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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을 변화시킨 사람들
김 충 영 KISTI 전문연구위원/국방대학교 명예교수
1. 서 론
역사를 거시적(巨視的)으로 보느냐 미시적(微視的)으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달리 인식될 수 있다. 요사이 한국 정치는 지난 역사를 미시적으로 보고 전체를 호도하는 것을 가끔 볼 수 있다. 미시적으로 보면 지금 이 순간도 억울한 사람들이 울부짖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미시적으로 보기보다 거시적으로 관찰하여 분석하고 평가할 필요가 있다. 돌아보면 조선 말기와 일제 식민지 시대 백성들은 자포자기에 빠져 의욕을 읽고 게으르고 시간관념도 없고 바삐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고 비웃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와서 외국에 가면 한국 사람들은 ⌜빨리 빨리⌟로 알고 있고, 한국인을 보면 후진국에서 산업국으로 경제 개발에 성공한 국민으로 보고 경이적으로 대하고 있다. 그러면 과연 이러한 발전에 누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어서, 해방 후 위기를 넘기며 한국인을 변화시킨 요인들을 거시적으로 분석해 본다.
2. 조선 말기 양반들의 횡폭과 자포자기에 빠진 백성
정양용은 신포의(身布議)에서 ⌜양반 출신에게는 무조건 신포를 면제해주어서 백성들은 오직 양반 신분이 되기 위해 자기 족보를 위조하여 자기 고향을 버리고 먼 곳으로 이주하여 양반 행세를 하며 유생 갓을 쓰고 과거 시험장에 출입하면서 양반이 될 수 있었다.⌟라고 했다. 또한 논정소(農政疏)에서 ⌜조선시대 양반출신은 벼슬도하지 않으면서 농업에도 종사하지 않고 일자무식이면서 선비로 자청하여 조상의 명칭을 표방하면서 으스대며, 거만을 떨고 일반백성을 멸시하며 농사짓는 일을 천시하고 노동하기를 싫어하며 손 까딱하지 않고 가난을 영광으로 알면서 굶주림을 견디니 놀고먹기만 좋아한다.⌟고 했다. 그래서 농민들은 세금이 과중하여 허덕이나 양반들은 놀면서 위압적(威壓的)이면서 손 하나 까닥하지 않으니 그 폐해를 논하고 있다.
한편 비숍(Isabella Bird Bishop)여사는 조선조 말에 한국을 둘러보고, 협잡을 업으로 삼는 관아 심부름꾼의 횡포, 관리들의 악행을 보고 한국 농민이 일본 농민들 보다 부지런하지 않는 이유를 생업에서 이익을 보호해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데 있다고 보았다. 한국 농민은 그가 소유하고 이는 것은 탐욕스럽고 부정한 관리들에게 다 빼앗기므로 가난이 그들의 최고 방어막이라고 보았다. 관리들의 수탈은 아주 악질적이어서 강요하는 뇌물, 강제되는 대부, 돈 있는 줄 알면 빌려달라고 하고는 이자는 고사하고 원금도 주지 않으면서 상환을 요구하면 조작된 죄목으로 벌금 부과하고 이 때문에 옥에 갇히고 연좌죄(連坐罪)로 친척까지 곤욕을 당하여 아예 상환을 요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농민들은 그저 가족이 먹고 입을 최소한 수입만 필요로 했으며 그 마저도 착취당하여 먹고 살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가운데도 비솝여사는 한국의 발전 가능성을 예견했다. ⌜한국인은 대단히 영민하고 똑똑한 민족이며 말귀를 잘 알아듣는 총명함을 지니고 있다.⌟ ⌜좋은 기후, 적절한 강우량, 내란과 도적질이 일어나기 힘든 훌륭한 교육을 고려하면 한국은 번영할 민족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한국 사회는 동학란으로 폭발했고 뒤이어 개혁의 시도는 현실에 적응되지 않아서 산산이 부서지고 일본은 개혁이라는 명목으로 한국을 식민지화 해버렸다. 일제 기간 백성들은 토지를 빼앗기고 유랑하게 되었으며, 그나마 토지를 가지고 소출을 내면 공출이란 명목으로 모두 빼앗겨 버려서 그저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농민들은 춘궁기(春窮期, 일명 보리 고개)에 끼니를 때우기 위해 산으로 풀뿌리, 나무줄기, 도토리 열매를 찾아 헤매었다. 놋그릇과 쇠붙이는 전부 전쟁을 위해 빼앗겨야만 했다. 농민들은 열심히 일해도 먹을 수 없으니 일할 의욕도 나지 않고 그저 그때그때 필요한 정도만 챙길 궁리만 하니 부지런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좋게 말하면 느긋하고 나쁘게 말하면 게으를 수밖에 없었고 술이나 먹고 노름판이나 벌리면서 ⌜왜놈들!⌟하고 한만 품고 있었다.
