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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권 논설·사론
1. 기존 전집의 문제점
단재 신채호는 한말·일제강점기 대표적인 계몽주의 계열의 역사가이며, 언론가였다. 그가 처음부터 계몽주의 계열의 지식인이 된 것은 아니었다. 신채호는 할아버지로부터 성리학자가 되기 위한 기초적인 지식을 터득하였으며, 신승구로부터 한학을 익혀갔다. 한말 학부대신을 역임하였던 신기선의 집에서 머물면서 많은 책을 섭렵하였으며, 그의 추천에 의해 성균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처럼 신채호는 당시 한국 대부분의 지식인들처럼 성리학자가 되기 위한 기초적인 수학과정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신채호가 계몽주의 계열의 지식인으로 자처하기 시작한 것은 독립협회에 몸을 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후 그는 신규식·신백우와 더불어 산동학원 설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신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에는 장지연의 초청으로 『황성신문(皇城新聞)』 주필로 활동하였다.
신채호가 본격적으로 계몽활동을 시작한 것은 황성신문사에서 대한매일신보사로 자리를 옮기면서였다. 그는 여기서 주필로 활동하면서 한국사와 관련된 방대한 양의 사론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그는 세 명의 이탈리아 영웅을 서사한 『이태리건국삼걸전』을 번역하였으며, 한국사에 있어 현재의 귀감이 되는 역사적 인물을 저술하려 하였다. 사론과 더불어 그는 당시 한국이 해결해야 할 과제와 한국 민족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나름의 논설도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기고하고 있었다. 이처럼 신채호는 각종 논설과 사론을 통해 국민을 계몽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통해 무너져 가는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일본이 한국을 강제병합(강제병탄, 1910)하자 신채호는 기나긴 망명생활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는 청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정착하였는데, 그 곳에서도 『대양보』·『권업신문』의 주필을 맡아 신문의 논설과 사론을 담당하였다. 논설과 사론을 통한 식민지 국민의 계몽활동은 임시정부로부터 이탈한 후에도 지속하였다. 그는 『신대한(新大韓)』을 창간하여 임시정부의 노선을 비판함과 동시에 자신만의 특유 화법으로 논설과 사론을 집필하였다. 신문뿐만 아니라 그는 각종 잡지 창간에도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였다. 『대동(大同)』의 창간에도 간접적으로 참여하는가 하면, 1921년부터 한문 잡지 『천고(天鼓)』를 발간하여 많은 논설과 사론을 집필하였다. 당시 신문 지상에는 발표하지 않았지만, 그는 많은 논설과 사론을 작성하였다.
신채호의 이러한 행동 궤적을 감안해 본다면, 신채호의 사상을 파악하고 그의 진면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논설 및 사론에 대한 검토가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이에 후대의 많은 학자들은 신채호의 사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그가 집필한 논설과 사론을 수집·정리하는데 많은 열정을 쏟았는데, 대표적인 책으로 1972년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에서 주관하고 형설출판사에서 발행한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전집(全集)』하(下)와 1975년에 나온 개정판(改訂版)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전집(全集)』별집(別集)을 들 수 있다. 여기에는 수십 편의 논설 및 사론이 수록되어, 신채호 연구에 있어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에서 간행한 『단재 신채호 전집』으로 말미암아 그와 관련된 연구가 질과 양적인 측면에서 한 단계 나아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기존 전집에 수록되어 있는 논설과 사론은 몇 가지 측면에서 중대한 결함을 안고 있었다. 해당 잡지나 신문에 실려 있는 논설과 사론의 원전자료를 수록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존 전집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생생한 1차 사료로서의 역할보다는 2차 사료로서의 기능밖에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기존 전집의 또 다른 문제점으로 무기명 논설 및 사론에 대해 특별한 검증 장치 없이 무분별하게 수록하였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기존 전집에서 각각의 무기명 논설 및 사론에 대해 그것이 왜 신채호의 작품인가에 대해 설명한 부분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신채호의 실상을 접근 하는데 오히려 혼란만 초래할 뿐이라는 것이 해제자의 생각이다. 이에 이번 단재 신채호 전집의 논설 및 사론에서는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해당 자료의 원전을 수록함과 동시에 무기명 논설에 대한 나름의 입장을 피력하려 한다.
2. 기명 논설·사론의 검토
이번 『단재 신채호 전집』에 수록될 논설 및 사론은 크게 기명(필명)과 무기명으로 분류하였다. 먼저 기명 및 필명이 기재되어 있는 논설 및 사론 가운데 「새해축사」, 「수원이생원」, 「주락조씨의 부인」, 「한씨부인의 자선」, 「게씨문중의 학교」, 「대한(大韓)의 희망(希望)」, 「역사(歷史)와 애국심(愛國心)의 관계(關係)」, 「성력(誠力)과 공업(功業)」, 「대아(大我)와 소아(小我)」,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는 하유(何由)로 기(起)하였는가」, 「문법(文法)을 의통일(宜統一)」, 「여우인절교서(與友人絶交書)」, 「친구에게 절교하는 편지」, 「낭객(浪客)의 신년만필(新年漫筆)」, 「부(父)를 수(囚)한 차대왕(次大王)」, 「고구려(高句麗)와 신라(新羅) 건국연대(建國年代)에 대(對)하여」, 「예언가(豫言家)가 본 무진(戊辰)」, 「만리장성(萬里長城)이 뉘것이냐」, 「조선민족(朝鮮民族)의 전성시대(全盛時代)」는 기존 단재 전집에도 수록된 작품들이다. 이번 전집에서는 해당 논설 및 사론의 원문과 새 활자본을 보완하여 수록하였다.
이번 전집에 새로 수록될 기명(필명) 논설 및 사론으로는 「고금광복기(古今光復記)」, 「동방고대각인종(東方古代各人種)」, 「금일(今日)에 또 피난(避亂)할 십승지(十勝地)를 찾는 사람들」, 「사십이상(四十以上)은 진살(盡殺)?」, 「월왕구천살인(越王句踐殺人)」, 「소아교양론(小兒敎養論)」, 「성질(性質)에 따라 아해(兒孩)들을 가르칠 일」이 있다. 「고금광복기(古今光復記)」는 『향강잡지(香江雜誌)』 창간호에 실려 있는 글이다. 『향강잡지』는 1913년 12월 20일 홍콩에서 창간되었다. 이 잡지는 중국 혁명파들의 경제적 후원을 받아 박은식 주도하에 창간되었다. 창간호에는 총 14편의 논설이 실려 있는데 「고금광복기」는 그 중 하나다. 이 글을 신채호가 작성했다고 보는 이유는 『향강잡지』가 창간될 시점에 신채호는 상해에 있어 박은식이 주관하는 잡지에 글을 기고할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 이 글의 필명이 ‘단생(丹生)’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동방고대각인종(東方古代各人種)」은 「대동제국사서언(大東帝國史序言)」과 더불어 『무애산고(無涯散稿)』에 수록된 작품이다. 『무애산고』는 성균관대학교 존경각에 소장되어 있는 책으로 우송(又松) 이규호(李奎鎬)라는 사람이 귀중한 여러 도서 중에 하나였다. 필사자·출판사·발행자 등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단군기원지사천이백사십유팔년(檀君紀元之四千二百四十有八年)’이라고 필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책의 간행연대는 1915년으로 추정해 볼 수 있으며, ‘신채호(申采浩)저’라고 밝히고 있다는 점, 『무애산고』의 무애(無涯)는 신채호가 사용했던 여러 호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미루어 보아 이 책의 저자는 신채호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동방고대각인종」은 예맥족·숙신족·선비족·거란족·지나(중국)족·왜족·몽고족·돌궐족·부여족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이 사론에서는 단순히 각각의 족을 설명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범주화하였다. 즉, 예맥족·숙신족·선비족·거란족은 부여족과 더불어 살거나 전쟁을 하였던 족으로 분류하였다. 지나(중국)족·왜족·몽고족·돌궐족은 부여족의 국경안에 거주하지 않으면서 항상 침입하여 괴롭히는 족으로 판단했다. 이처럼 신채호는 한국사의 주족을 부여족으로 간주하였으며, 이를 중심축에 두고 주변 여타의 족들에 대한 평가를 하고 있었다.
「금일(今日)에 또 피난(避亂)할 십승지(十勝地)를 찾는 사람들」, 「사십이상(四十以上)은 진살(盡殺)?」, 「월왕구천살인(越王句踐殺人)」은 ‘진공(震公)’이라는 필명으로 상해에서 발행한 『독립신문(獨立新聞)』에 실린 글들이다. 진공을 신채호의 또 다른 필명으로 보는 첫 번째 이유는 『천고(天鼓)』에서 찾아볼 수 있다. 주지하듯이 『천고(天鼓)』는 신채호가 1921년 북경에서 창간한 잡지였는데, 여기에 ‘진공’이라는 필명이 보인다. 예컨대, 『천고』 1권의 「조선독립 및 동양평화(朝鮮獨立及東洋平和)」, 『천고』 2권의 「한한양족지의가친결(韓漢兩族之宜加親結)」, 「고조선지사회주의(古朝鮮之社會主義)」는 필명이 ‘진공’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천고』와 『독립신문』에 ‘진공’이라는 필명으로 실려 있는 저자는 동일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천고』의 대부분을 신채호가 집필하였다는 점을 미루어 생각해 보면, 『독립신문』의 그것도 신채호의 필명일 가능성이 높다.
『독립신문』에 실려 있는 위 3편의 글들은 문체나 사상면에서 신채호의 다른 작품들과 서로 통한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금일(今日)에 또 피난(避亂)할 십승지(十勝地)를 찾는 사람들」에서 당시 문예사조의 하나였던 ‘연애소설’과 ‘신시(新詩)’에 대하여 현실 도피적인 문학일 뿐이라며 그만의 특유 화법으로 비판의 날을 세우는데, 이는 그의 또 다른 작품인 「낭객의 신년만필」과 「문예계 청년에 참고를 구함」이라는 글과 사상면에서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낭객의 신년만필」에는 ‘십승지(十勝地)를 찾아다니는 치인(癡人)’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는 제목과 유사성을 띠고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독립신문』에 ‘진공’이라는 필명의 글은 신채호의 작품으로 보아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성질(性質)에 따라 아해(兒孩)들을 가르칠 일」과 「소아교양론(小兒敎養論)」은 1935년 『신동방』이라는 잡지에 실려 있는 글이다. 이 두 편의 글이 『신동방』에 실리게 되는 경위에 대해서는 현재 알 수 없다. 이 두 편의 글은 제목에서 말해주듯 ‘소아(小兒)’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신채호 나름의 입장을 정리한 것이다. 「성질(性質)에 따라 아해(兒孩)들을 가르칠 일」에서는 부모 특히 아버지의 신분과 직업에 따라 자식을 교육시킬 것이 아니라, 소아가 천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질을 육성하여 국가의 큰 재목이 될 수 있도록 교육 시킬 것을 강조하였다. 「소아교양론」에서는 태아시절부터 소아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고 있었다. 신채호가 소아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국가의 근본이 소아에게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즉, 국가의 중심은 국민에 있으며, 국민의 핵심은 청년이라는 것이 그의 평소 지론이었다. 국가가 강해지기 위해서는 청년이 강건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소아시절 부모가 교육을 잘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전집에 수록될 기명(필명) 논설 및 사론 가운데 주목되는 것으로 『대한매일신보』 담총(談叢)·잡동산이에 연재된 짤막한 작품들을 들 수 있다. 담총과 잡동산이는 1909년 11월 20일부터 1910년 4월 7일까지 『대한매일신보』 국한문판과 국문판에 각각 연재되었다. 『대한매일신보』 국문판에는 필명이 보이지 않으나, 국한문판에는 ‘검심(劍心)’이라는 필명이 기재되어 있었다. 그러면 담총에 보이는 ‘검심’은 신채호의 필명인가. 『대한매일신보』 1909년 12월 15일자 담총란에는 「국(國)사의 일사(逸事)」라는 제목의 글이 연재되었는데, 여기서 저자 ‘검심’은 “홍이계(洪耳溪)가 연경(燕京)에 사(使)하다가 요양계관산(遼陽鷄冠山)에 일비(一碑)가 유(有)한데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이 연개소문(淵蓋蘇文)에게 대패(大敗)하여 단기(單騎)로 주(走)하다가 차산(此山)에 유숙(留宿)하였다고 기재(記載)한 것을 친견(親見)하였다.”라고 하여, 홍양호[이계(耳溪)는 홍양호(洪良浩)의 호임]의 기록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신채호가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독사신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년 12월 29자 담총란에는 「국문(國文)의 기원(起源)」이라는 글이 연재되었는데, 이 글의 필명 또한 ‘검심’으로 되어 있다. 저자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조한 것은 잘못 알려진 사실이라고 하면서, 한글의 기원을 『진언집(眞言集)』이란 책에 근거하여 승려 요의(了義)에서 찾고 있었다. 한글을 창조한 사람으로 요의를 들고 있는데, 이는 ‘검심’만의 독특한 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신채호의 글로 인정받고 있는 「국한문(國漢文)의 경중(輕重)」, 「국문연구회 제씨(國文硏究會諸氏)에게 권고함」이라는 글에서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신채호의 작품으로 간주되고 있는 「천희당시화(天喜堂詩話)」에서 “여(余)가 견(見)하는 바 국시중(國詩中)에 기유전(其流傳) 최구(最舊)한 자(者)를 거(擧)하면 고승(高僧) 요의(了義)가 국문(國文)을 시창(始創)하고 불교(佛敎)를 찬미(讚美)한 진언(眞言)이 시(是)라 할지나”라고 하여 승려 요의를 언급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담총의 저자인 ‘검심’은 신채호의 또 다른 필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담총은 다양한 주제를 짤막하게 적은 글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거기에는 신채호의 현실인식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여기서는 담총에 실려 있는 모든 글들을 소개하는 것은 피하고, 신채호의 현실인식을 읽어낼 수 있는 몇 편의 글들만 추려서 소개하고자 한다. 담총 또는 잡동산이에 실려 있는 신채호의 글들을 살펴보면, 기존 체제에 대한 파괴를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군(君)과 국(國)」(『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10. 1. 29)이라는 글에서 전통시대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군과 국을 동일시하였는데, 오늘날 한국이 문명국이 되기 위해서는 “군(君)은 군(君)이오 국(國)은 국(國)이 되야한다.”고 하였다. 신채호는 군과 국의 분리를 통해 전근대 사회의 표상물이었던 군의 전통적 권위를 부정하려 했다.
군(君) 뿐만 아니라 성인(聖人)에 대해서도 권위와 전통을 부정하고 있었다. 신채호는 「성인(聖人)」(『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2. 18)이라는 글에서 ‘성인’이 가지고 있던 신비성을 벗겨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성인(聖人)이 개중인이상(蓋衆人以上)에 초출(超出)치 아님은 아니나 피(彼)도 역(亦) 사회업력(社會業力)의 조성(造成)한 바오 자연(自然)히 생지(生知)한 자(者)가 아니라”고 하여 성인을 격하시키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나아가 현시대는 “자유시대(自由時代)니 범아학자(凡我學者)는 고인(古人)의 노(奴)가 되지 말지어다”(『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년 11월 27일자 「지나고설[支那(중국)古說]부에 운(云)하였으되」)라고 하여 기존 전통적 질서와 권위에 대해 부정하였다. 신채호는 전통과 권위에 대한 부정을 파괴의 논리로 이어 나간다. 아래의 자료를 통해 그 단면을 살펴 볼 수 있다.
