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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내 친구, 원숭이 똥꼬
- 은유시인 -
2.
똥꼬녀석이 무슨 연유로 텔레비전뉴스에 나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언뜻 보기에도 말쑥하게 빼어 입고 점잖게 인터뷰에 임하는 모습으로 보아 꽤나 사회 저명인사라도 된 듯 비쳐졌겠다.
특이하다할 만큼 괴상망측한 인상은 여전할지라도 예전과는 판이하게 꾀죄죄한 촌티를 말끔히 벗은 중후한 모습이었다. 역시 돈이란 사람의 인상이나 분위기마저 완전히, 어쩜 백팔십도까지 탈바꿈시킬 수 있는 영물임엔 분명하다고 느껴졌다.
“똥꼬녀석, 돈을 좀 벌기는 벌었나보지? 뭔가 있어 뵈는 티를 내는 걸로 봐선….”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신음소리에 가까운 주절거림이 새어나왔다. 뒤틀린 심사로 꼴에 영 같잖다는 생각에서다.
함양초등학교 동기모임에서 잠깐 봤던 녀석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자리에 모인 친구들로부터 흘려주운 동냥 말이긴 해도 고물상을 하면서 제법 많은 돈을 벌었을 것이란 소리를 들었다. 하긴 그때 그가 자가용처럼 끌고나온 4톤 트럭이 아무리 낡아빠진 중고차라지만 웬만한 집 한 채 값보다 더 비쌌을 테니, 그때도 이미 그의 과거 형편과 비교하면 대단한 신분상승이라 할 수 있었다.
어떤 모임에서든 주머니 사정이 제일 나아보이는 놈이 예외 없이 모임의 분위기를 이끌어가게 마련이다. 다시 말해 돈이 많은 놈일수록 더불어 말 빨이란 게 더 쎄진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겨우 먹고사는 놈일수록 구석진 곳에 숨은 듯이 웅크리고 있다가 어찌 한마디 내뱉더라도 공연히 좌중의 눈치부터 살피게 되더라는 것이다.
어쨌든 그때의 모임에서 녀석은 이미 예전의 녀석이 아니었음을 직감했다. 당당했고 큰소리도 마구 쳤고 아무 말이나 거침없이 해대었다. 예전 같으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짓이었다.
“난 말야 임마, 비록 너거들 보담 몬 배웠는지 모르것지만 말야 임마, 나두 이젠 묵고 사는 데 아무 지장 엄써 알아? 그리고 말야 임마, 난 엄씨 살아도 말야 임마, 돈만 벌 수 있다면 말야 임마, 내가 그간 얼매나 독하게 벌었는줄 알아 임마?”
똥꼬녀석은 동기모임의 술자리에서 끝내 대취하여 횡설수설했다. 말끝마다 ‘임마’소리를 내뱉었고 이놈 저놈 얼굴에다 삿대질까지 해댔다. 그런데도 녀석의 그런 안하무인격 행동을 저지하고 나서는 놈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몇몇은 그런 녀석의 비위까지 맞춰주려고 애를 쓰는 듯했다.
예전엔 구질구질한 꼬락서니에 잔뜩 주눅이 든 채 남의 눈치만 살피기에 급급했던 녀석이 동기모임에서는 제법 거들먹거리며 호기까지 부리는 것을 당시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녀석이라면 그때보다 형편이 나아졌으면 나아졌지 더 못하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런 녀석을 왜 여태껏 떠올리지 못했을까. 빨리 녀석을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박봉달, 네 이놈! 잠시만 기다렸거라, 이 형님이 널 함 만나러 갈 것이야.’
최형철이라면 얼마 전까지 동기회 회장도 했고, 또 아직까지 동기회연락처 역할을 도맡아오고 있으니 아마 녀석의 연락처 정도는 알고 있으리란 생각에 수첩에 적어놓았던 전화번호를 뒤적여 형철이 전화번호를 어렵사리 찾아냈다.
몇 번의 심호흡으로 괜한 긴장을 가라앉히고 형철이한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여러 차례 울리고서야 녀석은 전화를 받았다.
“나다, 배천석이….”
“어, 배천석이가? 아이고 배 교수, 니 참말로 올 만이다. 니 요즘 어찌 지내냐? 통 모임엔 나오지도 않고 말야.”
“응, 그동안 좀 바빴어, 그래 요즘 애들은 자주 모이나?”
