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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점-
▶ 공통적인 것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플롯전개, 영화 친구나 말죽거리 잔혹사와 같은 남성이 중심이 되었던 영화의 서사에 여성을 그대로 입힌 것과 같다. 암울했던 1980년대의 이면을 보여준다. 80년대 클리셰가 많이 쓰였다.
▶ 차이점
80년대 정서는 이제 식상한 플롯이다. 또한 그 80년대에 대한 추억이 너무 밋밋하게 진행되고 있다. vs 80년대의 클리셰를 많이 가져왔지만 그 클리셰를 향유한 주체가 다르기 때문에 기존 80년대를 다룬 영화에서 독립적인 영화로 보인다. 시퀀스가 인과관계가 떨어져도 각각 독립적이게 진행되고, 그 시퀀스들이 80년대 클리셰를 희화화하면서 오히려 80년대 클리셰를 탈피했다.
▶ 비판
캐릭터가 너무 지나치게 개성적이어서 인물서사 간에 인과관계가 약하다.
클리셰가 많이 차용되어 추억에 기댈 수는 있지만 플롯의 인과관계가 약하다.
→ 복고 분위기에 지나치게 기대었다. 남성들의 우정영화가 연상된다.
너무 80년대가 희화화된 감이 없지 않다.(진보에 대한 희화화) → 영화에 은근한 보수적 시선이 있다.
마지막 시퀀스에서 결말 보상이 너무 자본주의적이다.
→ 소녀들의 변치않는 우정을 그리는 듯 했던 영화는 결말부에서 돈으로 모든 것이 보상되며,
돈이 다 해결해주는 신자유주의 이념에 치우친 결말로 나타난다.
▶ 옹호
80년대의 비장한 모습을 가볍게 만들어 80년대 클리셰를 오히려 새롭게 만들었다.
→ 그 덕분에 80년대의 어두운 면을 그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이 얼마나 가볍게 잊고 살았는가를 더 반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남성들의 우정영화 같을지라도 80년대 여고생을 주목해, 그 주체를 옮긴 것이 좋다.
→ 항상 80년대 배경의 영화에서 뒤로 물러나 있던 여성을 주목한 것에 의미가 있다.
진보나 보수의 우위를 말하고 있기보단 오히려 몰락한 중산층에 대한 공감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은가.
▶ 주목할 점 (쟁점으로 분석할 수 있을 점)
80년대에 대한 써니의 해석을 진부하게 볼 것인가 VS 새로운 해석으로 볼 것인가
써니에서 나타난 캐릭터나 플롯의 약한 인과관계는 장점으로 볼만 한가 VS 단점으로 부각되는가
▶알아둘 점
써니 개봉 당시 평론가들에게 좋지 못 한 평을 많이 받았다. - 앞서 말한 약한 인과관계가 원인으로 보임.
정리한 평론 자료
[영화 비평] 김미영의 "그땐 그랬지...영화 써니"
2011년 12월 12일 (월) 10:36:59 이대성 기자 abc0500@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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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나미가 학교 교문 앞에 서 있는 장면이 보이고 점차 등교하는 학생들의 옷이 바뀌면서 화면은 서울로 전학 온 고등학생 나미(심은경 분)가 되어 있다. 영화는 그때부터 고등학생 나미가 기억하는 학창시절의 추억을 회상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이처럼 현재에서 과거로의 자연스러운 전환을 보이며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뛰어넘는다.
그런데 영화는 회상하는 과정에서 플롯의 치밀한 전개보다는 시대적 공감을 불러일으킬 법한 소재들 위주로 작품을 꾸린다. 나이키 가방과 신발 일색인 학교에서 ‘프로스펙스’가 아닌 ‘스펙스’를 신고 있는 나미, 영화 <라붐>의 한 장면, 당시 유행하던 텔레비전 프로그램 <젊음의 행진>과 <영 일레븐>,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놓고 그 사연이 읽히기를 고대하며 듣던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 일명 만남의 장소로 불리던 음악 감상실, 디스코 바지와 원색의 의상들, 헤어스타일 등 1980년대를 기억나게 할 당시 유행 아이콘들이다.
