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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전통이 있는 마을 - 충남 금산
성곡리
중도일보
1998년 6월 23일
산신이 점지해 준 '개삼터'
인삼은 동양의학에서 녹용, 해구신과 함께 3대 영약으로 알려져 왔다. 허준의 동의보감에 의하면 인삼에는 27종의 약효가 있다고 전한다. 위장, 성기능, 고혈압, 동맥경화증, 빈혈, 당뇨, 암, 간기능, 숙취 등등, 중국의 도홍경이 저술한 「신농초본경」에는 인삼의 약효에 대해 설명하면서 오장을 보하며 정신을 안정되게 한다는 등 정신적 측변을 강조하고 있다. 명약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인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생산되고 있지만 그중 한국의 인삼이 약효에 있어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얻고 있다.
그러한 인삼의 발원지가 우리 지역에 있다. 금산군 남이면 성곡리. 인삼의 눈이 튼 곳이라해서 마을 이름이 「개안」이 됐고, 이 고장 설화의 주인공 강처사가 처음으로 인삼 씨를 심은 자리를 「개삼터」라 부를 만큼 인삼과의 인연이 깊은 동네.
『지금으로부터 1천5백여년 전 강씨성을 가진 선비가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모친마저 병이 들어 자리에 눕자 진악산 관음굴에서 정성을 들여 모친의 쾌유를 빌던 중 꿈 속에서 산신령이 현몽하여 「관음불봉 암벽에 가면 빨간 열매달린 풀이 있을 것이니 그 뿌리를 달여 드리라」는 계시가 있었다. 그곳에 찾아가니 그러한 풀이 있어 뿌리를 캐어 달여 드리니 모친의 병은 완쾌되었고 그 씨앗은 지금의 남이면 성곡리 개안부락에 심어 재배하게 되었다.』
금산 인삼의 성지가 된 성곡리에 전해오는 모친 효행설화다. 역사적으로 정확한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마을에서 전하는 인삼의 재배시기를 보면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인삼이 재배됐던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고려인삼 종주국의 자존심을 뒷받침 해준 성곡리 인삼 만큼이나 마을에는 인삼과 관련한 민속신앙과 의례가 있다.
인류의 영약이라 불리는 인삼을 재배하는 사람들은 인삼을 인간의 공력만이 아니라 산신이 점지해주는 영물이라고 믿었다. 인삼은 주인의 발소리를 들으며 자란다고 할 만큼 인삼은 파종에서 수확까지 기울이는 정성은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오래 전부터 인삼을 재배하기 시작한 성곡에서는 산신이 점지해준 영물에 인격을 부여했다. 인삼의 싹이 트는 것을 입뇨, 즉 머리는 세운다는 뜻에서 이같이 불렀고 인삼의 싹이 트는 부분을 뇌두라고 일컬었다. 또 삼장 주인이 죽으면 삼장포에도 부고를 내는 등 인격화의 예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성곡리에서는 삼장제라는 것을 지낸다. 삼장제는 지난 가을 갈잎을 넣어 새로 만든 인삼밭에서 돌아오는 봄을 지내는 게 상례다. 삼을 심은 후 삼장발로 삼장을 꾸미고 난 다음 청소를 끝내고 잎이 나오길 기다린다. 입뇨를 할 때면 보통 음력 3월말께로 각 집에서는 삼장고사를 지낼 준비를 한다. 주인의 생기복덕을 보아 날을 받고, 날이 정해지면 주인이 제주가 되어 제를 지내게 된다.
제주는 제일 3일전부터 문 앞에 문종이, 숯, 솔가지 등을 꽂은 금줄을 늘이고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는다. 이때 궂은 일을 본 사람은 인삼포에 가지 않았고 드 달에는 남의 집 일도 달을 넘기고 해야 했다. 그 사이 궂은 일이 생기면 제가 취소되고 달을 넘겨 새로 날을 받아야 했다. 제 지내는 날까지 3일이 무사히 지나면 제주는 옷을 깨끗이 갈아입고 날이 저물기를 기다린다. 어두워지면 돼지머리, 떡시루, 삼사실과를 차려 삼장으로 향한다. 무만큼 큰 인삼으로 자라게 해 달라는 소지와 음복을 끝으로 제를 마친다. 삼장제를 지낼 때 호랑이가 바라보거나 그 다음날 호랑이 발자국이 있으면 삼농사가 대단히 잘 된다고 주민들은 믿고 있다.
