헌에 추증 되었다.어려서 부터 병치레를 많이 하여 학업을 감당 할 체력이 없었으나 장성하여서는 개연히 분발하 여 학업에 열중 하였다. 자식을 가르칠 때에 사랑 만을 베풀어 배움에 나 태하지 않토록 하였으며 흉년에 내외 종척(宗戚)가운데 어려움을 격고 있 는 이들이 있으면 힘써 이들을 구호하였다. 만년에 영회당(詠檜堂)을 지어 날마다 친구들과 더불어 이곳에서 시주(時酒)로 자락(自樂)하였다. 귀주(龜州) 김세호(金世鎬)가 묘갈명을 지었다.
황도현(黃道顯) (大相公派 世譜 17世 上卷112쪽) 1644년(인조22)~1715년(숙종41). 자는 문숙(文叔)이 며 징(澂)의 장남으로 호군을 지냈다.
황도익(黃道翊) (大相公派 世譜 17世 上卷112쪽) 1662년(현종3)~1749(영조25).자는 군익(君翊)이며 가의대부 동추을 받았다. 정(渟)의장남으로 당(堂)에 편액하기를 “영회”라 하였 는데 이는 그 근본을 잊지 않겠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월탄(月灘) 김창석(金昌錫)등과 교유하였다.
황경(黃璥) (大相公派 世譜 17世 上卷112쪽)경 1693((숙종19)~1785년(정조9).자는 경중(敬仲) 동추(同 樞) 도익(道翊)의 아들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소수서원 원장을 역임 하였다.
*19세 황재(黃梓) 1696년(숙종22)~1748년(영조24).자는 임중(任仲)이며 동 추(同樞) 도익(道翊)의 아들로 통덕랑을 지내고 소수서원 원장을 역임하였 다. 무신란(戊申亂. 1728년 이인좌의난)에 대항하기위하여 순흥에 의병진 이 결성되자 권동혁(權東奕)등과 더불어 소모장(召募將)으로 임명되었다.
황일청(黃一淸)(大相公派 世譜14世 上卷154쪽) 1589년(선조 22) ~ 미상. 절충장군(折衝將軍) 호(琥)의 아들. 행 통훈대부(行通訓大夫) 고성 군수(高城郡守)를 역임하였다고 하였다.
황입경(黃立敬)(大相公派 世譜16世 上卷36쪽) 1595년(선조 28) ~ 1683년(숙종 9). 자 경보(敬甫). 조대(釣臺) 유중(有中)의 아들.섬(暹)의손자, 통덕랑(通德郞) 증 사현부집의(司憲府執義)을 지냈다.
황유정(黃有淨) (大相公派 世譜 15世 上卷98쪽) 1596년(선조 29) ~ 1668년(현종 9). 자 증남(曾南). 호 양한정(養閒亭). 운계(雲溪) 시(是)의 아들. 중직대부(中直大夫)를 받았음. 시권(詩券)이 남아 있다고 하였다.
황유형(黃有泂) 1600년(선조 33) ~ 미상. 자 자정(子淨).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받았다.
황형(黃瀅) (大相公派 世譜 15世 上卷5쪽 同24쪽) 1600년(선조 33) ~ 미상. 자 계천(季天). 주부(主簿) 득형(得亨)의 아들.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황천일(黃千一) (大相公派 世譜 15世 上卷 123쪽) 1601년(선조 34) ~ 1663년(현종 4). 자 성응(聖應). 사재감 부정(司宰監副正) 기(琦)의 손자 성(惺)의 아들. 그는 상의원 별제(尙衣院別提)를 지내고, 후에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추증되었다. 그는 성품이 어질고 너그러웠으며, 사람을 사랑하되 의리(義理)에 맞게 했다고 하였다.
황유징(黃有徵) (大相公派 世譜14世 上卷106쪽) 1601년(선조 34) ~ 1667년(현종 8). 자 명선(明善). 汝奎(여규)의손자. 종고(宗皐) 서(曙)의 아들. 선교랑(宣敎郞)을 지냈다.
황유한(黃有漢) (大相公派 世譜 15世 上卷99쪽) 1601년(선조 34) ~ 1684년(숙종 10). 자(字) 여호(汝浩). 운계(雲溪) 시(是)의 아들. 호군(護軍)을 지냈다.
황입영(黃立潁)(大相公派 世譜16世 上卷71쪽과 38쪽) 1602년(선조 35) ~ 1673년(현종 14). 자 견보(見甫). 통훈대부(通訓大夫) 유길(有吉)의 아들. 그의 어머니는 증 영의정(贈領議政) 한효윤(韓孝胤)의 딸이므로, 인조비(仁祖妃)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아버지인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은 그의 외삼촌이 된다. 즉 소현세자와 효종을 낳은 인열왕후 한씨는 그의 외사촌인데, 이런 인연으로 그는 효종과 잠저(潛邸) 때부터 교분이 있었다. 그는 신장이 크고 체격이 장대하여 힘이 몇 사람을 합친 것과 맞먹었으며, 기국(器局)이 침중(沈重)하였다. 또한 성품이 호쾌하여 사물에 얽매임이 없었다. 병자호란 이후로 조정에서 군무(軍務)에 유의하여, 그를 서반(西班)으로 옮겨서 부장(部將)에 제수하였으나, 그는 이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곧 관직을 버리고 돌아왔다. 그런데 효종이 즉위하여 더욱 북벌에 유의하고, 그가 대임(大任)을 감당할 만하다고 하여 여러 차례 궁궐로 그를 불러 특별히 대우하였다. 이에 강무(講武)할 때에 그를 무과 시험에 응시하게 하였으나, 그는 시험장에서 번번이 대취(大醉)하여 활을 당기지도 않았다. 일찍이 효종이 병풍에 그의 이름을 붙이고 그 아래에 ‘병판(兵判)’ 2글자를 써놓은 적이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그는 더욱 자신의 능력을 숨기는 데에 힘을 썼다고 하였다. 북벌론이 바야흐로 무르익고 묘당(廟堂)에서 조석으로 이에 관한 계책을 논의함에, 무사(武士)들이 미리부터 원정(遠征)을 근심해서 심지어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이때 한 서북(西北)의 군교(軍校)가 그 무리에게 말하기를 “황 부장(黃部將)이 날마다 누워서 만취해 있다. 이 사람이 움직이지 않으니, 우리들은 근심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고 한다. 당시 그의 요청으로 추위에 고생하는 직숙(直宿) 군졸(軍卒)들에게 각각 고구자(藁?子)를 내려 주게 하니, 이것이 관례가 되어 이를 ‘황부장 구자(黃部將?子)’라 불렀다고 하였다. 어느 날, 그가 달 밝은 밤에 궁궐에서 숙직을 서면서 객수(客愁)에 젖어 휘파람을 불었는데, 그 소리가 궁궐 전체에 크게 울려 퍼져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이에 그가 임금에게 사실대로 고하자, 임금이 선온(宣?)을 내려 그의 마음을 위로하였다고 하였다. 효종은 끝내 높은 관작으로 그의 마음을 붙잡아 둘 수 없음을 알았고, 해학에 뛰어났던 동방삭(東方朔)에 그를 비기기까지 하였다. 그는 이에 고향으로 돌아와 살림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술과 해학으로 나날을 보냈고, 신선술(神仙術)과 골계(滑稽)를 즐겨 말하였다. 그는 천성이 인후관유(仁厚寬裕)하였으며, 문장은 호방한 성품을 반영하여 질탕(迭宕)하고 비범하였다. 그의 이러한 행적은 북벌론으로 시끄러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몸가짐을 지키기 위한 한 방편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가 생을 마치니, 질재(質齋) 김창문(金昌文)이 만시(輓詩)를 지어 이르기를 혼탁한 세상에 태어나 공만 홀로 초연하였으니 公生濁世獨翩翩
그 형연함, 흡사 가을 하늘에 걸린 둥근 달이었도다. 炯似秋空月掛圓
서울에서 낮은 벼슬은 포부 펼치기 어려웠고 東華宦薄難容地
북해 같은 깊은 준은 하늘에 부끄럽지 않았네. 北海?深不愧天
나이 팔십 되어 조화 타고 떠났으니 年至八旬乘化去
통연히 인간 세상의 한 신선이었도다. 洞然人世一神仙 라고 하였다. 후손인 황용한(黃龍漢)이 가장(家狀)을 찬하였다.
황유순(黃有淳)(大相公派 世譜 15世 참의공파(參義公派上卷66쪽) 1605년(선조 38) ~ 1686년(숙종 12). 자 자화(子和). 사영(士英)증손자 호군(護軍)을 지냈다.
황입신(黃立信)(大相公派 世譜16世 上卷 都正公派39쪽) 1605년(선조 38) ~ 1647년(인조 25). 자 자실(子實). 통훈대부(通訓大夫) 유길(有吉)의 아들. 그는 29세 때에 증광 생원시에 입격하고, 35세 때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관직으로는 형조 좌랑(刑曹佐郞), 예안 현감(禮安縣監), 자인 현감(慈仁縣監) 등을 지냈다.
황유항(黃有恒)(大相公派 世譜15세 上卷68쪽) 1607년(선조 40) ~ 1702년(숙종 28). 자 자상(子常). 동지(同知) 질(晊)의 아들.사영(士英)손자.그는 호군(護軍)을 지냈으며, 소수서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황수(黃璲)(大相公派 世譜17世 上卷 36쪽과190쪽 ) 1610년(광해군 2) ~ 1686년(숙종 12). 자 자진(子珍). 호 낙정재(樂正齋). 증 사헌부 집의(贈司憲府執義) 입진(立震)의 아들. 그는 문장에 능하고, 사학(史學)을 널리 연구하였다.진통덕랑(珍通德郞) 저서에 계총집(桂叢集)이 있다.
황입현(黃立顯)(大相公派 世譜16世 上卷 39쪽 88쪽) 1611년(광해군 3) ~ 1653년(효종 4). 자 이회(而晦). 유첨(有詹)의 아들. 생부는 유길(有吉). 그는 효자(孝慈)가 독실하였고, 청렴과 신중함으로 관직에 임하였다. 그는 음직으로 선공감 가감역(繕工監假監役)에 보임되었고,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로 옮겼다가, 다시 안기도 찰방(安奇道察訪)에 임명되었다. 그는 후에 이곳 관소(官所)에서 생을 마쳤다. 후손인 대계(大溪) 황재영(黃在英)이 묘갈명을 찬하였다.
황극순(黃克順)(大相公派 世譜17世 上卷273쪽 生員公 諱 瑞奎派46쪽) 1612년(광해군 4) ~ 1694년(숙종 20). 자 정백(正伯). 호 회곡(檜谷). 성균 진사(成均進士) 정열(庭悅)의 아들. 그는 진사시에 입격하였으며, 정산 현감(定山縣監)을 역임하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받았다.
황유해(黃有海)(大相公派 世譜15世 上卷44쪽) 1614년(광해군 6) ~ 1680년(숙종 6). 자 경보(敬甫). 운계(雲溪) 시(是)의 아들. 중직대부(中直大夫)를 받았다.
황한익(黃漢翊) (大相公派 世譜16世 上卷 7쪽과 28쪽) 1615년(광해군 7) ~ 1691년(숙종 17). 초명 진한(振翰). 자 상수(商叟).사우(士祐)의고손 유찬(有纘)의 아들.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묘갈은 현손(玄孫)인 황최원(黃最源)이 찬하고, 방예손(傍裔孫) 황용한(黃龍漢)이 썼다.
황유문(黃有文)(大相公派 世譜15世 上卷70쪽) 1617년(광해군 9) ~ 1704년(숙종 30). 자 여욱(汝郁). 동지(同知) 질(晊)의 아들. 호군(護軍)을 지냈다.
황징(黃徵)(大相公派 世譜17世 上卷 14쪽同112쪽) 1617년(광해군 9) ~ 1645년(인조 23). 자 거원(巨源). 한필(漢弼)후손 증 좌승지(贈左承旨) 이무(以茂)의 아들. 그는 어려서부터 문행(文行)이 있었다.
황유현(黃有顯)大相公派 世譜15世 上卷 34쪽) 1618년(광해군 10) ~ 1672년(현종 13). 초명 유석(有碩). 자 운여(雲如). 통덕랑(通德郞) 고(杲)의 아들.응규(應奎)의 손자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그는 풍기에서 서울 연지동(蓮池洞)으로 이거하였다가 다시 강화도(江華島)에서 살면서 이곳에 생을 마쳤다. 그 아들 입성(立星) 등 후손들은 다시 양양(襄陽 : 예천의 옛 이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임.) 등지에 우거(寓居)하며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의 묘소가 실전(失傳)되기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에 후손들이 예천(醴泉)에 단(壇)을 만들어 그를 추감(追感)하고 있다.
황유필(黃有弼) (大相公派 世譜15世 上卷 48쪽) 1618년(광해군 10) ~ 미상. 자 여상(汝相).명규(命奎)손자.봉사(奉事) 신(晨)의 아들.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황유(黃楡) (大相公派 世譜15世 上卷 154쪽108쪽) 1619년(광해군 11) ~ 미상. 자 경실(敬實). 사효(士孝)의증손자 고성 군수(高城郡守) 일청(一淸)의 아들. 영릉 참봉(英陵參奉)에 제수되었다.
황호(黃灝) (大相公派 世譜 17世 上卷 120쪽同17쪽) 1620년(광해군 12) ~ 미상. 자 호숙(浩叔). 첨지(僉知) 이청(以淸)의 아들. 그는 천성이 매우 효성스러워서, 부모님께 손수 맛있는 음식을 드렸고, 혹 나가서 좋은 음식을 얻으면 먹지 않고 가지고 돌아와 반드시 부모님께 올렸다고 하였다. 일찍이 해변을 지나는데, 큰 물고기가 바로 그의 앞으로 튀어 나오니, 그는 이를 취하여 부모님께 요리해 올렸다. 이에 사람들이 효감(孝感)이라고 칭술하였다. 그는 부모님 상에 3년 동안 시묘(侍墓)하면서 조전(朝奠)과 석전(夕奠)을 몸소 올렸으며, 또 조석으로 호곡(號哭)하였다. 그는 이러한 효행(孝行)으로 인해, 뒤에 좌랑(佐郞)에 증직되었다.
황유부(黃有孚) (大相公派 世譜17世 上卷 71쪽) 1620년(광해군 12) ~ 1697년(숙종 23). 자 신보(信甫). 동지(同知) 질(晊)의 아들.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參議公 사영(士英)증손자 이시다.
황정(黃渟) (大相公派 世譜17世 上卷 2쪽과 14쪽) 1624년(인조 2) ~ 1690년(숙종 16). 자 종원(宗遠). 좌승지(左承旨) 이무(以茂)의 아들. 후에 대사헌(大司憲)에 추증되었다. 그는 천품이 중후하고 질박하여, 가벼이 희로(喜怒)의 빛을 드러내지 않았고, 남의 과실을 드러내서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병치레를 많이 하여 학업을 감당할 체력이 없었으나, 장성하여서는 개연히 분발하여 학업에 열중하였다. 또한 주위에 책 읽기를 좋아하거나, 재주와 학문으로 이름을 얻은 자가 있으면, 반드시 적극적으로 이들을 칭술하였다.
그는 자식을 가르칠 때에 사랑만을 베풀어 배움에 나태하도록 하지 않았으며, 흉년에 내외 종척(宗戚) 가운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이 있으면 힘써 이들을 구호하였다. 만년에 그는 영회당(詠檜堂)을 지어 날마다 친구들과 더불어 이곳에서 시주(詩酒)로 자락(自樂)하였다. 귀주(龜州) 김세호(金世鎬)가 묘갈명을 찬하였다.
황창술(黃昌述) (大相公派 世譜 16世 上卷123쪽) 1628년(인조 6) ~ 1711년(숙종 37). 자(字) 계도(繼道) 혹은 계술(繼述). 호 단구(丹邱). 상의원 별제(尙衣院別提) 기(琦)의증손자 천일(千一)의 아들. 그는 식년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남달랐다. 유년기 때 외삼촌인 정근재(定?齋) 김규(金?)에게 수업하였는데, 그는 정근재의 독실한 가르침 아래, 문행(文行)을 날로 심화시켰다. 특히 그는 문단(文壇)에서 명망이 높아, 당시의 문사(文士)들이 그에게 윗자리를 양보하며, “문단의 대원수[騷壇大元帥]”라는 칭호를 붙였다고 하였다. 1643년(인조 21)에 부친상을 당함에, 그 상제(喪制)는 오로지 학봉(鶴峯) 집안의 가례(家禮)를 준용하였다. 그는 이때부터 과거를 완전히 단념하고자 하였으나, 어머니의 권유로 부득이 과거를 계속 준비하였다. 1688년(숙종 14)에 모친상을 당하고 상제를 마쳤을 때에는 탄식하며 이르기를 “과거는 작은 일이나, 자식이 되어 부모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지 못하는 것도 또한 죄인이다.”라고 하며, 마침내 그의 나이 81세 때인 1708년(숙종 34)에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이로 인해 베푼 문희연(聞喜宴)에서, 원근의 수령과 영남의 명망가들이 많이 참석하여 시를 창화하였으며, 그 시축(詩軸)에 권두인(權斗寅)?권두경(權斗經)?권두기(權斗紀) 및 이명하(李明夏)?채응만(蔡膺萬)이 서문(序文)을 지었다. 또한 조정에서는 그를 특별히 동부 참봉(東部參奉)에 임명하였다. 그는 이에 상경하여 숙배(肅拜)하고자 하였으나, 마침 서울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자식들이 상경을 만류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그는 집안에 단정히 있으면서 자신의 호를 ‘단구노인(丹邱老人)’이라 하고, 여유롭게 소요하다가 생을 마쳤다.
그는 어릴 적부터 진동보(陳同甫)의 사람됨을 늘 사모하여 고금을 하찮게 여기고 글과 술로써 회포를 달래니, ‘천하기남자(天下奇男子)’로 자처하였다. 그러나 시비(是非)와 공사(公私)는 확고히 분변하기를 마지않았다. 또한 고인(古人)의 이름난 절개에 대한 글을 읽으면, 마치 자신이 그 자리에 있는 양 장탄식하였다. 만년에 그는 침상 곁에 오직 성리서(性理書)만을 놓아두고 연구하였다. 고을의 인사들이 단계서원(丹溪書院)을 창립할 때에 그에게 많은 문제를 품의하였으므로, 이 서원의 규모와 시설이 그의 구상에서 비롯된 것이 많았다. 그가 생을 마치니, 모산(茅山) 이동완(李棟完)은 만시(輓詩)를 지어 “고을의 풍류, 지금은 쓸쓸해졌으니, 추억하며 누군들 눈물 가득 고이지 않으리.[鄕里風流今寂寞, 追思誰不?盈眸]”라고 하였으며, 북벽(北壁) 김홍제(金弘濟)는 제문(祭文)에서 “씩씩한 이 늙은이는 문단(文壇)을 종행하였네. 시상(詩想)은 솟구쳤고 자획은 해정(楷正)하였네. 보는 자들이 담장처럼 둘러서서 다투어 그 이름 알았다네.[??是翁, 縱步詞場. 詩思湧如, 字?楷正. 觀者如堵, 爭知名姓]”라고 하였다. 일고(逸稿)가 간행되었다. 방예손(傍裔孫) 황용한(黃龍漢)이 행장을 찬하였다. 별사우(別祠宇)를 묘소 아래에 건립하였으며, 이재(?齋) 권연하(權璉夏)가 그 상향축문(常享祝文)을 찬하였다.