<써니>는 1980년대의 추억을 회상하게 하는 요소들이 과하게 담겨 있고, 전체 플롯이나 구성에서 인과적인 상황을 구축해 내지 못했다는 비판을 가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캐릭터와 플롯의 인과관계보다 각 장면들이 독립적인 하나의 시퀀스 (Sequence)로 존재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따라서 강한 인상을 남긴 몇몇 장면들로 전체 스토리를 포섭해 유독 그 장면들만이 기억나게 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나미 입에서 황홀 상태에서 성령에 의해 말해진다는 방언方言처럼 튀어나오는 욕설이 난무하는 써니파와 소녀시대파의 싸움과 전경에 둘러싸인 채 싸우고 있는 소녀들의 모습이다.
영화 <써니>의 1980년대는 암울했던 역사의 기억이 아니라 주인공의 기억에 의해 유쾌하고 엉뚱하게 재구성된 추억이다. 그래서 무의식 저편에 봉인된 시간으로만 남아있던 1980년대의 현실을 <써니>는 기억의 왜곡을 거쳐 경쾌한 추억으로 재창조해낸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1980년대를 살았던 사람이라면 이 장면이 역사에 대한 조롱으로 여겨져 사뭇 불편할 수도 있다. 과거 역사에 대한 진지한 해석이 반영된 작품에는 전경들과의 대치 장면이 진지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시간의 흐름은 중심과 주변의 교체를 자연스럽게 생성한다. 어떤 시대의 주류 혹은 중심이 주변으로 바뀌고 주변이 중심으로 바뀌는 영역의 자리바꿈이 생겨나는 것처럼 영화 <써니>도 이런 상호 교환 관계가 반영된 하나의 흐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자리바꿈이 단순한 교체의 문제가 아니라 반복과 차이를 생성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즉 같은 형태의 반복을 통한 새로움의 생성은 또 다른 하나의 독립적인 개체가 되면서 기존의 것과 차이를 만들어내게 된다.
감독은 익숙한 클리셰의 반복 사용(1980년대를 기억하는 아이콘, 역사적 사건 등)을 통해 차이를 드러낸다. 감독은 이때 역사적 사실에 재미를 가미함으로써 장면을 희화화시킨다. 즉 형식의 해체에 따른 시퀀스의 의미가 변하고, 기존의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가졌던 내용과는 다른 새로운 작품이 되는 것이다.
같은 학생운동 사건이지만 7공주가 기억하는 시위 장면은 자신들의 싸움에 비해 주변적인 일개 사건일 뿐이다. 그렇기에 7공주에 의해 회상된 당시 전경들과 시위 학생들의 대치 상황은 자신들의 싸움을 가로막은 장애물로 기억될 뿐인 것이다.
이는 기억하는 주체에 따라 역사적 사실에 대한 중심과 주변의 자리바꿈이 형성됨을 보여주는 장면이라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써니’의 추억에 혹은 각색을 통해 재창조된 기억은 영화 제목처럼 ‘찬란하게 빛나던’ 시절인 것이다.
1980년대라면 있었을 법한 캐릭터들의 조합 또한 이 영화의 힘이다. 고등학교에서 익히 있을 법한 18대 1의 신화적 존재인 진덕여고 의리짱 춘화(강소라 분)가 있고, 외모에 집착한 나머지 쌍꺼풀 하나에 목숨 건 장미(김민영 분), 욕으로 싸우는 욕쟁이 진희(박진주 분), 문학소녀 금옥(남보라 분), 미스코리아를 꿈꾸는 복희(김보미 분) 그리고 누구나 꿈꾸었을 하이틴 잡지 표지모델 수지(민효린 분)가 있다.
이들은 각각 성장하여 고등학교 시절의 모습과는 대칭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 그려진다. 짱이었던 춘화는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있고, 장미는 실적 하나 없는 보험설계사다.