오인(吾人)은 공자(孔子)로 선생(先生)을 작(作)할까, 야소[耶蘇(예수)]로 선생(先生)을 작(作)할까, 마합맥[麻哈麥(마호메트)]으로 선생(先生)을 작(作)할까, 왈(曰) 개부부(皆否否)라 오직 진리(眞理)로 선생을 작(作)하리라. 고(故)로 공자(孔子)·야소[耶蘇(예수)]·마합맥[麻哈麥(마호메트)]의 행(行)한 바라도 진리(眞理)에 합(合)하면 공승교(恭承敎)하려니와 만일 진리(眞理)에 부합(不合)한 자(者)면 오인(吾人)은 두(頭)가 쇄(碎)하더라도 결단(決斷)코 반항(反抗)을 작(作)하여 아(我) 진리선생(眞理先生)을 유종(惟從)하리라. (중략) 성인경(聖人經)·현인전(賢人傳)이라도 진리(眞理)에 합(合)하면 이(已)어니와 진리(眞理)에 부합(不合)하면 오인(吾人)은 골(骨)이 분(粉)하더라도 결단(決斷)코 정의(正義)를 장(仗)하여 아(我) 진리성경(眞理聖經)을 유독(惟讀)하리라. 대저(大抵) 파괴(破壞)가 무(無)하면 건설(建設)이 무(無)하나니 구학설(舊學說)이 불파괴(不破壞)하면 신학설(新學說)이 불건설(不建設)될지며 구사상(舊思想)이 불파괴(不破壞)하면 신사상(新思想)이 불건설(不建設)될지며 구습속(舊習俗)·구제도(舊制度)가 불파괴(不破壞)하면 신습속(新習俗)·신제도(新制度)가 불건설(不建設)될지라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10년 1월 7일자 「유진리(惟眞理)」)
공자·예수·마호메트는 성인임과 동시에 ‘구학설(舊學說)’·‘구사상(舊思想)’·‘구습속(舊習俗)’·‘구제도(舊制度)’의 표상물로 등치된다. 이상의 것들은 ‘진리’에 합치되지 않으면 파괴의 대상이 됨을 역설하였다. 이처럼 신채호는 전통과의 단절을 꾀하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강한 어조로 전통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신학설(新學說)’·‘신사상(新思想)’·‘신습속(新習俗)’·‘신제도(新制度)’의 건설을 강조한 것은 그의 현실인식과 관계가 깊다. 그는 「상복연(喪服鳶)」·「재맹아(再盲兒)」(『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1. 23)와 「서인(西人)이 오주[澳洲(오스트레일리아)]를 처음 발현(發現)할 제(際)」(『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1. 25)에서 제국주의의 침략성을 직시하면서 동시에 현시대를 제국주의가 힘을 발휘하는 시대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힘의 논리 즉, ‘우승열패’와 ‘생존경쟁’이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 속에서 국가와 민족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전통에 얽매일 수 없다는 것이 신채호의 판단이었다.
신채호가 새롭게 건설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새로운 학설·사상·관습·제도는 ‘서구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그가 무분별하게 서구화를 받아들이자는 것은 아니었다. 신채호는 서구화를 받아들임에 조건을 제시했다. 그것은 「국수(國粹)」(『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10. 1. 13)라는 글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는 여기서 “만일(萬一) 국수(國粹)를 파괴(破壞)하고 법국[法國(프랑스)]의 문명(文明)을 수입(輸入)하면 시(是)는 자국인(自國人)을 구(驅)하여 법국노[法國(프랑스)奴]가 되게 함이오 국수(國粹)를 파괴(破壞)하고 덕국[德國(독일)]의 문명(文明)을 수입(輸入)하면 시(是)는 자국인(自國人)을 구(驅)하여 덕국노[德國(독일)奴]가 되게 함이라. 고(故)로 외국문명(外國文明)을 수입(輸入)하려는 자(者)가 위선(爲先) 국수(國粹) 이자(二字)를 삼복(三復)할지어”라고 하여, 국수를 파괴하지 않는 방향에서 서구의 제도와 사상을 도입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는 담총의 다른 글에서도 찾아진다. 「삼국이후(三國以後)의 한국(韓國)은」(『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2. 22)에서 그는 “삼국이후(三國以後)의 한국(韓國)은 기국성(其國性)이 어찌 여사(如斯)히 약(弱)한지 정치상(政治上)·문화상(文化上)에 모두 타(他)의 정복(征服)하는 바 되고 종교상(宗敎上)까지 타(他)의 정복(征服)을 당(當)하여 불교(佛敎)가 입(入)함에 한국적(韓國的) 불교(佛敎)가 되지 못하고 불교적(佛敎的) 한국(韓國)이 되며, 유교(儒敎)가 입(入)함에 한국적(韓國的) 유교(儒敎)가 되지 못하고 유교적(儒敎的) 한(韓)국이 되어 해(害)만 유(有)하고 익(益)은 무(無)하였거늘, 여금(如今) 천주교(天主敎)·기독교(基督敎)가 입(入)함에도 역연(亦然)할 여(慮)가 유(有)하니 비부(悲夫)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볼 때, 신채호는 서구의 신문물을 받아들여 새롭게 건설하고자 하였으나, 거기에는 한국적 주체성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국수가 중심이 되고 그것을 훼손하지 않는 방향에서 서구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담총에 실려 있는 몇 편의 글을 가지고 신채호의 현실인식과 극복방안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살펴보았다. 담총에는 이상의 글 외에도 많은 짤막한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역사인식의 한 단면을 살펴 볼 수 있는 글로는 「로이십사[路易十四(루이 14세)]는 법국[法國(프랑스)]의 효군(梟君)이라」(『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2. 10), 「국(國)사의 일사(逸事)」(『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2. 15), 「단(斷)발」(『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2. 21), 「삼국이후(三國以後)의 한국(韓國)은」(『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2. 22), 「여(余)가 왕년(往年)에 일사학선생(一史學先生)을 과(過)하니」(『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10. 1. 5), 「양국사학(兩國史學)의 반비례(反比例)」(『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10), 역사인식 외에 영웅관에 대해 언급한 글들로는 「위인(偉人)의 두각(頭角)」(『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1. 28), 「철인(哲人)의 면목(面目)」(『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1. 30), 「강감찬(姜邯贊)과 가부이[加富爾(카보우르)」(『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2. 14), 「동양영웅아(東洋英雄兒)의 결점(缺點)」(『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10. 1. 1), 「연개소문(淵蓋蘇文)」·「김준(金俊)」(『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10. 1. 21), 「대영웅(大英雄)·소영웅(小英雄)」(『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10. 2. 2), 「종교가(宗敎家)의 영웅(英雄)」(『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10. 2. 16) 등이 있다. 신채호의 교육관을 살펴 볼 수 있는 글들로 「내가 향곡(鄕谷)에 구경(?景)하니」(『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1. 20), 「옛적에 일소아(一小兒)가 유(有)하니」(『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1. 21), 「유(柳)수운(雲) 한석봉(韓石蜂)」(『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1. 26), 「촌여(村閭)의 인(人)이 항상(恒常) 소아(小兒)를 조속(操束)하여」(『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2. 1), 「노예공부(奴隸工夫)」·「협잡교육(挾雜敎育)」(『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2. 3), 「여(余)가 향일(向日)에 일독서실(一讀書室)을 과(過)하다가」(『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2. 24) 등을 들 수 있다.
3. 무기명 논설·사론의 검토
이번 『단재 신채호 전집』을 발간함에 있어 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이하 편찬위원회)를 구성하여 운영하여 왔다. 편찬위원회는 한국근현대사 전문가와 신채호를 전문적으로 전공하는 학자들로 구성하였다. 편찬위원회를 만든 이유는 이번 전집에 새로운 자료들을 발굴하여 수록하기 위해서였다. 이와 더불어 앞서 지적한 것처럼 기존 전집에는 신채호의 작품이 아닌 경우가 수록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것을 판단하는 데에 있어 신중을 기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논설 및 사론 같은 경우에는 대부분이 무기명으로 되어 있어 각각의 그것이 신채호의 글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데에 있어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편찬위원회를 대위원회와 소위원회로 나누고, 소위원회에서 무기명 논설 및 사론에 대해 검토 작업을 하였다.
편찬 소위원회에서는 기존 전집에 수록되어 있는 논설 및 사론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에 대해 인식의 궤를 같이하였다. 소위원회에서는 기존 전집에 수록되어 있는 논설 및 사론 가운데 어떤 것을 제외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견과 어떤 것을 제외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존 전집 가운데 어떤 것을 넣을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기존 전집에는 분명한 문제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것을 부정하는 상태에서 출발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이에 소위원회에서는 기존 전집 가운데 신채호의 작품이 아닌 것부터 분류하기 시작하였다.
「역사에 대한 관견 이측」, 「소회일폭으로 보고동포」, 「이십세기 신동국지영웅」은 신채호의 작품이 아닌 것으로 판단했다. 「역사에 대한 관견 이측」은 『대동제국사서언』, 『조선상고문화사』와 비슷한 역사인식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한매일신보사에서 주필로 근무하던 신채호가 그것을 ‘기서’의 형태로 글을 수록할 이유는 없었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기서’라는 이유로 신채호의 작품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으며, 필명도 유사한 측면이 있다는 견해가 나왔다. 하지만 ‘기서’는 독자 투고이기 때문에 신채호가 투고까지 하면서 신문사에 글을 실을 이유는 없어 보이며, 그와 비슷한 필명은 다른 데에서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위 세 작품은 신채호의 작품이 아닌 것으로 결정하였다.
「서호문답」, 「국민·대한 양마두상 객일봉」도 신채호의 작품이 아닌 것으로 편찬 소위원회에서는 결정하였다. 「서호문답」의 서호는 김규식의 호로 생각되며, 거기에서 그려지는 영웅관은 신채호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이 소위원회의 견해였다. 그리고 「서호문답」에는 일본을 찬사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것은 신채호의 일본관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국민·대한 양마두상 객일봉」에는 베델을 옹호하는 내용이 보이고 있기 때문에 양기탁의 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이상 5개의 글은 신채호의 그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 소위원회의 판단이었다. 소위원회에서는 이들 작품을 이번 새로운 전집에서는 수록하지 말자는 견해도 나왔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 소위원들 전체의 견해였다. 비록 소위원들이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여기에 참여하지 못한 또 다른 전문가들의 주장과 의견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대한신민회취지서」와 「고락유수」는 삭제하기로 하였다. 「대한신민회취지서」는 안창호의 작품이 분명하며, 「고락유수」는 『시천교월보』에 수록되었다고 하는데 『시천교월보』에는 그러한 글이 찾아지지 않는다. 그리고 신채호가 친일단체의 잡지인 『시천교월보』에 글을 기고할 일은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이십세기 신국민」, 「만주와 일본」, 「만주문제의 취하여 재론함」, 「청년학우회취지서」,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등은 신채호의 작품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가 나왔다. 이에 대해 「이십세기 신국민」은 내용상 약간의 차이가 보이지만 양계초의 「신민설」을 번역한 것이며, 「만주와 일본」, 「만주문제의 취하여 재론함」은 동일한 저자로서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청년학우회취지서」에 대해 국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최남선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는 의견이 제출되었는데, 『경부신백우』에 의하면 신채호가 작성했다는 기록이 보이기 때문에 이 또한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는 견해가 나왔다. 이상 4개의 글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기로 소위원회에서 결정하였다.
나머지 논설 및 사론에 대해서는 신채호의 글이라고 소위원회에서 판단하였다. 예컨대, 「동양이태리(이탈리아)」에는 「독사신론」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있다는 점, 「구서간행론」, 「서적계의 일평」, 「구서모집의 필요」는 내용상 서로 비슷할 뿐만 아니라 신채호의 문체와 사상이 일치하였다. 「국문연구회 위원제씨에게 권고함」과 「국한문의 경중」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담총에서 보이는 내용과 문체가 흡사하였다. 이처럼 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에서는 신채호의 논설 및 사론을 나름대로 검토하여 기명, 무기명-인정, 무기명-추정으로 구분하여 수록하기로 하였다. 아울러 한 가지 더 추가할 것은 「성토문」과 「조선혁명선언」은 독립운동편에 수록하기로 하였다는 점이다. 이 두 작품은 기존 전집에는 논설 및 사론에 수록되어 있었으나, 그 성격상 독립운동편에 수록해야 한다는 것이 편찬위원들의 판단이었다.
제7권 문학
1. 단재(신채호)의 글쓰기와 문학
단재 신채호를 이야기할 때 그의 앞에는 다양한 수식어가 온다. 언론인, 애국계몽가, 독립운동가, 민족주의자, 역사학자, 문인, 무정부주의자 등이 그러한 것이다. 그는 문사철을 겸한 전통적 문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항일투쟁에 참여한 실천적 지성인이다. 그는 애국계몽기 언론활동을 통해서 계몽운동을 펴는가 하면, 일제 강점기 무력투쟁을 선도하는 등 우리 근대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분이다. 이제까지 그에 대해서는 다양하게 조명되어 왔다. 나는 여기에서 그의 다양한 활동 가운데 문인 신채호, 신채호의 문학에 대해 언급하려고 한다.
단재(신채호)가 문인으로 지칭된 것은 이미 당대에도 그러하였다. 단재(신채호)는 계몽기에 『을지문덕』을 창작하고, 『이순신전』, 『최도통전』을 써서 『대한매일신보』에 발표하기도 했다. 안자산(자산 안확)은 『조선문학사』에서 “무애생의 명이 강호에 선전하야 문예가 혁혁한 자는 신채호”라고 하여 높이 평가하였다[안자산(자산 안확), 『조선문학사』, 한일서점, 1922, 124~125쪽]. 김태준은 단재(신채호)의 『을지문덕』, 『최도통전』 등을 들어 “역사소설을 지어 신생면을 개척한 것도 씨의 독창에서 난 것이며, 융성한 정치관념과 국가관념을 반영한 시대적 산물”이라고 평가하였으며(김태준, 『조선소설사』, 『한국문학사연구총서』 3, 삼문사, 1982, 441쪽), 임화는 그의 작품들을 『정치소설』에 포함시켜 논의하였다(임화, 「신문학의 태생」(6), 『한국문학사연구총서』 1, 삼문사, 1982, 510쪽). 이것들은 신채호의 애국전기물을 대상으로 문채 및 작품의 성격을 논의한 언급들이다. 단재(신채호)에 대한 당대의 문학적 평가는 애국계몽기, 주로 역사전기물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단재(신채호)는 일제에 의한 강제적인 병합조약(강제병탄, 1910)이 이뤄지기 직전 중국으로 갔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블라디보스토크·상해·북경 등지에 머물면서 독립운동과 역사연구에 몰두한다. 그 시기 그는 적지 않은 문학작품들을 창작하였다. 그러나 그의 문학은 발표 지면을 얻지 못했고, 상당수가 원고 상태로 남아 있었다. 단재(신채호)는 1928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36년 여순 감옥에서 옥사하게 된다. 그의 사후 상당수 유고는 떠돌게 된다. 단재(신채호)의 문학이 다시 조명을 받게 된 것은 그의 문학유고가 발견되어 세상에 공표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단재(신채호)의 문학, 특히 그의 유고들이 어떻게 빛을 보게 되었는지, 그리고 단재(신채호)의 전집에 포함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단재(신채호)의 문학 전모와 전집 문학편의 구성에 대해 언급할 것이다.
2. 단재(신채호)의 창작유고
단재(신채호)가 여순 감옥에서 옥사한 직후 그의 유고 일부가 공개된다. 1936년 4월 『조광』에서는 단재(신채호)추모특집을 마련한다. 거기에 「고려영(高麗營)」, 「추야술회(秋夜述懷)」, 「금강산(金剛山) 시조(時調)」 등의 유고와 더불어 단재(신채호)가 홍벽초(벽초 홍명희)에게 보낸 서신이 소개된다. 당시 단재(신채호)가 역사연구뿐만 아니라 문학 유고도 남겼음을 다른 사람들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외에 「대가야국천국고(大伽倻國遷國考)」, 「정인홍공략전(鄭仁弘公略傳)」 등은 전혀 미발표된 자(者)이요, 그의 심박(深博)한 고징(考徵)과 예리한 변절(辯折)은 동방고사(東邦古史)에 관하여 반드시 만인미발(萬人未發)의 창견(創見)을 이룬 바 더욱 있겠는데, 이제 그것이 고인(故人)과 함께 두터이 지하에 묻히니 애(愛)하다[안재홍, 「오호 단재를 곡함」,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별집) 형설출판사, 1977, 378쪽].
