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원 나혜석거리 동상 뒤에 인형의 집이란 시가 새겨져 있다-
인형의 집/나혜석
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 때
기 매하듯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 인형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는 위안물이 되도다.
(후렴)
노라를 놓아라
최후로 순수하게
엄밀히 막아논
장벽에서
견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주게
남편과 자식에게 대한
의무같이
내게는 신성한 의무있네
나를 사람으로 만드는
사명의 길을 밟고서
사람이 되고져
나는 안다
억제할 수 없는 내 마음에서
온통을 다 헐어 맛보이는
진정 사람을 제하고는
내 몸이 값없는 것을
내 이제 깨도다.
아아! 사랑하는 소녀들아
나를 보아
정성으로 몸을 비쳐다오.
많은 암흑횡행할지나
다른 날, 폭풍우 뒤에
사람은 너와 나.
3. 나혜석의 시세계/정영자
여성해방과 자유의지
1. 머리말
한국에서 근대에 대한 자각은 의식적인 것으로 출발한다 국내의자발적인 사회조건
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밖에서 오는 역사적 세력의 강요에 의하여 수동적으로 받
아들여져 갑오경장 이후 문학과예술은 개화를 선전·계몽하는 성격을 띠게 된다.
1910년대는 최남선, 이광수를 중심으로 일제 식민지 통치에 대항하며 동시에 당대
사회의 관습과 유교윤리에 도전하여 자유와 자율을 내세우는 교훈주의적이었으나
이것은 1920년대에 와서는 자유연애와 자아중심주의를 부르짖으며 더욱 확대되었
다. 인간의 개성과 자아 각성의 움직임 속에 전 시대와 비교한다면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여성의각성이 커다란 이슈로 대두하게 되었다.
여성해방의 이념이 우리 문학사에서 뚜렷하게 자각되기 시작한것은 신소설의 시대
가 개막된 이후인데, 그 첫 공식 선언은 아마도이해조의 <자유종>(1910)일 것이다.
1) 이해조는 이 소설을 통해서무엇보다도 여성의 사회적 기회균등과 교육의 필요성,
남녀차별의철폐와 여성해방을 부르짖지만 관념적인 제시로 끝나고 있다.
자유연애론이 질서정연한 논리로써 본격적으로 소설화 된 것은이광수에 의해서이
다. 기성윤리에 배반되는 이러한 주제는 씩씩하고 진취적인 신여성이 그 주요인물
로 등장했다.
그러나 여성해방의 이념이 문학과 생활에서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으로 실천된 것은
1919년 3·1운동 이후에 등장한 김명순, 김일엽,나혜석 등에 의해서였다 이들은 그
들의 문학과 생활을 통하여 가장 많이 논의되고 전기적 인물의 주인공으로 등장하
고 있다. 2)
1) 오세영, 『현대시와 실천비평』, 이우출판사, 1983, p. 60.
그러나 미술계의 선각자로서의 평가와 美의 십자가를 진 여인으로서 긍정적인 시각
을 보인 이경성 교수는 나혜석에 대한 견해를종합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① 여성해방의 선각자라는 것.
② 여류 예술가의 개척자라는 것.
③ 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라는 것 등 그녀의 생애를 의미있게 해석하는 측과
④ 지나친 자유주의자였다는 것.
⑤ 생활에 노예가 되기 싫어서 婦道를 지키지 않아 비참한 말로를 가진 희생자라는
것,등 그녀의 생애를 비난하는 측으로 대별하였다. 3)
그 외에도 나혜석을 옹호하는 한편 그의 미술적 평가와 정확한생애를 거론한 이경
성 '교수의 <미의 십자가를 진 여인 - 나혜석試論>4)과 긍정적인 측면에서 옹호하
고 있는 권영민 교수의 글5),『한국근세여성사화』 중에 <최초의 여류화가 晶月 나
혜석>6)은 문학과 인생에 대한 연구이고, 『폐허』 동인으로 함께 문단 활동을 한
김일엽의 우정에 찬 나혜석의 삶의 언저리 소개7)와 리얼리스트의선구로 논의한 김
영덕 교수와8) 1920년대 여류시인으로 평가한 최
2) 이구열,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 동화출판사, 1974.
김종욱 편, 『날아간 청마』, 신흥출판사, 1981.
나혜석, 『이혼고백서』, 오상출팔사, 1987.
박금회, <불꽃으로 살다가 얼음으로 간 선각의 에미>, 『여성중앙』, 19844. 10.
임종국 ·박로형, 『근세한국 기인전』, 상문당, 1969.
이상현 편, 『달뜨고 별지면 울고싶어라』, 국문출판사, 1981
구석봉, 『개화 백년의 여인산맥』, 수상출판부, 1978.
이명온, 『흘러간 여인상』, 인간사, 1956.
3) 이경성, <미의 십자가를 진 여인>, 『예술논문집』 1호, 1958. 9.
4) Ibid.,
5) 권영민, 「날아간 청마의 꿈」 , 김종욱 편, 『라혜석 - 날아간 청마』, 신흥출판
사, 1981.
6) 이옥수, 『한국근세여성사화(상)}, 규문각, 1985, pp. 309-317.
7) 김일엽, <진흙 속에 핀 꽃 나혜석을 말한다>, 이상현 편저, op. cit.,
근의 연구9)에 이르기까지 나혜석의 문학은 그 평가와 좌표 설정이 미흡하게 되어
있다.
이에 本考는 예술과 인생을 함께 일깨워 주는 선각자로서 나혜석을 그의 문학작품
을 통하여 규명해 보고자 한다.
2. 감동적 문학 - 그 삶의 편력
1910년 이후 조국의 역사적 시련기에 민족적 각성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따라
서 의식구조상으로 동족의식은 물론이거니와 남녀 차이에 대한 동등한 수준의 요구
와 그 시행은 상당하게 파급되었다
'皇國女性'을 만드는 전초작업으로 일본은 철저한 복종형 여성상을 여성의 理想像
으로 제시하였다. 10) 그러나 동경 여자유학생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잡지 『여자
계』는 3·1운동을 전후하여 여성의 사회적 각성을 촉구하는 선봉에 서서 활약하였
다. 11) 여러 가지 측면에서 3·1운동은 여성의 사회적 각성의 계기가 되었고, 여성
의 지위향상이 비롯되어 1920년대는 여성의 사회활동이 더욱 활발해지고, 각 방면
에서 사회적인 자아실현의 시기로 접어들게 된다.
1920년대의 계몽주의적 사회사상의 결과로 여성 교육이 양적으로 팽창해지고 과도
기적 현상을 거치는 동안에 신여성이란 이름의선각자들이 나타난다. 이와 같은 신
여성의 한 사람으로 나혜석은한국여성문학사와 미술사에 새롭게 나타난다.
나혜석은 1896년 4월 18일 경기도 수원군 신풍면 신창리에서 아
8) 김영덕, <한국근대의 여성과 문학), 『한국여성사2』,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여성
사편찬위원회 편,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72, pp. 376-380.