진희는 욕은 한 번도 입에 담아본 적이 없는 척 살아가는 우아한 사모님이 되었다. 그리고 문학은 생각할 수도 없는 가난한 주부 금옥과 미스코리아를 꿈꾸던 미모로 술집 접대부 일을 하는 복희, 강남의 사모님 나미 등 과거의 인물이 현재의 인물과 대조적으로 대칭관계를 이루며 짝을 맺고 있다.
어린 시절의 인물들이 어떤 모습으로 성장하고 변화했는지 즐거운 상상을 하며 영화를 지켜보게 만드는 힘도 캐릭터들의 독립적 개성에 있다.
이렇게 영화에 재현된 1980년대의 기억은 그 당시로 관객을 옮겨가게 한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는 동안 영화의 이미지들을 통해 내용을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시간성을 초월하여 그들만의 고유한 기억의 장소로 옮아간다.
즉 <써니>는 영화를 보는 개개인의 기억이 극장이라는 동일한 공간 속에 되살아나 그들이 기억하는 어느 한 공간, 시간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연결고리로 작용하는 셈이다. 영화에 등장한 1980년대 코드들은 집단의 공통된 기억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것을 수용하는 관객들에게는 그들만의 또 다른 작품으로 인식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시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조각조각 독립된 조각보들이 하나의 완성된 퀼트(quilt)가 되는 부분이다. 그 완성된 퀼트는 사용자, 혹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듯 작품 또한 관객들의 해석 방식에 따라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이 가능하며 그 순간 작품은 또 하나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셈이다.
http://www.dailyjeonbuk.com/news/articleView.html?idxno=136608
[강유정의 시네마 logue] 써니<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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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영화는 두 가지 축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어느 새 40대 중반이 되어 버린 써니 멤버들 찾기이고, 다른 하나는 플래시백 너머에서 등장하는 과거 써니 멤버들의 추억담이다. 흥신소에 부탁해 친구들을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그 장면과 맞물려 과거의 이야기들이 하나둘씩 떠오른다. 기억은 주로 나미가 떠올리고 그녀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던 졸업 앨범 속 친구들이 등장한다.
영화 ‘써니’가 의존하고 있는 것은 바로 1980년대의 복고적 분위기가 불러일으키는 향수이다. 1980년대 여고생들의 지표라고 할 수 있을 ‘나이키’에 대한 집착이나 1980년대 유행가를 곳곳에 배치한 의도도 마찬가지이다. 영화 ‘라 붐’의 주제곡을 들으며 헤드폰을 나눠 낀다거나 ‘터치 바이 터치’가 흐르는 거리에서 옆 학교 여학생과 싸우는 장면도 그렇다.
강형철 감독이 80년대 정서 중 중요한 부분으로 인용하는 또 하나는 바로 늘 데모하던 대학생 오빠들에 대한 추억이다. 흥미로운 것은 데모와 화염병, 최루탄을 늘 맞고 다녔던 그 길거리에 불량서클 멤버라고 할 수 있을 써니의 추억이 고스란히 겹친다는 점이다.
강형철 감독은 당시 대학생 세대들, 그러니까 소위 386세대들이 80년대에 가진 부채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 전경과 대학생들의 몸싸움을 ‘터치 바이 터치’라는 팝송의 가벼움으로 대체하는 것도 그렇다. 민주화나 독재반대와 같은 구호들은 옆 학교 ‘짱’과의 결투와 섞여 구분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강형철 감독에게 운동권 대학생들은 늘 그렇게 거리를 맴돌던 추억 중 하나인 셈이다.
문제는 80년대 정서에 대한 호소가 어딘가 너무 진부하고 식상하다는 사실이다. 최근 유행 중인 서바이벌이나 오디션 프로그램 역시도 80년대 혹은 과거의 정서에 상당부분 호소한다. ‘써니’에서 인용하는 80년대는 과거 ‘품행제로’와 같은 영화에서 효과적으로 보여주었던, 놀았던 아줌마, 아저씨들에 대한 기억의 밀도에 비해 상당히 밋밋해 보인다.
