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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크리스토퍼 라이히는 21세기 에스피오나지 스릴러의 전통을 잇는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작가. ‘넘버드 어카운트’Numbered Account와 ‘패트리어츠 미사일’The Patriots Missile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패트리어츠 미사일’은 2006년 국제스릴러작가연맹이 수여하는 최고작품상을 수상했다. 현재 서던캘리포니아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역자 이정윤은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다. 영국공영방송(BBC)과 서독공영방송(WRK)의 현지 코디네이터 및 리포터로 활동했다.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중이며 ‘사랑 그리고 여러 불가능한 소망들’을 우리말로 옮겼다
내용 소개
차가운 바람이 평원을 가로질러 불어오고 그 바람에 떠밀려온 나비 한 마리가 평원을 노닐고 있었다. 이 놀랍고도 자그마한 곤충은 날개를 팔랑이며 포물선을 그리듯이 오르내리며 하늘을 날고 있었다. 몸체와 달리 나비의 날개는 샛노란 바탕과 대조를 이루는 검은색 격자무늬를 띄고 있었다. 나비의 이름은 파필리오 파노프테스, '모든 것을 보는 자'라는 뜻의 별난 이름이었다.
나비는 날갯짓을 하며 전류가 흐르는 보안벽을 넘나들고 철조망 울타리 건너 접근금지 구역까지 날아 들어갔다. 철조망 울타리 너머에는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색깔과 종을 자랑하는 야생꽃밭이 펼쳐져 있었다. 주변 어디에도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사는 집, 헛간, 그 어떤 종류의 건축물도 없었다. 꽃잎 밑으로 살짝 드러나 보이는 채 마르지 않은 흙더미들이 꽃밭을 손질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긴 여정에도 불구하고 나비는 꽃을 보고 멈추질 않았다. 향기를 머금고 있는 꽃가루를 찾아다니거나 달콤한 과즙을 맛보지도 않았다. 대신 마치 공기 그 자체만으로 자양분을 얻을 수 있는 듯 날기만 했다. 그렇게 나비는 옅은 빛깔의 겨울 하늘 아래 반짝이는 노란 날개를 팔랑이며 그곳에 머물렀다. 라벤더 덤불 위에 앉아 휴식을 취하거나 험한 산에서 내려와 비옥한 초록 땅으로 흘러드는 시냇물을 마시지도 않았다. 사실 나비는 정확히 사방 1킬로미터를 경계로 하는 울타리를 벗어날 시도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다채로운 빛을 발하는 꽃밭 위를 맴도는 것에 만족하며 매일 밤낮을 잊은 채 쉬지도, 꿀을 빨지도 않고 앞뒤로 날아오르기만을 반복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 나쉬가 불어 닥쳤다. 바람은 빠른 속력과 엄청난 힘으로 앞에 놓인 모든 것을 강타하며 산맥을 지나 평원을 쓸고 지나갔다. 모진 바람을 나비는 이겨내지 못했다. 정해진 경계 안에서 맴돌기를 계속해 온 나비는 지치고 약해져 있었다. 세찬 바람이 불어와 나비를 들어 올렸고, 사나운 바람에 휘말려 빙글빙글 돌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연약한 몸체는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접근금지 구역을 순찰 중이던 경비대원 한 명이 흙바닥에 떨어져 있는 노란 물체를 발견하고는 지프를 멈췄다. 그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발목까지 자란 풀밭에 무릎을 접고 쭈그려 앉았다. 이제껏 보아 온 나비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우선 다른 것들에 비해 몸체가 컸다. 실크섬유 같은 외피에 돌출된 종잇장처럼 얇고 뾰족한 금속성 두 날개는 뻣뻣하고 단단했다. 솜털로 덮인 흉부는 두 동강이 나 있고 초록색 전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그는 나비를 바닥에서 주워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 역시 그 시설에서 일하는 다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군인이기 이전에 기술자였다. 자신이 목격한 것의 정체를 알아낸 그는 충격에 휩싸였다.
나비의 몸체 속에서 쌀 한 톨 크기의 알루미늄 처리가 된 배터리와 마이크로웨이브 발신기가 나왔다. 엄지손가락을 이용해서 나비의 더듬이를 짓누르자 껍질이 벗겨지면서 사람 머리카락만큼 가느다란 광섬유 케이블 다발이 드러났다.
아니야, 그는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빨리. 그럴 리가 없어.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갖가지 설명과 이론을 동원해 보았지만 어느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튀어나온 돌부리에 발이 걸려 바닥에 엎어졌다가 다시 일어난 그는 서둘러 지프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시각을 다투는 중대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무전기에 대고 서둘러 보고하는 내내 손마디가 부들부들 떨렸다.
"놈들이 우리를 찾아낸 것 같습니다."
(/ '프롤로그' 중에서)
1
조나단 랜섬은 고글에 붙은 얼음을 떼어 내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점점 악화되기만 하는 기상 상태 때문에 걱정스러웠다. 바람이 거칠게 울부짖으며 얼음과 모래를 얼굴에 뿌려댔다. 낯익은 바위투성이의 산봉우리들이 산과 계곡을 위협하듯 에워싸는 거대한 구름떼에 가려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몸을 앞으로 숙인 채 한 발 한 발 스키를 내딛으며 경사를 오르고 있었다. 스키 아래쪽에 부착된 나일론 실스킨이 눈을 움켜잡았다. 투어링 바인딩 덕분에 눈 위를 걷는 데도 아무 문제는 없었다. 서른일곱 살의 조나단은 큰 키에 날렵한 허리, 딱 벌어진 어깨를 갖고 있고, 꼭 죄는 양모 모자 아래 무성한 새치머리가 숨겨져 있었다. 짙은 와인색 눈은 스노고글이 보호해 주었다.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은 이틀 동안 까칠한 수염이 자라난 두 볼과 굳게 다문 입술뿐이었다. 낡은 스키 패트롤 재킷을 입었는데 산에 오를 때면 항상 입는 옷이었다.
뒤에서는 그의 아내 엠마가 빨간색 파카와 검정 바지를 입고 산비탈을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오르는 속도는 일정치 못했다. 세 걸음 오르고 쉬고, 두 걸음 오르고 쉬고를 반복했다. 이제 겨우 중간 지점을 지났을 뿐인데 이미 지친듯했다.
조나단은 스키를 언덕에 수직 방향으로 돌려놓고 스키폴을 눈 속에 꽂아 넣었다. “그대로 있어.” 양손을 입에 대고 소리쳤다. 응답을 기다려 보았지만 아내는 울부짖는 바람소리 때문에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머리를 낮춘 채 그녀는 계속해서 불안정하게 산을 오르고 있었다.
조나단이 옆걸음으로 경사를 내려갔다. 길은 가파르고 좁았으며, 한 쪽은 수직 암벽, 다른 한 쪽은 낭떠러지에 면해 있었다. 멀리 아래쪽에는 스위스 동부 그라우뷘덴주의 아로사 마을이 빠르게 움직이는 구름층 사이로 간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매번 이렇게 힘든 코스야?” 그가 다가가자 엠마가 물었다.
“지난번에는 당신이 나보다 먼저 정상에 올라갔잖아.”
“그건 8년 전 일이지. 나도 이제 늙었나 봐.”
“뭔 소리, 이제 서른둘인데. 아직 한창이야. 내 나이만 되어 보라고. 그 다음부터는 완전 내리막이야.” 조나단은 배낭을 뒤져 물 한 통을 꺼내 아내에게 건넸다. “기분은 좀 어때?”
“죽을 맛이야.” 그녀는 폴 위로 몸을 구부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셰르파를 불러야 될 것 같지 않아?”
“여기선 안 되지. 셰르파 대신 난쟁이 족이 있긴 하지만. 훨씬 영리하기는 하지만 힘은 그리 세지 않을 걸. 우리 힘으로 알아서 버텨야 한단 소리지.”
“정말이야?”
조나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몸에서 열이 너무 많이 나는 거 같아. 모자 좀 벗고 물을 가능한 한 많이 마셔.”
“여부가 있겠습니까, 의사 선생님. 분부대로 하지요.” 엠마는 양털 모자를 벗고 그렇지 않아도 갈증을 참고 있었다는 듯 물통 채 벌컥벌컥 들이켰다.
8년 전 이곳을 함께 오르던 그녀의 모습을 조나단은 속으로 떠올렸다. 둘이 함께 한 첫 등반이었다. 당시 그는 ‘국경 없는 의사회’의 아프리카 지부에 막 자리 잡은 신참내기 외과의였고, 그녀는 고집 센 영국인 간호사였다. 출발하기 전에 그는 그녀에게 이전에 산을 많이 올라 봤느냐고 물었다. “조금요.”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대로 된 등반은 한 번도 못해 봤지만.” 그렇게 말하고는 전문 산악인 뺨치는 솜씨로 그를 가볍게 제치고 정상에 먼저 도착했던 것이다.
“한결 나아졌어.” 엠마가 헝클어진 적갈색 머리를 손으로 손질하면서 말했다.
“정말이야?”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그녀의 담갈색 눈동자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미안해요.”
“뭐가?”
“잘 따라가지 못해서 말이야. 나 때문에 자꾸 느려지잖아. 그리고 지난 몇 년간 당신과 함께 와 보지 못한 것도 미안하구.”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난 그저 당신이 여기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 엠마는 고개를 들어 그에게 키스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도.”
“근데 말이야.” 그가 표정을 바꾸며 진지한 투로 말했다. “상황이 계속 안 좋아지고 있어. 아무래도 돌아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어.”
그 말에 엠마는 물통을 넘기며 이렇게 대꾸했다. “에이, 그건 말도 안 돼. 여기서 당신을 이긴 적도 있잖아. 이번에도 그럴 테니 잘 봐.”
“그럼 돈내기라도 할까?”
“더 큰 걸로 걸지.”
“오호, 그래?” 조나단은 물을 한 모금 들이키며 아내가 큰소리치는 게 듣기 좋다는 생각을 했다. 도대체 얼마만인가? 6개월? 아니 일 년은 된 듯했다. 만성두통에 시달리기 시작하며 아내는 몇 시간이고 어두운 자신만의 공간으로 숨어 버리기 시작했다. 정확히 언제였는지조차 모르겠다. 그녀가 파리를 다녀오기 전부터 그랬는데, 파리로 간 게 작년 7월이었다.
그는 소매를 걷어 올리고 순토 손목시계의 여러 기능을 작동시켜 보았다. 고도 9,200 피트, 기온 섭씨 영하 10도, 기압 900mb에서 계속 낮아지는 중. 그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기압이 바닥까지 떨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야?” 엠마가 물었다.
조나단은 물통을 배낭에 도로 집어넣었다. “좀 있으면 폭풍이 더 심해질 것 같아. 출발해야겠어. 정말 되돌아가긴 싫은 거지?”
엠마는 고개를 저었다. 자존심을 세우려는 게 아니라 결심이 단단히 선 것 같았다.
“좋아, 그럼. 당신이 앞장 서. 내가 뒤에서 따라갈게. 바인딩 좀 조절할 테니 잠간 기다려.”
무릎을 굽힌 채 조나단은 스키 앞쪽에 떨어지는 눈을 내려다보았다. 순식간에 스키가 눈으로 덮였다. 그러더니 스키 앞 끝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바인딩 조절할 생각은 달아나 버렸다.
그는 천천히 일어섰다. 머리 위로는 돌투성이의 석회암 정상까지 일천 피트나 펼쳐져 있는 암 빙벽 푸르가 노드원드가 까마득히 솟아 있었다. 거센 바람으로 인해 쌓인 눈이 빙벽 아래 모이면서 곧 질식할 것처럼 불안해 보이는 높은 경사면이 둑처럼 쌓여 있었다. 산악용어로는 ‘장전’이 된 것이었다.
입이 바짝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는 노련한 산악인이었다. 알프스산맥, 로키산맥, 심지어 한 시즌 동안 히말라야산맥을 등반한 경험도 있었다. 위험한 상황도 많이 겪었다. 다른 사람들은 헤쳐 나오지 못했을 때 혼자서 헤쳐 나오기도 했다. 그는 위험이 닥쳐왔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거 느껴져?” 그가 물었다. “곧 무너지려고 해.”
“무슨 소릴 들었어?”
“아니, 아직은 아니야. 하지만….”
저 너머 어디에선가…머리 위쪽 어딘가에서…멀리서 들리는 천둥소리가 산봉우리들을 넘어 울려왔다. 산이 흔들렸다. 푸르가의 눈 생각이 났다. 며칠 동안 계속된 추위로 눈이 얼어붙어 수십만 톤 무게의 거대 빙설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가 들은 것은 천둥소리가 아니라 새로 만들어진 얼음판이 갈라지면서 그 밑에 있는 더 오래되고 단단한 빙설로부터 분리되어 나올 때 내는 소리였다.
조나단은 산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전에도 한 번 눈사태에 갇혀 본 적이 있었다. 11분 동안 눈 아래 묻힌 채로 있어야 했다. 어둠속에 매장된 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얼마나 추웠든지 한쪽 다리가 뒤로 꺾여 무릎이 귀 바로 옆까지 올라와 있던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끝내 살아남았는데, 아래쪽으로 쓸려 내려가기 직전에 동료 한 명이 그의 패트롤 재킷에 있는 십자표시를 발견한 덕분이었다.
10초쯤 지나자 울리던 소리가 그쳤다. 바람이 잦아들고 기이한 정적이 감돌았다. 입을 닫은 채 그는 허리춤에 감아둔 로프를 풀어 한쪽 끝을 엠마의 허리에 단단히 감았다. 되돌아가는 것은 더 이상 택할 방법이 아니었다. 곧 들이닥칠 눈사태의 경로에서 벗어나는 게 급선무였다. 정면에 보이는 길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는 수신호를 보내자 엠마는 바짝 뒤따를 채비를 갖췄다. “준비 됐어?” 하고 그가 신호를 보내 물었다.
“오케이.” 대답이 돌아왔다.
조나단은 스키를 산 위쪽으로 향하고 출발했다. 길은 산 측면을 따라 가파르게 위로 나 있었다. 걸음을 빨리 한 채 앞으로 나아갔다. 몇 걸음마다 멈춰 서서 어깨 너머로 아내가 다섯 걸음 이상 떨어지지 않도록 확인했다. 바람이 동풍으로 방향을 바꿔 다시 불기 시작했다. 눈이 수평으로 불어 닥치면서 옷의 주름진 곳들을 할퀴었다. 발끝에 감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손끝에도 점점 마비증세가 오면서 나무토막처럼 굳어갔다. 시야가 20피트에서 10피트로 줄어들더니 이제는 코앞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계속해서 위로 오르고 있고, 협곡을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타는 듯이 욱신거리는 통증을 통해 알 수 있을 뿐이었다.
한 시간이 지나자 산등성이에 올랐다. 지칠 대로 지친 몸으로 그는 스키를 풀고 아내가 마지막 몇 피트를 올라오도록 도와주었다. 엠마는 스키를 가장자리 위로 들어 올리고는 곧바로 그의 품으로 쓰러졌다. 마치 경련이 일어난 것처럼 숨을 할딱거렸다. 그는 아내가 호흡을 가라앉히고 자기 힘으로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 껴안고 있었다.
그곳은 두 봉우리 사이의 능선이었기 때문에 바람이 성난 제트 엔진처럼 세차게 두 사람을 때렸다. 그러나 하늘은 일부 맑았고 잠깐 동안 발 아래로 프라우엔키르히 마을과 그 너머 다보스까지 이어지는 계곡이 눈에 들어왔다.
능선 반대쪽으로 스키를 타고 가서 주위를 살펴보았다. 20피트 아래 노출된 암석들 사이로 엘리베이터 통로처럼 가파른 눈길이 뻗어 있었다. “로만의 길이야. 여기만 무사히 내려가면 아무 문제없을 거야.”
로만의 길이란 지명은 이 지역에서 구전되는 일화에서 비롯됐는데, 스키를 타고 이 길로 내려가다가 눈사태를 만나 죽은 가이드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엠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조나단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내저으며 이렇게 내뱉었다. “너무 가팔라.”
“전에는 더 가파른 곳도 내려가 봤잖아.”
“아니야, 조나단. 저 낭떠러지 좀 봐. 다른 길은 없는 거야?”
“오늘은 그래.”
“그래도….”
“음, 이 능선을 내려가든지 얼어 죽든지 둘 중 하나야.”
그녀는 가장자리로 더 가까이 다가가서는 아래쪽을 자세히 보려고 목을 쭉 내밀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가슴에 파묻으며 뒷걸음질 쳤다. “미치겠네, 정말.”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곧이어 이렇게 말을 뱉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어쩌겠어. 한번 해 보자.”
“조금 내려간 다음 빠르게 턴. 그러면 별거 아니야. 아까도 말했지만 우린 전에 더 심한 곳도 내려가 봤잖아.”