안재홍은 단재(신채호)에게 「대가야국천국고(大伽倻國遷國考)」, 「정인홍공략전(鄭仁弘公略傳)」 등의 원고가 있었다고 하였다. 서세충 역시 미간된 책으로 이 두 저술을 들고 있다. 그리고 이윤재에 따르면 『조선사통론』, 『문화편』, 『사상변천편』, 『강역고』, 『인물고』 등 다섯 책의 원고가 있었다고 한다.
선생의 입옥 후에 그 장서 전부가 천진(天津) 모(某)(박용태(朴龍泰) : 편집자) 씨(氏)에게 임치되어 있다고 하니 그 원고도 아마 그 속에 있을 것 같이 생각된다[이윤재, 「북경시대의 단재」,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하) 형설출판사, 1977, 481~482쪽].
이윤재는 단재(신채호)의 다섯 권 저술이 “천진 모씨”에게 있을 것으로 추정했고, 편집자는 “천진 모씨”를 “박용태”로 설명했다. 이윤재의 추정이나 편집자의 지적은 상당한 일리가 있다. 그것은 단재(신채호)가 일경에 의해 체포된 이후 「만리장성이 뉘 것이냐」(1932.12.9~14)가 박용태의 이름으로 발표된 사실로 보아서도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단재(신채호)의 글은 그가 감옥에 들어간 이후 박용태가 보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단재(신채호)의 사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38년 12월 2일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후 원고의 행방은 자세하지 않다. 한편 단재(신채호)의 옥사(1936년) 이후 그의 유고들에 대한 발간 계획은 꾸준히 있어 왔다.
1942년 이때를 전후하여 한용운·박광·신백우·최범술 제씨가 『단재선생유고집』의 간행을 추진하였으나 일제의 감시로 추진되지 못함[「년보」,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하) 형설출판사, 1977, 505쪽].
1946년 중국에 신채호학사 설립. 중국인으로서는 세계사 대표 이석증, 중국학전관 대표 양가락, 상해 생물학연구소 대표 주설 등과, 한국인으로서는 정화암?유자명 제씨가 상호협력하여 선생의 유고를 한문과 영문으로 출간할 것을 계획함(「년보」,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하) 형설출판사, 1977, 506쪽).
유고집의 발간은 1942년 일본 제국주의의 감시 하에서는 성립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단재(신채호)는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1936년 여순 감옥에서 옥사했고, 또한 그의 글에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 비판하고 항거하는 글이 많았기 때문이다. 한편 1946년 4월 상해에서 중국인 이석증을 비롯하여 한국인 정화암?유자명 등은 신채호학사를 설립하고 유고집 발간을 기획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발기문에 “한평생을 민족해방과 민족문학 확립발전에 헌신(「申采浩學社 上海에 設立」, 『동아일보』, 1946.4.9.)”이라는 구문이 있는데, 그의 문학유고가 적지 않았음을 엿보게 한다. 그러나 이 역시 중국의 복잡한 상황과 해방 후 남북의 이데올로기 대립 등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로 실현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유고는 잊혀졌다. 그러던 것이 1960년대 북한과 1970년대 남한에서 빛을 보게 되었다.
3. 『룡과 룡의 대격전』의 탄생
신채호의 유고는 1964년부터 1965년에 『조선문학』과 『문학신문』에 게재되기에 이른다. 먼저 김하명의 해설(『조선문학』 204, 1964.8.)과 더불어 「룡과 룡의 대격전」이 소개되고, 이후 주용걸의 해설(「탁월한 작가 신채호 문학에 대하여?최근에 발굴된 그의 창작 유고를 중심으로」, 『문학신문』, 1964.10.20.)과 함께 「꿈하늘」이 소개된다. 이 글로 보아 당시 신채호의 창작유고가 발견되어 소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주용걸은 “신채호에게는 적지 않은 시조들과 약간의 자유시, 한시들도 있다. 예컨대 「새벽의 별」, 「고려영』, 「큰 바람」, 「감회」, 「꿈에 금강산에 놀고」, 「청루수」, 「나비를 보고」 등 시편들엔 조국 멀리 떠난 애국지사의 절절한 심정이며, 이국땅에서 겪게 되는 각양한 정신적 체험, 애국의 정서가 소용돌이치고 있다(주용걸, 「탁월한 작가 신채호의 문학에 대하여-최근에 발굴된 그의 창작 유고를 중심으로」, 『문학신문』, 1964.10.20, 3쪽)”라고 진술하였다.
「꿈하늘」, 「룡과 룡의 대격전」 외에도 당시 [국립중앙도서관 민족고전부]의 이름으로 「금전?철포?철추」, 「선언」, 「리해」, 「정육과 애국」 등의 수필과 「매암의 노래」, 「너의 것」, 「61일 계단의 회고」, 「나비를 보고」, 「새벽의 별」, 「고려영」, 「임술년 가을에 읊노라」, 「계해년 10월 초2일에」 등의 시?시조가 소개되었다. 그리고 북한은 이러한 작품들과 미발표 유고들을 한데 묶어 1966년 『룡과 룡의 대격전』이라는 유고선집을 발간하였다. 김병민에 따르면, 단재(신채호)의 유고는 1962년부터 북한의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정리하였다 한다.
중국에 사는 한 유지 인사는 북경에서 열린 학술논문발표회에서 단재(신채호) 선생의 유고는 광복 후 중국주재 조선대사관을 거쳐 조선민주주의 공화국에 전해졌다고 피력한 바 있다. 그 후 단재(신채호) 선생의 유고는 1962년대 초 평양의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는데, 평양의 학자들의 말씀에 의하면 김책공업대학에 있는 한 선생이 국립중앙도서관 서고에 들어갔다가 우연한 기회에 큰 주머니 속에 넣어져 있는 단재(신채호) 선생의 유고를 발견했다고 한다. 하여 즉각 학계의 중시를 일으켰던바 김일성종합대학 어문연구소의 주용걸 선생, 언어문학학부 안함광 교수, 그리고 국립중앙도서관의 관계 일꾼들이 유고정리 사업에 착수했다고 한다.
신채호의 유고가 발견된 이후 1966년 2월 국립중앙도서관 민족고전부에서는 문학유고들만을 선택하여 윤색·삭제·편집을 거쳐 『용과 용의 대격전』이란 책명으로 세상에 내놓았다(김병민 편, 『신채호문학유고선집』, 연변대학출판사, 1994, 2~3쪽).
『룡과 룡의 대격전』(조선문학예술총동맹출판사, 1966)은 당시 북한에 있는 단재(신채호)의 문학유고들을 정리하여 펴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으로 인해 단재(신채호)는 역사학자뿐만 아니라 뛰어난 문학인으로 새롭게 조명된다. 그 책에는 소설과 수필, 시를 비롯하여 서간이 실려 있다.
「룡과 룡의 대격전」, 「꿈 하늘」, 「백세 로승의 미인담」, 「일목대왕의 철퇴」, 「일이승」, 「류화전」, 「리괄」, 「박상희」, 「○○○부원군으로 견자」, 「철마 코를 내려치다」, 「구미호와 오제」, 「선언」, 「금전·철포·저주」, 「도덕」, 「정육과 애국」, 「리해」, 「문예계청년에게 참고를 구함」, 「실패자의 신성」, 「인도주의의 가애」, 「사상가의 노력을 요구하는 때」, 「차라리 괴물을 취하리라」, 「명과 리와 진의 삼인」, 「지기를 위하여 죽음」, 「지동설의 효력」, 「수양은 탁계부터」, 「위학문의 폐해」, 「소년의 희생」, 「신선의 두를 참하라」, 「대흑호의 일석담」, 「8월 29일 연초」, 「너의 것」, 「매암의 노래」, 「새벽의 별」, 「1월 28일」, 「61일 계단의 회고」, 「나비를 보고」, 「고려영」, 「현량사 불상을 보고」, 「임술년 가을밤에」, 「고향이 그리워」, 「계해년 10월 초이튿날」, 「우리 형님 가신 날에」, 「김연성을 꿈에 보고」, 「무제」, 「리 수상에게 도서 열람을 요청하는 편지」, 「전훈 노인에게 준 편지」, 「극웅에게」, 「한기악씨에게」(『룡과 룡의 대격전』, 조선예술총동맹출판사, 1966, 4~5쪽).
『룡과 룡의 대격전』은 말로만 떠돌던 신채호 유고의 실체를 확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문학계의 빈 공백을 채울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안함광 등이 신채호의 유고를 정리한 것은 김병민의 언급처럼 신채호 연구에 획기적인 의의가 부여된다고 할 수 있다. 유고의 발견은 언론인 또는 역사학자로 알려졌던 신채호가 끊임없이 문학창작을 한 문인 내지 작가였다는 사실을 확인해준 계기가 되었다. 그의 문학 「꿈하늘」과 「룡과 룡의 대격전」 등은 북한에서 높은 평가와 더불어 문학사적으로 새롭게 논의된다.
4. 『단재신채호전집』의 발간
4. 『단재신채호전집』의 발간
한편 1970년 남한에서는 이선근을 대표로 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가 결성되어 전집 출간 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전집편찬위원회는 1972년 『단재신채호전집』(형설출판사) 상?하권을 출간하였다. 상권은 주로 「조선상고사」 등의 역사물, 하권은 「조선사연구초」를 비롯하여 전기·논설·역사 관련 글을 비롯하여 소설·시가·서문 등을 싣는다. 특히 하권에는 아래의 작품들이 포함되었다.
시: 「구력세제(舊曆歲除) 봉우술회(逢友述懷)」, 「백두산도중(白頭山途中)」, 「증(贈) 기생(妓生) 연옥(蓮玉)」, 「추야술회(秋夜述懷)」, 「증별(贈別) 기당안태국(期堂安泰國)」, 「독사(讀史)」, 「북경우음(北京偶吟)」, 「영오(詠誤)」, 「서분(書憤)」, 「술회(述懷)1」, 「술회(述懷)2」, 「한나라 생각」, 「금강산(金剛山)」, 「고려영(高麗營)」
소설 : 「고락유수(苦樂有數)」, 「익모초(益母草)」
비평: 「조선(朝鮮) 고래(古來)의 문자(文字)와 시가(詩歌)의 변천(變遷)」
서문: 「세계삼괴물(世界三怪物) 서(序)」, 「몽견제갈량(夢見諸葛亮) 서(序)」, 「단기고사중간 서」.
먼저 하권에 산입된 시 작품을 보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작품들은 크게 작가가 생전에 발표한 것(가)과 단재(신채호)의 옥사 직후 주변 사람들에 의해 발표된 것(나), 그리고 미발표유고로 있다가 단재전집에 포함된 것(다)으로 분류할 수 있다. (가)의 경우는 「서분(書憤)」(『보전친목회보(普專親睦會報)-친목(親睦)』, 1907. 10. 15.), 「구력세제(舊曆歲除) 봉우술회(逢友述懷)」(『대한매일신보』, 1910. 2. 13.)와 「꿈에 금강산을 보고」(『독립신문』, 1923. 11. 10.)를 들 수 있다. 마지막 작품은 『조광』(1936. 4.)에 「금강산」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오기도 했는데, 심훈의 글에 “그 당시 그는 42, 3세의 장년이었는데, 원체 문명을 높이 들었을 뿐 아니라 [금강산 단풍 구경보다도 몽고 사막풍에 흉금을 펼치고 싶다][심훈, 「단재와 우당」,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별집), 형설출판사, 1977, 411쪽]”라고 언급되었다. 단재(신채호)가 43세 되던 때는 1922년이며, 『독립신문』에 발표된 것은 1923년의 일이다. 그리고 (나)의 경우 「영오(詠誤)」(변영만), 「추억의 실루에트」(『중앙』, 1936.6에 소개), 「추야술회(秋夜述懷)」(1922년 창작되어 1936년 4월 『조광』에 소개), 「고려영」(『조광』, 1936.4) 등이 유고로 존재하다가 옥사 직후에 소개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백두산도중(白頭山途中)」, 「증(贈) 기생(妓生) 연옥(蓮玉)」, 「증별(贈別) 기당안태국(期堂安泰國)」, 「독사(讀史)」, 「북경우음(北京偶吟)」, 「술회(述懷)1」, 「술회(述懷)2」, 「한나라 생각」 등은 유고로 존재하다가 전집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전집 하권에 소개된 시들 가운데 『룡과 룡의 대격전』에도 실린 것은 「고려영」과 「추야술회」(북한 선집에는 「임술년 가을밤에」) 2편뿐이다. 그렇다면 북한의 유고와는 다른 유고를 남한에서도 갖고 있었다는 말인가?
일제의 폭압 아래서 고 신백우 선생 같은 분은… 단재(신채호) 선생의 기간 미간 유고를 모집하여 집대성 발간하고자 온갖 심혈을 기울였었다[이선근, 「우리 민족사관은 누가 확립하였나」,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하) 형설출판사, 1977, 14쪽].
위의 글은 편찬위 대표였던 이선근의 [간행사]의 일부분이다. 그에 따르면, 신백우가 단재(신채호)의 유고를 모집하여 갖고 있다가 그것을 아들인 신범식에게 넘겨주었으며, 신범식의 지원으로 전집을 간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실상 이선근과 신백우는 1950년대 이미 [단재(신채호)유고출판회]에 참여했다. 1954년 10월 [단재(신채호)유고출판회]가 조직되었는데, 당시 김창숙?변영만?이선근 등 고문 6명, 신백우?이정규?장도빈 등 편찬위원 13명, 변영로?신수범?정화암 등 상무위원 9명, 감사 이을규 외 1인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출판회에 특별히 42년과 46년에 각각 단재(신채호)의 유고출간을 계획했던 신백우와 정화암, 그리고 변영로가 눈에 띈다. 변영로는 「국수주의의 항성인 단재 신채호 선생」이라는 글에서 단재(신채호)가 국시(國詩), 동사고(東史考) 등 저작에 여념이 없었단 말을[개정판 전집(별집), 397면] 들었다고 하였다. 그는 단재(신채호)의 [국시]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에 의해 단재(신채호)의 상당수 유고가 확보되어 전집편찬위원회가 구성된 것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이들의 유고 출간사업은 1955년 『을지문덕』 번역판이 나온 이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신백우는 몇 차례 단재(신채호)유고 간행을 위해 힘썼지만 이루지 못하고 1959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던 단재(신채호)의 유고들은 그의 아들인 신범식에게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유고 발간 사업은 1970년에 이선근에 의해 다시 추진된다. 이때 신백우가 지녔던 단재(신채호)의 유고가 다시 전집편찬위원회에 전해진 것이다. 그리하여 1972년 비로소 남한에서도 단재(신채호)의 유고가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전집편찬위원회가 다른 원고도 확보하고 있었음은 전집하에 실린 「홍벽초(벽초 홍명희)에게」라는 서신에도 드러난다. 전집에서 벽초(홍명희)에게 보낸 서신은 총 3개로 이뤄졌는데, 첫 번째 편지는 년도 미상이지만, 9월 5일에 쓴 것으로 확인이 되며, 두 번째 것은 내용상 1924년에 씌어진 것이다. 이 두 편지는 1936년 4월 『조광』지에 실렸던 것이다. 여기에 1930년 단재(신채호)가 옥중에서 쓴 세 번째 편지 일부가 추가되어 실렸다. 이것은 남한에서도 전집편찬위원회가 단재(신채호)의 유고를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게다가 전집편찬위원회에서는 기존에 발간된 잡지·저서 등에서 단재(신채호)의 글을 발굴하여 전집 하권에 실었다. 그것은 소설과 비평, 서문에 걸쳐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소설 「익모초」의 발굴은 그것이 비록 일부로서 불완전하기는 해도 단재(신채호)의 다양한 창작활동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리고 「조선 고래의 문자와 시가의 변천」은 단재(신채호)의 문자관과 시에 대한 이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밖에도 「세계삼괴물(世界三怪物) 서(序)」, 「몽견제갈량(夢見諸葛亮) 서(序)」의 발굴은 그 가치가 충분히 인정된다. 다만 뒤에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고락유수」와 「단기고사중간서」를 단재(신채호)의 전집에 포함시킨 것은 문제가 있다. 그러나 신문·잡지 등을 뒤지고 유고를 수합하여 전집에 산입한 공은 크다 하겠다.