“어…, 그저 그래, 모두들 먹고살기 바쁜지 어쩌다 얼굴 내밀곤 그래. 그건 그렇고…, 니 아직도 대학교수질하고 있나?”
“그럼, 교수질 말고 딴 거 뭐 할 게 있나? 맨 그렇지 뭐.”
“어, 그래도 요즘 같은 불경기에 하루하루 먹고 살기가 얼매나 어려운데…, 교수가 어디고, 교수만한 직업이 어딧노 말이다.”
“그건 그렇고…, 니 혹시 박봉달이 연락처 알고 있나?”
“어…, 봉달이? 아, 똥꼬 그놈 말이가?”
“그래, 원숭이 똥꼬….”
“글쎄, 그놈 몬 본지도 꽤 됐는데…, 가만있어 봐라…. 금마, 이곳 뜬지 꽤 오래됐어, 아마 10년도 더 됐을 걸? 어…, 그래 여깃다. 적어봐라. 금마 전화번호 불러줄 테니.”
“응, 불러봐라.”
“에, 공이… 이건 서울 지역번호고…, 에 공이에… 사일칠에… 구구둘둘… 적었나? 에, 공이에 사칠일… 공이에… 사일칠에… 구구둘둘…”
“공이에… 사일칠에… 구구둘둘… 맞나?”
“응, 맞다.”
“똥꼬 금마…, 지금 뭐하는데? 쫌 전에 티비에 나왔드라.”
“어, 그래? 티브이에 나왔다고? 유명인사 됐나 부지. 하긴 나도 금마 뭐하는지 잘 모르것다. 잠깐만! 아…, 맞다. 일성해운이라는 선박회사를 한다 카드라.”
“일성해운? 하여튼 고맙다. 한번 지나는 길에 들러 볼께, 그럼 담에 보자.”
“어, 그래 이제부턴 연락 좀 자주하며 살그라, 이제 살아봐야 얼마나 더 살것노?”
“옹냐, 알았다. 그럼 담에 보자.”
통화를 끝내자마자 똥꼬녀석의 전화번호라고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두 번째 신호음이 울리자마자 곧 수화기를 통해 맑고 부드러운 여자음성이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일성해운그룹 회장비서실의 최현주입니다.”
“……”
녀석의 음성이, 아니 하다못해 남자직원의 음성이 들려오리라 예상했었는데, 전혀 뜻밖이었다.
‘일성해운그룹 회장비서실?’
마른침이 목울대를 타고 내리면서 절로 긴장되었다.
“여보세요?”
“예, 수고 많고요, 혹 박봉달 씨라고…, 계시면 좀 바꿔주실 수 있을까요?
“실롑니다만, 무슨 일로 찾으시는데요?”
“계시면 바꿔주세요. 할 얘기가 있으니까.”
“회장님, 지금 손님과 면담중이시라 바쁘시고요, 대신 용건을 말씀해주시면 전해드리겠습니다.”
“나…, 박봉달 씨 친구 되는 사람입니다. 직접 통화하고 싶어서요.”
“네, 그러세요. 존함이 어찌되시는데요?”
“배천석…, 배짜 천짜 석짜… 배천석이라고…, 고향친구라카면 잘 알겁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
‘똥꼬녀석이 뭐? 일성해운그룹 회장님이시란다. 그리고 비서실까지 갖춘, 고운 음성을 지닌 아가씨를 비서로 둔 회장님이라니? 짜식, 그새 많이 컸구나.’
텔레비전에서 언뜻 봤던 녀석의 모습을 떠올렸다. 땟물을 벗겨내고 좋은 옷을 입었다지만, 일성해운그룹인가 뭔가 회장님으로 둔갑했다지만 녀석은 달라진 데가 없을 듯싶었다.
“여보세요?”
“예…, 말씀하시지요.”
“저, 회장님께서 내일 오후 두 시에 시간이 있으시다며, 그때 한번 찾아 주십사합니다.”
“저…, 잠깐만! 그곳 위치가…?”
“여긴, 송파구 방이동 일성해운빌딩 8층에 있는 회장실로 오시면 됩니다.”
“예, 알았어요. 그럼 낼 뵙지요.”