여고생들의 추억이라고는 하지만 유리창을 깨고 자퇴를 선택하는 여고생에게선 ‘친구’나 ‘말죽거리 잔혹사’의 흔적이 떠오르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영화계에선 성공적 데뷔를 거친 감독들의 2년차 증후군을 서퍼모어 증후군이라고 부른다. 관객들의 평가가 궁금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평론가 강유정 2011-06-27
[오사카] 그때 그 청춘에 마음을 주다
글 고정수 2012-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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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써니>는 한국에서 비평적으로 큰 성과를 얻었던 영화는 아니다. 특히 <씨네21>은 올해 초 <써니>를 ‘2011 과대평가된 한국영화’로 꼽기도 했다. 그 기사를 쓴 황진미 영화평론가는 이렇게 썼다. “결국 <써니>가 말하는 건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는 퇴행적 운명론이다. <써니>는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 우정을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친구를 찾고 친구의 마음을 여는 모든 순간, 돈이 활약한다. 궁극적 피날레 역시 유산 잔치다. 결국 <써니>가 말하는 건 ‘돈이면 옛 친구도 살 수 있다’는 신자유주의 이념이다.” 어떤 면에서 정확한 지적일 수도 있다. 실제로 유명한 피겨 아티스트 데하라 유키노리 역시 <써니>의 배금주의를 간파하는 글을 SNS에 올린 바 있다. 혹시 일본에서도 이런 평가가 늘어나면서 <써니>의 상승세가 한풀 꺾이지는 않을까? 아마도 그런 기우는 기우로만 끝날 것으로 보인다. SNS에서 <써니>를 극찬하는 일본인 중에는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8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중년 남자들이 많다. 영화의 배금주의를 지적했던 데하라 유키노리 역시 <써니>에 94점이라는 높은 점수를 줬다. 지금까지 한류 열풍을 지탱해온 일본인이 주로 중년 여성들이었다는 걸 감안한다면, 일본 중년 남자들의 극찬을 받고 있는 <써니>가 한국영화의 새로운 애호가들을 개척할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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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70184
동년배 여성 평론가가 본 <써니> 흥행 비결
심영섭 (영화평론가) 2011년 05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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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그래픽(CG) 없이 시작한 첫 장면에서 여고생 나미는 이제는 아줌마가 된 나미를 툭 건드리며 지나가고, 사방에서 여고생들이 쏟아지며 갑자기 1980년대의 여고 교실 풍경이 펼쳐진다. 강 감독은 주인공 중심으로 깊은 플롯의 잔재미를 살리기보다는 여고생들의 관계 속에서 툭툭 오늘을 건드리는 식이다. 특히 첫사랑에 실패한 나미를 현재의 나미가 다가가 안아주는 장면. 수평 트래킹으로 잡은 이 장면은 소녀와 아줌마가, 과거와 현재가, 사실은 한 여자 안에 고스란히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자상함이 배어 있다. 수영장에서건 은행에서건 어머니 혹은 아줌마라 불리는 나. 중년의 육신 속에 갇힌 소녀를 꺼내준 듯 반가워진다.
그러나 사회적 관점에서 보자면 <써니>는 암울한 시대 1980(80)년대가 업보처럼 뒤따라 다닌다. 사실 80년대를 살아낸 자로서, 80년대를 회고하면, 거기에는 온통 눈에 보이는 폭력이 도사리고 있었다. 아무리 이웃 학교의 ‘킹카’ 남학생과 독수리다방에서의 미팅에만 관심을 가지려 해도, 친구·오빠·선생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길거리에는 최루탄이 난무하던 시절.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말죽거리 잔혹사> <친구> 같은 남성 성장영화들은 원죄처럼 80년대 폭력의 문제를 학교라는 더 작은 사회로 치환한다. 그런데 <써니>는 이 문제를 만화적 상상력과 유쾌한 판타지로 갈무리하여 사뿐하게 80년대를 배경화하는 상업적 내공으로 차별화하는 것이다.