기후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인삼 재배촌 성곡리는 「무제」라 불리는 기우제의 역사도 깊다. 진악산 수굴에서 지내는 무제는 예부터 문헌에 남을 만큼 널리 알려졌으며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것. 수굴은 수불봉 아래 있는 명당이라 일컬어지는 호롱혈이 있다. 어느 해인가는 호롱혈을 파보니 여러개의 송장이 겹겹으로 나왔다고 한다. 몰래 묘를 쓸 만큼 좋은 묏자리. 이곳에 묘를 쓰는 사람은 용이 되어 승천을 하지만 마을에는 비가 내리지 않는다. 그래서 마을 주민들은 비가 오지 않으면 이곳에서 제를 지내고 묘를 찾아내 파묘를 하는 순으로 기우제를 진행한다.
무제 지내는 아침이면 집집마다 대문에 솔가지로 마개를 막은 물병을 거꾸로 매달아 물이 흐르게 한다. 또 집대문 앞에 황토를 깔아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금한다. 제물이 준비되면 제관과 제주는 수굴 청소를 하고 제를 지낸다.
인삼의 성지로까지 일컬어지는 성곡리는 인삼에 얽힌 설화를 근간으로 한 제를 지내는 것도 이채롭다. 해마다 10월이면 성곡리에 처음으로 인삼을 재배하게 해준 강처사와 진악산 산신령에게 감사의 제로 「금산인삼제」를 지낸다. 개삼각과 그 갚에 위치한 강처사 고택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인삼제는 전국적인 축제로 발전될 만큼 성대하게 치러져 인삼종주지의 면모를 과시한다.
인삼의 신성함과 영묘함을 아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 진악산의 깊은 골만큼이나 마을 주민들의 속내는 깊다. 인삼의 싹을 튀우고 누대에 걸쳐 기울여온 정성이 녹아있는 민속신앙과 의례가 지금의 성곡리를 유서 깊은 마을이라 부르게 한다.
□ 개삼각
인삼설화 뜻 기리는 사당
예로부터 인삼이 처음으로 재배된 곳으로 알려지고 잇는 이마을에는 설화의 뜻을 모시는 사당이 있다. 개삼각이 바로 그것. 지난 1983년 7월 지어진 개삼각 안에는 이 마을에 전해오고 있는 강처사 설화를 바탕으로 한 탱화가 있다. 진악산의 산신령이 효자 강처사에게 인삼을 하사하는 장면이다. 개삼각 앞에는 또 강처사가 살던 고택을 재현해 놓기도 했다.
이곳은 매년 금산의 향토축제로 열리는 금산 인삼축제 행사 때 군민이 모여 인삼을 처음으로 재배하게 해준 진악산 산신형에게 한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인삼제전을 올리는 자리다. 성곡리가 인삼의 발원지임을 새삼 증명해 주는 곳이다.
□ 성곡리 가는 길
금산읍에서 진안방면 지방도 795선을 타고 가다보면 진악산이 나온다. 이 산의 산자락이 치마폭처럼 감싸고 있는 곳이 개삼터라 불리는 남이면 성곡리다. 교통편은 시내버스 터미널에서 남이·석동방향 및 남일 음대방향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버스는 30분 간격으로 출발하며 도착지까지 10분 정도 소요된다.
부리면
평촌리 물페기
중도일보
1998년 7월 14일
노동의 고단함을 신명으로...
충청남도 금산에서 물페기 농요는 유명하다. 두레농사를 지을 때 부르는 이 노래는 지난 91년 개최된 제32회 전국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충남을 대표해 참가, 종합우수상인 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이후 92년 충남 무형문화재 제 16호로 지정 받았고 물페기농요 전승 보존회(회장 박찬헌) 주죽으로 매년 음력 7월 15 백중날을 전후해 시연되고 있다.