엠마도 이번엔 좀 더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잠시 동안 그녀는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다고, 동상에 걸릴 위험에 처한 것도 아니고, 전에부터 자살 시도나 다름없는 이런 위험한 활강으로 자신을 시험해 보기를 기다려 온 사람처럼 보였다.
“좋아, 그러면.” 조나단은 스키를 벗은 다음 덮개를 벗겼다. 그런 다음 스키 한 짝을 도끼처럼 쥐고는 사방 3피트 정도 크기로 눈 조각을 잘라내서 가장자리 너머로 떨어뜨렸다. 눈 조각은 경사면에 세차게 부딪친 후 산 아래로 굴러 내려갔다. 여기 저기 어지럽게 눈자취가 남아 있었지만 경사면은 무너지지 않고 단단히 서 있었다.
“따라 내려와.” 그가 말했다. “내가 길을 만들어 나갈 테니.”
옆에 와서 선 엠마의 스키 끝이 가장자리 너머로 나가 있었다.
“뒤로 물러나.” 그가 서둘러 스키를 신으며 말했다. 안 봐도 아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엠마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먼저 갈게.”
“당신한테 이 힘든 일을 다 맡길 순 없어.”
“안돼, 그런 말은 입에도 담지 마!”
“딱 한 번만 더 할 게, 이번이 마지막이야. 알았지?”
“여보…안 돼!”
엠마는 몸을 밀치며 앞으로 나갔고, 잠시 공중에 떠 있더니 곧 경사면 위로 착지했다. 스키 장비가 눈얼음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약간 불안정한 자세로 착지한 그녀는 번개 같은 속력으로 비탈길을 가로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스키 아래쪽이 약간 비뚤게 놓여서인지 몸의 무게를 눈 위에 너무 실은 채 달리는 것만 같았다. 양손의 위치 또한 지나치게 높았고, 몸은 스키로부터 너무 떨어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통제가 잘 안 되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활주면 가장자리에 있는 바위가 조나단의 눈에 들어왔다. 턴을 해! 그는 속으로 외쳤다.
그녀와 바위와의 거리는 10피트쯤 되었다. 그리고 5피트. 다음 순간 완벽한 점프턴을 하면서 그녀가 방향을 틀었다.
조나단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엠마는 비탈길을 가로지르며 내달리다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턴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양 손은 몸 옆에 내려와 붙어 있고, 바닥에 숨어 있는 돌출 장애물들의 충격을 잘 흡수하도록 무릎도 알맞게 굽히고 있었다. 피로한 기색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승리의 주먹을 불끈 쥐고 들어올렸다. 아내가 해낸 것이었다. 30분 후면 그들은 프라우엔키르히의 스타펠알프 식당 부스에 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카페 루츠 두 잔을 앞에 두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태연하게 웃으며 오늘 일을 얘기하고 있을 것이다. 그 다음에는 호텔방으로 돌아가서 침대 위에 누울 테고, 그리고… 하지만 그 꿈은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세 번째 턴에서 엠마는 실패하고 말았다.
가장자리에 걸렸거나, 아니면 턴이 0.5초 늦는 바람에 스키가 바위를 친 것 같았다.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공포에 질린 채 그는 아내가 활강로 중앙으로 큰 흔적을 새기며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양손이 눈 쌓인 바닥을 움켜잡으려 했지만, 경사가 너무 가파르고 얼음 때문에 너무 미끄러웠다. 하강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다. 점점 더. 그러더니 솟아오른 턱에 부딪히면서 몸이 헝겊인형처럼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한쪽 다리가 꺾인 채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눈이 사방으로 뿜어져 오르고 양쪽 스키가 대포알처럼 하늘로 튀어 올랐다. 아내는 팔다리가 모두 접힌 채 데굴데굴 굴러 내려갔다.
“엠마!” 그는 미친 듯이 소리치며 비탈길을 타고 내려갔다. 양팔을 벌려 균형을 잡고 전신의 근육을 팽팽하게 당겨 수직으로 활강했다. 경사면을 가로질러 안개가 장막처럼 자욱했고, 시계 제로의 백색 상태에 놓이면서 잠시 동안이지만 위아래가 구분이 안 되었다. 스키를 평행으로 한 채 그는 안개 속을 직선으로 파고 들어갔다.
경사면 저 아래 엠마는 머리와 배는 바닥을 향하고 얼굴이 눈 속에 파묻힌 채 누워 있었다. 그는 아내의 앞 10피트 정도 거리에서 멈춰 섰다. 스키를 벗고 큰 보폭으로 눈을 헤치고 다가가며 아내한테서 움직이는 기색이 있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엠마.”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말 들려?”
배낭을 벗어 던지고 무릎을 꿇은 다음 아내의 입과 코에서 눈을 털어냈다. 한 손을 등에 가져다 대니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게 느껴졌다. 다행히도 맥박은 안정적으로 세차게 뛰고 있었다. 그의 배낭 안 나일론 그물 가방에는 예비 모자, 장갑, 고글, 그리고 캐필린 셔츠가 들어 있었다. 셔츠를 접어 아내의 뺨 밑에 받쳐주었다.
바로 그때 엠마가 몸을 움직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런, 젠장.”
“가만히 있어.” 그는 응급실에서 쓰는 명령조로 소리쳤다. 그리고는 한 손으로 허벅지부터 시작해서 두 다리를 살펴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아야…그만!”
조나단은 손을 뗐다. 무릎 위 몇 인치쯤에 뭔가 날카로운 게 바지 안쪽에서 솟아올라 있었다. 흉측스런 돌출 부위를 보고 그는 그게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부러진 거지, 그렇지?” 엠마는 눈을 크게 뜨고 빠르게 깜빡거리며 물었다. “발가락을 구부릴 수가 없어. 밑에서 철사 뭉치로 묶어놓은 느낌이야. 너무 아파, 조나단. 엄살이 아니야.”
“진정해. 내가 좀 볼 게.”
스위스 군대 칼을 사용해서 그는 아내의 스키 바지를 길게 잘라낸 다음 천을 조심스럽게 찢었다. 부러진 뼈가 방한내복을 뚫고 삐져나오고, 뼈 주위 천은 피로 젖어 있었다. 대퇴골 복합골절이었다.
“솔직히 말해 줘, 얼마나 다친 거야?”
“별로 안 좋아.” 그는 마치 뼈에 살짝 금이 간 정도라도 되는 듯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그리고 진통제 애드빌 다섯 알을 꺼내 물과 함께 삼키도록 도와주었다. 이어서 응급 상자에서 꺼낸 접착테이프로 스키 바지 찢어진 부분을 다시 봉했다. “등을 바닥에 대고 좀 누워 있어야겠어. 알았지?”
엠마가 끄덕여 보였다.
“먼저 다리를 고정시킬 게. 뼈가 움직이지 않도록 해야 돼. 지금은 그냥 가만히 있어.”
“맙소사, 조나단, 그럼 내가 이 꼴로 어디 다른 데로 가기라도 할까 봐?”
조나단이 경사면을 올라가 아내의 스키와 폴을 찾아 왔다. 폴 대를 부러진 다리 양 옆에 대고 등산 로프를 적당한 길이로 잘라 한쪽 끝을 묶은 다음 종아리부터 허벅지까지 둘둘 감았다. 그런 다음 아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가죽 지갑을 건넸다. “자.”
엠마는 지갑을 이빨로 꽉 물었다.
조나단은 부러진 다리를 폴 대에 붙여서 감은 로프를 천천히 조였다. 엠마가 숨을 한 번 크게 빨아들였다. 이번에는 로프의 다른 쪽 끝도 묶은 다음 아내가 등을 대고 눕도록 몸을 뒤집은 다음 머리가 다리보다 높은 곳으로 가도록 뉘였다. 그런 다음 아내의 등 뒤쪽 경사면을 앉을 수 있게 손질했다. “좀 나아?”
엠마는 얼굴을 찡그려 보였는데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아내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괜찮아, 구조대를 불러 볼 게.” 그리고 재킷에서 무전기를 꺼냈다. “다보스 구조대.” 바람을 등지고 이렇게 불렀다. “응급상황임. 푸르가 남쪽 방향 로만의 길 아래쪽에 부상당한 스키어가 한 명 있음. 오버.”
돌아오는 건 정적뿐이었다.
“다보스 구조대.” 반복해서 불렀다. “긴급 구조를 요하는 응급상황임. 응답하라.”
요란한 백색 소음만 들려왔다. 다시 시도해 보았으나 역시 응답이 없었다.
“날씨 탓이야.” 엠마가 말했다. “다른 채널을 사용해 봐!”
조나단은 다른 채널로 돌렸다. 몇 년 전 그는 알프스 산맥에서 스키 순찰대원 겸 교관으로 일했는데, 그때 지역 내 모든 응급 구조대의 주파수를 맞출 수 있도록 무전기를 조정해 놓았다. 다보스, 아로사, 그리고 렌처하이데뿐만 아니라 주 경찰을 포함해서 스위스 알파인 클럽, 그리고 스키 타는 사람들과 등산객들에게 ‘미트 웨건’, 다시 말해 고기 배달차라 불리는 헬리콥터 구조팀 레가에게도 연락할 수 있게 해놓았던 것이다.
“아로사 구조대. 푸르가 남쪽 면에 부상당한 스키어가 있음. 긴급 지원 바람.”
역시 응답이 없었다. 무전기를 얼굴에 가까이 대고 보았더니 전원 등이 약하게 깜빡거리고 있었다. 허벅지에 대고 두드려 봤더니 불빛이 한 번 깜빡이더니 꺼져 버렸다. “전원이 나갔어.”
“나갔다고? 무전기가? 왜? 어젯밤에 확인했잖아.”
“그땐 괜찮았어.” 몇 번 켰다 껐다 해보았지만 무전기는 다시 켜질 것 같지 않았다.
“배터리 문제야?”
“모르겠어. 어제 새 걸 넣었는데.” 그는 장갑을 벗고 내부를 살펴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배터리 문제가 아니고 전선이야. 전원이 전송장치에 연결이 안 돼 있어.”
“그럼 연결해.”
“못 해 여기서는. 도구가 있어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는 무전기를 가방 안에 던져 버렸다.
“전화기는 어때?” 엠마가 물었다.
“전화기? 여긴 항상 통화 이탈 지역이잖아.”
“그래도 해 봐.” 그녀는 다그치듯이 말했다.
조나단의 핸드폰 화면 속에는 포물선 모양의 안테나 신호 아이콘 위로 가로선이 쫙 그어져 있었다.
일단 레가의 번호를 눌러 봤지만 전화는 걸리지 않았다. “안 걸려. 먹통이야.”
엠마가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누군가에게는 연락을 해야 하잖아.”
“아무한테도 연락이 안 돼.”
“무전기 다시 켜 봐.”
“뭣하러? 말했잖아. 고장 났다고.”
“그냥 하라면 해!”
조나단은 아내 옆에 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여보, 잘 될 거야.” 그는 자기가 낼 수 있는 가장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내가 스키를 타고 내려가서 구조대를 데려올 게. 당신이 위치 탐지기만 갖고 있으면 내가 당신을 찾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을 거야.”
“날 놔두고 가면 안 돼. 그 신호기가 있다고 해도 돌아오는 길은 절대 못 찾을 거야. 사방 20피트도 안 보이는데. 난 얼어 죽을 거야. 그럴 순 없어… 그렇게는 못해….” 말끝이 흐려지고 말았다. 그녀는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거의 성공할 뻔했는데. 정말이야…그 마지막 턴. 정말 조금 늦어 버렸어….”
“내 말 잘 들어. 당신은 괜찮을 거야.”
엠마는 그를 올려 보며 물었다. “정말 그럴까?”
조나단이 그녀의 뺨에서 눈물을 닦아주며 대답했다. “내가 약속할 수 있어.”
그는 배낭에 손을 뻗어 보온병을 찾아 아내가 뜨거운 차를 한잔 마시도록 거들어 주었다. 아내가 차를 마시는 동안, 그는 아내의 스키를 가져와 뒤편에 X 표시를 만들고 나중에 먼 곳에서도 보이도록 표시를 해놓았다. 그리고는 입고 있는 순찰대 재킷을 벗어 아내의 가슴 위에 포개놓았다. 모자를 벗어 아내의 모자 위에 덧씌운 다음 목까지 덮이도록 끌어당겨 내렸다. 마지막으로 배낭에서 비상용 담요를 꺼내 조심스럽게 아내의 등 아래로 밀어넣어 가슴까지 감싸며 덮었다. 담요엔 ‘헬프’라는 큼지막한 형광 오렌지색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항공 구조요청을 할 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15분마다 차를 조금씩 따라 마셔.” 아내의 손을 잡으며 그가 말했다. “계속 음식을 섭취하고 무엇보다 절대로 잠이 들면 안 돼.”
엠마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녀는 혼신의 힘을 대해 그의 손을 맞잡고 있었다.
“차 마시는 것 잊지 말고. 15분마다 꼭….”
“그만하고. 어서 가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그의 손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꼭 쥐더니 내려놓았다. “점점 더 무서워지려고 해. 어서 가요.”
“최대한 빨리 올 게.”
엠마가 그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조나단…그렇게 자신 없는 표정은 하지 말아요. 당신은 지금까지 나와의 약속을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는 사람이잖아.”
2
서부 다보스 지역에서 300킬로미터 떨어진 수도 외곽에 위치한 베른공항에는 아침부터 눈이 내리고 있었다. 제설작업을 하러 온 차량들이 무서운 기세로 활주로를 누비며 눈을 치우고 있었다. 마치 알프스를 패러디 해놓은 것처럼 쌓아놓은 눈 더미를 유도로 입구 쪽에다 내다 버렸다.
14번 활주로 서편에서는 한 무리의 남자들이 몸을 웅크리고 모여 서 있고 모두들 시선은 하늘을 향해 있었다. 누군가를 체포하기 위해 비행기 착륙을 기다리며 모여 있는 것이었다.
남자 한 명이 그들 무리에서 약간 비켜 서 있었다. 쉰 살의 마르커스 폰 다니켄은 그리 크지 않은 키에 입 꼬리는 아래로 처져 있고, 검은 머리는 영국 근위보병의 까칠한 턱수염처럼 짧게 잘랐다. 한마디로 엄숙함을 풍기는 매서운 인상의 소유자였다. 지난 6년간 그는 약칭 SAP로 알려진 정보분석보안국을 이끌어 왔다. 극단주의자, 테러리스트, 그리고 타국의 스파이들로부터 자국의 안보를 지키는 것이 SAP의 임무였다. 미국에선 FBI, 영국은 MI5가 그런 역할을 수행한다. 폰 다니켄은 추위에 몸을 떨며 비행기가 착륙하기만을 기다렸다.
“현재 상황이 어떤가?” 그는 옆에 서 있는 국경경비대 소령에게 물었다.
“십분 후면 활주로를 폐쇄할 거랍니다. 비행 시정이 정말 고약하군요.”
“항공기 상태는?”
“엔진 한쪽이 고장입니다.” 소령이 대답했다. “다른 하나는 현재 과열 상태입니다. 착륙 시도를 하려고 기수를 막 틀었습니다.”
폰 다니켄은 하늘을 살펴보았다. 활주로에 깔린 엷은 안개 사이로 노란 불빛의 착륙유도등이 깜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름에 가려져 있던 항공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출발한 걸프스트림 G-4기였다. 모든 서방국가 정보국에선 테일 넘버가 N415GB인 그 항공기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2003년 2월 밀라노 시내에서 비밀리에 체포된 극단주의 이슬람 성직자인 아부 오마르를 태우고 이탈리아를 출발, 독일을 거쳐 이집트에 도착하여 동족의 손에 넘겨 심문받게 했던 바로 그 항공기였다.
마케도니아에서 체포한 레바논계 독일 시민권자 칼레드 엘 마스리란 남자를 태워 아프가니스탄 카불 외곽에 위치한 ‘솔트 핏’ 감옥으로 이송한 적도 있었다. 막상 이송하고 보니 그는 테러활동 혐의를 받는 칼레드 엘 마스리와 동일인물이 아닌 것으로 판명났다.
한 건의 성공과 한 건의 실패. 최근 들어서는 늘 겪는 일이라고 폰 다니켄은 생각했다. 중요한 건 포기하지 않고 게임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항공기가 아스팔트를 세차게 내리치며 착륙했다. 타이어에서 물과 얼음조각들이 뿜어져 나오고, 배플이 닫히며 엔진에서 굉음이 났다.
“나쁜 놈들.” 다소 긴 붉은 머리와 교수들이 많이 쓰는 동그란 테 안경을 쓴 마른 체구의 수척해 보이는 남자가 말을 내뱉었다. “어서 저 인간들 상판때기를 보고 싶군.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본때를 보여줄 거야.” 그 남자는 스위스의 법무장관 알폰소 마티였다.
