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7년 인조15년 병자호란 발발 45일만에 국왕 인조는 항복을 결정하고 그동안 항전을 해 왔던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식을 거행했다. 국왕은 곤룡포 대신 평민이 입는 남색옷을 입고 세자를 비롯한 대신들과 함께 청태종의 수항단(受降壇)이 마련되어 있는 잠실나루 부근 삼전도에 도착, 어가에서 내려 2만명의 적병이 도열하고 있는 사이를 걸어 황제를 향하여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이른바 삼배구고두례(三拜九敲頭禮)라는 치욕적인 항복례를 실시하였다. 청은 지난 1636년 12월6일 청태종의 지휘 아래 용골대와 마부태를 선봉장으로 해서 12만군으로 압록강을 건너 침공해왔다. 그들은 진격로 주변의 성들을 공격하지 않고 곧바로 한성으로 직행했다. 조정은 종묘의 신위와 빈궁, 왕자들만 먼저 강화도록 떠나게 하고 14일에는 국왕도 몽진을 결정했으나 이미 홍제원이 점령당해 강화로 가는 길이 차단당했다. 이에 남한산성으로 몽진, 장기항전에 돌입했었다. 당시 남한산성의 방어 능력은 병사 1만 2천에 식량은 약 두 달치에 불과한 1만 4천 3백여 섬으로 적의 12만 대군과 싸우기는 역부족이었다. 적군은 남한산성을 직접 공격하지 않고 보급로를 차단하는 고사작전을 택했다. 남한산성에 혹한으로 동사자가 늘어가자 국왕은 옷가지와 양피이불을 하사했고 뒤이어 백관들도 이불과 심지어 말안장 등속까지 거둬 성채와 군병들에게 나워주었으나 동사하는 병사들과 백성의 수는 늘어갔다. 설상가상으로 음식조차 모자라 하루를 버티기 어려운 상황으로 진행되어 갔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김상헌 중심의 척화파와 최명길 중심의 주화파 사이에 논쟁이 끊어지지 않았으나 강화가 함락됐고 세자가 인질로 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오자 대세는 주화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리고 결국은 1637년에 3배 9고두례를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한 항복례로 한 번 절 할 때마다 세 번 머리를 땅바닥에 부딪치는 것을 세 번 해야 한다는 것을 일컫는다. 단 이 때 반드시 머리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나야 한다. 청태종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다시 할 것을 요구해 인조는 사실상 수십번 머리를 부딪쳤고 이에 인조의 이마는 피투성이가 되었다.
출처: 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33175&mode=title&query=%BA%B4%C0%DA%C8%A3%B6%F5&dircode=0
소감: 사전 만들기를 통해 수업시간에 빨리 넘어가면서 자세히
알지 못했던 세밀한 부분에 대해서 좀 더 알게되었다. 한편,
탕평책을 찾아보았을 때 내용이 적고 뭔가 부족한 것이
아쉽기도 했다. 또 척화비의 내용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게 되어 그 때의 대원군의 정치는 어떠했는가에 대해 더 잘 알았다.
|
첫댓글 준혁군, 날카로운 분석으로 소감을 쓴 것에 대하여 칭찬합니다. 이 과제는 단순히 복사해서 붙이기만 하면 시간만 낭비하는 것이 됩니다. 반드시 5개 밖에 안되니 자신이 조사한 내용을 읽어 보아야 합니다. 선생님도 준혁군이 조사한 이재명에 대해 읽어보고 새로운 사실을 알았답니다. 문화원형사전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 작업중입니다. 그래서 탕평책관련 내용이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작업을 함께 하는 것은 문화원형사전을 만들고 계신 분들을 응원해 드리기 위한 목적도 있답니다. 참, 설문하고 학번과 이름을 남겨 주기 바랍니다.