9) 신달자, 『1920년대 여류시 연구』, 숙명여자대학교대학원, 1980.
10) 『한국여 성사 2』, op. cit., p. 330.
11) 『여자계』 3호, 동경여자유학생 친목회, 1919. 9. p. 16. 익명으로 <여자교육론)
이라는 논문에서 종래의 현모양처 형을 부정적인 여성상으로 보고 남녀동등, 민족
주의를 부르짖고 『여자계』 4호, 1920. 3, p. 25에서는 재동경유학생 김환은 남성의
입장에서 열렬하게 남녀차별교육의 철폐를 주장하였다.
버지 나기정과 어머니 최시의 사이의 5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집안은
대대로 부유한 명문으로 증조부는 호조참판을 지냈으며, 아버지는 용인과 시흥의
군수를 역임했다. 위로 오빠 둘(홍석, 경석)도 일본 유학을 할 정도로 개화가정이었
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明順, 호는 晶月이며 그녀가 오빠들과 같은항렬로 이름을 바꾼
것이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두 살 아래인 동생 지석과 나란히 수원의 삼일여학교에서 보통과정을 졸업하고,
1910년에는 서울의 진명여고보에 여동생 지석과함께 입학하여 기숙사 생활을 하였
다. 1913년 3월 제1회 수석 졸업생으로 서울의 <매일신보>에서 혜석을 才子才媛난
에 소개할 정도로 이미 유명해져 있었다.
졸업 후 바로 동경여자미술학교로 진학하여 둘째 오빠의 권유로그는 서양화를 전공
하게 된다.
동경 유학 중 나혜석의 미모와 개성은 더욱 뚜렷해지고 다방면에 재질이 뛰어나 동
경유학생 사이에 인기가 많았다. 1914년 동경유학생들의 기관지인 『學之光』과
1915년 동경의 한국 여학생 친목회지인 『여자계』에 글을 기고하면서 여권신장에
대한 논설문을 쓰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나혜석의 문학은 여권운동과 여권의식에
대한 강렬한 메시지 묘사로서의 논설문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면서 『학지광』의 편집인 겸 인쇄인으로 문필운동을 하던 素月 崔承九와 첫사
랑에 빠졌으나 그가 26살의 젊은 나이로 폐결핵으로 죽자 정신적 혼란상태를 일으
킬 정도로 나혜석은 충격을 받는다.
그 무렵 京都 帝大 법학부 출신의 김유영이 헌신적으로 구애했으나 응하지 않고 최
승구의 친구인 춘원 이광수와 가까이 지냈다.
그러나 기혼자인 춘원과의 사이를 둘째 오빠가 반대하였고 친구인허영숙과 번갈아
만났고 나혜석이 허영숙에서 춘원을 양보하였다는 얘기도 있으나 확실치 않다. 12)
12) 박금회, op. cit., p. 284.
이옥수, of. cit., p. 310.
1918년 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함흥의 영생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다
시 서울에 와서 정신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9년 3·1 독립만세사건으로 김
마리아, 김인덕 등과 체포되어5개월의 옥고를 치루었다. 1919년 12월 어머니를 여의
었고 1920년4월 10일 그녀를 몹시 사랑하여 6년을 기다리던 10년 연장이고 전실 소
생이 있는 상처한 변호사 김우영과 서울 정동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뛰어난 재주와 개방적인 사고방식으로 동경유학생뿐만 아니라일본 학생들에게도 인
기가 높았던 그녀는 상처한 김우영과 결혼조건을 내세워 결혼하여 또 한 차례 화제
를 모았다. 나혜석은 결혼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조건을 열거했다.
① 일생을 두고 지금같이 나를 사랑해 주시오.
②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③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케 하여 주시오.
④ 죽은 애인의 무덤에 돌비석을 세워야 한다.
는 조건을 내세워 신혼여행길에 애인의 묘소에 다녀올 정도로 희한한 행동을 함으
로써 화제에 오르기도 하였다.
1921년 3월 19일 이틀 동안 최초의 서양화 개인전을 열어 장안을 떠들썩하게 하였
다. 풍경화를 주축으로 한 유화작품 70여 점으로 경성일보의 내청각에서 열린 개인
전은 대성공이었다.
개인전 이후에도 나혜석은 조선인 서화가들에 의한 최초의 근대적 단체전인 書畵協
會展(1921년 봄 첫 전람회)과 조선총독부가 주최하는 조선미술전람회에 계속 유화
를 출품하여 1927년 유럽여행을떠날 때까지 계속 입선, 수상, 특선을 하여 남성화가
를 앞질러 활동했다. 13) 1923년에는 만주 안동현의 부영사로 부임하게 된 남편을
따라만주 안동으로 이사를 하여 주로 만주의 풍물을 주제로 많은 풍경
13) 김종욱 편, op. cit., pp. 529-532. 나혜석 연보 참고.
이경성, op. cit., 그림에 대한 자세한 내용 수록
화를 그렸다. 안동현에서 외교관 부인으로 훌륭한 내조를 하는 한편 안동부인회를
조직하여 여권신장 및 독립운동을 도왔다.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가장 행복한 시기는 1920년에서 1927년이었다. 외교관인
남편을 따라 일본 외무성 파견으로 세계일주여행을 하며 많은 견문과 새로운 미술
기풍을 직접 접하고 1929년 유럽여행에서 돌아와서 화가로 대성이 촉망될 때 파리
체재 중에 있었던 최린과의 관계로 부부의 사이는 악화되어 1930년 4남매의 어머니
인 나혜석은 이혼을 당하고 만다.
이혼해·주지 않으면 간통죄로 고발하겠다는 협박을 받으며 이혼을 한 그녀는 마음
의 상처를 그림으로 달래며 작품제작에만 열정을 쏟아 1930년을 전후하여 미술가로
서 가장 화려하고 원숙한 절정기를 이룬다. 1930년 제10회 선전에 출품하여 특선의
영예를 누린'정원'은 파리에서 스케치해 온 후 완성한 작품이다.
세계사에서도 보기 드문 공개이혼장인 1934년 8, 9월호의 『삼천리』에 발표한 <이
혼고백서>와 최린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은 나혜석의 비참한 삶의 언
저리를 그대로 암시해 준다. 그리고 서서히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기 시작한다. 논
리적이고 대담한발언으로 쓰여진 <이혼고백서>는 사회제도와 법률의 모순, 무엇보
다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여성의 권리를 절규하고 남성중심사회를 신랄히 비판하
고 있다. <손해배상 청구소송>이 동아일보에 취재되고, 최린은 권력으로 신문을 압
수하고 드디어 최린으로부터 돈을 받고 고소취하를 한다. 1935년 『삼천리』 2월호
에 "살러가지 않고 죽으러 파리로 가겠다"는 내용의 <신생활에 들면서>란 유언을
발표하였다.