마티는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스위스 마라톤 국가대표 선수로 뛴 경력이 있었다. 당시 그는 더위에 지친 다리를 술 취한 사람처럼 흐느적거리며 올림픽 경기장으로 겨우 들어섰다. 응급의료진이 말리려고 했으나 그는 그들을 밀쳐내고 끝까지 뛰었다. 그리고 결승선을 넘자마자 쓰려졌고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됐다. 아직도 그를 영웅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고, 다르게 생각하는 이들도 물론 있었다.
“절대로 실수하면 안 되네.” 마티가 폰 다니켄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우리 체면이 달린 문제야. 스위스에선 용납될 수 없는 일이야. 우린 중립국이고, 이번이야말로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할 기회란 말일세.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겠지?”
노련한 폰 다니켄은 언제 침묵을 지켜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무전기를 입에 가져다 대고 이렇게 말했다. “내 명령이 있기 전까진 라이트를 켜지 말 것.”
100피트 떨어진 곳에선 여러 겹으로 설치한 바리케이드 뒤에서 경찰차량 몇 대가 진입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폰 다니켄은 왼쪽을 흘긋 쳐다봤다. 다른 쪽 바리케이드 뒤에는 중무장한 국경수비대원 열 명을 태운 장갑차 한 대가 대기 중이었다. 그는 무력행사를 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며 반대했지만 마티는 요지부동이었다. 벼르고 벼른 날이 드디어 왔기 때문이라는 말이었다.
“조종사가 항공기에서 내리게 해달라는 요청을 해 왔습니다.” 국경경비대 소령이 보고했다. 관제탑에서 커스텀 램프로 안내 중입니다.”
폰 다니켄과 마티는 표식이 없는 차량에 올라타고 지정된 파킹 지점으로 이동했다. 다른 사람들이 탄 차량도 그 뒤를 따랐다. 걸프스트림기가 활주로에서 방향을 틀며 커스텀 램프를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폰 다니켄은 비행기가 완전히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 “전원 출동.”
파란 불빛과 하얀 불빛이 검회색 하늘을 밝혔다. 숨어 대기하던 경찰차들이 쏜살같이 항공기를 포위했다. 장갑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공격 위치를 잡았고, 장갑차 위에는 병사 한 명이 50구경 포탑포를 잡고 조준자세를 취했다. 타격 장비를 입은 특공대원들이 차량에서 쏟아져 나와 비행기를 반원으로 둘러싸고 반자동 소총을 가슴 위로 받든 채 탑승구를 겨냥했다.
폰 다니켄은 팩스 한 장 때문에 이 난리를 피워야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는 차에서 내리며 권총의 탄창이 비어 있는 것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잠금장치가 되어 있는지 재차 확인했다.
세 시간 전 스톡홀름 주재 시리아 대사관에서 본국의 수도 다마스쿠스로 팩스 한 장을 보냈는데, 그 내용은 중동지역을 향해 가는 여객기 한 대의 승객명단이었다. 이를 스위스의 정찰위성 오닉스가 중간에서 가로챘다. 탑승자는 조종사, 부조종사, 그리고 두 명의 승객까지 모두 네 명이었다. 승객 한 명은 미국 정부 요원이고, 다른 한 명은 서방 12개국 사법 당국에서 인도 요구를 하고 있는 테러리스트였다. 가로챈 내용은 삽시간에 지휘부에 보고됐다. 팩스 사본 한 부는 폰 다니켄에게 이메일로 보내졌고, 다른 한 부는 마티에게 보내졌다.
사건은 거기까지였다. 여느 경우와 마찬가지로 ‘추가 행동 금지’란 딱지가 붙은 정보 사건으로 마감되는 듯했다. 그런데 문제의 항공기가 스위스 항공교통국에 무전을 보내 엔진 한 쪽이 고장 나 착륙이 요구되는 상황이니 비상착륙 허가를 해달라는 요청을 해오며 상황이 바뀌었다.
항공기의 앞문이 바깥쪽으로 열리며 계단이 동체에서 풀려나왔다. 폰 다니켄보다 앞장 서 걷고 있던 마티의 걸음걸이가 점점 빨라졌다. 조종사가 출입구에 나타났다. 법무장관은 수색영장을 내밀며 말했다. “인권에 관한 제네바협약에 위배되는 범죄인 호송이 이뤄지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소.”
조종사는 영장을 제대로 보지도 않은 채 “착오인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부조종사와 팔룸보씨 외에는 그 누구도 탑승하지 않았습니다.”
마티는 “착오는 무슨”이라는 대답과 함께 조종사를 밀치며 기내로 들어섰다. “스위스 영토에서는 범죄인 특별송환을 인정하지 않소. 폰 다니켄 경감, 기내 수색을 실시하게.”
폰 다니켄은 기내 통로를 걸어 들어갔다. 널찍한 가죽 시트에 승객 한 명이 혼자 앉아 있었다. 마흔 살쯤으로 보이는 백인 남성으로 삭발에 가까운 머리와 다부지고 넓은 어깨에다 냉정해 보이는 회색빛 눈을 가지고 있었다. 첫눈에 보기에도 자기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노련함이 엿보였다. 비행기를 에워싸고 있는 돌격대의 모습이 남자가 앉은 좌석의 창을 통해서도 또렷하게 보였다. 남자는 별로 걱정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폰 다니켄은 듣기 좋은 영국식 발음의 유창한 영어로 말했다. “당신이 팔룸보씨요?”
“그렇게 묻는 그쪽은?”
폰 다니켄은 자신을 소개하며 신분증을 제시했다. “당신이 왈리드 가싼이라는 죄수를 이송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내 말이 맞습니까?”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대답한 팔룸보는 두 다리를 꼬며 자세를 고쳐 앉았고, 폰 다니켄의 시선은 그가 신고 있는 앞코가 단단한 부츠로 옮겨갔다.
“기체를 좀 수색해도 되겠습니까?”
“여긴 스위스 영토 아니오. 마음대로 하시오.”
폰 다니켄은 그 승객에게 수색이 끝날 동안 자리를 지켜달라는 부탁 아닌 지시를 한 다음 뒤쪽으로 갔다. 접시와 잔이 주방 싱크대에 쌓여 있었다. 모두 네 세트였다. 기장과 부기장, 그리고 팔룸보. 누군가가 더 있었다는 말이다. 화장실 수색을 마치고 다시 뒤로 가서 해치를 열고 수화물 칸을 조사했다.
“없습니다.” 폰 다니켄은 마티에게 무전을 보냈다. “아무도 없습니다. 객실과 화물칸, 모두 이상 없습니다.”
“이상이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마티가 말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여행 가방에 숨긴 게 아닌 이상 우리가 찾는 자는 이 항공기 안에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계속 수색해.”
폰 다니켄은 화물칸과 빈 객실을 다시 뒤져 보았다. 아무 것도 나오지 않자 앞쪽 문을 닫고 승객 칸으로 되돌아왔다.
“몽땅 다 뒤져 봤는가?” 조종사 옆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던 마티가 물었다.
“아래위로 샅샅이 뒤졌습니다만 팔룸보 요원 외 다른 탑승객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게 말이 되는가.” 마티는 힐난하듯 폰 다니켄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 비행기에 죄수가 탑승하고 있단 증거도 있잖은가.”
“증거라니요, 무슨 증거죠?” 팔룸보가 물었다.
“장난 칠 때가 아니오.” 마티가 이렇게 대꾸했다. “우린 당신이 누군지, 또 누구를 위해 일하는지도 다 알고 있소.”
“알고 있다,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이쯤에서 말씀을 드려도 되겠군요?”
“뭘 말한다는 거요?” 마티가 물었다.
“당신들이 찾고 있는 그 남자를 불과 30분 전 당신네 영토의 높은 산 위에다 떨어뜨려 주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늘 알프스에 가보고 싶단 생각을 했다 길래.”
마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정말로?”
“엔진에 이상이 생긴 게 그 때문인지도 모르죠. 그것도 아니라면 거위 때문이었나?” 팔룸보는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창밖을 응시했다.
폰 다니켄이 법무장관 앞에 나서며 말했다. “장관님, 우리가 입수한 정보가 틀렸던 것 같습니다. 죄수는 없습니다.”
마티는 화가 치민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두 어깨가 격하게 떨렸다. 그는 승객에게 인사 대신 고갯짓을 해 보이고는 곧바로 항공기 밖으로 걸어 나왔다.
특공대원 한 명만 출입문을 지키고 서 있었다. 폰 다니켄은 그에게 손을 흔들어 내보냈다. 그 대원이 계단 아래로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폰 다니켄은 다시 팔룸보에게 돌아섰다. “우리 전문가들이 가능한 한 지체 없이 엔진을 수리해 드릴 것입니다. 날씨 때문에 공항이 계속 폐쇄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길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로슬리란 이름의 호텔이 있습니다. 나름 쾌적한 곳입니다. 불편을 끼쳐드린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사과는 받아들이겠습니다.” 팔룸보가 대답했다.
“그나저나. 이걸 바닥에서 주웠습니다.” 폰 다니켄은 이렇게 말하며 그 미국 중앙정보부 CIA 요원에게 다가가 작고 단단한 물질을 손에 쥐어 주었다. “혹시 우리 측에서도 관심을 보일만한 정보가 있다면 부디 협조를 아끼지 말아 주십시오.”
폰 다니켄이 나가자 팔룸보는 꽉 쥐었던 손을 폈다. 손 안에는 피 묻은 엄지손톱이 쥐어져 있었다.
3
“아내가 안 보여.”
조나단은 로만의 길 아래서 200미터 떨어진 산등성이 위에 서 있었다. 바람이 불규칙하게 울부짖으며 불어 닥쳐 백시현상이 일어나 잠시 앞이 캄캄해지는가 싶더니 점차 사그라졌다. 쌍안경을 들어 눈으로 가져갔다. 스키를 이용해 십자 모양으로 표시해 둔 지점이 눈에 들어왔고 펄럭이는 구급용 담요에서 ‘헬프’라는 글자도 보였다. 왼편으로 조금 더 움직여 보니 오렌지색 안전 눈삽도 있는데 엠마만 보이지 않았다.
세 명의 다보스 구조대원들을 뒤로 하고 조나단은 산등성이까지 올라갔다. 구조요청을 하러 스키를 타고 산을 내려갔던 게 벌써 네 시간 전의 일이다. 십자로 놓인 스키 바인딩과 아내의 배낭 일부만이 쌓인 눈 사이로 보였다. 배낭을 열어 보고 샌드위치와 에너지 바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보온병도 비어 있었다. 그는 가방을 힘없이 떨어뜨렸다. 엠마가 누웠던 자리의 자국이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자리를 옮긴 지 그리 오래된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어깨에 두른 비콘을 작동시킨 다음 전 방위로 한 바퀴 몸을 돌렸다. 비콘에는 100미터까지 감지할 수 있는 자동유도장치가 장착되어 있었다. 장비에서 삐-하고 초기 작동을 알리는 소리가 나더니 곧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인디언 북소리처럼 쿵쿵 하며 나는 눈 다져지는 소리만이 산허리를 감돌고 있었다.
“신호가 좀 잡히나요?” 곁에 다가온 구조대장 세프 스타이너가 물었다. 작은 키에 왜소한 편인 스타이너는 두 뺨이 움푹 들어가고 눈가에는 기다란 흉터가 있는 사람이었다.
“아니, 아무 소리도요.”
그때 눈 위에 핀 진홍빛 꽃잎 같은 게 눈에 뜨였다. 조나단은 몸을 숙여 핏자국을 만져 봤다. 멀지 않은 거리에 핏자국이 하나 더 있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또 자국이 하나 더 보였다. “이쪽이요.” 다른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더 이상 가면 안돼요.” 스타이너가 이렇게 경고했다. “몇 미터 안 가 크레바스가 있습니다.”
“크레바스라고요?”
“꽤 깊은 놈입니다. 빙하 밑바닥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조나단은 눈을 가늘게 뜨고 갈라진 암벽의 틈을 관찰해 봤지만 하얀 벽 뒤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로프를 좀 갖다 주세요.” 그는 암벽을 타기 위해 스키 장비를 벗고 하단 벨트를 착용한 다음 로프를 허리에 맸다.
“조심하세요.” 스타이너도 스키를 벗어던지고 자기 벨트로 조나단을 지탱하며 말했다. “당신까지 잃을 순 없습니다.”
조나단은 몸을 돌려 작은 체구의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아내를 잃은 게 아닙니다.”
바늘로 콕콕 찌른 것처럼 나 있는 미세한 핏자국을 추적하는 일이 처음엔 쉽지 않았다. 곧이어 핏방울이 굵어지고 나타나는 빈도수도 잦아지더니 나중에는 아예 한 줄로 쭉 뻗은 핏자국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석류 시럽이 든 캔에 구멍을 내서 눈 위에 죽 부은 것 같았다. 문제는 이게 석류 시럽이 아니라 산소를 함유한 동맥혈이라는 점이었다.
조나단은 아내가 여길 지나간 시점이 궁금했다. 5분 전? 아니면 10분쯤 됐나? 몸을 좀 더 수그리고 살펴보니 다치지 않은 쪽 다리의 발자국과 부상당한 다리를 질질 끌며 걸은 흔적이 보였다. 바로 그때 오목하게 솟은 눈 언덕이 보이고 언덕 한가운데 깊은 구덩이가 있었다.
그는 배를 바닥에 댄 채 몸을 구덩이 입구로 밀어 넣은 다음 안으로 손전등을 비추었다. 폭이 10미터는 됨직하고 빙하와 암석으로 이뤄진 바닥이 보이지 않는 통로가 손짓하고 있었다. 몸을 한쪽으로 기울여 호밍 비컨을 확인해 보았다. 숫자판이 깜빡이더니 98이란 수치가 떴다. 98미터라면 300피트가 조금 넘는 거리다. 배의 힘이 풀렸다.
“신호가 좀 잡히나요?” 스타이너가 물었다. “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까?”
“예”라고 대답은 했지만, 그 역시 확신을 가지고 한 말은 아니었다. “내려가 볼게요. 온 빌레이.” 조나단은 곧바로 내려갈 자세를 취하며 이렇게 말했다.
“빌레이 온.” 스타이너가 대답했다.
얼음도끼로 입구를 좀 더 넓혔다. 눈 한 무더기가 입을 쫙 벌리고 있는 크레바스의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먼저 부츠 신은 다리를 흔들어 넣은 다음 몸을 계속 움직이며 가슴께까지 밀어 넣었다. 어둠 속으로 떨어지며 몸이 얼음벽에 부딪혔고 안전 로프가 팽팽해지며 몸을 잡아 주었다. “들어왔습니다.”
발로 벽을 밀치고 손으로 로프를 조정하면서 점점 더 깊이 내려갔다. 손전등을 비추자 얼음여왕이 머무는 영원의 궁전처럼 천연 요새가 자태를 드러냈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이자 착각이었다. 크레바스는 아래 깔린 암석 지층이 지속적으로 휘돌아가는 힘에 의해 넓어지기도 좁아지기도 하며 계속 변하는 유동적인 상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10미터 아래쪽에 검은색과 흰색 무늬의 물건이 암석의 뾰족한 부분에 걸려 있는 게 포착됐다. 엠마의 캡 모자였다. 그는 시계추처럼 몸을 앞뒤로 흔들면서 얼음벽에 몸을 튕겨 반동을 시도했다. 세 번째 시도에서야 아슬아슬하게 몸을 수평에 가깝게 기울여 팔을 뻗어 그 물체를 움켜잡았다.
그는 캡 모자를 손에 든 채 몸을 고정시키면서 암석이 있는 곳을 향해 손전등을 비췄다. 암석 위에 쌓인 눈이 혈액과 엉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이번 경우에는 포도송이만한 핏자국만 보일 뿐 사람이 지나간 흔적 같은 건 없었다. 더 이상 자신을 속일 수가 없었다.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너무나 확연했다. 엠마는 혼자 산을 내려가려고 했고, 움직이는 와중에 부러진 뼈가 대퇴동맥에 손상을 입힌 것이었다. 그 동맥은 심장에서 보낸 혈액을 하체 말단부, 즉 다리에서 발끝까지 보내는 주요 통로이다. 외과의사인 그는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지혈대가 없으면 몇 분도 채 안 되어 과다출혈로 사망했을 것이다. 쉽게 말하면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죽는 것이다.
비컨을 확인했다. 89미터. 방향지시기가 아래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크레바스 밑바닥을 향해 전등을 비춰 봤다. 그곳은 망각의 세계였다.
“로프를 더 내려 봐요.” 그가 외쳤다.
“로프 여분이 25미터밖에 안 남았어요. 그게 전부라고요.”
위를 흘깃 올려다보니 내려온 틈새 입구가 밤하늘에 난 작은 구멍처럼 밝게 드러나 보였다. 여분의 줄을 묶은 다음 몸이 한 차례 출렁 하고 다시 하강을 시작했다. 천천히 줄을 풀면서 10피트 마다 멈춰 주위에 등을 비춰 장애물을 살피며 엠마를 찾아보았다. 비컨의 숫자가 점점 내려갔다. 85. 80. 75. 머리 위 세상으로부터 빛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얼음벽이 희미하게 푸른색으로 빛났다. 갑자기 밧줄이 팽팽해졌다.
