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종 딸랑딸랑님 작성 글: http://cafe.naver.com/lovehawkins/711
형제님께.
제가 접했던 책을 통해서 제게 합당한 삶의 방식을 찾을 수 없었기에 - 비록 그 사실에 대해 별 불편함은 없지만 - 이 문제에 대해 형제님의 생각을 알 수 있다면 기쁠 것입니다.
며칠 전 한 경건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영적 삶이란 은혜의 삶으로서, 노예적인 두려움에서 시작하여 영생에 대한 소망으로 강해지고 순전한 사랑으로 완성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각 상태마다 서로 다른 단계들이 있고 각각의 단계를 밟음으로써 사람은 마침내 복된 완성 지점에 이른다고 합니다.
저는 이 모든 방식들을 다 따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방식들은 저를 실망시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차라리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과 그 외에 모든 것을 다 포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보답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곳에 들어와서 처음 한 해 동안 저는 정해진 경건의 시간이 되면 대개 죽음·심판·천국·지옥 그리고 저의 죄에 대한 생각에 골몰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몇 년 간은 경건의 시간 외에도 하루 종일, 심지어 한창 일하는 중에도 조심스럽게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마음을 쏟았습니다. 늘 나와 함께 하시며, 내 안에 계시기도 하는 그분을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다가 저는 마침내 정해진 기도 시간에도 부지중 그렇게 하기에 이르렀고, 이로 인해 제 안에는 큰 기쁨과 위로가 생겨났습니다. 이 연습으로 제 안에는 하나님을 지극히 높이고 존중하는 마음이 일었고, 그 점에 있어서는 오직 믿음만이 저를 만족시킬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시작은 그러했지만, 처음 십 년 동안은 상당히 고통스러웠다는 것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군요. 제가 바라는 만큼 하나님께 헌신하지 못했고 죄가 마음에서 늘 떠나지 않았으며, 자격없는 저에게 하나님께서 큰 은총을 베푸셨다는 생각이 오히려 저를 괴롭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저는 자주 실족햇고, 힘겹게 다시 일어서야 했습니다. 모든 피조물, 이성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저를 대적하는 것 같았고 오직 믿음만이 제 편이였습니다. 가끔은 제가 그렇게 큰 은총을 입었다고 믿는 게 나의 주제넘은 추측은 아닌가, 다른 사람들은 힘들게 도착한 지점에 나는 측시 이른 척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괴로웠고, 또 어떤 떄는 이건 다 고집스러운 미망이며 나에게 구원 같은 건 없다는 생각이 들기 조차 했습니다.
이런 고민 속에서 일생을 마치고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에 한 동안 빠져 있었는데(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 품고 있는 저의 신뢰가 줄어든 것은 아니며, 위와 같은 고민은 오히려 제 믿음을 더 크게 해주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달라진 것을 갑자기 꺠달았습니다. 그리고 제 영혼 - 당시까지도 괴로움 중에 있던 제 영혼 - 은 마치 그 중심점, 안식처에 있는 것처럼 깊은 내적 평안을 느겼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단순하게 믿음으로, 그리고 겸손과 사랑으로 하나님 앞에서 행하고 있으며, 하나님을 거스를 만한 일은 행하지도, 생각하지도 않으려고 열심히 애쓰고 있습니다. 저는 다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나면 하나님께서 당신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제게 해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현재 제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도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은 고통도 없고 두려움도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 외에 다른 아무 뜻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모든 일에서 그분의 뜻을 이루려 애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스르거나 하나님 사랑이라는 동기에서 벗어나는 일이면 길에서 지푸라기 하나 줍지 않을 정도로 그분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고 있습니다.
저는 모든 형식적인 경건 생활이나 틀로 정해진 기도를 그쳤습니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그분과 교제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안에서 인내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저는 하나님께 순전히 집중하며 전폭적인 애정을 드리는데, 그것을 저는 하나님의 '실재적 임재'라 칭하고 싶습니다. 아니 좀더 좋게 표현하자면, 하나님과 영혼과의 습관젓이며 고요하고 은밀한 대화라고 할까요. 내적으로 그리고 때로는 외적으로도 기쁨과 황홀경을 느끼게 해주는 대화, 남에게 드러나지 않도록 적절히 수단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큰 기쁨과 황홀경을 안겨주는 대화 말입니다.