특히 마음에 와닿는 ‘터치 바이 터치’ 장면. 칠공주와 반대파 ‘소녀시대’의 맞장 뜨기가 80년대의 데모 군중과 버무려져 살과 살이 부딪치고, 뼈와 뼈가 우지직 금이 갈 것 같은 이 장면은 어느새 우리 시대의 치부이자 치열한 투쟁의 장이었던 80년대를 이렇게 가볍게 넘기고 있구나 하는 감회와 맞닥뜨리게 만든다.
80년대의 교실이 80년대 영화들처럼 폭력적이었나? 글쎄. 오히려 일부 아이들이 달고 다니던 욕 무더기와 면도날은, 즉 80년대 여고생들이 표출했던 폭력성은 수컷들이 보이는 계급 싸움보다는 소녀들의 내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만드는 일종의 하위문화는 아니었나. <써니>는 이러한 여고생들의 혈기 방장한 기운을 오늘로 끌어내어 나미의 딸을 괴롭힌 또 다른 칠공주를 혼내주는 에너지로 전환시킨다.
써니. 이 비밀 결사의 클럽 이름처럼 10대를 통과하는 소녀들은 어쩌면 인생의 가장 양지바른 곳에 서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장통을 겪고 도달한 어른의 문턱에는, 비밀리에 체득했던 연애담과 성장의 필살기들이 얼마나 소용이 있던가. 오늘을 보자면, 가부장제와 자본으로 갈라지는 계급의 문제에서 어떤 개인도 자유로울 수 없다. 복희는 몸을 팔고, 장미는 보험상품을 팔며, 금옥이는 시댁의 구박덩어리가 되었고, 진희의 남편은 외도를 일삼는다. 그렇기에 <써니>의 마지막은 또다시 판타지의 힘을 빌린 치유와 기적의 주술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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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관객들 최면에 걸리다
그제야 시무룩하게 깨닫는다. 나 역시 나이키 운동화 하나면 명품족이 되었던 80년대를 거쳐, 샤넬 백이나 루이뷔통 하나는 있어야 ‘간지’나는 2010년을 통과하고 있구나. 그래서 <써니>는 주문처럼 줄기차게 이렇게 여성 관객들에게 최면을 건다. “나는 내 역사의 주인공이야.” <써니>는 모처럼 여고생이라는 개인적인 미시사와, 그들의 관계를 통해 80년대와 오늘을 아우른다. 뭐 여성판 <친구> 같다고 해도, 솔직히 80년대 여고생들을 남성 감독이 스크린에서 건드려준 사실 자체가 반갑다.
자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아줌마 코스프레하고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며 ‘네가 정말 예쁘다’며 엉엉 울었던 그들처럼 이제 우리 아줌마들이 여고생 코스프레하고 디스코텍에서 시원하게 몸 푸는 거?
강형철 감독은 여성의 자아 찾기와 여성 연대라는 표어적 캐치프레이즈를 상업영화의 틈 안에서 남성 관객들조차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잘 비벼놓았다. 정치적이거나 직설화법은 아니지만, 정말 모처럼 40대 이상 중년 여성들의 향수 코드를 뒤흔드는. “우리 중에 하나만 건드리면 모두 건드리는 거잖아” 같은 대사가 시절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그래서 <써니>를 보고 나서 나직이 불러본다. 생의 구김살을 뽀얗게 다림질할 것 같던 지지배들아. 영자야. 순희야. 그립다 너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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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섭 (영화평론가)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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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웅에 극장뎐] 써니에 대한 변명
우선 영화 전반에, 특히 학창시절을 다루는 동안 인물들의 성격이나 행동이 지나치게 과잉되어 있어 자주 설득력을 잃어버린다는 것. 둘째는 80년대를 다루고 있음에도 그 서슬 퍼런 시대의 공기를 느낄 수 없고, 심지어 그 자체를 희화화해버리는 대목들이 자주 등장해 불쾌했다는 것이다. 두번째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 영화의 결말인 ‘선물’ 시퀀스도 너무 편하고 기만적인 방식이라 생각한다. 모두 이해할 만한 의견들인데, 이 영화를 큰 무리 없이 즐긴 한 사람으로서 어찌 됐든 두어가지 정도 보탤 이야기가 있다.