“이게 전부입니다.” 스타이너가 소리쳤다.
조나단은 손전등의 옅은 빛줄기로 빙하에 색을 입히듯이 천천히 주변을 비추었다. 붉은색의 정체 모를 물체가 보였다. 아내에게 벗어준 패트롤 재킷인가? 몇 인치 왼쪽을 비춰 보니 구릿빛으로 반짝이는 가는 물체 한 가닥이 보였다.
엠마의 머리카락?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로프를 더 내려 줘요. 조금만 더.”
“더 이상 없어요.”
“조금만 더 내려요.” 명령하듯 소리쳤다.
“그럴 시간이 없어요. 작은 눈사태가 막 우리 뒤편 능선을 날려 버렸어요. 산 전체가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릅니다.”
빛줄기를 따라 시선을 옮기자 빨간 조각이 시야에 들어왔다. 손전등을 1인치 정도 오른쪽으로 옮겼다. 그가 벗어준 재킷에 있는 십자문양이었다. 구릿빛으로 반짝이던 것은 바로 아내의 머리카락이었다.
‘엠마’ 하고 불러 보았지만 그 소리는 목이 메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내의 윤곽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엎드려 있었고, 한 팔을 마치 도움을 요청하듯 머리 위로 뻗어 있었다. 일이 크게 벌어지고 말았다. 그녀 주변의 빙하는 하얀색이 아닌 어두운 색을 띄고 있었다. 아내는 자신이 흘린 피가 고인 웅덩이 위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아내가 있어요. 아내 있는 곳까지 내려갈 수 있어요.”
“당신 아내는 100미터 높이에서 떨어졌습니다.” 스타이너가 말렸다. “아직 살아 있을 리가 없습니다. 어서 나오세요. 우리 네 사람의 목숨까지 위태롭게 됩니다.”
“엠마!” 조나단은 큰 소리로 외쳤다. “여보, 나야. 조나단. 아직 정신이 있으면 손이라도 움직여 봐.”
아내의 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암벽 틈 사이로 그의 목소리만 메아리쳤다.
“소리 지르지 말아요.” 놀란 목소리로 스타이너가 말했다. “우리까지 죄다 죽일 생각입니까.”
로프를 확 낚아채는 느낌이 들었다. 잡아당기는 게 느껴졌다. 조나단은 벽을 발로 차서 디디며 중심을 잡았다. 스타이너가 그를 힘껏 끌어올리고 있었다. 격분한 그는 신발 스파이크를 얼음에 꽂아 넣은 다음 칼을 꺼내 얼굴에서 몇 인치 위쪽 밧줄에 칼날을 갖다 댔다. 아이젠이 있고 얼음도끼도 있으니 혼자 힘으로 아내가 있는 곳까지 내려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내의 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내는 이미 점점 작아 보이기 시작했고 심지어 낯설게까지 느껴졌다. 아무런 움직임이나 미동도 포착되질 않았다. 그 높이에서 떨어지면 살기 어렵다고 한 스타이너의 말이 사실이건 말건, 떨어진 높이가 너무 높건 말건, 또 그녀가 떨어지는 속도를 늦춰 주었을지도 모르는 장애물들이 중간에 있건 말건 중요치 않았다. 무엇보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게 문제였다.
조나단은 칼을 로프에서 떼고 아이젠을 얼음에서 빼냈다. 생명줄이 다시 팽팽해지며 그를 끌어올렸다. 자기가 본 붉은 천 조각을 다시 비춰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아내의 모습은 더 이상 찾을 수가 없었다.
“엠마!” 이렇게 외치는 그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아내의 대답 대신 그의 목소리만 몇 번이나 메아리쳐 돌아올 뿐이었다.
4
랜드로버 한 대가 취리히를 지나 제스트라쎄 호변을 맹렬히 달려가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남자는 턱수염이 까칠하게 자라고 눈가엔 검은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24시간 내내 쉬지도 못한 그는 식사와 샤워, 그리고 수면이 필요했다. 일단 처리해야 할 일을 끝내면 쉴 수 있을 것이었다.
남자는 조수석 사물함 박스를 열고 소음기가 장착된 소총을 꺼낸 다음 옆 좌석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창밖의 호수를 내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하얀 파도가 출렁이고 멀리 떠 있는 큰 배의 불빛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배를 타기 좋은 밤은 아니었다.
다음 신호에서 차를 돌린 다음 좁고 구불구불한 길로 들어섰다. 헤드라이트 불빛을 집어삼킬 기세로 눈발이 날리고 있었지만 그는 속력을 줄일 생각을 안 했다. 미리 차로 한 번 답사를 해놓았기 때문에 가는 길은 알고 있었다. 지도를 보며 진입로와 탈출로를 모두 머릿속에 담아놓았던 것이다.
한번 힘차게 가속하더니 높은 언덕 위로 올라섰다. 큰길 양쪽으로 대저택들이 반듯하게 들어서 있었다. 취리히 동부에 위치한 그곳은 호화 주택이 즐비한 부촌이었다. 사람들은 이 동네가 새벽녘부터 저녁까지 해가 비치는 곳이라고 해서 ‘골드 코스트’라고 불렀다. 물론 부촌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불리기도 했다. 남자는 타깃이 사는 저택을 보자 곧바로 속력을 줄였다. 길가에서 약간 떨어진 언덕배기에 있는 프랑스 시골풍 집이었고, 양 옆으로는 눈이 수북이 쌓인 과수원과 맞닿아 있었다.
20미터쯤 떨어진 위치에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남자는 소나무 아래 그늘진 곳에 차를 세웠다. 라이트를 끄고 자리에 앉아 엔진 꺼지는 소리와 바람이 차창에 부대끼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재킷에서 순은제 케이스를 꺼내들었다. 안에는 탄환 네 알이 들어 있었다. 구릿빛 탄두에 X자가 새겨져 있는 길쭉한 탄환이었다. 그는 테이프를 감은 손가락으로 집어 탄환을 중앙 콘솔 박스에 일렬로 늘어놓았다. 그리고는 목에 걸고 있는 작은 도자기병 뚜껑을 열었다. 이어서 고대 언어로 나지막이 기도문을 읊조렸다. 그는 지금까지 300명이 넘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죽음의 세계로 보냈다. 기도문을 읊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자기 손에 죽은 영혼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청부살인업자 경력 20년에 어느덧 그는 미신을 숭배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총알을 하나씩 물약이 든 도자기 병에 담가 끈적거리고 쓴 냄새가 나는 액체를 묻혔다. 기도문으로 시작해서 액체로 마무리하는 것은 일종의 의식이었다. 전문가인 그는 조심은 아무리해도 지나치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았다. 이승에서든 저승에서든 마찬가지였다. 그는 탄환 하나하나에 숨결을 불어넣은 다음 탄창에 장착했다. 의식이 끝나자 권총을 집고 탄창을 밀어 넣어 장전했다. 안전장치가 잠겨 있는지 확인하고 반대쪽 주머니에서 빳빳한 무명 주머니를 꺼내 탄피 배출구 윗부분에 부착했다.
그런 다음 차에서 내렸다. 예리한 시선으로 집 앞길을 위에서 아래까지 훑어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날씨조차 그의 편이었다. 목표물의 집 주변에는 개미 한 마리도 얼씬하지 않았다. 시간은 9시 30분. 일대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그는 코트 단추를 채우며 빠른 걸음으로 길을 나섰다. 평균키에 좁은 어깨, 그리고 옷깃에 닿을 정도 길이의 차분한 검은머리를 늘어뜨린 외모는 겉으로 보기에 평범하고 단정했다. 안색은 파리할 정도로 창백하고, 움푹한 뺨에 얇은 콧대가 귀족적인 분위기를 주었다. 멀리서 보면 걷는다기보다는 길 위를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것 같았다. 시체처럼 창백한 안색과 날렵하고 조용한 움직임 때문에 그는 고스트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목표물의 집 앞을 지나면서 보니 현관 옆 창문으로 집 안이 훤히 다 들여다보였다. 거실에 있는 긴 소파에 나란히 앉은 여자 한 명과 아이 셋이 텔레비전에서 하는 저녁 프로그램에 한창 빠져 있었다. 자기처럼 검은 머리에 창백한 얼굴을 한 사내아이가 보였다. 막내로 보이는 사내아이는 팔을 엄마 몸에 두른 채 안겨 있었다. 그 모든 장면들이 샅샅이 보일 정도로 고스트는 느리게 걸었다.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눈동자 저 뒤편의 기억들이 마치 갇힌 창문에 몸을 부딪는 작은 새처럼 파닥거리며 날갯짓을 했다.
그는 눈길을 돌려 버렸다.
차량이 양방향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한 줄짜리 와이어 울타리를 뛰어넘어 타깃의 집 옆에 쌓여 있는 장작더미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는 눈 속에 웅크린 채 기다렸다.
리더가 되어 본 적은 없지만 한때는 그도 팀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외부에서 식사 중인 타깃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2인 1조로 구성된 감시조와 타깃의 집까지 따라갈 차량, 그리고 저격수를 가장 가까운 공항이나 기차역으로 데려가 신속하게 해외로 도피시켜 줄 처리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게 바로 표준 절차였다.
하지만 그는 지금의 이 방식을 더 선호했다. 그는 홀로 어둠속에서 움직이는 죽음의 사자였다.
남자는 겉옷 주머니에서 금속 박스를 꺼내들어 스위치를 켠 다음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금속 박스는 차고의 자동문이 작동하지 못하게 하는 방해 전파를 송출하고 있었다. 목표물은 어쩔 수 없이 차 밖으로 나와 차고 문을 수동으로 열거나, 아니면 옆문을 통해 차고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열려고 할 것이다.
멀리서 강력한 엔진이 부드럽게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주머니에서 소음기 달린 권총을 꺼내 길을 주시하면서 타깃이 탄 아우디 신형 A8 모델이 언덕 위로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렸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점점 또렷해지자 엄지손가락을 이용해 안전장치를 풀었다.
목표물이 탄 차가 가로등 밑을 지날 때 차량 모델과 번호판을 확인했다. 차가 속력을 늦추면서 도로에서 벗어나 차고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타깃이 차 밖으로 나왔다. 큰 키에 탄탄한 체격, 연한 적갈색 머리에 건강해 보이는 혈색의 남자였다. 기계공학 전문가다운 풍모의 그는 가정적이고 철저한 원칙주의자였다.
고스트가 그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서너 번의 가벼운 몸놀림만으로도 금세 사정거리까지 접근했다. 남자는 그를 보며 당황스러워했다. 차고 문은 왜 작동이 안 되지? 난데없이 불쑥 나타난 이 낯선 남자는 누구지? 고스트는 타깃의 눈빛을 통해 그런 감정을 읽고는 손을 들어 방아쇠를 당겼다. 정확히 머리를 겨냥해 세 발. 탄피는 무명 주머니 안으로 날아 들어가고, 타깃은 쓰러졌다.
고스트는 죽은 자를 향해 몸을 숙였다. 소음기가 장착된 권총을 타깃의 심장에 가까이 댔다. 타깃의 몸이 풀썩 하고 뛰었다. 그때였다. 죽은 자의 옷깃에 기이한 모양의 물체가 붙어 있었다. 옷핀처럼 생긴 물체였다. 자세히 보기 위해 몸을 약간 수그렸다.
나비였다.
5
마르커스 폰 다니켄은 밤 11시가 약간 지나 집으로 돌아왔다. 손에는 꽃가게 포장지로 싼 긴 줄기의 장미 두 송이가 들려 있었다. 그는 어두운 복도를 지나 조명등이 켜 있는 부엌으로 향했다. 꽃을 내려놓은 다음 권총과 지갑을 카운터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놓고는 하품이 나는 걸 억지로 참으며 냉장고를 열어 맥주 한 병을 꺼냈다. 싱크대 위에 햄 샌드위치, 포테이토 샐러드, 그리고 레몬타르트가 놓여 있었다. 전부 랩으로 정성스레 싸놓았다. 남은 음식은 냉장고에 보관해 달라는 가정부의 메모와 함께. 의자에 재킷을 걸쳐 두고 팔소매를 걷은 다음 싱크대에서 손을 씻었다. 그리고 샌드위치를 먹은 다음 포테이토 샐러드, 레몬타르트는 손도 대지 않고 가정부가 요구한대로 냉장고에 잘 넣어두었다.
폰 다니켄은 베른 외곽에 위치한 언덕 위의 거대한 샬레에서 홀로 지냈다. 혼자 살기엔 너무 큰 집이었다. 이 집은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 이렇게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집이다. 굳이 혼자 살길 바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누리는 이 고요한 삶이 싫은 것도 아니었다. 여러 해 동안 그는 텅 빈 복도의 울림, 음울한 침묵, 그리고 항상 불이 켜져 있는 빈 방들을 벗 삼아 살아 왔다.
테이블로 돌아서서 포장지를 풀고 안에 든 장미를 꺼내 들었다. 조심스레 줄기를 다듬어 신혼 여행지였던 무라노의 한 유리 공방에서 산 수제화병에 장미를 꽂았다. 그도 결혼을 한 적이 있다. 단 한 번. 딸애가 한 명 있었고 곧 태어날 아이도 있었다. 그때는 이 집도 지금처럼 넓게 느껴지지 않았다. 결혼하자마자 아내는 집을 팔자고 졸랐다. 제네바 출신의 변호사였던 그녀는 활달하면서도 충동적이고 자신이 일하는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여성이었다. 아내는 집이 지어질 당시의 사회 분위기처럼 지독히 보수적이고 딱딱한 느낌을 주는 낡은 흉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내의 생각에 찬성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이견을 좁힐 기회도 미처 가져 보지 못했다.
폰 다니켄은 거실등을 켰다. 벽난로 위에는 아내와 딸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금발머리의 두 여자 마리프랑스와 스테파니. 그는 15년 전에 일어난 항공기 사고로 두 사람을 한꺼번에 잃고 말았다. 그는 어제 산 장미를 치우고 새로 사온 장미를 꽂은 다음 낡은 안락의자에 앉아 남은 맥주를 마저 마셨다. 리모컨을 들고 텔레비전을 켰다. 다행스럽게도 뉴스에는 오늘 오후 불발에 그친 체포사건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채널을 돌려 프랑스 문학 관련 프로그램을 보기 시작했다. 문학이나 프랑스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었다. 다만 사회자가 다갈색 머리의 중년 여성인데, 그녀의 우아한 모습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텔레비전 소리를 줄이고 그녀를 응시했다. 완벽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텔레비전 세계는 현실 세계보다 안전하다. 지난 몇 년간 셀 수 없을 정도로 여러 번의 소개팅을 해 봤다. 몇몇 여성과는 한 번 더 만남도 가져도 보았고, 그 중 두 명과는 만남을 지속해 보려고도 했지만 6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두 여인 모두 매력적이고 똑똑했으며 침대 위에서도 잘 맞았다. 그러나 둘 다 아내를 대신하지는 못했고, 그런 사실을 깨닫자 관계는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데이트 횟수는 점점 뜸해지고, 맡은 사건을 핑계로 갑작스레 데이트를 취소하는 일도 잦아졌다. 두 여인 다 금세 눈치를 챘다. 그런 여성들과의 헤어짐은 씁쓸하고,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고통스러웠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예?”
“취리히 주 경찰 소속 위드머입니다. 사건이 터졌습니다. 에를렌바흐에서 살인사건입니다. 골드 코스트 지역입니다. 전문가의 소행으로 보입니다.”
폰 다니켄은 소파에서 일어나 텔레비전을 끄며 이렇게 내뱉었다. “왜 이쪽으로 연락하지? 강력계에서 맡을 사건 같은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미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부엌으로 가 차가운 맥주를 싱크대에 부어 버린 다음 권총집을 허리에 차고 재킷을 걸친 다음 지갑을 챙겼다.
“ISIS 파일에 희생자의 신상기록이 올라 있습니다.” 위드머가 이렇게 설명했다. “기밀로 분류된 파일인데, 이 자가 지난 20년간 감시대상자라는 기록만 첨부되어 있습니다.”
ISIS는 국가보안정보시스템의 약자로 5만 명이 넘는 개인정보를 담고 있는 연방경찰 데이터베이스를 가리킨다. 여기서 개인이란 테러리스트, 극단주의자, 그리고 적국이건 우방이건 상관없이 스파이로 의심되는 각종 정보국 요원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 행운의 사나이가 누구지?” 폰 다니켄은 자동차 열쇠를 집으며 이렇게 물었다.
“이름은 라머즈. 네덜란드인입니다. 스위스 영주권자로 여기서 15년을 살았습니다.” 위드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이어서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습니다. 하지만 직접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90분 안에 도착하겠네.”
