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의 등장과 그의 활약상
이성계의 집안은 고조부 이안사가 여진의 남경(당시 원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지금의 간도지역)에 들어가 원의 지방관이 된 뒤부터 차차 그 지역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증손자 춘은 원이 고려 출신의 이주민들에 대해 차별 정책을 실시하자 점차 원에 대해 회의를 품기 시작하고 원에서 등을 돌려 고려를 돕기로 결심하게 된다.
해서 이자춘은 아들 성계와 함께 고려가 실로 99년 만에 옛 땅을 회복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훗날 이자춘은 동북면의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4년 후인 1360년에 병사하고 그의 차남 이성계가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게 된다.
이자춘의 아들 성계는 1335년 화령부(지금의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났다. 이자춘과 최한기의 딸 최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담대했으며 특히 궁술에 뛰어났다.
이성계가 성년이 될 무렵인 14세기 중반의 한반도는 문인보다는 무인이 대접을 받는 시기였으며 1360년 고려의 관리가 된 지 4년 만에 이자춘이 병으로 죽자 이성계는 사병을 육성하여 동북면 지역에서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이듬해 10월에 독로강의 만호인 박의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면서 공민왕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홍건적이 고려를 침입하여 개경이 함락될 지경에 이르자 그는 사병 2천 명을 거느리고 수 도 탈환 작전에 참가해 가장 먼저 입성하는 성과를 올렸다. 1362년에 원의 나하추가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홍원 지방으로 쳐들어 오자 고려는 비로소 이성계에게 동북면병마사 벼슬을 제수하여 나하추 부대에 응전케 한다. 이로써 이성계는 27세의 나이에 문부를 겸비한 고려의 주목받는 관리로서 역사 전면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성계는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전쟁을 시작으로 1388년 위화도회군에 이르기까지 30여 년을 전쟁터에서 살다 시피 했지만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맹장이었다. 이성계는 승전할 때마다 위치가 올라갔으며 1362년 동북면병마사가 된 이후 같은 해에 밀직부사에 제수되고 1382년에는 동북면도지휘사, 1384년에는 동북면도원수문하찬성사가 되었으며 1388년에는 수상격인 문하시중 바로 아래인 수문하시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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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