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선생과 두암선생의 유적지 탐방 (1)반구정에서 계속!!
용화산을 종주하는 산악자전거 도로가 개통되어 내려다보는 전경이 천하 절경이다. 푸른 숲에 덮여 있는 용화산과 발 아래로 유유히 흐르는 억겁의 낙동강과 대안의 더 넓은 남지시가지가 풍요로운 시골의 면모를 볼 수 있게 한다. 4대강사업으로 강변의 넓은 은빛 백사장은 사라지고 없다. 모래 위의 서걱거리는 발자국 소리와 물너울 모래톱도 동심 한 편에 묻어두고 좋은 곳만 바라본다. 반구정에서 댓질고개를 내리받이 길로 800미터 내려오면 빼어난 풍광의 합강정(合江亭)이다.
징사(徵士) 간송(澗松) 조임도(趙壬道)선생은, 8세 때 임진왜란을 당해 아버지를 따라 고향을 떠나 합천·경북 청송·영주·봉화·의성 등지로 옮겨 살았다. 이때 선생은 퇴계 학맥을 이은 여러 선비들로부터 공부를 배웠으며, 17세 때 경북 안동에서 역시 퇴계의 제자인 여헌 장현광을 만나 스승으로 삼았다. 19세 때 비로소 고향인 검암에 돌아와 곤지재(困知齋)를 짓고 시냇가에 두 그루의 소나무를 심고서 ‘간송’이라고 호를 붙였다. 그리고 시한 수를 지어 좌우명으로 삼고자 했다.
‘爲愛澗邊松 天寒不改容’
‘시냇가의 소나무를 사랑하니 날씨가 추워도 그 모습 변치 않기 때문이라네’
소나무의 절개를 본받아 올곧은 선비로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정사에 도착하자 합강정사를 지키고 서있는 400년 수령의 은행나무(나무 둘레 4.6m,높이 약35m,가지 폭 약25m)가 천수(天壽)의 위풍으로 선생의 학업을 엿보게 한다.
돌계단을 밟고 낙원문(洛源門)을 들어서 처마 밑의 합강정 편액과 대청마루 안쪽벽면의 합강정사 편액이 원래 제 자리인지 의구심이 든다. 나그네가 지나쳐 가기만 할뿐 사람이 거주하지 않으니 정비와 정돈은 잘 되어 있으나 휑한 분위기는 어쩔 수 없나보다.
합강정사는 간송(間松) 조임도(趙任道)선생이 은거하며 수학하던 곳으로, 49세(인조 11년. 1633 계유) 봄에 내내(奈內)에서 기강(岐江 : 지금의 용산리)으로 옮겨와 살 때, 용산마을에서 마주 보이는 강 건너 용화산 기슭 함안군 장암리 장포 산60-1의 현 위치에 망모암(望慕巖)과 왼쪽에 사월루(沙月樓) 오른쪽에 연어대(鳶漁臺) 등 소정삼간(小亭三間)을 지어 합강정사(合江精舍)라 현판하고 은거(隱居)하였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변 2칸의 목조와 가건물(木造瓦家建物)이며 이 곳에 간송문집 및 금라전신록책판이 소장되어있다. 그 후 합강정은 1924년과 1937년에 중수(重修)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생이 은거한 사유는 광해 때 정인홍이 오랫동안 권세를 잡고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문묘종사(文廟從祠)를 반대하는데 대하여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진계(陳戒)의 소를 올리고 마침내 정인홍의 미움을 받아 기강으로 피신한 것이다.
선생은 유유자적하며 몸소 고기를 낚아 어머니를 봉양할 만큼 효심이 지극하여 백효(伯孝)라 불렸다.
간송(間松) 조임도(趙任道)선생은 소나무를 노래하며 몸과 마음을 추스려 스스로 담근질한 것을 '재송간변(栽松澗邊)' 에서 볼 수 있다.
합강정사가 있는 이 산은 옛날 7마리용(龍)이 승천하였다고하여 용화산이라 부른다. 용화산은 봉우리가(谷) 99봉(峯)을 이룬다. 어찌하여 100곡 100봉이 되지 않았는지 아쉬울 뿐이다.
함주지 산천조(山川條)에는 「龍華山 : 在郡城北四十里(代山)安谷山一臂??北走未及道興津一里許??西轉隆然斗起卽靑松寺主山也」라 하였다.
임진왜란당시 곽재우장군이 의병을 모아서 왜적을 물리칠때 교두부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또 6·25때에도 미군이 이곳에 주둔하면서 "이렇게 좋은 지리적 여건에서 북괴군에게 진다면 모든 군사들이 전쟁에서 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라 적고 있다.
용화산에는 사람이 해치는 짐승이 하나도 살 수 없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그리고 용화산 북쪽에 상부(上部)가 뾰족한 상사바위(相思岩)가 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한다.