황명화(黃命和) 1629년(인조 7) ~ 1702년(숙종 28). 자 화중(和仲). 낙정재(樂正齋) 수(璲)의 아들.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황유원(黃有愿) (大相公派 世譜15世 上卷47쪽과 35쪽) 1629년(인조 7) ~ 1694년(숙종 20). 자 경열(敬烈). 호 연재(蓮齋). 응규(應奎)의손자 서강(西崗) 고(杲)의 아들. 그는 임진왜란 때 강화도로 피난을 떠났으므로, 항상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졌으나, 세사(世事)로 인하여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황창달(黃昌達) (大相公派 世譜 16世上卷129쪽) 1630년(인조 8) ~ 1697년(숙종 23). 자 현경(顯卿). 별제(別提) 천일(千一)의 아들.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황청일(黃淸一) (大相公派 世譜15世 上卷102쪽) 1631년(인조 9) ~ 1698년(숙종 24). 자 회징(會澄).칙(恜)의아들. 봉직랑(奉直郞) 별좌(別座)를 지냈다.
황입기(黃立紀) (大相公派 世譜16世 上卷68쪽) 1632년(인조 10) ~ 1665년(현종 6). 자 군진(君振).사영(士英)의증손 호군(護軍) 유항(有恒)의 아들.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황로(黃璐) (大相公派 世譜17世 上卷88쪽) 1632년(인조 10) ~ 1685년(숙종 11). 자 여옥(汝玉). 찰방(察訪) 입현(立顯)의 아들.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황해익(黃海翊) (大相公派 世譜17世 上卷13쪽) 1632년(인조 10) ~ 1719년(숙종 45). 자 자거(子擧). 호 송파거사(松坡居士). 호군(護軍)을 지냈다.사우(士祐)고손자이다.
황창도(黃昌道) (大相公派 世譜16世 上卷120쪽) 1633년(인조 11) ~ 1668년(현종 9). 자 사행(士行) 혹은 자행(子行). 흘(忔)의손자 의일(儀一)의 아들. 증광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황중정(黃中正) (大相公派 世譜 17世上卷119쪽) 1634년(인조 12) ~ 1713년(숙종 39). 자 후재(厚哉). 위(蘤)의 아들. 호군(護軍)을 지냈다. 사언(士彦)6대손이다.
황창원(黃昌遠) (大相公派 世譜 16世上卷132쪽) 1634년(인조 12) ~ 1707년(숙종 33). 자 숙형(叔亨). 별제(別提) 천일(千一)의 아들.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황최(黃璀) (大相公派 世譜17世 上卷38쪽40쪽213쪽) 1635년(인조 13) ~ 1686년(숙종 12). 초명 선(璿). 자 공윤(公潤). 입영(立潁)의 아들. 생부는 입현(立顯).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황서강(黃叙綱) (大相公派 世譜 17世上卷24쪽 121쪽) 1640년(인조 18) ~ 1707년(숙종 33). 자여도 찰방(自如道察訪) 이문(以文)의 아들. 통정대부(通政大夫)를 받았다.
황창우(黃昌遇) (大相公派 世譜16世 上卷120쪽) 1642년(인조 20) ~ 1708년(숙종 34). 자 자득(子得). 의일(儀一)의 아들. 흘(忔)손자.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이에 대한 감응이 있었다고 하였다. 옥천(玉川) 조덕린(趙德?)이 행장을 찬하였다고 한다. 황염(黃琰) (大相公派 世譜 17世上卷40쪽253쪽) 1643년(인조 21) ~ 1698년(숙종 24). 자 계옥(季玉). 호 백우(白羽). 찰방(察訪) 입현(立顯)의 아들. 식년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그는 뛰어난 재주와 통달한 견식이 있었다. 또한 문사(文辭)가 뛰어나 명성이 났다고 하였다. 일찍이 성균관에 있을 때 석채례(釋菜禮)를 행하는 과정에서 찬례(贊禮)가 실수를 저질러 임금의 노여움을 사게 되자, 성균관 사람들이 이에 두려움에 떨었으나, 그가 한 마디 말로 임금의 마음을 되돌려 일을 무마시켰다고 하였다.
인사를 담당하는 관리가 그의 이름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그를 만나고자 하였으나, 그는 극구 피하였다. 그는 가난하게 지냈어도 독서하기를 즐겨서 기한(飢寒)과 질병이 심한 와중이라도 글공부를 그만두지 않았다. 이에 음양(陰陽)?산수(算數)?성상(星象)?감여(堪輿)의 학설도 두루 섭렵하여 막힘이 없었다.
만년에 그는 시끄러운 세상을 더욱 싫어하여 태백산에서 숨어살고자 하였는데, 많은 친구들이 편지를 보내어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 했던 그는 중간에 체류하던 부둔(富屯) 우소(寓所)에서 그만 병으로 생을 마치고 말았다. 정와(貞窩) 황용한(黃龍漢)이 묘지명을 찬하였다.
황도현(黃道顯) 1644년(인조 22) ~ 1715년(숙종 41). 자 문숙(文叔). 징(?)의 아들. 호군(護軍)을 지냈다.
황상춘(黃相春) (大相公派 世譜18世 上卷120쪽) 1644년(인조 22) ~ 1714(숙종 40). 자 춘오(春吾). 증 좌랑(贈佐郞) 호(灝)의 아들. 그는 효행이 있었다.
황명구(黃命耈) (大相公派 世譜 18世54쪽 ) 1648년(인조 26) ~ 1699년(숙종 25). 자 국로(國老). 유(瑜)의 아들.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통례원 인의(行通禮院引儀)를 지냈다.
황운대(黃運大) (大相公派 世譜20世 56쪽) 1648년(인조 26) ~ 1697년(숙종 23). 자 득보(得甫). 중추(中樞) 집(집)의 아들.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문인이다. 그는 효성과 우애로 널리 칭술되었다. 그는 또한 남의 선행을 즐겨 듣고 보아서, 이로써 자신의 덕성이 더 나아지기를 구하였다고 하였다.
황창근(黃昌近) (大相公派 世譜17世 21쪽) 1649년(인조 27) ~ 1689년(숙종 15). 자 원보(遠甫). 한충(漢忠)의 고손자 이일(以一)의 아들. 조봉대부(朝奉大夫)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을 역임하였다.
황창준(黃昌俊) (大相公派 世譜16世 上卷102쪽) 1650년(효종 1) ~ 1735년(영조 11). 자 대래(大來). 별좌(別座) 청일(淸一)의 아들. 호군(護軍)을 지냈다.
황명택(黃命澤) (大相公派 世譜18世 上卷60쪽) 1650년(효종 1) ~ 1683년(숙종 9). 자 덕수(德洙). 기(琦)의 아들.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냈다. 그는 풍기에서 순천(順天)으로 들어갔다가, 그곳 군수(郡守) 표인(表仁)의 시양(侍養)이 되었고, 다시 사위가 되었다. 황창렬(黃昌烈) 1653년(효종 4) ~ 1733년(영조 9). 자 효승(孝承). 별좌(別座) 청일(淸一)의 아들. 통정대부(通政大夫)를 받았다.
황명규(黃命圭)(大相公派 世譜17世 上卷132쪽) 1653년(효종 4) ~ 1722년(경종 2). 자 군서(君瑞). 통덕랑(通德郞) 창원(昌遠)의 아들. 생부는 단구(丹邱) 창술(昌述).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황명익(黃命益) 1654년(효종 5) ~ 1680년(숙종 6). 자 노경(虜卿). 린(璘)의 아들. 그는 효행이 있었다.
황유익(黃有益) (大相公派 世譜14世 上卷102쪽) 1655년(효종 6) ~ 1733년(영조 9). 자 여겸(汝謙). 봉사(奉事) 신(晨)의 아들. 통덕랑(通德郞)을 지내고, 후에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명규(命奎)의 손자이시다.
황덕규(黃德圭)(大相公派 世譜17世 上卷129쪽) 1658년(효종 9) ~ 1738년(영조 14). 자 사윤(士潤). 호 경독당(耕讀堂). 통덕랑(通德郞) 창달(昌達)의 아들. 그는 학식과 바른 행실이 있었다.
황신규(黃信圭)(大相公派 世譜17世 上卷123쪽) 1659년(효종 10) ~ 1739년(영조 15). 자 군신(君信). 단구(丹邱) 창술(昌述)의 아들.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황서규(黃瑞圭)(大相公派 世譜17世 上卷127쪽) 1660년(현종 1) ~ 1736년(영조 12). 자 문백(文伯). 호 사지당(四止堂). 창적(昌迪)의 아들. 유고가 있다.
황명일(黃命一)(大相公派 世譜18世 上卷76쪽 220쪽) 1661년(현종 2) ~ 1747년(영조 23). 자 현경(玄卿). 통덕랑(通德郞) 최(璀)의 아들.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받았다.
황도익(黃道翊) 1662년(현종 3) ~ 1749년(영조 25). 자 군익(君翊). 가선대부(嘉義大夫) 동추(同樞)를 받았다. 그는 당(堂)에 편액하기를 “영회(詠檜)”라 하였는데, 이는 그 근본을 잊지 않겠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월탄(月灘) 김창석(金昌錫) 등과 교유하였다.
황복규(黃復圭) (大相公派 世譜16世 上卷120쪽) 1663년(현종 4) ~ 1725년(영조 1). 자(字) 여삼(汝三). 호 활옹(豁翁). 창우(昌遇)의 아들.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그는 성품이 분명하고 구차스럽지 않았다. 그는 북벽(北壁) 김홍제(金弘濟)와 학문적으로 교유하였다. 저서에 ?일성록(日省錄).의례질문(疑禮質問) 등이 있다. 양진와(養眞窩) 장세상(張世相)이 장갈(狀碣)을 찬하였다. 흘(忔)의 증손자이다.
황도대(黃道大) (大相公派 世譜17世 上卷15쪽) 1663년(현종 4) ~ 1728년(영조 4). 자 덕재(德載). 호 일옹재(一翁齋). 송파거사(松坡居士) 해익(海翊)의 아들. 그는 효행이 탁월하여, 이로 인해 여러 번 향천(鄕薦)에 오르기도 하였다. 사우(士祐)6대손 이다.
황해(黃瑎) (大相公派 世譜17世 上卷102쪽) 1663년(현종 4) ~ 1687년(숙종 13). 자 군실(君實). 입준(立準)의아들. 가선대부(嘉善大夫) 호군(護軍)을 받았다. 종사랑공(從仕郞公) 명규(命奎)고손 이다
황명원(黃命元))(大相公派 世譜18世 上卷121쪽) 1664년(현종 5) ~ 1710년(숙종 36). 자 선장(善長). 서강(叙綱)의 아들. 그는 효행이 있었다.
황명삼(黃命三) (大相公派 世譜18世 上卷205쪽) 1665년(현종 6) ~ 1713년(숙종 39). 자 석여(錫汝). 호 삼원당(三願堂). 빈(玭)의 아들. 식년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그는 입격 당시 충주에 거주하였다.
황위(黃蔿) (大相公派 世譜16世 上卷119쪽) 1665년(현종 6) ~ 미상. 자 자영(子瑛). 주부(主簿) 대일(大一)의 아들. 그는 효행이 있었다.
황대규(黃大圭) (大相公派 世譜18世 上卷120쪽) 1669년(현종 10)~ 1721년(경종 1). 자 헌숙(獻叔). 생원(生員) 창도(昌道)의 아들. 생부는 창적(昌迪).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흘(忔)의 증손자이다
황의(黃?) 1671년(현종 12) ~ 1754년(영조 30). 자 의옥(義玉). 통덕랑(通德郞) 입기(立紀)의 아들. 생부는 입구(立絿). 통정대부(通政大夫)를 받다.
황도형(黃道亨) (大相公派 世譜 17世上卷110쪽) 1672년(현종 13) ~ 1749년(영조 25). 자 형숙(亨叔). 입정(立正)의 아들.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추(同樞) 및 행 부호군(行副護軍)을 지냈다. 후손 준흠(俊欽)이 주관하여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비명은 이강옥(李康玉)이 찬하고, 글씨는 김규형(金奎炯)이 썼다. 사필(士弼)의 6대손 이다.
황후(黃 ) (大相公派 世譜17世 上卷112쪽) 1681년(숙종 7) ~ 1749년(영조 25). 자 회중(晦仲). 호 일성재(日省齋). 도익(道翊)의 아들. 이무(以茂)의 증손 한필(漢弼)자손 고산(孤山) 이유장(李惟樟)의 문인이다. 그는 천품이 영수(穎秀)하고, 또 그의 외숙조(外叔祖)인 이유장(李惟樟)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학문의 본령인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얻었다. 그는 효제(孝悌)를 독실하게 실천한 바탕 위에서 경전을 심도 있게 연구하고 예서(禮書)를 섭렵하였다. 그는 용강(龍岡) 황수일(黃守一)과 더불어 편지로 예학(禮學)을 토론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자신의 행실을 잘 다스렸으며, 집안을 다스리는 방도에 법도가 있었다. 그는 늘 혼정신성(昏定晨省)을 할 때에 관대(冠帶)를 잘 갖추었으며, 이때 노복(奴僕)으로 하여금 자신의 일을 대신하게 하지 않았다. 계모에게도 친어머니와 같이 그 효성을 다하였다. 그는 부친인 도익에게 간(諫)하는 말을 잘하여, 도익이 “우리 아이는 기간자(幾諫子 : 은미하게 부모에게 간언을 올리는 아들)라고 할 만하다.”고 하였다. 북벽(北壁) 김홍제(金弘濟)가 뇌문을 지었다. 황재화(黃載華) (大相公派 世譜 上卷132쪽 17世) 1681년(숙종 7) ~ 1748년(영조 24). 자 악여(岳汝). 창원(昌遠)의손자 통덕랑(通德郞) 명규(命圭)의 아들. 그는 일찍이 과거를 그만두고 문예(文藝)에 뜻을 독실하게 가졌다.
황근규(黃謹圭) (大相公派 世譜17世 上卷92쪽 359족 123쪽) 1685년(숙종 11) ~ 1751년(영조 27). 자 경백(敬伯). 단구(丹邱) 창술(昌述)의 아들.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황윤규(黃潤圭) (大相公派 世譜17世 上卷121쪽) 1686년(숙종 12) ~ 1762년(영조 38). 자 백삼(伯三).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 창근(昌近)의 아들. 사마시에 입격하였다고 하였다.
황게(黃게) (大相公派 世譜19세 上卷76쪽 220쪽) 1687년(숙종 13) ~ 1737년(영조 13). 자 백고(伯固). 동지(同知) 명일(命一)의 아들.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황숙(黃塾)(大相公派 世譜19世 上卷198쪽204쪽 ) 생몰년 미상. 식암(息庵) 섬(暹)의 세손.입진(立震)5자의아들 그는 효성과 우애가 있었으며, 어려운 일에 처한 이를 잘 도와주었다. 그는 무신란(戊申亂)에 대응하기 위해 풍기에 의병진이 설치되자, 일기 유사(日記有司)에 차출되었다.
황재해(黃載海)(大相公派 世譜18世 上卷126쪽354쪽 ) 1687년(숙종 13) ~ 1756년(영조 32). 자 달원(達源). 호 단계(丹溪). 통덕랑(通德郞) 신규(信圭)의 아들. 소수서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그의 문학과 행실, 기국(器局)을 세상 사람들이 추중하였다. 유고가 있다.
황상규(黃相圭) (大相公派 世譜17世 上卷92쪽360쪽 ) 1691년(숙종 17) ~ 미상. 자 경여(敬如). 단구(丹邱) 창술(昌述)의 아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받았다.
황경(黃?) 1693년(숙종 19) ~ 1785년(정조 9). 자 경중(敬仲). 동추(同樞) 도익(道翊)의 아들.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소수서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황서(黃抒) (大相公派 世譜19세 上卷 76쪽221쪽 ) 1694년(숙종 20) ~ 1749년(영조 25). 자 후중(休仲). 동지(同知) 명일(命一)의 아들. 그는 성품이 인자하여, 이미 아이였을 때부터 가난한 이들을 구제할 뜻을 품었다고 하였다. 후에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황재숭(黃載嵩) (大相公派 世譜17세 上卷 335쪽 ) 1695년(숙종 21) ~ 1708년(숙종 34). 대규(大圭)의 아들. 그는 어린 나이에 이미 문장을 이루어서 그 문장이 세상에 유행하였다고 하였으나, 불행히 14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황재(黃榟) (大相公派 世譜 上卷 116쪽 19세) 1696년(숙종 22) ~ 1748년(영조 24). 자 임중(任仲). 동추(同樞) 도익(道翊)의 아들. 그는 통덕랑(通德郞)을 지내고, 소수서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무신란(戊申亂)에 대항하기 위하여 순흥에 의병진이 결성되자, 권동혁(權東奕) 등과 더불어 소모장(召募將)으로 임명되다.
황일녕(黃一寧)(大相公派 世譜19세 上卷 186쪽 ) 자는 성징(聖.徵)生庚申 西紀1680年 卒辛丑 壽72世 식암(息庵) 섬(暹)의 5세손. 그는 무신란(戊申亂)에 대응하기 위해 풍기에 설치된 의병진에 참여하여, 도청(都廳)을 맡았다.
황입덕(黃立德) (大相公派 世譜16세 上卷 48쪽102쪽 ) 1698년(숙종 24) ~ 1766년(영조 42). 자 종득(宗得). 증 사복시 정(贈司僕寺正) 유익(有益)의 아들.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황이대(黃履大)(大相公派 世譜20세 上卷 210쪽 ) 1698년(숙종 24) ~ 1765년(영조 41). 자 수백(?伯). 호 청광자(淸狂子). 저(저)의 아들. 생부는 식(埴). 농은(農隱) 이의만(李宜晩)의 문인이다. 사마시에 입격하였다고 하며, 무신란(戊申亂)에 대항하기 위한 의병진이 풍기에 결성되었을 때에 서기(書記)를 맡았다. 유고가 있다.
황담(黃담) (大相公派 世譜19世 上卷 76쪽227쪽) 1699년(숙종 25) ~ 1727년(영조 3). 자 사관(士寬) 혹은 중관(仲寬). 동지(同知) 명일(命一)의 4째아들. 그는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황옥진(黃玉振) (大相公派 世譜18世 上卷 163쪽) 생몰년 미상. 용헌(慵軒) 사우(士祐)의 6세손.대상공파 상권 30쪽도대(道大)의 子 그는 무신란(戊申亂)을 진압하기 위하여 풍기에 의병진이 결성되었을 때에, 이에 참여하여 정지행(丁志行) 등과 함께 영장(領將)을 맡았다.
황옥성(黃玉成)(大相公派 世譜18世 上卷 166쪽) 생몰년 미상. 용헌(慵軒) 사우(士祐)의 6세손. 옥진(玉振)의 동생. 그는 무신란(戊申亂)을 진압하기 위하여 풍기에 의병진이 결성되었을 때에, 이에 참여하여 서기(書記)를 맡았다.