우선 첫번째 지적부터. <써니>의 화법 자체는 무척 익숙한 것으로, 청소년기의 추억을 신화화하는 영화들의 틀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다. 따지자면 추억류 남성 판타지를 조롱하고 비웃었던 <품행제로>의 반대편에서, <친구>의 방식으로 여성 판타지를 구축한다. <써니>가 과거를 다루는 방식이 <친구>와 다른 점은 후자에서 병풍에 불과했던 여성들이 이야기의 중심으로 이동했다는 사실뿐이다. <써니>는 지금 이 시간을 살아나가고 있는 인물들이 우연히 만나 과거 어느 시점에 함께 공유했던 짧은 사건을 신화화하고, 거기에 특별한 가치를 덧씌우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더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구조 안에서 다소간의 과잉된 에너지가 극을 지배하게 되는 건 막무가내식 설정이라기보다 자연스런 일이라 할 만하다.
두번째 지적에 관련해서는 대표적으로 ‘터치 바이 터치’ 시퀀스를 들 수 있겠다. 신군부에 저항하는 대규모 시위대와 주인공들이 뒤엉켜 집단 군무를 추듯 난장을 형성하는 이 장면은 ‘사실’보다는 ‘유희’에 방점이 찍혀 있다. 주인공의 남편이나 오빠가 과거에 운동권이었다가 지금은 성공한 자본가, 혹은 실패한 자본가로 살아가고 있다는 대목 등과 더불어 <써니>는 386 세대의 어떤 전형성에 대해 확실히 냉소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그리고 이런 태도가 결말의 ‘선물’ 시퀀스에 이르러 일부 관객들에게 뚜렷한 보수 이데올로기로 비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 영화를 진보 보수의 틀에서 재구성하는 게 옳은 방식인지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 그보다 <써니>는 몰락한 중산층을 바라보는 공감 어린 시선에서 동력을 얻는 영화다. 과거 우리 가운데 상당수는 실제 그랬든 그렇지 않았든 간에 관계없이 느슨하고 심정적인 인식 아래서 ‘중산층’이었다. <써니>의 결말은 과거의 신화적인 역동성으로부터 멀어져 관성 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몰락한 중산층’의 물리적인 부활을 그리고 있으며, 이는 기만적일지라도 관객에게 위안과 해소의 감정을 전달하는 데 성공한다. 극장을 나서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이 “나도 친구 잘 만나 중산층 되고 싶다”였다. 그렇다고 그와 같은 인상이 영화 본연의 낙천적인 에너지 자체를 폄하할 근거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허지웅 영화평론가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478062.html#csidx87eb1e66e2d280c943ceaf8f5f9300e
평론 전문들 첨부
Research] 써니_영화 평론 및 기타 리서치_써니에 대한 평론 정리_신유나_161120.hwp
첫댓글 자료들을 찾을때 찾으신 자료 이외에서 또 다른 자료들을 찾고 새롭게 보려고 해봤어요. 영화 속 80년대를 묘사하는 모습은 오늘날과 비교하여 얘기해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찾은 자료에서는 <써니>가 기존의 80년대의 요소를 이용하면서도 차별화되었다고 언급한 자료가 많았는데요.
80년대에 대한 써니의 해석은 '추억'이라는 관점에서도 볼 수 있을 것같고, 이 요소들과 인물들의 개성은 결국 흥행할 수 있었던 요소라는 생각이 들어요.
맥키의 이론에 적용해보며 구체적으로 분석해보고 하나하나 짚어보는 것도 좋은 시작이 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