간단히 말해, 저는 제 영혼이 지난 30여 년 동안 하나님과 함께 해왔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따분하다 싶은 많은 얘기들은 건너뛰고, 다만 저의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려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스스로를 인간 중에서 가장 형편없는 자, 상처와 부패로 얼룩지고, 왕이신 분을 거슬러 온갖 종류의 범죄를 저지른 자로 여깁니다. 그 모든 일들에 회한을 느끼면서, 저의 사암함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그분의 용서를 구하며 그분의 뜻대로 처분하시도록 저 자신을 그분의 손에 맡겼습니다. 그러나 자비와 선함으로 충만하신 왕께서는 저를 징계하시기는커녕 오히려 사랑으로 안아주시고, 당신의 상(床)에서 먹게 하시고, 그 손으로 친히 먹여 주시고, 보배함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제게 주셨습니다. 그분은 수천수만 가지의 방법으로 쉼없이 저와 얘기를 나누기를 기뻐하시고, 모든 면에서 당신의 은총을 받는 자로 대해 주십니다. 그래서 순간순간 저는 제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안에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분의 임재를 연습하는 가장 유용한 방법은 단순하게 주의를 집중하는 것과 뜨거운 열정으로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인데, 이럴 때 저는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가슴팍에서 느끼는 것보다 더 큰 달콤함과 기쁨으로 하나님 품에 안겨 있는 저의 모습을 자주 봅니다. 감히 이런 표현을 써도 될지 모르겠지만, 저는 하나님의 가슴(bosom)이라 부르겠습니다. 거기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달콤함을 맛보고 체험하기 때문이지요.
궁핍함과 저의 연약함으로 인해 생각이 이따금씩 다른 곳을 헤멜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너무도 매혹적이고 향기로운 내적 움직임에 의해 부름을 받고 곧 제 정신으로 돌아옵니다. 형제님꼐서도 잘 알고 계시지만 제가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인지를 곰곰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저같이 무가치하고 배은망덕한 자에게 하나님이 베푸신 큰 은총이 더욱 빛날 것입니다.
저에게 정해진 기도 시간은 동일한 훈련의 연속일 뿐입니다. 때로 저는 제 자신이 조각가가 자기 앞에 세워놓은 돌 같다고 생각합니다. 조각가는 그 돌을 깎아 작품을 만들겠지요. 이렇게 하나님 앞에 제 자신이 놓여 있을 때, 저는 하나님께서 제 영혼 안에 하나님의 완벽한 형상을 새겨 주시기를, 저를 완전히 하나님과 똑같이 만들어 주시기를 갈망합니다.
또 어느 때 기도에 열중하고 있다 보면 제 모든 영과 혼이 높이 들려올라가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제 편에서 어떤 주의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붙드시고 그분 안에 든든하게 고정되어 있는 한 그 기도는 계속됩니다. 주님은 그 중심지요 안식처가 되십니다.
이런 상태를 무위(無爲), 망상, 자기애(自己愛)라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도 잘 압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이 거룩한 무위(無爲)이며, 만일 그 상태에 있는 영혼이 자기애(自己愛)에 빠질 수 있다면 그것은 행복한 자기애임을 고백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이 그런 안식 상태에 있는 동안에는 전에 그에게 익숙했던 행위들이 간섭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을 지탱시켜 주던 행위들도 그런 상태에서는 도움보다는 오히려 방해만 될뿐입니다.
이런 상태를 망상이라고 칭하는 것도 참을 수 없습니다. 이런식으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영혼은 그 상태에서 오직 하나님외에 다른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것이 제 안에 있는 망상이라면 하나님께서 치료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대로 저를 다루시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오직 그분만을 바라고, 전적으로 그분께만 헌신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형제님의 생각을 제게 알려 주시는 호의를 베풀어 주신다면 저는 그 의견에 언제나 크나큰 경의를 표할 것입니다. 저야 말로 형제님을 특별히 존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 안에서 형제님의 벗된 자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