황응륜(黃應綸) (大相公派 世譜19世 上卷 10쪽) 1699년(숙종 25) ~ 1780년(정조 4). 자(字) 방언(邦彦). 호 백인재(百忍齋). 경(褧)의 아들. 생부는 상(裳). 당시에 그는 예(禮)를 좋아하고 바탕이 겉모습을 능가하였으며, 기질이 강건하고 말이 질박하였다. 그는 몸가짐과 행실을 삼가기를 나이가 들수록 더욱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정평이 났었다. 그는 특히 예서(禮書)에 침잠하여 쉼 없이 이를 연구하였으므로, 예(禮)의 상변(常變)에 대한 절문(節文)에 통달하였다. 또한 예에 관한 선유(先儒)들의 문답을 정리하여 책으로 만들어서 항상 책상에 두고 보았으며, 의문 나는 점을 질문하는 사람이 있으면 상세히 답해 주어 의심이 남지 않도록 하였다. 그의 행적과 인품은 그의 족손(族孫)인 황용한(黃龍漢)이 찬한 행록(行錄)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황명곤(黃命坤) 1700년(숙종 26) ~ 1746년(영조 22). 자 지언(智彦). 의(?)의 아들. 승사랑(承仕郞)을 지냈다. 황응서(黃應緖)(大相公派 世譜19세 上卷 139쪽 ) ㅡ1702년卒.자는 술부(述夫) 봉예공(奉禮公) 용헌(慵軒) 사우(士祐)의 후손. 그는 무신란(戊申亂)에 대응하기 위해 풍기에 의병진이 결성되자, 이에 참여하여 사병(司兵)을 맡았다.
황헌규(黃獻圭)(大相公派 世譜17세 上卷 129쪽 ) 1700년(숙종 26) ~ 1775년(영조 51). 자 헌중(獻中). 단구(丹邱) 창술(昌述)의 아들. 자헌대부(資憲大夫) 동추(同樞)를 받았다. 그는 성품이 공경스럽고 검약하였으며, 또한 과묵하였다. 그는 몸가짐을 삼가고 행실을 닦으니, 향당(鄕黨)에서 그의 행실이 칭송되었다고 하였다. 황이형(黃履亨) (大相公派 世譜19세 上卷 120쪽 ) 1703년(숙종 29) ~ 1769년(영조 45). 자 형중(亨仲). 여담(汝曇)의 아들. 그는 효성과 인자한 성품이 뛰어났다고 하였다. 12世사언(士彦)자손이시다.
황재동(黃載東) (大相公派 世譜18세 上卷 120쪽 ) 1703년(숙종 29) ~ 미상. 자 주경(周卿). 대규(大圭)의 아들. 생부는 할옹(豁翁) 복규(復圭). 그는 통덕랑(通德郞)을 지냈으며, 창원 황씨 병자보(丙子譜) 간행을 주간하였다.
황응위(黃應緯) (大相公派 世譜19세 上卷 9쪽 ) 1704년(숙종 30) ~ 1783년(정조 7). 자 사장(士章). 상(裳)의 아들.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황시회(黃時晦) (大相公派 世譜19世 上卷372쪽 ) 1705년(숙종 31) ~ 1790년(정조 14). 자 자양(子養). 재화(載華)의 아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받았다. 창원(昌遠)증손자이다.
황득재(黃得載) (大相公派 世譜19세 上卷 304쪽 ) 1708년(숙종 34) ~ 1743년(영조 19). 자 중약(重若). 생원(生員) 우천(遇千)의 아들.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황석규(黃錫圭) (大相公派 世譜17세 上卷 123쪽 ) 1710년(숙종 36) ~ 1759년(영조 35). 자 군평(君平). 右단구(丹邱) 창술(昌述)의 아들. 선무랑(宣務郞)을 지냈다.
황익대(黃益大)(大相公派 世譜 20世 上卷 68쪽 ) 1710년(숙종 36) ~ 미상. 자 겸중(謙仲). 통덕랑(通德郞) 숙(塾)의 아들. 그는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입격 당시 그는 횡성(橫城)에 거주하였다.
황집대(黃集大) (大相公派 世譜20世 上卷 72쪽 ) 1712년(숙종 38) ~ 1756년(영조 35). 자 성보(成甫). 배(培)의 아들. 그는 어려서 문예(文藝)를 전공하였으나, 중년에 풍비(風痺)에 걸려 학업을 완성하지 못하게 됨을 늘 한스러워하였다. 대신 자질(子姪)들의 학업을 부지런히 독려하고 권면하였다. 정와(貞窩) 황용한(黃龍漢)이 찬한 묘지에 그의 행적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황인채(黃鱗采) (大相公派 世譜20世 上卷 2쪽 ) 1716년(숙종 42) ~ 1799년(정조 23). 자(字) 국량(國亮) 혹은 계칙(季則). 호 양몽재(養蒙齋). 증 이조 참판(贈吏曹參判) 경(㯳)의 아들.한필(漢弼)의 후손.그는 32세에 식년 진사시와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39세 때에 증광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그는 주부(主簿), 제주 판관(濟州判官) 등을 지내고, 노인직(老人職)으로 가의대부(嘉義大夫)를 받았다. 그의 관직 생활은 몹시 순탄치 못하였다. 1781년(정조 5)에 제주 판관에서 벗어나 경직(京職)을 받게 되었으나, 재직하던 중에 고을 사람 강성(姜城)을 제주 목사와 더불어 장살(杖殺)하였다는 죄목을 얻어 유배형에 처해지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는 향촌에서 성망(聲望)을 얻었다. 그가 생을 마치자 반암(半巖) 전구(全球)는 “다섯 아들에게서는 그가 인(仁)을 실천했음을 보겠고, 구순(九旬)의 나이는 덕(德)이 바탕이 되었음을 징험하겠네.[五子看仁種, 九旬驗德基]”라 하였고, 소암(素巖) 김진동(金鎭東)은
소년에 명성이 영남을 흔들더니 少年聲譽動南堧
대과, 소과 합격은 수염 뽑듯 손쉬웠네. 蓮桂巍科摘然
중년의 공명은 판관에 그치고 말았으나 中世功名止半刺
모년의 은전은 조상에게도 미쳤네. 暮年恩數及重泉
라고 하였다. 그는 1761년(영조 37)에 소수서원 원장으로 있었고, 특히 ?명륜당중수시상량문(明倫堂重修時上梁文)을 짓기도 하였다. 유집으로 양몽재집(養蒙齋集)이 있다.
황재식(黃載湜) (大相公派 世譜 上卷 121쪽18世) 1716년(숙종 42) ~ 1775년(영조 51). 자 정숙(淨叔). 윤규(潤圭)의 아들. 통훈대부(通訓大夫) 상호군(上護軍)을 지냈다.이일(以一)의 증손이다
황윤한(黃潤漢) (大相公派 世譜 上卷 208쪽 69쪽21世) 1717년(숙종 43) ~ 1764년(영조 40). 자 덕장(德章). 호 수연당(壽延堂). 최대(最大)의 아들. 생부는 정대(鼎大). 그는 송간(松澗) 황응규(黃應奎)의 원고(原稿)를 수집하여 문집 간행에 일조하였다. 정와(貞窩) 황용한(黃龍漢)의 ?수연당족형윤한만(壽延堂族兄潤漢輓)?에 그의 인품과 행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황련(黃璉) (大相公派 世譜 上卷 102쪽17世) 1719년(숙종 45) ~ 1784년(정조 8). 자 공보(公寶). 증 좌승지(贈左承旨) 입덕(立德)의 아들.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었다.
황직대(黃直大) (大相公派 世譜20世 上卷 73쪽) 1720년(숙종 46) ~ 1743년(영조 19). 자(字) 숙방(叔方). 배(培)의 아들. 정와(貞窩) 용한(龍漢)의 부친. 그는 어려서부터 영오하였으며, 미목(眉目)이 수려하고 키가 크고 몸이 약하였다. 성품은 강직하였으나 남을 잘 포용하였고, 청렴하고 고결하였으나 남들과 대립각을 세우지 않았다. 그는 6, 7세 때부터 이미 스스로 부모에게 효성을 다할 줄을 알고서, 부모의 뜻을 어기지 않고 공경하였다. 또한 웃어른을 모심에 예양(禮讓)이 있었다. 성품은 인후하여 다른 사람의 허물을 가려 주기를 잘하였다. 10여 세부터 부친의 명으로 먼 곳으로 나아가 학업에 종사하게 되었는데, 혹 산사(山寺)에서 절밥을 먹기도 하고 혹 객처(客處)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문예(文藝)가 날마다 심화되었으나, 이 때문에 혈허병(血虛病)을 얻게 되었다. 18세에 호서(湖西) 집안과 혼인하였는데, 호서는 서울과 가까워 많은 사우(士友)들이 공부하기에 편리하였으므로, 그도 사우들의 촉망을 받으면서 풍기와 호서를 오가며 공부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로 인해 기혈(氣血)을 더욱 손상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어머니가 병환으로 위독해지자, 그는 곁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그도 얼마 후 쉬고 있던 우사(寓舍)에서 병에 걸리어 어머니 장례를 치른 후에 곧 생을 마쳤다. 약간의 유문(遺文)이 있는데, 과체(科體) 가운데 부(賦)와 표(表) 등은 흠잡을 데가 없었고, 간찰(簡札) 등의 일상적인 글도 이순정도(理順情到)했다고 하였다. 아들 황용한(黃龍漢)이 그 부형(父兄)들로부터 들은 바를 정리하여, 행록(行錄)을 찬하였다.
황시복(黃時復) (大相公派 世譜 上卷126쪽354쪽19世) 1721년(경종 1) ~ 1794년(정조 18). 자 내초(來初). 단계(丹溪) 재해(載海)의 아들.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황재길(黃載吉) (大相公派 世譜18世 上卷359쪽92쪽) 1721년(경종 1) ~ 1762년(영조 38). 자 형여(亨汝). 통덕랑(通德郞) 근규(謹圭)의 아들. 장사랑(將仕郞)을 지냈다.
황재옥(黃載玉) 大相公派 世譜18世 上卷122쪽347쪽) 1723년(경종 3) ~ 1794년(정조 18). 자 문중(文仲). 생원(生員) 윤규(潤圭)의 3子. 그는 위선(爲先)의 정성이 독실하여, 문중 위토(位土)를 잘 구획하여 마련했다고 하였다.
황제대(黃濟大) (大相公派 世譜20世 上卷 78쪽 ) 1724년(경종 4) ~ 1770년(영조 46). 자 여달(汝達). 증 사복시 정(贈司僕寺正) 서()의 아들. 그는 시 읊기를 사랑하여, 전인(前人)의 시에 차운한 작품이 무려 수천 편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특히 그의 만년 절필로 한중잡영(閑中雜詠)이 있는데, 그의 종현손(從玄孫)인 대계(大溪) 황재영(黃在英)이 서종고조시고후(書從高祖詩稿後)?를 지어 이르기를, 그의 시가 자연핍진(自然逼眞)하여 전송(傳誦)할 만하다고 하였다. 유길(有吉)의 자손이다.
황재홍(黃載弘) (大相公派 世譜18世 上卷 129쪽 361쪽) 1727년(영조 3) ~ 1810년(순조 10). 자 인경(仁卿). 동추(同樞) 헌규(獻圭)의 아들.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황호대(黃浩大) (大相公派 世譜20世 上卷 78쪽 ) 1727년(영조 3) ~ 1788년(정조 12). 자 양숙(養叔). 증 사복시 정(贈司僕寺正) 서(서)의 아들. 그는 헌(軒)에 ‘경착(耕鑿)’이라는 편액을 달았는데, 이는 격양가(擊壤歌)에 나오는 “착정이음(鑿井而飮)”, “경전이식(耕田而食)”의 약어이다. 후에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다.
황정채(黃禎采) (大相公派 世譜20世 上卷 111쪽과304쪽 ) 1729년(영조 5) ~ 1749년(영조 25). 자(字) 군상(君祥). 증 사복시 정(贈司僕寺正) 득재(得載)의 아들. 통훈대부(通訓大夫)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다. 參議公派 사영(士英)자손이다 황지관(黃志寬) (大相公派 世譜20世 上卷 318쪽 ) 1729년(영조 5) ~ 1818년(순조 18). 자 운경(雲卿). 이형(履亨)의 아들. 첨추(僉樞)를 지냈다. 황찬효(黃纘孝) (大相公派 世譜21世 上卷 2쪽 ) 1729년(영조 5) ~ 1755년(영조 31). 자 인겸(仁兼). 양몽재(養蒙齋) 인채(鱗采)의 아들.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황균(黃均)`(大相公派 世譜21世 上卷 84쪽 ) 1732년(영조 8) ~ 1812년(순조 12). 증 참의(贈參議) 명수(命受)의 아들. 좌윤(左尹)에 추증되었다. 입양(立陽)의 증손이다.
황귀대(黃貴大) (大相公派 世譜21世 上卷 84쪽 ) 1735년(영조 11) ~ 1838년(헌종 4). 증 좌윤(贈左尹) 균(均)의 아들.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중추(同中樞)를 지냈다. 입양(立陽)의고손이다. 황덕한(黃德漢) (大相公派 世譜21世 上卷 97쪽 ) 1738년(영조 14) ~ 1801년(순조 1). 초명 창한(昌漢). 자 내윤(乃潤). 석대(錫大)의 아들. 생부는 진대(鎭大). 그는 효행을 실천하여, 그 사실이 조정에 계문(啓聞)되기도 하였다. 이헌순(李獻淳)이 행장을 찬하였다.
황굉한(黃宏漢) (大相公派 世譜21世 上卷 54쪽 ) 1738년(영조 14) ~ 1786년(정조 10). 자 인경(仁卿). 복대(復大)의 아들. 생부는 필대(必大). 통훈대부(通訓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받았다. 대사현 섬(暹)의 자손이다.
황사원(黃泗源) (大相公派 世譜20世 上卷 10쪽) 1739년(영조 15) ~ 1811년(순조 11). 자(字) 덕연(德淵). 호 백옥처사(白屋處士). 응기(應紀)의 아들. 그는 8세에 아버지를 잃고 조부에게서 수학하였다. 이때 그는 자신이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가르침을 잃었다는 사실에 더욱 유념하여, 스스로 발분(發憤)하여 독서에 열중하였다. 그는 경전(經傳)을 연구하고 문예에 정진하였으나, 이를 통해 출세를 꾀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터는 과거를 완전히 단념하였다. 그는 이때부터 문을 닫아걸고 집안을 정리하면서, 외모(外慕 : 부귀영달을 꾀하는 마음)를 완전히 끊고 오직 문사(文史)로써 자오(自娛)하였다. 또한 촌의 수재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면서 고을의 서숙(書塾)에서 활동하였으며, 오랜 만에 만난 친구들과 산림천석(山林泉石)에서 소요(逍遙)하였다. 만년에는 걸음걸이가 어려울 정도로 다리에 병을 앓았으므로, 출입을 줄이고 꾸준히 조섭하였다. 그는 특히 형과의 우애가 유별나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사마온공(司馬溫公)과 그 형인 백강(伯康)이 나누었던 것과 같은 우애를 유지하였다. 그는 밤에는 반드시 중용장구(中庸章句)와 대학장구(大學章句)를 송독하였고, 만년에는 책상머리에 항상 주자(朱子)퇴계(退溪)의 시를 두고 탐독하였다. 또한 무이지(武夷志)를 본떠 도산(陶山)의 산천과 퇴계 선생의 행적을 별도로 정리하였다. 한 수령이 그를 향교(鄕校)에서 우연히 보고 관직에 천거하였고, 관찰사가 다시 조정에 보고하여, 여러 차례 천목(薦目)에 오르게 되었으나, 끝내 관직을 제수 받지는 못하였다. 그는 독서를 함에 억지로 천착하지 않았고, 일을 함에 교묘함을 구하지 않았으며, 문장을 지음에 질박함을 위주로 하여 조탁하지 않았다. 그의 호는, 그가 일찍이 정와(貞窩) 황용한(黃龍漢)에게 준 시에 “백옥(白屋)” 2글자가 있었는데, 황용한이 여기에 세한(歲寒)의 감회가 있음을 알아차리고 이로 인하여 그를 백옥이라고 부른 데서 말미암았다고 한다. 유집이 있는데, 이는 그의 손자인 황계하(黃繼夏)가 서소(書巢) 김종휴(金宗烋)에게 부탁하여 교감을 받은 것이다. 김종휴가 ?백옥처사전(白屋處士傳)?을 찬하였다.
황최원(黃最源) (大相公派 世譜20世 上卷 10쪽20世) 1739년(영조 15) ~ 1819년(순조 19). 자(字)낙선(樂善). 호 죽헌(竹軒). 백인재(百忍齋) 응륜(應綸)의 아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과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의 문인이다. 그는 천품이 완수(完粹)하고 체격이 풍위(豊偉)하였다. 그는 대산 문하에 나아가 처음으로 증강(曾江)의 사감(史鑑)을 배우고, 이미 그 큰 줄기를 이해한 후에는 차례대로 사서(四書)를 공부하였는데, 이 때 그의 나이는 불과 11세였다고 한다. 이렇게 공부하는 사이에 다시 이광정에게 나아가 배우기도 하였다. 그는 이후 30여 년 동안에 사문(師門)에 머물면서 의심나는 부분을 질의하고 스승으로부터 학문적 은혜를 입었다. 특히 그는 기억력이 매우 좋았는데, 여러 고서들을 섭렵함으로써 역대 전고(典故)와 문물(文物)의 대부분을 암기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어버이 명으로 과거 공부를 하여, 사람들이 조만간 합격할 것이라고 내다보기도 하고, 또 향시(鄕試)에 여러 차례 입격하였으나, 그는 이해득실에 연연하지 않는 담박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 때문에 끝내 불리(不利)하였다. 1784년(정조 8)에는 난은(懶隱) 이동표(李東標)에게 시호(諡號)를 내려주기를 요청한 연명 상소에 참가하였다. 그는 만년에 다리를 다쳤는데, 그것이 점점 풍비(風痺)를 이루어 거의 10년 동안 침상에서 전전하기도 하였다. 그는 부모를 봉양하는 일에도 정성을 다하였다. 그는 특히 자식이 빈천하고 부모가 질병을 앓아서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고서도, 부모를 잘 섬겼던 사례를 채집하여, 벽에 써서 자질(子姪)들에게 보여 주었다고 하였다. 그는 이밖에 가승(家乘)을 정리하고 병산(甁山)에 별사(別祠)를 건립하는 등 위선 사업에도 심력을 다하였다. 그는 백옥처사(白屋處士) 황사원(黃泗源), 정와(貞窩) 황용한(黃龍漢)과 일문지기(一門知己)가 되어 함께 학술을 토론하고 산수를 유람하였다. 그의 문장은 뜻이 명백하고 정밀하였으며, 글자도 험벽(險僻)하지 않았다. 유집이 있다. 서소(書巢) 김종휴(金宗烋)가 행장을 찬하였다. 황준효(黃濬孝) (大相公派 世譜21世 上卷 2쪽) 1740년(영조 16) ~ 1794년(정조 18). 자 충겸(忠謙). 양몽재(養蒙齋) 인채(鱗采)의 아들.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황명원(黃命源) (大相公派 世譜20世 上卷 9쪽) 1741년(영조 17) ~ 1787년(정조 11). 자 지성(之聖). 증 사복시 정(贈司僕寺正) 응위(應緯)의 아들.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다.
