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高宗)은 고려 23대 왕으로 1192년(명종 22) 정월에 태어나 1259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재위기간은 1213∼1259년까지 46년간이었다. 이름은 철(?), 초명은 진(瞋)·질(?), 자는 대명(大命)·천우(天佑)이다. 강종(康宗)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원덕태후 유씨이며, 왕비는 희종의 딸 안혜태후 유씨이다. 안혜태후는 1218년에 왕비가 되어 1232년에 사망하였다. 고종은 1212년(강종 1) 태자에 책봉되고 이듬해 강종의 뒤를 이어 강안전(康安殿)에서 즉위하였다.
고종의 재위 46년간의 대부분은 최충헌에 이어 최우의 집권시기로 내우외환이 그치치 않았다. 말기에는 최항(崔沆)·최의(崔훺)에 이어 무인정권 말기를 겪어야 했다. 따라서 고종은 최씨 무인정권의 독재체제로 인하여 실권을 잡지 못하였으며, 잦은 민란과 외침 등으로 국가적 위기를 겪어야 했다. 1218년(고종 5) 당시 최고 실력자인 최충헌이 70세로 관직을 물러나려 하자 궤장(?杖)을 주어 계속 정사를 돌보게 하였고, 이듬해 왕씨 성까지 하사하였다. 1219년 최충헌이 궤장과 왕씨 성을 반납하고 죽자, 그의 아들 최우가 실권을 장악하고 정방(政房)을 통하여 백관의 인사를 좌우하였으므로 왕권은 회복되지 못하고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가 없었다. 이후 1258년 3월 대사성 유경(柳璥)과 별장 김인준(金仁俊)이 최씨정권의 마지막 집정 최의를 살해함으로써 표면상으로 왕권은 회복되었으나, 실권은 여전히 무인세력인 김인준과 이어 임연(林衍) 부자에게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즉위 초년인 1216년부터 3년간 계속된 합단(合丹, 몽골에 쫓긴 거란세력 일부)의 침입과 뒤이은 몽골의 침입으로 재위기간은 최대의 국난을 겪은 시기였다. 특히 1231년부터 6차에 걸친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강도로 천도하여 28년간 항쟁하였다. 물론 막대한 인명과 문화재의 손실을 비롯한 국토의 황폐를 가져왔다. 즉 1232년 몽골의 침략 예봉을 피하고자 강화로 천도하였으나 같은 해 대구 팔공산 부인사(符印寺)에 보관된 현종 때의 대장경판(大藏經板)이 소실되고, 1235년에는 경주의 황룡사 9층목탑이 소실되는 등 귀중한 문화재가 훼손 소실되었다.
고종은 1259년 몽골과의 강화를 청하기 위해 태자 전(힕, 원종)을 몽골에 보냈고 무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몽골로 하여금 강화의 내성과 외성을 헐게 하였다. 이리하여 고종은 1257년 몽골과 화의하였으며 이듬해 최씨 무인정권이 무너지면서 왕권을 회복하는 듯 하였으나 실권은 여전히 무인세력들이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1259년 세상을 떠나 강화에 묻히게 되었다.
한편 1236년 몽골항쟁 당시 불력에 의한 몽골을 격퇴하고자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고 소실된 대장경판을 다시 새기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것이 곧 팔만대장경이다. 이보다 앞서 1227년에는 감수국사(監修國史) 평장사(平章事) 최보순(崔甫淳), 수찬관(修撰官) 김양경(金良鏡)·임경숙(任景肅)·유승단 등으로 하여금 ≪명종실록≫을 편찬하게 하여 사관과 해인사에 각각 보관하게 하였다.
고종의 능은 홍릉이며 시호는 안효(安孝)이고, 1261년 7월 신유에 고종의 진영(眞影)을 경영전(景靈殿)에 봉안하였으며, 1310년에 충헌이 증시(贈諡)되었다. 고종에 대하여 이제현(李齊賢)은 "왕은 예전에 유승단에게 배웠는데 재위하기를 거의 50년이었으니 대개 학문으로써 그 덕을 쌓고 외신(畏愼)으로써 그 위(位)를 보전하니 백성들이 기뻐하고 하늘이 도왔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사신은 "고종 때 안으로는 권신들이 서로 잇달아 국명을 독단하였고, 밖으로는 여진·몽골이 군사로 해마다 침노하니 당시의 국세는 매우 위태로웠다. 그러나 왕은 소심(小心)으로 법을 지켰으며 모든 부끄러움과 치욕을 참았으므로 보위를 온전하게 하여 마침내 정권이 왕실로 돌아옴을 보게 되었다. 적이 이르면 성을 굳건히 하여 굳게 지키고 물러가면 사자(使者)를 보내어 좋게 교통하였고 태자를 보내어 예물을 가지고 (원나라에) 친조하게 한 까닭에 마침내 사직을 지키고 국조(國祚)를 길이 전하게 하였다"고 평하였다.