3. 자유민주주의 수호가 중요 했던 시절
1945년 해방이 되었으나 국토는 분리되고 민족은 이념으로 두 쪽으로 갈라져 싸웠다.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몇몇 선각자들은 한반도가 절대로 공산화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을 처벌하기 시작했다. 해방 직후 지주들을 제외한 지식층 대부분은 공산주의 사상에 호응함으로 해서 1946년에 대구 10∙1폭동, 1948년에 제주4∙3사건, 1948년 10월 20일 여수∙순천반란사건이 터졌다. 이승만대통령은 다급했다 그래서 친일파에 관계없이 수사경력이 있는 사람을 채용하여 공산주의자를 처벌하여 공산당을 더 번지지 않게 하는 한편 토지개혁을 하여 공산주의자가 말하는 무산계급을 줄이는 데 급급했다. 최초 이승만 대통령은 제1대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민주정부는 백성이 주장하지 않으면 그 정권이 필경 정객과 파당의 손에 떨어져 전국이 위험한 데 빠지는 법이니⌟라고 하고는 북한 정권에 대하여 ⌜이북 동포 중 공산주의자들에게 권고하노니 우리 조국을 남의 나라에 부속하자는 불충한 이상을 가지고 공산당을 빙자하여 국권을 파괴하려는 자들을 우리 전 민족이 원수로 대우하지 않을 수 없나니 남의 선동을 받아 제 나라를 결단내고 남의 도움을 받으려는 반역행동을 버리고 남북 정신통일로 우리 강토를 회복해서 조상의 유업을 완전히 보호하여 가지고 우리끼리 합하여 공산이나 무엇이나 민의를 따라 행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공산당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공산당의 매국주의를 반대한다고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민주주의 정체 아래에 공산주의 든 민주주이든 하자는 주장이었다. 당시 제2차 대전 후 소련은 맑스-레닌주의에 입각하여 공산국가의 종주국 역할을 하면서 전 세계 공산화를 추진하고 자유세계에 공산게릴라를 암암리에 지원하고 있었다.
1949년 중국본토는 중국 공산당이 국부군을 몰아내고 베트남은 공산군을 이끄는 호지민이 기세를 올렸다. 아시아 지역에서 공산국가로 번지는 도미노 현상을 서방세계는 우려하고 있었다. 북한은 공산세력의 승세를 이용하여 급기야 1950년 6월 25일 기습 남침했고 한국군은 완전히 파멸하였으며 미군이 참전했으나 남한은 북한군에 의해 점령당할 위기에 놓였다. 그런데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한국군 제1사단이 다부동 전투에서 북한군 3개내지 4개 사단을 성공적으로 막아 한국군은 재편에 성공하여 건재함을 보여 주었고, 미국군의 신뢰를 얻어 북한군을 물리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동안 이승만 대통령은 재선하기 위해 부산정치파동 등 민주주의에 어긋나는 부당한 방법을 썼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의 공산화만은 막아야 한다는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아젠하우워 미대통령과 담판하여 미국이 한·미 양국 간에 어떤 형식이든 상호방위조치를 취할 의사를 표명하도록 하는데 성공하였고, 드디어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을 승낙하고, 1953년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조인되었다. 이 조약은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는 법적인 근거가 되는 조약이며, 한미행정협정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통해 주둔하게 된 미군의 법적인 지위를 규정하고 있다. 즉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한미행정협정의 모법(母法)인 것이다. 그래서 일단 한국은 공산 침략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다.
4. 산업 사회로 가는 길을 위해 모두 뭉쳤다.
한국은 일제 강점과 공산화할 위기의 긴 동굴을 통과하여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였으나, 전후 한국은 폐허 속에서 헐벗고 굶주려서 세계 각 나라들의 구제의 대상이 되었다. 더구나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로 한국 자체 내에서 자유 민주주의 체제는 붕괴위기에 직면하고 독재정치가 지속될 처지에 놓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말 대로 백성이 주장하지 않으면 그 정권이 필경 정객과 파당의 손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1960년 학생들이 주동이 된 4∙19의거로 다시 민주정치는 회복될 수 있었다. 여하튼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화할 어려운 처지에서 자유민주주의 확고한 기반을 조성하고 물러났다.
거의 완전한 자유민주주의는 찾았으나 자유의 소리는 자기주장의 소리와 자기 이익만을 챙기는 소리로 묻혀버리고, 조용한 다수의 소리는 죽어버렸다. 백성의 주장은 묻혀버리고 소수의 이익 집단 소리만 어지러이 난무하다가, 1961년 5월 16일 군사 정권을 맞이하게 되었고 박정희 대통령이 등장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 사관학교 출신이었고 일본 사관학교에 들어가려면 일본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했으며, 해방 후 여수∙순천반란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소문도 무성 했다. 이러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 중에 나타난 정치는 반일 감정을 품고 있었으며 철저한 반공 주의자였다. 1960년 초 국민소득도 북한이 남한을 앞서고 있었으며, 전후 복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국민 자본은 바닥났고 외국 지원에만 의존해야 했다. 따라서 외국자본의 한국 투자는 상상할 수 없었다. 한국의 발전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전쟁 후 한국의 교육열은 높아서 농민들은 토지를 팔아서 아들을 교육시키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했다. 그러나 대학교를 졸업해도 공무원이나 은행에 취직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가. 국민자본 형성