물페기는 이 농요가 전승되고 있는 금산군 부리면 평촌 2리의 자연마을 명칭이다. 마을 앞들인 평촌 들녘을 남쪽 무주군 경계부근에서 발원하는 현내천(縣內川)이 이곳으로 흘러들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으로 보고 있지만 어원이 정확치는 않다. 또 언제부터 시작됐는지에 대해서도 확실치는 않지만 이곳의 두레 농요는 평야지대와 산악지대의 소리가 결합됐다는 특성을 띠고 있는게 특징이다.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이 분기되는 지점에 위치해 산악지대의 소리가 주종을 이루면서 평야지대의 소리도 흡수, 처연하면서도 힘차고 담백한 음색을 자아내고 있다.
40여가구가 살고 있는 평촌 2리에서 두레는 보통 20∼30명으로 구성된다. 마을의 논이 평촌들뿐만 아니라 산에 위치한 다락논이 많은 터라 삼과 조의 이모작을 짓고 있으며 만종모 심는 시기와 삼 찌는 시기가 같아 일손이 바쁘다. 조종모의 아시논매기는 또 비가 많이 오는 절기인데다 모를 심은 후 20일 간격으로 논매기를 해주어야 하는 철에 일손은 부족할 수 밖에 없었다. 「두번 맨 쌀과 세 번 맨 쌀은 바꾸지 않는다」는 말처럼 정성스런 김매기는 농사일에서 중요한 부문, 물페기는 따라서 여느 동네보다 두레가 비중을 차지한다. 일손이 바쁜철 주민이 힘을 모아 일을 처리하고 친목을 다지는 등 우리네 농경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레는 이렇게 시작했다.
여기서 파생된 농요는 노동의 노고를 흥과 신명으로 연결시켜주는 중계역을 자임해왔다. 일과 놀이, 놀이와 일이 만나는 넉넉함 속에서 한해의 풍년을 바라고 이웃의 화평을 기원했던 것.
물페기의 농요는 두레가 났다는 신호로 나팔을 울리며 두레꾼들이 마을 입구에 토신고사를 지내면서 시작된다. 풍년과 마을 주민의 건강을 기원하는 고사를 지내고 나면 본격적인 모심기에 들어간다. 이때는 뒷소리가 없이 부르는 노래말을 서너명이 주고받는 모노래를 부른다. 「뽕 따하러 어으 가세 뒷동산 너머로 뽕 따러가세 도오우 따고, 임도 나 보고 겸사겸사 뽕따러 가세」, 「바람이 불구 비올줄 알면 어떤 사람이 빨래질 가나 빨래 갈라면 강가에 가지 저건너 삼밭에 뭣하러 가나」. 처연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선율이다.
모를 심고 난 후에는 들쥐, 두더지들이 두렁을 뚫어 논물이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논두렁을 밟으며 다지면서도 농요는 계속된다. 아시매기, 모를 심고 15일에서 20일 사이에 논을 매는 작업을 한다. 한창 더운 날씨에 해야하는 일이므로 리듬이 빠르고 경쾌하면서도 힘찬 농요가 이어진다. 『예도 찍고 저기도 찍고 산이가 산이네 잘도 찍네 우리야 농부들 고만조만 파양들 하네 얼카산이야』(논매기 소리 얼카산이야 중)
선소리꾼이 매번 가사를 바꿔 소리를 메기면 나머지 농군들은 다함께 얼카산이야를 잘도 받아넘긴다. 아시를 매고 10일이 지나면 재벌매기가 시작된다. 긴 소리로 논을 거의 다 맬때가 되면 풍년이 들어 방아를 찧듯 경쾌하면서 빠르게 부르는 방아소리가 들녘을 메운다. 이 노래는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 물페기 농요의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데 3장이라고 부르는 초장, 중장, 맏장으로 구성, 일과 놀이가 자연스레 결합된 농요의 백미로 꼽히고 있다.
『에헤헤라 방애호 에헤라 방애호 이방애가 쥐방안가 강태공의 자작방애 얼커덩 절커덩 찧는 방아 언제나 다찧고 밤마실갈까』 유장하면서도 자유분방하게 들녘을 적시고 산을 넘는 넉넉함이 서려있는 소리들이다.