1972년 상·하 2권 발간에 이어 단재신채호전집간행위원회(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에서 바뀐 이름)는 또 다른 여러 편의 단재(신채호) 글을 추가로 발굴하여 1975년 『보유』편을 발간했다. 『보유』편은 논설, 사론?평론, 수상, 소설 등으로 구성되었다. 논설이 16편, 사론?평론이 6편, 수상이 8편, 소설이 9편이다. 여기에는 「꿈하늘」이 마침내 소개가 된다.
이 보유에 편입된 유고 정 자료들은 전서를 편찬할 때 누락된 몇 편의 글과 그 후에 하나씩 모집해둔 글들이다. 마침 만해(한용운) 스님과 경부 신백우 선생 등이 단재유고집을 편찬하고자 준비해 오던 자료보따리가 나와 거기에서 소설 「꿈하늘」[몽천(夢天)]을 비롯한 몇 개의 유고와…(중략)… 특히 최근에 선생의 장남 신수범 씨가 이도(移徒)를 하면서 낡은 세간을 챙기다가 윤세복 씨가 정리해 둔 미간 유고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유화전」을 비롯한 몇 개의 소설과 「선언」을 비롯한 몇 개의 논설이 그것이다(『단재신채호전집』(보유), 형설출판사, 1975, 557~558쪽).
보유편을 편집한 김영호는 자료의 입수경위를 위와 같이 밝혔다. 「꿈하늘」은 신백우로부터, 그리고 「유화전」, 「선언」 및 기타 소설은 윤세복으로부터 구한 것이라는 얘기이다. 그런데 이 작품들은 『룡과 룡의 대격전』에 실렸던 작품들이다. 『룡과 룡의 대격전』에 실린 작품 가운데 전집 보유편에 실린 작품은 「꿈하늘」, 「유화전」, 「구미호와 오제」, 「백세 노승의 미인담」, 「철마 코를 내리치다」, 「일목대왕의 철퇴」, 「박상희」, 「리괄」, 「○○○부원군으로 간 견자」 등의 서사물과 「선언」, 「실패」, 「차라리 괴물을 취하리라」 등 수필 15편이다. 과연 전집간행위원회는 신백우와 윤세복으로부터 자료를 구한 것인가? 왜 『룡과 룡의 대격전』에 실려 있는 작품들을 그들로부터 구했다는 것인가?
이 별집에 수록하고 있는 문품들로 말하면, 첫째 문예류로서, 소설 시 시조 수상 서한 등과 『천고』지에 게재된 문품들인데, 이것은 특히 일본 동경 무장대(武藏大) 도부(徒部) 학(學) 교수가 보관하고 있던 것을 제공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비록 작은 것 같지마는 일본인 학자로서 양심 있는 학문인은 이같이 선생의 문품을 소중히 받드는 것임을 생각하면, 새삼 느꺼운 마음을 금치 못함과 아울러, 그분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이은상, 「간행사」,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별집), 형설출판사, 1977, 3쪽].
1977년 단재신채호전집간행위원회는 다시 개정판을 내기에 이른다. 그리고 거기에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인 이은상의 「간행사」를 실었다. 개정판의 「간행사」에 자료의 수집 경위가 그대로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일본 동경 무장대(武藏大) 도부(徒部) 학(學) 교수가 보관하고 있던 것”이라는 구절이다. 『룡과 룡의 대격전』은 소설과 수상, 시, 시조, 서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구절은 결국 북한에서 발간된 『룡과 룡의 대격전』을 도부(徒部) 학(學) 교수로부터 건네받았다는 말이 된다. 김영호의 신백우?윤세복의 주장은 북한 자료에 대한 논란을 없애기 위한 도회에 불과하다. 전집간행위원회는 도부(徒部) 학(學)으로부터 『룡과 룡의 대격전』을 입수했고, 이것을 전집에 실은 것이다. 궁극적으로 북한에서 발간된 『룡과 룡의 대격전』의 유입은 비록 때늦은 감이 있지만 남한의 전집 발간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룡과 룡의 대격전』은 개정판 단재전집에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보유』편에 빠져있던 「용과 용의 대격전」, 「일이승」을 비롯하여 시, 시조, 한시, 그리고 서신 등이 모두 개정판 『별집』에 포함되게 된다. 그리고 새로이 『대한매일신보』 소재 여러 편의 글을 수록하였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임중빈이 발굴 소개한 「천희당시화(天喜堂詩話)」(『대한매일신보』, 1909.11.9~12.4.)이다. 그것은 전대 시화를 계승하면서도 계몽기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신채호가 견지한 문학관이 여실하게 드러나는 매우 중요하고도 가치 있는 시화이다. 전집간행위원회는 수집할 수 있는 자료들을 최대한 입수하여 실었다. 글 가운데 저자확정이 미처 이뤄지지 못한 채 실린 것들이 있어 문제가 되긴 하지만 그들의 공로는 크다 하겠다.
5. 『신채호문학유고선집』의 출간
1990년대 들어 새로운 단재(신채호)유고선집이 소개되었다. 그것은 김병민의 『신채호문학유고선집』이다. 이 유고집의 중요성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그 하나는 단재(신채호)의 유고를 거의 개변 없이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미 북한에서 나온 『룡과 룡의 대격전』에서도 단재(신채호)의 유고들을 소개하였지만, 이데올로기 및 기타 이유에 따라 편집되거나 삭제, 윤색된 것들이 적지 않다. 그러므로 단재(신채호)의 유고와는 거리가 있다. 물론 이것을 토대로 한 전집 역시 개변을 겪었다. 김병민은 필사해온 것을 바탕으로 원전에 가장 가까운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김주현, 「단재 신채호의 문학과 정전의 문제」, 『현대소설연구』, 현대소설학회, 2007.12.).
다음으로 『룡과 룡의 대격전』에 제시되지 않은 작품들도 선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주용걸의 진술만 보더라도 『룡과 룡의 대격전』이 단재(신채호) 문학 유고의 전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가 소개한 시 작품 가운데 「큰 바람」, 「감회」, 「꿈에 금강산에 놀고」, 「청루수」 등 네 작품은 『룡과 룡의 대격전』에 소개되지 않았다. 여기에서 「꿈에 금강산에 놀고」의 경우 「금강산」으로 『조광』에 소개된 시조가 있어서 그 실상을 확인할 수 있지만, 나머지 3편의 경우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다. 유고 가운데 적지 않은 분량이 소개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다행히 김병민은 『룡과 룡의 대격전』에 소개되지 않은 몇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그것은 아래와 같다.
「단아잡감록(丹兒雜感錄)」, 「조선(朝鮮)의 지사(志士)」, 「아방윤리경(我邦倫理鏡)」, 「고구려삼걸전(高句麗三傑傳) 서문」.
「단아잡감록」의 경우 총 9필로 되어 있다. 그런데 『룡과 룡의 대격전』에서는 제1필 지기 위하여 죽음, 제2필 피의 인과, 제3필 지동설의 효력, 제4필 수양은 탁계부터, 제6필 위학문의 폐해, 제7필 소년의 희생, 제8필 명과 리와 진의 삼인 등 7개의 글을 개별 글로 소개하고, 「제5필 물심양계의 병진」, 「제9필 나의 말일이 곳 지구의 말일」은 빼고 말았다. 그러나 김병민은 이들 작품들을 모두 소개하여 그의 선집을 통해 작품의 전모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나머지 세 작품도 단재(신채호)의 현실 및 역사관, 문학관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의 소개는 의미가 크다.
또한 그는 책의 후미에 신채호의 유고 작품의 목록을 제시하였다. 그 목록 가운데 『룡과 룡의 대격전』 및 그의 유고집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은 아래와 같다.
소설?「건륭황제의 꿈」
시?「도제사언문(悼祭四言文)」
수상?「사상가의 노력을 노력하는 때」, 「태산행기」
사학논저?「역사총론(歷史總論)」, 「강역고(疆域考)」, 「선랑사통론(仙郞史通論)」, 「전설시대사(傳說時代史)」, 「고구려사(高句麗史)」, 「단군강역도만주국(壇君疆域圖滿洲國)」, 「해북열국(海北列國)과 고구려(高句麗)」, 「조선사를 외국인에게 배우지 말지어다」, 중국사관(中國史觀) 방면 논문 3편(김병민 편, 『신채호문학유고선집』, 한국문화사, 1994, 250~252쪽).
이것들은 신채호의 유고 작품 중 아직도 그 내용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다. 김병민에 따르면, 이 작품들은 북한에 유고로 남아 있다. 북한에 있는 유고는 어서 빨리 국내로 들여와 전집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6. 최근 발굴 작품
박정규는 『용파집(龍坡集)』에 실린 용파(龍坡) 신풍구[申豊求(1837~1932)]의 회갑연을 축하하는 시, 독립기념관에 소장된 광무5년(1901)에 지은 오언배율, 그리고 「단재잠(丹齋箴)」을 발굴하여 소개했다(박정규, 「국내에서의 신채호 연보와 쓴 글에 대한 고찰」, 『단재신채호연구의 재조명』, 단재문화예술추진위원회, 2006, 62~67쪽 및 박정규 외 편, 『단재신채호』, 단재문화예술제전추진위원회, 2006, 116쪽). 전집에서 첫 번째 것은 박정규처럼 그 내용을 따라 「용파수연시(龍坡壽宴詩)」로 이름을 붙였으며, 오언배율은 “광무(光武) 오년(五年)(1901) 신축(辛丑) 이월(二月) 칠일(七日) 신채호(申采浩) 배(拜)”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형식에 따라 간단히 「오언배율(五言排律)」이라고 붙였다. 「단재잠」은 [단재 신채호 선생 제23주기 추도식](1959.4.) 자료집에 실린 것으로 4자 14행 56자의 운문 형태를 띠고 있다. 그의 소개는 새로운 자료의 발굴이라는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필자는 이 밖에 신영우의 글속에 포함된 한시와 단재(신채호)가 이화사에게 준 작별시도 중요한 작품으로 생각한다. 전자는 특별히 제목이 없어 임의로 「무제(無題)」로 이름 붙이고, 후자는 “자선이연경시(子鮮離燕京時) 신채호증자선이작별시(申采浩贈子鮮以作別詩)”라는 구절이 있어 편의상 「작별시(作別詩)」로 지칭했다. 전집간행위원회에서는 변영만의 글에 포함된 7언절구를 「영오(詠誤)」라는 이름으로 실었는데, 신영우가 소개한 7언배율은 시에 따로 소개하지 않았다.
고원문물총의전(故園文物總依前) 유아풍류불용선(儒雅風流不用仙)
봉수옹창위특지(峰樹擁蒼爲特地) 현영가백우량천(?永呵白又凉天)
향수월조방성몽(鄕愁越鳥方成夢) 시의오잠정입면(詩意吳蠶正入眠)
음파독총겸화⊙[吟罷讀叢兼話⊙(?+覇)] 한인취미신유연(閒人趣味信悠然)
이 시도 신영우가 [단재작(丹齋作)]으로 분명히 밝히고 있으므로 당연히 단재(신채호) 작품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한 편의 한시가 있다.
부생사십성하사(浮生四十成何事)
빈병상수불잠리(貧病相隨不暫離)
각한수궁산진처(却恨水窮山盡處)
임정가곡역난위(任情歌哭亦難爲)
이 시는 『동아일보』(1936. 2. 27.)에 실린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 신문에서 확인할 수 없었다. 하동호가 발굴하여 『단재신채호와 민족사관』(형설출판사, 1980, 685쪽)에 실었다. 이 시가 있었음은 “[부생사십성하사(浮生四十成何事) 빈병상수불잠리(貧病相隨不暫離)]라는 그의 한시(漢詩) 일구(一句)는 그의 아시(兒時)로부터 잠시도 면치 못한 적빈(赤貧)과 다병(多病)을 자탄(自嘆)한 일구(一句)”라는 원세훈의 추도문에서도 알 수 있다(원세훈, 「단재 신채호」,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 별집, 형설출판사, 1977, 395쪽). 이 시는 “흥경도중작(興京道中作) 갑인(甲寅)”이라는 설명이 있는데, [1914년 흥경(興京) 가는 길에서 쓴 시]라는 말이다. 단재(신채호)는 1914년 단오 때 환인현(桓仁懸)에 있었음을 「무제」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위 내용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3,4행이 「백두산도중」과 거의 같은데, 어떤 연유인지는 불분명하다. 아마도 한 작품을 먼저 짓고 나중에 손을 봐서 다른 작품에 포함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여기서는 해설에서 소개만 하고, 「백두산도중」만 전집에 포함시키기로 하였다. 이 외에도 단재(신채호)의 시는 더 발굴될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정인보가 “시조(時調)에 대하여 간혹 기탁(寄託)함이 있었다 하나 상해 있을 때는 보지 못한 바요, 한시(漢詩)에 있어서는 자못 영롱(玲瓏)?태탕(?蕩)한 경계가 있어서 비록 솔이(率爾)한 저작이라도 사치(辭致)가 다른 사람과 달랐다”(개정판 전집(하), 461쪽)라고 하는 대목이나 정인보의 [국시(國詩)] 운운하는 대목은 단재(신채호) 시(시조, 한시 포함)가 많았음을 의미하지만, 실제 전집에 포함된 시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필자는 최근 『가정잡지』 제2년 제3호(1908년 3월호)에 실린 「익모초」의 제1회 게재분을 찾아냈다. 이 잡지는 현재 연세대 중앙도서관 귀중본실에 있는데, 여기에 소설 「익모초(益母草)」(40~47쪽) 제1회가 실려 있다. 이 작품은 제1회에 저자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제2년 7호(1908. 7.)에는 [신채호]로 분명히 밝혀져 있다. 단재(신채호)전집에는 현재 1908년 7월호에 실린 「익모초(속)」(5회 연재분 추정)만 실려 있다. 이 작품은 최완길을 주인공으로 하여 애국심을 다룬 것으로, 단재(신채호)의 초기 문체 및 소설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 자료로 평가된다. 작품에는 “기자왈”이라 하여 작가의 주장을 사평형식으로 직접 제시하였다. 다만, 『가정잡지』가 1908년 4월~ 6월호가 비어 있고, 또한 8월호 이후가 없는 상태라 작품의 전모를 파악하기 어려운 아쉬움이 있다. 그리고 「장덕진군(張德震君)의 유서(遺書)와 일지서(日誌敍)」도 이번에 발굴되어 소개되는 글이다. 『장덕진전』에 붙인 단재(신채호)의 서문으로 27세의 나이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죽은 장덕진의 전에 부친 글이다.
그리고 이번에 단재(신채호)의 두 편지도 추가하였다. 하나는 4244(1911)년 9월 8일 안창호에게 보낸 한글편지로,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신채호가 미주로 오라는 안창호의 편지를 받았으나 [『권업신문』 발간] 관계로 미주로 가기 어렵다는 뜻을 전한 것이다. 그 다음 편지는 4245(1912)년 11월 1일에 쓰인 한문편지이다. 이 편지에서도 안창호가 단재(신채호)를 미주로 불러들이려 한 대목을 볼 수 있다. 당시 단재(신채호)는 재정과 건강상의 이유로 도산(안창호)의 제의를 거절하였다. 그리고 내용 가운데에는 이준의연회(李儁義捐會) 발기에 관한 내용도 나온다. 이 두 편지는 신용하에 의해 이미 1986년 3월에 『한국학보』에 소개되었다. 그런데 당시 한글 편지는 모두 소개되었으나 한문 편지의 경우 3면 중 마지막만 소개되었다. 이후 『도산안창호전집』에 전체가 영인되어 실렸다.