청구씨여, 반드시 후회하고 있을 때 내 이름 한 번 불러주소. 사남매 아이들아 에미
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에 선
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회생된 자이었더니라. 후일 외교관이 되어 파리 오거든 네
에미의 묘를 찾아꽃 한 송이 꽃아다오.14)
그러나 마음과 달리 고국에 미련을 가지고 떠날 수도 없었고 수덕사, 해인사, 마곡
사로 둘러 다니면서도 끝내 불교에 귀의할 수도없었다. 고향인 수원에서 몸을 요양
하면서 그림을 그렸으나 방랑벽이 있어 여기저기 다니면서 마음을 정착시키지도 못
하고 그림도그릴 수 없을 정도로 중풍이 오면서 가난한 삶이 그녀를 엄습하였다.
1937년 『폐허』 동인이었던 김일엽 스님이 있던 수덕사에 찾아가서 그림도 그리고
불교에 심취했으나 과거의 생각에서 헤어나질못하고 아이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애 절하였다. 가장 인간적인 면이 나타나면서 당시 발표한 글들은 모성애와 사랑을
그 주제로 하고 있었다. 친정과 시댁 양쪽 모두 수치스럽다며 집안의 족보에서조차
이름이 지워져 버린 그녀는 온몸을 떨며 말도 못하는 폐인의되어 머리를 깎이우고
매를 맞으며 오빠집에 갇혀 지냈으며 1938년마지막 글이 된 <해인사의 풍광>을
『삼천리』 8월호에 발표하였다.
나혜석은 자신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나는 18세 때부터 20년간을 두고 어지간히 남의 입에 오르내렸다.
즉 우등, 1등 졸업 사건, M과 연애 사건, 그와 사별 후 발광 사건,다시 K와 연애,
결혼 사건, 외교관 부인으로서의 활약 사건, 황옥(黃鈺) 사건, 구미 만유사건, 이혼
사건, 이혼고백서 발표 사건, 고소사건, 이렇게 별별 것을 다 겪었다.
그 생활은 각국 대신으로 더불어 연회하던 극상 계급으로부터 남의집 방구석에 굴
러다니게 되고, 그 경제는 기차, 기선에 1등, 연극 활동사진에 특등석이었던 것이
전당국 출입을 하게 되고, 그 건강은쾌활 씩씩하던 것이 거의 마비까지 이르렀고,
그 정신은 총명하고천재라던 것이 천치바보가 되고 말았다. 누구에 게든지 호감을
주던내가 이제는 사람이 무섭고 사람 만나기가 겁이 나고 사람이 싫다.
내가 남을 대할 때 그러하니 그들도 나를 대할 때 그럴 것이다.
14) 나혜석, <신생활에 들면서>, 『삼천리』, 1935. 2.
이와 같이 사람 능력으로 할 만한 일은 다 당해보고 남의 것은 사람의 버린 것밖에
없다. 어찌하면 다시 내 천성인 순진하고 정직하고 순량하고 온유하고 부지런하고
총명하던 그 성품을 찾아볼까.
다 운명이다. 우리에게는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있다.
그러나 그 운명은 순순히 응종하면 할수록 점점 증장하여 닥쳐오는것이다 강하게
대하면 의외로 힘없이 쓰러지고 마는 것이다. 15)
그러나 위의 생활 이후의 생활은 더욱 비창하였다고 한다. 1935년(43세)에서 1946년
(50세)까지 그의 행적은 알 수 없고, 1944년에서울 인왕산 소재 청운 양로원아 들어
가기 전까지 가끔 수원의 큰오빠집과 서울의 작은오빠집에 갇혀 있었고 병이 몹시
심한 상태로 돌아다니며 집안 망신시킨다는 이유 때문에 오빠들에게도 외면당하였
다고 한다. 1945년 8월 24일에 경석오빠집을 나와 崔古根이라는 이름으로 양로원에
들어갔고, 그 후 다시 안양, 경성보육원 농장에 거처하고 있었으나 이후 종적은 알
려져 있지 않다.
나혜석의 죽음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1948년 12월 10일 아침 서울
시립 자혜병원에서 행려병자로 들어와 사망했다. 원효로 입구의 굴다리 안에서 동
사해 가고 있었고 악취가 나는거지몸으로 소지품 하나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다만
뜯어진 호주머니의 안으로 빠진 목도장이 나혜석이 가지고 있었던 유일한 물품이었
다.
1949년 3월 14일자 관보에는 나혜석의 사망광고가 실려 있다. 16) 그러나 최근 "나
혜석을 1950년에 만났었다"는 주장17)이 있어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화가이며 제1기
여류문인이었던 나혜석의 죽음은아직도 신비의 베일에 가려져 있다.
어쨌든 나혜석의 그림을 그리고 여권주장의 틈틈이 글을 쓰면서
15) 나혜석, <신생활에 들면서>, 『삼천리』, 1935. 2.
16) 나혜석의 일생에 대한 일화는 직접 가족들을 만나 보고 참고문헌을 참고하여
정확하게 기록한 박금희의 글(여성중앙, 1984. 10)을 중심으로 김종욱 편『나혜석』
과 나혜석의 <이혼고백서> 및 그녀의 글을 참고로 하였다
17) 김점덕, 자전적 산록(17회), 월간음악, 1986. 10. p. 93.
불꽃같은 생을 살았던 선각의 여성이었음은 분명하다. 또한 불행과 비참이 그 극에
달한 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살고 죽었는지도 불분명한 채 선정 적이고 흥미있는
사생활 쪽으로만 너무 알려진 저널리즘의 희생자이기도 하다 행복과 불행의 그 분
명한 이중주의연극은 단 한 몸으로 강렬하게 보여 준 특이한 1920년대의 인물이기
도 하다.
3. 여성각성 및 외래사상의 선구
오랜 문화전통의 제약으로 매몰되어 온 여성의 의식을 깨우쳐한 인간으로서 실존적
삶을 이룩하게 하는 것은 사회의 요청이기도 하다.
최근에 대두하게 된 여성해방운동 내지 여성학은 대체로 여성이론가들에 의하여 전
개되고 있다.
근대나 현대의 공통점은 여성문제의 해결, 여성의 해방은 여성을전통적 가족제도와
가정적 역할에서 공적인 일과 생산적 활동에 참여시킴으로써만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18)
전통적인 유교사회에서 급격한 개화기를 맞이한 우리 나라에서도 여성에 대한 오해
와 편견을 일소하는 의식개혁 속에 민주사회를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다.
오세영은 1920년대 제1기 여류문인이 강력하게 주장한 여성해방논리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첫째, 억압 없는 性의 구현.
둘째, 도덕적으로 위장된 여성억압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새로
운 개념의 정조관이 제시된다.
셋째, 남녀평등 사상이다.
넷째, 여성교육과 사회진출의 요구이다. 19)
18) 정의숙, <여성해방운동의 이념>, 여성학,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여성연구소편, 이
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79, p. 34.