물페기 농요에서는 또 긴 방아로 논을 다 돼면 마치 풍년이 되어 방아를 찧듯 경쾌하면서도 빠르게 부르는 자즌 방아소리, 방애소리로 방아를 찧었으면 밥을 지어 쌈을 싸듯 둥그렇게 원을 지어 부르는 쌈싸는 소리가 있다. 논을 거의 다 맸을 때 농군들이 논둑을 에워싸고 한 지점으로 모이면서 하는 노래로 마치 방아를 찧고 밥을 지어 생명을 잇게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이렇게 그해 김을 매고 나면 백중일을 전후해 마을에서 농사를 제일 잘 지은 일꾼을 뽑아 댕댕이 넝쿨로 관을 씌우고 소에 태우는 장원놀이로 그간의 노고를 치하한다. 노동과 노래가 만나면서 파생된 노동요, 농군의 바람과 애환이 고스란히 담아 때로는 처연함이, 때로는 자유분방한 유장함이, 때로는 넉넉함을 지금까지 전해주고 있다. 그 중에서도 뭎페기 농요는 다양한 선법과 독창성을 간직한 채 두레문화의 극치를 보여주는 소리로 물페기 들녘에 그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 농바우 그시기
"하늘 놀래켜 비오게 하라"
농바우끄시기는 부리면 금강변을 중심으로 제원면 일대까지 많은 사람들이 모여 행하는 기우제. 농바우끄시기의 기원은 이렇게 시작한다.
먼 옛날에 두 부인을 둔 장수가 살았는데 장수가 전쟁을 끝내고 집에 들어오자 장수의 갑옷을 놓고 두 부인이 싸움을 했다. 이를 본 장수는 갑옷을 바위로 된 단단한 농속에 넣고 다시는 꺼내 볼 수 없도록 뒤집어 놓았다. 이후 날이 가물면 아녀자들이 힘을 모아 농바우를 글어 내리려고 줄을 당기기 시작했는데, 이는 농바우가 밑으로 떨어지면 천지개벽하므로 하늘님이 농바우가 밑으로 구르기 전에 비를 내려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농바우끄시기는 농바우로 동아줄을 매는 용줄매기, 비가 오기를 기원하여 병에다 소나무 가지를 꽂고 거꾸로 세워서 비가 오는 것을 흉내내는 물병세우기, 마을 아낙이 기원하는 산제, 선소리꾼의 소리에 맞춰 용줄을 끄는 농바우 끄시기순으로 진행된다.
농바우를 끄셔도 비가 오지 않으면 마을 아낙들이 옷을 벗고 키로 물을 까부르는 등 비가 올때까지 날궂이를 계속한다.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자연재해를 초월적인 존재를 통해 극복하려는 마을 주민들의 염원이 담겨있는 기우제다.
□ 금산 평촌리 가는 길
물페기 농요가 전승되고 있는 것은 금산군 부리면 평촌리, 자연부락의 명칭이 물페기다. 평촌들이 있는 부리면은 금산군에서 동남단에 위치, 무주군과 영동군에 접해있다. 금산에서 무주쪽으로 가다보면 멀지 않아 부리면을 만난다.
용화리
중도일보
1998년 9월 8일 화요일 제 10141 호
개화 거부하는 '청빈마을'/70년대 후반 버스·전기개통…향촌생활 생생히 보존/ 높은 벼슬 없어도 용강서원 중심 반가촌 면모 유지
『용화리의 전통?. 세상이 예전같지 않아서 전통이랄 게 뭐 있어야지.』
금산군 제원면 용화리에서 태어나 이제까지 떠나본 적 없이 이곳에서 살고 있는 토박이 김현칠 옹(67)의 서두다. 『그러니께 용화리는 고인돌이 출토되고, 삼국시대 사람들이 살았다는 흔적이 남아있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은 없어. 다른 동네보다 인심좋은 것도 전통이라고 할수 있을란가.』
금산에서 영동 방면의 막다른 길에 위치한 용화리의 산증인 김옹의 소박한 동네 소개다. 금산지역에서 개화가 가장 늦은 곳으로 이 마을의 역사적 생명성과 과거 향촌생활의 일면을 살필 수 있는 문서가 보존돼 역사적 조명이 가능한 곳이 용화리다. 고인돌, 돌칼 등 선사시대 유적이 발굴됐고,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단절없는 역사와 전통의 면모를 간직한 마을.