7. 전집의 편제와 구성
여기에 실린 신채호 문학은 『룡과 룡의 대격전』, 『신채호문학유고선집』, 그리고 『단재전집』 수록 문학과 최근 발굴 작품이다. 단재(신채호)는 계몽기에 『이태리건국3걸전』을 역술하고 『을지문덕』, 『이순신전』, 『최도통전』 등의 역사전기물을 썼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전기물은 제4권 역사편에 이미 수록하였다. 그런 관계로 이 권에서는 주로 순문학적인 작품들을 수록하기로 하였다. 먼저 단재유고선집인 『룡과 룡의 대격전』을 실은 것은 비록 윤색이나 누락 등의 문제가 없지 않으나 단재(신채호)의 유고를 직접 정리하였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충분히 인정되기 때문이다. 북한의 유고를 볼 수 없는 현실에서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김병민의 『신채호문학유고선집』을 그대로 실은 것은 단재(신채호)의 원고에서 가장 손상이 적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전집간행위원회가 발굴하여 『단재전집』에 실은 작품들과 최근 새로이 발굴한 작품들을 실었다.
편제는 시·소설·비평·서신·서로 나누었다. 시 가운데 「무제(無題)」(1896), 「용파수연시(龍坡壽宴詩)」(1897), 「오언배율(五言排律)」(1901), 「서분(書憤)」(1907), 「구력세제(舊曆歲除) 봉우술회(逢友述懷)」(1910), 「백두산도중(白頭山途中)」(1914), 「추야술회(秋夜述懷)」(1922) 등은 작품의 창작 년대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증(贈) 기생(妓生) 연옥(蓮玉)」, 「증별(贈別) 기당안태국(期堂安泰國)」, 「독사(讀史)」, 「북경우음(北京偶吟)」, 「술회(述懷)1」, 「술회(述懷)2」, 「영오(詠誤)」, 「작별시(作別詩)」, 「한나라 생각」, 「단재잠(丹齋箴)」 등은 창작 년대가 미상이다. 순서는 창작 연도순으로 하며, 한시·시·시조 순으로 나열하였다. 그래서 한시는 창작 년대를 알 수 있는 「무제」, 「용파수연시」, 「5언배율」, 「서분(書憤)」, 「구력세제(舊曆歲除) 봉우술회(逢友述懷)」, 「백두산도중(白頭山途中)」, 「추야술회(秋夜述懷)」 등을 순서대로 배치하고 이어 년대 미상의 작품인 「증(贈) 기생(妓生) 연옥(蓮玉)」, 「증별(贈別) 기당안태국(期堂安泰國)」, 「독사(讀史)」, 「북경우음(北京偶吟)」, 「술회(述懷)1」, 「술회(述懷)2」, 「영오(詠誤)」, 「작별시(作別詩)」를 실었다. 여기에서 「무제」, 「5언배율」, 「용파수연시」, 「작별시(作別詩)」, 「단재잠(丹齋箴)」 등은 최근 발굴되어 소개된 것들이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번역을 실었으며, 전집에 실린 작품은 이은상의 번역을 가져왔고, 그밖에 박정규·이충구?김병헌·정우락 제위의 번역을 참조하였다. 이어 일반시 「한나라 생각」과 시조 「금강산」, 마지막으로 운문 형태인 「단재잠」을 실었다.
소설에는 유일하게 「익모초(益母草)」를 실었다. 이번에 발굴된 「익모초」 제1회 발표분을 추가해서 실었다. 비평에는 계몽기 가장 중요한 비평문 중 하나인 「천희당시화(天喜堂詩話)」(『대한매일신보』, 1909. 11. 9.~12. 4.)를 실었다. 1920년대의 중요한 글인 「조선 고래의 문자와 시가의 변천」(『동아일보』, 1924. 1. 1.) 역시 비평문이지만, 전집 제6권 신문 등에 수록된 논설류에 실려 여기에서는 배제했다. 그리고 새로이 발굴된 안창호에게 보낸 서신 2통(1911, 1912)과 「차형혜감(車兄惠鑑)」(1928년경)을 실었다. 특히 한문 서신의 경우 정우락 교수의 번역을 참고하여 실었음을 밝혀둔다. 서문으로는 「세계삼괴물서(世界三怪物序)」(1908. 3.)와 「몽견제갈량(夢見諸葛亮) 서(序)」(1908년 여름)를 비롯하여 이번에 새로 발굴된 「장덕진군(張德震君)의 유서(遺書)와 일지서(日誌敍)」(1925)를 실었다.
그 밖에 기존 전집에 들어 있으면서 제외한 것이 세 작품 있음을 밝힌다. 하나는 「철추가」이며, 또 하나는 「고락유수」, 마지막으로 「단기고사중간서」이다.
박물관(博物館) 도라드러, 창해역사(滄海力士)의 쓰고, 남은 철추(鐵椎), 한번 구경하고나니, 잠겼던 기력(氣力)이 버쩍 나고, 숨었던 사상(思想)이 절로 난다, 더 철추(鐵椎)를 번뜩 들고, 박랑사중(博浪沙中) 드러가서, 진시황(秦始皇)의 타고 앉은 정차(正車)를, 와직근 퉁탕 부시고, 더 폭학(暴虐) 무도(無道)한 자(者)를, 분골쇄신(粉骨碎身)한 후(後)에, 우리 한국(韓國)의 국위국광(國威國光)을, 만고(萬古) 역사상(歷史上)에 빗내며, 자고(自古)로, 회포(懷抱)를 펴지 못하고, 목적(目的)을 달(達)치 못한, 고점리(高漸離) 형가배(荊軻輩)의 천추원혼(千秋怨魂)을, 위로(慰勞)코저(『대한매일신보』, 1910. 3. 25.).
「철추가」는 『대한매일신보』 국한문본과 국문본에 모두 실려 있다. 국한문본에 실린 작품이 전집간행위원회에 의해 발굴되어 개정판 전집에 실렸다. 국한문본에서는 저자가 [후창해(後滄海)]로 소개되어 있다. 후창해란 창해역사의 뜻을 가진 이후 사람이란 말이다. 아마도 단재(신채호)가 『조선상고사』 등에서 철추, 또는 창해역사 등을 언급하였기에 포함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국문본에서 저자는 [강릉이창해]로 되어 있다. 이로 유추하건대, 이씨 성을 가진 강릉 사람으로 보인다.
전집 하권의 [소설]에 포함시킨 「고락유수」 같은 것은 단재(신채호)의 작품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한 여성의 우여곡절의 일생을 그리려는 시도가 담긴 미완성작 「고락유수」가 내용이나 문체로 보아 단재(신채호)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은 제외하고서라도 1913년 3월 『시천교월보』에 실렸다는 것만으로도 그 이유는 충분하다. 1911년 2월 17일 창간되어 1913년 4월 27일 통권 27호로 종간된 『시천교월보』는 친일파 이완용이 창립한 시천교의 기관지였다. 신문의 이런 성격을 단재(신채호)는 몰랐을 리가 없었고 그렇다면 친일파에 대한 증오가 하늘까지 치솟았던 그가 거기에 글을 실었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당시 단재(신채호)는 머나먼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병고에 시달리고 있어서 국내와는 거의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그러므로 「고락유수」는 단재(신채호) 작품에서 빼버리는 것이 마땅하다(최옥산, 「문학자 단재신채호론」, 인하대 박사논문, 2003. 8, 66~67쪽).
최옥산은 여러 가지 정황증거를 통해 「고락(苦樂)이 유수(有數)」(「고락유수(苦樂有數)」의 원제)를 단재(신채호) 작품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말은 일리가 있다. 비록 저자가 [무애생]이라고 명기되어 있을지라도 신채호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세계3괴물서」에서 신채호는 [무애생(生)]이라고 썼지만, [무애생]이 신채호만의 호로 보기 어렵다. 이 작품은 1913년 4월(통권 27호)에 1회 게재되고, 이후 잡지의 폐간으로 게재가 중단되고 말았다.
즉 신채호 명의의 서문은 사실상 이화사의 소작으로 이화사가 광복회 「고시문」의 내용을 변개하여 서문에 넣었던 것으로 헤아려 보는 것이다(조인성, 「한말 단국관계사서의 재검토 - 『신단실기』, 『단기고사』, 『환단고기』를 중심으로」, 『국사관논총』 3, 국사편찬위원회, 1989. 10, 253쪽).
「단기고사 중간서」에는 “임자(1912)년에 내가 안동현(安東縣)에 이르를 때에 지우 이화사가 일권 고사(古史)를 가지고 와서 장차 출간할 뜻으로 내게 서문(序文)을 청하거늘”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단재(신채호)가 1912년에 안동현에 이르렀을 때 「중간서」를 썼다는 말이다. 그런데 신채호는 1911년 12월말부터 1912년 5월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신문의 발간 사업으로 인해 대단히 바빴으며, 그런 그가 안동에 갔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리고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이갑이 보낸 편지 3통[1911(4244). 11. 28, 1912(4245). 1. 29, 1912(4245). 2. 3.]을 보면 그 시기 단재(신채호)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신채호가 1912년 11월 1일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에서 “약소유소수지물(若少有所須之物) 당일관중국(當一觀中國) 차왕내지(次往內地)”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1910년 6월 블라디보스토크에 온 이래 1912년 10월까지 중국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12년 초에 안동에 갔을 가능성은 더욱 없다. 게다가 「중간서」에는 “방술(方術)”, “반만년 역사상”, “중화인”, “중화각지”, “원저 주인공 야발 선생”, “만고불멸” 등 단재(신채호)의 표현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당시 단재(신채호)는 주로 “대동사천재(大東四天載)”, “지나(중국)”, “지나(중국)인” 등의 표현을 썼다. 단재(신채호)는 1916년 「꿈하늘」에서 “단군신조(檀君神祖)께서 교(敎)와 정치(政治)를 세우사 우리의 시조(始祖)가 되시고 강역(疆域)은 남북(南北)이 만리(萬里)가 되며 만대(萬代)에 미쳤사오나 그러나 어찌해 당시(當時)의 기록(記錄)은 신지비사(神志秘詞) 여들짝 밖에 전(傳)치 못하였던가”라고 하여 단군에 관한 기록이 더 이상 없음을 고백하였다. 이후 단재(신채호)의 논저에서 『단기고사』에 대한 언급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도 「단기고사중간서」가 단재(신채호)의 글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그리하여 세 편 모두 이번 전집에서 배제했음을 밝혀둔다.
8. 남은 말
막상 전집을 구성하기 위해 작품을 찾았지만 기존 전집에서 크게 더한 것이 없다. 사실 이번 전집에서는 새롭게 추가해야 할 작품으로 떠오른 것이 몇 가지 있었다. 먼저 북한에 있다는 단재(신채호)의 문학유고들이다. 이미 소개된 것 외에도 보다 많은 문학유고들이 북한에 있을 것으로 보인다. 주용걸·김병민, 그리고 안함광[안함광은 「신채호와 그의 문학」(『조선문학』 210, 1965. 2, 112쪽)에서 “시가 작품 「새벽의 별」·「너의 것」·「고려영」·「매암의 노래」·「청루수」·「나비를 보고」·「본국 홍수」…등이 있다.”라고 했다.]의 진술을 통해 아래와 같은 작품은 북한에 있지만 아직 소개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소설?「건륭황제의 꿈」
시?「도제사언문(悼祭四言文)」, 「큰 바람」, 「감회」, 「청루수」, 「본국홍수」
수상?「사상가의 노력을 노력하는 때」, 「태산행기」.
박정규는 오래전부터 단재(신채호)의 작품 발굴에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는 그 일환으로 『단재신채호시집』을 간행하는 성과를 이룩했다. 그 시집에는 이전에 미처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다. 박정규는 아래 작품을 단재(신채호)의 시로 규정했다.
「고식(姑息)과 시계(『황성신문』, 1907. 2. 11~12), 「독립가」(獨立歌)(『황성신문』, 1907. 2. 16), 「청포곡(聽布穀)」(『황성신문』, 1907. 4. 27), 「만필감흥(漫筆感興)」(『황성신문』, 1907. 5. 11), 「영입귀문관(寧入鬼門關)이언정 물향묵서가(勿向墨西哥)」(『황성신문』, 1907. 6. 12), 「열심(熱心)」(『황성신문』, 1907. 6. 27), 「가절감회(佳節感懷)」(『황성신문』, 1907. 8. 17), 「초혼가(招魂歌)」(『대한매일신보』, 1907. 12. 17), 「독립자유가(獨立自由歌)」(『대한매일신보』, 1908. 1. 1), 「소망」(『소년』, 1910. 8), 「안 잘 시간에 자는 잠들」(『권업신문』, 1912. 5. 26), 「시일」(『권업신문』, 1912. 8. 29).
이 가운데에서 「고식과 시계」, 「청포곡」, 「만필감흥」, 「영입귀문관(寧入鬼門關)이언정 물향묵서가(勿向墨西哥)」, 「열심」, 「가절감회」는 『황성신문』에 실린 운문체 논설이요, 「시일」은 『권업신문』에 실린 논설이다. 박정규는 「환기(喚起) 이천만민(二千萬民)하여 축팔만이천리지독립성(築八萬二千里之獨立城)」에 포함된 가사 「독립가」와 「신년송축」에 포함된 가사 「독립자유가」를 시로 소개했다. 그리고 논설 「영입귀문관(寧入鬼門關_이언정 물향묵서가(勿向墨西哥)」는 전반부만을 시로, 논설 「위국민대한양신문초혼(爲國民大韓兩新聞招魂)」의 후반부를 「초혼가」라는 시로 소개했다. 그는 이 시기 무서명 논설이 단재(신채호)에 의해 집필되었기 때문에 운문체 논설을 단재(신채호)의 시로 소개한 것이다. 「안 잘 시간에 자는 잠들」은 『권업신문』에 [단평]란에 실린 무서명의 산문이다. 이것은 행갈이가 되어 있고, 운문 성격을 띠고 있다. 그는 단재(신채호)를 논설에 삽입 시가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탁월한 시인으로 평가했는데(『단재 신채호』, 136쪽), 그의 주장은 일부 상당한 일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수용에 앞서 보다 확실한 작가 검증을 거칠 필요가 있기에 전집에 싣는 것을 보류하였다.
또한 권오만은 『대한매일신보』 소재 사회등가사를 연구하며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
신채호 자신이 「사회등」 가사를 제작한 경우이다. 신채호는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논설기자로 재직하면서 그의 활동을 논설 집필에만 한정하지는 않았다. …(중략)… 아마도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610여 편의 「사회등」 가사 중 다수의 작품들이 그에 의하여 쓰여졌으리라고 보아 무방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채호는 「사회등」가사의 전개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가라고 할 수 있다(권오만, 『개화기시가연구』, 새문사, 1989, 375쪽).
그는 신채호가 사회등가사의 작가 중 가장 중요한 작가(382쪽)였으므로 단재(신채호)는 사회등가사를 형성, 전개한 문학인으로도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고(380쪽)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신채호의 사회등가사 참여 및 제작 여부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연구 성과가 없는 실정이다. 비록 무서명으로 발표되어 어려움이 있지만, 앞으로 단재(신채호)의 사회등가사 형성 및 제작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연구가 뒤따라야 한다.
전집을 묶었지만 여전히 전집은 미완성이다. 현재로선 이것이 최선이라고 위안을 삼아 보지만 오히려 책임회피와 같은 부끄러움이 가시질 않는다. 언젠가 북한의 유고가 입수되고, 또한 단재(신채호)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어 보다 완전한 전집이 나오길 기대하며 아쉬움을 달랜다.
제8권 독립운동
1
제8권 「독립운동」은 단재 신채호의 독립운동에 관한 국내외 자료를 수집 정리한 것이다. 단재(신채호)는 한국근대사학을 선도한 민족주의 사학자이다. 또한 그는 구국계몽운동과 그를 이은 항일민족운동을 주도한 언론인이며, 저상(沮喪)하던 민족정기를 환기시킨 민족문학을 개창한 문인이다. 그보다도 불요불굴의 민족주의 사상을 견지한 단재(신채호)는 일제 침략으로 유린된 국권의 회복과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강직하고도 철저한 독립운동에 헌신한 순국선열(殉國先烈)이다.