1920년대 제1기 여류문인 세 명 가운데 가장 논리적이고 명쾌한문장으로써 여권신
장과 여성의식의 개혁과 사회제도의 합리화를 주장한 여류선각자는 나혜석이다. 나
혜석은 김명순의 비감한 감정과 김일엽의 정열적 감성과 비교할 때 가장 일찍이 여
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이것을 논하였고, 1937년의 유럽방문 기회에도 여권문제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英美婦人 參政權運動者 會見記를 쓸 정도로 그는 "조선에 여권
운동자 시조"20)가 될 가능성까지 시사하였다.
그는 1914년 최초로 여권을 주장하는 글 <이상적 부인>을 동경유학생들의 기관지
인 『학지광』에 발표하여 적극적이고도 개방적이며 혁명적인 사고방식을 보여 주
었다. 1915년부터 동경의 한국여학생들은 모임을 가지고 친목회지인 『여자계』를
발행하여 3·1운동을전후하여 여성의 사회적 각성을 촉구하는 선봉에 서서 활약하
였다.
사회에서 여자를 불신하고 남자가 여자를 모욕하는 것이며 여자의사업이 어리고,
지각이 없고, 성공이 더디고, 사물에 어둡고, 처리가 둔하고, 실패가 많은 것은 전혀
확고한 신념이 결핍되고 이지적 해결력이 빈약하였던 까닭 같소. 이 결점이 사람
이하의 금일 여자의현상을 지배하는 것 같소.
빙긋 웃는 것이 여자의 美點이라 하오. 살짝 돌아서는 것이 여성의귀염스러운 점이
라 말들 합데다. 말 아니하고 생각 없는 자를 여자답다하오. 우리도 남과 같이 사람
다운 여자가 되고 남의 일을 나도판단할 줄 알며,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 할 줄
알며, 더러운 것을더럽다 할 줄 알거든 - 생각도 좀 해본 것 같고, 할 말도 다 해본
듯하거든 - 그때야 말로 웃고 싶은 대로 빙끗빙끗 마음대로 웃어서 여자의 아리따
운 표정도 해봅시다. 쌀쌀스럽게 싹 돌아서는 귀염도 부릴시다. 말없고 얌전한 여자
가 됩시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뜨거운 정 외에 맑은 이성을 구비치 않으면 아니될
줄 알아요(中略)
19) 오세영, op. cit., pp. 62-64.
20) 나혜석, 영미부인 참정권운동자 회견기, 『삼천리』, 1936. 1.
우리 조선 여자도 인제는 그만 사람같이 좀 돼봐야만 할 것 아니오? 여자다운 여자
가 되어야만 할 것 아니오? 미국 여자는 이성과철학으로 여자다운 여자요, 佛國여
자는 과학과 예술로 여자다운 여자요, 독일 여자는 용기와 노동으로 여자다운 여자
요, 그런데 우리는 인제서야 겨우 여자다운 여자의 제일보들 밟는다 하면 이 너무
늦지 않소? 우리의 비운은 너무 참혹하오그려.21)
나는 허영이 있고, 욕심이 있는 자라야 공부도 잘하고 대사업을 이루는 자라 하오.
나폴레옹이나 비스마르크에게 만일 성공이라는 허영심과 위인될 욕심이 없었던들
어찌 백천 년 후세를 전하여 幾億萬 사람의 뇌 속에 기억을 삼았으리까. 우리는 어
서 남들이 주장하는 '인격존중이니, 사람은 사람답게 이상의 반 푼이라도 실현해야
겠고, 또 사람다운 생활을 해야겠다'는 것을 바라볼 욕심을 내야겠고,모방할 허영심
도 많아져야 할 것이 아닐까요? 우리에게도 급한 대로 우선 몇 가지 욕심을 가진
후라야 사업을 할 수 있다 하오.22)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신념의 결핍'과 '이지적 해결력의 빈곤'에서 오는 여성의
결함을 인식하고, 판단력을 고취시키고, 감정 외에 이성의 조화를 주장하였다. 특히
외국여성들의 여자다움을 열거하면서 조선여자의 여자다움에 대한 부정적인 면을
논리적으로 따져 나갔다. 특히 봉사와 희생정신을 그 근간으로 하는 조선의 전통적
여성들에게 허영과 욕심을 가져야 성공할 수 있다는 예를 나폴레옹이나 비스마르크
를 들어 설득력있게 주장하였다. 그 중에서 특히 세 가지, 즉
① 조선여자도 사람이 될 욕심을 가져야 한다.
② 자기 소유를 만들려는 욕심이 있어야 한다.
③ 활동할 욕심을 가져야 한다. 23)
는 명쾌한 논리를 밝혔다.
21) 나혜석, <雜感>, 『학지광』, 1917. 3.
22) 나혜석, <잡감 - K언니에게 與함), 『학지광』, 1917. 7.
23) Ibid., pp. 201-203.
특히 세계사적 측면에서 남존여비의 제도가 동양보다 심하던 서양이 제대로 여성의
지위를 확보하게 된 내력을 광범위한 세계적안목으로 묘사하고, 일본이 남의 문화
를 수입하여 일본화하는 점과외적 자극을 받아가지 고 내적 조직을 만드는 것을 본
받아 조선화시킬 욕심을 내어야 한다는 것과 광란노도의 회생을 하고, 조선 여자
중에 누구라도 가치있는 욕을 먹는 자가 있어야 제대로 여권을찾을 수 있다는 명확
·박식한 나혜석의 논리는 그 문장의 수려함과 함께 대단한 주장이며 합리적이고,
선구적 이론을 밑받침하고있다.
한국의 여성상은 회생·기원·사랑·恨의 여성상으로서24) 그 전통적 여성상이 일
반화되고 미덕이 되어 있던 당대에 허영과 욕심을가지고 자신을 찾는 활동과 성공
에 대한 허영심을 가져야 하며 사람다운 생활을 해야 한다는 개인주의적 사고의 적
나라한 표현은혁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1921년 9월 28일부터 10월 1일에 걸쳐 <부인의복 개량문제>라는 글을 김원주(일
엽)와의 논쟁형식으로 동아일보에 연재하여 복식미학 및 예술관을 바탕으로 한 생
활개혁정신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색채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에 나혜석의 의복색
채 문제에 대한이론은 선구적인 안목이며 보통학교에서의 교복을 전폐하여 색깔있
는 옷을 입힘으로 아이들에게 색에 대한 지식과 감각을 갖도록해야 된다는 교육적
측면에도 그의 선구적 판단과 예술적 논리와,교육적 판단이 번득이고 있다.
<생활개량에 대한 여자의 부르짖음>25)에서는 먼저 마음부터 고치고 그 다음 살림
을 고치자는 생활개혁 이전에 정신개혁을 더욱주장하여 서로 사랑하고 아끼는 근본
된 힘을 얻도록 하는 것이 생활개량의 제일 가까운 길이라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폐쇄적인 정신으로서는 생활개량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합리성있게 갈파하였다.
