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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태복음 7:1-2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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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에 대한 일대기는 셀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책과 그림과 음악과 문학작품, 그리고 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법을 통해, 시각적으로, 또는 청각적으로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묘사들을 집약하여 모든 인류에게 제공되어 왔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예수님 전인 B.C(Before christ)와 예수님 이후 A.D(Anno domini-in the year of our LORD, 주님의 해) 구분할 만큼 역사의 큰 흐름을 바꾸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가공인물을 내세워 역사의 연표에 표시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이 사실 자체만으로도 예수님이 실제인물이 아니라는 논란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전하려는 다양한 시도 중에 영상매체를 통한 복음 전파는 파급력과 영향력이 가장 클 것입니다. 기독교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벤허나 십계를 알고 있고, 세계적인 팝 가수 머리이어 캐리와 휘트니 휴스턴이 함께 부른 애니매이션 영화 ‘이집트 왕자’의 주제곡인 ‘When You Believe’라는 곡은 기억할 것입니다. 저도 어린 시절에 영화를 통해서 본 예수님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1977년도 작품으로 영화의 제목은 ‘나자렛 예수(Jesus Of Nazareth)’입니다.
말씀 자체를 영상화 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고된 작업입니다. 이미 결과를 다 알고 있는 내용을 입체화 하는 작업은 특별할 것이 없어 보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영화가 나올 때마다 비평들이 쏟아집니다. 성경 내용을 지나치게 벗어났다, 너무 과장 되었다, 너무 자의적인 시도이다, 여러 가지 이유들로 평가를 합니다. 창조예술이라는 영화의 고유 영역을 인정해주기보다는 얼마나 성서에 입각하여 영화가 완성되었는지가 평가의 기준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시나리오 작가나 감독이 무엇을 말하려하는 창의성보다는 성경말씀 내용을 얼마나 충실이 따르고 영상미학으로 보여주는가를 강요하는 편입니다. 이 룰에서 벗어나면 관객들에게 외면당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과거 명작이라고 꼽히는 영화들을 보면 사실을 사실대로,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영상화 한 작품들입니다. ‘나자렛 예수’는 특히 장시간 내내 복음서를 그대로 옮긴 듯 성경말씀에 충실합니다. 중요부분에서는 말씀을 자막처리해서 더욱 신뢰도를 높여 줍니다. 시간이 되실 때 여유 있게 보시면 충분히 은혜가 되실 것입니다.
‘나자렛 예수’는 제게도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영화는 이탈리아 출신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이 연출하고, 영국 출신 배우인 로버트 파웰이 예수님 역을 맡은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상영시간이 무려 6간이 넘는 대작입니다. 제가 왜 이 영화를 좋아했었는지 세 가지가 기억이 납니다.
첫째는 배우 때문입니다. 주인공으로 나온 파웰은 아마 예수 그리스도 영화 중에서 가장 예수다운 풍모를 지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알지 못하기에 이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모습을 연상하라 하면 그 배우가 연기한 예수님의 얼굴이 항상 매치가 됩니다. 저만의 예수님 형상을 담아 둔 셈입니다.
또 한 명의 배우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로 나왔던 아르헨티나 출신의 여배우‘올리비아 핫세’ 때문입니다. 당시 사춘기에 영화를 볼 때라 청순한 미모의 배우를 보고 설렘을 받은 기억이 납니다. 아마도 짝사랑의 감정 비슷한 것을 느끼지 않았나 기억 됩니다. 이 배우는 같은 감독과 함께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또 다른 명작을 만듭니다. ‘올리비아 핫세’는 당시 청순함의 대명사로 남성이면 누구든지 좋아하는 배우였습니다.
둘째는 예수님 역의 목소리를 더빙한 성우 때문입니다. 김종성 성우입니다. 이분의 맑고 청명한 음성은 정말 듣기가 좋았고 귀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이 분의 프로필을 보니 로버트 파웰과 한 살 터울로 동 시대를 살아온 분이셨습니다. 본명은 ‘김기호’ 였고 어린 시절의 이름이 ‘종성’ 이엇다고 합니다. 성우가 된 이후로는 ‘금 종소리’라는 의미로 종성(鍾聲)이라는 이름을 다시 사용하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격동 50년, 용의 눈물, 불멸의 이순신,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직장의 신 등 수많은 방송대작과 광고 그리고 다큐멘터리의 나레이터로 활동 하셨습니다. 물론 영화 더빙 작품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참 타고난 미성을 소유한 성우 분입니다.