성산 김씨와 옥천 육씨가 용화리 1, 2구에 분포돼 거주하는 이 마을은 일찍부터 용화서원을 중심으로 유교의 전통을 확립해 왔다. 반가촌으로 불리는 용화리. 조선후기인 18세기 용강서원이 들어선 이후 반가촌의 면모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당대으 권세가나 큰 벼슬자리에 나선 인물이 없다는 특징을 지닌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반가촌이라고 불리지만 이조때부터 진사, 행원 하나 안나온 곳이여.』
얼마되지 않는 산전문답을 빌어 근근이 생활을 유지하면서도 서원을 중심으로 학문을 소홀히 하지 않았던게 마을의 생활상이다. 용강서원에서 인근 진산, 옥천, 무주, 태인, 평창 등의 사대부가 드나들면서 반촌으로서의 입지를 굳혀온 마을. 집에서는 보리죽도 못먹어도 손님이 오면 쌀밥으로 대접했고, 아녀자들이 물동이를 이고 나오면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피하는 등 유교의 보수적 전통이 완고하게 자리했다. 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할만큼 가난한 반가 용화리는 조선후기 동춘 송준길의 고손자이면서 왕의 스승이었던 금속 송내희 선생이 용강서원 원장을 맡으면서 부임하는 금산 현감이 부임 3일이내 인사를 다녀가야 할만큼 반가의 위상이 절정에 달한다. 대원군때 전국적인 서원 철폐령으로 용강서원이 훼철된후 이곳은 서당으로 변모, 마을의 교육 기능을 담당한다. 천자문과 동몽선습, 소학, 사서삼경 등으로 일제시대 근대교육기관이 설립되고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인 지난 1950년대초까지 이같은 기능은 지속됐다.
70여 가구에 60세 이상 고령이 1백여명을 차지, 농사일과 경로당을 중심으로 유유자적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마을. 『인근 주막거리서 바가지 들고 용화리로 찾아오는 일은 있어도 당장 끼니 때울 형편이 안되도 바가지 드는 일은 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전할만큼 꼿꼿한 유교 전통의 맥을 자랑으로 여기는 용화리는 지금까지 조선후기 상하민의 생활상에서 이어져온 각종 계가 전통의 자리를 지킨다.
임진왜란 이후 황폐화된
향촌 사회를 복구하기 위해 상하를 막론한 전 주민의 협력으로 성립된 계. 용화리는
대동계, 백로계, 시우계, 송계 등 근 50여개의 계가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고, 이
가운데 지금까지 맥을 이어오고 있는 계가 상당수다. 마을의 조직회의 체계인 대동계,
송계를 비롯, 서원을 중심으로 향촌질서를 바로 잡기위한 용강 서당계, 문중 성씨별
계, 생활사의 일면을 반영하는 용친회, 타성 친목계, 가마골 친목계, 용우회, 백로회,
그릇계, 두레계, 연자방아계, 장구계, 금란계, 문생계 등. 양반촌임을 증명하는 계조직부터
상하민의 결속, 하층민끼리의 단합 등 애경사시 부조 및 친목을 목적으로 결성된
각종 계가 용화리 마을사와 함께 생성, 소멸했다. 이중 산림보호를 목적으로한 송계와,
서당의 문전옥답을 관리한 용강 서당계, 문인들의 모임인 금란계 등은 1950년대 이후부터
70년대 사이에 그 모습을 감췄다. 활발한 계모임으로는 매년 음력 정월 15일 마을으
대소사를 논의하고 귀밝이 술로 조촐한 주연을 베푸는 대동계가 있다. 이날은 이장을
선출하고, 새로 이사온 사람 신입례, 동답, 동산의 운영, 한해 마을의예·결산
등 제반 마을 일을 논의한다.