황명억(黃命億) (大相公派 世譜18世 上卷 102쪽) 1743년(영조 19) ~ 1825년(순조 25). 자 국보(國賓). 증 호조 참의(贈戶曹參議) 련(璉)의 아들. 첨추(僉樞)를 받았다.명규(命奎)의 자손이다.
황용한(黃龍漢) (大相公派 世譜21世 上卷 73쪽 ) 1744년(영조 20) ~ 1818년(순조 18). 초명 귀한(龜漢). 자(字) 추견(椎見). 호 두곡생(斗谷生)?정와(貞窩). 직대(直大)의 아들. 식암(息庵) 섬(暹)의 후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이다. 그는 처음 충청도 연풍(延?) 외가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 직대가 1743년(영조 19)에 이미 졸한 상황에서 다시 풍기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애초에 공부를 할 때 스승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하였으나, 자질이 강명(剛明)하여 재주가 일찍부터 이루어졌다. 어린 나이로 조부의 상을 당하였을 때, 다른 어른들을 따라 반드시 참례(參禮)하였으며, 어른들이 출타하게 되면 마치 성인처럼 스스로 집례(執禮)하였다. 11세 때 영주의 수령이 선비들을 시험하였는데, 그는 여기서 당당히 입격하였다. 이에 수령이 그의 나이가 어린 것을 가볍게 보고 혹 남의 손을 빌려 답안을 작성한 것이 아닌지 의심하였다. 이에 그가 정색을 하고 자리를 박차고 떠나려 하자, 수령이 그에게 간곡히 사죄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약관 이전에 호방한 기상이 충만하여, 이른바 연조(燕趙)의 기풍이 있었으나, 약관 이후에는 착실히 공부하여 경전(經傳) 연구에 침잠하고 제자(諸子)의 책을 섭렵하였다. 아울러, 그는 주역(周易)에서부터 중국 역대의 명문장, 동국 명문장가의 글을 손수 베껴 책으로 만들어서 밤에 암송하였다. 그는 또한 송사(宋史) 읽기를 매우 좋아하였는데, 이 책에서 군신 사이의 정책 논의, 국가 흥망(興亡)?치란(治亂)의 근본 이유, 현사대부(賢士大夫)들의 진퇴출처(進退出處)의 자취 등을 차기(箚記)하고 아울러 사평(史評)을 부기하였다. 이 가운데 특히 장준(張浚)에 대해서는 “천하의 막중한 책무를 맡고자 했던 옛 군자들은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다. 마음이 바르면 기(氣)가 평(平)해진다. 기(氣)가 평하면 보고 듣는 것이 공정하게 된다. 이렇게 천하를 공정하게 다스리고 천하의 힘을 합하면 어떤 일이든지 모두 이루게 된다.”라고 하여, 자신의 정치론을 표출하였다. 당시 이상정(李象靖)이 영남에서 도학(道學)을 강명(講明)하여 유풍(儒風)을 크게 진작시켰는데, 그는 깊은 골짜기에 살고 있어 그의 존재를 처음에는 잘 몰랐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상정이 그의 문장을 보고 크게 감탄한 것을 계기로 당시의 많은 선비들이 그에게 청교(請交)하였으며, 그도 대산을 한두 번 찾아뵙게 되었다. 이때 대산은 그에게 논어(論語)를 읽기를 권하였고, 또 태극도설(太極圖說)의 경재잠(敬齋箴)을 강론하였다. 아울러 대산이 ‘경자요훈(敬字要訓)’을 내려주자, 그는 이를 평생토록 가슴에 새겼다. 그의 문장은 매우 섬민정화(贍敏精華)하여 여러 차례 향시(鄕試)에도 입격하였으나, 1776년(영조 52)에 영조가 승하한 때부터는 과거를 단념하고 사서(四書) 및 주자?퇴계 글의 연구에만 열중하였다. 또한 토엄(土?) 몇 칸을 지어 꽃과 대나무를 심고 도서(圖書)를 비치하여 이 안에 편안히 깃들었다. 그는 여기서 문인(文人) 및 시인(詩人)들과 더불어 경전과 사서(史書)를 상확하고 운자(韻字)를 나누어 시를 지었다. 의문 나는 점을 물으러 오는 자들이 있으면, 그는 반드시 선현들의 정론(定論)을 들어 반복하여 이해시켰다. 또한 그 스스로 이해되지 않는 바가 있으면, 반드시 그 글을 책상에 항상 놔두고 고검(考檢)하여 기필코 이해한 연후에야 그만두었다. 그는 늘 ?출사표(出師表)?와 ?육가(六歌)?를 소리 높여 낭랑하게 읊었는데, 음운이 처절(凄切)한 곳에 이르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또한 동국 선유(先儒)들의 행장과 묘갈을 읽기를 좋아하였는데, 땅과 시세(時勢)가 절로 가까운 동국의 이야기를 접하며 자연히 감발흥기(感發興起)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문장은 전칙간엄(典則簡嚴)하였으며, 그의 필법(筆法)은 주경(?勁)하였다. 그가 작성한 일상의 간찰 따위도 사람들이 매우 귀중하게 다뤘다고 하였다. 그는 일찍이 말하기를 “옛날의 향당(鄕黨)은 사람들을 가르쳤으나, 지금의 향당은 사람들을 속박한다.”라고 하면서, 사우(祠宇)의 향례(享禮)에 일체 참여하지 않았으나, 일향(一鄕) 단위의 향음대례(鄕飮大禮)를 앞두고 그에게 의견을 구하러 온 고을 사람들에게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는 “온온공인(溫溫恭人), 유덕지기(惟德之基)” 8자를 손수 써서 벽에 걸고 항상 자성(自省)하였다. 또 ‘자술편(自述篇)’을 지어 평소 그가 가진 뜻을 나타내었는데, 대개 그의 학문은 맹자(孟子)의 지(志)와 계로(季路)의 용(勇)과 안연(顔淵)의 인(仁)을 거슬러 구하고, 궁극적으로는 공자(孔子)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에 중점이 두어졌다. 그는 일찍이 역학계몽(易學啓蒙)을 읽고, 선후천설(先後天說)에 대하여 동암(東巖) 류장원(柳長源)에게 질의하였다. 또한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는 그와 일면식도 없었으나, 그가 편지를 보내니, 신교(神校)를 허여하였다. 구은(衢隱) 이헌순(李獻淳)은 예안에 우거한 이후부터 그와 함께 학술을 논의하였다. 또한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은 일찍이 말하기를 “근세에 정와(貞窩) 황모(黃某)와 같이 학문이 정밀하고 견식이 분명한 이가 없다. 늘 찾아가 보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던 것이 지금도 한스럽다.”라고 하기도 하였다. 그는 정탁(鄭琢)의 약포집(藥圃集)이나 김약련(金若鍊)의 두암집(斗庵集)을 교감(校勘)하는 등 지역의 서적간행 사업에 활발히 참여하였다. 문집에 정와집(貞窩集)이 있다. 대계(大溪) 황재영(黃在英)이 행장을 찬하였다.
황용대(黃鎔大) 1745년(영조 21) ~ 1837년(헌종 3). 자 도현(道賢). 벽(璧)의 아들.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동지중추(行同知中樞) 상호군(上護軍)을 받았다. 황명신(黃命信) (大相公派 世譜18世 上卷 102쪽 ) 1746년(영조 22) ~ 1828년(순조 28). 자 이성(而誠). 증 호조 참의(贈戶曹參議) 련(璉)의 아들. 동중추(同中樞)를 받았다. 명규(命奎)의 자존이다.
황시열(黃時說) (大相公派 世譜19世 上卷 137쪽) 1755년(영조 31) ~ 1836년(헌종 2). 자 여습(汝習). 재천(載天)의 아들. 그는 소수서원 원장을 역임하였으며, 조상을 받듦에 지극한 정성을 다하니, 세상 사람들이 ‘군자(君子)’라 칭하였다고 하였다.
황시학(黃時學) (大相公派 世譜19世 上卷 121쪽) 1755년(영조 31) ~ 1801년(순조 1). 자 진경(晉卿). 상호군(上護軍) 재식(載湜)의 아들.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이일以一)의 고손이다.
황지헌(黃志憲) (大相公派 世譜20世 上卷126쪽354쪽) 1755년(영조 31) ~ 1833년(순조 33). 자 도숙(度叔). 증 사복시 정(贈司僕寺正) 시복(時復)의 아들. 그는 소수서원 원장을 역임하고, 후에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그가 생을 마치니, 일포(逸圃) 박시원(朴時源)은 만시를 지어 이르기를,
유인(幽人)이 되돌아보아 행실에 허물없어 길하였으니 幽人貞吉履其旋
나는 이 단구(丹丘) 은사(隱士)의 어짊 알아봤다네. 我識丹丘隱士賢
염약(斂約) 지켜 고을에 처했으니, 진정한 처사(處士)였고, 斂約居鄕眞處子
여유롭게 노닐며 한가하였으니, 작은 신선이었도다. 優游無事小神仙 라고 하였다.
황기한(黃耆漢) (大相公派 世譜21世 上卷78쪽 ) 1758년(영조 34) ~ 1811년(순조 11). 자 기로(耆老). 증 이조 참의(贈吏曹參議) 호대(浩大)의 아들. 삼종형(三從兄)인 정와(貞窩) 황용한(黃龍漢)의 문인이다. 그는 천성이 자량(慈諒)하고, 행실이 단장(端莊)하였다. 그는 어린 나이에 문사(文詞)에 이미 조리(條理)가 있었고, 분장(分章)과 절구(截句)가 정치(精緻)하였다고 하였다. 황용한(黃龍漢)이 ?제삼종제기로기한문(祭三從弟蓍老耆漢文)?을 지었다.
황기한(黃夔漢) (大相公派 世譜 21世上卷 10쪽 ) 1759년(영조 35) ~ 1824년(순조 24). 자 중고(中皐). 수원(洙源)의 아들. 증광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그는 성품이 개제(豈弟)하고 선행을 좋아하였다. 정와(貞窩) 황용한(黃龍漢)이 그 재주에 따라 잘 성취시켜 주었다고 하였다.
황시호(黃時浩) 1761년(영조 37) ~ 1835년(헌종 1). 자 기천(其天). 재중(載中)의 아들. 그는 효행이 있었다.
황중경(黃中敬) (大相公派 世譜 22世上卷 71쪽 中卷123쪽 ) 1761년(영조 37) ~ 1793년(정조 17). 자 이직(以直). 성한(聖漢)의 아들. 그는 증광 생원시에 입격하고, 소수서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都正公派 유길(有吉)의 8대손 이다.
황두한(黃斗漢) (大相公派 世譜 21世 上卷 304쪽 ) 1762년(영조 38) ~ 1833년(순조 33). 초명 태한(台漢). 자(字)는 이첨(爾瞻). 호는 소행재(素行齋). 정채(禎采)의 아들.생부는 윤채(潤采) 英祖38년(1762)~純祖32년 (1832) 순흥부 향청(順興府鄕廳) 좌수(座首)를역임, 수직(壽職)으로 증(贈)가선대부 이조참판(嘉善大夫 吏曹參判).겸(兼)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純祖32년(1833)2월-5월 순흥 향청(鄕廳)순흥좌수(座首)및소수서원 원장 역임했다. 묘(墓)영주시(榮州市)순흥면(順興面)지동(池洞)주방리촌(舟芳里村)(재배이촌)에 모시다.參議公派 道存의後孫 우천(遇千)증손이다. 단산면(丹山面) 병산(屛山)에 六兄弟 (黃中能.黃中炁,黃中杰 .黃中建 .黃中聖 .黃中元 )와 四女를 夫 李壽亨, 夫 權載鉦, 夫 康泰煥, 夫 金樂述,두었다. 좌수(座首)란?: 조선시대 지방 자치 기구인 향청(鄕廳)의 일인자로 수령권을 견제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가 향임(鄕任) 인사권과 행정실무의 일부를 맡아 보았는데 건양1년1896년에 향장(鄕長)으로 고치면서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다
純祖31년(1831)~哲宗4년(1853)의 약20년간의 순흥 향청(鄕廳) 기록에 의하면 병산 창원 黃씨에서 순흥 좌수(順興 座首)를 역임한 이는 다음과 같다.
좌수(座首)역임자 (지방 인사 행정실무 수장)
황 두 한(黃斗漢) (昌原黃氏 大相公派 世譜21世 上卷304쪽) 純祖32년(1762)-(1833) 2月~5月 순흥 좌수(順興 座首) 생(生)은 임오(壬午)1762年 졸(卒)은 계사년(癸巳年) 자(字)는 이첨(爾瞻) 생부(生父)는 생부(生父)윤채(潤采) 계(系) 정채(禎采)의 아들이다. 향년(享年)72세 졸(卒)하다. 증 가선대부(贈 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겸(兼) 동지의금부사(同知 義禁府事) 묘(墓)는 순흥면(順興面) 지동(池洞) 주방리촌(舟芳里村)(재배이촌)에 있다.
황 건 한(黃建漢) 자(字)는 치극(穉極) (昌原黃氏 大相公派 世譜21世 上卷303쪽) 생(生)은 신축년(辛丑年) 졸(卒)은 을묘년(乙卯年)향년 75세 純祖32년(1832) 5월~동33년 正원. ▲ 동34년 10월~憲宗1년(1835) 12월. ▲ 憲宗4년 (1838) 4월~동5년 9월. ▲ 동7년(1841) 正월~동8년 2월. ▲ 동10년(1844) 11월~동11 년 正월. ▲ 동13년(1847) 10월~동15년 2월.- 6차례 순흥 좌수(順興 座首) 역임 -
황 시 한(黃始漢) 憲宗1년(1835) 12월~동2년 9월.순흥 좌수(順興 座首) 역임
황 중 능(黃中能) 자(字)는 봉의(鳳儀) (昌原黃氏 大相公派 世譜22世 中卷421쪽) 병진(丙辰)1796年生 신사년(辛巳年) 생부(生父)두한(斗漢)의 자(子) 졸(卒)향년(享年)70世 憲宗6년(1840) 3월~동7년 正월. ▲ 동15년(1840) 10월~동년12월.- 2차례 순흥 좌수 (順興 座首) 역임 - 이상4人이 純祖31년(1831)~哲宗4년(1853)의 약20년간의 순흥 향청(鄕廳) 기록에 의하면 병산 창원 黃씨에서 순흥 좌수(順興 座首)를 역임한 기록이 있다.
황장한(黃章漢) (大相公派 世譜21世 上卷 96쪽 ) 1763년(영조 39) ~ 1840년(헌종 6). 자 우천(于天). 의대(宜大)의 아들. 증광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황건한(黃楗漢) (大相公派 世譜21世 上卷 9쪽 482쪽) 1765년(영조 41) ~ 1827년(순조 27). 자 건중(建中). 증 이조 참의(贈吏曹參議) 명원(命源)의 아들.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482쪽의 중채(中采)아버지 이시다.
황중려(黃中呂) 1766년(영조 42) ~ 1837년(헌종 3). 자 사중(士重). 덕한(德漢)의 아들. 생부는 운한(運漢). 그는 효행이 지극하여, 관찰사가 그에 관해 천목(薦目)에 기록하면서, 천부적으로 타고난 그의 진실한 효성을 강조하였다.
황중민(黃中敏) (大相公派 世譜22世 上卷 72쪽) 1767년(영조 43) ~ 1843년(헌종 9). 자 백수(伯修). 호 백하(白下). 연한(連漢)의 아들. 정와(貞窩) 황용한(黃龍漢)의 문인이다. 소수서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유고가 있다.
황지교(黃志敎) (大相公派 世譜 20世 上卷 346쪽) 1770년(영조 46) ~ 미상. 자 경오(敬五) 시겸(時謙)의 아들. 그는 일찍부터 과거를 사양하고, 퇴계학의 본령인 심학(心學)에 전념하여 연구하였다.
황노한(黃魯漢) (大相公派 世譜 21世上卷 226쪽) 1770년(영조 46) ~ 미상. 자 정서(井瑞). 윤대(潤大)의 아들. 정와(貞窩) 황용한(黃龍漢)의 문인이다. 그는 삼종형(三從兄)인 황용한과 이웃에 살면서 조석으로 함께 학술을 담론하여, 그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황용한의 곡삼종제정서(哭三從弟井瑞)?에 따르면, 그는 뜻이 결렴(潔廉)하고 행실은 개직(介直)하였으며, 행동거지는 삼가고 단정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그의 문사(文辭)는 광고소목(曠古疎目)했다고 하였다.
황서한(黃舒漢) (大相公派 世譜21世 上卷 132쪽) 1774년(영조 50) ~ 1819년(순조 19). 자 치순(穉醇). 호 백천(白川). 지익(志益)의 아들.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소암(素菴) 김진동(金鎭東)의 문인이다. 소수서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자질이 남달랐고, 영민하였다. 9세 때에 김진동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증강(曾江)의 사감(史鑑)을 모조리 읽고 문리(文理)가 확 트이게 되었다. 그는 이로부터 몇 년이 되지 않아 경사자집(經史子集)의 미묘한 이치를 반복 연구하여 이에 통달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예부터 문호를 잘 부지하였던 사람은 과거에 급제하지 않고 현달한 이가 드물다.”라며 과거 응시를 권유한 부모의 명을 따라서 공령문을 공부하여, 마침내 1798년(정조 22)의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그는 사마시에 입격한 이후부터는 청운의 헛된 꿈을 품지 않고, 오로지 성현들이 남긴 경전과 정주학(程朱學)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때때로 춘추(春秋) 정이간(鄭易簡), 만곡(晩谷) 조술도(趙述道),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와 더불어 이른바 삼달덕(三達德)인 지인용(智仁勇)의 근원과, 천인성명(天人性命)의 단서, 음양이기(陰陽理氣)의 학설 등에 관하여 연구하였다. 그런데, 그는 1819년(순조 19) 5월 5일에 원유(遠遊)를 나갔다가 그만 실종되고 말았으니, 이때 그의 나이 46세였다. 저서에 백천유집(白川遺集)이 있다. 하산(何汕) 황필락(黃必樂)이 행장을 찬하였다.
황명한(黃命漢) (大相公派 世譜21世 上卷 126쪽) 1777년(정조 1) ~ 1855년(철종 6). 자 유천(維天). 증 좌승지(贈左承旨) 지헌(志憲)의 아들.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신규(信奎)의 고손 이시다.
황순효(黃舜孝) 1777년(정조 1) ~ 1837년(헌종 3). 자 성여(聖汝). 양몽재(養蒙齋) 인채(鱗采)의 아들.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황지원(黃志元) (大相公派 世譜 20世 上卷 121쪽) 1778년(정조 2) ~ 1833년(순조 33). 자 선장(善長). 통덕랑(通德郞) 시학(時學)의 아들.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同知)를 받았다. 이일(以一)의 자손이시다.