셋째로는 예수님의 산상설교 장면 때문입니다. 당시 저는 산상설교를 익히 알고 있었지만 낭랑한 성우의 목소리로 더빙된 영화 화면을 보면서 짜릿 짜릿한 전율을 느꼈습니다. 저 말씀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구나! 여러 가지 질문에 대해 답변이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지식 수준의 한계를 넘어선 말씀들이구나!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산상설교을 읽으면 눈으로는 글을 읽지만 장면 장면들이 파웰이 연기한 예수님과 함께 입체화되어서 상상이 되고, 성우 김종성 씨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산상설교를‘성서중의 성서’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집약한 내용입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설교는 전체적으로 영화에서 한 장면을 긴 시간 편집 없이 길게 보여주는 롱-테이크(long-take) 기법처럼 무려 세장에 걸쳐 설교가 이어집니다. 복된 삶, 윤리, 도덕에 관한지침, 사회적인 규범과 자선사업, 신앙생활의 기도와 금식 등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율법을 잘못 이해하고 있던 내용에 대해 6개의 대표적인 조항들을 가지고 일깨움을 주십니다. 살인, 간음, 이혼, 맹세, 보복, 원수에 대한 용서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대로 살았지만 문자에 얽매여서 하나님이 주신 계명의 참의미를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본래 의도를 설명해주고 그들의 무지함을 깨우쳐 주십니다. 이 외에 모든 내용이 다른 어떤 설교보다도 값진 내용을 많이 담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설교하고 계시는 장소와 듣고 있는 청중들은 누구일까요? 먼저 장소를 살펴보면 마태복음 5장 2절에 ‘산에 올라가 앉으셨다’고 합니다. 설교를 듣기 위해서 군중들이 많이 모여 있었고, 예수님은 산 위쪽에서 말씀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병행 본문인 누가 복음 6장 12-16절에서 예수님은 산에 기도하러 올라가셨다가 제자들과 함께 내려와 평지에 서서 말씀 하십니다. 장소가 산이냐, 평지냐 논란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산에 해당하는 원어는 ‘산이나 산악지대’로 높지 않은 야산을 말합니다. 누가복음의 평지는 완전히 산 아래로 내려왔다는 것은 아닙니다. 산꼭대기든 중턱이든 군중이 많이 모였다고 하니 가파른 지대가 아니라 사람이 많이 모일 수 있는 트여진 장소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청중들은 누구입니까? 마태복음 산상설교의 청중들은 4장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보고 따라온 무리입니다. 모든 악한 것과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을 따라온 갈릴리 지역 사람들과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하심과 천국복음 전파하심이 수리아에까지 널리 퍼졌으니 전국 각 지역에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보러 온 무리들 이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청중들은, 예수님의 12제자들, 그리고 그 제자들을 따르는 많은 무리들, 또한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백성들이었습니다. 갈릴리를 중심으로 사방 수백Km에서 사람들이 몰려온 것입니다.
특이한 점은 무리들을 구분하셨습니다. 12제자들, 그리고 말씀을 믿고 따르는 수많은 제자들, 소문을 듣고 병을 고치러 온 일반 백성들로 구분합니다. 차별을 두어서가 아니라 먼저 예수님이 친히 찾아가서 따라오도록 직접 지명하시고 밤새도록 기도하신 후에 제자로 선택한 12명을 중심으로 예수님이 사역하셨다는 것입니다. 들을 때도 가장 앞자리에서 듣게 하십니다.
지금처럼 확성기나 마이크도 없을 때 인데 그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들을 들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신적인 능력으로야 다 들리게 하실 수도 있지만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이시기에 목소리가 실제로 들리는 거리에 있는 사람들만 직접 설교 말씀을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들은 사람이 다음 장소로 이동하면서 못 들은 사람에게 전하고, 전해들은 사람은 또 다른 곳에서 또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전했을 것입니다.