단재(신채호)는 능문명설(能文名說)로 기술된 수많은 독립운동의 문자를 남겼다. 그러나 단재(신채호)는 이와 같은 문필활동 외에도 조국 독립운동의 일선에서 헌신한 애국적 행적을 남겼다. 그러므로 이 ‘독립운동’ 편은 그가 남긴 유문(遺文) 외에 행적을 밝히는데 필요한 자료를 집대성한 것이다. 분류는 제1부에서 ‘국내 구국계몽운동’, 제2부에서 ‘망명, 독립운동’, 제3부에서 ‘3·1운동(1919) 후 독립운동’ 자료로 대분하여 정리하였다.
2
단재(신채호)는 1880년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山內)에서 태어났다. 조실부형하고 8세 때, 고향 청원군 낭성(琅城)으로 이사하여 사간원 정언(正言)을 지낸 조부 신성우(申星雨) 밑에서 전통 한학을 공부하여 14세 무렵에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독파하고, 시문(詩文)이 뛰어나 인근에 문명(文名)을 떨쳤다. 18세 때에는 개화파 재상 신기선(申箕善)의 집에 드나들며 그가 소장한 신·구(新·舊) 서적을 섭렵하고, 그 이듬해 성균관에 입학하여 3년간 관내에서 기숙하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의 학문은 성리학에만 머문 것이 아니고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하고 불교에도 일가견을 이루었다. 나아가 단재(신채호)는 이무렵 대담하게 신사조(新思潮)를 수용하여 개화혁신과 자주독립을 강조하는 근대 계몽사상가로 급부상하였다.
단재(신채호)는 26세 때 회시(會試)에 합격하고 이어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에 임명되었으나, 바로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가 신규식(申圭植)·신백우(申伯雨) 등과 산동학당(山東學堂)을 개설, 신교육운동에 솔선하였다. 얼마 후 『황성신문(皇城新聞)』의 논설 주필로 초빙되어 강렬한 항일논설로 구국운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장지연(張志淵)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논설이 빌미가 되어 그 신문이 폐간되자, 양기탁(梁起鐸)이 주관하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논설 담당 주필로 옮겨 박은식(朴殷植)을 이어 대한제국 최후의 구국언론을 선도하였다.
단재(신채호)는 이 무렵 『대한매일신보』에 새로운 ‘조선사(朝鮮史)’의 정립을 시도한 『독사신론(讀史新論)』을 연재, 민족주의 사학의 단초(端初)를 열었다. 또한 이와 전후하여 전기물 『을지문덕』과 『수군제일위인 이순신』·『이태리건국삼걸전』을 저술, 구국을 위한 애국심 고취에 기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단재(신채호)는 안창호·양기탁·이동녕·박은식·전덕기·이동휘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참여하여 최후의 구국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제1부 ‘국내 구국계몽운동’에는 단재(신채호)의 출신(出身)과 가계를 밝히는 세보(世譜)를 비롯하여 성장, 수학기의 문명(文名)을 실증할 자료와 성균관박사의 서임(敍任)·퇴임(退任),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가정잡지』 등의 주필 편집 논설기자 등을 맡아 항일언론을 폈던 자료들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독립협회와 신민회에 가담하여 구국활동에 솔선한 자료도 망라하였다.
이들 자료는 단재(신채호)가 망명 전 국내에서의 구국 행적을 직·간접적으로 실증하는 것들이다. 그 중에는 흔히 ‘신박사(申博士)’로 호칭되던 단재(신채호)의 성균관박사 칭호 자료도 포함되었다. 26세 때인 1905년 4월 4일 판임관육등(判任官六等)에 서임된 ‘성균관박사’이나, 그 다음날인 4월 5일 의원 면직된 문서와 신문기사들이다. 또한 장지연의 초빙으로 『황성신문』 주필로 항일언론을 펴던 단재(신채호)가 1907년 11월 5일부터는 박은식을 이어 『대한매일신보』의 논설 주필로 옮겨 대한제국 최후의 문필보국(文筆報國)의 항일언론을 보이게 된 것이다. 이 무렵 『대한매일신보』의 발행부수는 국한문판이 8,043부, 한글판이 4,650부, 영문판인 『코리아 데일리 뉴스(Korea Daily news)』가 463부로 총 13,256부가 발매된 것으로 집계된 자료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단재(신채호)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소식을 듣고 신민회의 중심인물이기도 한 양기탁 등과 같이 ‘밤늦게까지 주연을 열고 만세를 불렀다’는 일제 통감부의 정보기록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당시 구국계몽운동시기 자료 중에는 『독립협회약력(獨立協會略曆)』과 같이 단재(신채호)의 활동상이 기술되었으나 자료의 성질상 고도의 사료 비판이 필요한 것도 없지 않다.
3
단재(신채호)는 31세 때인 1910년 국망을 앞두고 신민회 동지와 망명길에 올라, 그해 6월 ‘청도회담(靑島會談)’을 거쳐 국치일 전후 러시아 연해주에 첫 망명지를 정하였다. 단재(신채호)는 그곳에서 『해조신문(海朝新聞)』과 『대동공보(大東共報)』를 계승한 『대양보(大洋報)』를 어렵게 간행하였다. 이어 권업회(勸業會) 창설에 가담, 언론부장으로 『권업신문(勸業新聞)』의 주필을 맡아 국외에서의 민족언론을 주도하였다. 또한 서북간도와 국내를 연계, 의열투쟁을 결행하는 광복회(光復會)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3년 남짓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단재(신채호)는 1913년 여름 신규식(申圭植)의 초청을 받아 북만주를 거쳐 중국 상해(上海)로 활동지를 옮겼다. 그 후 단재(신채호)는 57세를 일기로 일제의 여순 감옥에서 순국할 때까지 망명생활을 상해와 북경을 중심으로, 때로는 고구려와 발해의 고지(故地)인 남만주 서간도(西間島) 지방을 왕래하면서 조국광복투쟁의 최전선에서 헌신하였다.
제2부 ‘망명, 독립운동’에는 단재(신채호)의 연해주 망명과 그곳에서의 『대양보(大洋報)』와 『권업신문(勸業新聞)』의 간행 및 ‘권업회(勸業會)’ 활동 자료를 수록하였다. 또한 중국 상해(上海)와 북경(北京)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관여한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에 관한 자료도 포함시켰다.
단재(신채호)의 망명은 나라의 멸망을 목전에 둔 1910년 2월 국외독립운동기지 선정을 위한 신민회 결정에 따라 안창호·김지간(金志侃)·정영도(鄭英道) 등과 함께 결행되었다. 그러나 망명 경로는 인천에서 해로를 택해 청도(靑島)로 간 안창호 등과 달리 육로로 중국 안동(安東)을 거쳐 청도에서 합류하는 길을 택했다. 그 곳에서 그해 6월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한 청도회담(靑島會談)을 개최하고 청도에 모인 망명객 일행들과 러시아 연해주와 인접한 북만주 밀산(密山)에 새로운 독립운동 기지를 세우고자 블라디보스토크로 향발하였다. 이와 같은 망명과 청도회담에 관한 자료는 희귀하다. 그런 중에서도 정영도의 『증언록』과 이정희의 『아버지 추정 이갑(秋汀 李甲)』 속에 이와 관련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그해 8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단재(신채호)는 권업청년회(勸業靑年會) 등의 지원을 받아 그곳에서 무엇보다 항일언론을 재건하는 『대양보』와 그를 이은 『권업신문』 간행에 전력하였다. 그동안 『해조신문』과 『대동공보』로 대표되던 연해주지역 한인의 항일언론은 1910년 8월 국치(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전후 일제의 요구를 받아들인 러시아 당국에 의하여 폐간되었고, 관련 인물들은 피체되었거나, 러시아 영외로 강제 추방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국치전후 연해주지역 한인이 결속하여 전개한 성명회(聲明會) 활동과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 편성 등의 중요 민족운동은 대변지 없이 추진될 수밖에 없는 애로를 겪었다.
연해주 한인사회는 이주 전후에 따른 원호(元戶)와 여호(餘戶)의 차별과 출신지역에 따른 북도(北道)·서도(西道)·경기(京畿)파의 대립, 그리고 이념에 따른 의병계열과 계몽계열로 얽혀 복잡한 정치 성향을 나타내어 단합된 항일민족운동을 추진하는데 적지 않은 장애요인이 되었다. 더욱이 이와 같은 현실적 조건은 여러 갈래 한인사회의 의견통일과 자금 마련, 러시아 당국으로부터의 발행허가 취득, 일제의 방해공작의 제거 등 어려운 문제와 중첩되어 단합된 항일노선을 걷기에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러나 단재(신채호)의 언론보국(言論報國)을 위한 헌신적 활동은 1911년 6월 18일 『대양보』의 창간으로 결실을 맺었다. 여기에는 연해주 한인들의 단재(신채호)에 대한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주필 이래의 항일언론인으로서의 성명(聲名)과 신뢰가 뒷받침되었다고 할 수 있다.
대양보사의 임원은 사장에 최재형(崔才亨), 총무에 차석보(車錫甫), 러시아어 번역 유진률(兪鎭律), 발행인에 김대규(金大奎), 회계에 김규섭(金奎涉), 서기에 김만식(金晩植), 집금인(集金人)에 이춘식(李春植)으로 짜여 졌고, 단재(신채호)는 신문 내용을 총괄하는 주필을 맡았다. 대외적으로 편집 겸 발행인은 니콜라이 삐토르뷔취 유가이라는 러시아 귀화인 이름을 가진 유진률(兪鎭律)이 맡고 주필에 신채호로 선임되었다. 신문체제는 사설을 비롯하여 국내전보·외국전보·각국통신·최근시사·논설·대한통신·잡보·기서 등의 난을 마련하여 일견 『대동공보』와 유사한 편집체제를 갖추었다. 그보다도 주 2회 발행하는 이 신문은 창간과 더불어 내용이 철저한 항일기사와 민족의 독립언론으로 손색없이 채워져 일제가 가장 질시하는 언론으로 부상한 것이다. 일본영사관 측이 입수하여 일본어로 초역하여 상부에 보고한 자료에 의하면 「강동 재류의 동포에게 고함」이라 제한 창간호 논설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강동 재류의 동포여, 머리들어 두만강 저편을 바라보면 동포가 적(일본)의 먹이(餌)가 되었다. 충신은 이미 죽고 애국지사는 투옥되었다. 신문과 학교는 박해를 받으며 토지 수용법이 나왔고 무명의 잡세가 날로 늘어간다. (중략) 『대양보』는 독자에게 금·은·칼·총과 충신·의사·독립·자유를 주어 적(일본)을 살해하게 할 것이다.(국역)
또한 「대한통신」란에는 국치(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 직후 국내에서 일어난 ‘105인 사건’과 ‘테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사내정의)] 총독 암살사건’, ‘신민회사건’으로 알려진 600여명의 애국자 탄압 사실을 필두로 각지 의병항쟁과 탄압, 불법한 토지 수용령 등의 구체적 사례를 들어 일제 무단통치의 내용을 규탄하고 있다. 게다가 이와 같은 『대양보』의 항일논조는 호를 거듭할수록 더해간다고 보고하고 있다.
1911년 9월 14일자 제13호까지 발행이 확인되는 『대양보』는 실물 그대로 전래된 것이 현재 한 호도 없다. 그러나 이곳에 수록한 일제 측 비밀정보기록 중에는 제2호를 뺀 나머지 호수의 중요 내용을 초역 보고한 것이 남아 있어 그 실상의 일단을 알 수 있게 한다. 현지 일본영사관에서는 이와 같은 『대양보』의 존재를 위태롭게 보고 발행을 불가능하게 하고자 비열한 비밀공작까지 폈다. 그것은 그들이 고용한 고급밀정 엄인섭(嚴仁燮)을 시켜 발행인인 현지 원호 출신의 유진률과 국치(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 후 새로 세력이 커진 북도파 실력자 이종호(李鍾浩) 간에 이간 공작을 교묘히 펴면서, 그 해 9월 17일 『대양보』의 인쇄활자를 절취하게 한 것이다. 『대양보』의 상용 인쇄활자 3분의 2에 해당하는 15,000개의 활자를 몰래 절취하여 앞으로 인쇄를 다시 못하게 만들고 그 책임을 교포간의 알력으로 꾸민 비열한 공작을 편 것이다. 사실 대양보사 측이나 교포사회 측에서는 이와 같은 일제 측 공작을 오랫동안 알 수 없었다. 일제가 저지른 그 진상을 이런 자료로 밝힐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재 우리의 과제 가운데 이와 같은 사실의 규명 못지않게 또한 중요한 것은 어디엔가 전래되고 있을지도 모르는 실물 『대양보』를 조사 수집하여 귀중한 항일언론의 내용을 복원하는 일일 것이다. 더욱이 『대양보』 이전의 『해조신문』과 『대동공보』, 『대양보』 이후의 『권업신문』의 실물들은 결호가 있기는 하지만 러시아 성 페테르부르크 소재 국립도서관에 소장 전래되어 귀중자료로 이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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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신채호)는 연해주 망명지에서 『대양보』 간행 활동과 함께 권업회(勸業會) 창설과 그 기관지 『권업신문(勸業新聞)』 간행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권업회는 단재(신채호)의 『대양보』 발행과 전후하여 개척리(開拓里)라고 부르던 한인 최초의 집단 거주지가 철거 당하고 새로 건설된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1911년 5월 19일 이종호·김익용(金翼鎔)·강택희(姜宅熙)·엄인섭(嚴仁燮)·조창호(趙昌鎬) 등 한인사회 각계파의 인물이 망라된 47인이 발기하였고, 동월 29일 제1회 총회를 개최하여 성립되었다. 이 창립총회에서 회장에는 신망 높던 그곳 한인사회 노야(老爺) 출신의 최재형(崔才亨), 부회장에는 저명한 의병장 출신의 홍범도(洪範圖)가 선임되었고, 단재(신채호)는 김그레고리·엄인섭·조장원·유진률·김유명 등 11인과 함께 평의원에 선임되었다.
국치(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 후 최대의 한인 민족운동기관으로 창립된 권업회는 대외적 활동의 편의를 위하여 ‘권업회’라는 경제주의 단체임을 강조하였고, 러시아 당국의 공인을 신청하여 연흑룡주에서 절대 전제권을 가진 곤닷지 극동총독의 허가까지 얻어 내었다. 그리하여 그해 12월 17일 다시 총회를 개최하여 회칙도 연해주 한인사회가 단합되어 활동할 수 있게 정비하고 그에 따른 임원을 선출, 조국독립의 쟁취를 최고 이념으로 하는 항일민족운동을 각 방면에서 적극적으로 펴갔다. 이 총회에서 권업회를 대표하면서 실질적 운영 책임자가 되는 의사부 의장에는 헤이그 특사로 성명을 떨친 이상설(李相卨), 부의장에는 이종호(李鍾浩)가 선임되고, 단재(신채호)는 신문부에 부장겸 주필에 선임되어 『권업신문』의 창간과 발행을 책임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단재(신채호)는 이상설·이종호·홍범도·이근영(李根英)·조장원(趙璋元)·이민복(李敏馥)·김춘화(金春化) 등과 함께 권업회 발전에 앞장섰다.