고종이 1259년 6월 임인일에 재상 유경의 집에서 죽자 그해 9월 기미일에 장사지내고, 능호를 홍릉이라 하였다. 한편 ≪속수증보 강도지≫에는 홍릉이 고려산 동남봉 아래 위치해 있는데, 본래는 강화읍 대산리 연화봉 능소로부터 이장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홍릉은 1916년 당시 고려산 동쪽 해발 200m선 부근에 있었으며, 남쪽에 있는 혈구산에 대하여 전방 표고 197m 산을 넘어 멀리 바다를 바라보기 쉬운 위치에 있다. 능 아래 100m 거리에 강화읍에서 내가면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 즉 홍릉은 고려산 측방에 있어 그 주봉으로부터 내려와 뻗은 산줄기 하나가 오른쪽 날개를 만들어 이 방면의 전망을 가로막고 있다. 또 왼쪽 날개의 산줄기는 점차로 낮아져 남쪽으로 우회하고 있다. 오른쪽 계곡은 깊어서 능 아래를 흐르고, 왼쪽 계곡은 얕아서 능을 멀리 지나간다. 이 두 물줄기는 능 아래의 동남방에서 합류한다. 능은 남쪽을 향해 있고 능 아래의 골짜기를 합한 능역 아래까지 거칠게 만든 석단의 흔적이 있었다.
홍릉의 능역은 3단의 축대로 나뉘어져 있는데, 최상단에는 봉분, 2단에는 석인(石人), 아래에는 정자각(丁字閣)이 있다. 1916년에 고분조사가 있었는데, 당시의 규모를 살펴보면 높이는 5척, 직경은 14척 정도의 작은 규모였다. 봉토 아래 부분의 호석인 병풍석은 3개가 남아 있었는데 각면의 길이는 3척 7촌 내외이고 높이는 약 1척 1촌이었다. 병풍석은 12면을 둘렀던 것으로 보이는데, 능 주위에 남아 있는 난간석 일부를 비롯하여 석주와 동자석주가 각각 6개가 있으며 동자석주의 윗면에 죽석 머리부분이 각이 진 것을 통하여 12각의 각점에 세워졌던 것을 알 수 있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능의 네 모퉁이에 석수(石獸)가 각각 1구씩 배치되어 있었는데 안쪽 2기는 마멸이 심했지만 완전하게 남아 있었고 다른 2기는 능 뒤쪽에 매몰되어 머리부분만 노출되어 있었다. 이들의 크기는 모두 소형으로 높이 약 2척 3촌 정도였으며 안면이 윗부분에 있는 방주형(方柱形)이었다. 능 좌우와 뒷면에는 곡장(曲墻)이 있었는데 너비 28척에 안길이 29척 5촌이었다.
제1단면의 전방 울타리 돌담은 대부분이 붕괴되어 제1단면과 2단면 사이는 경사면을 이루고 있다. 제2단면은 폭이 약 48척으로 이면의 안쪽 중앙에 조선 고종 초년에 세운 작은 능비가 있다. 석인 2쌍이 좌우로 서로 마주하고 있었는데 앞면의 폭은 1척 4촌, 옆면은 약 7촌의 방주에 머리와 의복(頭部衣褶)을 조각한 것으로 관(冠)에는 액(額)이 있다. 2단면 전방의 울타리 돌담은 높고, 이 돌담에 접해서 위에는 정자각이 있었던 흔적이 있다. 정자각의 전방에도 1단면이 있었던 것 같지만 황폐가 심하여 명확히 알 수가 없다. 홍릉은 3·4차례 도굴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능의 석물로 제2단에 각주형(角柱形) 문인석(文人石) 2쌍이 서로 마주하고 있으며, 보수된 난간에 원래의 것으로 보이는 동자석주(童子石柱)가 몇 개 있고 석수는 보이지 않는다. 조선 고종 때에 건립한 작은 비석이 있다. 근래의 보수공사로 기둥 사이에 동자석을 받쳐서 가로 건너지르는 돌인 죽석(竹石)을 얹어 난간을 보수하였고, 봉토 아랫부분에 호석(護石)을 둘렀다. 그러나 봉분이 있는 상단 앞면의 축대는 현대식으로 쌓았고, 곡장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봉분 뒤의 3면을 비스듬히 사초(莎草)를 덮어 마치 민간의 묘처럼 만들어 놓아 원형과는 거리가 먼 느낌이다. 고종은 재위기간이 46년이나 되고 또 강화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또한 고려 상감청자와 팔만대장경을 조판할 수 있는 정도의 국력을 가졌던 당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능역의 규모가 너무 초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편 홍릉이 있는 국화리 고려산 기슭에는 청련사(靑蓮寺)라는 절이 있다. 고려산은 고종이 강화로 천도하면서 생긴 이름으로 생각되며, 고려 왕릉이 존재함으로써 그 이름이 비중있게 느껴지고 있다. 청련사는 고구려 장수왕 때 천축(天竺)의 이인이 산문을 열었고, 충렬왕 때 천축조사가 고려산 정상을 중심으로 오방에 청·백·홍·황·적련사를 창건하였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현재 백련사와 함께 전승되고 있는 청련사는 충렬왕 이후 그의 조부되는 고종의 홍릉을 지키기 위하여 경영하던 그 원찰(願刹)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홍릉의 보호 사찰인 홍릉사의 절터는 현재 능 앞에 있는 청소년야영장의 시설물로 완전히 파괴되어 절터의 축대석이 있던 토축만이 겨우 남아 있다. 또한 최근에 야영장 뒤에 재실을 짓다가 중단된 상태로 남아 있다. 이러한 정황에서 지표조사와 발굴작업이 이루어져 보다 명확한 사실이 밝혀져야 한다. [출전:신편강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