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리법만 108가지 스페인식 쌀 요리
[김성윤 기자의 세계 맛 기행]
스페인 파에야
김성윤 음식전문기자
입력 2022.03.28 03:00
‘냄비국수’나 ‘대포’처럼 조리도구나 그릇이 음식의 이름으로 굳는 경우가 종종 있다. 스페인 파에야(paella)도 그런 경우다. 파에야는 원래 바닥이 둥글고 납작한 프라이팬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쌀에 해산물이나 육류·채소 등을 넣고 만드는 스페인식 쌀 요리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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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에야는 스페인에서도 지중해를 끼고 있는 발렌시아(Valencia) 지방이 원조로 꼽힌다. 스페인은 유럽에서 이탈리아에 이은 ‘제2의 쌀 생산국’이다. 알부페라라는 커다란 호수가 있는 발렌시아 남부는 벼농사가 발달한 곡창지대다. 파에야는 이 지역 농부들이 토끼고기·달팽이·줄기콩·흰 강낭콩 등 들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식재료로 만들어 먹던 새참이었다.
스페인에는 파에야 종류가 한국의 김치만큼 다양하다. 파에야 조리법만 108가지를 담은 요리책이 있고, 김치처럼 집집마다 사람마다 만드는 법과 넣는 재료가 다르다. 그중 대표랄 수 있는 ‘파에야 발렌시아나’는 토끼고기나 닭고기에 채소가 들어간다. ‘파에야 데 베르두라스’는 채소만 들어가고, ‘파에야 마리네라’는 해산물이, ‘파에야 믹스타’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고기와 해산물이 모두 들어간다.
/조선일보 DB
‘파에야 네그라’는 오징어 먹물을 넣어 쌀을 검게 물들인 것이고, ‘파에야 피데우스’는 쌀 대신 파스타로 만든다.
파에야 종류는 다양하지만 만드는 방법은 비슷하다. 파에야를 불에 올리고 올리브오일을 두른다. 고기나 생선 등 주재료를 볶다가 노릇해지면 피망이나 콩 등 채소를 더하고 닭 육수나 해산물 육수를 붓는다. 파에야 원조를 자부하는 발렌시아 사람들은 장작불에 지은 파에야가 최고라고 말한다. 흔히 오렌지나무로 불을 피우는데, 장작불 향이 밥알에 배어들어야 제대로 된 파에야라고 주장한다.
파에야 냄비의 육수가 졸아들고 재료가 익으면 쌀을 넣은 후 다시 육수를 붓고 간도 한다. 이때 사프란을 더하는 경우가 많다. 사프란은 지중해 연안에서 자라는 붓꽃과 꽃의 암술이다. 살짝 매운맛과 독특한 향을 내고, 무엇보다 음식을 노랗게 물들이기 위해 사용하는 향신료다. 파에야라고 하면 황금빛이 떠오를 만큼 사프란이 자주 사용된다.
쌀이 육수를 다 빨아들이고 익었을 때쯤 뜸을 들인다. 뜸이 잘든 파에야는 다시 불에 올리거나 화력을 키워 바닥을 눋게 한다. 한국에서 누룽지를 좋아하듯, 스페인 사람들은 ‘소카라트(socarrat)’라고 하는 파에야 누룽지를 별미로 친다.
파에야가 완성되면 따로 덜지 않고 식탁 가운데 놓고 온 가족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나무 숟가락으로 먹는다. 모든 음식을 1인분씩 덜어 먹는 유럽에서 보기 어려운 광경이다. 큰 접시에 담아낸 음식을 나눠 먹는 건 이슬람 또는 중동 식습관이다. 스페인을 포함한 이베리아반도를 수백 년간 지배한 무슬림(이슬람교도) 지배자들은 쌀 먹는 식습관과 재배 기술을 전했다. 세계에서 가장 독실한 가톨릭 국가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스페인에서, 이슬람의 영향을 여전히 맛볼 수 있는 음식이 파에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