회사규모야 어떻든 간에 소위 해운회사 회장이란 직책이 아무나 선뜻 만나주는 자리가 아니라면…, 의외로 간단히 녀석과 만날 약속이 정해졌겠다. 일부러 여비 들여 서울까지 찾아가야한다는 부담이야 있겠지만, 지긋지긋한 부산을 탈출하여 서울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 여겼다.
‘녀석, 고물상해서 언제 돈을 그리 벌었다고….’
은근히 배알이 꼴려오는 것을 느끼면서도 일견 녀석이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길을 걷다, 사장님 하고 살짝 불렀더니, 열에 열 사람 모두가 돌아보데요. 어쩌구….’
오래전에 공전의 히트를 쳤다던 모 여가수의 노래가사를 흥얼거렸다. 하긴 사장이니 회장이니 하는 것들이 지천에 깔린 세상이고 보니, 녀석도 그중 하나려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회장소리 듣는 것으로 보아 제법 출세하긴 했나보다.
내가 하필 녀석의 도움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갖는 것부터가 웃기는 짓이다. 비록 소싯적 얘기라 하겠지만, 녀석과 나는 엄연히 상반된 다른 세계에서 살았다.
내가 부잣집 외동아들로 떠받들리어 자랐다면, 녀석은 거렁뱅이나 다를 바 없는 헐벗은 집에서 무지렁이로 천하게 자랐다. 내가 귀한 집 도령처럼 부티 나게 생겼다면, 녀석은 애들한테 무자비하게 따돌림을 당할 만큼 지지리도 못생겼다. 뿐인가, 내가 전교에서 1,2등을 할 때 녀석은 꼴찌를 도맡았고, 내가 인기가 좋아 애들한테 둘러싸여있었을 때 녀석은 또래에 어울리지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 헤벌린 입가로 침을 질질 흘리며 부러운 듯 구경만하고 있었다.
***
아버지 상을 치룬 이래로 한동안은 아버지에 대한 죄스러움을 떨쳐내지 못하고 나 자신도 이리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자각이 들었다. 그리고 대학 4년, 그림 그린답시고 8년 해서 12년 넘게 뭉개고 지냈던 그 돼지우리 같은 아틀리에에서 벗어나기로 작정했다.
그때부터 직장을 잡겠다고 여기저기 이력서를 들고 쫓아다녀봤지만 적잖은 나이라 하여 취직이 그리 호락할 리 없었다. 미술정교사자격증을 따놓은 것도 아니고 해서 학교 같은 곳은 아예 기웃거리지도 못했다.
마냥 놀고 지내기도 눈치 보여 함양시내에 미술학원을 차려놓고 그렇게 2년여를 고향에서 지냈는데, 어느 날인가 멀쑥하게 차려입은 중년신사 하나가집으로 찾아왔다. 그는 아버지가 아직 살아있을 거라 믿었고 고향에만 오면 언제든지 찾아뵐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진작 찾아뵙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한다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이고…, 선상님. 이게 뭔 일이라요? 지가 진작에 찾아 뵈얄텐데…. 그놈에 묵구 사는 게 머라꼬, 하이고…, 선상님이요.”
그는 아버지 때문에 두 번씩이나 생명을 건졌노라며, 마음속에 늘 아버지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고 그 은혜를 갚을 수 있는 날만 학수고대하며 살아왔노라했다.
“지도 함양사람이라요. 지가 이만큼 묵고 살 수 있는 것두 다 선상님 은공 때문이라요. 거시기….”
그는 멀건 대머리에 맺힌 땀방울을 연신 손수건으로 닦아내며, 한참동안 ‘월월~!’ 짖어대듯이 자신의 파란만장했던 고생담을 늘어놓았다. 결론은 혈혈단신 맨몸으로 부산에 정착, 자수성가하여 이젠 제법 규모가 큰 사업체를 경영하고 있노라는 것이다.
내게도 그 좋은 미술대학 나와 시골에서 썩고 있느니, 대학 강단에 서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어왔다. 뜻밖이었다.
“배 선생, 대학 강단에 함 서보시려오?”
“대학요? 뭐…, 그런 자리가 있을까요?”
그는 다소 의아한 눈초리를 보이는 내게 부산의 부일여자대학 재단이사장과 두터운 친분이 있다며, 나를 그 학교에 적극 추천해 주겠노라 굳게 약속을 하고 떠났다.
“지야… 뭐, 그리만 해주신다면야….”
“배 선생이 오케이하면, 교수자리는 내가 당장이라도 알아보리다.”
“……!”