옛날 이 마을에 처녀 하나가 있었는데 동네 청년을 사모하다가 인연을 맺지 못하자 이 바위에서 자결을 했다. 이때부터 이바위를 상사바위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상사바위 끝이 너무 뾰족하여 오르기가 힘들어서인지 이 바위에 올라 침을 세 번 뱉으면 장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함안지명사)
기록에 의하면, 간송(間松) 조임도(趙任道)선생은 평소 존모(尊慕)하기를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祐), 동계 정온(桐溪 鄭蘊), 외재 이후경(畏齋 李厚慶), 모계 문위(茅谿 文緯), 수암 유진(修巖 柳袗), 미수 허목(眉 許穆) 등제공(諸公)이었는데 서로 도의풍절(道義風節)이 같았다.
하루는 임금님께서 간송의 높은 명성을 듣고 망모암을 찾아왔다. 그런데 간송은 짚신을 삼으며 집에 들어오는 손님을 바라보지도 않고 임금님임을 알았으나 짐짓, "선 빚 얻고 후 빚 갚다니!" 하면서 맞았다.
임금님이 하도 기가 막혀, "낙동강 구구봉(용화산)을 줄까? 낙동강 칠백 리를 줄까?" 물었다. 간송은 구구봉을 달라고 하여 용화산을 하사 받았다. 그래서 용화산 구구봉이 함안 조씨의 소유가 되었다고 전한다.
간송(間松) 조임도(趙任道)선생의 문집과 강제12영
정사의 대청마루에 걸려 있는 편액이 지난 세월의 무심함을 말하듯이 편액만이 한 자리에 모여 있다. 정사의 절경을 소재(小題)로 쓴 『강제십이영(江濟十二詠)』이 지난 세월의 풍상을 몸으로 말하고 있다.
은행나무 아래 강변에는 넓은 너럭바위와 암반의 절벽면과 그 아래 곳곳의 넓은 백사장과 푸른 강물의 조화로운 어울림이 인심 좋은 시골 아낙네 같아 덤치기 낚시로, 달이 뜨면 강물에 달기둥을 이루는 월주(月柱)가 내리는 풍광은 절경의 극치를 이루게 하였다고 한다.
徵士間松趙先生遺墟碑(징사간송조선생유허비)
간송(間松) 조임도(趙任道)선생은 50세에 공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때 유림의 여러 선비들의 추대로 남명이 강학하던 김해 산해정(山海亭)이 있던 신어산(神漁山)기슭의 신산서원(新山書院 1578년 건립. 1609년 사액) 원장을 맡아 운영하였다. 이때 강우지방(江右地方)에서 선생의 명망이 대단히 높음을 알 수 있다.
합강정사에는 영조20년(1744)에 간행한 간송문집책판(澗松文集冊版)과 순조13년(1813년)에 간행된 함안의 역사와 고려말 충신 이방실 장군과 함안군 출신자들의 업적을 기록한 금라전언록책판(金羅傳言錄冊版)이 소장되어있으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80호로 지정되어 있다.
금라전언록 책판
저서는 이광정이 서문을 쓴 간송집(澗松集) 금라전언록과 풍수음(風樹吟), 유모가(孺慕歌)가 있으며, 기문으로는 ‘망모암기’와 곽재우 망우정사의 ‘여현정기’가 있다.
1666년 사림의 건의로 조정에서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을 추증하였으며, 함안군 안인리에 송정서원(松亭書院)을 건립하여 위패를 봉안하고 향사(享祀)하고 있다.
거름강과 나루터
말무덤산과 개비리길 그리고 억새전망대
정사를 뒤로하고 내려오는 길목이 또한 절경이다.
남강이 낙동강 품으로 합수되어 들어오는 거름강 장포나루. 장포나루는 남강과 낙동강의 합류지점으로 대산면 장암과 의령 지정면의 성산과 창녕 남지읍의 용산 마을의 창나루 3곳을 연결해 주는 나루였다. 사공은 의령의 성산에 상주하여 주막(酒幕)을 열고 남지장을 왕래하는 주민들을 건네주는 중요한 교통과 소통의 길이었다. 필자도 1970년대 말까지 오트바이를 나룻배에 싣고 성산으로 왕래하기도 하였던 나루로 지역주민들의 애달픈 과거의 애환이 서려 있던 나루터였는데, 지금은 강물 따라 혹간 교량 가설이 추진된다는 소문이 무심히 흐르니 어느 날 갑자기 광안대교 같은 새로운 명소를 이곳에서 바라 볼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해 본다. 임진왜란의 홍의장군의 말발굽소리와 함성이 말무덤산 개비리길 단풍 따라 들린다.
배수장을 거쳐 동박골 마을을 지나고 공단 네거리로를 거쳐서 귀환하는 도로는 모두 평지의 시골 길이라 전답에서 작업하는 농부의 모습과 다양한 농작물을 보면서 달리는 재미도 인상적이다.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