24) 이남덕, 『한국문학에 나타난 전통적인 여성상』, 여성학, 이화여자대학교출판
부, 1979. pp. 230-257 참고.
25) 나혜석, 생활개량에 대한 여자의 부르짖음, 동아일보, 1926. 1. 24-30.
우리 중에 한 사람도 자기를 잊고 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
먹고 잘 입고 편안히 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조선 여자는 확실히 옛날부
터 오늘까지 나를 잊고 살아왔다. 아무 한 가지도 그 스스로 노력해 본 일이 없었
고 스스로 구해 본 일이 없었으며 그 혼자 번민해 덕 일이 없었고 제 것으로 얻은
것이아무것도 없었다. 가이 없다. 나를 잊고 사는 것, 이것이야말로 처량한 일이 아
닌가.26)
위에서도 "나"를 찾아야 한다는 개인주의 사상의 일단이 보이고이혼하고 3년의 세
월이 지난 뒤 그는 여권 부재의 사회제도와 남성위주의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통발
하는 <이혼고백서>를 발표하여 그의 분로와 저항을 대담하고 구체적인 내용으로
밝히고 있다.
그것은 전무후무한 일대 사회사건이 되어 물의를 일으켰고 급기야평양의 한 여성은
이것을 다시 공박하는 글을 실어 '無所不知하는저널리즘의 인형이 되지 마시고 요
령있는 성명으로 당신의 결백을증명하라 27)고 당부하였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
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서양에나 동경사람쯤 하더
라도 내가 정조 관념이 없으면 남의정조 관념이 없는 것을 이해하고 존경합니다.
남에게 정조를 유인하는 이상 그 정조를 고수하도록 애호해주는 것도 보통 인정이
아닌가.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 밥 먹고 싶을때 밥 먹고, 떡
먹고 싶을 때 떡 먹는 것과 같이 任意用地로 할 것이요, 결코 마음의 구속을 받을
것은 아니다.
(中略)
왕왕 우리는 이 정조를 고수하기 위하여 나오는 웃음을 참고 끓는
26) 나혜석, <나를 잊지 않는 행복>, 『신여성』, 1924. 8.
27) 『신가정』, 1934. 10.
피를 누르고 하고 싶은 말을 다 못한다. 이 어이한 모순이냐, 그러므로 우리 해방은
정조의 해방부터 할 것이니 좀더 정조가 극도로문란해가지고 다시 정조를 고수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 27)
극단적인 정조론을 제창하여 성 해방까지 논의한 그의 논설은 이혼 후의 분노와 남
편에 대한 저항적 자세에도 기인한다고 보아야한다.
타고난 생김이 운명이 된다는 것은 악이다. 기능과 역할의 결정은 성을 기반으로
할 것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과 취향에 의거해야할 것이다. 29)
<강명화의 자살에 대하여>30)에서 '조선에서 여자로서 사랑을 할줄 알고 줄 줄 아
는 자는 기생계를 제하고는 없다'고 말하던 나혜석은 그녀들의 자유스러운 연애감
정을 긍정적인 측면으로 보았으나 자포자기의 자살행위는 비판하고 있다.
1937년 세계여행을 떠나기 전에도 그녀의 폭넓은 식견은 세계적안목으로 외국의 여
성들의 경우와 그곳 생활에 대한 것을 앞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글을 썼지만 세계
여행 이후에는 더욱 다각적인면으로 외래사조를 소개하고, 외국의 여성을 조선여성
과 비교하여여성각성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일 잘하고 무서운 독일 여성은 사물의 진상을 정하는 동시에 크게 노력하여 드디어
위대한 가정사업을 성취한다. 부끄럼을 많이 타고 매우 침착하며 온화하고 가정적
이어서 타 구라파 여성과 같이 사교적이 아니요, 살림에만 착실하여 별로 외출치
아니한다. 매우 소극적인 동시에 실용적이다.
잔인성이 많은 이태리 여성은 여자다웁고 사랑스러운 여성이 적다.
문명에서 퇴보된 국민인 만치 별로 좋은 특징이 보이지 않고 모두 개질치 않게 보
인다
28) 나혜석, 신생활에 들면서, 동아일보, 1935. 9. 20.
29) 윤후정, 『여성문제의 본질과 방향』, 여성학, 이화여자대학교, op. cit., p. 55.
30) 나혜석, 강명화의 자살에 대하여, 동아일보, 1923. 7, 8.
고집 센 스페인 여성은 어디까지나 자기 고집대로 해보려 하고 감정은 예민하지만
원한을 오래 가지고 있어 이태리 여성과 같이 잔인성이 많다. 눈과 머리가 검고 및
이 회고 미인이 많다. 즉 화양절충한 세계적 미인이 많다. 질투가 심하여 기어이 복
수를 하고 말며,명예심도 많다고 한다.
참기 잘하는 러시아 여성은 의무심이 많으며 인내심이 많고 회생적정신과 정열을
가졌으며 레닌 정부가 된 후 그들은 외면으로는 당당한 사람 지위에 있으나 내면으
로는 생산 문제로 인하여 일어나는번민이 많다.
이상과 여히 구미 각국 중 큰 나라의 여성의 특징을 열거하여 그지위를 암시하였거
니와 일반으로 구미 여성은 창조적이요 예술적이다. 그러나 구미 여성은 인격으로
나 두뇌로나 기술로나 학술상 조금도 남자의 그것보다 결핍이 있지 아니하여 당당
한 사람 지위에 있는 것이 다. 31)
동양여성이 의지가 박약한 반대로 서양여성은 의지가 강하다. 동양남성이나 여성이
몰상식한 반대로 서양남성이나 여성은 상식이 풍부하다. 창작성은 대개 이성 간에
서 있게 되나니 그들의 생활은 창작적이요, 그들의 생각은 창작적 이다. 여하튼 그
들은 인생관이 서고처세술이 서 있다. 사람인 것을 자각하였고 여성인 것을 의식하
였다. 이것을 우리는 배우자는 것이요. 흉내내자는 것이다가시덤불 속의 들장미화 -
너는 언제나 빛나는 꽃이 되려나. 그러나 타임은 간다. 그 타임은 모든 변화를 가지
고 온다. 그 타임은 미구에 너에게 자각과 의식과 실행을 움켜주리라. 아니 지금 진
행중에있다 선진인 구미 여성이여 - 우리는 그대를 존경하는 동시에 우리의 지위를
찾고자 하노라.32)
위와 같이 외국여성의 특징과 지위에 대한 탁월한 안목은 여성문제에 대한 그의 관
심사에 있었다.
31) 나혜석, 반도 여성에게, 『삼천리』, 1935. 6.