그는 약속을 저버리지 않고 며칠 후에 내게 연락을 해왔다. 이사장과의 면담 일정이 잡혔으니 아예 이력서와 소개서, 대학졸업증명서며 성적증명서, 주민등록등본, 호적등본, 증명사진 등 인사서류를 챙기고, 또 직접 그린 작품도 몇 점 준비해가지고 부산으로 오라하였다.
그렇게 해서 부산 양정에 있는 2년제 부일여자전문대학에 응용미술과 시간강사로 취직이 되어, 1987년도 새 학기부터 정식으로 출강하기 시작했다. 그때 내 나이는 이미 서른넷으로 적잖은 나이였다.
그러나 말이 강사지 일주일에 고작 두 시간만 강의가 있을 뿐 그 이외의 시간은 할일이 없어 무료할 수밖에 없었고, 강사수입이라는 것이 생활비는커녕 보름치 밥값도 해결되지 않는 형편없는 금액이었다. 그러나 앳되어 보이는 여학생들로부터 교수님이란 호칭으로 불리는 것도 과히 나쁘지는 않았다.
그해 가을이 한창 무르익어갈 무렵, 학생과 주임으로부터 내게 이번 졸업생 졸업앨범편집을 맡아줄 수 있겠느냐는 제안을 해왔다.
“아무래도 배 선생이 그림 전공한 분이고 해서 부탁드리는 것이요.”
“예, 잘됐습니다. 지가 맡겠습니다. 마침, 지도 시간이 좀 남아돌아 뭘 할까 싶기도 해서요.”
무료한 나머지 할일을 찾게 되어 기뻤고, 또 은근히 편집수당이라도 떨어질까 하여 선뜻 응했다. 그렇게 해서 응용미술과 학생 몇몇과 졸업앨범편집위원회란 걸 구성하고 학교앨범편집 작업에 들어갔다.
당시 학교 내의 사진촬영은 물론 앨범제작까지 학교 길목에 위치한 보림사진관에서 도맡았다. 학교와는 연간 계약이 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학교 설립 이래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늘 보림사진관 하말종 사장이 독점해왔던 것이다.
“이거…, 얼마되진 않지만…, 애들 요기하는데 좀 보태쓰시라고…. 헐헐헐….”
한창 앨범편집한다고 정신이 없는데, 캔맥주와 캔음료를 각기 한 박스씩 앞세우고 들어온 하 사장이 눈치껏 슬그머니 쥐어주는 흰 봉투 속엔 두툼한 감촉으로 보아 백만 원은 너끈히 들어있음직 했다.
“아니…, 이건 뭡니까? 이러면… 지가 곤란한데요.”
“마, 받아두이소. 헐, 애들 고생하는데….”
촌지인지 뇌물인진 몰라도 두툼한 돈 봉투를 받고 보니 괜히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아쉬운 게 있으니까 그런 봉투를 애들 밥 사주라는 핑계로 내게 쥐어준 것이 아니겠는가. 하 사장이 돌아가고 나서 화장실에 들러 확인해본 바로는 백만 원짜리 자기앞수표 두 매를 비롯해 3백만 원이란 결코 적잖은 금액이 들어있었다.
하 사장이 그간의 학교행사는 물론 사계절마다 변화되어가는 대학캠퍼스 곳곳을 미리 찍어놨기에 졸업생들을 학과별로 일정을 잡아 캠퍼스를 배경으로 한 스냅사진과 학사모와 학사가운을 입힌 독사진을 찍게 하고, 또 한편으론 앨범에 삽입할 삽화 등도 그렸다.
그렇게 졸업생들 졸업사진 촬영과 졸업앨범을 편집하는 동안 보림사진관에 수시로 들락거렸다. 사진관에 별 볼일이 없어도 사진에 관심이 많았기에 더욱 자주 들렀던 것이다.
하말종 씨는 일반사진관과는 달리 촬영기자재만큼은 굉장한 것들로 갖추고 있었다.
“내가 장비 욕심은 쫌 유별나거든요. 헐, 아마 나보담 장비를 더 잘 갖춘 데가… 서울에 몇 군데 있을려나? 헐, 암튼 부산에서는 나 따라올 사진관이 없을 겝니다. 헐헐헐….”