폰 다니켄이 110킬로미터 거리를 가는데 걸린 시간은 정확히 85분이었다. 차에서 내려 얼어붙은 인도를 조심스레 걸어가 사건 현장 테이프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숙여 들어갔다. 경관 한 명이 폰 다니켄을 보더니 인사했다. “어서오십시오, 경감님.”
폰 다니켄은 그의 등을 두드려 주며 물었다. “위드머 반장은 어디 계신가.”
“저 위쪽에 계십니다.” 경관은 차고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폰 다니켄은 범죄 현장 주위를 에워싼 이동식 조명 배터리가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1000와트짜리 전구가 죽은 자의 몸을 비추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생트로뻬의 타히티 해수욕장에서 선탠을 즐기는 사람처럼 보였다. 폰 다니켄은 사체를 힐끗 본 다음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실력 꽤나 갖춘 자의 소행이군.”
사체 옆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있던 어깨가 넓은 대머리 남자가 폰 다니켄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머리에 세 발, 가슴 부위에 한 발 맞았습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취리히 주 경찰 소속 강력반장인 월터 위드머였다. “소형 구경입니다. 상처로 보아 덤덤탄을 사용했습니다. 어떤 놈인지 현장에 흔적 하나 남기지 않았습니다.”
“살해당한 것이라고 믿는다는 말이지?”
“탄피도 없고 목격자도 없습니다.” 위드머가 얼굴을 찡그리며 일어섰다. “우리 추측으로는 살인범이 고의로 차고 문에 일시적 장애를 일으켜 희생자가 차량 밖으로 나오게끔 유도한 것 같습니다만. 어떻게 보십니까?”
폰 다니켄은 길가로 급히 되돌아가 보았다. 엉망이 된 희생자의 모습이 적어도 며칠간은 뇌리에 남아 있을 것 같았다.
마르커스 폰 다니켄은 강력계 형사가 아니고, 강력범죄를 다뤄 본 경험도 별로 많지 않았다. 그는 다른 분야의 일을 주로 해 왔다. 4년간 보병장교로 근무했고, 그 다음에는 연방경찰 금융범죄과에 합류했다. 빠른 승진과는 거리가 먼 보직이었다. 소위 스위스 은행들의 성삼위일체라 부르는 사기, 화폐위조, 돈세탁 관련 범죄를 파헤치는 수사관으로 몇 년 활동하다가 10년 전에 큰 기회를 잡았다. 나치 희생자 자산을 관리하는 스위스 정부 대책위에 연방경찰 대표로 간 것이었다.
자국의 은행계 거물, 몇몇 다른 나라 외교관들,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든 수많은 피해자 단체의 대표들과 협력하며 그는 스위스 정부, 스위스의 국내은행, 세계유대인총회, 백악관, 독일 중앙정부,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해당 사건 피해 당사자들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분야의 이해 당사자들이 모두 받아들일 만한 해결안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 보상으로 그는 연방경찰청 내 엘리트 부서로 알려진 정보분석보안국으로 발령을 받은 것이다.
“희생자의 아내는 뭐라고 하나?” 그가 차고 너머 보이는 저택 창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뭔가 본 게 있다고 하던가?”
위드머가 고개를 저었다. “그쪽도 쉽지 않았습니다. 앵무새 같은 여자입니다. 일이 있어났을 시간에 아이들과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는 말만 합니다. 차가 멈추는 것을 보았는데 차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남편을 찾아 밖으로 나갔다고 합니다. 거기에 걸린 시간이 고작 2분이었다는 말을 강조하더군요. 통상 하는 질문은 모두 물어 보았습니다. ‘남편에게 적이 있었느냐?’ ‘남편이 최근에 협박 같은 걸 받은 적은 없었느냐?’ ‘최근 며칠간 평소와 다른 일은 없었느냐?’ 그 여자 말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군요.”
“그 여자가 하는 말을 믿나?”
“난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위드머가 대답했다.
“어쩌면 라머즈와 킬러가 서로 아는 사이였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자기 손으로 차고 문을 열었던 건 아닐까? 서로 잠깐 보기로 미리 사전에 약속을 했던 건 아닐까?
“글쎄요. 장작더미 옆에 발자국이 있습니다. 제 추측으로는 살인자는 희생자가 오길 기다리며 그곳에 잠복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시는 길에 잡아낸 게 있으십니까?”
“벨기에 경찰에서 1987년 브뤼셀에서 라머즈를 일주일간 감시한 적이 있다는 정도. 그자가 스위스로 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자기들이 갖고 있던 파일을 우리한테 넘긴 거지. 우린 그 자료를 ISIS 데이터베이스에 올린 거고. 몇 가지 더 있는 것도 같지만 보존 파일들이라 내일 아침까지는 접근이 힘드네. 내가 지금 자네에게 말해 줄 수 있는 거라고는 이 자가 취리히로 거처를 옮겼고, 그 후로는 준법정신이 투철한 주민 행세를 해왔다는 걸세. 탈세를 한 적도 없고,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없다는 군. ISIS에는 그런 부류의 인간들이 넘쳐나지. 알잖아. 요주의 인물로만 남아 있는 놈들.”
“의심스러운 자인 건 확실합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 보시죠.”
위드머가 차고에서 그를 안내해 집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에서 곧바로 계단을 내려가 몇 개의 방 있는 곳으로 갔다. “저희 팀원 한 명이 화장실을 좀 쓰자고 했더니 이 집 부인이 흙먼지가 집 안에 들어오지 않게 가급적 아래층을 사용해 달라는 부탁을 하더랍니다. 아래층에서 그 요원이 화장실인 줄 알고 이 작업실로 들어갔답니다.”
화장실은 문이 열려 있고 전등도 켜져 있었다. 폰 다니켄은 그 화장실을 지나 복도를 계속 따라 내려갔다. “왜 그런 실수를 했는지 이해가 가는 군.”
위드머가 복도 맨 끝에 있는 방의 전등 스위치를 올리자 온통 스테인리스 스틸로 꾸며진 작업실이 나왔는데, 안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스테인리스 작업 벤치에 스테인리스 받침까지 모든 게 공장에서 갓 만든 제품처럼 번쩍이고 있었다. 어설프게 주말 여가시간이나 보내려고 만든 방이 아닌 게 분명했다. 톱이나 망치 같은 공구도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방주인이 전문 공학엔지니어임을 보여주는 각종 하이테크놀로지 장비와 도구들이 즐비했다.
근처 테이블 위엔 여권들이 가득 찬 플라스틱 봉지가 놓여 있었다.
“이건 뭐지?”하고 폰 다니켄이 물었다.
“저희 대원이 맨 위 서랍에서 발견한 물건입니다.”
“그 친구 휴지 찾아 헤매고 다닌 게로군, 안 그런가?”
위드머는 코웃음을 치며 눈썹을 으쓱 치켜세워 보였다. 폰 다니켄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았다. 불법 수색을 한 것이다. 그렇게 찾아낸 증거물은 법정에서 증거로 인정해 주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게 뭐 어떻다는 건가? 라머즈가 법정에 설 일도 없을 테고.
“네덜란드, 벨기에, 뉴질랜드.” 그는 여권을 한 권, 한 권 넘겨보았다. “평범한 여행객이라. 당신 요원이 또 뭐 찾은 건 없나?”
“캐비닛 아래를 보십시오.” 위드머가 말했다. “그걸 보면 라머즈가 자기를 노리는 적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 조심하십시오. 장전되어 있습니다.”
폰 다니켄은 무릎을 굽혀 작업용 벤치 아래쪽 공간에 머리를 밀어 넣었다. 뒤쪽 벽에는 우지 반자동 소총이 숨겨져 있었다. 그는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이 무기의 판매자가 누구인지 알아보게.” 그는 이렇게 말하고 일어서며 여권들을 집어 들었다. “이건 내가 가지고 가서 좀 봐도 되겠나?”
“수령증 하나만 써 주십시오.” 위드머가 말했다.
폰 다니켄은 여권 수령증을 한 장 쓴 다음 노트에서 찢어냈다. “이거면 되겠지. 이제 자네가 라머즈 부인에게 질문할 일만 남았군. 가서 남편이 왜 다국적 소유자였는지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지 않으면, 그 여자와 세 아이는 24시간 안에 전원 추방당할 거라고 말하게. 언제까지 입을 다물고 있을지 두고 보자고.”
“그건 좀 심한 거 아닙니까?” 위드머가 이렇게 되물었다. “여자의 남편이 희생된 마당에 말입니다.”
폰 다니켄은 코트 단추를 여미며 문밖을 나섰다. “희생되었다고?” 그는 표정이 굳어지며 말했다. “여권이 세 개가 넘고, 장전된 우지 기관소총을 소지한 자라면, 그가 누구건간에 희생자라고 할 수 없어. 범죄자가 아니면 스파이겠지.”
6
사방이 칠흑 같은 어둠으로 뒤덮였다. 조나단은 눈을 깜박여 보았다. 두 눈을 뜨고 있었지만 주변이 온통 암흑인 건 변함이 없었다. 고개를 들려고도 해 봤지만 꼼짝없이 고정된 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팔과 다리도 핀으로 고정당한 듯했다. 마치 콘크리트 속에 잠긴 듯 전신은 눈 속에 굳게 갇혀 버렸다. 손은커녕 손가락 하나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흔들림 없는 목소리가 들려와 그에게 평정을 유지하라고 일러 주었다. 예상과 달리 그다지 춥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의아하기까지 했다. 한없이 어두울 뿐이었다. 어느 누구도 이 어둠에 대해서 충고해 주거나 언급한 적이 없었다. 숨쉬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시시각각 산소는 줄어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눈 속에 파묻혀 있다는 사실과 더 늦기 전에 누군가에 의해 구출될 확률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포가 깊은 곳에서부터 창자를 타고 스멀거리며 점점 더 빠르고 강렬하게 밀고 올라오면서 그의 자제심을 무너뜨리고, 차분한 이성의 소리를 억눌렀다. 어둠, 압력, 산소 부족, 목까지 차오르는 공포가 엄습했다. 비명을 지르며 입을 열자 오히려 쌓인 눈만 입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엠마” 하고 부르며 두 손으로 침대 위 옆자리를 더듬고 있었다.
또 꿈을 꾼 것이었다. 아내의 목소리를 듣고 싶고, 어깨에 닿는 아내의 손길이 그리웠다. 방의 불을 켰다. 원래 아내가 누워 있어야 할 자리는 정돈된 채 그대로였다. 말끔한 화이트 이불 커버는 단정히 포개져 있었다. 아내가 입던 나이트셔츠의 끝자락이 배게 밑으로 힐끔 나와 있었다.
하지만 이제 아내는 없다.
온갖 감정이 서서히 다가오는 폭풍처럼 그를 엄습했다. 숨소리가 빨라지고 손가락 끝마디가 얼얼하기 시작했다. 복부를 가르는듯한 날카롭고 차가운 무언가가 느껴져 배를 웅크리며 몸을 숙였다. 그는 흐느꼈다.
아내는 이제 없다.
같은 말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얼어붙은 어둠속에 홀로 남은 채 누워 있던 그녀. 그 장면이 그를 너무도 괴롭혔다.
가까스로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숨소리가 차츰 느려지고 공포가 지나갔다. 그러나 이런 순간이 영원히 사라진 게 아니란 걸 그는 알았다. 주위를 맴돌며 때가 되면 다시 나타날 것이었다.
그는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여전히 많은 눈이 내리고, 음울한 색조 덕에 장엄한 느낌마저 주는 구름이 펼쳐진 새벽하늘은 옅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창밖에는 군데군데 오두막이 자리한 완만한 언덕이 펼쳐져 있었다. 반마일 더 뒤로는 마을을 품고 있는 산봉우리의 능선을 따라 푸른 숲이 펼쳐져 있었다.
발코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차가운 날씨로 인해 공기가 더 상쾌하게 느껴졌다. 난간에 서서 어제의 루트를 더듬어 보았다. 두 눈은 길을 따라 구름과 안개를 뚫고, 산 깊숙한 곳을 지나 푸르가의 눈 덮인 정상까지 쫓아갔다. 그리고 그곳을 지나 로만의 길까지 더듬어 올라갔다.
어떤 산인지 알면서도 난 당신을 지키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을 하나도 하지 않았어.
어떤 산인지 알면서도 당신을 홀로 산 위에 남겨 두었어.
어떤 산인지 알면서도 산이 당신을 죽이도록 내버려 두었어.
추위에 가누기 힘들 정도로 몸이 떨리자 조나단은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방이 잘 정돈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놀랐다. 그녀가 없으니 방도 예전과 달라 보여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보통 때와 같을 리가 없는 지금, 이 방만은 여전히 보통 때와 같은 모습으로 있다는 사실에 배신감마저 느꼈다.
책상에 앉아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엔 자외선 차단제, 포켓 나이프, 갖가지 지도, 입술크림, 반다나 두건, 비콘, 그리고 쌍방향 무전기가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그는 무전기를 집어 들고 전원을 켰다 껐다 해 보았다. 작동되지 않았다.
전선…전선이 끊어져 있었다.
산에서 돌아온 조나단은 경찰서로 출두 요청을 받았고, 그곳에서 의사의 검진을 받은 다음 질문 세례를 받았다. 본명 조나단 호바트 랜섬. 출생지 미국 메릴랜드주 아나폴리스. 직업 외과전문의. 소속 국경 없는 의사회. 국적 미국인. 거주지 제네바.
이어서 엠마와 관련된 질문에도 대답해야 했다. 출생지 잉글랜드 펜잰스. 부모 모두 사망. 가족관계 여동생 한 명. 여동생 이름 베아트리스. 직업 간호사 관리직. 지나치게 양심적이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던 여자. 아내이자 최고의 친구. 그의 정신적 위안이었던 사람.
다른 질문들도 받았는데 산악인으로서의 경험에 관한 것들이었다. 어쩌다 기상 파악을 제대로 못한 건지. 엠마가 추락 사고를 당하게 된 자초지종. 그리고 아내를 두고 나와야 했을 당시 아내가 피를 흘리고 있었는지 여부. 등산 시작 전에 무전기에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던 점에 대해서도 질문을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폭풍으로 기상이 악화되는 상황에서 등반을 계속하기로 결정한 이유에 대해서도 질문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그것은 그녀가 내린 결정이었다. 엠마는 결코 뒤로 물러설 줄 모르는 여자였다.
무전기를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서도 그의 시선은 산자락을 헤매고 있었다. 등산에 대한 그의 남다른 열정은 아홉 살 되던 무렵 가족과 함께 간 캘리포니아 여행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의 목표는 미국 본토 48개 주에서 가장 높은 휘트니산을 오르는 것이었다. 새벽 5시에 휘트니산 입구 고도 8,500 피트 지점에서 출발해 하루 만에 1만 4,500 피트의 정상까지 22마일 왕복 코스를 주파하는 계획은 그의 형들을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 조나단과 아버지는 초반 몇 마일만 같이 오르다 멈추고, 형들이 등산을 마치고 올 때까지 챙겨온 점심이나 먹으며 송어낚시를 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때도 조나단은 독립적인 성향이 강한 아이였다. 자기 형을 우러러보는 대부분의 또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조나단도 혼자 남겨지고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매끼 식사에 칵테일 반주를 잊지 않으시던 아버지는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그는 아니었다. 4마일쯤 가자 형 네드 랜섬은 잠시 쉬며 점심을 먹자고 했지만 조나단은 막무가내로 앞으로 나아갔다. 뒤에서 다들 멈추라고 불러댔지만 들은 체도 않았다. 그 후 8마일 더 가서 정상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는 걸음을 멈췄다. 그의 형들보다 100야드나 앞서 있었다.
주사위는 그때 이미 던져졌다.
열여섯 살 때 조나단은 오로지 등산에만 관심을 가진 소년이었다. 검정고시에 합격해 놓은 덕에 고교 수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고, 대학 진학에는 관심도 없었다. 여름은 매킨리산의 가이드, 겨울엔 산악 스키 정찰요원으로 활동하며 온 산을 누비고 다녔다. 모아둔 돈은 전부 다음 원정에 써 버렸다. 아이거 북벽, 아콩카과, K2 매직라인 무산소 등정 등 굵직한 등정에 이름을 올렸다. 그저 앞만 보고 밀어붙였다. 그는 끝까지 밀어붙이다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물러섰다.
자신의 성격에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성격상 결함이란 비정상에 가까운 용맹함과 타고난 반항정신을 말하는 것이었는데, 그 때문에 툭하면 주먹질을 했다. 산악 리조트 인근의 술집들은 늘 허풍쟁이와 허접스런 인간들로 넘쳐났다. 그는 아무 상대에게나 싸움을 거는 게 아니라 꼭 무리들 중 제일 시끄러운 자를 골랐다. 마땅히 당해도 싼, 그리고 한판 잘 어우러질 수 있어 보이는 상대를 택했다. 그럴 때면 그는 신경을 알맞게 곤두세워 줄 버번위스키 샷 한 잔을 주문했다. 그 다음에는 적절히 한 마디 던지기만 하면 끝이었다. 운만 따른다면 5분도 채 안 돼 뒤편 복도로 나가 판을 벌일 수 있었다.