60세이상 노인들의 계조직인 백로회. 이 백로회는
마을내 권선징악, 상부상조, 독행자 표창 및 권장등을 주요 사업으로 하며 효행자를
선정하는 일를 담당했으나 지금은 결성 초기의 성격과 다소 변해 노인회 성격을 띠고
있다. 골패계는 용화리 출향인사중 연배가 비슷한 김씨, 육씨가의 후손들이 친목을
주 목적하는 모임이다. 일년에 한번씩 회원의 집에서 돌아가며 우의를 다지는 계가
있다. 이밖에도 용화리가 고향인 초등학교 또는 중학교 동창들을 중심으로 10여명
안팎이 모여 결성한 친목계와 애경사시 상호 부조를 목적으로 한 모임 등 수많은
친목계가 성행하고 있어 옛 반상간의 뿌리가 사라지지 않은 이 마을만의 특수성을
엿보게 한다.
도로 포장 이후 금산읍내에서 10분거리로 수려한 풍광을 즐기기위한 외지인이 끊이지 않는 용화리. 여느동네에서 쉽게 보여지는 양옥집보다는 흙담에 슬래브를 올려 놓은 가옥이 눈에 들어오고, 모시 적삼을 입은 노인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은 곳. 1백여년전 지어진 초가집에 슬래브로 지붕 개량한 옛 가옥안에는 시어머니와 맞상을 하지 못하는 며느리와 물질보다는 충·효·예를 중히 여기는 반가의 유교정신이 깃들어 있다.
□ 용화리 가는 길
금산군 세원면 용화리는 금산 읍내에서 영동방면으로 약 10km떨어진 외딴 곳이다. 금산읍내에서 용화리까지 운행하는 버스를 하루에 5회. 자가용편으로는 세원면 소재지를 지나 마달피 야영장쪽으로 약 10분정도 달리면 한적한 용화리에 도착할 수 있다.
□ 용화리 토박이 김현칠
black
"집 보존은 조상 받드는
일" 김현칠 옹(67)은
용화리의 토박이다. 1백여년 전 할아버지가 살았던 집을 지붕 수리와 약간의 증축만을
한 채 살고 있는 김옹은 집을 보존하는 것이 곧 조상의 정신을 받드는 일이라고 여긴다.
지금 92세 고령의 노모를 모시고 사는 김옹. 용화리의 역사와 과거사를 꿰뚫는 터줏개감인
셈이다. 금산지역 유도회장을
역임하고 도본부 감찰위원으로 활동중인 김옹은 지난 92년 민속학자 강성복씨가 엮고
금산문화원이 발간한 「용화리의 역사와 민속」이 책자로 나오기까지 중추적역할을
담당한다. 이 책에 수록된 용화리 역사 민족의 기초, 마을의 형성과 변천, 지명의
유래와 역사, 용화리 인물사, 민요와 설화 등 제반 분야에 걸쳐 자문위원 역하를
맡은 것. 김옹의 노고는 전통 마을 용화리의 가치가 널리 알려지고 보존 되는데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지금도 마을의 역사와
전통과 관련한 글들을 구지 등에 내고 있고, 용화리를 알기위해 찾아드는 내방객들에게
가이드 역을 마다하지 않은 김옹. 용화리의 역사를 전파해주는 전령사이다.
첫댓글 물페기 지나서 평촌강가에 솥단지걸고 금방 잡아온 딸치와 피래미에 고추장 듬뿍넣고 어죽쑤어 막걸리 한사발 들이키던 그시절. 언제 다시 그런 맛과 운치를 을 느낄 수 있으리요-----
양완아, 금년 여름에는 모두 모여 천렵 한번 하자.ㅎㅎㅎ
얼~쑤 , 조오치~~~
우리 양완이는 막걸리가 빠지는 경우는 없지?
양완친구 딸치와 피래미잡어 솟단지는 영규가 걸고 요리는내가할께
미녀친구 음식 솜씨가 좋다는데 이담에 평촌강가에 44회 동창생들 간판걸고 근사한 민물매운탕집 내보자. 난 어부, 영규는 부엌데기,미녀는 요리사,나머지는 단골 손님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