하 사장은 말하는 습관부터가 좀 독특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스스로 독특해지려고 자못 노력하였는지도 모른다. 말을 끝낼 즈음 걸핏하면 ‘헐헐헐…’거리는 소리를 냈는데, 첨엔 그게 웃는 소린지 나름 감탄사인지 언뜻 구별이 되지 않았다. 어찌 들으면 숨을 헐떡이거나 목에 가래가 끼었을 때 나는 소리처럼 귀에 거슬렸다. 말하는 중간 중간에도 ‘헐…’이란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을 추임새처럼 끼워 넣는 것이 제 딴엔 그것도 멋으로 여겼나보다.
작달막한 키에 볼록하니 똥배까지 튀어나오고 커다란 두상에 보통 사람 코보다 두 배는 족히 되어 보일 주먹코가 하 사장을 조금은 어설퍼 보이게 했으나, 인간성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이게 린호프란 카메란데요. 헐, 아마 부산엔 이거 한 대밖엔 없을걸요. 헐, 에이바이텐(8×10″)까지 슬라이드로 찍을 수 있는 거지요. 어때요? 굉장하지요?”
하 사장은 육중해 뵈는 린호프의 자바라를 한껏 늘리면서 연신 린호프의 장점을 늘어놓았다.
“린호프의 좋은 점은 이 자바라의 유연성에 있는 거 같아요. 헐, 일반 카메라로 삘딩 아래에서 삘딩 전체가 나오도록 사진을 찍다보면 삘딩 윗부분이 사다리처럼 좁아지잖아요. 헐, 그걸 뭐라더라? 아오리라 카든가? 이 네 귀퉁이에 붙어있는 자바라 조절나사를 조정하다보면 삘딩이 수직으로 선 것처럼 찍힌다니까요. 아오리를 잡을 수 있는 카메란 이 린호프밖엔 없을걸요. 헐헐헐….”
소위 대형카메라의 제왕이라는 독일제 린호프를 그때 처음 구경하였다. 당시 그 카메라는 본체만 웬만한 아파트 한 채 값에 해당하리만큼 상당히 비쌌다. 그는 그 외에도 롤라이나 핫셀블라드 등 값비싼 명품 중형카메라를 비롯 수십 대의 각종 카메라와 그에 걸맞은 수십 종의 렌즈와 필터, 그리고 여러 개의 스트로브 등을 소유하고 있어, 그의 스튜디오는 촬영기자재박물관을 연상케 했다.
앨범편집이 끝난 이후에도 그의 사진관을 계속 드나들며 그로부터 사진과 관련된 많은 의견을 나누었고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이 카메라, 음청 비싸기도 하거니와 증말 귀한 거시여. 입학을 축하하는 의미루다 주는 선물잉께 대신 공부 잘혀야 한다.”
내가 함양중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 아버지는 자신이 오래도록 소중히 지녀왔던 독일제 카메라 라이카를 내게 주었다. 당시 그 카메라는 상당히 진귀한 것으로 잃어버리거나 고장이 나지 않도록 특별히 신경 써서 간직하라 일렀다.
그러나 그 카메라는 불과 두 달 만인 학교 봄 소풍 때 잠깐 한눈 판 사이에 도난당했고, 그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호되게 야단맞기도 했다.
그리고 이후로 카메라 사달라고 계속 떼를 쓰는 바람에 아버지는 마지못해 일제 캐논이란 카메라를 사주었다. 허나 그 카메라도 2년 반 가까이 사진을 찍어오다가 중학교 졸업기념 수학여행을 남해로 갔을 때 고장을 냈다.
“어이, 배천석이! 여기도 좀 찍어주라.”
“천석아! 나 좀 찍어줄래?”
“얌마! 지발 순서를 지키그라. 아까부텀 우리순서 기다렸다 아이가.”
그땐 카메라가 참 귀하디귀했고, 또 우리 일행 이백사십여 명 중에 카메라라곤 오로지 나만 갖고 있었기 때문에 사진 찍어달라는 성화에 잠시 쉴 틈조차 없었다. 어쩜 그 때문에 내 인기가 더 폭발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바다를 처음 본 촌놈들인지라 하나같이 바닷물이 위태롭게 닿을만한 자리에 비집고 서서 저 먼 바다를 배경으로 포즈를 잡았다. 따라서 해안의 들쭉날쭉한 바위 위를 이리저리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애들 스냅사진을 찍어주다가, 웬걸? 뾰족하게 튀어나온 바위 턱에 어쩌다 바지부리가 걸려 넘어졌는데 하마터면 바닷물 속에 거꾸로 곤두박질할 뻔했다.