간접 전달되어도 말씀의 능력은 약화되거나 변질되지 않습니다. 현재 우리는 2천년이 지나서 말씀을 듣는데도 믿어지고 ‘아멘’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시간과 공간과 문화와 역사와 국경을 초월합니다. 주님의 능력은 말씀하시는 것 자체에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언제나 믿음으로 마음에 받으시는 우리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의 앞 장인 5장 6장은 각각의 마지막 구절로 요약이 됩니다. 5장 48절,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6장 34절,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더 압축하면 온전하라! 염려하지 말라! 입니다. 온전하기 위해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염려하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염려하는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어서 7장의 말씀들은 믿음이라는 고귀한 가치를 마음에 담고 살아가는 우리자신이 고질적으로 버리지 못하는 태도와, 극도로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해 들려주십니다. 7장의 내용은 네 가지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하지마라!/하라!, 들어가라!/삼가라!는 내용이 대구(對句)를 이루는 구조입니다.
첫째 내용은 ‘비판하지 마라’입니다. 비판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밝히거나 잘못된 점을 지적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남의 잘못이나 결점을 책잡아서 나쁘게 말하는 비난이나, 남을 비웃고 헐뜯어서 말하는 비방과는 사뭇 다른 느낌입니다. ‘건전한 비판은 있을수록 좋다’고 비판에 대해 아주 긍정적 의미를 부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비판은 사전적으로 표면상 긍적적 요소가 있을지 몰라도, 대체로 그 내면에는 부정적 판단이 기조를 이루는 논증적 언술을 의미합니다.
비판이라는 원어의 뜻에는 ‘판단’ ‘심판’ 이라는 최종적 선고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법원의 재판장이 선고를 내리는 판결과도 같은 것입니다. 뗄 수 없는 딱지를 붙이는 것 같은 정죄의 의미를 담고 있기에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 비판이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불순한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남을 무너뜨리고 내가 높아지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본래 대상은 위선자들을 말합니다. ‘나는 의인이요 너는 불의한 사람이다’ ‘나는 율법에 완벽한 자요, 너는 무지한 자로다’ ‘나는 정의의 비판자요, 너는 판결 받고 고침을 받아야 되는 자로다’ 자칭 자신이 하나님 앞에 떳떳하고 경건하고 거룩한 의인의 표본이라고 착각하는 위선자들에게 주님은 강력한 경고를 내리시는 것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판단과 판결을 주었습니까? 우리가 어떤 누군가에게 “심판해도 돼!” 그러한 권한을 내줄 권세가 있습니까? 비판할 권리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로 누구를 판단하여 비판할 수 없습니다.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다’ 라고 합니다. 남을 비판하면 그 내용과 똑 같은 내용이 부메랑이 되어서 네게 돌아올 것이라고 선뜻 이해 할 수 있지만 그 말이 아닙니다. 네가 옳다 생각하고 남에게 잣대를 들이대서 비판하는 그 내용들이 누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너도 나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누구를 비판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특히 3~5절에서 형제와 연관지면서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비판하는 것을 강력하게 경고 하십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미 비판이 습관화, 일상화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남의 눈에 있는 티 같은 소악(小惡)은 보이는데 자기 눈 안에 있는 들보 같은 대악(대악)은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비판하는 사람들 대다수가 자신의 들보를 모르는 사람들로서 비판을 일삼다가는 결국 자아상실의 구렁텅이에 빠져 위선자의 탈을 쓰고 살아가는 비참한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비판의 독버섯은 결국 신앙공동체를 파멸로 몰아가는 엄청난 재앙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6절에,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고 하십니다. 거룩과 진주는 내면과 외면의 모습입니다. 가식과 위선이 아닌 참 된 신앙의 모습입니다. 화려하고 깨끗한 옷을 걷어 냈을 때 추한 모습의 맨 몸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겉 과 속이 깨끗하여 사랑과 겸손의 열매를 맺어 가는 모습을 상징합니다.
비판하는 사람은 위선과 가식이 들어날 때 개와 돼지와 같은 동물의 우리에 던져져서 더러움에 버려지는 것과 같습니다. 개와 돼지, 거룩과 진주를 대조적으로 보여줍니다. 비판을 일삼는 사람은 거룩과 진주를 지닌 것 같아도 심판의 날에 이르러 자신의 진가가 거짓으로 판명됩니다. 위선이 드러나서 속되고 추한 것으로 판단되어 하나님께 비판 받는 결과는 참으로 비참해 진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적극적으로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반대로 소극적으로 남을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비판은 절대 안 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자신은 서로 비판할 자격이 없을뿐더러, 비판 자체가 심판자로서 권세를 가지신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비판에 대해 로마서 8장 1-2절 말씀을 우리말 성경으로 읽어 드립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여, 그대는 변명할 수 없습니다. 그대는 남을 판단하는 그것으로 그대 스스로를 정죄하고 있습니다. 남을 판단하는 그대가 똑같은 일들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진리대로 하나님의 심판이 내린다는 것을 압니다.”