32) Ibid.,
내게는 늘 불안을 주는 네 가지 문제가 있다. 즉 1.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2. 남녀간 어떻게 살아야 평화스럽게 살까? 3. 여자의 지위는 어떠한 것인가? 4. 그
림의 요점이 무엇인가?33)
지극히 개인적 삶의 태도이지만, 자신의 전공인 그림보다 여권에대한 관심이 우선
할 정도로 여권신장과 여성해방은 그의 신념이기도 하다.
<歐美遊記>에는 '부녀생활과 오락기판'을 소개하여 부녀생활의시간적 여유가 바로
오락기관의 번창에 있음을 소개했고, 만주, 하르빈, 인도, 시베리아, 모스크바, 폴란
드, 파리, 스위스, 벨기에, 네델란드, 런던, 이태리, 스페인, 미국, 하와이, 동경을 도
는 1년 8개월동안의 여행기에는 수사학적인 용어 구사 없이 각국의 미술관이나 박
물관, 공원 등을 사실적인 수법으로 기록하여 왕성한 메모 및 집필 의욕을 보였다.
8개월 동안의 파리 체재의 경험을 바탕으로 <파리화가생활>을『삼천리』(1932. 4)
에 기고하여 미술에 대한 새로운 지식과 새로운흐름을 알리고, '행복스러울 때 그림
을 그렸으나 지금은 그림을 그려 행복하도록 이지적으로 되어 있고 부절한 노력을
위하여 심각한 천재를 기다린다'고 하는 선구적 논리를 갈파하였다.
20세기 초 일제의 식민지 정책 아래에 서구적 근대화의 바람은이 땅의 지식인들에
게 신문화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계몽적 의미가 많았다. 이 시대를 살고, 오랜 기간
동안 직접 외국을 보고 체험한나혜석 역시 서구생활에 익숙하고, 자유개방주의에
도취하여 인간의 참다운 삶을 서로 돕는 남녀평등의 가정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현실을 냉혹하여 그녀의 이상은 실현되지 못한 채 그는 자유분방한 선각자
라는 이름만 가지게 되었다.
모든 지나간 사실들은 세월의 흐름 속에 그 의의가 축소되어 가경향이 있다. 그러
나 한국의 현대화 과정의 초기에 여성 선각자
33) 나해석, 歐美遊記, 『삼천리』, 1932. 12.
로 교육받고, 여성각성 및 여권인식에 국제적인 안목에서 가장 활발이 활동했던 나
혜석은 '여성권익'이라는 새로운 역사의 전환에 공헌한 의의를 재평가 받아야 할
여성임이 분명하다.
4. 인간을 찾아서 - 그의 문학
여류화가로 더 알려지고 화려한 선전 특선과 입선의 경력에 비교한다면 여류문인으
로서의 나혜석은 작품 수에 있어서나 그 문학적 평가에 있어서 미술보다 훨씬 못
미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문학작품을 통하여 여성해방 및 여성의 기본권에
대한 강력한주장을 하고 있으며 특히 명쾌하고 논리정연한 그의 논설문은 이것을
더욱 구체화시키고 있다.
동경유학 시전에 동경유학생들의 동인지 『학지광』에 여성해방과남녀평등에 관한
글과 동경유학 조선 여학생들의 동인지인 『여자계』에 소설을 발표했다.
1920년 7월에 창간된 순수문학 동인지 『폐허』에 김억, 남궁벽,이혁로, 김영환, 나
혜석, 민태원, 김한영, 염상섭, 오상순, 김원주, 이병도, 황석우 등과 함께 창간동인으
로 참여하여 <洋鞋와 詩歌)라는 제목으로 대화식으로 예술론을 전개하였다.
시 5편, 소설 4편, 감상문 36편, 논설문(時論) 8편, 기행문 3편, 희곡 1편 34)이 전하
여 시보다 산문의 우위를 보이고 있다.
1921년 1월에 간행된 『폐허』 2호에 <냇물) <砂>가 발표되었다.
앞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나혜석은 낭만주의적이고 감상적인 시를 쓰기 전에 먼저
근대적 여권을 주장하는 내용을 썼고, 이들 주장은 동경유학생들의 동인지인 『학
지광』과 『여자계』에 발표하였다.
1914년 당시 18세의 나이로 <現狀的 婦人), 1917년에는 정월이라는 익명으로 『학
지광』에 여권신장의 글을 기고하였다. 그러나 장차결혼까지 약속했던 『학지광』
의 편집인 겸 발행인인 시인 소월 최
34) 참고문헌 자료편 참고.
승구가 죽자 크게 충격을 받고 자살까지 기도한다.
졸졸 흐르는 져 내물
흐린 날은 푸르죽죽
맑은 날은 반짝반짝
캄캄한 밤 흑색갓치
달밤엔 백색갓치
비오면 방울방을
눈오면 녹혀 주고
바람불면 문의지어
아참붓허 저녁까지
밤붓허 새 벽까지
춥든지 더웁든지
실튼지 좃흔지
언제든지 쉬임업시
외롭게 흐르는 내물
내물! 내물
저러케 흘너셔
湖되고 江되고 海되면
흐리든물 맑아지고
맑든물 퍼래지고
퍼럿튼물 ㅅ자지고(華虹門樓上에셔)
-<냇물>전문
野原 가온대 ㅅ갈너잇셔 갑업는
모래가 되고보면 줍난 사람도업시
바람불면 몬지 되고
비오면 진흙되도
人馬에 게 밟히면션도
실타고도 못하고 이 세상에 잇셔
이ㅅ다금 져 川邊에
讀公英 野菊花 메 다시꼿
피엿다가 슬어지면 흔적도 업시
뉘라셔 차져ㅣ오랴
뉘라셔 밟아주랴
모래가 되면 갑또업시
- <砂> 전문
위의 시들은 주권을 상실한 민족적 비애와 애인 최승구를 사별한 정서적 비애가
『폐허』 동인들의 허무주의적 색채와 어울려 더욱 암울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다.
특히 <냇물>은 1933년 4월 『신동아』에 발표한 <원망스러운 봄밤>의 마지막 부
분에도 일부 실렸는데, 시 바로 앞부분에 소월이란이름이 두 번이나 나와 첫사랑
애인의 죽음을 체험한 허무에서 쓰여졌음이 확실시 된다.
<냇물>은 언제나 쉽없이 흐르는 냇물에다 자신의 외로움을 부여하였다. "흐린날은
푸르죽죽/맑은 날은 반짝반짝/캄캄한 밤 흑색같이/달밤엔 백색같이" 다양한 색깔로
변하는 냇물의 자유스러움과비 오고 눈 오고 바람 부는 날의 역할과 계절의 순환
속에서도 항상 흐르는 냇물의 끈기와 변화에 대응하는 저력과 용기를 의미한다. 특
히 밤낮없이 흐르는 냇물은 호수가 되고 강이 되고 바다를이루는데 자신은 아무것
도 할 수 없다는 원망과 한스러움을 나타내고 있다.