박정히 대통령이 밖으로 내어 놓은 것은 반공이지만 내부적으로는 한국을 산업사회로 발전시키려는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그래서 1962년 1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1963년 9월 말 한국의 달러보유고는 고작 9,300 달라에 불과했다. 자본이 있어야 하는데 국민자본이 없었다.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오려고 하나 사람도 산도 토지도 헐벗은 한국에 어느 나라 정부도 자본가도 한국에 투자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서독정부와 우여곡정 끝에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고 3천만 달러 차관을 빌리는데 처음으로 성공했다. 뒤이어 나온 생각이 한일국교정상화였다. 미국이 극동방위전략상 이를 적극 권장했다. 1965년 4월 3일 한일국교정상화로 대일청구권으로 무상 3억 달러, 정부차관 2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 이상을 확보하여 제2 및 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사업에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때마침 월남에서 미국이 고전하여 파병요청이 왔다. 월남 파병은 한국이 제3국모임에는 찬밥신세를 면키 어려웠으나 한국의 경제 발전에는 좋은 기회였다. 1965년, 박대통령은 "우리 상품을 국제시장으로 무한히 진출케 하고 자본과 기술을 국제적으로 추구해야 하며... 월남 파병 결정과 한일정상화는 국가이익 추구를" 위해 불가피한 결정이라고 했다. 실제로 월남파병을 통해서 외자의 유치와 해외진출을 통한 인적, 물적 자원의 수출을 추구하였다. 월남 파평의 주요한 산물이 한국과학기술소(KIST)이다. 즉 1965년 5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양국 대통령이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한국 공업발전을 위한 연구소 설립에 합의고, 이에 따라 1966년 2월 10일 한국과학기술소(KIST)를 설립하였다
다른 한편 당시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서독은 인력난에 시달렸다. 그러나 한국은 양질의 노동력이 많아서 고민이었다. 그래서 독일 정부와 인력수출계약 체결하고, 1963년부터 간호사와 광부들을 서독으로 파견하기 시작했으며, 파독 노동자들의 임금을 담보로 독일연방은행으로부터 4천만 달러의 차관을 빌려 올 수 있었다. 실제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67~71)은, 식량 자급화와 산림녹화, 화학·철강·기계공업의 건설에 의한 산업의 고도화, 7억 달러의 수출 달성, 고용확대, 국민소득의 비약적 증대, 과학기술의 진흥, 기술수준과 생산성의 향상에 그 목표를 두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소요자금 9800억 원 중 국내자금이 6029억 원, 외자가 14억 2100만 달러였다. 이 중 6억 달러가 65년의 한일 국교 정상화로 들어온 것이었다. 같은 해 1월 베트남 파병 결정에서 73년 3월까지 8년간에 걸친 전쟁 특수에 의해 한국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이 기간 중 경제성장률은 9.6%였으며 수출주도형 경제체제가 확립되어 71년에는 10억 6760만 달러가 수출되었다. 수출 의존도는 13.7 %에서 17.8 %로 높아졌다. 또한 공업건설이 본격화됨에 따라 외자의존도가 높아졌고, 국민 자본이 형성되어 직접투자가 가능해졌다.
나. 국민정신 통합
박정희 대통령이 항시 주장하는 것이 민족중흥과 조국 근대화였다. 그러나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국민의 호응이 반드시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새마을운동이다. 그리고 국민을 결집시키는 표어가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라는 것이었다. 새마을운동의 정신은「서로서로 돕고(협동), 땀 흘려서 일하며(근면), 살기 좋은 내 마을을 부자 마을로 우리 힘으로 만들자(자조)」였다. 농촌부흥의 결정적 요인은 근본적으로 박대통령이 창안하여 농민들에게 근면 자조 협동 정신을 불러일으킨 새마을운동이었다. 새마을운동은 마을이 노력하면 반드시 정부에서 보상을 주어 마을과 마을 간에 경쟁이 일어났다. 새마을운동을 통하여 산림녹화사업, 마을 진입로 확장, 작은 교량 건설, 작은 하천의 둑 개조, 조림 사업, 농로건설, 토양개량, 경지정리, 다목적 댐 건설을 비롯한 수리시설의 확충, 영농의 기계화, 다수확 미곡 종자의 개발, 온실재배기술 보급, 농산물 가격안정정책, 단지별 농어민 소득증대특별사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5.16혁명을 일으킬 때만 하더라도 한국의 산이 벌거벗은 상태였다. 박정희 시대 산림녹화 사업 덕분에 한국 산은 푸른 옷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통계로도 입증된다. ‘1984년 임업 통계 요람’에 따르면 남한 전체 임목 면적의 84%가 20년생 이하, 즉 나무 10그루 중 8그루 이상이 박정희 시대에 심어진 것이다. 그래서 유엔은 한국을 이스라엘과 함께 20세기의 대표적 녹화 사업 성공 국가로 꼽고 있다. 반면에 지금 북한의 산하는 온통 붉은 빛을 띠어 비만 오면 토사로 고생하고 있다. 산을 아카시아로 덮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산림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먼저 잘 살 수 있는 나무를 심어서 토양이 좋아지면 경제림을 심는다고 한다. 이제 한국은 경제림을 축차적으로 심고 있는 실정이다.
수리시설의 확충, 영농의 기계화, 다수확 미곡 종자의 개발로 우리의 주곡인 쌀 생산량이 1977년에는 4,710만 6천 섬으로, 4천만 섬을 돌파하여 8.15 해방 이후 수없이 겪었던 미곡부족과 쌀 파동을 마침내 근본적으로 극복하고 쌀이 연간 수백만 섬씩 남아돌게 되었다. 이러한 새마을정신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원칙을 고수하면서 열심히 일하면 나도 잘 살수 있다는 것을 보임으로서 농민과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1890년에 비솝 여사가 한국 서민들은 일해서 돈을 모우면 양반에게 착취당함으로 해서 열심히 일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 게으르게 되었다고 했는데, 새마을운동을 통하여 서민들은 서로 협동해서 빨리 움직여야 정부의 도움을 받고 마을도 잘고 자기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터득하게 된 것이다.
다. 산업기반조성과 산업사회건설
새마을 운동을 통하여 시골 마을과 농토에 농로가 생겨서 지게가 사라지고 경부 및 호남고속도로가 건설되어 전국이 일일생활권이 되었다. 동해, 포항, 울산, 부산, 마산, 여수, 인천에 항만시설을 현대화하고, 마산, 창원, 울산, 구미, 여수, 순천에 공업단지를 조성하여 산업기반을 확충하면서, 시멘트∙석유∙중화학·비료∙철강·자동차∙기계∙전력∙전자 공업의 건설에 박차를 가하였다. 민간 기업은 일본에서 사양 산업인 합판∙섬유∙봉제∙신발 등 인력 집약적인 산업에 뛰어들어 싼 노동력으로 기업을 확충해 나갔다. 또한 일본이 1979년 쓰꾸바 연구학원도시 건설을 완료한 것에 착안하여 대덕단지에 과학연구단지를 건설했다. 그리고 국방과학연구소도 건설하여 외국에 있는 한국의 인재들을 끌어들여 자주국방의 기틀을 다졌다.