비판하지 말라고 해서 거짓이나 악을 보고 서로 못 본 체하라고 가르치심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불의에 대하여 결코 적당주의의 태도를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독사의 자식들아’ 라는 표현으로 실로 준엄하게 이것을 규탄하기도 하셨습니다. 악과 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비판하되 사람에 대한 비판은 금지하여야 합니다. 비판과 심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이시고 판단하실 수 있는 분도 하나님뿐이십니다.
비판은 그 비판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무서운 심판에 이르게 합니다. 형제나 이웃이나 누구에게나 비판하려는 생각이 내 안에 들어오면 즉시 물리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비판이 나를 죽이고,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것임을 명심하시고 서로 사랑하는데 힘쓰는 우리 모두기 되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내용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입니다. 비판이나 판단에 힘쓸 시간과 노력을 아껴서 하나님 앞에 나가 말씀을 듣고 주시는 것을 취하고 그것을 나누며 베푸는 삶을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이보다 더 희망적인 말씀이 있겠습니까? 이보다 더 확실한 약속이 있겠습니까?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해서 돌과 뱀이 아니라 떡과 생선을 주는 마음으로 다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아버지 저 필요한 것 있어요, 주세요!” 한 마디 하면 다 주신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모든 것을 가지고 계셔서 좋고, 언제나 부르면 대답하시고 만나 주셔서 좋고, 가지고 계신 것을 아낌없이 다 주셔서 좋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멋지신 분입니다. 참~ 좋으신 분이 하나님 아버지 이십니다.
비판 하는데 힘을 쏟는 시간에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소위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구하면 다 주시지만 거기에는 숨겨진 조건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22절,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믿음으로 구하면 다 주시고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 없이 구하면 노력과 시간만 허비하는 것입니다. 외식하지 말고 진실한 믿음으로 구하여야 한다는 것이 당연한 진리입니다.
12절은 믿음대로 구하고 구한 것을 받았을 때 우리가 누리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남을 대접하라 하시는데 그러면 우리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생명, 재물, 가정, 예배당.. 이런 유형의 것이 우선 생각 됩니다. 그러나 사랑, 기쁨, 평안, 감사, 평화, 화목... 이런 무형의 것이 더 많습니다. 유‧무형의 모든 것을 주셨는데 이것을 통칭하면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은혜의 선물들 이라는 말씀입니다.
앞의 말씀과 연결시켜 보면 비판하는데 힘쓰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받은 그 은혜대로 이웃에게 대접하며 나누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은혜를 나누는 것이 남을 대접하는 길이요, 믿음 생활을 하는 자의 도리요, 결국은 그것이 하나님 주신 율법을 지키는 일이고, 앞선 선지자들의 길을 따라 걸어가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사랑으로 그것을 나누는 것이 믿는 자들의 삶이어야 합니다.
은혜를 나누는 것은 은혜를 주신 분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결국 남을 대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함께 공유하라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진실로 구하시고, 원하는 만큼 다 받으시고, 받은 은혜대로 아낌없이 남에게 찾아가 나누시며, 은혜를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내용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입니다. 우리 눈앞에 두 문이 있습니다.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고 합니다. 또 하나의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고 합니다. 들어가라!고 한다면 누구라도 당연히 크고 길이 넓은 문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넓은 문이 멸망의 문이니, 그 옆에 있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힘들고 곤란한 선택으로 몰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크고 넓은 길로 가면 현실은 보장 되지만 미래는 보장 되지 않습니다. 좁은 길로 가면 현실은 피폐하지만 미래는 보장됩니다. 뿌리치기 힘든 넓은 문의 유혹은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이는 좁은 문을 쉽게 포기하기에 충분합니다. 크고 넓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입니다.
