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무대 위 인문학] 여성 12명이 '공정한 삶' 놓고 법정 공방 펼쳐요
입력 : 2022.06.13 03:30
연극 '웰킨'과 배심원제
女 용의자 "임신 중" 감형 탄원에
18세기 인종·계급 다른 여성 모여
치열하게 진실 찾는 과정 담겼죠
▲ 연극 ‘웰킨’은 1759년 영국의 어느 작은 도시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배경으로 해요. 오는 25일까지 공연되는 연극 웰킨의 무대에서 여성 배심원들이 모여 기도를 하는 모습이에요. /두산아트센터
1759년 영국의 어느 작은 도시에서 마을 유지(有志·명망 있고 영향력을 가진 사람)의 어린 딸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 집의 하녀였던 21살의 여성이 용의자로 지목되죠. 평화롭던 마을에서 일어난 범죄에 모두가 분노하고, 용의자는 사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그런데 용의자는 살인을 인정하면서도 "임신 중"이라며 법정에 감형을 탄원합니다. 하지만 용의자의 배는 임신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고, 지금으로부터 260여 년 전의 의학 기술로는 그녀의 임신 사실을 확인하기 어려웠습니다. 이에 마을의 12명 여성이 배심원으로 소환되고, 그녀들은 용의자의 임신 여부에 대한 치열한 논쟁을 펼치게 되죠. 용의자의 말은 과연 진실일까요, 거짓일까요. 배심원들은 공정한 판단을 할 수 있을까요.
로런스올리비에상 수상자 작품
오는 25일까지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되는 연극 '웰킨'은 영국 공연예술계 최고 상으로 불리는 로런스 올리비에상 수상자인 영국의 여성 극작가 루시 커크우드의 작품입니다. 2020년 영국 국립극장에서 초연된 뒤 큰 호평을 받았죠. 이 작품은 여성이 남편에게 종속돼 집안일과 육아를 도맡아 해야 했던 1700년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나이·인종·계급이 다른 12명의 여성 배심원이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 묵직하게 펼쳐지죠.
연극의 제목인 '웰킨(welkin)'은 영어로 '하늘, 천국'이라는 의미인데요. 용의자로 지목된 여성은 살인 사건이 있었던 밤에 무엇을 했느냐는 질문에 "핼리혜성을 보고 왔다"는 말을 해요. 핼리혜성은 76년을 주기로 지구 가까이를 지나가죠. 연극의 제목인 '하늘'과 '핼리혜성'은 1700년대 당시 여성들의 삶과 2022년을 살고 있는 현재 우리의 삶을 연결하는 고리와도 같습니다.
중세 여성들은 종교라는 이름으로 무고한 여성을 박해했던 마녀사냥의 위험을 넘어야 했고, 출산과 육아, 그리고 끊임없이 밀려드는 집안일과 노동의 짐 속에서 신음해야 했어요. 연극은 이런 여성의 사회적 위치가 과연 진일보했나 질문합니다. 마치 76년마다 다시 등장하는 핼리혜성처럼 여성의 일과 위치는 제자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역사와도 같죠. 18세기 여성 배심원이었던 12명의 여성들이 현대의 주부가 되어 또다시 집안일을 하고 있는 연극의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인 이유입니다.
일반 시민이 재판에 참여하는 배심원제
이 작품을 이끌고 가는 배심원 제도는 판사가 아닌 일반 시민이 재판에 참여하는 제도입니다. 판사와 검사로 대표되는 소수의 권력이 판결을 마음대로 하는 것을 막자는 취지로 도입됐기 때문에, 헌법에 명시된 시민의 권리로 볼 수 있기도 하지요.
배심제는 미국과 영연방 국가, 러시아, 스페인 등에서 실행되고 있는데요.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 대부분의 국가는 '참심제(參審制)'를 도입해서 운영하고 있어요. 배심제와 참심제의 가장 큰 차이는 형벌의 정도를 정하는 '양형(量刑)'의 방식에 있습니다. 배심원이 형사 사건에 대한 유무죄를 판결하면 이후 판사가 형량을 결정하는 배심제와 달리, 참심제에서는 참심원이 양형에도 관여합니다.
근대 배심원 제도의 골격은 12세기 영국의 왕이었던 헨리 2세 때부터 갖춰졌어요. 현재 배심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요. '대배심원'(Grand Jury)은 보통 16명에서 23명이 참여해요. '소배심원'(Petit Jury)은 12명의 배심원이 참여하고요. 만장일치로 피고인의 유무죄 여부를 결정하는 소배심과 달리, 대배심에서는 다수결을 통해 피의자의 기소 여부를 결정합니다. 우리가 보통 영화나 드라마·연극에서 보게 되는 형태가 이 소배심원 제도예요. 연극 '웰킨'에서도 12명의 여성이 모여 용의자의 임신 여부를 판단하죠.
미국의 경우 배심제는 미국 헌법 6조 수정조항에 명시된 권리이자 미국 시민이라면 반드시 이행해야 하는 의무 중 하나예요. 따라서 18세 이상 남녀 누구나 배심원으로 소환받게 되면 반드시 이행해야 하는 강제성이 있죠. 귀찮다고 소환장을 무시해 버리고 정해진 날짜에 나오지 않으면 '법정 모독죄'로 간주돼 벌금이 부과되고 구속영장 명령까지 내려질 수 있죠.
연극 '웰킨'이 영국의 1700년대 배심제를 배경으로 한다면, 미국의 배심제를 이해할 수 있는 법정 연극으로는 '12인의 성난 사람들'(12 Angry Men)이 있습니다. 친아버지 살해 혐의를 받는 스페인계 미국 소년에 대한 재판이 열리는데, 11명의 배심원은 소년의 유죄를 인정하지만 단 한 명의 배심원이 반론을 제기하며 치열한 토론이 펼쳐져요. 결국 소년은 무죄로 풀려나지요.
극작가 레지널드 로즈가 쓴 이 연극은 1954년 미국의 TV에서 드라마로 방영되고 3년 뒤인 1957년 영화로도 제작됐어요. 시드니 루멧 감독이 만든 이 영화는 탄탄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을 받으며 평단의 호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배심제와 비슷하게 국민이 형사 재판에 참여할 수 있는 '국민참여재판'이라는 제도가 있어요. 무작위로 선정된 배심원들이 유무죄 의견을 재판부에 전달하는 재판이지요. 우리나라 사법제도는 헌법상 판검사 등 직업 법관에 의해 재판이 진행되는 것이 특징이지만, 국민이 재판에 참여하는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 2008년 도입됐답니다.
[죄 협상한다는 비판도]
국민이 재판 과정에 참여한다는 장점은 있지만, 배심제는 '플리바게닝제(유죄협상제)'를 낳게 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혐의자가 혐의를 인정하면 검찰이 가벼운 범죄로 기소하거나 형량을 낮춰주는 제도를 플리바게닝제라고 합니다. 배심제를 채택하고 있는 영미법의 사법 체제에서 피의자가 유죄를 인정하는 경우에도 배심제까지 거치게 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취지에서 도입됐는데요.
미국의 경우 형사 사건의 90% 이상이 이 플리바게닝제를 통해 해결되고 있다고 합니다.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배심원제를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이지만, 사법부가 범죄자와 형량을 흥정한다는 점에서 정의 관념에 위배되고 수사를 편하고 쉽게 하는 '수사 편의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 1957년 제작된 ‘12인의 성난 사람들’ 영화 포스터. /위키피디아
최여정 '이럴 때 연극' 저자 기획·구성=조유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