물불 안 가리고 싸웠고 단숨에 끝을 냈다. 영리한 싸움꾼인 그는 빠르게 상대의 약점을 간파했다. 그는 땀범벅이 돼서 엉겨 붙거나 싸움판에서 흔히 보는 어색한 레슬링 판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1~2분 정도 상대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다 순간적으로 행동에 들어갔다. 상대의 턱에 잽을 한 방 날리고 복부에 펀치 한 방, 그리고 머리에 훅 한 방. 대개는 그 정도에서 정리가 됐다. 그는 자신만의 절제된 싸움기술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물론 그도 싸움을 잘 한다는 것은 위험할 뿐만 아니라 자칫 자멸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지나치게 모험을 추구하는 자신의 성향 탓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누가 봐도 위험천만한 상황만 보면 달려들었고, 자신보다 덩치가 큰 상대들에게 늘 도전장을 날렸다. 그러다 싸움에서 지기 시작했고, 자신의 성격적 결함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등반을 하면서도 점점 더 큰 위험을 감수하기 시작했다. 지도에 없는 루트들을 찾아내고, 마치 굶주린 사람처럼 등반이 불가능한 곳만 찾아다녔다.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 오르기를 갈망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아침에 그 모든 게 사라져 버렸다. 싸움질도, 수직 화강암벽을 정복하려는 욕구도, 살아 있음을 느끼기 위해 위험천만한 모험을 갈망하던 습성도 그냥 사라져 버렸다. 그는 등산장비를 벽에 걸며 지난 삶에 작별을 고했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눈사태에 된통 당하더니 놀라 저런다며 수군거렸다. 너무 놀라서 기가 한풀 꺾인 거라고들 했다. 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 그는 포기한 게 아니었다. 충동적인 기질을 충족시켜 줄 더 큰 도전을 발견한 것뿐이었다. 그 일은 암벽등반이 아니라 고속도로 위에서 일어났다.
스물 한 살이던 어느 날이었다. 일요일 밤이었는데 자이언 국립공원에 있는 높이 2,000피트의 붉은 암벽 엔젤스 랜딩에서 일주일 동안 자유등반을 마치고 아스펜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늘 그렇지만 산길 도로 교통사정은 끔찍했다. 낡은 포드 브랑코가 차량 몇 대를 사이에 두고 앞서 가던 대형 트레일러를 추월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 고물차는 추월을 하기엔 너무 느렸고, 반대편에서 마주오던 대형트럭과 충돌했다. 운전자는 즉사했다. 조나단이 다가갔을 때 동승했던 사람은 살아 있었다. 열네 살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소녀였다. 조나단은 소녀를 차 밖으로 끄집어내 바닥에 눕혔다. 변속기가 소녀의 가슴을 관통한 상태였고, 상처 부위에선 파열된 소화전처럼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순찰대원 훈련에서 배운 것에 겨우 의지해서, 사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게 거의 전무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한쪽 주먹을 구멍에 밀어 넣고 파열된 혈관을 눌러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막았다. 그때까지 소녀는 의식을 잃지 않고 있었지만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구급차가 올 때까지 소녀는 자신의 갈비뼈에 손을 파묻고 있던 그를 그냥 올려다 볼 뿐이었다.
그는 소녀의 심장 박동을 내내 느끼고 있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손 밑에서 뛰고 있는 심장 자체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다시 한번 도전에 나섰다.
그 다음 주에 곧바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의학을 공부하겠다며 대학에 진학한 것이다.
조나단의 생각이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창가에서 눈길을 돌리자 엠마의 나이트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아내가 남긴 흔적들이 그대로 있었다. 뚜껑 열린 미네랄워터, 로맨스 소설 위에 놓인 독서용 안경. 한번은 건장한 스코틀랜드 남자들이 나오는 이야기나 시간 여행을 하던 해적이 영원의 성에 갇혀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처녀를 구출해 내는 이야기에 매료되는 이유를 설명하며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 장르의 소설은 스토리가 하나같이 너무 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해피엔딩이 보장된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말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직업에서 겪는 스트레스에 대한 일종의 해독제였다. 그녀의 직업에서는 어떤 것이든 행복하게 끝나는 법이 없고, 예상한대로 끝나는 적도 거의 없었다.
베개 틈으로 나와 있는 엔젤 블루 색상의 옷에 시선이 갔다. 침대에 앉아 아내의 나이트셔츠에 얼굴을 파묻었다. 부드럽고 익숙한 느낌의 울 잠옷에선 바닐라와 백단향 내음이 났다. 묘한 자극이 온몸을 훓고 지나갔다. 아내의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부드러운 곡선의 탄탄한 근육. 목 아래쪽에서 발산되는 온기. 쏟아져 내리는 머리카락 밑에서 보내는 수줍은 미소는 그의 욕구를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할까?” 엠마는 용기를 내듯 이 말을 천천히 읊조리곤 했다.
조나단은 나이트셔츠를 무릎에 포개 놓았다. 그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리움이 파도처럼 밀려와 그를 휘감았다. 물밀듯 밀려오는 강한 그리움은 점점 공포로 변해갔다.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상실감에 대한 공포였다.
그는 나이트셔츠를 보며 호흡을 진정시켰다. 아직 작별을 고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셔츠를 곱게 접어서 베개 밑에 도로 넣어두었다. 아내를 조금이라도 더 곁에 두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7
정보분석보안국 본부는 베른의 누스바움 거리에 위치한 스틸과 유리로 된 현대식 건물에 있다. 스위스 정보국 요원인 이들의 총 인원은 200명 남짓 된다. 주요 임무는 정보 수집과 분석, 본국, 특히 베른에서 활동 중인 타국 정보 요원 감시, 그리고 자국 국경을 넘나드는 은밀한 교신을 감시하는 것이다. 이들 가운데 30명의 요원이 보다 활동적인 임무, 즉 스위스 영토 내에서 활동하는 소규모 테러 집단을 포함한 극단주의자들을 상시 조사하고 감독하는 일을 도맡아 했다. 이 활동은 소규모 단위로 은밀히 운영되었다.
일곱 시 정각에 사무실에 도착한 마르커스 폰 다니켄은 곧바로 업무에 돌입했다. 수화기를 들고 내선번호를 누르자 여자 음성이 흘러나왔다. “ISIS. 슈미트입니다.”
폰 다니켄은 자기 신분을 밝히고 말했다. “테오 라머즈란 자에 관해 우리가 가진 모든 정보가 필요합니다. 긴급 사항입니다.”
“네, 즉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후 그의 컴퓨터 창에 새 이메일의 도착을 알리는 메모가 떴다. ISIS 파일임을 확인하자 만족스런 기분으로 파일을 열었다. 벨기에 경찰에서 넘어온 정보들을 취합한 자료들이었다.
테오도르 알브레히트 라머즈 1961년 로테르담 출생. 위트레흐트 대학에서 기계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암스테르담과 헤이그 등지를 떠돌며 별 볼일 없는 민영기업을 전전함. 1987년에 와서야 그는 당국으로부터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브뤼셀에 체류하던 그가 미국인 무기 제조업자인 제럴드 불의 조수로 일했기 때문이다. 당시 제럴드 불은 사담 후세인이 의뢰한 일명 슈퍼건 제작에 한창이었다. 암호명 ‘바빌론’으로 불린 이 무기는 수백 마일 떨어진 목표물을 정확히 맞출 수 있는 거대한 고성능포였다. 중동의 독재자가 의뢰해 진행되던 그 작업은 당국의 감시 대상이었다. 그리고 테오 라머즈를 포함한 직원들도 벨기에 경찰청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분류되었다.
나머지 이야기는 폰 다니켄도 아는 내용들이었다. 제럴드 불은 1990년 브뤼셀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 현관에서 매복 중이던 암살범에게 후두부에 다섯 발의 총격을 받고 살해당했다. 처음엔 그를 죽인 게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의 소행이라는 추측이 제기되었지만 틀린 추측이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과학자들과 거리를 유지하는 동시에 협조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장래의 고객답게 불의 움직임과 동향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바로 그런 이유로 이라크 측에서 그를 살해했던 것이다. 바빌론 계획이 완성되자 사담 후세인은 불이 그 제조법을 그 어느 누구와도, 더구나 이스라엘과는 절대로 공유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폰 다니켄은 이메일 창을 닫고 창가로 걸어갔다. 낮게 깔린 구름에 축축한 진눈깨비만 내리는 회색빛의 음산한 아침이었다. 바깥에 보이는 풍경이라고는 주차장과 반쯤 짓다만 오피스 타워 건물, 그리고 그 건물을 오르내리며 궂은 날씨에도 일하는 인부들뿐이었다.
그리고 라머즈? 그자는 도대체 어떤 일을 하고 있었던 거지? 무슨 일이었기에 작업실에 우지 자동소총을 숨겨놓고 화장실에는 온갖 국적의 여권을 챙겨두었던 거지? 어떤 일을 했기에 전문 킬러가 이 자를 노린 것일까?
폰 다니켄은 다시 책상으로 돌아왔다. 여러 가지 자료가 책상 위에 놓여 있고, 자료에는 ‘공항 출입국 기록’, ‘대테러/국내’, ‘대테러/해외’, 그리고 ‘불법거래’ 등의 라벨이 붙어 있었다. 자료들을 훑어보다가 그는 ‘대테러/해외’란 라벨이 붙은 파일을 따로 보관해 두었다.
여러 해외 정보기관에서 보낸 전문을 모아놓은 것이었다. 1971년에 스위스 정보국장은 도처에서 자행되는 정치적인 동기에 의한 폭력행위의 등장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안보 확보 임무를 맡은 서유럽 내 각국 법집행 전문가들의 연합체를 결성했다. 일명 베른클럽으로 알려진 이 그룹은 9/11 테러를 계기로 모임을 공식화하고 명칭도 대테러그룹을 뜻하는 CTG로 바꾸었다.
제일 위에 놓인 보고서는 스웨덴 담당자로부터 온 것으로 극단주의자라는 혐의를 받는 왈리드 가싼이란 자가 스톡홀름에서 목격됐다고 했다. 이어서 보고서는 가싼을 요르단 암만 소재 쉐라톤호텔 폭파사건과 미수에 그친 몇몇 사건의 주요 용의자로 보고 있다고 밝히고, 가싼과 그의 공범으로 보이는 자에 관한 그 어떤 정보라도 얻는 즉시 스웨덴 정보기관에 전달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었다.
최종 보고서는 아니지만 기재된 내용들은 정확했다.
지난 1월 왈리드 가싼은 스위스를 거쳐 갔다. 제네바의 모스크 사원에 심어놓은 정보원으로부터 첩보를 입수한 폰 다니켄은 그의 소재를 추적해 체포조를 파견했다. 스위스에서 수배된 것은 아니지만 인터폴에서 발부받은 ‘레드 플래그 영장’에 따라 폰 다니켄은 가싼을 검거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운명은 가싼의 편이었다. 그자는 폰 다니켄이 겨우 소재를 파악하고 체포 경보를 발령했을 때 이미 스위스 국경을 빠져나갔다. 그는 비행기 안에서 발견했던 손톱을 생각했다. 어쩌면 가싼의 움직임에 대해 그가 만든 보고들이 체포에 기여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자가 스톡홀름의 거리에서 잡힌 것인지, 아니면 유럽의 다른 도시에서 잡힌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가싼의 처리는 CIA 특수제거팀 팀장인 필립 팔룸보에게 맡겨두는 편이 더 낫겠다는 판단을 했던 것이다.
폰 다니켄은 2층으로 걸어 내려가 차가운 회색 카펫이 깔린 복도를 지나 오른쪽 맨 마지막에 위치한 사무실 문을 향해 갔다. 사무실 문에는 ‘KILA 2.8’이라는 문패가 붙어 있었다.
KILA는 신원서류 조사과로 세계 각국에서 수집되는 신원서류들을 보관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곳에 있는 방대한 수의 캐비닛 어딘 가에는 전 세계 200개국 이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모든 종류의 여권, 운전면허증, 출생증명서가 최소한 한 개씩은 들어 있었다.
폰 다니켄은 문틈으로 머리를 들이밀며 말했다. “맥스, 자네 바쁜가?”
맥스 사일러는 KILA의 총지휘자로 푸른 눈에 옅은 금발, 딱 벌어진 어깨에 작고 다부진 체구를 가진 사나이였다. 일하다 말고 그는 “자네가 올 줄 알았지” 하며 올려다보았다. “간밤에 고생 좀 했다고 들었네.”
폰 다니켄은 사일러에게 구체적인 사항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권 세 개를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피살자의 집에서 발견한 증거들일세.”
“특수요원?” 사일러는 여권을 훑어보며 이렇게 물었다.
“특수요원이나 밀수꾼, 사기꾼 그 중에 하나겠지.”
사일러는 커버에 금장 장식과 함께 네덜란드의 정식 국가 명칭이 적혀 있는 붉은색 여권을 응시했다. “이건 진짜인가?”
“그자는 네덜란드 정부에서 자국민에게 발급하는 C형 허가서를 소지하고 있었어. ISIS가 네덜란드에서 다닌 대학시절까지는 추적해냈지. 18세 이전에 잠입했다고는 보기 어렵다는 게 내 생각이네만. 하여튼 자세히 좀 분석해 주게. 이 여권들은 전부 아이덴티게이트에 돌려 더 상세한 자료들이 나오는지 검색해 보고 발급한 기관들과 연락을 취해 보게.”
더 상세한 자료들이란 주민등록증이나 출생증명서 등 개인의 신상정보를 확인해 주는 정부 발행 문서들을 말하는 것이다.
사일러가 몸을 숙여 서류 더미를 가까운 의자 위로 옮겼다. 흘낏 보니 이탈리아 운전면허증, 독일 의료보험증, 영국 출생증명서 등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 가짜였다.
“줄스 게이, 1962년생, 브뤼셀 출신이라.” 사일러는 벨기에 여권을 펴고 소리 내어 읽었다. 여권 페이지를 죽 넘겨 출입국 도장들을 살펴본 다음 다시 제일 앞장을 펴고 거위 목처럼 생긴 자외선 등 밑으로 가져갔다. 희미한 벨기에 왕궁 마크가 나타났다.
“반응 잉크는 괜찮아 보이는 군.” 폰 다니켄이 말했다.
“벨기에 신형 여권 마크는 선명하지. 여권에 다섯 가지 위조 방지 장치가 있어. 겉면에 레이저로 뚫은 미세한 구멍, 알버트 2세의 워터마크, 보는 각도에 따라 녹색에서 푸른색으로 색이 바뀌는 벨기에 마크, 그리고 두 개의 마이크로 감지요소까지. 확인이 더 필요하겠지만 내가 보기에 이건 진본이네.”
“빈 페이지들 말인가?”
“빈 페이지들뿐만이 아닐세. 내 말은 공식적으로 발행한 진본이란 뜻이지. 정식 여권 발행 기관에서 발행된 것이 맞아.”
“확실해?” 폰 다니켄의 의심병은 그의 직업상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벨기에 여권은 위조문서 시장의 명품으로 통하는데, 저렴하면서도 믿을 만하고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990년 이후 1만 9,000 페이지가 넘는 진본 여권의 빈 용지가 도난당했는데, 벨기에 영사관, 대사관, 그리고 시청이나 외국으로 가는 외교 행랑에서 사라졌다. 이 나라 사람들은 열쇠 잃어버리는 것만큼이나 쉽게 여권을 분실했다.
“그야 확인해 보면 되지.” 컴퓨터에 로그인한 다음 사일러는 스위스 경찰이 전 세계에 걸쳐 이백만 건 이상에 달하는 도난당하거나 위조된 서류들을 저장하고 있는 아이덴티게이트 데이터베이스에서 해당 여권번호를 조회했다. “벨기에 사람들은 쉽게 잃어버리는 만큼이나 도난 신고도 철저히 하지.” 사일러가 말했다. “만약 이 여권이 도난당한 것이라면 뭔가 자료가 나올 거야.” 잠시 후 그의 넓적한 얼굴이 실망한 듯 주름이 졌다. “아무 것도 없는데. 벨기에 측 정보로는 여권에 아무 문제가 없어.”
“위조 여권이 아니라는 게 확실해?”
“그렇다고 봐야겠지. 사진이 여권에 아예 박혀 있잖아. 라머즈가 원래 주인의 사진을 자기 사진으로 바꿔치기 했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해.”
“전화 좀 써도 되겠나?”
“그럼.”
폰 다니켄은 벨기에 연방경찰의 신원증빙과에 전화를 넣었다. “프랭크, 지금 내 책상 위에 자네 나라 여권이 하나 있는데 말이야. 간밤에 살해당한 남자의 여권이야. 내 생각엔 진본인 것 같아.” 이렇게 말하며 그는 여권번호와 여권 소지자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진본이야.” 잠시 후 프랭크 빈센트가 말했다. “시스템에 번호가 뜨는데.”