황증효(黃曾孝) 1779년(정조 3) ~ 1801년(순조 1). 자 수약(守約). 양몽재(養蒙齋) 인채(鱗采)의 아들.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황연한(黃淵漢) (大相公派 世譜21世 上卷 132쪽) 1781년(정조 5) ~ 1846년(헌종 12). 자 치헌(穉憲). 호 소계(素溪). 첨추(僉樞) 지익(志益)의 아들.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었고, 특히 효성과 공경을 다하여 부형(父兄)들을 섬기면서 응대(應對)와 진퇴(進退)를 오직 부형들의 명에 따랐다. 본격적으로 취학(就學)하면서부터, 그의 재지(才智)와 문조(文藻)가 숙성하였다. 그가 “生長太平今堯天, 窮居陋巷古顔淵”이라는 시구를 지어 내자, 백형인 황서한(黃舒漢)이 그의 선한 마음 자취를 기특하게 여겼다. 또한 과거 공부를 할 무렵에는, 그가 지은 의(疑)?부(賦)가 매우 훌륭하여, 인구에 회자된 작품들이 많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분재(分財)하게 되었을 때, 그의 조부가 그에게 좋은 밭 몇 두락을 주자, 그는 의식(衣食)이 없는 것을 근심해서는 안 된다며 사양하였다. 그의 집안은 매우 가난하였으나, 당시까지 미비하였던 제전(祭田)비갈(碑碣)묘우(廟宇)재실(齋室)에 대하여 온 마음을 다해 경영하였다. 또한 그러한 사업을 하고 남은 돈을 불려서, 어려운 이들을 돕고 자제들을 가르치는 일에 보태었다. 그는 어려운 이웃들도 잘 구호해 주었는데, 특히 서소(書巢) 송홍직(宋弘直)이 순흥에 우거(寓居)하게 되자, 직접 자신의 재물을 덜어 송홍직을 구호하는 한편, 원근의 친구들을 동원하여 의연금을 내도록 독려했다고 하였다. 그는 행동거지에 위엄이 있어, 길에서 비를 만나더라도 걸음걸이에 변화를 주지 않았다. 또한 전염병을 피하기 위해 머물고 있던 우사(寓舍)에 화재가 발생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인명이 상할까 두려워하여 가산(家産)을 수습하러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극구 만류하였다고 한다. 그는 사람들과 학술을 변론할 때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가 일찍이 송홍직?서성렬(徐成烈)과 함께 율려신서(律呂新書)를 강론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서로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여 끝에는 싸우려는 기색이 있게 되자, “군자는 구차하게 서로 같아지기를 구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어찌 이기는 데에 힘을 써서 분쟁할 필요가 있는가.”라며 조용히 만류하였다. 이에 송홍직은 “충담(沖澹)하고 겸허할 뿐만 아니라, 평소에 덕성을 함양하였으니, 우리들의 사범(師範)이 될 만하다.”고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기체증(氣滯症)이 있었는데, 1819년(순조 19)에 백형인 백천(白川) 황서한(黃舒漢)이 멀리 다른 곳으로 나갔다가 실종되자, 종형(從兄)과 더불어 그를 찾아 10여 년을 방방곡곡 돌아다니느라, 몸의 기운을 더욱 소진하였다. 이에 그는 과거를 보지 않고 평생 조섭하리라 마음먹었으나, 자신에게 두어진 부형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평생 딱 한 번 도전한 사마시에 거뜬히 입격하였다. 만년에 그는 두문불출하며 섭양에 전념하는 가운데, 오직 고을의 학술 행사나 향음주례에만 참석하여 행사를 주도하였다. 그의 학문은 소암(素菴) 김진동(金鎭東)에게 수학한 백형의 성과를 온전히 계승하여, 그 연원을 갖추었다고 하였다. 문집이 있다. 극재(克齋) 황기도(黃基道)가 가장(家狀)을 찬하였다. 6대조 창원(昌遠)의 자손 이시다.
황중관(黃中琯) (大相公派 世譜 上卷72쪽) 1782년(정조 6) ~ 1849년(헌종 15). 자 찬우(瓚右). 호 나와(蘿窩). 연한(連漢)의 아들. 유고가 있다.
황욱한(黃旭漢) (大相公派 世譜21世 上卷110쪽) 1785년(정조 9) ~ 1843년(헌종 9). 초명 의한(毅漢). 자 사홍(士弘). 배대(配大)의 아들. 정와(貞窩) 황용한(黃龍漢)의 문인이다. 그는 안빈낙도(安貧樂道)하고 자신의 행실을 잘 검속(檢束)하였다고 하였다.
황범하(黃範夏) (大相公派 世譜23世 上卷97쪽) 1787년(정조 11) ~ 1857년(철종 8). 자 홍지(洪之). 호 만향재(晩香齋). 중려(中呂)의 아들.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대계(大溪) 황재영(黃在英)의 만시(輓詩)에 “큰 집안에 원래 말세의 기풍 없었고, 호쾌한 담론에는 항상 고인의 풍모 있으셨네.[大宅元無衰世意, 劇談常有古人風]”라고 하였다.
황일윤(黃一潤) (大相公派 世譜19世 上卷102쪽) 1788년(정조 12) ~ 1808년(순조 8). 자 윤경(潤卿). 동중추(同中樞) 명신(命信)의 아들. 참의(參議)에 추증되었다.
황중신(黃中愼) (大相公派 世譜22世 上卷78족) 1788년(정조 12) ~ 1867년(고종 4). 자 근지(謹之). 호 백야(白野). 증 이조 참판(贈吏曹參判) 호대(浩大)의 손자 기한(耆漢)의 아들. 정와(貞窩) 황용한(黃龍漢)의 문인이다. 그는 천품이 남달라서, 겨우 두 돌 때부터 외침(外寢)에 나가 지냈다고 하였다. 10세 때에는 필법(筆法)이 부쩍 성장하여 획력(劃力)이 주경(?勁)하였다. 24세 때부터 스스로 집안을 잇게 되면서, 그는 더욱 몸을 삼가며 조리 있게 일을 주간하였고, 우애를 다해 6명의 동생과 누이를 잘 성장시켰다. 그는 남과 물건을 주고받을 때에, 항상 그것이 의리에 맞는 것인지를 먼저 따졌으므로, 행위에 구차스러움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는 문장을 지을 때에 진부한 말을 없애고 정간(精簡)을 얻는 데에 힘을 쏟았다. 약관 때에 그가 여러 장로(長老)들을 따라 도솔봉에 올라 지은 시는 정와(貞窩) 황용한(黃龍漢)으로부터 매우 큰 인정을 받았다고 하였다. 이밖에 일상적인 간찰을 지을 때에도 번잡함을 버리고 간략함을 추구하였다. 그는 광범위한 고서(古書)를 섭렵하여, 의약(醫藥)?복서(卜筮)?음양(陰陽)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 그는 늘 말하기를 “나의 사주는 화(火)에 속하는 것이 많다. 그러므로 평소 태양(太陽)의 기운이 불처럼 일어났다. 그래서 어릴 적에는 칼을 차고 다닌 적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는 선행(善行)을 한 사람은 칭찬하고 사모하기를 마지않았으나, 악행(惡行)을 저지른 사람은 원수처럼 미워하여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집안에서의 예법(禮法)을 중시하여, 일찍이 말하기를 “집안이 망할 때에는 그 예가 이에 앞서 먼저 망한다.”라고 하였으며, 유속(流俗)이 허례(虛禮)에 빠지는 것을 몹시 미워하였다. 그는 성품이 탄이(坦夷)하고 졸박(拙樸)하여, 의관(衣冠)을 화려하게 꾸미지는 않았으나, 의복 등에 절도가 없고 추잡함이 있는 것을 매우 싫어하였다. 그는 향당(鄕黨)의 시비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절속(絶俗)의 태도를 고수하지는 않았다. 그는 1824년(순조 24) 이후로 과거를 완전히 단념하였다. 1857년(철종 8)에는 아들 황인하(黃仁夏)가 시종신(侍從臣)을 거쳤기 때문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고, 다시 규례에 따라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을 받았다. 1867년(고종 4)에는 다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받았다. 그는 일찍이 소강절(邵康節)의 원회운세설(元會運世說)을 가지고 개벽(開闢) 후의 연월일시를 추산한 바 있었다. 또한 만국전도(萬國全圖)를 베껴 때때로 펴보면서, 인간 세계에 허다한 분쟁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상황에 대해 애달파하였다. 만년에는 주자(朱子)가 정정(訂正)한 ?참동계(參同契)?를 손수 베껴 주야로 송독하면서, 그 내용을 힘써 실천하였다. 손자인 대계(大溪) 황재영(黃在英)이 유사(遺事)를 찬하고,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이 묘갈명을 찬하였다.
황중이(黃中彛) (大相公派 世譜19世 上卷 73쪽 ) 1789년(정조 13) ~ 1839년(헌종 5). 자 종병(宗秉). 정와(貞窩) 직대(直大)의 손자 용한(龍漢)의 아들.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을 지냈다.
황일철(黃一澈) (大相公派 世譜19世 上卷 105쪽 ) 1790년(정조 14) ~ 1877년(고종 14). 자 철경(澈卿). 동중추(同中樞) 명신(命信)의 아들. 첨중추(僉中樞)를 받았다.
황지임(黃志任) 1795년(영조 19) ~ 1858년(철종 9). 자 천민(天民). 시가(時可)의 아들. 증광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그는 괴담(槐潭) 배상열(裵相說)을 현양(顯揚)하는 사업에 참여하였으며, 소수서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황중능(黃中能) (大相公派 世譜22世 上卷 304쪽 中卷421쪽 ) 1796년(정조 20) ~ 1869년(고종 6). 졸(卒)향년(享年)70世 초명 중구(中九). 자(字) 봉의(鳳儀). 소행재(素行齋) 두한(斗漢)의 일자(一子) 통덕랑(通德郞)을 지냈으며, 憲宗6년(1840) 3월~동7년 正월. ▲ 동15년(1840) 10월~동년12월.- 2차례 순흥 좌수 (順興 座首) 역임 -순흥부 향장(順興府鄕長)과 소수서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12世 참의공(參議公)사영(士英)의 후손 이시다.
황중분(黃中奮) (大相公派 世譜22世 上卷 79쪽 ) 1799년(정조 23) ~ 1848년(헌종 14). 자 중희(仲熙). 호 죽남(竹南). 증 이조 참판(贈吏曹參判) 기한(耆漢)의 아들. 유고가 있다.
황중욱(黃中郁) (大相公派 世譜 中卷22世 117쪽 上卷211쪽 ) 1801년(순조 1) ~ 1884년(고종 21). 자 문익(文益). 식한(式漢)의 아들. 호군(護軍)을 지냈다.
황중명(黃中明) (大相公派 世譜22世 上卷 126쪽 ) 1801년(순조 1) ~ 1884년(고종 21). 자 이직(而直). 호 인옹(?翁). 증 호조 참판(贈戶曹參判) 명한(命漢)의 아들. 그는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추(同樞)를 지내고, 소수서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황중형(黃中炯)(大相公派 世譜22世 上卷 80쪽 ) 1803년(순조 3) ~ 1868년(고종 5). 자 광언(光彦). 호 이재(怡齋). 증 이조 참판(贈吏曹參判) 기한(耆漢)의 아들. 증광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그는 도량이 넓고 트였으며, 효성과 우애에 힘을 다하였다. 그는 9세에 부친상을 당한 때부터, 중형(仲兄)인 황중분(黃中奮)과 함께 큰형인 황중신(黃中愼)에게 수학하였다. 그는 남들이 번거롭게 독려하지 않았어도 문필(文筆)이 숙성하였으며, 1844년(헌종 10)에는 사마시에 입격하였다. 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운치가 청원(淸遠)하여, 어떠한 관직도 모두 마다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노년이 되어, 고항(古項)에 별장을 마련하였는데, 유신(庾信)의 시 구절에서 말을 취하여 이를 “피수처(避愁處)”라고 명명하였다. 그가 지은 시는 모두 산일되었으나, 손수 기록한 것으로 사숙록(私淑錄)이 있다. 만년에는 주자봉사(朱子封事)를 베껴서 주야로 송독하며 이르기를 “좀 더 일찍 이 책의 맛을 알지 못하고 평생을 허랑하게 보낸 것이 한스럽다.”라고까지 하였다. 유고가 있다. 대계(大溪) 황재영(黃在英)이 묘지를 찬하였다.
황중연(黃中演) (大相公派 世譜 上卷 126쪽 22世) 1806년(순조 6) ~ 1885년(고종 22). 자 성택(聖澤). 증 호조 참판(贈戶曹參判) 명한(命漢)의 아들. 증광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후에 소수서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황성대(黃成大) 1809년(순조 9) ~ 1886년(고종 23). 초명 용하(龍夏). 자 여집(汝集). 재원(載元)의 아들. 식년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그는 진사시를 앞두고 있을 때에, 어떤 조짐이 있는 꿈을 꾸고서 자신의 이름을 성대(成大)로 바꾸었다고 하였다.
황성하(黃成夏) (大相公派 世譜23世 上卷 98쪽 ) 1809년(순조 9) ~ 1884년(고종 21). 자 공언(功彦). 호 봉일(鳳逸). 중철(中喆)의 아들. 유고가 있다.
황중범(黃中範) (大相公派 世譜22世 上卷 127쪽 ) 1809년(순조 9) ~ 1872년(고종 9). 자 성홍(聖洪). 증 호조 참판(贈戶曹參判) 명한(命漢)의 아들.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황극대(黃極大) 1810년(순조 10) ~ 1890년(고종 27). 자 군칠(君七). 증 참의(贈參議) 일윤(一潤)의 아들. 좌윤(左尹)에 추증되었다.
황중화(黃中화) (大相公派 世譜23世 上卷9쪽 489쪽 142쪽 ) 1810년(순조 10) ~ 미상. 자 덕여(德余). 증 이조 참판(贈吏曹參判) 건한(楗漢)의 아들.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추(同樞)를 받았다.
황중익(黃中翊) (大相公派 世譜 22世 上卷 127쪽) 1811년(순조 11) ~ 1884년(고종 21). 자 성익(聖翊). 증 호조 참판(贈戶曹參判) 명한(命漢)의 아들.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황인하(黃仁夏) (大相公派 世譜23世 上卷 78쪽中170쪽 ) 1811년(순조 11) ~ 1885년(고종 22). 자 유선(幼善). 백야(白野) 중신(中愼)의 아들. 식년 문과와 중시(重試)에 급제하였다. 그는 재주와 자질이 비범하여, 겨우 글자를 익힐 나이에 이미 이어(俚語 : 일상적이고 속된 말)를 엮어 글을 지을 줄 알았다고 하였다. 약관이 되어 공령문을 공부하여 이에 능하다는 성망(聲望)을 얻었고, 첩송(帖誦)에 종사하여 3년 만에 7서(書)를 두루 암송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그는 1849년(헌종 15)에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이 해에 헌종이 승하하여 곡반(哭班)에 참여하였다. 이후 그는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명릉 별검(明陵別檢)을 역임하였고, 어머니 선성 김씨(宣城金氏)의 복을 마친 후에는 저작(著作), 봉상시 직장(奉常寺直長)을 역임하였다. 1854년(철종 5)에는 사소한 잘못으로 인하여 대리(大理 : 형옥(刑獄)을 맡은 관청)로 나아갔다가 금방 풀려났고, 다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임명되었다. 1855년(철종 6)에는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이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추존하기를 청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를 가게 되었는데, 그는 이때 류치명의 죄를 청하는 연명(聯名) 대계(臺啓)에 참여하지 않고 사직소를 올려 귀향해 버렸다. 그는 1857년(철종 8)에 홍문록(弘文錄)에 뽑혔으며, 1859년(철종 10)에는 일소(馹召)를 받게 되었는데, 당시는 옥당 유신(玉堂儒臣)에 대한 하유(下諭)가 오랫동안 행해지지 않고 있던 실정이었으므로, 이는 그에 대한 특별한 대우였다고 하였다. 그가 능행(陵幸)을 따를 때에 복장(服裝)이 매우 간소한 것을 보고, 당시 재상이던 임백경(任百經)이 매우 칭탄한 적이 있었다. 이후 그는 홍문관 벼슬로는 수찬(修撰), 교리(校理)를 역임하고, 사헌부 벼슬로는 지평(持平), 장령(掌令), 집의(執義)를 역임하고, 사간원 벼슬로는 정언(正言), 헌납(獻納), 사간(司諫)을 지냈다. 그가 양산 군수(梁山郡守)로 재직할 때에는, 사람들이 그의 정사(政事)가 지나치게 관대한 것이 아닌지 의심하였으나, 오래 그가 재직할수록 정사가 더욱 숙련되어지고 엄명(嚴明)해졌다고 하였다. 아울러 왜인(倭人)들에 대하여 자주 관향(館饗)을 베풀어서, 왜인들을 회유하고 그들의 신망을 얻었다. 그는 1865년(고종 2)에 김귀주(金龜柱)의 복관(復官)을 반대하는 연명 차자(箚子)에 참여하였다가, 이로 인해 체직되기도 하였다. 1866년(고종 3)에는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고,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승진하였다. 그는 이듬해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이후로는 사진(仕進)할 뜻을 완전히 단념하였다. 복을 마쳤을 때에 임금이 특지(特旨)로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임명하여 그를 불렀으나, 그는 다시는 서울에 복귀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10여 년 동안 산수 사이에 소요하고 서사(書史)로써 자오(自娛)하다가 조용히 생을 마쳤다. 그는 성격이 모나지 않고 관대하였으나, 마음속에는 늘 지키고 있던 절조가 있었다. 또한 문사(文辭)는 섬일(贍逸)하고, 시는 원창화실(圓暢華實)하였다. 그는 평생토록 겸손의 뜻을 고수하여, 호(號)를 가지고 스스로를 표방하지 않았다. 이재(?齋) 권연하(權璉夏)가 묘지명을 찬하였다.
황재형(黃在衡) (大相公派 世譜24世 上卷 98쪽 ) 1813년(순조 13) ~ 1891년(고종 28). 자 은민(殷民). 만향재(晩香齋) 범하(範夏)의 아들.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황중걸(黃中杰) (大相公派 世譜22世 上卷 305쪽 中卷445쪽) 1816년(순조 16) ~ 1903년(광무7). 자(字) 치흥(穉興). 소행재(素行齋) 두한(斗漢)의 삼자(三子) 그는 가선대부(嘉善大夫) 행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겸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 副摠管). 소수서원원장(紹修書院 院長)을 역임. 소수서원 임사록4권(紹修書院 任事錄3卷)에 기록이 있다.
황중경(黃中瓊) (大相公派 世譜24世 上卷 139쪽 ) 1819년(순조 19) ~ 1903년(광무7). 자 경엽(景燁). 매한(梅漢)의 아들. 그는 첨추(僉樞)를 받고, 소수서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황세하(黃世夏) (大相公派 世譜23世 上卷 88쪽 ) 1822년(순조 22) ~ 1891년(고종 28). 자 치오(致五). 호 정산(庭山). 중기(中耆)의 아들.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효모전 참봉(孝慕殿參奉)에 임명되었다. 유고가 있다.