한편 박정희 대통령은 국력의 척도는 수출이라고 생각하고 기업이 수출하면 모든 편의를 봐주었다. 수출 기업은 자금이 부족하면 융자해 주고 외무부 해외공관장을 독려하여 수출 길을 열어 주니 당시 ⌜모든 기업의 길은 수출로 통한다.⌟는 말이 생겼다. 이러한 경제정책은 후에 ⌜개발독재⌟라는 용어를 낳았다. 수출기업의 전성시대를 의미한다.
특히 제철산업은 국가의 기간산업으로서 선진국으로 가는 필수산업이었다. 그런대 선진국의 제철산업은 모두 식민지를 경영하여 그 여력으로 제철산업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식민지 경영 없이 제철산업을 성공시킨 나라는 인도와 한국 뿐이다. 포항종합제철은 일본과 경제협력으로 이루어진 사업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며 또한 가장 성공적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박정희 대통령은 ⌜범국가적인 차원에서 포철이라면 만사를 제쳐 놓고 무조건 지원하라⌟고 지시하고 포철에 관련한 모든 시설을 국가에서 지원했다. 그러했기 때문에 포철은 처음부터 흑자를 기록할 수 있었다. 포철 성공에도 개발독재가 기여한 면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국민은 열심히 한다면 잘 살 수 있다는 의욕과 정부는 수출할 수 있는 기업에는 과감하게 자금을 융자해주어 일자리를 창출함으로써 한국에서 뒤늦게 산업혁명의 불이 붙었다. 산업화에 상승효과(synergy)가 나타나, 1인당 GNP가 1960년 94달러에서 1970영 248달러로 2.6배로 늘어났고, 1964년 1억 달라 수출을 달성했는데 1970년 10억 달러를 수출했다. 1966년에서 1970년 사이에 연평균 수출 성장률이 36.8%로 세계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1977년에 1인당 GNP 1000달러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하여 수출은 무려 2480배로 수입은 340배로 늘어났다.
1970년대는 그래도 인력이 남아돌아 원양어선 선원, 동남아 정글 벌목 노동자, 중동 건설공사의 노동자들이 나아가서 고생하면서 외화를 벌어들였다. 개발독재 속에서 노동자들이 노력보다, 임금이 적어서 곳곳에서 노동운동이 싹트기 시작했다. 영국이 일찍이 산업혁명을 일으켰으나 어려운 노동여건에 노동운동을 일으켰던 현상이 이제 한국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하튼 한국의 산업화는 양질의 싼 노동 임금이 기여한 면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라. 문화사업과 환경보전책
민족정신의 요람지로 가꾸기 위해 1968년에는 현충사의 성역화 사업을 추진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이후부터 '호국문화유적의 복원과 정화'에 관심을 두고, 단순한 유적을 보수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건물을 짓고 기념비를 세우며 주변 환경을 정화하는 등 새로운 유적을 조성하였다. 이시기에 조성된 유적들은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유적들을 비롯하여, 금산의 7백의총(1975-76)을 비롯하여, 임진왜란 관련 유적, 여러 시기의 문화유적을 간직하고 있는 강화도의 유적들(고려궁지, 강화성, 광성보, 신미양요 순국무명용사비 등), 유관순, 윤봉길 의사 등 항일독립운동과 관련된 의사들의 사당 건립, 그리고 서울성곽 등 전국 중요 성곽 보수 등으로, 전국의 주요한 호국국방유적은 국민총화기에 거의 모두 보수, 복원, 정화되었다. 또한 이외에도 세종대왕, 강릉 오죽헌, 추사 김정희의 고택 등 민족사상의 선현유적과 불국사, 부석사를 비롯한 전통문화유적이 복원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7년 4월 25일 문화센터기공식 치사에서 "민족자립을 위한 조국의 근대화 작업을 수행함에 있어 민족주체의식을 확립하는 일은 가장 긴요한 과제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1970년대부터 무녕왕릉(1970), 거창 고려 벽화고분(1972), 경주 천마총(1973), 황남대총(1973) 등 많은 고대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호국선현과 안보유적의 정화 정책은 조상의 국가수호의지를 국민들이 배워 자주국방의 정신을 고취하도록 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 정책은 박정희 대통령의 '자주국방' 의지를 간접적으로 부각시키려는 효과를 갖고 있으며, 강한 국가를 추진하려고 하였다.