3·4조의 정형률을 대체로 간직함으로써 파격적인 자유시 형식을보여 주지는 목하
고, 그 전체적인 시의 짜임새가 문학적인 승화를이루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을
찾아서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였던 나혜석은 자신의 내면적 충격에도 용기를 가지고
묘사하였다.
슬퍼! 아아, 슬퍼! 해가 가고 날이 가니 슬픈가, 그 얼굴 그 몸이 재가 되고 물 되어
가는 것이 슬픈가. 그 세계와 내 세계의 거리가 멀리 갈수록 그는 점점 냉정해지고
나는 점점 열중해 가는 것이 슬프다. 35)
35) 나혜석, <원망스런 봄밤>, 『신동아』, 1933. 4
에 나타나 있듯이 첫사랑을 잊지 못하여 그리워하는 애절한 심정을 엿볼 수 있다.
이때 나혜석은 남편과 이혼한 뒤여서 더욱 사별한 연인을 그리워 하였던 것 같다.
특히 <砂>는 아무렇게나 버려진 모래의 신세에다 자신을 비유하여 님 가신 뒤의
외로움을 더욱 애절하게 노래하였다.
"피엿다가 슬어지면 흔적도 업시/뉘라셔 차져오랴/뉘라셔 밟아주랴/모래가 되면 갑
또업시"는 후일의 자신의 운명을 예시해 놓은 것같은 시인의 예언적 기능을 엿보게
한다. 들판에 버려진 값없는 모래와 .이름없는 들꽃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그
역설적 미학이자신의 삶과 합치점을 이루는 반생을 살아야 했던 비운의 시인이었
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강력한 사회제도와 인습과, 윤리도덕의 불합
리한 모순에 도전하고, 전통적인 여성상에 반란하는 새롭고도 적극적이며 성취 적
이며 허영적인 새로운 여인상을구축하고자 하였다.
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 때
기 매하듯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 인형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는 위안물이 되도다.
(후렴)
노라를 놓아라
최후로 순수하게
엄밀히 막아논
장벽에서
견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주게
남편과 자식에게 대한
의무같이
내게는 신성한 의무있네
나를 사람으로 만드는
사명의 길을 밟고서
사람이 되고져
나는 안다
억제할 수 없는 내 마음에서
온통을 다 헐어 맛보이는
진정 사람을 제하고는
내 몸이 값없는 것을
내 이제 깨도다.
아아! 사랑하는 소녀들아
나를 보아
정성으로 몸을 비쳐다오.
많은 암흑횡행할지나
다른 날, 폭풍우 뒤에
사람은 너와 나.
<인형의 집> 전문
매일신보(1921. 4. 3)에 발표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이 작품은시적 상황의 설정
자체가 다분히 극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으며, 인간적인 의지와 자유를 인습의 굴레
에 의해 빼앗기고 있는 여성의위치는 <인형 - 위안물>이라는 말로 포상되고 있다.
36)자아를 찾아 사람이 되고 싶다는 개인적 열망은 시대의 요청에의한 인간적인 자
각과 여성 자신에 대한 각성과 함께 강력한 메시
36) 권영민, 「날아간 청마의 꿈」 , 김종욱 편, op. cit., p. 51
지를 담고 있다. 그것은 '인간을 찾아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답하고, 여행하고,
글쓰고, 그림 그린 나혜석의 인간적 욕망이며, 자신의삶 전부를 투자한 자아중심주
의의 허영심과 명예심과 그 발전적성취 감에 있다.
나는 인형 이었네
아버지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안해 인형으로
그네의 노리개이었네
노라를 놓아라
순순히 놓아다고
높은 담벽을 헐고
깊은 閨門을 열고
자유의 대기중에
노라를 놓아라
나는 사람이라네
남편의 안해 되기 전에
자녀의 어미 되기 전에
첫째로 사람이라네
나는 사람이로세
구속이 이미 끊쳤도다
자유의 길이 열렸도다
天職의 힘은 넘치네
아아 소녀들이여
깨어서 뒤를 따라오라
일어나 힘을 발하여라
새날의 광명이 빛혔네.
- <노라> 전문
앞의 <인형의 집>과 <노라>는 그 주제가 모두 여성해방과 여성의 인간회복을 주
창한 시이다.
<노라>의 창작동기는 입센 『인형의 집』을 양백취에 의해 번역된 저서의 서시로
쓰여졌다고 한다. 37) 특히 <노라>를 씀으로 동일한 자아적 '노라'가 그 내면에 살
아 자신의 인생관의 예시적 방면이되어 주었다38)는 면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여성해방 및 자유주의 사상을 고취하며, 항상 시대감각을 앞지르는 글을 발표한 나
혜석은 사회와 제도와 도덕으로부터 심한 도전을 받았으나, 그는 도리어 당당하고
도 자신에 찬 확신과 해박한 논리로 자신의 주장을 펼쳤고, 시로써 다하지 못하는
주장을 논설문과 감상문을 빌어 표현하였다. 따라서 허무의식의 낭만주의 색채를띠
는 개인주의적 감상과 여권 해방에 대한 과감한 이론 전개는 민족적, 여성적 자각
에 대한 공동체적 의식으로 나타난다.
<아껴 무엇하리 청춘을)(『삼천리』, 1935. 3)에서는 자신의 뒤돌아본 삶에 대한 긍
지와 자부심을 부여하고, '빈틈없이 이용한 청춘을/아낄 무엇이 있으며/지난 청춘을
/아껴 무엇하리오'라는 자신의삶에 대한 합리화를 보여 주는 자기도취와 자아성취
의 시이다.
<이혼고백서>(『삼천리』, 1935. 2) 마지막 부분에 舊稿에서라고밝히고 인용한 시
는 나혜석의 삶 전체를 보는 서글픔과 애처로움이있다.
펄펄 날던 저 제비
참혹한 사람의 손에
두 죽지 두 다리
모두 상하였네
다시 살아나려고
발버둥치고 허덕이다
37) 김윤식, <여성과 문학>, 숙대아세아여성연구 제7집, 1968.
38) 신달자, op. cit., p. 61.
끝끝내 못 이기고
그만 척 늘어졌네
그러나 모른다.
제비 에 게는
아직 따뜻한 기운이 있고
숨쉬는 소리가 들린다.
다시 중천에 떠오른
활력 과 용기와
인내와 노력이
다시 있을지
뉘 능히 알 리가 있으랴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이혼고백서>는 충격적인 파문이며, 나혜석을 사회에서 소외
시키는 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지만 <이혼고백서)에는 간절히 남편과의 재회
를 원하고, 이혼이 자신의 본의가 아니라 남편의 강청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무저항
적으로 양보한 것으로 밝힌 점, 난생 처음으로 당하는 충격으로 너무 상처가심하고
치명적인 점, 이혼을 못하는 네 가지 이유의 논리성 39) 등으로 미루어 그는 개인적
대화나 만남과 서신왕래가 불가능하였기때문에 <이혼고백서>라는 공개장으로나마
남편의 마음을 되돌리려고 계획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위의 시에 나오는 '제비'는 나혜석의 대상적 自我이기도 하다. 역경과 좌절 속에 가
느다란 희망을 안고 그 가능성을 <이혼고백서>마지막에 부쳐 본 그의 비탄적 이
고, 자신만만하고, 논리정연하면서도 과거를 잊지 못하여 연연해 하는 어쩔 수 없는
여인, 그리고 모
39) ① 팔십 노모가 계시니 불효요.