황재옥(黃在玉) (大相公派 世譜24世 上卷 93쪽 ) 1823년(순조 23) ~ 1886년(고종 23). 자 중옥(仲玉). 시하(峕夏)의 아들. 완이(莞爾) 이인구(李寅龜)가 묘지명을 찬하였다.
황기경(黃基敬) (大相公派 世譜24世 上卷 72쪽 ) 1824년(순조 24) ~ 1865년(고종 2). 자 외근(畏根). 호 석오(石梧). 두하(斗夏)의 아들. 사마시에 입격하였다. 유고가 있다. 족제(族弟)인 대계(大溪) 황재영(黃在英)이 그의 사마시 입격을 축하하며 ?하족형기경승상(賀族兄基敬陞庠)?을 지어 이르기를,
정신을 쏟은 바는 능히 피곤함을 잊나니 精神所注可忘疲
삼십년 동안 수많은 시를 지었도다. 三十年來萬首詩
시원스런 솜씨로 단에 오르니 제자들이 기뻐 달려가고 快手登壇諸子走
고심하여 태산의 돌 뚫었음을 조물주가 알아줬네. 苦心穿石造翁知 라고 하였다.
황연하(黃璉夏) 1824년(순조 24) ~ 1886년(고종 23). 자 기언(器彦). 중운(中運)의 아들. 증광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황수하(黃壽夏) (大相公派 世譜23世 上卷 80쪽 ) 1826년(순조 26) ~ 1905년(광무9). 자 백유(伯兪). 이재(怡齋) 중형(中炯)의 아들. 식년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황중련(黃中鍊) (大相公派 世譜 22世 上卷 132쪽 中卷 264쪽) 1829년(순조 29) ~ 1888년(고종 25). 자 덕휘(德輝). 호 벽은(碧隱). 소계(素溪) 연한(淵漢)의 아들. 증광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유고가 있다.
황병수(黃秉銖) 1832년(순조 32) ~ 1887년(고종 24). 자 이숙(彛叔). 재승(在昇)의 아들. 통정대부(通政大夫) 장례원 전사(掌隷院典祀)에 추증되었다. 그가 어머니 한양 조씨(漢陽趙氏)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니, 어사가 조정에 그 효행 사실을 계품하였다.
황기하(黃璣夏) (大相公派 世譜23世 上卷 305쪽 中卷438쪽 ) 1834년(순조 34) ~ 1913년. 자(字) 순형(舜衡). 두환(斗漢)의 이자(二子) 중기(中炁)의 아들. 소수서원 원장을 역임했다.
황조하(黃祖夏) (大相公派 世譜23世 上卷 81쪽中卷193쪽) 1834년(순조 34) ~ 1899년(광무 3). 일명 조하(祖夏). 자 염우(念禹) 혹은 여무(汝茂). 호 저초(渚樵). 이재(怡齋) 중형(中炯)의 아들.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오하여, 7세 때 능히 글을 지을 줄 알았다. 겨우 9세 때 모친상을 당함에, 예법에 맞게 아침저녁으로 궤전(饋奠)하였다. 17세 때에는 그가 처가에 있었는데, 친구들이 시끄럽게 장난하는 데 바빴으나, 그는 초연히 몸가짐을 바르게 하여 어른들 곁에서 주선하였다. 그는 문예에 성취를 이루어, 붓을 잡으면 곧바로 문장을 완성하였는데, 사리(辭理)가 창달(暢達)하여 노성한 사람들도 모두 혀를 내둘렀다고 하였다. 그는 23세 때에 생원시에 입격하여 성균관에 유학하게 되었다. 그는 이때 이름난 공경(公卿) 및 큰 학자들과 교유할 수 있었다. 1866년(고종 3)에 프랑스 해군이 강화도를 점령하자, 서울 사람들이 크게 놀라고 성균관 유생들도 흩어져 떠난 자들이 매우 많았다. 그러나 그는 “우리들이 성균관에 있으면서 그 직분은 오로지 성묘(聖廟)를 보위하는 것인데, 어찌 어려움에 임하여 일신의 안위만을 도모하겠는가.”라고 하면서, 유생의 건복(巾服)을 정제하고 동요하지 않았다. 1868년(고종 5)에 부친상을 당하게 되자, 정성을 다하여 상례를 치르고, 복을 마친 후에 다시 성균관으로 올라 왔다. 1873년(고종 10)에 전 승지(前承旨) 최익현(崔益鉉)이 올린 소장(疏章)에 “이륜두상(?倫?喪)”이라는 말이 있었던 것에 대하여, 성균관 유생들이 이 말이 오히려 윤리를 무너뜨리는 것이라 여겨 권당(捲堂)을 단행하였다. 그는 이때 반수(班首)로 있으면서, 권당을 선동하였다는 죄목으로 전라도 영암군(靈巖郡)에 정배(定配)되었다. 그는 유배 기간 중에 전혀 우울해 하지 않고, 산해(山海)의 경치를 유상하면서 남천록(南遷錄)을 저술하였다. 그는 이듬해 봄에 방환되었다. 1885년(고종 22)에는 청병(淸兵)이 도성에 들어왔는데, 이때 십여 명의 무리가 갑자기 명륜당(明倫堂) 바깥에 이르렀다. 이에 그가 문을 굳게 잠그고 글로 써서 이르기를 “성묘(聖廟)가 있는 곳이니 예복을 갖추지 않으면 감히 들어올 수 없다.”고 하니, 청병이 즉시 수긍하고 물러났다고 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세상을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곧장 고향으로 돌아와, 명리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후진들을 깨우쳐서 문풍(文風)을 흥기시키는 일로 자신의 책무를 삼았다. 그는 일찍이 예천의 저곡(渚谷)에 우거(寓居)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만년에는 ‘저초(渚樵)’라는 호를 쓰게 되었다. 그가 생을 마치니,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의 문인인 극암(克菴) 류흠목(柳欽睦)은 만시(輓詩)를 지어 이르기를,
겸비한 재덕은 세상에서 필적할 만한 이 드무니 才德兼全世罕匹
식암옹(息庵翁)이 세운 모범, 유풍이 남았네. 息翁模範有遺風
우리 유가 본색은 자기절제에 있으니 吾儒本色在繩檢
공과 대계(大溪)는 이어받은 게 같다네. 公與大溪承襲同 라고 하였다. 유고가 있다. 면우(?宇) 곽종석(郭鍾錫)이 묘갈명을 찬하였다.
황재영(黃在英) (大相公派 世譜24世 中卷 170쪽 ) 1835년(헌종 1) ~ 1885년(고종 22). 자(字) 응호(應頀). 호 대계(大溪). 좌부승지(左副承旨) 인하(仁夏)의 아들.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문인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상이 수랑(秀郞)하고 비범하게 총명하였다. 그는 남들과 다투거나 따지지 않았으며, 이치에 어긋난 말을 내지 않았다. 겨우 글을 배울 나이에 그는 이미 글을 지울 줄 알았는데,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말이 많았다. 그가 6세 때에 마마를 겪게 되자, 어른들이 고을 풍속에 따라 돈[錢]을 허리에 차게 하였으나, 그는 이를 물리쳤다고 하였다. 그는 늘 어른들 곁을 떠나지 않고 서적을 공부하였으며, 번거로이 가르치지 않아도 견해가 숙성하였다. 책을 읽다가 삽화로 들어간 성현(聖賢)의 진상(眞像)을 보게 되면, 번번이 자리에서 일어나 절을 하니, 조부인 중신(中愼)이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그는 12, 13세 때에 이미 경전(經傳)과 자사(子史)를 모조리 읽었다고 하였다. 그는 1851년(철종 2)에 승지(承旨) 김진우(金鎭右) 집안에 장가를 들었다. 이때 그 집안의 여러 장덕(長德)들이 그와의 나이 차이를 잊고 허교하니, 그는 이들과 교유하면서 학식과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 또한 1853년(철종 4)에 외가로 찾아가,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과 더불어 예설(禮說)을 토론하기도 하였다. 마침내 1855년(철종 6)에는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에게로 나아가 의심스러운 바를 질의하였는데, 이때 정재가 그의 학술을 크게 허여하였다. 그가 시를 써서 당시 팔순이 넘은 정재에게 작별을 고하자, 정재는 그에게 심은후(沈隱侯)의 시를 써서 이에 답하였다. 그는 양산 군수(梁山郡守)로 부임하는 아버지 황인하를 따라 갔는데, 그곳에서 아버지를 보살펴드리는 일 외에는 반드시 단정히 앉아 독서하였고, 여가에 그곳의 고적을 두루 답사하였다. 그는 1864년(고종 1)에 동당시(東堂試)에 응시하기도 하였으나, 돌아오면서 이르기를 “어찌 기필할 수 없는 것을 얻기를 바라서 내가 좋아하는 바를 따르지 않겠는가?”라고 하며, 성리학의 본령에 더욱 매진하였다. 그는 1871년(고종 8)에 이재(?齋) 권연하(權璉夏)와 함께 단양(丹陽)을 유람하고, 아울러 그곳의 도산(道山) 윤최식(尹最植), 완이(莞爾) 이인구(李寅龜)를 방문하여 시를 창수(唱酬)하였다. 1873년(고종 10)에 관찰사(觀察使)가 그에 대하여 천목(薦目)에 “안빈여조(安貧勵操), 구경구지(?經求志)”라고 기록하여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는 1880년(고종 17)에는 구경천(九卿薦)에 오르기도 하였다. 이에 1883년(고종 20)에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을 제수 받았다. 그는 이듬해에 향교(鄕校)에서 고을 사람들과 함께 향음례(鄕飮禮)를 설행하였으며, “정학(正學)을 회복하고 사학(邪學)을 그치게 하는 방법은 강학(講學)보다 우선할 것이 없다.”고 하면서 동지들을 이끌어 월삭(月朔) 강회(講會)를 열었다. 그가 이 강회를 4, 5년 지속하는 동안, 흥기된 지역 선비들이 많았다고 하였다. 어려서부터 그는 이치를 궁구하고 몸을 닦는 학문이 있음을 알았으나, 처음에는 제자백가의 책을 섭렵하고 성리서에는 전념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경전으로 되돌아가 성리(性理)를 근기(根基)로 삼고 고인(古人)을 표준을 삼았다고 하였다. 그는 늘 새벽마다 경재잠(敬齋箴),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사물잠(四勿箴)?을 암송하면서, 그 가르침을 행위의 법칙으로 삼았다. 그럼에도 그의 학식은 실로 범위가 넓어서, 음양(陰陽)?율려(律呂)?성력(星曆)?의복(醫卜)에까지 널리 걸쳤다. 그는 문장을 지을 때에 조탁을 일삼지 않아서, 그 문장이 전아(典雅)하고 시 역시 충담간고(沖澹簡古)하였다. 그는 일찍이 주자대전(朱子大全)과 퇴계집(退溪集) 가운데 예(禮)와 리(理)를 논한 학설을 뽑고, 후현들의 의론 및 자신의 의견을 부쳐서 고금동이(古今同異)?????? 3책을 만들었다. 아울러 내면 성찰을 위하여, 백흑두(白黑豆 : 조개(趙?)가 마음속에 선악(善惡)의 발동을 시험하고자 하여 선념(善念)이 동하면 흰콩을 두고 악념(惡念)이 동하면 흑두(黑豆)를 던졌음)의 뜻을 모방하여, 매일의 선악사(善惡事)를 기록하고, 이를 방촌곤월(方寸袞鉞)이라 명명하였다. 그는 서학(西學)이 학자들을 현혹시키고 속이는 것을 염려하여, 그것이 중국(中國)에 유입된 때로부터 열성(列聖)이 이를 엄하게 물리쳤던 사실을 상세히 기록하여 수양록(修攘錄)이라고 명명하였다. 또한 일본(日本)의 태재순(太宰純)이 저술한 논어고훈(論語古訓)이 주자(朱子)의 가르침을 비난한다고 하여, 이에 대한 변(辨)을 짓기도 하였다. 문집이 있다.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이 묘지명을 찬하였다.
황기화(黃基華)(大相公派 世譜 上卷 5쪽444쪽 23世) 1838년(헌종 4) ~ 1913년. 자 치관(致寬). 응하(應夏)의 아들. 생부는 정하(鼎夏). 가선대부(嘉善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받았다.
황재훈(黃在薰) (大相公派 世譜24世 中卷 171쪽 ) 1839년(헌종 5) ~ 1881년(고종 18). 자 응소(應韶). 좌부증지(左副承旨) 인하(仁夏)의 아들. 그는 나면서부터 병치레를 많이 하며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으므로, 어른들이 그리 심하게 공부를 독려하지 않았고, 그도 섭양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천성이 남달리 총명하였고, 윤리에 독실하였다. 부친 황인하(黃仁夏)가 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형인 대계(大溪) 황재영(黃在英)이 독서에 전념하느라, 가사를 돌보고 조부를 보살필 수 없었는데, 그가 좌우로 주선하면서 조부모를 봉양하는 도리를 극진히 하였다고 하였다. 양산 군수(梁山郡守)로 부임한 부친을 따라갔을 때에는, 오로지 행동을 신중하게 삼가서 과실을 범하지 않았다. 또한 1864년(고종 1)에 동래(東萊)로 부친을 모시고 갔을 때에는, 설사병을 앓던 부친을 조석으로 쉬지 않고 시탕하였다. 그는 1880년(고종 17)에 정시(庭試)에 응시하려고 하였으나, 수신사(修信使) 김홍집(金弘集)이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을 가지고 들어오자, “사설(邪說)이 횡행하는 때에 어찌 과거를 보겠는가?”라고 하며 즉시 출성(出城)하였다. 이때 동돈녕(同敦寧) 이용하(李龍夏)가 그를 전송하면서 그의 출처가 매우 적실하다고 칭찬했다고 하였다. 이해 11월에는 병을 무릅쓰고 안동 도회(道會)에 참석하였는데, 돌아와서 황재영에게 말하기를 “이번 모임에서 골수 의리(骨?義理)는 오직 김석규(金碩奎) 씨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로부터 그는 몇몇 동지들과 더불어 매월 삭망(朔望) 강학회(講學會)를 개최하기로 하고, 황재영에게 이에 관한 협조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는 당시에 수족(手足) 부위에 조열증(潮熱症)을 앓고 있었으나, 품은 뜻을 이루기 위해 교육 사업 등을 추진하느라 조섭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갑자기 위독해지더니, 곧 생을 마치고 말았다. 말 그대로 그는 평생 하루도 아프지 않은 날이 없었으나, 수응(酬應)하는 문자에 막힘이 없었고, 산택(山澤) 사이에 은거하는 고사(高士)를 부지런히 방문하여 그들의 기방비결(奇方秘訣)을 이해했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천문(天文)지지(地誌)?침약(鍼藥)?복서(卜筮)?산학(算學)?역학(曆學)?예학(禮學) 등 다양한 방면에 걸쳐 학식을 쌓았다. 큰형인 황재영(黃在英)이 묘지를 찬하였다.
황진하(黃震夏) (大相公派 世譜 上卷 126쪽 23世) 1840년(헌종 6) ~ 1906년(광무 10). 자 형백(亨伯). 호 단포(丹圃). 성균 생원(成均生員) 중인(中演)의 아들. 그는 문학(文學)과 행실이 있었으나, 은거하여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황기하(黃冀夏)(大相公派 世譜23世 中卷 179쪽 ) 1841년(헌종 7) ~ 1867년(고종 4). 자 우존(禹尊). 죽남(竹南) 중분(中奮)의 아들. 그는 성품이 관유(寬裕)하고, 기욕(嗜慾)이 적었으며, 남들을 해치고자 하는 마음을 조금도 품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는 신장이 크고 기운이 허약하여 흐늘흐늘 말도 잘 못할 듯하였으나, 바른 의론을 쏟아낼 때에는 듣는 이들이 압도될 정도였다. 그의 나이 8세 때에 아버지가 졸하자, 백부인 백야(白野) 황중신(黃中愼)에게 나아가 수학하였는데, 공부를 독려함이 조금 느슨하였어도 그 스스로 일과(日課)를 폐하지 않았다. 조금 자라서는 정문(程文)에도 진취를 이루었다. 1863년(철종 14)에 그가 종질(從姪)인 대계(大溪) 재영(在英)에게 중용(中庸)을 배우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재영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하기를 “누가 감히 조카로서 아제를 가르칩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그는 “자네가 아니면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들을 수 없다.”고 하며 강청하여, 결국 그에게 수업했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그는 황재영의 학설을 깊이 신뢰하면서 학문을 부지런히 익혔다. 그는 특히 상서(尙書)를 즐겨 읽었다. 문중과 인근의 학자들이 달밤에 모여서 글을 암송할 때에, 비록 글이 길고 읽기 어렵더라도, 그는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는 불행히 젊은 나이로 생을 마치고 말았는데, 생전에 향약(鄕約)과 의계(義?)를 설치하는 일에 적극 협조하였으나, 결국 그 완성을 보지는 못하였다. 대계 황재영이 행술(行述)을 찬하였다.
황기락(黃基洛)(大相公派 世譜24世 上卷 2쪽과417쪽451쪽 ) 1843년(헌종 9) ~ 1885년(고종 22). 자 성서(聖書) 혹은 성언(成彦). 용하(龍夏)의 아들. 생부는 정하(鼎夏). 그는 생원시에 입격하고, 소수서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황기도(黃基道)(大相公派 世譜24世 상卷 132쪽 ) 1849년(헌종 15) ~ 1895년(고종 32). 자 도응(道凝). 호 극재(克齋). 장하(長夏)의 아들. 백천(白川) 서한(舒漢)의 후손. 이재(?齋) 권연하(權璉夏), 복재(復齋) 강건(姜楗)의 문인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여러 아이들과 놀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이 독서하는 것을 보면, 곁에 있었으면서도 능히 음을 외워 읽을 줄 알았다고 하였다. 수령이 선비들을 시험하였을 때에, 그가 장원으로 뽑힌 바가 있었고, 여러 차례 향시(鄕試)에서도 입격하였으나, 복시(覆試)에서는 불리(不利)하였다. 그러다가 부친의 상을 당한 이후에는 과거 공부를 완전히 단념하였다. 이후 독서에 전념하여 사서(四書)와 성리서(性理書)를 심도 있게 연구하였고, 권연하와 강건의 문하에서 배우면서 다시 여러 경전을 배웠는데, 두 스승으로부터 정밀한 공부 태도를 인정받았다. 그는 시국(時局)이 날로 그르쳐지고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재기(李載基)?곽종석(郭鍾錫)과 함께 시사(時事)를 토론한 바 있었다. 이때 이재기는 은둔하여 장수(藏修)하며 스스로를 보전하는 것을 위주로 한 반면, 곽종석은 벼슬을 하지 않는 유생 신분에서라도 마땅히 국난에 적극적으로 달려 나가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그는 이러한 시대를 당하여 “마음이 서로 맞는 사람과 약속하여 깊은 곳에 들어가 밭을 갈고 독서를 하면서 서로 경계하고 서로 권면한다면, 자신의 본성(本性)을 실추시키지 않을 것이다.”고 주장하였는데, 결국 곽종석도 그의 의견에 수긍했다고 하였다. 그는 이때부터 동정(動靜)?어묵(語?)의 사이에 맹렬히 성찰의 공부를 더하여 자신을 다스렸다. 독서를 할 때에는 책의 가장 중요한 제일의(第一義)를 꿰뚫어 익숙하게 하였고, 혹 정밀하게 살피지 못한 부분이 있으면 다시 읽고 사색하면서 밝게 이해할 때까지 그만두지 않았다. 그는 가산(柯山) 김형모(金瀅模)와 더불어 중용(中庸) 수장(首章)의 뜻을 토론하면서, 도(道)가 이미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기는 하나 그 고유한 것만을 믿어서 이를 보존하는 공부를 지극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또한 강필익(姜必翼)과 더불어 선악(善惡)과 천리(天理)의 학설을 토론할 때에는, 악(惡)이 과불급(過不及)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정이(程?)의 학설을 인용하면서, 악(惡)자를 너무 무겁게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김만진(金萬鎭)과 더불어 성기(性氣)의 학설을 토론할 때에는, 성(性)만을 논하고 기(氣)를 논하지 않거나 반대로 기(氣)만을 논하고 성(性)을 논하지 않는 것은 곧 ‘불비(不備)’와 ‘불명(不明)’에 해당된다고 주장하고, 성(性)은 리(理)요, 기(氣)는 리(理)에 실린 물(物)이라는 점을 완전히 갖추어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배우는 자가 공부를 함에 있어 사장(詞章)의 말단에 치우치는 것을 경계하고, 아울러 마음을 안정시켜 환난에 대처하는 도리를 배워야 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 스스로는 독서하고 의리(義理)를 강론함에 있어 그 앎이 투철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고, 이미 알게 되었으면 그 앎을 힘써 실천하지 못할까 근심하였다. 자신을 검속하는 그의 엄중함은 엄혹한 관리가 옥사(獄事)를 처리하는 것과 같았고, 마음을 성찰하는 그의 세밀함은 상제(上帝)가 자신에게 임하고 있는 듯이 하였다고 하였다. 문집이 있다. 정산(貞山) 김동진(金東鎭)이 행장을 찬하였다.
