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종로교회는 화성 행궁과 함께 수원에서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곳이다. 교회 남쪽으로는 팔달문이 자리잡고 있고, 북동쪽으로는 수원 기독교 교육의 자부심, 삼일학원이 건재하고 있다.
1896년 감리교 소속 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턴은 경기도의 중심이자 충청도로 가는 길목인 수원을 눈여겨보고 순회전도에 나섰다. 그러나 사대부의 도성 수원은 선교사들에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스크랜턴 선교사는 선교 보고서에 그 어려움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 아직 수원과 공주, 두 곳 모두 직접적인 사업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 두 도시의 변두리에 있는 지방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다."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
1898년부터 수원은 스웨어러(Willbur C. Swearer, 한국명 서원보) 선교사가 순회전도를 담당하게 되었다. 선교사들의 전도와 노력 속에서 지역사회와 가족들의 박해와 시련을 견디며 비밀스럽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 당시 스웨어러 선교사는 수원 도성의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해 서울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감리교인들을 수원으로 이주시키기도 했다. 그만큼 수원 선교는 쉽지 않았다. 이 서울 출신 감리교인들과 수원 감옥에 갇혀 있던 기독교인들이 감옥 안에서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어렵게 시작된 수원의 신앙 공동체를 위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스웨어러 선교사의 조사였던 김동현이 화성 행궁 옆인 화령전 근처 부지를 매입했다. 그런데 이 일로 수원 유수가 김동현을 구성했다. 이유는 교회터가 화령전에서 너무 가깝다는 것이었다. 화령전은 순조가 아버지 정조를 기리며 매년 제를 올리는 곳이었다.
수원화성행궁 화령전
수원 양반들의 반대로 거래가 취소됐다. 정당한 절차를 통해 매입했지만 스웨어러 선교사는 수원 선교를 위해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매매계약이 취소되자 김동현 조사는 풀려났다. 이 일로 큰 분란이 일어날 수도 있었지만 선교사들의 양보에 수원 유수도 한발 물러섰다. 그 장소만 아니라면 수원 어디든지 부지 구입을 하도록 허락한 것이다.
전도인 이명숙이 북문 안 보시동(지금의 복수동 116번지)에 13칸 짜리 초가집을 매입하였고,이후 선교사 사택을 겸한 예배당이 들어섰다. 그리고 그 이듬해 봄, 남자 3명과 여자 4명, 모두 7명의 교인이 처음으로 등록하며 수원종로교회(구 보시동교회)의 역사가 시작됐다. 뿌리는 내리는 과정은 어려웠으나 일단 교회가 시작되자 놀라운 속도로 부흥했다. 7명으로 출발한 교회는 2년 뒤 160명이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민족 교육을 위한 학교도 세웠다. 교인인 이하영, 임면수, 나중석 등은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와 스테판 베크(Stephen Ambros Beck)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남자매일학교(삼일학교)와 여자 매일학교(지금의 매향학교)를 설립했다. 후에 수원 근대 교육의 효시가 되어 삼일남학교와 삼일여학교로 발전했다.
1908년 무렵, 수원종로교회에도 감리교 기독청년단체인 엡윗청년회가 조직됐다. 엡윗청년회는 전도와 교육, 애국운동을 위해 감리교인 청년들이 결성한 단체로, 한국 청년 운동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남학교인 삼일학교와 협력하여 수원 지역 청년들의 사회활동을 지원하고 계몽활동가를 양성했다. 김세환, 임명수 같은 민족의식이 투철한 애국지사들이 교사로활동하며 학생들에게 역사와 한글을 가르치고 강도 높은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그 외에도 김제원, 홍돈후, 차희균, 이선경 등 민족을 사랑하는 수원 기독교인들은 3.1독립운동, 국채보상운동, 애국계몽운동 등을 주도했다.
특히 임면수는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삼일여학교와 삼일학교의 운영을 뒷받침했으며, 후에는 만주로 망명을 떠나 신흥무관학교와 양성중학교에서 독립군 양성에 헌신했다. 부인 전현석 여사는 독립군 식사를 위해 하루에 5~6끼의 식사를 제공했다. 당시 독립군으로서 전 여사의 밥을 안 먹어 본 이가 없을 정도였다.
신흥무관학교 학생들
1910년 수원종로교회의 교인은 373명으로 늘어났고, 1912년에는 1,200명으로 증가하였다. 교회 증축이 불가피해지자 조지버딕(George M Burdick, 변조진) 선교사가 알테라 티터(Althera B. Teither) 모친 기념예배당 건축을 위해 보관 중이던 150불(300원)을 헌금했다. 여기에 교회 매각 대금과 교인들의 헌금이 더해져 공사가 시작됐다. 교회 위치도 북수동 종로네거리로 옮겼다. 이때부터 교회가 종로에 소재한다 하여 이름이 보시동교회에서 수원종로교회로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교회는 기숙사 건물을 만들어 사경회를 강도 높은 신앙 수련회로 성장시켜 갔다. 수원종로교회는 수원지역 복음화의 선교기지였으며 삼일학교를 중심으로 한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의 첨병기지였다. 지역의 애국지사들이 모이는 곳이자 나라의 인재를 배출하는 전당이었다.
1997년 IMF 사태 이후로 수원종로교회는 1998년부터 매주 한끼를 필요로 하는 이웃들에게 제공하는 '사랑의 손길' 운동을 펼치고 있다. 노숙인 150~200여 명에게 투입되어 헌신하고 있으며, 매달 첫 주의 성찬식 헌금 전액이 구제에 쓰인다. 적지 않은 재정과 수고가 구제활동에 쓰인다는 것은 놀랍고도 기쁜 일이다. 2015년 800회를 기록한 '사랑의 손길' 구제사역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14:29)
● 답사일 : 2016.11.20
● 글 출처 : 믿음의 땅 순례의 길, 유성종.이소윤, 두란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