② 자식이 사남매요, 학령 아동인 만큼 보호해야 할 것이요.
③ 한 가정은 부분의 공동생활인 만큼 생산도 공동으로 되었을 뿐 아니라분리케 되
는 동시는 마땅히 一家二家되는 생계가 있어야 할 것이요.
④ 우리 연령이 경험으로 보든지 시기로 보든지 순정, 즉 사랑으로만 산다는 것보
다 이해와 의로 살아야 할 것이요.
- <이혼고백서> 중에서
성으로서의 나혜석을 발견할 수 있다.
47편이 있는 나혜석의 감상문과 기행문, 논설문에서는 여성해방,자유사상, 자아중심
주의, 파리의 여성 및 외국생활의 소개를 통하여조선과의 비교적인 삶의 양상, 타협
할 수 없었던 사회, 제도, 인습,가족에 대한 저항과 반발이 그 주제로 나타나고 있
다.
특히 나혜석의 예술비평에 대한 탁월성은 이미 1924년 『개벽』 7월호에 <1년만에
본 경성의 잡감>에서 나타나고 있다. 음악회와미술 전람회와 연극관람 후의 예술적
인 비평의 글은 예술전반에대한 폭넓은 지식에서 가능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예술
의 바탕은1927년 세계일주여행 이후 더욱 심화되었다. 40)
파리 여자라면 사치나 하고 놀기나 잘 하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알뜰살뜰하게 오밀조밀하게 앙실방실하게 아양도 양하게 사접시를깨뜨리게 깔깔대
고 깨가 옥실옥실 쏟아지듯 속살거려 사람 그것이곧 그대로 예술품이어서 싫증이
없고 고통을 잊고 비애가 없는 그날그날 새기분을 창작해 내는 파리 가정의 주부생
활이다.
사람이 그래도 예술품일 수 있는 새 기분을 창작해 내는 파리의 가정주부들을 눈여
겨보았고, 특별히 부인의 가정생활을 말씀하면 아양보양하고 앙실방실하고 요밀조
밀 알뜰살뜰 불란서부인 중에도 점잖고 수수하고 침착하나 어딘지 모르게 매력을
가진 부인이니 강약이 겸비하여 물샐틈없이 규모가 꽉 째이게 살림살이를 하고 염
증이 나지 않고 산산스럽지 않은 생활에 즉 예술이 많았읍니다.
남편에게 다정스럽게, 자식에게 엄숙하게, 친구에게 친절하게, 노복에게 후하게, 가
축에게 자비스럽게 구는 데는 감복하지 않을 수 없고 더욱이 가풍이 학자의 생활인
만치 質素하고 자치제이라 주인이하 어린이까지 세숫물도 자기가 떠다 하고 밥먹고
난 그릇까지다 각각 부엌에다 내다 놉니다. 때때로 떼아틀(극장), 오페라, 씨네마 초
대장이 오면 개에게 집 잘 보라고 부탁하고 문을 닫아 걸고구경을 갑니다. 구경을
다하고 오다가 카페에 들어가 차나 음식을
40) 나혜석, <파리의 어머니날>, 『신가정』, 1933. 5.
먹고 돌아옵니다. 41)
늘 새로운 세계와의 신선한 충격적인 예술적 삶을 희구하였기에나혜석은 시대를 앞
서 살았던 여인이기도 하였다. 특히 여성문제에대한 문제는 그의 주된 관심사였기
에 그림 부분에 대한 글 이외에그의 외국생활의 표현 중에는 여권문제에 대한 것이
가장 많다. 특히 자기 자신을 잊지 않고,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삶이 곧 여자의 해
방·자유·평등이라고 주장하는 선각자였다.
우리는 어서 속히 내 한 몸이 있는 것을 확인하여야 하겠고 동시에내 몸이 귀엽고
사랑스럽고 아껴야 할 것을 잊지 않도록 되어야 하겠다. 내 몸이 귀엽거늘 어찌 남
의 손에만 맡겨둘 수 있겠으며, 내몸이 사랑스럽거늘 어찌 반드시 한 있는 다른 사
람의 사랑으로만만족할 수 있으랴! 내 몸이 아깝거늘 어찌 남의 일만 죽도록 보아
주고 남을 편하게 해주기 만으로 일생을 보낼 수 있으랴! 자기를 잊지 않고서 라야
남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 것이요. 자기를 잊지아니한 가운데에 여자의 해방,
자유, 평등이 다 있는 것이요, 연애의철저가 있을 것이며, 생활 개선의 기초가 잡힐
것이며 경제상 독립의 마음이 날 것이다. 42)
5. 맺음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나혜석은 시대를 앞서 살았던 선각의여성이었기에 불행과
절망을 받아야 했다.
부인으로서, 어머니로서, 情婦로서, 여자친구로서 오로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자
신의 인생을 결정하는 데 자유롭고 싶었던 나혜석은 육체적, 정신적 갈등과 고초와
괴로움으로 가득 찬 생애를 살다 갔다.
인간으로서 자유스럽고, 마음껏 예술의 창작으로 정진하고 싶었
41) 나혜석, <다정하고 실질적인 불란서 부인>, 『중앙』, 1934. 3.
42) 나혜석, <나를 잊지 않는 행복>, 「신여성』, 1924. 7.
으나 그의 이상은 소용돌이치며 급변한 그의 삶에 침몰된 채 끝내꽃피우지 못하였
다. 그러나 그는 김명순, 김일엽 등과 함께 현대여성문학의 제1기생으로 오늘날의
여류문학 및 여성의식을 일깨우고정착시키는 데 전환점을 가져오도록 한 공로자이
며, 새로운 문명과새로운 세계를 인식시켜 준 불꽃같은 선각자였다.
김억, 남궁벽, 이혁로, 민태원, 염상섭, 오상순, 황석우 등과 함께1920년 『폐허』를
창간하여 20년대 문학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따라서 시에서는 낭만적 경향
이 나타나고 소설에서는 낭만적인것과 사실적인 경향이 공존한다.
時論과 산문을 통하여 여성해방·남녀평등의 사회, 구제도에 대한과감한 비판과 도
전을 전개하던 그의 논리정연하며 폭넓은 지식을예를 들어 설득한 그의 문장은
1920년대의 여류시론을 대표할 만하다.
그의 시와 소설, 산문은 여성해방 및 자유주의사상과 특히 자아중심주의를 그 주제
로 하였으며, 항상 시대감각을 앞지르는 신선하고 충격적인 글을 발표하여 보수전
통사회를 자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