황정하(黃靖夏) (大相公派 世譜23世 上卷 90쪽中卷262쪽) 1850년(철종 1) ~ 1923년. 자 치묵(致?). 호 제헌(霽軒). 중희(中熙)의 아들. 유고가 있다.
황석하(黃錫夏) (大相公派 世譜23世 上卷114쪽과 中卷 445쪽) 1850년(철종 1) ~ 1918년. 자(字) 광국(光國). 동지(同知) 世譜上卷305쪽 중걸(中杰)의 아들. 식년 사마생원시 고종25년(1888)무자(戊子)식년시(式年試)생원(生員)3등(三等)35위(63/214)입격하였다...(崇禎紀元後五戊子 式年 司馬 榜目)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B13LB-39). 소수서원 원장 을 역임하였다. 소수서원 임사록4권(紹修書院 任事錄4卷)에 있다. 參議公 사영(士英)의 후손 이시다
황시흠(黃始欽)(大相公派 世譜25世 上卷 94쪽) 1850년(철종 1) ~ 1893년(고종 30). 자 요백(堯伯). 재옥(在玉)의 아들. 대계(大溪) 황재영(黃在英)의 문인이다. 그는 지극한 행실이 있었다고 하였다.
황재진(黃在鎭)(大相公派 世譜24世 上卷 81쪽中卷193쪽) 1853년(철종 4) ~ 1924년. 자 치규(致圭) 혹은 치규(穉圭). 호 동려(東廬). 저초(渚樵) 조하(肇夏)의 아들. 그는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였으며, 풍기사립안정학교(豊基私立安定學校)의 설립을 주도하였다. 문집이 간행되었다.
황제하(黃悌夏)(大相公派 世譜23世 中卷 279쪽) 1854년(철종 5) ~ 미상. 자 효능(孝能). 중헌(中憲)의 아들. 증광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황재헌(黃在軒)(大相公派 世譜24世 上卷54쪽 中卷 10쪽) 1856년(철종 7) ~ 1896년(건양 1). 자 사원(士轅). 호 석오(石吾). 인의(引儀) 서하(叙夏)의 아들. 그는 국가의 개화에 뜻을 두어 김옥균(金玉均)의 문하에서 들어가 개화파(改化派)를 지지하였다. 제3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수립되자, 청하 군수(淸河郡守)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청하 군수 재직하는 동안에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김홍집이 실각하고 개화파 관리들이 화를 입게 되었는데, 그는 청하에서 난중(亂衆)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순직하고 말았다. 영주영풍향토지(榮州榮豊鄕土誌)에는 그의 다음 시가 소개되어 있다. 얕은 재주는 많은 책에 임하기 부끄러우나 菲才深愧五車臨 일편단심은 나라 위한 정성이었네. 一片丹衷爲國? 밝은 해가 굽어보고 있으니 天日昭昭應俯瞰 훗날 역사는 내 마음 증명하리라. 他年汗史證吾心 권오인(權五寅)이 묘갈을 찬하였다.
황기영(黃基永)(大相公派 世譜 上卷 126쪽中卷567쪽24世) 1860년(철종 11) ~ 1935년. 자 주명(周命). 호 석오(石吾). 단포(丹圃) 진하(震夏)의 아들. 소수서원 원장 및 풍기향교 전교를 역임하였다. 그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할머니 슬하에 자랐는데, 할머니 품속에 있다가 다른 사람이 오는 것을 들으면 어머니를 부르면서 말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곧 계모가 들어오자, 생모와 다름이 없이 그를 섬겼다. 그는 재주와 슬기가 비범하였다. 백숙조(伯叔祖)인 수헌옹(壽軒翁)의 문하에서 수업(受業)하면서, 소미통감(小微通鑑)과 경전(經傳)?자사(子史)에 힘을 썼는데, 번거로이 독려하지 않아도 문의를 문득 이해했다고 하였다. 13세의 나이로 예천(醴泉) 백일장(白日場)에 나아가 장원을 차지할 정도로 과문(科文)에 능숙하였으나, 과거제가 혁파된 이후에는 오직 독서에만 전념하였다. 그가 이미 늙어서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자신이 늙었다고 핑계하면서 거상(居喪)의 예법을 소홀히 한 바가 전혀 없었다고 하였다. 유집이 있다. 청산(聽山) 장건덕(張建德)이 묘갈명을 찬하였다.신규(信圭)후손이시다.
황낙성(黃樂成)(大相公派 世譜24世 上卷7쪽과 上卷467쪽 ) 1860년(철종 11) ~ 1941년. 본명 세흠(世欽). 자(字) 범현(凡顯). 재구(在九)의 아들.사우(士祐)의 후손.그는 별시 문과에 급제하고, 부사직(副司直), 주서(注書) 등을 역임하였다. 풍기사립안정학교(豊基私立安定學校)의 교장과 소수서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황재옥(黃在鈺) (大相公派 世譜24世 中卷 421쪽) 1860년(철종 11) ~ 1927년. 자(字) 성옥(聲玉) 혹은 찬옥(贊玉). 호 약천(藥泉). 장하(章夏)의 아들. 생부는 대하(大夏). 그는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였다.고종13년(1876)병자식년식 생원3등 55위(85/101).숭정원후5丙子 式年試 司馬 방목 (B13LB-38),(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수서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소수서원 임사록4권(紹修書院 任事錄4卷)에 기록이 있다.
황덕주(黃德周) 1861년(철종 12) ~ 1940년. 그는 풍기사립안정학교(豊基私立安定學校)의 설립을 주도하고, 학교의 제3대 교장과 풍기군 서부 면장(西部面長), 영주군 풍기면 초대면장(初代面長) 등을 역임하였다.
황순하(黃舜夏) (大相公派 世譜23世 上卷302쪽 中卷 414쪽) 1863년(철종 14) ~ 1941년. 자(字) 현오(鉉五). 호 백우(白愚). 중언(中彦)의 아들. 소수서원 원장을 역임하였다.도존(道存)의 후손 이시다.
황호흠(黃浩欽)(大相公派 世譜25世 上卷 5쪽과 448쪽 ) 1864년(고종 1) ~ 1933년. 초명 두흠(斗欽). 자(字) 건칠(建七). 기인(基仁)의 아들. 그는 1903년(광무7) 4월에 관리서 주사(管理署主事)에 임용되었다. 황호영(黃虎榮)의조부
황기혁(黃基爀)(大相公派 世譜24世 上卷 127쪽과 中卷577쪽 ) 1866년(고종 3) ~ 1942. 자 화서(和瑞). 호 만죽(晩竹). 찬하(瓚厦)의 아들. 소수서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황의하(黃義夏)(大相公派 世譜24世 上卷 154쪽과 下卷1쪽 ) 1867년(고종 4) ~ 1941년. 자 성화(成和). 중선(中繕)의 아들. 사효(士孝)의 후손.장릉 참봉(莊陵參奉)을 지냈다.
황익흠(黃益欽)(大相公派 世譜25世 上卷 5쪽과 上卷444쪽 ) 1867년(고종 4) ~ 1920년. 자 중겸(仲謙). 기화(基華)의 아들. 그는 1903년(광무7) 5월에 최용한(崔鏞漢)?유한붕(劉漢鵬) 등과 함께 관리서 주사(管理署主事)에 임용되었다.
황기창(黃基昌)(大相公派 世譜世24 上卷 139쪽과 中卷706쪽 ) 1869년(고종 6) ~ 1940년. 자 이건(而建). 일하(馹夏)의 아들. 주사(主事)에 임용되었다.
황윤제(黃潤濟) (大相公派 世譜24世 上卷97쪽 中卷300쪽 ) 1869년(고종 6) ~ 1919년. 자 성거(聖車). 조수(祖銖)의 아들. 풍기향교 전교를 역임하였다. 황재철(黃在哲)(大相公派 世譜24世 上卷 79쪽과 中卷179쪽 ) 1869년(고종 6) ~ 1940년. 자 여명(汝明). 호 석정(石庭). 기하(冀夏)의 아들. 생부는 우하(瑀夏). 풍기향교(豊基鄕校)의 전교(典敎)를 역임하였다. 문집이 있다.
황재학(黃在鶴) (大相公派 世譜24世 中卷 445쪽) 1870년(고종 7) ~ 1928년. 자(字) 화백(和伯). 석하(錫夏)의 아들. 관리서 주사(管理署主事) 및 궁내부 주사(宮內府主事)에 임용되었다.
황기세(黃基世)(大相公派 世譜24世 上卷 73쪽과 中卷136쪽 ) 1871년(고종 8) ~ 1934년.자 사현(士顯) 정하(正夏)의 아들. 1871년 歷上里 면장(面長)을 역임하였다.
황기섭(黃基燮)(大相公派 世譜24世 上卷 123쪽과 中卷537쪽 ) 1872년(고종 9) ~ 1944년. 자 화응(和應). 호 죽일(竹逸). 윤하(胤夏)의 아들. 희재(希齋) 김휘준(金輝濬)과 동강(東岡) 서상건(徐相建)의 문인이다. 그는 학식과 바른 행실이 있었다. 그는 성품이 관후하였고, 바른 행실을 닦는 것에 힘썼다. 유고가 있다.
황정수(黃政銖)(大相公派 世譜25世 上卷 126쪽과 中卷567쪽 ) 1874년(고종 11) ~ 1945년. 자 순칠(舜七). 호 소은(素隱). 석오(石吾) 기영(基永)의 아들. 소수서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어려서 문장을 익혀, 13세 때에 순흥 백일장(白日場)에서 장원으로 뽑히기도 하였다. 그는 가난을 달게 받아들이며 학업에 힘을 기울였기에, 내면에 사욕이 싹트지 않았다고 하였다. 유집이 있다. 후손(後孫) 황춘식(黃春植)이 비음(碑陰)을 찬하였다.
황윤덕(黃潤德)(大相公派 世譜26世 上卷 97쪽과 中卷301쪽 ) 1874년(고종 11) ~ 1941년. 자 달삼(達三). 증 장례원 전사(贈掌隷院典祀) 병수(秉銖)의 아들. 그는 통정대부(通政大夫) 궁내부(宮內部) 문서과장(文書課長) 및 해동은행(海東銀行) 두취역(頭取役 : 은행장)을 역임하고,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풍기 군민(豊基郡民)들이 내각(內閣)에 그를 군수(郡守)로 임명해주기를 청원하기도 하였다.
황병흠(黃炳欽) (大相公派 世譜25世 上卷 78쪽과 中卷170쪽 ) 1875년(고종 12) ~ 1944년. 자 회로(晦老). 호 소선(小仙). 재훈(在薰)의 아들. 유고가 있다.
황재수(黃在壽)(大相公派 世譜24世 上卷 105쪽과 中卷361쪽 ) 1889년(고종 26) ~ 1983년. 자 수일(壽一). 면하(冕夏)의 아들. 생부는 정하(正夏). 그는 어버이 섬김에 효성을 다하여, 군(郡)으로부터 효행상(孝行賞)을 받았다.
황정흠(黃鼎欽)(大相公派 世譜24世 上卷 54쪽과 中卷1쪽 ) 1889년(고종 26) ~ 1955년. 자 이경(耳敬). 호 후송(後松). 재석(在錫)의 아들.식암(息庵)섬(暹)의후손 그는 성품이 강직하면서도 기질은 온건하였다고 하였다. 풍기 장날인 1919년 4월 9일, 3시 30분경에 안용호(安容鎬)?최성원(崔盛源)?남영진(南永鎭)이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만세 운동을 주도하다가 헌병 주재소로 붙잡혀 가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김용준(金容俊)?남상필(南相弼)?황정흠(黃政欽)?이화백(李和伯) 등과 함께 백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주재소 입구 동남쪽으로부터 주재소를 향하여 태극기를 들고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결국 그는 이로 인하여 총검으로 위압하는 경찰에 붙잡혔다. 주재소에 붙잡힌 그는 자신을 취조하는 헌병 보조원에게 민족적 양심을 일깨우며 운동에 동참하기를 호소하는 등 전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5월 16일에 재판을 받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선고받고 대구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옥중(獄中) 유고가 있다.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황태흠(黃泰欽)(大相公派 世譜25世 上卷 123쪽과 중卷537쪽 ) 1892년(고종 29) ~ 1981년. 자 문산(文山). 기섭(基燮)의 아들. 소수서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 황낙구(黃洛龜)(大相公派 世譜26世 上卷 5쪽과 上卷448쪽 ) 1892년(고종 29) ~ 1977. 자 명가(明可). 호 수암(睡庵) 혹은 목고재(木古齋). 주사(主事) 호흠(浩欽)의 아들. 그는 소수서원 원장을 역임하였고, 필법(筆法)이 뛰어났다.
황인흠(黃寅欽) (大相公派 世譜25世 上卷 135쪽과 中卷655쪽 ) 1897년(광무 1) ~ 1961년. 자 공인(孔仁). 기서(基緖)의 아들. 소수서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황규흠(黃奎欽)(大相公派 世譜25世 上卷 127쪽과 中卷575쪽 ) 1900년(광무 4) ~ 1959년. 자 성응(星應). 기정(基定)의 아들. 풍기향교의 전교를 역임하였다.
황윤덕(黃潤德) (大相派 世譜26世 中卷 421쪽 ) 1900년(광무 4) ~ 1948년.1月29日庚子生 자 덕경(德卿). 호 단암(丹菴). 연흠(淵欽)의 아들. 歷 영주 단산면 3대 단산면장(丹山面長)을 (1936년 1월22일-1938년 4월30일) 역임하였다.
황영흠(黃永欽)(大相公派 世譜25世 上卷 79쪽과 中卷179쪽 ) 1904년 ~ 1979년. 자 문서(文瑞). 재철(在哲)의 아들. 풍기향교 전교를 역임하였다.
황규흠(黃圭欽)(大相公派 世譜 25世 上卷 132쪽과 中卷621쪽) 1905년(광무 9) ~ 1990년. 자 규백(圭伯). 호 모재(慕齋). 기호(基皓)의 아들. 그는 위선(爲先)의 염(念)이 독실하여, ??????백천문집(白川文集)과 극재문집(克齋文集)을 발간하고, 첨모정(瞻慕亭)을 건립하였다.
황석흠(黃奭欽)(大相公派 世譜25世 上卷 132쪽과 中卷624쪽 ) 1906년(광무 10) ~ 1930년. 자 대석(大奭). 기욱(基郁)의 아들. 그는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졸업하고,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시와 산문(散文) 등 유고가 있다.
황영식(黃泳植)(大相公派 世譜26世 上卷 80쪽과 中卷189쪽 ) 1906년(광무 10) ~ 1980년. 자 경립(敬立). 건흠(建欽)의 아들. 그는 풍기읍 의회의원(豊基邑議會議員) 및 풍기향교의 전교를 역임하였다.
황순익(黃淳益)(大相公派 世譜26世 上卷 9쪽과 上卷481쪽 ) 1910년(융희 4) ~ 1993. 인흠(仁欽)의 아들. 풍기향교의 전교를 역임하였다.
황윤규(黃潤圭)(大相公派 世譜26世 上卷 55쪽과 中卷12쪽 ) 1914년 ~ 1990년. 자 명언(明彦). 호 여재(餘齋). 국재(菊齋) 우흠(友欽)의 아들. 그는 초대 안동 임하면 의회의장(安東臨河面議會議長)에 피선되었고, 풍기향교 전교를 역임하였다.
황윤학(黃潤鶴) (大相公派 世譜 26世 上卷 125쪽과 中卷589쪽) 1915년 ~ 1985년. 자 원고(院皐). 호 단재(丹齋). 낙수(樂銖)의 아들. 그는 친할아버지인 석오(石吾) 황기영(黃基永)에게 한학을 수업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식과 행실이 있었으며, 그의 기국(器局)을 세상 사람들이 추중하였다. 종질(從姪)인 황춘식(黃春植)이 비음(碑陰)을 찬하였다.
황을흠(黃乙欽) (大相派 世譜25世 中卷 423쪽 ) 1915년 ~ 1950년. 자 경보(景甫). 약천(藥泉) 재옥(在鈺)의 아들. 그가 상주 경찰서(尙州警察署) 재직 중에 순직(殉職)하니, 상주의 군민(郡民)들이 순직비(殉職碑)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황윤대(黃潤大) (大相派 世譜26世 中卷 449쪽과430쪽 ) 1917년 ~ 1965년. 윤흠(允欽)의 아들.受 日本國 中央大法學士 歷 봉화 경찰서장(奉化警察署長)을 역임하였다.