“웃기는 군. 여기선 라머즈란 이름의 그 희생자가 네덜란드 국적을 갖고 C급 허가증을 가진 스위스 거주자로 나오는데. 부탁 하나만 하지. 이 줄스 게이라는 남자에 대해 자세히 조사 좀 해주게.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으로 말이야. 이 자가 실존 인물인지 가상 인물인지 좀 알아봐 주게.”
“시간이 좀 걸릴 걸. 오늘 중이면 되겠나?”
“점심 전이면 더 좋고. 그리고 하나 더 있어. 그 여권이 어디로 발송된 건지도 알려주게.”
폰 다니켄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맥스 사일러가 뉴질랜드 여권을 검사해 보았더니 그것도 검사를 통과했다. 손 댄 흔적도 없고 여권번호도 도난 데이터베이스에 나타나지 않았다. 폰 다니켄이 시계를 보니 뉴질랜드 오클랜드 시간으로는 오후 5시 30분. 대신 파리 소재 대사관에 연락을 취해 보기로 했다. 10시간의 시차 때문에 뉴질랜드는 대부분의 공식적인 요청을 처리할 수 있도록 프랑스 주재 대사관에 보강 인력을 배치해 두고 있었다. 폰 다니켄이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더니 대사관측은 여권이 진본이라고 알려주었다. 뉴질랜드 당국에 의하면 여권 소지자 마이클 캐링턴은 크라이스트처치 빅토리아 레인 24번지에 거주하는 모범 시민이었다. 공식 기록이 깨끗했다.
문제의 여권에 대해 검토해 달라고 요청하자 즉시 조사해 보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떻게 생각해?” 전화를 끊고 그가 물었다.
사일러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했다. “뭐라 말하기가 어렵군. 자네가 맡은 사건의 피살자 사진이 붙어 있는 두 개의 유효한 여권이라.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군. 그렇지 않은가? 게이와 캐링턴은 위장 신분이야. 뒤가 구린 사업가는 아닌 것 같고. 아무래도 자네가 그림자 요원이 연루된 사건을 맡은 것 같군.
‘그림자 요원’이란 자국 정부의 보호 없이 비밀리에 외국 영토에서 활동하는 훈련받은 요원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한마디로 적국에 깊숙이 잠입한 위장간첩을 말하는 것이다.
폰 다니켄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무실로 돌아왔다. 7년 전 사건 이후로 그의 책상 위에 이 정도 규모의 사건이 올라온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 두 가지가 궁금했다. 라머즈는 누굴 위해 일한 것일까? 그리고 살해당하기 전까지 그가 스위스에서 꾸민 일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8
오전 7시. 테일 넘버 N415GB번, 걸프스트림 4호의 터빈 수리가 끝나고 항공기는 스위스 베른공항을 이륙할 준비를 끝마쳤다. 마르커스 폰 다니켄이 숙소 제공을 제안했지만 필립 팔룸보는 기내에 남아 승객용 객실 후미에 있는 카우치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항공기가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하자 팔룸보는 자리에서 일어나 항공기 꼬리 쪽 문을 지나 화물칸으로 갔다. 화물칸은 경사진 천장에 창문이 없는 비좁은 공간으로 한쪽 구석엔 여행용 가방 세 개가 쌓여 있었다. 다리를 접고 앉아 가방들을 밀어내고 바닥의 판넬을 들어 올리자 쇠 손잡이가 나왔다. 손잡이를 확 잡아당기자 매트리스와 안전벨트가 있는 한 평 남짓의 좁은 공간이 드러났다.
그 안엔 흰색 점프슈트를 입고 마른 체구에 올리브 빛깔 피부를 가진 남자가 손발이 수갑에 묶인 채 누워 있었다. 수염은 누군가에 의해 깎여 있고, 두발도 군인 머리처럼 짧았다. 성인용 기저귀 또한 규정에 따라 채워져 있었다. 수감자를 비인격화하는 동시에 무력화하기 위한 조치들이었다.
남자는 어리게 보이고 철태 안경을 끼고 있어 겉모습만 보면 대학생이나 컴퓨터 프로그래머처럼 보였다. 왈리드 가싼. 나이는 31세. 이슬람 지하드, 헤즈볼라, 그리고 자존심 강한 이슬람 광신도라면 누구나 동경하는 알카에다 조직에도 가담한 적이 있는 내로라하는 테러리스트였다.
팔룸보는 그를 끌어내 승객실로 데리고 가서 자리에 밀어 앉힌 다음 움직이지 못하도록 안전벨트로 꽉 조여 고정시켰다. 그런 다음 가싼의 다친 손가락을 머큐로크롬으로 소독해 주었다. 팔룸보가 손톱 세 개를 뽑아 버렸기 때문이다.
“도대체 날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요?” 가싼이 물었다.
팔룸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몸을 숙여 남자의 발에 묶여 있던 수갑 장치를 풀어 준 다음 혈액순환이 되도록 발목을 문질러 주었다. 이렇다 할 정보를 얻기도 전에 심부정맥혈전증으로 죽기라도 하면 큰일이기 때문이었다.
“난 미합중국 국민입니다.” 가싼이 반항하듯 대들었다. “내게도 권리가 있습니다. 어디로 날 데려가는 거냐고요? 난 대답을 들을 권리가 있습니다.”
불현듯 특별송환에 관한 격언이 생각났다. CIA에선 누굴 심문하려면 요르단으로 보내고, 고문하려면 시리아로 보내며,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리게 하려면 이집트로 보낸다는 말이 있다.
“벌써 알면 재미없잖아, 하지.”
“내 이름은 하지가 아니라고요!”
“틀린 말은 아니지.” 팔룸보가 협박조로 이렇게 말했다. “왜인 줄 알아? 자네에게 이제 이름 따윈 없기 때문이야. 이제부터 자넨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라고.” 그러면서 그자의 코앞에다 손가락을 휘둘러 보였다. “이렇게 휙-하고 사라져 버린 거지.”
팔룸보는 비행기가 이륙하자 안전벨트를 맸다. 선실 머리 위 화면에는 비행기의 속도, 외부 온도, 도착지 시간 등과 함께 세계지도 위에 항로가 나타나 있었다. 북쪽으로 비행한 뒤 몇 분 후에 걸프스트림기는 기수를 왼쪽으로 돌려 지중해가 있는 남동쪽으로 향했다.
“한번 더 기회를 주겠어.” 팔룸보가 말했다. “지금 자백을 하든 아니면 나중에 하든. 장담하는데 첫 번째 선택이 자네한테 더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다 줄 거야.”
가싼은 다갈색 눈동자로 그를 응시하며 대꾸했다. “난 할 말이 없어요.”
팔룸보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번 건도 영 쉽지 않겠는 걸. “자네가 독일에서 구해온 폭발물. 거기서부터 시작해 볼까?”
“무슨 애길 하는지 모르겠군요.”
“그래, 그렇게 나올 줄 알았지.”
그는 가싼을 쳐다보며 이 젊은 사내가 저지른 끔찍한 일들과 그가 초래한 죽음들, 그리고 그가 파괴한 가족들을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비행기가 착륙하면 이 자에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도 생각을 했다.
앞으로 네 시간 뒤면 왈리드 가싼은 자신이 저지른 짓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9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잠시 만요.” 청바지에 모카신을 신은 조나단은 바스크 풀오버를 걸치며 문 쪽으로 갔다.
호텔 매니저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저희 전 직원을 대신하여 진심으로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저나 저희 직원들이 대신….”
“고맙습니다.” 조나단은 이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매니저는 고개만 끄덕일 뿐 좀처럼 떠날 생각을 안했다. 대신 그는 재킷에서 누런 서류봉투를 하나 꺼내더니 그에게 건넸다. “사모님께 왔던 편지입니다만.”
조나단은 봉투를 받아 자세히 보기 위해 조명 있는 쪽으로 가져갔다. 편지의 수신인은 ‘엠마 랜섬, 벨뷰호텔, 포스트스트라쎄, 아로사’로 되어 있었다. 주소는 크고 굵직한 글씨로 또박또박 적혀 있고, 한눈에 봐도 남자가 쓴 글씨임을 알 수 있었다. 편지를 뒤집어 봐도 보낸 이의 주소 같은 건 적혀 있지 않았다.
“하루 늦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호텔 직원은 말을 이었다. “성 피터-몰니나 근처의 철도 터널 확장 공사 때문에 눈사태가 나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랜섬 부인께도 그렇게 말씀을 드렸더니 매우 언짢아하셨습니다. 이 점 사과드립니다.”
“내 아내와 이 편지에 대해 말을 나누셨다고요?”
“예, 토요일 저녁 식사 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내가 이 편지를 기다리고 있었단 말씀이죠?”
“사모님께서 선생님의 생일과 관련 있다는 귀띔을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제게도 특별히 잘 보관해 달라고 당부하셨고요.”
생일이라고? 조나단의 서른여덟 번째 생일인 3월 13일이 다가오려면 아직 한 달이 훨씬 넘게 남았다. “네, 짐작이 가는군요. 고맙습니다.”
그는 문을 닫고 침실로 걸어가며 손에 쥔 편지를 뒤집어 보았다. 엠마 랜섬. 벨뷰 호텔, 포스트스트라쎄, 아로사. 우편물 소인의 잉크 자국이 번져 있었다. 보낸 날짜는 쉽사리 알아볼 수 있었지만 우편을 보낸 지역이 기록되어 있어야 할 부분은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그 첫 글자인 알파벳 A인지 R인지 구분이 안 가는 글씨가 남아 있고, 두 번째 글자는 c 아니면 o, 그것도 아니면 e일거라는 추측이 가능했다. 세 번째 글자는 l 아니면 i 정도로 보였다.
그러다 추측하기를 그만두고 말았다. 다 부질없는 짓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침대에 걸터앉으며 봉투를 뜯으려고 집어 들다 푸른색 급행 우편용 스탬프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 그렇다면 금요일에 부쳐 하루 뒤에 배달되도록 보냈다는 말인데. 봉투를 한 번 더 뒤집어 봤지만 여전히 보내는 이의 주소 같은 건 없었다.
아내를 의심하기 시작한 게 얼마나 됐을까? 6개월? 아니면 일년 전부터? 어쩌면 엠마가 프랑스 출장을 다녀온 후부터였던 것 같기도 하다. 아니야. 어쩌면 이미 그 전에 가까워진 사이였을지도 모른다. 진작 눈치 챘어야 했는데, 그러기엔 자기가 너무 바빴던 것 같다.
그가 아내를 미치도록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미치도록’이란 말은 무서운 것이다. 그것은 무조건적이고 위험하고, 자기를 모두 포기하는 사랑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엠마를 향한 사랑은 그녀에 대해 추호도 의심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입 꼬리를 올리며 짓는 표정을 보면 “당신은 아무리 애써도 날 못 이길 걸” 하고 놀리는 것 같았다. 숱 많은 붉은 머리는 제대로 빗는 법이 없었다. 제발 기워 입으라고 아우성치는 듯한 찢어진 청바지. “세상에는 머리를 땋고 멋진 옷을 입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너무 많아, 조나단.” 그녀의 눈빛은 그로 하여금 그녀에게 모든 것을 다 쏟게 만들었다. 그녀는 마치 그를 위해 특별히 창조된 존재 같았다. 그는 아내를 위해 모든 것을 쏟았고,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마디로 그는 아내를 미치도록 사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눈먼 사랑만 한 건 아니었다.
지난 몇 달 동안 아내는 자신이 하는 일에 점차 흥미를 잃어갔다. 하루에 14시간씩 하던 일하는 시간이 12시간, 8시간으로 차츰 줄어들었다. 국경 없는 의사회의 지역 담당자인 엠마는 중동지역 구호활동 업무를 총괄하고 있었다. 스텝과 자원봉사자를 채용하고 훈련시키는 업무를 지휘하고, 물품 배송 감독과 현지 관리 접촉하는 일을 맡았으며, 구호활동을 유지하고 운영하는 데 필요한 재정을 관리했다. 정말 정신없이 바쁜 직업이라고 표현해도 모자랐다.
힘을 다 소진해 버릴까 염려한 나머지 처음에 조나단은 그녀를 진정시키는 역할을 도맡았다. 자신을 너무 혹사시켰기 때문이다. 마치 내면에 있는 밝은 불꽃을 모조리 태워 버리려고 작심한 사람 같았다. 휴식이 필요한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다른 조짐들이 있었다. 두통을 호소하는가 하면, 홀로 산책하러 나가고, 침묵하는 시간도 점점 더 길어졌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멀어져 간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모든 것이 파리 출장을 다녀온 다음부터 시작되었다.
조나단은 두 손가락으로 봉투를 잡고 앞뒤로 뒤집어 보았다. 무게감이 전혀 없었다. 고작해야 종이 한 장 정도 들어 있을 것 같았다. 아무 것도 기재되지 않은 반송지 주소 기재란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곳 스위스에서는 은행 정보 관련 기밀을 누설하거나 린트 밀크 초콜릿 구매 영수증을 가짜로 만드는 것은 범죄에 해당되지만, 봉투에 발신자의 이름을 기입하지 않는다고 국가 반역죄로 처벌받지는 않는다.
국가 반역자가 아니라면 정체가 무엇인가?
라디오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딱딱한 영국식 영어가 들려왔다. “그리니치 민 타임 12시, BBC 방송국 월드 서비스입니다. 보도에 의하면….”
그러나 조나단의 머릿속에선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봉투를 열어 봐.” 목소리는 이렇게 재촉했다. “당장 열어서 읽어 봐.”
읽어 보는 게 그렇게 큰일은 아니잖아…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고 읽어 보고 싶은 생각이 절실한 것도 아니었다. 엠마는 죽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녀에 대한 추억뿐인데, 그걸 굳이 망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는 편지를 얼굴에 좀 더 가까이 가져다 대며,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한 도시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내고 있었다.
바로 파리였다…파리의 문화와 크로와상, 그리고 샤갈 작품전에 푹 빠지고 싶다며 엠마가 일주일을 다녀왔던 곳.
파리…그가 엄청나게 화를 내며 남긴 음성 메시지들에도 불구하고 엠마는 그곳에서 이틀 낮 이틀 밤 동안 사라졌고, 그런 다음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나타났다.
파리….
조나단은 사각 속옷 하나만 걸친 채 텐트 안 간이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새벽 세 시인데도 텐트 안은 여전히 열기로 후끈거렸다. 중동에서도 유별나게 더운 여름이 계속되고 있었다. 몇 달 동안 베카 밸리에서 일하고 생활하면서 그는 땀을 흘리며 자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옆 침대는 비어 있었다. 엠마는 일주일간 유럽을 방문하기 위해 떠나고 없었다. 제네바의 본부에서 나흘간 머문 뒤 파리로 가서 사흘 동안 제일 친한 친구인 시몬느와 만나 빛의 도시를 정신없이 구경하는 게 그녀의 일정이었다. 쥬드폼미술관에서 오후를 보내고, 저녁에는 베르사유에서 ‘빛과 소리’를 즐길 것이라고 했다. 엠마는 활기에 넘쳐 자신들의 여행 일정을 분 단위로 쪼개고 있을 것이다.
조나단은 자동차 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차량이 쳐들어오는 소리가 밤하늘을 가득 울리고 있었다. 베개에서 머리를 들어 올리는데 한 발의 총성이 어둠을 찢어놓았다.
조나단은 재빨리 침대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팔레스타인 청년 라쉬드가 병원 문 앞에 서서 두 팔을 뻗은 채 입구를 막고 있고, 진흙투성이 도요타 픽업 트럭 두 대가 근처에 세워져 있었다. 차량 스피커를 통해 A단조의 멜로디가 슬렛지해머 비트에 맞춰 시끄럽게 울려나왔다. 무장한 민병대 몇 명이 그를 에워싸고 자동소총 총구로 찌르면서 문을 열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조나단은 그들 가운데로 뛰어들며 어설픈 아랍어로 말했다. “원하는 게 무엇이요?”
“당신이 책임자인가?” 리더로 보이는 누런 얼굴빛에 성긴 턱수염, 그리고 고양이처럼 예리한 눈빛을 가진 이십대 청년이 말했다. “당신이 의사인가?”
“내가 의사요.” 조나단이 대답했다.
“우리는 약이 필요하다. 이 아이에게 물러서라고 말해라.”
“절대로 안 됩니다.” 라쉬드가 소리쳤다. 아이는 아주 독립심이 강한 열다섯 살 소년으로 조나단과 엠마가 이곳에 왔을 때부터 성실히 그들 곁을 지켰다. 그에게 있어서 조나단은 우상이자 스승이었고, 수호성인이자 가장 신성한 존재였다. 라쉬드는 수많은 친척들을 돌봐 주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의학을 공부하고 싶어했다.
“제발 진정해 주시오.” 조나단은 신경이 곤두선 괴한들을 진정시키려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도와드리지요. 누가 아프십니까? 여러분 가운데 누가 다친 겁니까?”