가까스로 위기는 모면했지만 그 바람에 카메라를 놓쳐 바닷물에 ‘첨버덩’ 빠뜨렸던 것이고, 그 즉시 건져 올려 말린다고 애를 썼으나 이미 카메라 본체 안에 바닷물이 스며들어간 터라 결국 못 쓰게 된 것이다.
“맹물이라면 드라이로 말리면 된다카지만, 바닷물은 염분때매 딲아내봐야 소용움따카더라.”
카메라를 고치기 위해 일부러 부산까지 다녀왔던 아버지가 들려준 말이었다.
그리고 그 뒤 내가 서울 경복고등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했을 때, 입학 기념선물이라며 아버지가 세 번째로 사준 카메라는 보다 싸구려인 일제 페트리란 카메라였다. 그렇게 카메라는 성장기의 내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필수도구로 자리 잡게 되었다.
중학교 다닐 당시엔 카메라가 원체 귀하던 때라 소풍이나 운동회, 기념식 등 학교행사가 있을 때마다 촬영은 내가 도맡아했다. 이는 중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후부터 줄곧 학교미술부에 소속된 이래 여러 미술경시대회를 휩쓸면서 내 예술적 재능을 인정받기도 했지만, 실제 함양 일대 사진관의 사진사들보다 더 멋지게 사진구도를 잡는 것이 한몫했다.
당시 사진은 카메라가 귀한만큼 아무나 취미삼아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처음엔 아버지가 내 손에 카메라를 쥐어줬기 때문에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그보다 나의 사진에 대한 집착이 더 컸기에 사진세계에 점차 매료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학교행사 때마다 내가 마치 그 행사의 주인공인양 대접받는 것도 우쭐할만했다. 엄숙하다할 큰 행사 식장에서도 대열에서 마음 놓고 이탈할 수 있었음은 물론, 높은 단상 위나 쥐 죽은 듯이 도열해있는 학생들과 선생들 사이를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것도 큰 특권이라면 특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진은 내겐 큰 수입원이었다. 꽤 잘 산다는 집 외동아들이기에 여느 애들처럼 용돈이 궁할 리는 없지만 내 기술만으로 내 재능만으로 학생신분으로서는 결코 적은 금액이라 할 수 없는 돈을, 그것도 큰소리쳐가며 벌 수 있다는 것은 온몸이 짜릿하리만치 감칠맛 나는 일이었다.
어쨌든 카메라셔터를 누르면 누를수록 그것은 점점 더 큰돈이 되어 내 주머니 속에 쌓여갔다. 나중엔 계산이 더 밝아져 독사진이나 몇몇이 모인 사진은 아예 찍을 염두를 않고, 적어도 열 명 이상 모아놓고 사진을 찍었다.
“혼자서 뭔 멋으로 사진을 찍는다냐? 다함께 찍어야 나중에 기념이 되지.”
사진 찍히는 순서를 기다리려고 주변에서 쭈뼛거리는 애들까지 앵글 속에 강제로 쑤셔 넣으며 그럴듯한 핑계를 대지만, 내 얄팍한 속내까지 알 까닭이 없는 애들은 그 말에 깜빡 속아 넘어가기 마련이었다.
그만큼 필름을 아낄 수 있고 사진에 찍혀있는 머릿수대로 인화지를 뽑을 수 있다는 계산인데, 그것은 바로 수입의 극대화를 꾀한 것이었다.
“이건 좀 심한데?”
“야! 이것도 나라카며, 사진값을 달라카나?”
머릿수대로 사진을 뽑아 사진값을 받으려다보면 간혹 누군가는 볼멘소리로 따지기도 했다. 여러 얼굴사이에 가려 제 얼굴은 반쪽밖에 나오지 않았다든가, 옆모습이 멀찍이 찍힌 사진인데도 제돈 다줘야한다는 것이 억울하다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내 대답은 한결같았다.
“싫음 관둬.”
이 한 마디면 대개 따지려들던 애들조차 ‘괜히 밉보이면 그나마 사진 찍힐 기회가 영영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인지, 주눅이 들어 구겨진 얼굴을 펴게 마련이었다.
“아니…, 뭐… 그렇다는 거지 뭐….”
- 제3회에서 계속 이어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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