특히 단재(신채호)는 일제 공작으로 부득이 정간된 『대양보』를 잇는 『권업신문』 창간에 주력하여 권업회의 대변지로 부상시키는 한편 강력한 항일민족언론으로 부활시켰다. 『권업신문』은 명의상 발행인을 블라디보스토크 시의원인 이반 삐투르즈코프를 내세우고 있으나 단재(신채호)가 신문부장으로 총무 한형권(韓馨權)과 부원 박동원(朴東轅)·이근용(李瑾鎔) 등과 함께 『대양보』를 잇는 항일민족언론을 펴고 있었다. 인쇄활자를 절취당했으므로 부득이 필사 석판인쇄로 주1회 2,000부를 발행하는 신문으로 키워갔다. 특히 제2부 ‘망명, 독립운동’에 수록된 『대양보』와 『권업신문』, 그리고 권업회의 관련 자료는 한·일(한국·일본) 간의 중요자료를 망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 측은 한인의 국외활동 기지로 가장 주목되는 연해주지역에서 『대양보』와 그를 잇는 『권업신문』이 간행되고 항일 독립운동의 중심기관인 권업회 활동을 중시하여 그를 탄압 와해시키고자 현지 총영사관을 비롯한 각종 군관민의 정보기관을 통하여 철저하게 정보를 수집하고 비열한 탄압공작을 폈다. 수록된 자료는 현재 일본 외무성 사료관에 소장되어 있는 관련 자료 중 단재(신채호)와 관련된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한편 한국 측 자료는 국민회 관련 문서 속에 포함된 백원보(白元普)·이강(李剛)·이갑(李甲) 등 현지에서 활동중이던 국민회 계통 인사들이 안창호에게 보낸 서한 속에 담겨 있는 단재(신채호)의 현지 활동상을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는 귀중자료들이다. 안창호는 단재(신채호)와 연해주 망명을 이어 미국에 간 후 단재(신채호)를 미국에 초청하여 『신한민보(新韓民報)』 등 국민회의 항일 언론을 맡기고자 여러 차례 시도하였으나, 단재(신채호)는 응하지 않았다. 단재(신채호)는 연해주에서 활동한 후에도 북만주를 돌아 상해와 북경 등 중국에서 독립운동과 국사연구에 골몰하였다. 단재(신채호)로선 신명을 다 바친 독립운동의 현장이며 더욱이 그가 탐구하는 민족주의 사학의 역사 유적이므로 떠날 수 없었던 것이라 해석된다.
단재(신채호)는 1913년 후반기 이후 상해에서 동제사(同濟社)에 참여, 활동하면서 박달학원(博達學院)에서 청소년 교육에 종사하였다. 이어 1914년에는 윤세복(尹世復)의 초청으로 고구려의 흥기지인 서간도 회인(懷仁)에 가서 대종교에 입교도 하고, 『조선사(朝鮮史)』를 지어 동창학교(東昌學校)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1년 남짓 머문 그곳에서 원근의 광개토대왕비와 장군총 등을 비롯한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지를 답사, 실측하고 백두산에 올라 고대사의 영광을 성찰하기도 하였다. 그 후 북경에 돌아와 『중화보(中華報)』와 『북경일보(北京日報)』 등에 논설을 기고하여 호구(糊口)하면서, 국사연구에 전심하였다. 그런 중에도 조국광복을 위한 망국민의 애국심을 분발시킨 중편 소설 『꿈하늘(夢天)』과 『용과 용의 대격전』등을 비롯한 망명전 국내에서 발표한 『천희당시화(天喜堂詩話)』의 뜻을 이어가는 애국 작품을 적지 않게 창작하였다.
한편 단재(신채호)는 1917년 7월 상해에서 발표된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에 신규식(申圭植)·조성환(曺成煥)·한진(韓震)·박용만(朴容萬)·김성(金成)·박은식(朴殷植)·조소앙(趙素昻)·박기준(朴基駿)·이일(李逸)·신헌민(申獻民)·홍엽(洪燁)·윤세복(尹世復)·신빈(申斌) 등 17인과 함께 연명하였다. 이와 아울러 일제 측 극비의 정보기록에 의하면 단재(신채호)는 연해주 망명 후 부터 그의 말년까지 언제, 어디에서나 국외한인 중 대표적 ‘불령선인(不逞鮮人)’, ‘요시찰인(要視察人)’으로 지목되어 감시와 체포 숙청의 공작이 뒤따르는 신변 위협 속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단재(신채호)도 망명활동 중에는 유맹원(劉孟源)·유병택(劉炳澤)·박철(朴鐵)·윤인원(尹仁元)·신단(申端)·신채호(申彩浩)·신응우(申應雨)·신병희(申秉凞)·신병호(申秉浩) 혹은 중국식 이름인 왕조숭(王兆崇)·왕국금(王國錦) 등의 가명을 써서 신분을 감추기도 하였다. 또한 독립운동 관련의 선언서·취지서·성토문·논설과 그 밖에 많은 시문을 지어 발표하면서도 아예 기명하지 않거나 별명 혹은 단생(丹生)·단재(丹齋)·무애생(無涯生) 외에도 금협산인(金頰山人)·열혈생(熱血生)·검심(劍心)·한놈·적심(赤心)·연시몽인(燕市夢人)·단아(丹兒)·누사(淚史)·진생(震生)·대궁(大弓) 등 여러 필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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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세가 되던 1919년 3·1운동을 맞은 단재(신채호)는 조국독립을 확신하고, 상해에 달려가 임시의정원의 개원 의원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미구에 이승만의 ‘위임통치론’과 여운형·장덕수 등의 ‘도일행적(渡日行跡)’ 등에 반대하여 임시정부를 떠나 『신대한(新大韓)』을 창간, 임시정부의 ‘외원중시’와 ‘대일유화’적 독립운동 노선을 비판하였다.
제3부 ‘3·1운동(1919) 후 독립운동’에는 Ⅰ. 대한민국임시정부, Ⅱ. 북경군사통일회, Ⅲ. 무정부주의운동, Ⅳ. 순국과 그 밖에 시기를 명확히 구별치 못하는 단재(신채호) 행적 관련 자료 등을 수록하였다. 그 중 Ⅰ.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자료에는 서두에 길림(吉林)을 중심으로 하는 만주지역에서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가 주동이 되어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와 국내 서울에서 13도의 국민대표가 선포한 ‘한성정부’ 관련 자료를 수록하였다. 단재(신채호)는 대한독립선언서에 연명된 김교헌(金敎獻)·여준(呂準)·이상룡(李相龍)·박용만(朴容萬) 등 민족대표 39인 중 1인으로 기명되었고, 한성정부에서는 조정구(趙鼎九)·박은식(朴殷植)·현상건(玄尙健) 등 18명으로 구성된 평정관(評政官)에 선임되었다.
단재(신채호)의 상해 임시정부 참여는 1910년대 남북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이회영(李會榮)·조완구(趙琓九) 등과 함께 각지에서 모인 29인의 임시의정원 개원의원의 1인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건립에 적극 참여 활동을 벌였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기사록』은 임시정부 수립경위와 초창기 활동을 밝혀주는 현존하는 귀중 문서이다. ‘대한민국’이란 국호와 연호 그리고 「대한민국임시헌장(大韓民國臨時憲章)」 등을 제정하고 임시정부의 국무원을 구성하는 관제를 마련, 국무총리를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 요인을 선거한 임시의정원의 의사록의 일종이다. 단재(신채호)는 국무총리를 선거할 때 홀로 이승만의 선출을 극력 반대하였다. 이승만은 3·1운동(1919) 직전 미국에서 ‘위임통치안’을 제기한 인물로 독립정신의 흠이 있어 정부수반이 될 수 없다는 논리이다. 결국 단재(신채호)의 이같은 이의제기로 임시의정원 의원 등이 먼저 국무총리 후보를 상호 추천하고 그중에서 3인을 공천후보로 의결하고 최종으로 무기명 단기식 투표에 의하여 선출하는 방식으로 바꾸어 선출하였다. 이때 단재(신채호)가 천거한 박용만(朴容萬)은 3인의 공천후보도 되지 못하고, 이승만은 국무총리에 당선되고 말았다. 단재(신채호)는 크게 불만으로 여겼으나, 그대로 임시의정원 충청도 대표의원으로, 전원위원장도 연임하는 등 임시정부 초창기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해 9월 들어 임시정부 통합운동의 결과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며, 연해주의 노령(러시아령)정부와 상해 정부가 통합하는 방식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재정비하고, 국무총리를 대통령제로 격상하는 헌법개정을 통하여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격상시켰다.
단재(신채호)는 이를 용납할 수 없었고 유화적인 임시정부의 지도노선을 바로잡기 위하여 임시정부를 떠나 그해 10월 28일 『신대한(新大韓)』을 창간, 혈전(血戰)을 강조하며 임시정부의 외세의존 노선을 규탄하였다. 또한 이와 전후하여 여운형(呂運亨)·장덕수(張德秀)·최근우(崔謹愚)·신상완(申尙玩) 등의 ‘도일행적(渡日行蹟)’을 원세훈(元世勳)·한위건(韓偉健) 등과 함께 유호국민대회(留?國民大會)를 개최하여 신랄하게 규탄하였다. 그들의 도일행적은 적인 일본으로부터 참정권이나 자치권을 얻으려 ‘비사후례(卑辭厚禮)’하려는 전통 외교로써 ‘민의위반(民意違反)’ 행위가 되고 또한 임시정부의 활동이 아닌 ‘개인행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임시정부의 대변지 『독립신문』과 맞서 간행한 『신대한』의 창간사를 비롯한 각종 논설과 관련 기사는 이를 실증하고 있다.
한편 단재(신채호)는 이 무렵 남형우(南亨祐)가 단장인 ‘신대한동맹단(新大韓同盟團)’의 부단장으로 각종 일제 측 자료에 부침(浮沈)되고 있다. 단재(신채호)와 뜻이 맞는 정치결사로 여겨지나, 『신대한』과의 관계는 확실히 밝힐 수 없다. 또한 국내에서 안희제(安熙濟)·박광(朴珖)·신백우(申伯雨)·윤병호(尹炳浩)·서세충(徐世忠) 등이 재건한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 단장에 추대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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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신채호)는 1920년에 들어서면서 활동 중심지를 상해에서 다시 북경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박용만(朴容萬)·신숙(申肅)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반대세력과 합작하여 군사통일운동(軍事統一運動)을 일으켜 남북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는 군사 단체의 통합과 혈전(血戰)의 독립전쟁을 강조하는 독립운동 방략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제3부 Ⅱ. ‘북경군사통일운동’ 자료에는 혈전을 준비하는 제2 보합단(普合團)으로 불리는 ‘대한민국군정부(大韓民國軍政府)’를 비롯하여 그를 뒷받침할 통일책진회(統一策進會), 군사통일회(軍事統一會) 관련 자료와 『천고(天鼓)』, 『대동(大同)』 및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 등의 관련 자료를 합록하였다. 그 중 제2 보합단(普合團)은 1920년 4월 북경에서 단재(신채호)를 포함하여 박용만, 고일청(高一淸)·김창숙(金昌淑) 등 반(反)상해임시정부 인사 50여명이 군사통일운동의 실효를 거두기 위하여 조직한 것이다. 상해의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타도하고 혈전과 그를 수행할 국민군 편성을 강조하는 ‘독립전쟁론’을 구현하려는 것으로 여겨진다. 외형상으로 ‘각 단이 합동하여 공진(共進)’한다는 뜻으로 ‘제2 보합단(普合團)’이라 불렀으나, 속으로는 상해 임시정부를 반대한 ‘대한민국군정부(大韓民國軍政府)’를 건립하려 한 것이고, 단재(신채호)는 그 정부의 내무장(內務長)의 직임을 맡았다. 단재(신채호)는 이무렵 이승만의 위임통치론을 규탄하고 나아가 임시정부의 부실하고 철저하지 못한 독립노선을 극렬히 반대하는 ‘성토문(聲討文)’을 지어 김원봉·김창숙·남공선·이극로·장건상 등 54인의 연명으로 발표하여 국내외 독립운동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또한 무력투쟁의 강화를 위하여 박용만·고일청 등과 함께 ‘군사통일촉성회(軍事統一促成會)’를 개최하고 배달무(裵達武)를 서간도에, 남공선(南公善)을 북만주에 파견하여 각지 무력군단의 통합을 촉진하였다.
한편 단재(신채호)는 김정묵(金正?)·박봉래(朴鳳來) 등과 ‘통일책진회’ 결성을 발기하여 ‘첫째 진정한 독립정신 아래 통일적 광복운동을 전개하고, 둘째 정부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여 시국을 수습하고, 셋째 군사 각 단체를 완전히 통일하여 혈전을 꾀한다.’라는 내용의 취지서를 작성 공포하였다. 나아가 단재(신채호)는 ‘군사통일회’를 소집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해체와 혈전을 통한 독립전쟁노선의 강화를 천명하였다.
북경에서 이와 같은 군사통일회의 활동은 상해에서 박은식과 원세훈(元世勳) 등 13인의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의 소집 요구와 만주지역에서 경신참변(간도참변, 1920) 후 독립군 재정비를 추진하던 여준(呂準)·김동삼(金東三)·이상룡(李相龍) 등의 동조를 받아 1923년 정초부터 상해에서 역사적인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국민대표회의의 개최는 나라를 잃고 국내외에 유리하면서도 조국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국민의 대표자가 한데 모이는 총회를 개최하여 그곳에서 독립운동의 이념과 정책 그리고 임시정부 문제 등을 총괄 심의하여 온 국민의 총의로 조국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활성화시키려던 염원이 담긴 것이었다. 1921년 초부터 제기된 국민대표회의는 우여곡절 끝에 1923년 1월 3일부터 프랑스 조계내 민국로(民國路) 침례교회당에서 국내외 61개 단체 대표 124명이 참석하여 개최되었다. 이는 한국 독립운동사상 최대 규모였다.
독립운동계의 각계 명사가 거의 참석한 이 회의는 그해 5월 15일 제63차 회의까지 우여곡절을 겪기는 하였으나,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의제도 다양하게 시국 현안 문제를 비롯하여 독립운동의 이념과 노선, 정책, 혈전의 전술, 그리고 임시정부 문제 등 각 안건을 심도 있게 논의하여 합의 도출한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임시정부 문제를 놓고 개조파(改造派)와 창조파(創造派)로 갈려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였다. 이때 단재(신채호)는 박용만, 신숙 등과 함께 공산주의 계열이 섞인 창조파의 주동자로 활동하였다. 창조파는 개조파의 퇴장 불참 속에 회의를 속개하여 새로 창조하려는 정부의 헌법까지 제정하고, 기존 임시정부의 해체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단재(신채호)도 적극 가담한 이 창조파의 활동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단재(신채호)는 고문에 추대되고 김규식(金奎植)을 수반으로 ‘한정부(韓政府)’ 혹은 ‘조선공화국정부’도 미구에 와해되어 독립운동사상 큰 상처만 남겼다.
한편 단재(신채호)는 이보다 앞선 1921년 초 북경에서 김창숙 등과 함께 순한문의 독립운동 잡지 『천고(天鼓)』를 창간하여 제7호까지 계속하면서 민족단합과 한·중(한국·중국) 공동의 독립운동 이념을 정립하려 하였으며, 혈전(血戰) 강조의 독립운동 전술 천명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이와 전후하여 군사통일과 국민개병의 ‘독립전쟁론’ 구현에 중점을 둔 군사통일회 기관지 『대동주보(大同週報)』를 주간하였다. 표지에 『대동(大同)』이란 표제로 간행된 『대동주보』는 현재 1921년 7월 9일의 제3호를 비롯하여 4·5·6·7호가 전래되어 군사통일운동의 노선을 실증하고 있다.