13, 14절, 두 구절만 생각하면 누구라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결단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선 말씀을 이어 봅니다. 비판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포기하고, 부정하는 것입니다. 내 자아가 부정되기에 그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께 구하며 나아갑니다. 구한 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주시는데, 그 은혜의 통로요 운반자가 성령 하나님 이십니다. 성령 충만한 상황이 되면 우리의 영안이 열립니다. 좁은 문 뒤에 생명의 안식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할지라도 너무나 편안하고 쉽게 좁은 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두 문을 놓고 어디로 들어갈 것인지 선택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디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명령 하십니다. 말씀하시니 들어가긴 가야 되는데 그렇다고 강제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믿음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너 혼자 들어가라 하시지 않고 내가 함께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가 볼 수 있게 앞장서서 가고 계십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어서 외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생명의 좁은 문에 들어와 있습니다. 좁고 협착한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주님을 놓치지 말아야 길을 잃지 않습니다. 생명의 문을 나설 때까지 앞서 가시는 주님 곁에 붙어서 끝까지 통과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넷째 내용은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시간에도 우리를 계속 넘어뜨리려는 사탄의 공세는 계속 됩니다. 22절에 거짓 선지자들도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합니다. 신명기 13장에서도 선지자나 꿈꾸는 자들이 이적과 기사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이리의 옷을 입고 노략질하려고 미혹합니다. 외식하는 자들의 대표적인 예가 ‘거짓 선지자’입니다. 주님은 이들을 향해 철퇴를 내리시면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떠나가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설교하는 말씀을 믿고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말 잘하는 말쟁이가 되어서 위선과 거짓으로 살아가는 것을 경멸하십니다.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겉치레는 화려하지만 열매 없는 쭉정이는 아궁이에 던져질 것이고, 열매 맺지 못하는 나쁜 나무는 찍혀 태워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는 것은 그들을 상대하기는커녕 근처에 얼씬 거리게 하지 말고 늘 거리를 두고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거짓 선지자’의 사술에 넘어가지 않는 방법은 그들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고 듣지 않는 것입니다.
왜 거짓 선지자들이 넘쳐 나겠습니까? 시대가 악한 것도 있지만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신명기 13장 3절,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가증하고 위선적인 ‘거짓 선지자’와 참 사랑의 하나님을 비교조차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신신당부입니다.
다시 한 번 앞서 말씀과 연결합니다. 바판 하려는 네 자아를 버리고, 하나님 아버지께 성령 충만을 구하고, 네 앞에 앞서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좀은 문으로 들어가되, 거짓의 어떤 유혹에도 요동치 말고 하나님 아버지만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전체 7장의 흐름이고 주님이 산상에서 선포하셔서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을 듣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 즉 천국 시민권자로 준비하며 이 땅에서 모범적으로 살아가는 참된 신앙의 삶이 어떠해야 되는지 규범 적으로 말씀 하십니다. 권유 정도의 말씀이 아니라 하지마라! 하라! 들어가라! 삼가라!를 명확하게 구분하면서 단호하게 말씀 하십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기억하고 예수님 사후에도 ‘하나님의 나라’, ‘천국복음’에 대한 증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죽음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어떻게 그렇게 실천할 수 있었겠습니까? 24절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26절에,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듣고 행하는 자와 듣고 행하지 않는자로 나뉩니다. 제자들은 두 말씀 중에 듣고 행한 쪽을 선택한 사람들 이었습니다. 위선자인지 신실한 신앙인인지 구별할 수 있습니다. 참 된 복음의 증인인지 거짓 선지자인지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 기준은 한 마디면 족합니다.“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우리 모두에게 듣고 행하는 선택의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거룩하고 온전한 사랑의 열매를 많이맺어 참 복음의 증인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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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참으로 귀한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의 무지를 깨우쳐주시고 진리의 말씀을 담게 하시니 감사 합니다. 이제 말씀을 들은 우리가 ‘듣고 행하는’자로 살아가도록 결단하는 은혜를 주옵소서.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하셨사오니 비판하지 말고, 성령을 구하고, 주님과 동행하며, 거짓에 흔들리지 말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을 진실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영광의 주님을 볼 때까지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게을리 않게 하옵소서. 사순절 기간 동안 주님의 일생을 기억하며 십자가의 길을 동참하는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감당하신 우리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50318 수요설교.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태복음 7장 1-29절. 2015. 3. 11 수요예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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