한편 자연환경에 눈을 돌려 1971년까지 7개 구역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했고, 1970년대 말에는 산업화에 따른 자연여가공간의 파괴를 우려하여 이에 대한 대책으로 1971년 7월 30일 건설부 고시 제447호로 수도권 주변 지역을 그린벨트로 묶는 것을 시작으로 1977년 4월 18일 전남 여천 일부 지역을 그린벨트로 지정하기 까지 전 국토의 5.3%에 이르는 5,397.1km2를 개발 불가 지역으로 고시했다. 1978년 10월 5일 ‘자연보호헌장’이 선포되어 국토에 대한 애호정신을 고양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연자원, 문화유적자원, 녹지공간에 대한 보존의식을 향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마. 자주국방을 위한 노력
1960년대 북한은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완성하고 1960년에 경제개발7개년계획을 추진하여,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남한을 압도하고 있었다. 1962년에 4대군사노선(전인민 무장화, 전지역 요새화, 전군 간부화, 전군현대화)을 설정하여 북한군의 군사전략을 선제기습공격, 속전속결, 총력전, 배합전술로 결정하고 남침할 수 있는 무력을 기르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1970년에 북한은 화포와 전차를 대량생산할 수 있었고 군함과 잠수함까지 만들었으며 포탄은 완전히 자급하고 있었다. 그리고 북한 정권과 인민은 1970년경에 남침 통일한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한편 남한은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 초까지 북한군의 극심한 군사도발에 전전긍긍했다. 1968년 무장 공비 청와대 습격 미수사건,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의 납치, 백여 명의 무장공비가 울진과 삼척에 침투하여 1개월 이상 준동한 사건, 1969년 미 공군 EC121기 격추사건, 1971년 3월 미 제7사단 철수 등 한국 안보는 긴박하기 그지없었다. 미국의 닉슨 대통령 그 후 당선된 카터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비우호적이었다. 더구나 반정부 인사들은 이러한 실정을 안보를 미끼로 장기집권하려 한다고 박정권을 매도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는 한국 안보 상황이 더 없이 긴박한 상황이었다. 군사적으로 북한이 남한에 우위에 있었고, 미국은 한국을 독재정권이라고 해서 냉담했다. 1975년에 인도차이나 반도에서는 베트남이 통일을 이룩하고 그 여세를 몰아 라오스 및 캄보디아에서 공산정권이 들어섰다. 자유세계는 한국과 동남아시아에서 공산화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지 않나 우려했다. 이러한 와중에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을 방문하여 남침을 타진했다. 제3세계는 베트남, 중국 편이었고 북한에 호의적인 편이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유신독재에 항거하는 반정부 인사들이 늘어만 가고 일부 인사들은 북한 정권에 호의적인 언사를 늦추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과 국가 안보를 걱정하는 일부 군사 지도자들은 다급해졌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전방에 전차 방벽을 쌓고 방어진지를 강화했다. 그리고 예비군을 창설하여 훈련시켰으나 일부 반체제인사들은 정권 유지 차원으로 이를 오도했다.
1970년에 한국은 소총 한 자루도 못 만들었으며 월남전을 통하여 얻은 M16 소총을 일부 부대에서 장비하였을 뿐 대부분 부대는 M1과 칼빈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나마 노화되어 고장이 잦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8얼에 국방과학연구소(ADD)를 설립하고 방위산업육성회의를 주간하고 이를 뒷받침하기위한 7대(철강,비철금속,조선,전자,화학,기계,전력) 중화학공업 추진방안을 채택했다. 1978년에 이르러 기본 병기인 소총, 화포, 전차 등과 유도탄을 생산하게 되었다. 전방부대는 신형 소총을 장비하게 되었고 재래 무기는 예비군용으로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전두한 대통령 때에 3분지 1을 감원시킴으로 유능한 인재들이 학계 또는 미국으로 떠나버려 잠시 주춤하였다. 그러나 민간 기술이 성숙하여 현재 군함은 물론 잠수함도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 이후 내우외환(內憂外患)에 시달리면서 조국근대화 다시 말하면 산업사회로의 발전과 자주국방을 위해 모든 심혈을 기울였다.
1979년에는 미 대통령 카터로부터 외면당하고 국내적으로 유신반대세력에 부딪쳤으며, 중동 붐으로 인플레이션이 심하여 부동산은 급상승하고 백성들은 불평이 많았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인의장막에 쌓여있다. 그리고 삽교천 방조제를 준공을 마친 후에 시해당하고 말았다.
5. 나락(奈落)한 동남아시아 정치 지도자들
1960년 초에 미안마(당시 버어마), 인도네시아, 필립핀, 말레지아, 캄보디아, 베트남, 태국, 인도, 파키스탄 등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는 한국 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는 ⌜족벌체제⌟로 나라살림을 결딴 낸 것이 치명적이었다. 수하르토의 셋째 아들 토미, 큰딸 시티, 차남 밤방이 득세함으로 해서 그들의 첫 글자를 딴 조어 ⌜도시바 왕국⌟이라는 말이 떠돌았을 지경이었다. 1997년 아시아에 외환위기가 닥쳤을 때 살아남기 위해서는 IMF의 개혁요구를 받아들여야 했으나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IMF가 요구하는 ⌜독과점 철폐⌟는 자신의 권력자원과 기반을 송두리째 도려내는 것이었다. 그는 결국 권좌(權座)에서 물러나야 했다.
미안마 네윈은 1962년 ⌜착취 없는 공평한 사회⌟라는 이념을 내걸고 출범했다. 미얀마식 사회주의에 입각하여 비미얀마인의 자본을 중심으로 국유화하여, 국영 경제구조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국영 경제구조는 처음부터 여러 요인으로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또 국내 치안의 혼란과 외국원조의 도입 억제 등으로 경제는 장기적인 침체 상태에 빠졌다. 결과적으로 네윈 정권은 폐쇄적인 통치 아래서 통제 경제의 비능률과 생산성 저하라는 구조적 모순에 빠지게 되었다. 네윈도 1974년에 버마식 사회주의의 실패를 부분적으로 자인하고, 그 폐단을 치유하기 위해 경제 개혁 및 자유화를 도입하였다. 그 결과 잠시 경제가 호전된 듯하였으나, 이는 해외 차관을 효과적으로 운용하지 못해 외채 부담 증가, 외환 사정 악화, 수입 규제, 원자재 부족, 공업 생산성 감소, 내수용품 공급 부족, 밀수와 암시장의 확산, 물가 폭등으로 이어져서 결국 1981년 8월에 물러나고, 그의 아들은 뇌물 수수 협의로 감옥신세를 져야만 했다.
필립핀 마르코스는 1965년 대통령에 당선된 후 1972년 9월 계엄령을 선포하여 정당 활동을 금지하고 1976년에는 대통령의 비상대권을 강화했다. 이멜다는 1972년의 계엄령 선포 이후 실질적인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녀는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정부와 산업체의 요직에 친척들을 들어앉힘으로써 자주 비난을 샀고, 그녀 자신도 수도 마닐라 시장(1975~86)직과 주거환경장관(1979~86)직을 역임했다. 마르코스의 권력 후기는 부정부패의 만연, 경제침체,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경제적 불평등 확산,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섬들에 근거를 둔 공산 게릴라들의 폭동으로 점철되었다. 1983년 무렵 마르코스의 건강은 악화되기 시작했고 그의 통치에 대한 저항은 부단히 커져만 갔다. 1986년 2월 25일 마르코스가 미국의 설득을 받아들여 하와이 망명길에 오르게 되면서 비로소 끝나게 되었다.