또한 단재(신채호)는 국민대표회의 소집보다 약간 앞서 의열단(義烈團)의 요청으로 ‘의열단선언(義烈團宣言)’이라고도 하는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을 집필, 독립운동사상 불후의 문자를 남겼다. 단재(신채호)는 망명 전후에 걸쳐 그의 민족주의 독립사상을 이론으로 기술한 명문탁설(名文卓說)도 많지만 그 중에서도 그의 민족주의사상 내지 민족운동의 전술로 백미를 이룬다고 논찬되는 이 「조선혁명선언」은 민족주의운동이 ‘민중(民衆)’의 기반 위에 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폭력(暴力)’만이 그 단계에서 가장 유효 적절한 독립운동의 전술이라는 것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그는 여기서 이른바 ‘내정독립론(內政獨立論)’은 물론이요, 이른바 ‘준비론’, ‘외교호국론(外交護國論)’까지도 철저하게 비판하고, 이어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무이한 무기(武器)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악수하며 부절(不絶)하는 폭력·암살·파괴·폭동으로써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서 인류를 압박하지 못하며 사회로서 사회를 박삭(剝削)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朝鮮)’을 건설할 지니라”라고 하는 ‘민중의 직접 폭력혁명’을 주창하고 있다. 이것이 당시 승승장구하던 일제와의 투쟁에서는 단연코 여러 가지 민족주의운동 가운데서도 돋보이는 혁명이론(革命理論)으로 칭예(稱譽)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한말 이래 단재(신채호)의 ‘신민론(新民論)’을 기반으로 한 ‘독립전쟁론(獨立戰爭論)’을 ‘민중의 직접혁명’ 이론으로 진일보시킨 전술이라고도 할 수 있다.
7
단재(신채호)는 1925년 전후로부터 무정부주의 운동에 경도하기 시작하여 1927년 동방 9개국 대표가 모인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여 그 대회 선언문까지 작성하였다. 또한 그 대회 결의에 따라 실천운동에도 가담 ‘외국위체변조사건(外國爲替變造事件)’에 연루되어 대만 기륭(基隆)항에서 일제 경찰에게 잡혀 공판정에서 10년형을 받고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여순감옥에서 8년여를 복역하다 옥사 순국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단재(신채호)의 무정부주의운동은 어디까지나 ‘조선의 독립’을 전제로 하고, 그를 성취하기 위하여 무정부주의 이념과 전술을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단재(신채호)는 최후 공판 진술에서 ‘우리 동포가 나라를 찾기 위하여 취하는 수단은 모두 정당한 것’이라고 의연하게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Ⅲ. ‘무정부주의운동’에는 단재(신채호)가 조국 독립을 위하여 모험을 간직한 실천운동으로 내외의 이목을 경동하게 하고 자신을 여순감옥에서 옥중 순국으로까지 몰고 가게 한 무정부주의 관련 자료를 수합한 것이다. 특히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의 신문보도 기사를 조사 수집한 것으로 파괴, 살해 등의 의열활동까지 도모하는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의 활동과 ‘외국위체변조사건’의 전말, 투옥 공판의 경위 등을 규명할 자료인 것이다. 그러나 단재(신채호)의 무정부주의 사상의 수용과 내용을 깊이 탐구하기에는 부실한 면이 적지 않다. 앞으로 단재(신채호)의 무정부주의운동 연구의 심화를 위하여 관련 자료의 재보완 발굴이 필요할 것이다. 한편 이와 전후하여 단재(신채호)는 오랜 지기(知己) 홍명희(洪命憙)의 교섭을 받아 국내에서 결성된 신간회에 가담하고 국외활동중임에도 불구하고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그리고 일제 측 자료에는 이와 전후하여 단재(신채호)의 공산주의운동 관련 자료가 더러 보이는데 이는 사실성이 거의 희박한 정보 자료인 것 같다. 철저한 검정과 사료비판이 선행된 후의 해석이 필요할 것이다.
Ⅳ. ‘순국, 기타’에는 10년 형기를 받은 단재(신채호)의 옥중관련 자료와 부인 박자혜(朴慈惠) 여사와 아들 신수범(申秀凡)·신두범(申斗凡) 등 가족관계 자료 및 그밖에 시기와 내용을 정확히 밝힐 수 없는 행적의 단편 자료 등을 함께 수록하였다.
단재(신채호)는 망명 직후부터 속병 등 신병이 끊이지 않았고 생계의 궁핍이 겹쳐 안정된 가정생활을 영위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일제로부터는 수급의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지목되어 생명을 노리는 감시와 피체 위험이 첫 망명지 연해주에서부터 남북만주, 중국대륙 어느 곳에서나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단재(신채호)는 이런 주변 위험을 개의치 않고 어디에서나 한편으로 민족주의사학의 저작과 웅혼한 역사문학을 창작하면서도 철저하고도 강직한 독립운동의 전사로 일관하다 끝내 여순감옥에서 1936년 1월 18일 석방을 1년 8개월 앞두고 뇌일혈로 쓰러져 의식을 잃고 말았다. 급보를 받은 부인 박자혜 여사와 아들 수범(신수범)이 여순 감옥에 도착했을 때에는 그가 그렇게 그리며 걱정하던 처자가 앞에서 오열하는 것도 알아보지 못하고 차가운 시멘트 감방에서 죽은 듯이 누워 운명의 시각만을 남기고 있었다. 민족의 자유와 나라를 찾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친 단재(신채호)는 며칠 후인 2월 21일 아무도 임종을 지키는 이 없는 감방 속에서 한마디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명운을 다하였다. 일제로선 ‘옥중사망’이나 한국의 역사로선 장엄한 ‘순국선열(殉國先烈)’의 전범(典範)인 것이다.
제9권 단재(신채호)론·연보
1. 신채호론
『단재 신채호전집』 제9권은 신채호와 교분이 있던 친구나 후학 등의 기록을 수집하여 ‘신채호론’을 정리한 것이다. 신채호에 관한 인물평을 비롯한 논의는 그의 생존 당대에도 많지는 않았지만, 종종 있었다. 괴벽스러웠던 그의 성품이라든가 그의 학문적 업적 등에 대하여, 주로 교분이 있던 인물들이 신문이나 잡지를 통하여 언급하였던 것이다. 예컨대 신채호가 체포된 뒤 두 차례 면회한 회견기나 부인 회견기 등이 소개되었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에 『조선사연구초』와 『조선사』 등이 연재되자, 신채호의 학설을 비판한 안확이나 홍기문의 글 등이 있었다.
그러나 신채호에 대한 본격적인 소개와 논의는 그가 1936년 2월 21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한 직후에 두드러졌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조사 또는 신채호 관련 기사를 싣고, 두 신문사에서 간행하던 월간잡지였던 『신동아』와 『조광』에서는 그를 기리는 추모특집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조선일보』는 안재홍이 「오호(嗚呼) 단재(신채호)를 곡함」(2월 27일자)을, 홍명희가 「곡단재(신채호)」(2월 28일자)를 조사로 게재하였다. 이어 홍기문이 「신단재(신채호)학설 비판」이라는 제목의 글을 2월 29일자부터 3월 10일자까지 8차례 연재하였던 것이다. 『동아일보』에서는 정인보의 「단재(신채호)와 사학」(2월 26, 28일자)을 실었고, 심훈이 「단재(신채호)와 우당[友堂(윤희구)]」(3월 12, 13일자)을 실은 바 있다. 그리고 『신동아』 4월호는 「신단재(신채호)를 추억함」이라는 제목으로 정인보가 「잔억(殘憶)의 수편(數片)」, 서세충이 「단재(신채호)의 천재와 응체(凝滯) 없는 성격」, 신석우가 「단재(신채호)와 ‘의(矣)’자」, 해객(海客)이라는 필명의 인물이 「단재(신채호)고우를 추억함」이라는 추모의 글을 실었다. 『조광』 4월호에는 「돌아간 신단재(신채호)의 면영(面影)」이라는 표제로 「희(噫)! 불귀의 신단재(신채호)」(편집자)를 싣고, 안재홍의 「신단재(신채호)학설사관(申丹齋學說私觀)」, 이광수의 「탈출도중의 단재(신채호)인상」, 홍명희의 「상해시대의 단재(신채호)」, 이극로의 「서간도시대의 선생」, 이윤재가 「북경시대의 단재(신채호)」, 미망인 박자혜의 「님의 영전에」라는 위령제문을 수록하였다. 신채호의 시와 편지도 소개하였다. 이 두 잡지의 특집이 신채호에 관련된 많은 정보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그 밖에 『삼천리』에 원세훈이, 『중앙』에 변영만이 회고담을 통하여 신채호의 별세를 안타까워하였다. 또 홍기문은 신채호 역사학 전반에 대한 검토를 시도하였다. 사실 신채호의 생애와 관련해서 작은 사실들이 이러한 회고문을 통하여 확인될 수 있었고, 또 신채호라는 인물의 분위기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이 자료집에 수록된 자료는 원칙적으로 신채호와 교분이 있거나, 직접적인 교분이 없더라도 1950년대까지 발표된 기록을 대상으로 삼았다. 신문과 잡지에 발표된 것이 대부분이고, 일부는 회고록 등에서 확인하였다. 대체로 당대 신채호에 대한 논의는 언급한 바와 같이 그의 곧은 성품을 드러내는 일화를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졌고, 그의 학문에 대한 관심이 표명되었다. 그리고 추모시 등도 몇 편 있다. 특히 신채호와 막역한 교분을 지닌 변영만·변영로 형제와 홍명희·홍기문 부자, 안재홍 등이 신채호에 관하여 여러 편의 글을 쓴 바 있어, 크게 참조된다. 그리고 신채호와 관련된 신문기사도 일부 수록하였다.
아래의 표는 『단재 신채호전집』 9권에 수록된 자료의 목록이다.
순번 |
제 목 |
필자 |
발표지 |
발표시기 |
비고 |
1 |
大勢의 回運-新大韓主筆 申采浩先生 |
|
革新公報 50 |
1919.12.25 |
|
2 |
問題 업는 論文을 읽고 |
沈鴻武 |
東亞日報 |
1924.10.20 |
|
3 |
國粹主義의 恒星인 丹齋申采浩 先生 |
卞榮魯 |
開闢 |
1925.8 |
|
4 |
申采浩氏의 吏讀解釋 |
安自山 |
中外日報 |
1928.3.6-8 |
3회 |
5 |
大連監獄에서 申丹齋와 面會 |
李灌鎔 |
朝鮮日報 |
1928.11.8 |
|
6 |
申采浩 夫人 訪問記 |
|
東亞日報 |
1928.12.12,13 |
2회 |
7 |
朝鮮史硏究草를 보고 |
文一平 |
朝鮮日報 |
1929.10.15-16 |
2회 |
8 |
鐵窓中의 申采浩消息 |
|
朝鮮日報 |
1931.6.10 |
|
9 |
申丹齋의 輪廓 |
?篁生 |
朝鮮日報 |
1931.6.12 |
|
10 |
朝鮮의 歷史大家 丹齋 獄中會見記 |
申榮雨 |
朝鮮日報 |
1931.12.19-30 |
7회 |
11 |
申丹齋의 語源考證을 檢討함 |
洪起文 |
朝鮮日報 |
1935.2.5 |
|
12 |
두 번 面會時 全然 意識이 不明-申丹齋, 殞命時 光景 旅順갔든 徐世忠氏 談 |
徐世忠담 |
朝鮮中央日報 |
1936.2.25 |
|
13 |
丹齋와 史學 |
鄭寅普 |
東亞日報 |
1936.2.26,28 |
2회 |
14 |
嗚呼 丹齋를 哭함 |
安在鴻 |
朝鮮日報 |
1936.2.27 |
|
15 |
哭丹齋 |
洪命憙 |
朝鮮日報 |
1936.2.28 |
|
16 |
朝鮮歷史學의 先驅者인 申丹齋學說의 批判 |
洪起文 |
朝鮮日報 |
1936.2.29-3.8 |
8회 |
17 |
哭丹齋 |
李楨 |
東亞日報 |
1936.3.8 |
|
18 |
丹齋와 于堂 |
沈熏 |
東亞日報 |
1936.3.12-13 |
2회 |
19 |
고 단? 신채호 선?을 조상함 |
홍언 |
新韓民報 |
1936.3.26 |
|
20 |
申丹齋와 紅色內衣 |
點下生 |
東亞日報 |
1936.4.12 |
|
21 |
申丹齋와 紅燈街 |
KCS |
東亞日報 |
1936.4.14 |
|
22 |
殘憶의 數片 |
鄭寅普 |
新東亞 |
1936.4 |
|
23 |
丹齋의 天才와 ?滯없는 性格 |
徐世忠 |
新東亞 |
1936.4 |
|
24 |
丹齋와 ‘矣’字 |
申錫雨 |
新東亞 |
1936.4 |
|
25 |
丹齋故友를 追憶함 |
海客 |
新東亞 |
1936.4 |
|
26 |
申丹齋 學說私觀-尊貴한 그의 史學上의 業蹟 |
安在鴻 |
朝光 2-4 |
1936.4 |
|
27 |
脫出途中의 丹齋印象 |
李光洙 |
朝光 2-4 |
1936.4 |
|
28 |
上海時代의 丹齋 |
洪命憙 |
朝光 2-4 |
1936.4 |
|
29 |
西間島時代의 先生 |
李克魯 |
朝光 2-4 |
1936.4 |
|
30 |
北京時代의 丹齋 |
李允宰 |
朝光 2-4 |
1936.4 |
|
31 |
가신 님 丹齋의 靈前에-祭文을 代身하야 哭하는 마음- |
朴慈惠 |
朝光 2-4 |
1936.4 |
|
32 |
丹齋 申采浩 |
元世勳 |
三千里 4 |
1936 |
|
33 |
故 丹齋 申采浩 先生을 追悼함 |
震人 |
民族革命 |
1936.4 |
|
34 |
野人春秋(二) |
金東里 |
朝鮮中央日報 |
1936.5.24 |
|
35 |
실루에트 二三 |
卞榮晩 |
中央 |
1936.6 |
|
36 |
祭申丹齋文 |
卞榮晩 |
山康齋文? |
1957 |
|
37 |
丹齋傳 |
卞榮晩 |
山康齋文? |
1957 |
|
38 |
申采浩學社 上海에 設立 |
|
東亞日報 |
1946.4.9 |
|
39 |
解說에 대신하여-丹齋先生과 나- |
李瑄根 |
花郞道硏究 |
1949 |
|
40 |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光輝의 人 史家 申采浩 선생 |
卞榮魯 |
新天地 |
1954.6 |
|
41 |
丹齋遺稿 出版會 첫 會合 열고 發足 |
|
東亞日報 |
1954.10.30 |
|
42 |
丹齋와 나 |
진록성 |
靑史 1 |
1955 |
|
43 |
申丹齋와 花郞硏究 |
林耕一 |
花郞의 血脈 1 |
1956 |
|
44 |
申采浩論 |
卞榮魯 |
思潮 10 |
1958 |
|
45 |
丹齋先生 逸話片片 |
卞樹州 |
朝鮮日報 |
1960.2.20 |
|
46 |
哭丹齋先生墓 |
李殷相 |
朝鮮日報 |
1960.2.20 |
시 |
47 |
獨立運動秘話 |
金昌淑 |
京鄕新聞 |
1962.3.2 |
|
48 |
-申采浩- 獨立과 自尊의 奇人風志士 |
柳光烈 |
記者半世紀 |
1968 |
|
49 |
아버님 단재 |
신수범 |
나라사랑 3 |
1971 |
|
50 |
悼申丹齋 |
金昌淑 |
心山遺稿 1 |
1973 |
|
51 |
病枕無寐憶 白凡丹齋二公 |
金昌淑 |
心山遺稿 1 |
1973 |
|
52 |
傳記-丹齋 申采浩 略傳 |
申伯雨 |
?夫申伯雨 |
1973 |
|
53 |
丹齋 申采浩 追悼辭 |
申伯雨 |
?夫申伯雨 |
1973 |
|
54 |
雪中 懷 采浩 |
申伯雨 |
?夫申伯雨 |
1973 |
|
55 |
哭 丹齋 |
申伯雨 |
?夫申伯雨 |
1973 |
|
56 |
又 哭 丹齋 |
申伯雨 |
?夫申伯雨 |
1973 |
|
57 |
朝鮮愛國史家申采浩 |
柳子明 |
世界史硏究動態 |
1981.2 |
|
58 |
丹齋 申采浩 先生 |
趙擎韓 |
光州隨筆 23 |
1991 |
|
59 |
申采浩 |
柳子明 |
독립기념관소장본 |
자료번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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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채호와 관련된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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