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요동지역과 러시아 연해주까지 북으로 뻗어 있는 발해! 698년 대조영이 세운 발해는 이 좁은 국토에서 아웅다웅 사는 우리의 숨통을 튈 수 있는 꿈의 나라이다.
우리의 핏줄 어디에 요동 벌을 휘달리던 그 강한 고구려의 기상이 남아 있을까. 그냥 과거지사가 아니라 우리의 소란스런 모든 것이, 펄럭이는 깃발에서처럼 스러지고 다시 불길처럼 치솟는 그런 발해가 ….
요즘 우리들 주위에 이민을 가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아니 이민을 꿈꾸는 사람이 날마다 늘어난다. 모두가 다 이 좁은 '여기'에서 없는 것, 있어야 함에도 없는 것, 우리에게 없는 그 무엇을 꿈꾸며 미국을, 캐나다를, 뉴질랜드를 그린다.
여기 이곳에, 결핍된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잡아 두지 못하고 떠나게 하는 것일까. 일본 강점기에 못살아 쫓기어 떠나는 행렬이 수십만. 간도 행렬이 연간 십여 만 명을 넘었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렇게 무도한 이민족도 없는데,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미국을, 캐나다를, 뉴질랜드를 꿈꾸게 하는 것일까. 꽤나 행복하게 보이던 사람들도 답답하다며, 숨을 쉴 수 없다며 이민을 꿈꾼다.
2000년 한 해 이민자 수는 1만5천3백여 명으로 1999년도보다는 20%가 늘어났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민을 꿈꾸고 있는 사람은 또 얼마 만큼일까.
여기 이곳을 떠나는 이들이, 이곳을 떠나려 꿈꾸는 이들이 소망하는 것이 어찌 경제적인 것 만이겠는가. 그 먼 미지의 땅에 이른다고 하여도 나의 온 정신과 나의 온 존재는 여기 다 다 두고 떠나는데,
거기 있다한들 어떻게 막힌 답답한 가슴이 시원하게 뚫릴 수 있을까. 우리가 여기서 영원히 자유롭지 못하면 지구 어디로 간들 일상의 잔뿌리를 내릴 수 있겠는가.
미련을 끊고 이 곳을 떠난 이들은 '내 조국이 어디냐'고 묻는다. 미국 땅에 수십 년을 살아도 실 뿌리 하나 내릴 수 없어 '이곳'을 다시 와 보면 떠날 때 없던 것이 여전히 없어 다시 되돌아 설 수뿐이니….
"내 조국은 늘 기대하고 찾아오고 또 떠나는, 그래서 그 가운데 어디쯤, 아마도 태평양 상공 어디나 비행기 속인가 보다." 되돌아서는 이민자의 말에 가슴이 아려온다.
우리에게 무엇이 그렇게 없는가.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있는 그것이, 그렇게 자주, 그렇게 쉽게 말하는 그 언론의 자유며, 그 민주주의라는 것이. 비행기 속에, 가없는 창공에는 있을까, 여기에 없는 모든 것이, 우리가 꿈꾸는 모든 것이 높이 뜬 비행기 속, 우리의 핏줄 속, 우리의 아득한 발해의 역사 속 거기에 그렇게 있을까.
기울어 가면서도 "서쪽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고 싶은 욕심이 있다"는 노회(老獪)한 한 정객의 말이 무섭기만 하다. '벌겋다'는 말이 주는 이미지 때문일까. 나라를 떡 주무르듯 할 수 있다는 망령 때문일까. 입으로만 민주주의를 말하는 모든 정객들이 무섭기만 하다.
우리의 꿈은 부대끼며 함께 궁글며 뒤엉키어 살아야 할 이곳에서,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있는, 그러면서도 우리의 삶 속에서 스러져 가는, 그 말할 수 있는 자유, 없으면 숨쉴 수 없는 민주, 그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