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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지 대구가 내게 특별한 곳이 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전쟁 통해 기약 없이 중단됐던 공부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시절 피난민 학생수에 비해 학교가 턱없이 부족해 그저 나무 기둥 몇 개에 겨우 지붕만 척 얹어 놓은 임시 건물에서 공부하던 일이 생각난다. 그것이 대구 봉덕국민학교의 임시 교사였다. 그 임시교사는 기와를 구워 보관하던 창고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다 새로 배정돼 들어간 정식 피난지 학교가 희도초등학교—당시에는 희도국민학교—였다.
그 학교는 공교롭게도 먼 훗날 내가 사랑에 빠지게 된 그 사람의 모교이기도 했다. (이순자 자서전 28 페이지 중에서)
그 청년의 멋진 사관학교 제복 때문이었을까. 유난히 좌중을 압도하는 패기가 느껴져 유심히 그 모습을 눈여겨 보게 되었었다. 그런데 너무도 신기한 일이었다. 그 청명한 가을날, 불쑥 경화동 집으로 아버지를 찾아온 많은 청년들 중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참모장님 계시냐고 묻던 그 가운데 청년, 그는 바로 1년 전 동창회에서 보았던 바로 그 육사생도였다. ‘전두환 (全斗煥)’이라는 이름의 그 생도와 친구들 생도들이 사택으로 찾아온다는 일은 전혀 생각할 수 없던 일이었다. 일요일이라 외출이 허락된 날이었지만 마땅히 갈 곳도 없고 용돈도 없어 난감해하던 중 새로 부임하신 참모장님을 찾아가면 어떻겠냐고 제안한 사람은 바로 전두환 생도였다고 한다. (이순자 자서전 32 페이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