미안마, 수하르토, 마르코스를 구태여 여기에 이야기 한 이유는 미안마, 인도네시아, 그리고 필립핀은 1960년도에는 한국 보다 여러 면에서 앞서 있었다. 이들 나라는 정치 지도자들을 잘못 만나 퇴락의 길을 걸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민족을 내세워 외세에 저항하여 제3세계 동맹을 만들어 선진국을 매도했다. 그리고는 족벌 정치로 치부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친인척이 날 뛰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하였으며 경제 개발에 관한한 우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등용했을 뿐 아니라, 외국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했으며(개방정책) 경제개발 진척사항을 직접 확인했다. 박정희 대통령 이후 대통령들은 친인척을 잘 관리하지 못하여 감옥에 간 것을 생각하면, 그의 탁월한 영도력이 앞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미안마, 인도네시아, 필립핀, 말레이시아, 태국, 베트남, 북한 등 국가는 1960년대에 한국 보다 훨씬 잘 살던 나라였으나 박정희 시대에 한국은 이들 나라 추월하고 아시아 네 마리용으로 떠올랐다.
6. 외국에서 본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
1970년대에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자 세계는 한국을 다른 면에서 주목하기 시작했다. 서독이 ⌜라인강의 기적⌟을 이룩하고 일본이 선진국으로 도약할 때는 개발도상국과 제3세계는 처다 볼 수 없는 나무를 보듯이 했다. 그러난 한국이 ⌜한강의 기적⌟을 이루자 제2차 대전 당시 식민지였던 국가들은 한국이 한다면 우리도 할 수 있지 않으냐 하는 자신감을 가지고 한국을 배우려는 노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중국의 등소평이 박정희 식 경제 개발에 관심을 가졌으며,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베트남, 필립핀 등 아시안 국가들을 필두로 해서 인도, 파키스탄, 몽골, 중앙아시아 국가들까지 한국의 경제 발전에 관심을 갖고 어떻게 자국에 적용할 것인가를 고심하고 있다. 심지어 푸틴 전 러시아 대통령도 대통령이 되기전에 박정희 경제개발에 대해 연구했다고 한다.
특히 1988년 서울 올림픽 때에 동유럽 국가들은 한국이라는 나라는 보잘 것 없는 나라로 알고 왔다. 그러나 실제 한국에 와 보고 기절초풍했다. 한국의 한강이 커서 놀란 것도 아니고 올림픽 경기장이 웅대해서 놀란 것도 아니었다. 한국의 남대문 시장과 동대문 시장을 돌아보고 물자가 길바닥에 넘쳐있는 것을 보고 경악(驚愕)했다. 자기 나라에는 물자 부족에 허덕이는 데 보잘 것 없다고 생각했던 동양의 분단 된 나라가 6∙25전쟁 폐허에서 이렇게 성장한데서 놀랐다. 그래서 더욱 공산주의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동구 자유화에 시동을 걸었다. 정주영 현대 구룹 전회장은 88서울 올림픽이 동구의 자유화 운동의 점화를 당겼다고 말했다. 그 전까지 제3세계니 비동맹회의이니 하여 세계여론을 주도 했던 나라들도 한국의 경제 개발에 찬사를 보내며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제3세계도 경제 개발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한국이 심어주었으며, 비동맹국가들은 공산주의 체제로서는 도저히 경제 개발이 불가능하며 자유민주주의 체제만이 경제를 개발할 수 있다는 것을 한국을 통해서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동구의 공산체계 붕괴와 연이어 소련이 붕괴되었고, 중국은 흰 고양이와 검은 고양이 논쟁 끝에 정치는 공산당이 하되 경제는 자본주의를 도입하게 되었다. 또한 이를 따라 베트남도 같은 방법으로 경제 개발에 노력하고 있다. 남미에서도 칠레와 브라질은 한국의 경제 개발을 참고로 하고 있는 실정이다.
1993년 세계은행 이사회에서 한국과 일본의 경제 발전을 모델로 하는 ⌜동아시로부터 교훈⌟이라는 간담회를 열었다. 이 때 전 비서실장인 김정렴씨가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정책⌟라는 제목으로 기조연설을 했다. 이 때 회원들은 중화학공업 건설, 개발정책, 산업 정책, 금융정책 등 세계은행 조사부에서 문제로 제시되었던 부분은 묻지 않고, 우수한 공무원의 확보, 이들의 헌신적 노력 유발방법, 기업체내 직업 훈련 그리고 한일관계에 대해서 질의를 했다. 미 MIT의 경제학 교수 에릴스 H. 앰스덴(Alice H. Amsden)은 박대통령의 경제개발정책을 높이 평가했다. 세계은행 간부 밭트(V. V. Bhatt)는 한국의 경제 기적은 개발도상국과 자유경제로 전환하는 구공산국가들에게 크게 참고가 되겠다고 총평했다.