황호영(黃虎榮) (大相公派 世譜 27世 上卷 5쪽과 上卷 448쪽 下卷63쪽) 1919년 ~1972년. 자 오생(吾生) 중재(中在)의 6대손. 낙용(洛龍)의아들. 한필(漢弼)의후손.그는 경기공립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케이오대학의(慶應大學)경상학부를 수료하였다. 그는 재무부(財務部) 이재국장(理財局長) 행 오대국회의원(行五代國會議員)대한교육보험사장(大韓敎育保險社長)을역임하였는데, 한국전쟁 중 부산 피란 시절에 동경으로 가서 한은(韓銀)의 외화(外貨) 관계 부정 사건을 조사하기도 하였다. 이후 그는 야당 정치가로 활발한 정당 활동을 펼쳤다. 1960년 1월에 20인의 민주당 정책소위(政策小委) 위원으로 선발되었다. 그는 자유당 후보로 의원에 당선되었던 이정희(李正熙)가 ‘일부선거 무효’ 판결을 받음으로써 실시된 영주의 재선에 나섰다. 선거 기간 중 자유당원과 군경, 공무원들의 조직적인 선거 비리에 대한 잡음이 이어지는 가운데, 그와 무소속 박용만은 선거 포기를 선언하는 등 당시 영주는 일대 혼잡에 휩싸여 있었다. 선거가 끝난 후에 그는 무장 경찰과 자유당원들의 투표소 포진, 3인조 시간제 투표, 투표장 내 형사 배치 등을 사례로 들며 투표무효 소송을 제기하였다. 아울러 2월 28일에 열린 공명선거추진 전국위원회 결성대회에 참석하고, 여기서 상임기획위원에 선출되었다. 5월에는 민의원 선거를 대비한 민주당의 선거공약과 실천사항 중 금융 분야에 대한 기초 작업을 수행하였다. 그는 7월에 박용만을 제치고 제5대 민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당선 직후 민주당 신파(新派) 소장 의원의 한 사람으로서 이철승?김영구 등과 함께 장면 총리를 둘러싼 노장층을 견제하고자 하였는데, 9월 신파 의원들이 별도로 원내 교섭단체 등록을 추진할 때 이에 참여하였다. 10월에는 재무부 자문기구인 재정경제위원회 조세분위(租稅分委) 위원에 참여하였다. 1961년 1월에 민주당이 중앙상무위원회를 열어 중앙 각부의 부장과 차장을 개편 보강할 때, 재정부장을 맡았다. 또한 부정축재심의 소위원회의 위원으로 선발되었다. 3월에는 풍기 삼업조합장(蔘業組合長)에 선출되었다. 그는 1963년에 민주당 고수파와 신정당(新政黨) 합류파의 대결 구도 속에서 합류파로 활동하였으며, 신정당(가칭)의 양곡 및 물가문제연구 특별위원회의 구성 멤버로 임명되고, 상무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보름도 되지 않아, 그를 비롯한 민주당계 의원들은 상무위원 선정 비율 및 민주당계 의원들에 대한 허정(許政)의 애매한 태도로 인하여 집단탈퇴를 선언하였다. 다만, 그는 황학성?양덕인?홍문중 등 다른 민?참의원급 인사들과 함께 신정당 잔류 의사를 밝혔으며, 6월에 신정당 기획위원으로 지명되었다. 또한 같은 달에는 증권 부정사건을 비롯한 4대의혹사건 규명투쟁위원회의 신정당 대표가 되었다. 8월에는 5/16 군사정변 주체 세력의 민정참여를 저지하기 위해 국민의 당이 결성될 때, 발기인(發起人)이 되었고, 9월에 국민의 당 재무부장에 선임되었다. 10월에는 영주?봉화 지역구의 출마공천자로 결정되었는데, 11/26 총선에서 김창근 후보에 뒤져 낙선하였다. 1964년 1월에는 야당통합 등 일체의 당 운영을 위임받은 당운영17인위원회의 위원 및 야당통합 추진위원이 되었다. 9월에 국민의 당이 민주당과의 합당을 선언하고 전당대회 일정을 발표할 때, 30인의 전당대회 준비위원이 되었다. 1965년 5월 민주당과 민정당이 통합하여 단일야당(민중당)을 출범할 때, 조직 부위원장이 되었고, 7월에는 중앙상무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한일협정비준안과 월남파병 문제를 둘러싸고 당론이 분열되는 가운데, 그는 9월에 원외(院外) 민주계로서 민중당을 탈당하였고, 윤보선을 중심으로 추진되던 신당 주비(籌備)작업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후 그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대한교육보험 사장에 취임(1969년 2월)하였으며, 1972년 1월에 생명보험협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황준식(黃俊植) (大相公派 世譜 27世 上卷 5쪽과 上卷 448쪽 下卷64쪽) 字 여윤(呂胤) 생(生) 丁卯 西紀1927年 四月二九日 受 醫學碩士 英國에딘바라 醫大 卒業 獨逸及日本國 受 義學博士位歷 서울의대 助敎授 경희대 醫大 主任 교수 同 醫大外科 과장, 황낙용(黃洛龍) 三子 2010년 순흥 소수서원 원장 역임
황영탁(黃永鐸) 1920년 ~ 1983년. 자 택수(澤洙). 인흠(寅欽)의 아들. 풍기향교의 전교를 역임하였다.
황필상(黃弼相) (大相公派 世譜27世 上卷 80쪽과 中卷189쪽 ) 1925년 ~ 2000년. 자 국우(國佑). 호 백은(白隱). 영식(泳植)의 아들. 문수(文殊)?평은(平恩)?순흥(順興) 면장 및 풍기향교 전교를 역임하였다. 식암(息庵)섬(暹)의 후손이시다. 황상구(黃相究) 대구 고검장역임
황윤경(黃潤慶)) (大相公派 世譜26世 中卷 413쪽 1935년 ~ 1995년 8月27日.乙亥生 익흠(翼欽)의 아들. 그는 榮州農高와 建國大 受政治學碩士 . 그는 특히 4. 19 혁명 당시에 학생대표로서 건국대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이 공적으로 건국공로포장(建國功勞褒章) 보국훈장(保國勳章)을 받았다. 그는 이후 5.16 민족상재단 사무총장을 역임하고, .第10代國會維政會議員候補被選 정당 활동도 펼쳤다.
황순상(黃淳相)(大相公派 世譜26世 中卷 426쪽) 字 雲龍(운용)1942年6月2日壬午生 병흠(丙欽)의子 受 法學士 警察幹部職 大邱警察廳保安科長 榮州警察署長 역임
황윤업(黃潤業) (大相公派 世譜26世 中卷 436쪽) 1941年 4月25日 辛巳生 寅欽의子 農業中央會 丹山面 4代5代6代 單位農業協同組合長역임
황두식(黃斗植) (大相公派 世譜27世 下卷 522쪽) 1932年 8月29日壬申生 字 星應(성응)3代丹山面長 潤德(윤덕)의子 受 經濟學士 歷 民主黨財政部長역임 民主黨國會議員 秘書役級 書記官 역임
황용식(黃龍植) (大相公派 世譜27世 中卷 447쪽 ) 1944年5月28日生 영달(泳達)의子 경북고등학교졸(1960-1963)서울대학교 법학 학사(法學 學士)(1963-1967) 플렛처대학원 외교학 석사(1976-1977). 외교통상부 조약국 국장(1999-2000年). 튀니지 대사역임(2000-2003年).주대만 대표부 대사역임(2004年). 수상경력:외무부장관 표창장(1982年). 대통령표창장(1984年). 세보(世譜)22世 중걸(中杰)의 현손(玄孫)이시다.
황충식(黃忠植) (大相公派 世譜27世下卷 536쪽) 1941年 2月9日 辛巳生 潤河(윤하)의子 二代榮州市議會議員역임 農業中央會 丹山面 8代9代 單位農業協同組合長역임
황윤진(黃潤鎭) (大相派 世譜26世 中卷 455 쪽) 1952年4月6日生 자(字)신경(信卿) 락흠(洛欽)의자(子) 수원대학교 산업경영대학원 수료(1998년) 한국노총 소비자협동조합 연합회 부이사장(1984)한국노총 경기도본부 용인지부 의장(1987年). 전국화학 노동조합연맹 부위원장(1991年). 노동부 노동정책 평가위원(1991年)(사)한국노총 경기도본부 이사장(1997年). (재)용인노총 장학회 이사장(1997年). 한국노총 경기도본부 제5대 사무처장(1997年)제5대 경기도의회 의원(議會議員)(1998年)역임. 한국노총 경기도본부 제6대의장(2000年). (재)경기도노총 장학문화재단 이사장(2000年). 제6대 경기도의회 의원(議會議員)(2002年) 역임 정당할동을했다. 수상경력: 경기도지사 표창(1994年). 노동부장관 표창(1997年). 대한민국 철탑 산업훈장(2003年) 세보(世譜)22世 중걸(中杰)의 고손(高孫)
생몰년 미상
황경(黃璟) 생몰년 미상. 입양(立陽)의 아들. 그는 증손 귀대(貴大)가 수직을 받은 것으로 인하여 군자감 정(軍資監正)에 증직되었다.
황경천(黃敬天) 생몰년 미상. 증(增)의 아들. 참봉(參奉)을 지냈다.
황구령(黃九齡) 생몰년 미상. 참봉(參奉) 사충(士忠)의 아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받았다.
황근(黃瑾) 생몰년 미상. 순릉 참봉(順陵參奉) 사순(士純)의 아들. 참봉(參奉)을 지냈다.
황기(黃埼) 생몰년 미상. 자 천구(天球)?기옥(奇玉). 증 사헌부 집의(贈司憲府執義) 입진(立震)의 아들. 그는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할 때에 장구(章句)에만 얽매이지 않았다고 하였다.
황담(黃譚) 미상 ~ 1558년(명종 13). 자 대이(大以). 직장(直長) 사필(士弼)의 아들. 통사랑(通仕郞) 습독관(習讀官)을 지냈다.
황대인(黃大仁)(大相派 世譜15世 上卷 119쪽 ) 생몰년 미상. 자 군후(君厚). 판관(判官) 변(?)의 아들. 그는 학식과 행실이 일찍부터 성취되었다고 하였다.
황대일(黃大一)(大相派 世譜15世 上卷 119쪽 ) 생몰년 미상. 자 순보(純甫). 판관(判官) 변( )의 아들. 주부(主簿)를 지냈다.
황덕규(黃德奎) 생몰년 미상. 자 문보(文甫). 참봉(參奉) 사준(士俊)의 아들. 참봉(參奉)을 지냈다.
황득형(黃得亨) 생몰년 미상.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 자용(自勇)의 아들. 예빈시 주부(禮賓寺主簿)를 지냈고, 후에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황림(黃琳) 생몰년 미상. 초명 현(玹). 순릉 참봉(順陵參奉) 사순(士純)의 아들. 생원시에 입격하였다고 하였다.
황명신(黃命臣) 생몰년 미상. 서상(?常)의 아들. 호군(護軍)을 지냈다.
황명욱(黃命郁) 생몰년 미상. 자 문지(文之). 동추(同樞) 하윤(河潤)의 아들. 호군(護軍)을 지냈다.
황명홍(黃命弘) 생몰년 미상. 자 영백(英伯). 동추(同樞) 하윤(河潤)의 아들. 호군(護軍)을 지냈다.
황박(黃璞) 생몰년 미상. 부장(部將) 입영(立潁)의 아들. 충의위(忠義衛)를 지냈다.
황변(黃?) 생몰년 미상. 자 시백(時伯). 장(璋)의 아들.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을 지냈다.
황빈(黃彬) 생몰년 미상. 자 국화(國華). 호 중화당(中和堂). 우수(愚叟) 한충(漢忠)의 아들. 식년 진사시에서 차석으로 입격하였다. 그는 풍기 군수(豊基郡守) 주세붕(周世鵬)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특히 풍기향교(豊基鄕校)의 이건 및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의 창건에 경비(經費)를 부조하는 등 흥학(興學) 사업에 적극 기여하였다.
황사공(黃士恭) (大相公派 世譜 上卷 1쪽 12世) 생몰년 미상. 희원(希元)의 아들. 참봉(參奉)을 지냈다.
황사순(黃士純) (大相公派 世譜 上卷 1쪽 12世) 생몰년 미상. 자 일지(一之). 참봉(參奉) 희숙(希淑)의 아들. 순릉 참봉(順陵參奉)을 지냈고, 사후에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추증되었다.
황사영(黃士英) (大相公派 世譜 上卷 1쪽 12世) 생몰년 미상. 선릉 참봉(宣陵參奉) 희현(希賢)의 아들. 순릉 참봉(順陵參奉)을 지냈고, 후에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추증되었다.
황사온(黃士溫) (大相公派 世譜 上卷 1쪽 12世) 생몰년 미상. 희원(希元)의 아들. 참봉(參奉)을 지냈다.
황사웅(黃士雄) 생몰년 미상. 자 국주(國柱). 부장(部將) 희안(希顔)의 아들. 부장(部將)을 지냈다.
황사인(黃士仁)(大相公派 世譜 上卷 154쪽 12世) 생몰년 미상. 자 애지(愛之). 참봉(參奉) 희숙(希淑)의 아들. 내금위장(內禁衛將)을 지냈다.
황사준(黃士俊) (大相公派 世譜 上卷 1쪽 12世) 생몰년 미상. 자 국빈(國賓). 순릉 참봉(純陵參奉) 희성(希聖)의 아들. 참봉(參奉)을 지냈다. 그는 죽계지(竹溪誌)에 ‘고을 선비[鄕士]’로 소개되어 있는데, 이 ‘향사(鄕士)’란 인(仁)을 행하기를 즐겨하고 불의를 수치스럽게 여겨서, 결국 고을의 풍속을 두텁게 만드는 선비를 일컫는 뜻으로 쓰였다. 황사충(黃士忠) 생몰년 미상. 희형(希亨)의 아들. 참봉(參奉)을 지냈다.
황성(黃惺) 생몰년 미상. 자 이경(而敬). 증 한성 우윤(贈漢城右尹) 기(琦)의 아들. 사재감 부정(司宰監副正)을 지냈으며, 후에 동지돈녕(同知敦寧)에 추증되었다.
황성(黃晟) 생몰년 미상. 자 경승(景升). 습독관(習讀官) 담(譚)의 아들. 봉사(奉事)를 지냈다.
황소(黃昭) 생몰년 미상. 자 중명(仲明). 참봉(參奉) 이규(以奎)의 아들. 훈도(訓導)를 지냈다.
황수성(黃遂性) (大相公派 世譜 上卷 118쪽 13世) 생몰년 미상. 자 복초(復初). 참봉(參奉) 사온(士溫)의 아들. 참봉(參奉)을 지냈다.
황승한(黃承漢) 기사생(己巳生) ~ 미상. 여대(汝大)의 아들. 참봉(參奉)을 지냈다.
황신경(黃藎卿) 생몰년 미상. 통례원 봉례(通禮院奉禮) 전(躔)의 아들. 진사시에 입격했다고 하였다.
황연(黃演) 생몰년 미상. 주부(主簿) 득형(得亨)의 아들. 호군(護軍)을 지냈다.
황연수(黃延壽) 생몰년 미상. 검(儉)의 아들. 금부 도사(禁府都事)를 지냈다.
황우태(黃遇泰) 생몰년 미상. 자 안수(安?). 창세(昌世)의 아들.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중추(同中樞)를 받았다. 황유방(黃有方) 생몰년 미상. 자 자의(子義). 훈도(訓導) 재(載)의 아들. 봉사(奉事)를 지냈다.
황유선(黃有善)(大相公派 世譜 上卷 107쪽 15世) 생몰년 미상. 자 자우(子佑). 참봉(參奉) 사준(士俊)의 증손. 참봉(參奉)을 지냈다.
황응겸(黃應謙) 경오생(庚午生) ~ 미상. 자 자익(子益). 주일(主一)의 아들. 호군(護軍)을 지냈다.
황응문(黃應文) 생몰년 미상. 진사(進士) 빈(彬)의 아들. 훈도(訓導)를 지냈다.
황의생(黃義生) 생몰년 미상. 수(琇)의 아들. 진무위 사용(振武衛司勇)을 지냈다.
황이규(黃以奎)(大相公派 世譜 上卷 105쪽 13世) 생몰년 미상. 자 치화(致和). 직장(直長) 사호(士豪)의 아들. 기자전 참봉(箕子殿參奉)을 지냈다. 황이문(黃以文) 생몰년 미상. 호군(護軍) 연(演)의 아들. 자여도 찰방(自如道察訪)을 지냈다.
황이번(黃以藩) 생몰년 미상. 자 한보(翰甫). 부정(副正) 지(?)의 아들. 직장(直長)을 지냈다.
황이정(黃以正) 생몰년 미상. 훈(壎)의 아들. 참봉(參奉)을 지냈다.
황이징(黃以澄) 갑신생(甲申生) ~ 미상. 초명 입징(立澄). 증 좌승지(贈左承旨) 형(瀅)의 아들. 호군(護軍)을 지내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황이청(黃以淸) 생몰년 미상. 초명 낙천(樂天). 증(增)의 아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받았다.
황인한(黃人漢) 병진생(丙辰生) ~ 정묘졸(丁卯卒). 자 문숙(文叔). 우대(羽大)의 아들. 감역(監役)을 지냈다.
황자용(黃自勇) 생몰년 미상. 사용(司勇) 의생(義生)의 아들.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을 지냈다.
황장(黃璋) (大相公派 世譜 上卷 119쪽 13世) 생몰년 미상. 자 명중(明仲). 사재감 정(司宰監正) 사언(士彦)의 아들. 그는 어려서부터 문학(文學)과 행실이 있었으나, 불행히 일찍 생 을 마쳤다고 한다.
황재(黃載) 생몰년 미상. 자 여후(汝厚). 참봉(參奉) 수성(遂性)의 아들. 그는 훈도(訓導)를 지냈으며, 옛것을 좋아하고 박학하였다.
황치일(黃致一) 생몰년 미상. 자 성보(誠甫). 직장(直長) 운(?)의 아들. 계공랑(啓功郞) 직장(直長)을 지냈다.
황하윤(黃河潤) 생몰년 미상. 자 성숙(聖叔). 호군(護軍) 이징(以澄)의 아들. 동추(同樞)를 받았다.
황해(黃該) 생몰년 미상. 자 자박(子?). 직장(直長) 사필(士弼)의 아들. 내금위 권관(內禁衛權管)을 역임하였다. 그는 죽계지(竹溪誌) 향사(鄕士)에 거명되어 있는데, 여기서 ‘향사(鄕士)’란 인(仁)을 실천하기를 즐기고 불의(不義)를 수치스럽게 여겨서 결국 고을의 풍속을 두텁게 하였던 선비를 일컫는 말이다. 황화조(黃和祚) 임술생(壬戌生) ~ 미상. 충의위(忠義衛) 박(璞)의 아들. 충의위(忠義衛)를 지냈다.
황흔(黃昕) 생몰년 미상. 자 명원(明遠). 참봉(參奉) 이규(以奎)의 아들. 훈도(訓導)를 역임하였다.
황희안(黃希顔) 생몰년 미상. 진사(進士) 신경(藎卿)의 아들. 부장(部將)을 지냈다.
작성일: 2011년 2월 11일 .황 영 운 梨花에 月白하고 銀漢은 三更 인데. 一枝春心 은 子規(소쩍새)야 알랴 마는 ( 계속 재수록 중) 多情도 病인양 하야 잠 못드어 하노라. 李 兆 年 의 (多 情 歌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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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장문의 자료를 올리시느라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정말 조은 자료를 올려주셨습니다~~
지금까지 종보에서 보아온 내용보다 더 자세하네요~~
수고하셨습니다
부휜당공파 27세 손.
명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