“내 아버지요.” 리더가 말했다. “심장이 안 좋아요. 약이 필요해요.”
“이리로 모시고 오세요.” 조나단이 말했다. “기꺼이 치료해 드리지요.” 리더 소년의 두 눈이 이글거리고, 미소는 꿈속을 헤매는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술을 마셨나? 아니면 마약? 어떤 종류지? 라키? 하쉬? 메스?
“그럴 시간이 없어.”
“메자-알-샤리프 병원으로 가는 게 좋을 겁니다. 당신 아버지가 심장병을 앓고 있다면 베이루트로 모셔가도록 주선해 줄 수 있어요.”
하지만 베이루트는 차로 여덟 시간이 걸리고, 메지-알-샤리프로 가는 길은 홍수로 길이 끊어져 통행이 불가능했다.
“비켜.” 리더가 이렇게 소리치며 라쉬드를 밀쳐내자 라쉬드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조나단이 라쉬드에게 달려들지 말라고 말리기도 전에 리더는 라쉬드의 얼굴에다 대고 총을 한 방 발사했다.
“우리 아버지는 심장병 때문에 니트로글리세린이 필요하단 말이야.” 리더는 쓰러진 라쉬드의 몸을 타넘으며 소리쳤다.
조나단은 쓰러진 라쉬드를 보고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았다. 조나단은 그들을 조제실로 안내했다. 무리는 순식간에 달려들어 모르핀과 비코딘, 코데인이 놓인 선반을 눈 깜짝할 사이에 깨끗이 비웠다. 불과 몇 분 만에 조제실 전체가 텅 비었다. 마무리도 신속하게 했다. 그들은 조나단에게 예언자의 가호를 빌어 준 다음 픽업 트럭에 오르더니 곧바로 자리를 떴다.
조나단은 곧바로 전화기를 들고 파리로 전화를 걸었다. 파리에 가 있는 엠마더러 제네바로 날아가 국경 없는 의사회 본부로 찾아가라고 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본부에 미리 전화를 걸어 추가 자금 지원을 요청해 놓은 다음 엠마가 그걸 가지고 와야 병원 의약품을 다시 채워놓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레바논은 새벽 세 시 반이고 파리는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다. 트로와꼬론느 호텔로 전화를 했지만 아내는 받지 않았다. 핸드폰도 불통이었다. 호텔로 다시 전화를 걸어 아내가 묵는 방에 메시지를 남겼다. 그래도 엠마는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 그날 밤, 그 다음날 아침에도. 심지어 조나단이 베이루트로 직접 운전해 가서 자기 구좌에 남은 돈을 모두 긁어 암시장에서 필요한 약품을 구입하고 난 그날 오후까지도 아내의 전화는 없었다.
아내가 사라진 것이었다.
모든 인간의 인내심에는 한계가 있다. 슬프게도 그는 믿음이라는 것이 결코 닳아 없어지지 않는 덕목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음날 그는 오전 6시에 호텔로 전화를 걸어 매니저를 바꿔달라고 부탁했다. “아내가 묵고 있는 방에 메모를 남긴 게 확실합니까?” 따지듯이 물었다.
“예, 아내께서 묵는 객실로 메시지를 전달해 드렸습니다. 확실합니다. 제가 직접 방으로 전달했습니다.”
“혹시 지금 내 아내가 방에 있는지 확인해 주실 수 있겠는지요?”
“아, 물론이지요. 전화를 제 핸드폰으로 돌리겠습니다. 방에 계시면 바로 통화하실 수 있도록 바꿔드리겠습니다.”
조나단은 전화기 너머로 호텔 매니저를 따라 3층으로 올라갔다. 구식 엘리베이터 문 닫히는 소리, 고급 신사화가 카펫이 깔린 복도를 느릿느릿 걷는 소리, 이어서 문을 강하게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십니까, 마담. 호텔 지배인 앙리 고티에르입니다. 별 일 없으신가 해서 들렀습니다.”
아무 대답이 없었다. 잠간 시간이 흐른 다음 고티에르가 객실로 들어갔다.
“랜섬씨?” 세련된 프랑스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메모들이 여기에 그대로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죠?”
“바닥에 그대로 놓여 있습니다. 개봉되지 않은 채 그대로입니다. 아내께선 객실에서 지내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침대를 사용하신 흔적이 없습니다. 가방이나 소지품도 보이지 않습니다.” 고티에르는 잠시 말을 멈추고 어깨를 으쓱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객실 상태가 고객께서 입실하시기 전과 다르지 않습니다.”
* * *
일단 열어 보자.
조나단은 한 손가락으로 봉투의 윗부분을 찢어 열었다. 종이 한 장만 달랑 들어 있었다. 아무런 내용도 적혀 있지 않은 빈 종이였다. 보내는 사람 이름도 없고 받는 사람 이름도 없었다. 아무런 표시나 흔적도 없었다. 봉투를 뒤집어 위아래로 흔들어 보았다. 카드보드지 두 장이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두 장 모두 정확히 같은 크기이고, 종이의 한쪽 모퉁이에는 절취된 흔적이 있었다. 카드보드지의 정중앙에는 빨간 잉크로 찍힌 여섯 자리 숫자가 보였다. 자세히 보니 무슨 영수증 같아 보였다. 코트를 맞기면 주는 보관증 비슷했다. 오른쪽 하단에 아주 작은 글씨로 뭔가 적혀 있었다.
SBB. 스위스 국철 수하물 보관증이었다.
10
마르커스 폰 다니켄은 열두 시간 만에 다시 취리히로 돌아왔다. 회사 입구 간판에는 휘황찬란한 블루 색상의 글씨로 ‘로보티카 AG’라고 적혀 있었다. 그가 본 자료에 의하면 1994년에 테오 라머즈가 이 회사를 설립하고 그때부터 회사의 소유주 겸 최고경영자로 있었다. 회사의 생산활동 내역은 ‘기계 부품’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좀 사무적이고 고지식해 보이는 여성이 사열 준비를 마치고 지휘관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부동자세를 하고 리셉션에서 대기 중이었다. “미카엘라 멘즈입니다.” 큰 걸음으로 다가오며 그녀가 말을 건넸다. 한쪽으로 가르마를 탄 짧은 갈색머리에 수수한 투피스 정장 차림이었다. 명함에는 기계공학 박사에다 박사과정을 우등으로 졸업했다는 이력이 적혀 있었다.
폰 다니켄은 노련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내민 명함에 화답하듯 자신의 신분증을 내밀어 보였다. 누구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을 태도였다.
“우리 모두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 사무실로 안내하며 멘즈는 이렇게 말을 꺼냈다. “라머즈씨에게 원한을 가질 만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정말 좋은 분이셨거든요.”
“그럴 테지요.” 폰 다니켄이 말했다. “사실 내가 이곳을 찾아온 것도 그래서입니다. 우리도 회사 직원들 못지않게 살인범을 체포하고 싶습니다. 어떤 정보든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멘즈의 사무실은 작지만 아담하게 잘 꾸며져 있었다. 가족이나 연인 혹은 친구의 사진을 넣은 액자는 없었다. 그녀는 일과 결혼한 일벌레처럼 보였고, 매우 심란한 상태에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죽은 라머즈를 걱정하는 것은 아닐 테고, 앞으로 회사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그가 죽은 지금 회사 경영을 누가 대신 맡을지 같은 것을 놓고 고민 중일 것이다.
“회사 내 사람이 범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녀는 슬픔을 가득 담은 말투로 물었다. “해외에 나가 있는 사람일까요?”
“지금으로선 드릴 말이 없습니다. 수사 중인 사건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는 게 경찰 내부 규정입니다. 먼저 회사에 관련된 질문부터 해도 되겠습니까? 정확히 만드는 물품이 무엇입니까?”
직책이 이사인 그녀는 책상 쪽으로 의자를 바싹 당겨 앉으며 대답했다. “내비게이션 시스템입니다. 지상, 수중, 이동식 단말기 포지셔닝이요.” 폰 다니켄이 이해가 안 간다는 눈빛을 보이자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항공기, 보트, 차량의 정확한 위치를 인식해 내는 장비를 만드는 것입니다.”
“GPS 같은 것입니까?”
얼굴을 찡그리는 것으로 보아 그것과는 다른 모양이었다. “우리 제품은 위성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최근 ‘센서 융합’이라는 기술을 활용해서 새로운 지형 내비게이션 시스템 특허를 취득했습니다. 관성 센서 내비게이션 시스템과 디지털 지도, 그리고 전파 탐지 고도계의 측정값을 결합하는 것입니다. 항공기의 경로를 따라 지형의 높낮이를 측정하고, 측정값을 디지털 지형 지도와 비교함으로써 항공기의 위치를 오차범위 몇 밀리미터 이내로 정확하게 잡아낼 수 있습니다.”
“구매자는 누구입니까?”
“저희는 여러 분야의 고객층을 모시고 있습니다. 보잉, 제너럴 일렉트릭, 에어버스, 그 외에도 여러 회사들이 있죠.”
그녀의 말에 놀란 듯 폰 다니켄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렇다면 내가 이용하는 항공기가 산속으로 처박히지 않는 것에 대해 감사를 드려야하겠군요.”
“저희 때문만은 아닐 테지만 굳이 말하자면 우리 공로도 크다고 할 수 있지요.”
그는 무슨 비밀 이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몸을 숙였다. “군사기술 부문에도 쓰였을 것이라고 생각되는군요. 군수산업 쪽 고객도 확보하고 있으신가요? 전투용 항공기 제조업자라든가. 레이저 유도 무기라든가요. 그런 종류의 무기들 있지 않습니까.”
“전혀요.”
“하지만 언급하신 회사들 중에도 대규모 방위산업체가 있지 않습니까, 안 그런가요?”
“그렇긴 하죠. 하지만 그 분야는 저희 담당이 아닙니다. 군사용 내비게이션 시스템을 제작하는 회사는 따로 있습니다.”
폰 다니켄의 귀에는 그 대답이 굉장히 사무적으로만 들렸다. 라머즈는 사담 후세인의 의뢰로 제작했던 슈퍼건을 비롯하여 대형 무기를 제작하는 데 연루되어 요주의 인물 명부에 올라 있었던 사람이 아닌가. “라머즈씨가 전에 무기 제작 일에 관여한 사실을 모르시지는 않겠지요?” 이렇게 떠보았다.
“정말 비상한 분이셨지요.” 멘즈가 대답했다. “저하고 미처 나누지 않으셨던 관심 분야도 참 많았을 거라 짐작해요. 제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우리 회사는 어떤 종류이건 무기 쪽과는 연관된 적이 절대로 없다는 점입니다.” 그녀의 눈썹이 가운데로 몰렸다. “근데 왜죠? 그 일이 그분의 죽음과 무슨 상관이라도 있단 말씀이세요?”
“지금으로선 모든 가능성을 다 열어놓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멘즈는 고개를 돌렸고, 그는 그녀가 방금 나눈 대화 내용을 따져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표정이 부드러워지더니 얼굴을 가리고 숨죽여 훌쩍이며 이렇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테오씨의 죽음이 너무 가슴 아파서요.”
폰 다니켄은 대화 내용을 노트에 급히 적어 내려갔다. 자신이 명탐정 메그레 경감은 아니지만 미카엘라 멘즈가 사실을 말하고 있는 건 분명한 것 같았다. 설혹 라머즈가 바람직하지 않은 어떤 일에 연루되어 있었다 해도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여자가 진정하길 기다렸다가 다시 물었다. “라머즈씨가 출장을 자주 다닌 편이었나요?”
멘즈가 고개를 들었다. “출장이요? 어머나! 당연하죠.” 그녀는 눈을 훔치며 말했다. “쉬지 않고 여행을 다니셨죠. 설비점검, 계약체결, 고객관리 등등 할 일이 너무 많으셨죠.”
“라머즈씨가 주로 다니던 나라는요?”
“우리가 하는 계약의 90퍼센트는 유럽 내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뒤셀도르프, 파리, 밀라노, 런던을 수없이 왕래하셨어요. 산업 중심 허브 도시들이지요.”
“중동에 간 적은 없었어요? 시리아나 두바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나 이집트와는 거래가 없었나요?”
“전혀 없습니다.”
“출장을 위한 사전 예약 업무는 누가 했나요?”
“직접 하셨죠. 제가 생각하기에는.”
“라머즈씨가 비서를 통하지 않고 일을 처리했단 말씀이신가요? 항공편, 호텔, 렌탈 차량 등등 출장 전에 준비할 일들이 많은데요.”
“말을 해도 듣지 않으셨지요. 그분은 뭐든 직접 하는 스타일이셨어요. 여행을 가실 경우 인터넷을 통해 직접 모든 예약을 하셨어요.”
폰 다니켄은 노트 패드에 그녀가 말한 정보를 모두 받아 적었다. 무슨 일이든 직접 하는 스타일이어서 그렇게 했다고는 절대 믿지 않았다. 그는 비밀이 많은 사람이었다. 줄스 게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다른 가명으로 항공권 예약을 할 때 누군가 어깨너머로 쳐다보는 걸 원치 않았을 것이다. “멘즈 박사님.”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그가 말했다. “그분의 사무실을 좀 봐도 되겠습니까? 라머즈씨에 대해 아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만.”
“그러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사실 폰 다니켄은 이미 그의 업무 권한을 넘어서 있었다. 영장을 발부받을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법률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그는 그곳에서 기웃거릴 권한이 없었다. “살인범을 잡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것을 다 해보고 싶습니다만.”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도 같은 생각이시죠?”
미카엘라 멘즈는 자리에서 일어나 따라오라며 신호를 보냈다. 라머즈의 사무실은 바로 옆방이었다. 사무실 크기는 멘즈의 방과 같았고 사무용 가구도 같았다. 캐비닛 위에 진열되어 있는 아주 흥미로운 물체가 폰 다니켄의 시야에 들어왔다. 높이 5센티미터에 투명한 플라스틱 재질로 만든 물건이었는데 V자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박사님 회사에서 만든 제품인가요?”
“그건 MAVmicro-airborne vehicle라는 것으로 초소형 비행체입니다.” 멘즈박사가 대답했다.
“좀 봐도 되겠습니까?” 그는 MAV를 가리키며 이렇게 물었고, 멘즈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것을 집어 들었다. 무게는 1킬로그램 남짓 되었다. 양 날개 부위가 매우 단단하면서도 유연성이 뛰어나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실제로 날 수 있나요?”
“당연하죠.” 그녀는 자존심 상한다는 듯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대답했다. “비행범위는 50킬로미터, 최대시속도 400킬로미터나 됩니다.”
“그럴 리가요, 정말입니까!” 폰 다니켄은 목청을 키우며 순진한 시골 경찰관 행세를 성공적으로 해보였다.
“라머즈씨가 이걸 여기서 직접 만드셨단 말입니까?”
멘즈는 고개를 끄덕여 시인해 보였다. “저희 연구개발실에서 그분이 직접이요. 이제껏 만든 것들 중 가장 작은 제품이죠. 그 사실에 꽤나 만족해하셨어요.”
폰 다니켄은 그녀가 내뱉는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암기했다. 비행거리 50킬로미터. 속도 시속 400킬로미터. 그의 손으로 직접 만들었고…지금까지 제작한 것들 중에서 가장 소형. 그건 이런 종류의 비행체가 더 있을 거란 소리였다. 그는 그 희한한 비행 물체를 좀 더 관찰했다. 오차범위가 불과 몇 센티미터에 지나지 않는 고성능 내비게이션 시스템으로 유도되는 것이 틀림없었다. “회사 제품에 포함된 것인가요? 생산라인에 포함시킬 계획이십니까? 장난감 시장에 진출시킨다든지 말입니다?”
예상했던 대로 그의 말에 멘즈의 태도가 싸늘하게 바뀌었다. 그녀는 앞으로 나와 초소형 비행체를 빼앗아 들며 이렇게 쏘아붙였다. “MAV는 장난감이 아닙니다. 이건 현존하는 것들 중에서 가장 가벼운 초경량 비행체란 말입니다. 잘 모르시나 본데 참고로 이건 저희 VIP 고객님을 위해 제작한 제품이랍니다.”
“그게 누군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건 기밀사항이라서 곤란합니다. 하지만 군 계통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는 것만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사실은 그 반대에 가깝죠. 제가 말씀 드린다면 누군지 금방 아실 겁니다. 최고 수준의 고객으로부터 주문을 받았으니 우리로서는 영광이죠.”
“그 고객이 누구인지에 대해 알려주신다면 매우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멘즈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정보가 살인범을 찾는 데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건지 저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군요.”
폰 다니켄은 점잖게 물러섰다. 시간을 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한 다음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를 달라는 말을 했다. 차 있는 곳으로 돌아가면서 그는 로봇에 대한 생각은 더 이상 하고 있지 않았다. 머릿속은 MAV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미카엘라 멘즈의 말이 옳았다. 그것은 장난감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쁘장하게 위장해놓은 무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