참고로 한국의 경제 개발은 대통령이 백성들을 잘 살게 하겠다는 집념과 경제 개발 진행사항을 직접 확인했으며 현장에서 우수한 인재가 있으면 즉각 발탁했다. 그래서 공무원들은 열심히 일을 하여 성과를 올렸다. 산업 인력을 확충하기 위해 야간전문대를 설치하여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게 하였으며, 적은 노동 임금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음을 실질적으로 보여 주었다. 기업가는 수출만 하면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으니까 열심히 수출을 위해 노력했고 외국 공관장은 자기가 맡은 지역에 수입을 늘이면 언제라도 승진할 수 있어서 열심히 수출 시장을 개척했다. 이러한 대통령, 공무원, 저임금, 전문대 기술양성으로 인한 양질의 노동력, 기업 등이 잘 살아보자는 한 목표를 향해 Synergy 효과를 일으켜서 한강의 기적, 동아시아의 기적을 낳은 것이다.
7. 박정희 대통령 이후 민주주의 성취와 문제점
박정희 대통령은 산업시대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전문대를 장려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야간 직업학교를 장려했다. 한편 중학교부터 좋은 학교를 가기 위해 경쟁이 치열한 것을 감안하여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를 평준화하였다. 그런데 평준화 되지 않았을 때는 대학교 학생 활동은 주로 고등학교 출신 별로 단체를 형성하여 활동하여 학교별로 선후배가 있어서 위계질서가(位階秩序)가 있었다. 이 때 학생운동은 주로 명문고 출신들이 주동이 되어 4∙19민주혁명과 6∙3한일국교정상화를 반대하는데 치중하였으며 친북적인 활동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평준화 후에는 명문 대학에 어떤 고등학교도 다수 학생을 입학시키지 못하게 되어 대학교 내에 출신고별 활동은 미미하게 됨으로 해서, 반정부 활동과 사회활동을 하는 학생단체가 대다수를 이루고 이들을 중심으로 대학교 학생회장이 선출되었으며. 선출된 학생회장은 반정부 활동을 해야만 회장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처럼 인식되었다. 더구나 전두환 대통령은 국민의 지지 기반으로 대통령이 되지 않았고, 광주민주화운동을 강압적으로 진압했다고 해서 반정부 학생운동은 국민지지를 얻어 활발해졌다.
반정부 학생운동단체는 조직이 거대해 지자, 민족, 자주, 통일을 표방하여 친북 반미 성향의 운동권 조직인 민주해방(NL, National Liberty)계열과 노동해방을 주로 주장하는 민중민주(PD, People Democracy)계열로 분열되었고 그러한 가운데 끊임 없는 투쟁으로 1987년 6월 민주화운동(6월 항쟁)이 대한민국 전역에 물결쳤다. 그 힘을 바탕으로 서울시 각 대학 총학생회장들은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약칭 서대협)를 결성하였고 연이어 8월 19일 충남대학에서 전국 95개 대학 4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기 전대협 발족식을 가졌다. 전대협은 1993년 5월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약칭 한총련)으로 재발족하였다. 한총련에 소속된 일부 학생들은 자유민주주의 성향보다도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여 김일성을 찬양하기도하고 인공기를 휘날리기도 하며 반미운동을 주도하여 반정부활동은 친북 활동으로 번졌다. 조용한 친미적 보수 학생들은 조직이 없어서 묵묵히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여하튼 한총련의 이러한 좌경적인 활동으로 국민의 차가운 시선을 받기도 했으나, 학생운동조직을 기초로 세를 확대하여 2002년 대통령 선거와 2004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기세를 올렸다. 문제는 이제 학생회장은 이들 조직 내에서 당선 될 수 있고 학생회장은 정계 진출의 발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정계 진출자들은 계속 이들로 이루어 질 것이고 이들은 성분은 대체적으로 민족주의 색체가 강하여 개인 기본적 인권인 자유를 억압하는 북한에 호의적이면서 반미 감정을 부추겨서 국민들로 하여금 적과 동지를 혼동시킬 우려가 있다.
이제 좌경적인 정치인은 기본적인 인권을 무시하고 민족, 민중, 민주를 주장하면서 북한에 호의적인 학생조직을 발판으로 정계에 진출 할 수 있으나, 경제개발을 주도한 보수 세력은 정계 진출할 방법이 모호하다. 역사적으로 민족주의는 외세로부터 독립하여 자유를 얻고자 많이 주장되어 왔다. 특히 유럽에서는 자유를 위해 외세에 저항했다. 그러나 후진국에서는 민족주의를 주장하여 독립을 쟁취한 후에 자유를 외면하고 폐쇄정치를 하면서 독재정치를 하는 지도자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북한의 김일성과 김정일, 미안마의 네윈, 인도네시아의 스카르노와 수하르토, 베트남의 호지민, 중국의 모택동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하나 같이 민족을 외치고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외세에 대해 패쇄 정치를 하고 언론을 탄압했다. 다시 말하면 백성의 기본적인 인권을 무시하고 집권 유지를 제일 목표로 하여 백성을 도탄(塗炭)에 빠뜨리고 말았다. 북한 정권이 주장하는 주체사상은 바로 패쇄 정치와 독재 정치를 미화하여 국민의 시선을 반미감정으로 미국과 한국에 대해 적개심을 갖게 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일직이 조선말에 대원군의 쇄국정치(鎖國政治)를 펼 때 백성들은 적극 호응 했으나 극히 일부 식자들 특히 천주교인들은 이를 우려했다. 그 결과는 일본의 식민지로 끝을 맺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으며, 희망도 소망도 잃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기 정권에 대항하는 세력은 억압했으나 그 외 것은 모든 것을 개방했음을 주지해야한다. 이제 빠른 도약으로 인한 여러 부작용이 나타나 불협화음은 반정부학생운동과 노동운동으로 확산되었으나 민족주의를 외치며 북한을 적으로 보지 않고 동족으로 생각하고 옹호하는 것이 국가 안보상 문제가 될 우려가 있다.
이제 한국은 급격히 성장하여 여러 가지 부작용이 있음을 잘 파악하여, 이를 잘 마무리하여 선진국으로의 도약하는 데 필요한 힘을 모아야 할 시기이다. 지금 전국학생운동을 주도한 인사들이 정계에 진출하여 이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 돈 있는 사람들을 사업에 투자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아직도 변하지 않고 심지어 핵을 보유하고 있는 북한을 끌어안아도 한국 안보는 튼튼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우려 때문에 6∙25세대와 월남참전세대들 그리고 1960∙1970년대 경제를 성장시킨 주역들이 흰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거동하기 힘든 몸으로 시청 앞 광장에서 함성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8. 결 론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큰 어려움에 빠졌다. 서유럽 국가들은 마샬플랜(Marshall Plan)에 의해 경제 개발에 성공을 거두었으나 중남미는 미국의 착취로 못산다는 해방신학이 판을 쳤고 동 및 남아시아에서는 일본만 한국전을 호기로 삼아 경제회복에 성공했을 뿐 모든 국가들은 정체 상태에 있었다. 그래서 중국,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가 공산화 되고, 미안마는 사회국가가 되었으며, 필립핀과 인도네시아는 공산 게릴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1970경에 이르러 한국이 경제 성장에 성공하고 반면에 소련을 비롯한 공산국가들은 공산주의적인 분배 정책에 결함이 들어나 외부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중국의 등소평은 아예 공산주의적인 분배 정책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자본주의를 도입했다. 제2차 세계대전 전 식민지 국가이며 6∙25로 폐허된 나라가 개발도상국을 뛰어 넘은 한국에 대해 주목 했다. 한국 경제의 발전은 자유주의, 자본주주의 경제체제로 후진국도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를 많은 학자들이 여러 가지로 분석하고 있지만, 비숍여사가 ⌜한국인은 총명하고 잘 교육만 시키면 좋은 자연 환경을 가졌음으로 번영할 수 있다.⌟했듯이 한국은 좋은 여건을 한데 모우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근저(根底)에는 노력하고 나라에 발전에 기여하면 승진할 수 있고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박정희 대통령이 보여 주었으며, 박정희 대통령은 산업기반 시설에 과감하게 투자하여 새마을 정신을 통하여 synergy 효과를 도출했기 때문에 산업사회를 이룩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발전 과정에서 한국사람 개개인은 ⌜느릿느릿⌟,⌜세월아 네월아⌟하는 식에서 ⌜빨리 빨리⌟로 국가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바쁜 산업국가⌟로 변화하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육도(六韜)는 ⌜무릇 사람은 죽는 것을 싫어하고 사는 것을 즐기며 덕을 베풀기를 좋아하고 이를 쫓기 마련이다.(凡人惡死而樂生)⌟ 그래서 백성을 잘 살게 하고 이롭게 하는 것이 정치의 도리라고 했다. 순자(荀子)는 ⌜사람은 나면서 욕망을 가지고 있고 욕망을 채우지 못하면 이것을 채우려고 하는데 제한과 절도가 없으면 서로 다툰다고 했다(人生而有欲, 欲而不得, 則不能無求, 求而無度量分界, 則不能不爭.). 그래서 욕망은 가능 여부에 관계없이 일어나지만, 가능한 것을 추구하는 것은 마음에 합당하므로 (欲不待可得, 而求者從所可, 受乎心也.)⌟ 정부는 백성들이 욕망을 추구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했다. 한비자(韓非子)는 국가를 통솔하는데 두 가지 방법이 가장 중요한데 그것은 바로 형덕(刑德)이라고 했다(明主之所導制其臣者, 二柄而已矣, 二柄者刑德也). 그래서 반드시 자연을 따르고 인정에 순응하여 상벌을 분명하게 해야(必循天順人, 而明賞罰) 한다고 주장했다. 상을 주어야 사람들은 열심히 하고 이득이 있는 곳에 몰리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근대 유럽에서 아담 스미스(Adam Smith, 1723-1790)는 이(利)를 쫓는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을 주장하면서 자유방임주의를 제창했다. 그러나 자유방임주의가 모순을 들어내자, 1900년대 초에 칼 맑스의 공산주의 이론과 영국 거시 경제학자 케인즈(John Maynard Keynes, 1883-1946) 통제 경제이론이 대두 되었고, 1930년대 통제경제이론이 유행하던 시기에 오스트리아 태생 영국 경제학자 하예크(Friedrich A. von Hay, 1899-1992)는 ⌜예속의 길⌟라는 저서를 내어 정부 개입은 궁극적으로 공산당이나 히틀러 같은 전체주의를 초래한다고 경고하며, 인간 순리에 따르는 자유방임을 주장했다. 칼 맑스의 자본론은 인간의 본성을 도외시함으로써 공산주의는 전체주의와 독재주의로 발전하여, 결국 기본적인 인권을 유린하게 되었고 필경 공산주의 국가는 붕괴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을 미리 예견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자유민주주의를 고수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 토대 위에서 외국 자본을 끌어들여 백성들이 욕망을 추구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었다. 박 대통령은 누구든 결과가 좋은 공무원은 승진시키고 수출을 많이 한 기업체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새마을운동을 통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이득을 주어 마을 간에 경쟁심을 유도시킨 결과 국가적으로 상승(synergy)효과가 나타나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토대를 조성했다. 뿐만 아니라 여타 후진국에도 발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후진국도 한국 경제개발을 모델로 자국의 경제개발을 시도하게 되었다.
1950년대에 헐벗고 못살고 미래가 보이지 않은 나라로 인식되어 오던 한국인이 이제 전 세계를 누비며 경제활동을 하고 있으며 개발도상국과 후진국들의 부러움을 싸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는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의 지도력 없이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며, 더구나 김일성과 김정일로 이어지는 북한 지도자들로 인하여 북한 국민들은 아직까지 도탄(塗炭)에서 허덕이는 것을 볼 때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의 지도력은 더욱 빛이 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